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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3-05-31 20:30:15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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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역사
Historia Romae
Ἡ Ἱστορία τῶν Ῥωμαίω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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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Domus Nerva-Antonina
96년 ~ 192년
성씨 네르바(Nerva)
트라야누스(Traianus)
안토니누스(Antoninus)
창건자 네르바 (96 ~ 98)
주요 황제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로마 제국의 왕조
플라비우스 왕조 다섯 황제의 해

1. 개요2. 역대 황제3. 역사
3.1. 네르바-트라야누스 왕조3.2. 안토니누스 왕조
4. 왕조 가계도상의 특징5. 평가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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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의 세 번째 세습 왕조.

도미티아누스 암살되어 단절된 플라비우스 왕조의 뒤를 이어 서기 96년부터 192년까지 로마 제국을 통치했다. 보다 세부적으로 '네르바-트라야누스 왕조'와 '안토니누스 왕조'로 나누는 경우도 간혹 있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가 이 왕조에 속하는 황제들이었으며, 여기서 루키우스 베루스 콤모두스만 빼면 그 유명한 오현제였다.

콤모두스를 제외하면 모두 양자 관계로 제위가 계승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의 황제들을 양자 황제(Adoptive Emperors)라고 부르기도 한다. 혈연 관계에 의존하지 않고 실력자를 양자로 맞이하여 제위를 계승했던 것이 이 시기 로마를 최전성기로 이끈 원동력으로 꼽히곤 한다.[1][2] 그러나 로마법상의 입양, 로마 귀족들의 상속, 입양, 근친혼 관행에 따라 트라야누스 일가를 중심으로 하나의 새로운 가문을 만들어 제위를 세습했기 때문에, 오현제가 의도적인 이유로 입양제도를 이용해 실력자를 채택한 다음 제위를 이었다고 보면 안 된다.

2. 역대 황제

대수 이름 재위 기간
1대 네르바 96년 9월 18일 ~ 98년 7월 27일
2대 트라야누스 98년 7월 27일 ~ 117년 8월 8일
3대 하드리아누스 117년 8월 10일 ~ 138년 7월 10일
4대 안토니누스 피우스 138년 7월 11일 ~ 161년 3월 7일
5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161년 3월 8일 ~ 180년 3월 17일
루키우스 베루스 161년 3월 8일 ~ 169년
6대 콤모두스 180년 3월 17일 ~ 192년 12월 31일

3. 역사

3.1. 네르바-트라야누스 왕조

창건자 네르바와 그의 후계자이자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실질적인 창건자 트라야누스, 트라야누스의 5촌조카이자 양자 하드리아누스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3.2. 안토니누스 왕조

과거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클라우디우스 씨족의 카이사르 가문 일가(클라우디우스, 네로)처럼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중시조 형태로 내려온 라인이다. 네르바-트라야누스 라인과 달리, 왕조를 구성한 네 명의 황제가 모두 트라야누스의 누이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혈육 내지 친인척들로 구성된 특징이 있다.[3]

4. 왕조 가계도상의 특징

아우구스투스, 리비아 드루실라 부부가 개창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여러 부분에서 가계도상 공통점이 많다고 평가받고 있다. 왜냐하면 두 왕조 모두 입양을 통한 친양부자 관계를 통해 제위를 이었고, 그 혈연관계 속에서 진행된 근친혼의 모습이 드러나거나 계획된 경우가 많다는 이유 때문이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단일 가계였던 플라비우스 왕조나 여타 동양 왕조와 달리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처럼 크게 두 가문이 결합된 형태였다. 하나는 네르바-트라야누스-하드리아누스-루키우스 베루스로 이어지는 네르바 가문(또는 트라야누스 가문) 라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안토니누스 피우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콤모두스로 이어지는 안토니누스 가문 라인이었다.

