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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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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280px-ManichaeanElectaeKocho10thCentury.jpg
마니교 성직자를 그린 10세기 고창(투르판) 벽화.

1. 개요2. 역사
2.1. 중세 중국에서
3. 특징4. 교리5. 영향6. 기타7.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 Manichaeism

유대교, 영지주의, 그리스도교, 조로아스터교에다 초창기 부파 불교 자이나교의 수행방식까지 복합으로 섞어서 생긴 이란 계통의 종교. 창시자인 마니(Mani)의 이름을 따서 마니교라고 한다. 참고로 마니아(Mania)란 말이 이 종교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극도로 이원론적이며 중근동의 여러 종교를 전부 섞어서 복잡한 교리체계를 만들었다. 현세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이며 일방적으로 내세지향적인 교리를 따랐는데 그로 인해 세력을 떨치지 못하고 몰락하고 말았다. 비슷한 짬뽕 종교인 시크교가 상무정신을 중시하고 이것저것 골고루 먹으라고 한 결과 시크교도들이 전투민족으로 부상했고 지금도 인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1]

2. 역사

마니교의 창시자 마니는 서기 216년 (오늘날 이라크 영토인) 파르티아 제국 수도 크테시폰 인근에서 태어났다. 마니의 아버지는 본래 그 지역의 토착 다신교를 믿었지만 아내가 마니를 임신했을 즈음 계시를 받고 ( 아랍어 기록에서 알 무그타실라[Al Mughtasila]라고 부른) 어떤 종교로 개종했다. 무그타실라는 '자기를 씻는 사람들'이란 뜻인데 4세기 중동 인근의 세례 예식을 하는 공동체를 거의 다 흡수했다는 증언이 있으며 '알카사이'라는 사람이 창교했다고 하는데 사실 이 이름은 중동 쪽의 종교문서에서는 툭하면 나오는 선지자다. 실제로 알카사이가 무그타실라를 창립한 것이 아니라 무그타실라가 자기네 역사를 (예전부터 유명한 이름인) 알카사이에 기탁했다고 보는 편이 맞는다.[2] 마니는 무그타실라를 배척했지만 자신의 사상에서 무그타실라의 영향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했다.

마니가 태어난 지 얼마 안 돼서 크테시폰은 사산 왕조에게 함락당하고 곧 파르티아가 멸망했다. 12살 때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에게 새로운 종교를 만들라는 계시를 받고 25살 때부터 자신이 살던 제국 파르티아의 주요한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를 비롯해 중동 각지에 퍼져 있던 그리스도교 불교, 그리스 영지주의 철학 유대교의 교리를 참조하여 자신의 이름을 붙인 마니교를 창시했다. 240년에는 샤푸르 1세를 만나서 자신이 붓다의 후계자라고 공언하였는데 샤푸르는 마니교에 대해서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호라산으로 여행하면서 그곳의 인도인 상인들과 사제들에게 불교와 자이나교 교리와 수행방식을 공부하고 이를 마니교 교리에 흡수하여 마니교 교리를 완성했다.

마니는 교리서 여섯 권을 썼는데 그 중에는 샤푸르 1세를 위해 집필해 헌정한 교리 요약서 <샤푸라칸>이 있다. 마니의 출생지와 생년월일을 상당히 정확하게 추정할 수 있는 것도 <샤푸라칸>에서 마니가 직접 설명했기 때문이다. 샤푸르 1세는 마니교로 개종하진 않았지만 한동안 마니교는 사산 제국 안팎에서 신자를 확보했다. 하지만 샤푸르 1세의 다다음 황제 바흐람 1세부터 마니교 박해가 시작되어 마니도 이때 순교했다. 마니교도는 동서 양쪽으로 퍼져서 서쪽으로는 로마 제국이 있던 유럽 북아프리카까지, 동쪽으로는 중국까지 선교하였으나 위구르 제국에서 국교로 채택된 시절을 빼면 주류종교로 올라오지 못하였다.

마니교에서 갈라져나온 마즈다크교라는 원시 공산주의 사상을 강조하는 분파도 생겼다. 이들은 배우자도 공유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심지어 샤한샤 하렘에서 후궁들을 대거 납치하는 일도 저질렀다가 탄압을 받고 세력이 약해졌다.

마니교는 14세기를 끝으로 소멸하면서 마니가 남긴 교리서 일부 및 중앙아시아에 흩어진 유적, 백련교나 마니광불[5][6]처럼 다른 종교에 흡수되거나 영향을 끼친 흔적만 남았다.

2.1. 중세 중국에서

중국에 전래된 마니교의 역사에 대해서는 명교 문서 참고.

