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ding [ 펼치기 · 접기 ] {{{#181818,#E5E5E5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font-size: 0.95em; letter-spacing: -0.35px"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 | 마르쿠스 안니우스 베루스 카이사르 | ||
다섯 황제의 해 | 소 페르티낙스 | |||
세베루스 왕조 | 세이우스 살루스티우스 | |||
군인 황제 시대 | 가이우스 율리우스 베루스 막시무스 | 발레리아누스 2세 | 살로니누스 | 소 빅토리누스 | 테트리쿠스 2세 | |||
사두정치 | 크리스푸스 | 리키니우스 2세 | |||
콘스탄티누스 왕조 | 달마티우스 | 한니발리아누스 | 마그누스 데켄티우스 |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 |||
서로마 제국 | 팔라디우스 | |||
레오 왕조 | 파트리키우스 | |||
유스티니아누스 왕조 | 게르마누스 | |||
이라클리오스 왕조 | 마르티노스 | 테르벨 | |||
이사브리아 왕조 | 니키포로스 | 흐리스토포로스 | |||
아모리아 왕조 | 알렉시오스 모셀레 | 바르다스 | |||
마케도니아 왕조 | 대 바르다스 포카스 | |||
두카스 왕조 | 요안니스 두카스 | 기오르기 2세 | |||
콤니노스 왕조 | 니키포로스 멜리시노스 | 소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 |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 요안니스 로게리오스 달라시노스 | 벨러 3세 | 몬페라토의 레니에르 | |||
앙겔로스 왕조 |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 콘라드 1세 | 마누일 마우로조미스 | |||
라스카리스 왕조 | 레온 가브라스 | |||
팔레올로고스 왕조 | 콘스탄티노스 팔레올로고스 | 알렉시오스 콤니노스 스트라티고폴로스 | 루지에로 데 플로르 | 요안니스 팔레올로고스 | 흐렐야 | |||
아우구스투스 · 카이사르
|
}}}}}}}}}}}}}}} |
<colbgcolor=#8b0000> 로마 제국 카이사르 Constantius Gallus |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
|
<colcolor=#FECD21> 휘 |
플라비우스 클라우디우스 콘스탄티우스 갈루스 (Flavius Claudius Constantius Gallus) |
생몰 년도 | 325년 또는 326년 ~ 354년 |
카이사르 재위 기간 | 351년 3월 15일 ~ 354년 |
아버지 |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
어머니 | 갈라 |
부인 |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 |
형제자매 | 율리아누스(이복 동생) |
자녀 | 아나스타시아 |
[clearfix]
1. 개요
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 왕조의 황족. 율리아누스의 형으로, 351년부터 354년까지 동부 속주를 통치한 카이사르(부황제)였다. 그러나 어렸을 때 콘스탄티우스 2세에게 받은 박해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정을 거듭하다 끝내 처형되었다.2. 생애
325년 또는 326년 로마 제국 이탈리아의 에트루리아 지방 마사 베테르넨시스(오늘날 마사 마르티티마)에서 콘스탄티누스 1세의 배다른 동생인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갈라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성명미상의 형과 누이가 있었으며, 5~6살 아래 이복동생 율리아누스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콘스탄티우스 1세이며, 할머니는 플라비아 막시미아나 테오도라이다. 삼촌은 플라비우스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이며, 이모는 플라비아 율리아 콘스탄티아, 아나스타시아, 에우트로피아다.갈루스의 어머니 갈라는 세베루스 왕조의 몇 없는 후손으로, 오래된 이탈리아 가문 풀비우스 일가의 후손이다. 갈라의 외할아버지 네라티우스 유니우스 플라우티우스는 카라칼라의 처남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우스 오르텐시아누스의 후손이며,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외사촌인 악명높은 근위대장 가이우스 풀비우스 플라우티아누스의 후손이다. 따라서 율리아누스와 달리 갈루스는 모계를 통해 세베루스 왕조의 창건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먼 후손이었고, 외가의 가계를 통해 로마-이탈리아 원류 노빌레스의 피를 이었다.
당대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그를 금발머리에 잘생긴 사람, 키가 크고 매력 넘치는 금발머리 귀공자로 묘사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역사가에 따르면, 갈루스는 온화한 성격인 동생 율리아누스와는 달리 다혈질적이고 많이 예민했다고 한다.
부친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두터운 총애를 받아 335년 파트리키우스 칭호를 받았고 집정관에 선임되었고, 그의 가족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337년 5월 22일 콘스탄티누스 1세가 사망한 뒤, 불온한 움직임이 일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생전에 친자식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를 아우구스투스(정황제)로 세워 제국을 3개로 분할하고, 조카인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세워 특정 지역의 영토를 다스리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세 형제는 유언장에 따라 제국을 3개로 분할하면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를 달마티우스에게, 폰투스를 한니발리아누스에게 넘겨줬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1세가 병이 아니라 이복형제들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헛소문이 돌자, 콘스탄티누스 1세를 추앙하던 군인들이 분노하여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를 포함해 왕조의 거의 모든 남성 구성원을 살해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족 학살 사건) 이때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와 계모인 바실리나도 살해되었는데, 당시 12살의 갈루스와 6살의 율리아누스만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이 대량 학살에서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 사건은 갈루스의 운명을 뒤집어 엎고 만다.