이 왕조는 아우구스투스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입양 형태로 제위 계승을 했으면서도 일정 부분 황실 구성원들 사이에 혈연 관계가 있었다. 즉 로마 귀족들 사이에서 대를 잇기 위해 활용한 친양자 제도와 족벌주의 문화 아래에서 끊임없이 혈연상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한 공통점이 있었다. 그래서 리비아 드루실라, 소 아그리피나, 폼페이아 플로티나, 대 파우스티나, 도미티아 루킬라, 루킬라 등 황실 여인들의 입김이 강했고, 이들이 황제의 제위 계승이나 프라이토리아니(근위대)를 이끄는 근위대장, 수도장관 등 주요 관직 임명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도 많이 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두 왕조 모두 이렇게 확보한 '적합한 후계자’들 중 제위에 오른 황제들, 즉 칼리굴라, 네로, 콤모두스 암군이나 폭군으로 평가받을 정도로 평이 좋지 못했고, 멀쩡하고 유능한 후계자들은 대개 요절하거나 친위쿠데타로 제위 계승권이 무산되면서 비극 속에 죽는 일이 벌어져 중간에 제위 계승 구도가 꼬이는 상황도 연출되었다. 그리고 두 왕조 모두 이런 특징 가운데 정통성이 확보된 황족들이 정치적 음모의 중심에 서게 되었고, 이 과정 중 황제 암살 미수건으로 잡음이 일어나면서 균열이 생기고, 종국적으로 서로 다른 두 가문이 하나의 새로운 가문이 된 뒤 공동운명체로 완전히 멸문했다는 부분도 연구자들에게 공통점으로 언급되고 있다.

아울러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기사계급 출신의 신참자 가문이었던 플라비우스 왕조와는 달리 수도 로마에서 큰 영향력을 가진 집정관급 원로원 계급에 속한 두 가문이 법적, 혈연적으로 결합된 형태의 이중 가문이었다. 물론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의 가문을 거슬러 올라가면 오늘날의 스페인이나 프랑스 남부 지방이 나오지만, 이들은 모두 최소한 아버지 대부터 원로원 계급에 속했고, 속주 총독 등 요직을 맡아 온 제국의 최상위 지도층 출신이었다.

왕조의 명목상의 시조인 네르바의 가문은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부터 이어진 이탈리아 세습 귀족 가문이었고, 하드리아누스의 양자 루키우스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본가 역시 공화정 시대부터 내려온 노빌레스 계급이었다. 또 황실의 두 가문 중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외가 역시 이탈리아의 오래된 노빌레스에 속했다. 이는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갈리아 혈통의 친가(아우렐리우스 풀부스 가문)를 두고 있었다고 해도 피우스의 친조부가 플라비우스 왕조 치하에서 집정관 2회, 로마 도시 장관(urban prefect)까지 지낸 인물이었고, 황제 본인은 외조부로부터 이탈리아계 귀족인 안토니누스 가문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할아버지 또한 트라야누스의 조카 손녀인 아내를 통해 황실과 인척 관계에 있었으며, 집정관 3회와 도시 장관을 지낸 당대의 엘리트였다. 따라서 이 왕조는 로마와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한 귀족 가문 출신의 황실이라는 점에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 많은 공통점이 있다고 평가받는다.

반면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와의 차이점도 있다. 가계상 차이를 보면, 서로 비슷해보여도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는 실질적인 창건자인 트라야누스의 적통을 잇기 위해 인위적으로 무리해서 하나의 가문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하드리아누스와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어찌되었던 간에 모두 트라야누스 친누나의 친혈육이거나 인척이었고, 이들의 결혼 정책에서 종국적으로 하나의 혈통을 만들려고 했던 정황이 보인다고 한다.

이에 비해 아우구스투스의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이어받은 적합한 후계자를 얻기 위해서 아내 리비아 드루실라의 본가이자 양자 티베리우스, 대 드루수스 형제의 클라우디우스 씨족을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과 인위적으로 연결해 하나의 가문으로 만들고 대를 이어 나갔다. 즉, 창건자 생전의 왕조 개창부터 지속적으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 드루실라의 직계 혈통을 얻었고, 궁극적으론 다른 성씨의 가문을 하나의 가문(카이사르 가문)으로 결합해 완성해 나갔다. 그래서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라는 것이 일반 민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졌고, 당대부터 지금까지 두 가문은 멸문 직전까지 하나의 가문이었다. 따라서 이를 반영하듯 이 왕조의 가계는 계속되는 근친혼과 복잡한 입양 관계 등으로 거미줄처럼 상당히 복잡하다.

이런 특징은 같은 세습 왕조이자 입양 관계가 많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의 가장 큰 차이점인데, 사실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역시 하드리아누스의 기본 계획[4]대로 였다면 ‘아우구스투스의 왕조처럼 연이은 근친혼으로 복잡해졌고, 긍극적으로는 ‘아일리우스 가문=안토니누스 가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런 하드리아누스의 기본 계획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에 의해 바뀌게 되었는데, 그래도 조카 루킬라와 삼촌 루키우스 베루스 간의 결혼을 봤을 때 두 가문의 혈연적 결합 시도는 나타나고 있다[5].