3. 특징

최대 특징은 조로아스터교를 넘어서는 극한의 이원성으로, 조로아스터교 때부터 강조되던 선악의 대립을 넘어서 육체와 영혼의 대립까지 교리에 포함하니 철저한 자기단속과 철저한 구원론을 강조했다. 예컨대 마니교 계율 중에 모든 형상이 있는 것을 파괴하지 말라는 내용이 있는데 이 원칙대로라면 목욕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에 할 수 없고 농사의 형상을 파괴하기 때문에 할 수 없다.

이 원칙을 그대로 지킨다면 마니교도가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엄격하다는 자이나교의 교리가 겨우(?) ' 생명을 파괴하지 말라.'인데도 상업 정도 외에 제대로 발 붙일 업종이 없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나마 지키는 게 좀 더 쉬운 같은 이란계 짬뽕종교 바하이 신앙이 좀 더 세계에 파급되어 오늘날까지 살아남게 되었다. 그래서 마니교에서는 수도자를 겸하는 성직자들에게는 이런 원칙을 최대한 요구하고 평신도에게는 조금 널널하게 풀어 주는 대신 ( 불교에서 승려들이 평신도 불자에게 공양, 시주를 받듯이) 평신도층이 성직자들을 먹여살리는 의무를 지도록 했다.[7] 식생활에서는 채식, 특히 과일을 요구했는데 마니교 최대 축일인 마니 순교한 날[8]에도 과일을 먹었다.

또 다른 특징은 그 막장 같은 짬뽕성이다. 창조 설화부터가 유대교, 그리스도교, 조로아스터교, 불교에 등장하는 예언자, 성인들을 마구마구 버무린 환상스러운 구성을 자랑하니 교리와 신을 베낀 사이비라며 기성 종교에게 핍박받았다. 이러다 보니 마니교도는 비밀 종교집단이 되어 자신들끼리만 접촉하면서 살았는데 이것도 권력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아서 위구르 제국을 제외하면 중앙 무대로는 거의 올라오지 못한 채 반체제 성향의 민간 종교[9]로만 역사에서 존속하였다.

4. 교리

마니교의 세계관은 당대 유대교 그리스도교, 조로아스터교, 그리스 신화를 모두 합쳐 재구성했으므로 매우 복잡하고 방대하다. 여기에 마니교의 필수요소인 빛과 어둠이라는 이원론적 선악 구도가 들어간다.

대략 정리하면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는 우리가 사는 시대까지 세 번의 시기를 거치며 대립했고 그 과정에서 인류[10] 세상이 창조되었다. 세 번째 대립기인 현대(마니교가 생길 무렵)에 빛의 영역을 다스리는 빛의 아버지가 사람들을 빛으로 인도하기 위해 예수를 먼저 보냈는데 예수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온 사람이 마니라고 가르쳤다. 마니교의 예수관은 그리스도교에서 세례자 요한의 입지와 비슷하면서도 다르며 그리스도교에서 이단시하는 영지주의적 관점이 섞여서 그리스도교는 마니교를 이단으로 보아 박해했다.

마니교의 창조론에 따르면 세상은 세 차례에 걸친 빛과 어둠의 싸움으로 인해 생겨났으며 사람을 포함한 만물은 빛과 어둠의 속성이 섞여 있는데 마니교에선 영혼은 빛의 세력, 몸은 어둠의 세력이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채식과 금욕, 명상, 수행으로 어둠을 멀리하고 빛을 추구하며 타락에서 벗어나는 것이 마니교 교리의 핵심이다.

마니교는 철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특징 때문에 종교인 중에서 스스로의 사유를 거쳐 자발적으로 개종하는 등의 파급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성경에서 드라마틱하게 펼쳐지는 내용으로 우주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과는 정반대였다.

마니교는 금욕주의를 강조하기도 해서, 마니교의 고위 성직자 독신으로 산다.[11]

마니교의 '마니'는 신의 최후의 예언자로서 신을 믿는 종교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와 같이 예수를 인정한다. 이렇게 신을 믿고, 예수, 부처, 조로아스터 등을 과거의 예언자로 이해했다. '마니'는 빛의 예언자라고 불리며 빛을 선한 개념으로 여겼는데 이러한 빛과 어둠의 대립은 조로아스터교에서 빌려왔다. 하지만 기성 종교의 입장에선 마니교를 자기네 교리와 신을 표절한 도둑, 이단으로 여기고 박해하는 명분으로 쓰기 좋다는 약점도 있었다.

