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Gaius Iulius Camilius Asper |
|
출생 | 180년경, 로마 제국 리키아 에트 팜필리아 속주 아탈리아(오늘날의 튀르키예 안탈리아) |
사망 | 미상(추정) |
전체 이름 |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 Gaius Iulius Camilius Asper |
직위 | 원로원 의원 |
가족 |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아들) |
경력 | 집정관(212년)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카라칼라에게 누명을 쓰고, 아버지와 함께 불명예 추방됐다가 복귀했다.2. 생애
아버지, 아들 모두 똑같은 전체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함께 212년 집정관을 지낸 동명이인 아버지와 구분하기 위해, 212년 집정관 중 아버지는 대(大)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아들은 소(小)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라고 한다. 또는 아버지 아스페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아들 아스페르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로 통칭하기도 한다.통상적으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로 지칭하는, 소(小)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는 직계 대대로 똑같은 이름을 지어 사용했고, 제국 동부에서 상당한 명망가였다. 아버지는 콤모두스 황제 아래에서 가문 최초로 집정관이 됐고, 이후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총독 직을 수행하기 전에 파트리키에 편입되며 신흥 귀족 가문을 개창한 사람이었다. 할아버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증조 할아버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판시니아누스, 고조할아버지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 고조 할아버지와 4대조 역시 이름이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였다. 이중 그의 고조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는 모두 시리아 속주의 안티오키아에서 두움비르(duumviri)를 지냈고, 그의 직계는 모두 안티오키아의 귀족들로, 셀레우코스 제국 시절부터 안티오키아 귀족 직위를 세습 중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위치한, 튀르키예의 도시 안탈리아 출신이다.
젊은 시절부터 교양이 풍부하고, 당대 최고의 석학 중 한명으로 분류될 정도로 학식이 뛰어난 아버지와 똑같이 천재로 분류될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인품이 바르고 예의 바른 면모 아래 능력이 뛰어난 원로원 의원으로 명망이 대단한 아버지 못지 않게, 몸가짐이 바르고 훌륭하기로 정평이 난 사람이었다.
그는 아버지가 세베루스 왕조 시절인 200/201년 또는 204/205년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낼 때, 아버지 휘하에서 재무관을 지냈다. 이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추천으로 아피아 가도 보수 관리 업무 감독을 맡았고, 쿠르수스 호노룸을 밞아 나갔다. 이 당시, 180년 정도에 출생했던 그의 나이는 20대 초반 ~ 중반의 대단히 젊은 나이였다.
212년, 아버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아스페르와 나란히 부자(父子)가 함께 정규 집정관을 지낸 영광을 누렸다. 이들에게 집정관 추천을 한 사람은 친동생 게타를 모후 율리아 돔나 앞에서 직접 존속살해한 카라칼라 황제였다. 이 사건에 관해, 동시대 디오 카시우스, 헤로디아누스는 불리한 상황에 놓인 카라칼라가 아스페르의 인품과 명성을 이용해 원로원에게 지지를 끌어 모을 작정으로 아스페르 부자를 집정관에 나란히 추천시켰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아버지 아스페르와 함께 카라칼라를 적극적으로 변호하지 않았다. 이런 아스페르 부자의 행동은 양심적이었고, 동료들에게 더 큰 존경을 받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카라칼라의 심기를 크게 건들여, 그는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망명하듯 추방됐다. 본래였다면 카라칼라에게 목숨을 잃을 뻔 했지만, 원로원 전체에게 존경받아온 지식인이었고, 카라칼라로서는 그를 죽이는 것은 정치적 부담이 크고 강력해 이 정도로 마무리 됐다고 한다.
강제 추방되고 5~6년이 지난 뒤인, 217/218년 아버지가 아프리카 속주 총독에 임명되는 식으로 추방이 해제될 때, 함께 추방형이 해제됐다. 그렇지만 곧 카라칼라는 암살됐고, 마크리누스가 새로운 황제가 됐다. 이때 마크리누스는 추방이 해제된 그의 부친 아스페르가 너무 늙고 병에 걸려 허약한 몸으로는 아프리카 속주 총독이 될 수 없다며, 이 임명을 철회하고, 퀸투스 아니키우스 파우스투스를 새로 임명했다. 이후 아버지 아스페르는 사망했는데, 아들인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는 추방형 해제 뒤 이탈리아 로마로 복귀해 살았다.
아들로는 똑같은 이름을 가진 보결집정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밀리우스 아스페르가 있다. 그는 가이우스 마이키우스 아퀼리우스 파비우스 티티아누스의 며느리로 가이우스 마이키우스 파비우스 아퀼리우스 티티아누스의 아내 율리아의 아버지이다.
여담으로 아버지, 아들과 함께 삼부자 모두 가문과 큰 인연이 없던 브리타니아, 마우레타니아 팅기타나 일대 주민들을 후원해, 뭇사람들에게 진심으로 애국자였다고 찬사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