또 두 왕조가 이탈리아와 로마에 기반을 둔 세습 귀족 출신의 왕조였기에 황실이 이탈리아 귀족적 성향을 보였다고 해도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는 고대 로마 파트리키 가문들의 족벌주의 연합체적 성향을 띠고 있었다는 부분에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차이가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5. 평가

과거에는 동양의 요순시대 정도로 극찬을 받았던 세습왕조였다. 특히 오현제(五賢帝)로 불리는 다섯 현제가 제국의 평화를 가져다 주고, 끝없는 복리증진 및 시혜책으로 명망을 얻은 부분은 왕조의 말년이 최악의 폭군 콤모두스로 인해 상처를 입었어도 극찬을 받았다. 한 문장으로 정리해보자면, 로마인들 기준으로는 분명 여러모로 황금 시대(Saeculum Aureum)라는 표현이 걸맞았던 시기가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가 존속한 시대였다.

하지만 후기 프린키파투스의 등장과 세베루스 왕조, 3세기 황제들의 노력 등이 연구되고, 이 시기의 유물, 유적 발견과 비문 해석 등으로 인해 현대에는 과거 에드워드 기번의 예처럼 마냥 완벽한 세습 왕조로 찬사를 받지 않는다. 되려 그 평가는 3세기의 점증된 위기를 초래했고, 오현제 중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외엔 기존 문제를 심화시키거나, 위기 확대 와중에 잘못된 판단 속에서 로마 제국의 부정적 영향을 장기화시켰다고 재평가받고 있다. 따라서 현대학자들은 "순금이 아닌 도금된 평화기였다"고 평하면서, "굳이 다섯 황제 모두를 현제로 묶어야 되느냐"고 평가하기도 한다.

고대부터 당대 로마인들에게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와 안토니누스 가문이 극찬을 받은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안정기에 접어든 프린키파투스(원수정) 아래에서 황제와 원로원이 큰 감정다툼 없이 공존했고, 해당 왕조가 2세기를 대표한 최고 명망가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정치적으로는 황제와 원로원과의 관계가 전반적으로 양호했다.[6] 이런 상황의 배경에는 우선 왕조의 설립자인 네르바 본인이 원로원의 승인에 의하여 정통성을 확고히 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며, 또한 황제들이 전반적으로 원로원의 비위를 적당히 맞춰주었던 점도 컸다. 다만 유일한 예외인 하드리아누스의 경우 즉위 직후 원로원의 요인 4명을 반란 혐의로 재판도 없이 즉결처형 해버린 데다가, 재위 기간 내내 속주 순방에만 열심인 채 본진인 로마는 비워둬서 원로원과 사이가 개판이었다. 하지만 정작 실제적 권력의 측면으로 보자면 원로원의 기능 쇠퇴가 가속화된 시기이기도 한데, 이 시기 원로원은 더이상 주요한 인적 풀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황제들은 측근 관료층이라고 부를 만한 세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당장 로마 역사상 최고의 역사가이자 지식인으로 원로원 의원이었던 타키투스가 공직상으로는 별다르게 한 것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하지만 이들 기사계급도 능력이 출중하거나 황제에게 잘보여서 황제 관료로 생활한 후 황제의 추천으로 원로원 의석을 얻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원로원 계급으로 들어갔다. [7]

군사적으로도 제국은 역사상 최대의 판도로 영토를 확보하여 안정기를 맞았다. 트라야누스 황제 시기에는 다키아를 정복하여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의 참패를 앙갚음했고, 파르티아 원정까지 감행해 수도 크테시폰을 함락해버리기까지 했다.[8] 트라야누스가 파르티아 원정 와중에 사망한 후 그를 계승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더이상의 영토 확장은 제국의 역량을 감안할 때 무리수이다.'라는 판단을 내리고 파르티아에서 군사를 철수하였으며[9]이후로 로마는 팽창 정책보다는 철저히 국경 수성에 몰두하게 된다.[10] [11] 정확히 말하자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재임 기간 내내 게르만족의 외침에 시달린 나머지, 재임 말기에 게르마니아 일대를 정복하고 속주화하려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지만 전쟁 도중에 아우렐리우스가 병사하고 후임 콤모두스가 전쟁을 중간에 포기해버리면서 무산되었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콤모두스가 전쟁을 포기한 동기는 아마 그냥 막사 생활이 지겨워서(...)였겠지만 그 당시 로마의 재정 상황이나 여러 상황을 감안했을 때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이러한 정치, 군사적 안전성을 바탕으로 제국 각지에서 활발한 물자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경제력의 절정을 맞이함과 동시에 지나친 식민도시 개발 및 농작지 확대로 인해서 서서히 경제적인 엔트로피의 고갈이 이루어지던 시기도 이 시기였다.