게다가 마니교는 보편 종교로서의 역할을 자처했다. 기존의 종교가 타 민족, 타 종교인을 박해하기 바빴던 것과는 달리 매우 평화적이기 때문에 이는 분명 매력적인 점이었다.

결정적으로 독특한 점은 ' 영지주의'다. 대부분의 종교들이 수행을 하거나, 돈을 내거나, 선행을 하거나 하는 등 일상생활과는 거리가 있는 것을 행하기를 바라는 것과는 달랐다. 마니교에서는 '지식'을 쌓을수록 그에 비례해서 인간의 타락을 막아주고 빛에 다가갈 수 있다고 보았다.[12]

악이란 절대 사라질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지식을 쌓아야 한다고 보았다.

다른 종교들처럼 마니교도 성직자와 평신도로 계급이 나뉘었다. 마니교 성직자는 '선택받은 자', 평신도는 '듣는 자'로 불렸으며 성직자들은 다시 크게 4개의 계급으로 나뉘는데 최고위 계급의 성직자는 창시자인 마니를 계승했다고 하여 '후계자'라고 불렸고 후계자 밑으로 12명의 ' 사도'들이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도교의 창시자인 예수를 따랐던 12명의 사도들을 모방한 것이다. 사도들의 밑으로는 72명의 주교와 360명의 장로가 있었다.

마니교 성직자는 스스로 농사를 짓거나 돈을 버는 일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생계에 필요한 식량은 모두 평신도에게 의지했다. 평신도는 성직자와 달리 농사와 돈벌이가 허락되었다. 마니교 성직자들은 주로 수도원(사원)에 모여 자기들끼리 살았으며 평신도들이 가져다주는 곡물과 채소와 과일 등으로 구성된 식사를 하루에 한 번, 해가 진 후에 먹었다.[13]

5. 영향

창시자이자 교주였던 마니 바흐람 1세 이단으로 잡혀 죽은 후의 역사 자체가 피압의 역사라고 할 종교지만 이란을 벗어난 국외에서는 민간에서나마 크게 유행해 동서 종교에 모두 큰 영향을 줬다.

지금은 사라진 종교지만 영향력이 생각보다 매우 크다.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스페인,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지역, 인도, 중국, 한국에 이르기까지 사실상 구대륙 전체를 휩쓴 종교다. 중세 시대의 전파력 치고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 어떤 메이저 종교보다 파급력은 더 앞서나갔다. 이는 중앙유라시아의 교역 시스템에 힘 입은 바가 큰데 중앙유라시아 각지에서 교역을 하는 소그드인, 튀르크인 교역상들 입장에서 마니교 교리를 배워 두면 유럽이나 지중해 문화권에서는 그리스도인처럼 행세할 수 있고 중국이나 인도에서는 불자처럼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마니교를 적극적으로 차용할 수밖에 없었다. 마니교 신자가 많았던 위구르족들은 몽골 제국 시대에 여러 종교와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이유로 행정 실무 관료나 외교관으로 각광받았다.

서방으로는 3세기 이후에 로마 제국에서 상당 기간 융성했다. 그리스도교 교부, 성인으로서 추앙받는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도 한때 마니교 신자였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 마니교를 비판했고 이후에도 선악을 극단으로 강조하고 구원을 중시하는 중세 이단 교파는 대개 마니교에 많이 영향을 받았다. 대표할 정도로 전형이 될 만하거나 특징이 있는 것이 9세기 동로마에서 유행했던 바오로파, 보고밀파, 11세기·12세기에 서유럽에 퍼진 카타리파로 이들은 마니교와 비슷하게 세상은 빛과 어둠의 영역으로 나뉘어 있고 인간은 어둠이 아닌 빛의 길을 따라야 한다는 교리였다.

중동에서는 마니교 신자들과 이슬람 신학자들과의 토론과 논쟁이 결국 무타질라 학파라는 이슬람 사변철학의 발전으로 이어진다. 영지주의나 동양 철학에 지식이 있는 마니교 성직자들이 이슬람 신학자들과의 토론에서 자꾸 이기자 불안감을 느낀 무슬림 학자들이 이들과 맞서기 위해 고대 그리스 철학과 중세 인도 과학을 공부하고 이슬람 교리에 접목시키면서[14] 결국 이슬람의 사변 철학 학파가 생겨난 것이다. 재밌는 사실인데 마니교가 박해받아 사라지고 나서 무타질라 학파도 필요가 다 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단 취급을 받고 사실상 사멸했다.[15]

여담으로 영어 위키백과 Atheism 항목에 서술되어 있는 중세 아랍, 페르시아인 무신론자들은 사실 오늘날과 같은 개념의 무신론자가 아닌 마니교 신자였다. 이들은 마니교의 신학적 관점에서 이슬람 신학을 비판했는데 마니교 신학은 실전되고 이들이 이슬람 신학을 비판한 내용만 남아 이들이 무신론자였다는 오해가 생긴 것이다. 실제로 아랍어 페르시아어로 마니교 신자를 칭하는 멸칭인 진디끄(Zindiq, زنديق)[16]는 오늘날 무신론자와 동의어로 쓰인다.