6세기의 이교도 역사가 조시무스는 헛소문을 퍼트려 군대를 선동하고 학살을 주도한 이가 콘스탄티우스 2세라고 지목했다. 자신과 두 형제만이 제국을 통치하게 하도록 이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처럼 병사들이 콘스탄티우스 2세와 그 형제들의 잠재적 정적이 될 친족 학살을 마무리한 직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세 아들은 유언장에 따라 제국을 공식적으로 삼분할한다. 장남 콘스탄티누스 2세는 갈리아, 브리타니아, 히스파니아를, 셋째 콘스탄스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서부 일리리쿰을, 차남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집트, 시리아, 동부 일리리쿰 등 동방 영토를 다스렸다.
이런 정국 흐름 속에서 갈루스와 율리아누스 형제는 졸지에 부모를 잃어버린 뒤, 양육과 보호라는 이름 아래 니코메디아로 떠났다. 니코메디아는 콘스탄티우스 2세의 관할이었고, 이들은 콘스탄티우스 2세 감시 하에 지냈다.
형제는 아리우스파 성직자 에우세비오스에게 기독교 교육을 받았으며, 스키타이 출신의 고트족 거세 노예였던 마르도니우스에게 고전 문학과 철학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율리아누스는 마르도니우스의 가르침에 깊은 영감을 받았지만, 갈루스가 어떻게 받아들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렇게 6년을 지내다 342년 카파도키아의 마르켈룸에 유폐되었다. 이들은 바깥에 출입하여 또래 친구를 사귀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고, 형제의 선생이었던 마르도니우스도 오지 못하게 하였기에,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했고 노예의 자식들만 교제할 수 있었다.
형제가 이렇듯 불우한 삶을 이어가던 350년 1월, 마그넨티우스가 서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콘스탄스를 살해하고 황제를 자칭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에 복수하고자 서방으로 진격하기로 했지만, 자기가 없는 동안 동방을 맡을 인물이 필요했다. 이리하여 형제는 석방되었고, 갈루스는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소환되어 황제의 여동생 플라비아 발레리아 콘스탄티나와 결혼하고 부황제(카이사르)에 발탁되었다. 즉위식은 351년 3월 15일에 거행되었고, 두 사람은 352년, 353년, 354년 3차례에 걸쳐 집정관을 공동으로 맡았다. 그러나 갈루스는 독자적으로 장관을 임명하는 게 허용되지 않았고, 오로지 콘스탄티우스 2세가 지정한 장관들의 지도를 받아야 했다.
콘스탄티우스가 여동생 콘스탄티나를 갈루스와 결혼시킨 건 갈루스와 동맹을 맺기로 했기 때문이었지만, 자신에게 원한을 품은 여동생을 멀리 보내는 의미도 있었다. 콘스탄티나는 본래 한니발리아누스의 아내가 되어 어엿한 황후가 될 예정이었지만, 남편 예정자가 잔인하게 살해되는 바람에 그러지 못 했다. 그녀는 마그넨티우스에게 접근해서 자기와 결혼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콘스탄티우스 2세는 이를 눈치채고, 갈루스와 결혼시킴으로써 마그넨티우스와 내통하지 않게 하였다. 갈루스와 콘스탄티나 부부는 아나스타시아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다.
갈루스는 부황제가 된 뒤 시르미움에서 안티오키아로 이동하던 중 니코메디아에 있는 율리아누스를 방문했다. 그 후 351년 5월 7일 안티오키아에 도착한 뒤 본격적으로 정치를 맡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그는 351년 또는 352년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발발한 유대인의 반란을 진압했다고 한다. 히에로니무스는 갈루스가 수천 명의 유대인을 학살했는데, 심지어 너무 어려서 무기를 들지도 못하는 아이까지 죽였으며, 도시 하나를 파괴하고 살아남은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고 기술했다. 한편, 요안니스 조나라스는 마그넨티우스가 갈루스를 암살하기 위해 암살자들을 보냈지만, 암살자들이 노부인의 집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저 여자는 너무 늙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거다'라고 여기고 자신들의 계획에 대해 대화를 거리낌없이 나눴다가, 노부인이 곧장 갈루스에게 알리는 바람에 실패했다고 기술했다. 갈루스는 이 암살자들을 모조리 처형했다고 한다.
필로스토르기오스에 따르면, 갈루스는 사산 왕조군의 침략도 막아냈다고 한다. 하지만 사산 왕조군과의 전쟁은 콘스탄티우스 2세 본인이 이미 루킬리아누스 장군에게 맡겨놨고, 샤푸르 2세는 동쪽에서 쳐들어온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철수했다. 따라서 갈루스 본인이 야전군의 선두에 서서 적과 교전할 기회는 없었다. 또한 다른 기록에는 이를 입증할 내용이 없는 것을 볼 때, 왜곡된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후방에서의 교통 정리는 맡았던 것으로 보인다. 353년 샤푸르 2세의 부관 노오다레스가 바트네 마을을 급습했으나 부하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같은 해 갈루스는 오리엔티스를 해안 지방으로 보내 그곳을 급습하고 있던 아사우리아인들을 공격하게 했다. 아사우리아인들은 로마군이 접근해오자 뿔뿔이 흩어졌다.