그렇지만 여러 연구들에서 밝혀졌듯, 이 왕조 아래에서 로마 제국은 종국적으로 '3세기의 위기'라는 수렁에 빠지게 됐다. 이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아들 콤모두스만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오현제로 불리는 황제들의 지나친 확장정책, 순방을 벌이며 진행된 무리한 황제 중심의 세계주의화, 방치되기 시작한 본국 이탈리아와 서방 속주들의 경제적 침체 및 쇠퇴 등으로 그 속은 곪아 있었다. 이전 황제들과 달리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 황제들은 재정적, 경제적 취약성을 고민한 황제는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외엔 없었고, 이들마저 제국이 경제적 잠재력을 마음껏 발산하도록 환경을 조성하지 못한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일례로, 로마 제국의 경제 지표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인 이탈리아에서 황제가 기금을 풀어 중위소득 수준을 안정화시키는 알리멘타 기금 증가 필요성이 늘고, 동방에서 파산한 도시들이 속출한 시기는 공교롭게도 오현제의 절정이라고 불린 트라야누스 치세 후반부터였다. 인재풀 역시 하드리아누스 시대부터 증가한 문민화, 귀족화된 세습 귀족들의 증가 속에서 제국이 필요로 한 군필 원로원 의원, 기사계급의 감소가 가속화된 것도 이 왕조 아래에서부터였다. 로마 제국의 프린키파투스가 문제가 많음에도 황금기로 찬사하는 이들의 평가가 무색하게도, 공화정체 위에 올라탄 제정의 한계가 고질적인 문제로 확산되고 로마 원로원이 황제 입만 바라볼 정도로 무능함을 노출해 황제가 자문회의, 특별위원회를 상설화하고 프라이토리아니를 중앙 내각기구로 활용하려는 시도가 보인 시절도 이 왕조 아래에서부터였다.

괜히 여러 학자들이 입을 모아 "황금 시대가 아니라 도금 시대"로 평하는게 아니다. 따라서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과거처럼 평화기에 몸을 맡기고 흐르는 물처럼 통치했다는 주장 역시 기존 통설과 달리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대에 진행된 문제 해결 때문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또 트라야누스의 연이은 팽창전쟁과 하드리아누스의 내정개혁 및 순방 역시 "전쟁 승리와 막대한 전리품에 가려진 도금된 업적", "이전 두 세습 왕조 시대때 얻은 누적된 성과를 과실삼아 개인적 야심으로 진행된 무리한 전쟁", "효율을 가장한 문제많은 개혁","왜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시대 이전 정책들로 회귀했는지 납득이 간다" 등의 부정적 평도 많이 나오고 있다. 그래서 현대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루키우스 베루스 공동통치와 함께 시작된 연이은 위기의 시작은 이미 건강위협 신호가 중병 수준으로 닥친 상황과 비슷하다는 평도 받고 있고, 과거 찬사받던 업적들 역시 이전의 플라비우스 왕조와 이후의 세베루스 왕조들의 성과로 재평가받고 있다.

6. 여담

이중 흔히 '플라우티우스'라고 하는 마르쿠스 페두카이우스 플라우티우스 퀸틸루스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딸 안니아 아우렐리아 파딜라와 결혼해 안토니누스 가문의 사위가 되었다. 그는 장인과 처남 콤모두스 시대 동안 두 황제에게 신임을 받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경우에는 여러 사위 중 그를 적극 밀어줬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장인 사망 당시 국장 수행 멤버였는데, 그럼에도 아내의 언니 루킬라가 콤모두스 암살 미수 사건을 일으킬 당시 개입하지 않아 마르쿠스의 사위 중 목숨을 건졌다. 플라우티우스는 콤모두스 암살 당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의 몇 없는 남성 황족이자 마르쿠스의 사위임에도 제위에 욕심을 안 냈는데,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제위를 돈으로 사고,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로마로 진군하자 이런 모습을 보고 아예 은퇴선언을 해버리며, 가족들과 함께 시골 별장에 들어가버렸다. 하지만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그가 자신의 진군 당시, 국법에 따라 이는 절대 해서는 안되는 행동이라고 반대한 것을 빌미삼아 205년 사형을 명령한 뒤 그를 살해했다.