동방으로는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까지 뻗어나간 후 민간 신앙에 크게 영향을 끼친다. 먼저 위구르 제국을 위시해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잠시 국교로 정해졌던 적이 있으며 중국식 마니교는 당나라 9세기 경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북송 말에 강남에서 반란을 일으킨 방랍의 집단에 채식주의자 마귀를 섬긴다는 끽채사마교[17] 신자가 포함됐던 일변으로 마니교는 미륵 신앙과 합해지면서 소위 명교 혹은 백련교로 발전하기도 했는데 15세기 후 마니교도는 소멸했으나 백련교도는 19세기까지 을 괴롭힐 정도로 크게 융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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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푸젠성에 남아있는 마니교 사원인 초암[18]의 (불상으로 위장한) 마니 석상

오늘날 중국 남부인 저장성 원저우시의 창난현(蒼南縣)의 연해지방인 염정(炎亭), 괄산(括山) 일대에는 천 년 동안이나 독특한 풍습이 전해져 내려오는데 하얀 옷을 입고[19] 죽은 자가 좋은 세상으로 가도록 기원한다든지, 일부 나이 든 어민들은 매일 아침에 반드시 밥을 세 입 먹을 때까지는 채소 반찬을 먹고 그 후에 고기 요리를 먹는다든지 하는 것들이며 일부 노인들은 지금까지도 아침에는 태양에 절을 하고 저녁에는 달에 절을 하는데 연구자들은 이 풍습이 바로 어민들이 마니교를 믿은 흔적이라고 보고 있다. 다만 마니교의 교리가 약간 변형되기도 했는데 원래는 육식을 절대 금지했지만[20] 마니교를 믿는 온주의 어민들은 힘든 고기잡이 뱃일을 하기 때문에 체력을 보충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육식을 허용하기로 교리가 바뀌었다는 견해가 있다. 출처

6. 기타

십자군 전쟁 문서에서도 나온 <아랍에서 보는 십자군>으로 유명한 작가 아민 말루프는 <마니>라는 소설[21]을 썼는데 말루프 자신이 레바논 태생이며 프랑스에서 거주하는 가톨릭 신도지만[22] 마니에 대하여 긍정적으로 보는 시각[23]을 넣기도 했다. 사실 이 사람은 종교 연구도 하면서 데바닷타(한국에도 정발됨)라는 소설을 썼는데 이 소설에서 데바닷타에 대하여 좀 좋은 면도 있다고 봤으나 광신적인 한계로 가서 스스로 파멸하니 안타깝다고 결국 결말이나 그 근본주의에 대해서는 비난했다. 그렇지만 서문에서 패자이기에 더더욱 기록에서 불리하게, 왜곡되어 남았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쓸 정도로 다양한 종교에 대하여 연구하고 소설을 쓰며 중립적으로 보는 사람이므로 그의 소설 마니에서도 마니교에 대하여 긍정적인 부분과 같이 패자로 사라졌기 때문에 데바닷타 같이 부정적인 이미지로만 남게 된 게 크며 매니악이라는 그리 좋지 않은 말 유래가 되었다는 의견을 표했다.

실제 마니교와는 상관없지만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의 교주 이름이 만희라서 그 종교가 마니교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24] 그래서 인터넷에 마니교를 검색하면 실존했던 마니교에 대한 글과 신천지를 이만희교라고 비판하는 글이 섞여 나오는지라 신천지의 멸칭으로서의 마니교와 실존하는 마니교를 헷갈려하는 경우도 있다. 백괴사전에서 마니교는 신천지를 가리킨다.

김용 의천도룡기에도 마니교를 모티브로 삼은 명교가 주요 세외무림 세력으로 등장해 적지 않은 비중을 보여준다.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Old Gods DLC에서 조로아스터교 이단으로 추가됐고 Jade Dragon에서 전용 종교 지도자, 종교 기사단, 베마 축제 이벤트가 생겼는데 역사대로 초기 시나리오에서 위구르족과 키르기스족 유목민들이 마니교를 믿는다. 이후 나온 후속작인 크루세이더 킹즈 3에서는 조로아스터교 이단이 아닌 이원 신앙이라는 별개의 신앙으로 분리되어 나왔다. Europa Universalis IV는 마니교가 없지만 CK2에서 마니교로 플레이하던 세이브 파일을 컨버트하면 마니교로 플레이할 수 있다. EU4에서 마니교는 조로아스터교의 상징물에 그리스도교 십자가가 달린 문장을 갖는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마니산, 인천 광역버스 업체 마니교통이랑 한자 표기가 같다.