그가 주로 맡아야 했던 건 사산 왕조와의 전쟁이 아닌 다른 문제였다. 사산 왕조와의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곡물이 죄다 전선으로 보내지면서 안티오키아에서 곡물 공급이 감소했다. 갈루스는 곡물 가격 상승에 맞서기 위해 안티오키아 원로원의 의견과는 무관하게 몇몇 법률을 통과시켰다. 이로 인해 원로원 계급은 갈루스에게 불만을 품었다. 그러던 중 폭도들이 봉기를 일으켜 시리아 총독 테오필로스를 때려 죽인 사건이 벌어졌다. 테오필로스는 콘스탄티우스 2세가 직접 임명한 인물로, 갈루스와 여러 안건에서 자주 갈등을 벌였다. 그래서 갈루스가 폭도들이 테오필로스를 죽이도록 유도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또한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갈루스와 콘스탄티나 부부는 많은 부유한 사람을 재판에 회부하여 '마법'을 써서 유죄로 확정짓고 무고한 사람들을 처형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했다고 한다.
353년 안티오키아 총대주교 탈라시오스가 자연사하자, 콘스탄티우스 2세는 도미티아누스를 새 총대주교로 임명하여 안티오키아로 보냈다. 또한 그는 갈루스와 함께 동방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를 서쪽으로 빼냈다. 갈루스는 콘스탄티우스가 자신을 의심해 이러는 거라 여기고 불안해하고 있었는데, 마침 도착한 도미티아누스가 자신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며 궁정에 쓰이는 물품에 일일이 간섭하자 그만 폭발했다. 갈루스는 근위병들에게 도미티아누스를 체포하라고 명령한 뒤, 장교 몬티우스에게 도미티아누스 처형을 감독하라고 명령했다.
필로스토르기오스에 따르면, 몬티우스가 "총대주교 처형은 부황제의 권한을 넘어서는 행위입니다."라고 반대하자, 콘스탄티나가 몬티우스를 손수 붙잡아서 끌어내렸다고 한다. 갈루스는 몬티우스와 도미티아누스를 고문한 뒤 처형했다. 몬티우스는 죽기 전에 에피고노스와 에우세비우스가 자신과 한 편이었다고 진술했다. 이로 인해 철학자인 실리키아의 에피고노스와 에메사 출신의 웅변가 에우시비우스가 법정에 소환되었다. 두 사람 모두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는데, 에피고노스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거짓 자백했지만 에우세비우스는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갈루스는 이 두 사람 역시 처형했다.
354년 봄, 콘스탄티우스는 발렌티아에서 안티오키아의 재판 소식을 전해들었다. 당시 그는 마그넨티우스의 반란을 진압한 뒤 알레만니족과의 전쟁을 이어가고 있었다. 콘스탄티우스는 알레만니족과 화해한 뒤 밀라노로 이동했다. 이후 측근들을 불러모아 갈루스의 처우를 논의했다. 그는 갈루스를 소환하기로 마음 먹고, 사절을 보내 출두 명령을 내렸다. 콘스탄티나는 오빠 콘스탄티우스를 설득하기 위해 먼저 떠났지만, 비티니아의 카에니 갈라카니에서 병사했다. 갈루스는 콘스탄티우스의 진의를 의심해 안티오키아에 머물렀다. 이에 콘스탄티우스는 재차 사람을 보내 "너를 아우구스투스로 삼으려고 하니 어서 와라"라고 밝혔다. 갈루스는 미심쩍었지만 콘스탄티우스의 보복을 두려워해 안티오키아를 떠나 밀라노로 향했다.
그런데 그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전차 경주를 벌였고, 아우구스투스에게만 주어지는 영예인 왕관을 썼다. 콘스탄티우스는 그의 행동을 첩자들을 통해 보고받고, 갈루스를 호위하는 병사들을 하나둘씩 빼돌렸다. 이리하여 갈루스가 홀로 노리쿰의 푸토비오에 도착했을 때, 장교 바르바티오가 그를 체포한 뒤 갈루스의 황실 예복을 강제로 벗겼다. 이후 그는 일리리아의 폴라로 인도되었고, 콘스탄티우스의 신하들에게 심문받았다.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에 따르면, 갈루스는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책임을 죽은 아내 콘스탄티나에게 돌렸다고 한다. 콘스탄티우스는 이 소식에 격노하여, 세레니아누스를 파견해 갈루스를 처형하도록 하였다. 요안니스 조나라스에 따르면, 콘스탄티우스는 막판에 마음을 바꿨지만 처형을 집전하던 환관 에우세비우스가 황제가 변심했다는 걸 사형수들에게 전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이리하여 갈루스는 카이사르로 재위한 지 4년만에 비참하게 죽었다. 이때 그의 나이 29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