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36대 황제
퀸틸루스 QVINTILLV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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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틸루스 (Marcus Aurelius Claudius Quintillus) |
제호 | 임페라토르 카이사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틸루스 인빅투스 피우스 펠릭스 아우구스투스 |
출생 | 212년 |
로마 제국 판노니아 시르미움 | |
사망 | 270년 (향년 58세) |
로마 제국 아퀼레이아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270년 ~ 270년 (17/177일) | |
전임자 |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
후임자 | 아우렐리아누스 |
종교 | 로마 다신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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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제36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동생. 형 클라우디우스가 270년 3월에 전염병으로 병사하자, 로마 시민들과 로마 원로원의 추대를 받고, 평화롭게 황제에 즉위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생전부터 형의 강력한 제위경쟁자 아우렐리아누스가 이끈 로마군이 이에 불복해, 아우렐리아누스를 옹립했다. 따라서 가망이 없다고 생각한 퀸틸루스는 아퀼레이아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 생애
2.1. 황제가 되기 이전의 생애
퀸틸루스는 판노니아의 시르미움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정된다.(태어난 연도는 알 수 없다.) 형 클라우디우스처럼 로마화된 이민족 가정에서 태어난 그는 형과 함께 군대에 입대했다. 하지만 형이 군인으로서 탁월한 용기와 리더십을 갖췄다며 세간의 찬사를 받으며 출세를 거듭하는 동안, 퀸틸루스는 별다른 전투 공적을 세우지 못했다. 나중에 아우렐리아누스를 지지한 군대에게 불신임당한 것을 볼 때, 그는 형과는 달리 군사적 재능이 결여되었거나, 과거의 티메시테우스처럼 군입대 후 병참 분야를 관리하며 형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를 보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경력을 추정하면, 후자일 확률이 높다고 평가받는다.형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가 즉위하기 전후 중 언제 원로원에 입성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형이 즉위한 후 원로원 안에서 조용하게 황제의 동생으로 역할을 했고, 이탈리아 사르다니아의 징세관으로서 직무를 수행했다는 기록, 그가 사르다니아(사르데냐) 총독으로 있었다는 사실이 존재해, 의외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황제가 가장 신임한 인물인 것은 분명하다.
2.2. 황제 즉위
270년 3월 클라우디우스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수행하던 군대는 동생 퀸틸루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 당시, 퀸틸루스는 형의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 북부를 방어하는 책임을 맡아 아퀼레이아에 남아 있었다고 하며, 형이 원로원, 군대, 민중들에게 신망이 워낙 높았고 이 사람 역시 인망이 있는 탓에 자연스레 권력 승계가 이뤄졌다. 이에 대해 12세기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 요안니스 조나라스의 기록에 따르면, 로마 원로원은 처음부터 퀸틸루스를 황제로 추대했다고 한다.그러나 다뉴브 강에 주둔한 로마군은 형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와 달리 오랜 기간동안 원로원 의원, 사르데냐 총독 등을 역임한 퀸틸루스의 제위 계승을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퀸틸루스가 형과 달리 비루하다고 여겼고, 그가 가진 업적이 자신들의 기병대장 아우렐리아누스보다 부족하다며 반발했다. 이들은 퀸틸루스에게 복종을 거부했고, 그 틈 속에서 아우렐리아누스가 새 황제가 됐다. 그렇지만 여기에는 고대 기록들의 표현 그대로 퀸틸루스가 2달 동안 재위하는 내내 보인 엄격하고 질서화된 군율에 대한 반발이라는 견해도 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 따른 추정인데, 아우렐리아누스가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생전부터 제위를 노릴 기미를 보이자 고티쿠스, 퀸틸루스 형제가 이들을 제어하기 위해 군율을 엄격히 적용했고, 이에 다뉴브 군단이 반발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신용도가 지극히 낮기 때문에 사실 여부는 불분명하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고티쿠스에 의해 기병장관에 선임된 이래 로마군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었으며, 다뉴브 전선의 로마군은 사실상 사병화되어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절대복종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아우렐리아누스는 고티쿠스가 전염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본인 휘하의 강력한 군대에게 자발적 지지 속의 옹립 형태로 황제를 선포했다.
2.3. 죽음
다뉴브 강 주둔 로마군이 아우렐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다는 소식이 로마에 전해졌을 때, 퀸틸루스는 아퀼레이아에 있었다. 그는 형의 갑작스러운 죽음 속에서 꽤나 명민하게 통치했고, 많은 양의 주화를 발행하면서 관리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내전은 벌어졌고, 곧 아우렐리아누스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했다.이에 조나라스, 에우트로피우스, 제롬 등의 후대 로마제국, 동로마 제국 사가들은 퀸틸루스가 이를 내전에 치닫지 않게 노력했다가, 결국 제위를 지키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어떤 고대기록에서는 원로원이 퀸틸루스 추대를 취소했고 퀸틸루스 추대에 동의했던 로마군도 그를 저버렸다고 한다. 이런 까닭에 조나라스로 대표된 역사기록에 따르면, 퀸틸루스는 자신의 주치의인 안티오키아의 요안네스에게 자신의 정맥을 끊어 차분하고 명예롭게 죽을 수 있게 해달라고 하고, 목숨을 끊었다. 일부 자료에는 퀸틸루스가 재위 17일 만에 죽었다고 하나, 조나라스를 비롯한 여러 로마인들은 그가 177일 동안 재위하다가 사망했다고 하며, 그가 발행한 주화들 역시 그가 17일이 아닌 177일간 즉위했음을 확인시켜준다.
가족으로는 이름 미상의 아내와 자녀 2명이 있었다고 한다.
3. 여담
남아 있는 로마기록들에 따르면, 형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이상으로 온화했고 유능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우렐리아누스 즉위 이후,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사실상 기록말살형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비난의 대상이 됐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자신이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에게 사실은 다음 황제로 낙점됐으며, 본인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아닌, 본인에게 가야 될 제위를 차지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퀸틸루스가 자신의 형을 독살했다며 계속 강조했다. 하지만 원로원, 로마시민들은 그를 믿지 않았다. 이런 배경으로 아우렐리아누스는 퀸틸루스에 대한 평가를 삭제하고, 자신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 이들을 모조리 반역자로 몰아 죽이거나 추방했다.콘스탄티누스 1세의 할머니(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어머니)가 클라우디우스 2세와 퀸틸루스의 동생 크리스푸스가 낳은 딸이라고, 콘스탄티누스 왕조 시대 작성된 믿을 수 없는 고대기록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는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