7. 관련 문서



[1] 심지어 서양권 국가에서도 이들이 부대에서 터번을 쓰는 걸 용인할 정도로 영향력이 있다. [2] 서양 언어 쪽 자료에서는 무그타실라를 '알카사이의 종교'라는 뜻으로 Elchasaite 또는 비슷한 파생형 단어로 지칭하곤 한다. 아니면 아랍어 단어를 음역해서 '무그타실라'라고 하거나. [3] 다만 마니교를 믿은 위구르족들은 실제로 채소를 재배하기 위해 몽골 초원에 채소를 기를 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4] 이는 토하라인들이 위구르인들에게 동화되는 결과를 부른다. [5] 중국 푸젠성에 있는 유적. 마니교+불교+도교가 섞인 양식이다. [6] 1, 2 푸젠성 취안저우시 남쪽 진강시에 있는 유적. [7] 마니교에서 성직자는 '선택된 자', 평신도는 '듣는 자'로 불렸는데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분파인 카타리파에서도 성직자와 평신도를 완덕자(Perfecti), 평신도(Credentes)로 구분했다. [8] 마니교는 이날을 기려 그리스도교에서 예수의 수난과 부활을 기리는 것과 비슷한 '베마' 축일을 지냈다. [9] 선악구도가 크게 작용하므로 [10] 인류는 세 번째 시기에 탄생했다. [11] 마니교의 영향을 받아서 서기 11세기부터 프랑스 남부 알비 지방에 등장한 신흥 종교인 카타리파에서도 성직자들은 독신으로 살았는데 카타리파에서는 물질 세계는 악마가 만들었기 때문에 물질 세계에 태어나는 것 자체가 고통으로 간주되었고 따라서 아이는 낳지 않는 편이 좋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평신도들은 그런 교리를 그다지 엄격하게 지키지 않아서 카타리파 교리를 믿으면서도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는 일이 많았다. [12] 이 교리로 인해 마니교가 국교였던 중세 고창회골 위구르인들은 평범한 노예조차 계약서를 직접 작성할 수 있을 정도로 평균 교육 수준이 높아 “초원의 지식인층”이라는 평판을 얻었다. [13]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도현신 지음/서해문집/80~82쪽 [14] 특히 유일신 사상과 가깝고 인간 형태의 신을 부정하고 무형의 신을 주장한 신플라톤주의가 무슬림 학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15] 다만 영향력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라 오늘날의 시아파 12 이맘파 교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6] 복수형은 잔다까(Zandaqa). 원래는 조로아스터교 사제들이 마니교 신자들을 낮춰 부르는 멸칭이었다. [17] 끽채사마(喫菜事魔)란 단어가 '채소를 먹고 마귀를 섬긴다.'는 뜻이다. 사(事)에 '받든다, 섬긴다.'는 뜻도 있어서 사마(事魔)가 '마귀를 섬긴다.'는 의미다. [18] 채식 습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임 [19] 마니교에서는 하얀색이 빛을 상징하는 좋은 색이라고 여겨서 성직자들이 하얀 옷과 모자를 착용했다. 원래 중국인들은 하얀색이 죽음을 상징하는 불길한 색이라고 여겨 꺼린 것과는 정반대다. [20] 마니교에서는 고기와 생선과 술이 영혼을 더럽히는 부정한 음식이라고 여겨서 신도들한테 결코 먹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마니교도들은 곡물과 채소, 과일, 우유, 맹물만 먹을 수 있었다. 다만 종교가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주로 퍼지는데 유목민들의 현지 사정상 이것을 온전히 지키기란 어려웠고 그래서 이 원칙은 성직자 계층만 지키도록 하고 평신도들은 최대한 널널하게 풀어주는 방식으로 유연하게 대처했다고. 출처: 지도에서 사라진 종교들/도현신 지음/서해문집/77쪽 [21] 해당 소설은 한국에서 정발되었다. [22] 아버지가 레바논의 멜키트 그리스 가톨릭 공동체 출신으로 대대로 그리스도교 집안이었다. [23] 비난도 했지만 서문에서는 다양한 종교 장점을 넣으며 노력한 점을 높게 평가했다. [24] 자신을 보혜사라고 자칭하는 측면에서 비슷한 점이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