[1] 다만 이게 정말로 중요한 원동력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이러쿵 저러쿵 말이 많다. 이전 로마 역사에서도 공화정, 제정 시대 중 플라비우스 왕조 정도를 제외하면 양자 관계로 권력이 세습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우선 카이사르부터가 아우구스투스를 양자로 입양했으며, 아우구스투스 역시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입양했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모두 훌륭하게 통치를 수행해냈다. 또한 오현제 시기 황제랑 같은 해에 집정관이 된 인물들을 보면 대부분 황제와 인척, 친척이다. 오현제도 우리랑 같은 사람이었으며 같은 인물이면 측근, 같은 측근이면 친척, 같은 친척이면 가족을 더 선호하였다. [2] 그리고 사실 양자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게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이전 황제들은 모두 친자가 없었다. 즉 제위를 세습하고 싶어도 세습할 수가 없었던 것. 하지만 양자가 아니더라도 족보를 펼쳐보면 네르바 빼고는 직•간접적으로 다 연결되어 있다. [3]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콤모두스는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후손이며, 안토니누스 피우스와 루키우스 베루스는 결혼을 통해 울피아 마르키아나의 일가와 연결된 인척 관계가 된다. [4] 하드리아누스는 후계자로 입양했다가 요절한 아일리우스 카이사르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딸 파우스티나와 결혼시킬려고 했다. [5] 이렇게 된 원인은 안토니누스 피우스가 하드리아누스가 짜놓은 결혼 계획을 임의적으로 변경해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이다. [6] 양호해야지 좋은 황제로 칭송된다. 명군이거나 어느 정도 업적이 있었음에도 원로원과 대립각을 너무 세워서 폭군 취급받는 황제도 많았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티베리우스였다. [7] 2세기쯤 되면 공화정 시기부터의 명문 귀족은 많이 남지 않았고, 다수의 원로원 의원들의 가계도를 올라가면 기사계급 출신이 많았다. [8] 여담이지만, 파르티아의 수도를 함락한 후 트라야누스가 한 말은 " 내가 젊었으면 인도까지 갈 텐데.."였다고 한다. [9] 시오노 나나미 시각이고, 그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다.시오노 나나미가 까일 부분이 많은 건 맞지만 이건 로마 사학자들의 전반적인 시각이다. [10] 원수정 시기에 제국확장을 포기한 적이 없다. 애초에 라인•도나우 강도 국경선이 아니었고 강을 따라 방어하지도 않았다. 로마군의 요새는 강 너머 깊숙이까지 있었고 주둔한 흔적도 꾸준히 발견된다. 하드리아누스는 그런 요새들을 강화한 것뿐이었으며, 이후 로마는 능력만 되면 확장하려고 했다. 상황과 관리 역량이 부족했을 뿐. [11] 다만 하드리아누스의 뒤를 이은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경우 '너무 국경 자체를 지키는 것에만 몰두하다가 국경 밖 게르만족의 세력 구도가 대격변을 일으키는 것을 놓쳤고, 이로 인해 후임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그 똥을 치워야만 했다.'라는 비판을 사기도 한다. 이에 대한 갑론을박은 안토니누스 피우스 항목 참조. [12] 오늘날에는 뇌와 관련된 급성질환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밤낮이 자주 뒤바뀌는 불규칙적인 생활 습관이 가장 큰 이유로 분석되고 있다. [13] 이 입양선언은 정치적 정통성을 얻기 위한 행동이었고, 이 당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간의 내전이라는 특수성도 고려해봐야 한다. [14] 고르디아누스 1세. 고르디아누스 2세, 고르디아누스 3세 [15] 고르디아누스 3세의 친부가 명문 귀족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 휘하 부관 발부스를 시조로 하는 이 발부스가 맞는지 불분명하며,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에서 내세우고 있는 주장일 뿐이다. 현대 학자들은 이 기록이 워낙 위서인데다 이런 명문가 귀족이 친부라면 당장 로마인들의 관습과 전통상 풀네임에 그 흔적이라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발부스의 아들이 고르디아누스 3세라는 이야기는 고르디아누스 가문의 정통성을 위해 후대에 조작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