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고전 라틴어:Appius Claudius Iulianus) |
출생 | 미상 |
사망 | 미상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로마시장, 콘실리움 위원 |
가족 |
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티알리스 아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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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가 존속한 서기 2세기 후반~3세기 초반에 활동한 원로원 의원, 집정관, 로마시장, 야전 사령관, 콘실리움(황제자문회의) 위원이다.세베루스 왕조 후기인 엘라가발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 동안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를 도운 원로원 의원으로, 디오 카시우스 등과 함께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를 대표한 인사다.
2. 생애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 클라우디우스 가문 사람이다. 자세한 기록이 없어 확실치 않으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사비누스 레길렌시스와 그 형제들을 시작으로 이어진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진짜 후손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당시 몰락귀족이 된 진짜 후손들은 옛 전통에 따라, 클라우디우스/클로디우스를 병기표기했고, 이들의 클리엔테스 후손들이 잘 나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에게서 개인이름과 씨족 성씨를 하사받은 것으로 추정한 경우가 많은데, 이 역시도 어느 부분까지가 사실인지는 불확실하다.동시대의 진짜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 후예인 몰락귀족 아피우스 클로디우스 풀케르와 그 자녀들과 달리, 이 사람은 클라우디우스 가의 종가격 이름이자 상징과 같은 '풀케르', '사비누스' 같은 이름을 코그노멘으로 본인, 아들 모두 사용하지 않고 있다.[1] 이는 본인, 장남, 손자, 증손자 등에게 어떻게든 클로디우스[2], 풀케르를 꾸역꾸역 전체 이름에 넣은 푸피에누스 일가와 매우 대비되는 모습이다. 다만, 서유럽 일부, 러시아, 동유럽 학자들의 경우에는 클라우디우스 풀케르 가의 후예 내지 방계 친척 정도로 보기도 한다.
어쨌든 이런 배경을 둔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형제가 공동황제인 시절인 161~163년 트라키아에서 전직 법무관 자격으로 이곳 지방관 내지 지방 총독 격의 관직을 담당한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티알리스의 아들이다. 아버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마르티알리스는 전형적인 몰락귀족 출신 로마 제국의 중하위 공무원이었다. 그는 총독이라고 하나 실제로는 오늘날 소피아에 있는 조폐소에서 안키알로(오늘날의 불가리아 포모리에) 시 정부의 주화 발행을 도왔다고 알려져 있고, 현재의 불가리아 일대에서 마르키아노플(현재의 불가리아 데브냐)와 현재의 불가리아의 수도 소피아 북부의 작은 마을에 위치한 작은 로마시대 도시 니코폴리스 아드 이스투룸에 이름이 적혀 있어, 지방 행정관을 지낸 비문이 확인된 사람이다.
클라우디우스 마르티알리스의 아들인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는, 공화정 후기, 제정 시기의 몰락귀족 출신들의 전형처럼, 신참자 취급 이하를 받으며 성실함, 능력 검증으로 자리를 잡은 것 그대로 경력을 밞고 원로원에 입성한 사람이다. 그가 제대로 원로원에서 이름을 날린 것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모든 경쟁자를 제거하고, 원로원을 재개편하고 확장하면서 몰락귀족 출신 후손들 중 중하급행정, 군대에서 경력을 쌓은 실력 있는 장교, 관료 출신들에게 원로원 재입성 기회를 줄 때부터였다. 그래서 그는 세베루스 시대 말인 서기 210년 무렵에 보결 집정관에 아주 짧게나마 그 이름을 올렸다.
이는 이 사람이 생애 두 번째 집정관이자 첫 정규 집정관에 오른 뒤, 자신의 군 경력과 군 전역을 기념하는 서기 224년 군대 졸업 청동비문에 나온다. 그는 의도적인지, 아니면 어쩔 수 없어서 인지 모르나, 로마 공화정의 상징 중 하나인 이 명문가와 어떤 관계이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는 문구를 단 한 개도 적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하급 행정 실무부터 군 복무 중 성실하고 공손히 살았음을 적으면서, 집정관이 됐다며 감사함을 적어 놓았다. 그래서 전체 이름도 분명하지 않고, 대대로 물려 쓴 코그노멘이 율리우스 씨족명 뒤에 '-anus'를 붙인 '율리우스 가 사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어, 그가 클라우디우스 가문 후예가 맞다고 단정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종종 나오고 있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는 223년 수도장관을 지냈고, 다음해인 224년, 가이우스 브루티우스 크리스피누스와 함께 집정관을 지냈다. 그리고 당선 이후 224년 1월 7일자 청동비문인 '군사 졸업장'을 발행해 자신의 경력과 삶을 기념했다.
서기 224년 군대 졸업장 청동비문은, 관례에 따라 그가 집정관을 지내고 율리아 마이사, 율리아 마마이아와 손잡고 권력을 쥔 이후 제작됐다. 따라서 비문을 통해, 그가 두 번에 걸쳐 집정관을 했고, 이중 한 번은 당해년도 집정관에 올랐음이 확인된다. 그리고 이후 세베루스 가문의 카라칼라(또는 엘라가발루스) 치하에서 아시아 속주 총독과 아프리카 속주 총독을 지냈다고 적혀 있다.
여러 정황상 엘라가발루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의 외조모 율리아 마이사,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의 모후 율리아 마마이아와 친분이 깊고 마마이아와는 사이가 돈독했거나, 그들이 그를 추천해 기용할 만큼 불완전한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초기 시절에 도움이 될 능력을 검증한 인물임이 확인된 인물이다. 그래서 두 번째 집정관이 된 해부터, 프라이펙투스 우르비가 되어 로마 시장을 맡으면서, 황제자문회의(콘실리움) 위원을 맡았음이 추가로 확인된다.
이런 측면을 생각해보면, 시리아 여제 및 세베루스 알렉산데르와 관계가 좋아 은퇴 직전 집정관이 된 디오 카시우스와 살짝 다를 뿐, 당대 로마 안에서 탄탄한 경력을 갖추고 있는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귀족적인 색채가 강하지 않음을 예측해볼 수 있다. 몰락귀족 출신이거나 옛 조상이 몰락한 가문과 클리엔테라 사이인 만큼이나, 그 재산은 디오처럼 넉넉하지 않았던 것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베루스 왕조가 안정된 뒤부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기조 아래에서 본인 경력과 능력으로 기회를 잡아, 후기에 고위직에 올랐고,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와 울피아누스의 단점을 보완해줄 군대의 신망이 있던 점에서 주목할 인사로 분류된다.
자녀로 확인된 인물은 같은 이름을 가진 아들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있는데, 그는 막시미누스 트라쿠스가 몰락하는 과정에서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푸피에누스, 발비누스, 고르디아누스 3세가 한 해에 등장한 238년 집정관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