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berius Manilius Fuscus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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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63년 |
사망 | 미상 |
직위 | 원로원 의원, 집정관, 야전 사령관, 사제 |
가족 |
플라비아 폴리타(아내) 마닐라 루킬라(딸) 가이우스 카이소니우스 마케르 루피니아누스(사위)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루킬루스 마케르 루피누스(외손자) |
경력 |
집정관(2회) 아시아 속주 총독(209~212) 시리아-페니키아 지방 황제 특사(194년)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 사제(190~225년)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203~2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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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세베루스 왕조 시대의 원로원 의원, 집정관, 사제, 야전 사령관. 두 번의 집정관 경력이 있는 인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주요 지지자이며, 율리아 마이사를 도왔다.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시대 초기까지 활동했다.2. 생애
서기 163년경 태어났다. 성씨 마닐리우스(Manilii/Manlii)에서 드러나듯이 이탈리아 혹은 히스파니아 지방 출신인데, 프라이노멘으로 쓴 티베리우스에서 드러나듯이, 히스파니아 서부 일대인 오늘날의 스페인 서부 출신으로 추정된다.190년경인 27세의 젊은 나이에 프라트레스 아르발레스 사제가 됐고, 콤모두스 아래에서 191년부터 다키아에 주둔한 게미나 제13군단의 지휘관으로 193년까지 복무했을 만큼, 지위와 경력 모두 로마 제국 안에서 최상류층 출신이었다. 다만, 그의 출신 가문 중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 전까지 집정관에 오른 인물은 없었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193년 콤모두스, 페르티낙스 황제가 연달아 암살되고 다섯 황제의 해가 발발하자, 마리우스 막시무스, 알비누스 세네키오, 킬로 등과 함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주요 지지자가 되어, 세베루스의 로마 진군과 대대적인 원로원 내 정적 숙청 등에 개입했다고 한다.
194년 페스켄니우스 니게르와의 내전에서 세베루스가 승리한 직후, 세베루스가 보복성 차원에서 비잔티움 주민들을 전쟁 포로 대하듯이 탄압하고, 시리아 지방 내에서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들을 숙청할 때, 레반트 지방에서 속주 개편 실무를 도맡았다. 그는 이때 시리아-페니키아 지방 황제 특사가 되었고, 시리아 포이니키아 속주의 초대 총독으로 부임했다. 이 경력 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후원 아래 196년 보결 집정관이 되었다.
첫 집정관 경험 후, 세베루스가 장남 카라칼라를 위해 그에게 각종 지위를 내렸다. 이때 그가 받은 지위에는 203년부터 취임한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의 수장 자리도 있었다. 이 직책을 받으면서, 시빌라의 예언서를 관리한 15인 사제를 이끌었고, 204년에는 세속 축제 행사를 조직, 지휘하면서 세베루스 왕조의 세습 선전을 도맡아 처리했다. 이후 209년부터는 아시아 속주 총독이 되었다가 212년 카라칼라 단독 통치까지 재임했다.
엘라가발루스가 암살된 뒤, 율리아 마이사 등의 의중 아래 마이사가 죽기 직전에 225년 정규 집정관에 204년 초 추천받아 생애 두번째 집정관에 다음해인 225년 올랐다. 동료는 세르비우스 칼푸르니우스 도미티우스 덱스테르였다. 하지만 그는 외손자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루킬루스 마케르 루피누스에게 보결 집정관 경력을 주면서, 225년 여름 즈음 집정관 자리에서 자진 사퇴한 뒤 은퇴했다.
3. 가족
이탈리아 로마에서 발굴된 비문에 따르면, 아내는 플라비아 폴리타이다. 플라비아 폴리타는 165년생으로,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이라고 적혀 있다. 이들 사이에는 외동딸 마닐라 루킬라가 있었다. 아내 플라비아 폴리타는 204년 세상을 떠났고, 푸스쿠스는 재혼하지 않았다.딸 마닐라 루킬라는 가이우스 카이소니우스 마케르 루피니아누스와 결혼했다. 사위 가이우스 카이소니우스 마케르 루피니아누스는 157년생의 이탈리아 출신 로마 귀족으로 163년생인 티베리우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보다 나이가 많았다. 이 결혼에서 195년 태어난 아들 중 장남이 군인황제시대 당시 고르디아누스 1세와 고르디아누스 2세가 아프리카 속주에서 황제를 자처하고,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에게 대항한 가운데에서 현명하게 대처한 원로원 의원 중 한명인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루킬루스 마케르 루피누스이다.
마닐리우스 푸스쿠스의 외손자이자 상속자인 그는 255년까지 살았는데, 고르디아누스 3세 시절에 아프리카 속주 총독 사비니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키자 대항마 차원의 특사가 되었고, 티메시테우스가 페르시아와 전쟁에 앞서 부재할 황제와 근위대장들을 대신하여 이탈리아와 로마 통치를 대리했다. 그러다가 고르디아누스 3세가 죽자, 필리푸스 아라부스의 즉위와 황제 승인을 허락했고, 255년경인 갈리에누스 황제때에 은퇴했다. 참고로 이 사람의 외손자는 서기 3세기 군인황제시대의 원로원 의원으로 4세기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지낸 아니키우스 아우케니우스 바수스이며, 손자는 4세기 집정관 카이소니우스 바수스이다.
딸 마닐라 루킬라는 마닐리아와 카이소니아 마닐리아도 낳았는데, 푸스쿠스의 외손자 못지 않게 외손녀들도 그 일가 전체가 대단한 권세를 누렸다.
장녀 마닐리아는 카이소니우스 루킬루스 마케르의 누나로 추정된 인물로, 280년 집정관에 오른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오비니우스 루피누스 마닐리우스 바수스의 어머니이다. 차녀 카이소니아 마닐리아는 언니 마닐리아, 오빠 루키우스 카이소니우스 루킬루스 마케르 루피누스보다 장수해 275년까지 살았다. 그녀의 남편은 4세기 집정관 암니우스 아니시우스 율리아누스인데, 이들의 아들 암니우스 마니우스 카이소니우스 니코마쿠스 아니키우스 파울리누스 호노리우스 역시 집정관을 지냈고 프라이펙투스 우르비를 지낼 때에는 로마 포룸에 동상이 세워질 만큼 큰 위세를 떨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