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벤허》의 개선식 장면[1] |
1. 개요
凱 旋 式 / Victory Parade전쟁이나 전투 등에서 승리한 장군이나 군대 또는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를 치하하고 승리를 기념하기 위한 행사. 고대 로마의 개선식이 가장 유명하다. 개선식을 위해 건설된 문을 개선문이라 한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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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로마에서 묘사된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개선식[2] |
그는 올림피아에서 전 그리스를 감격의 도가니로 만들었다.
그는 개선식을 통해 호사로움과 부유함, 힘과 정신을 뽐냈으며 우승자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다른 도시들을 내려다보았다.
소크라테스
개선식은 예로부터 장군과 군대, 또는 선수에겐 더할 수 없는 영광이요, 명예인 행사였다. 그 역사는 고대 그리스 올림픽에서 우승한 선수를 축하하며 각 도시국가에서 치르던 행사였다. 그 선수들에게는 물질적 보상과 특권이 주어졌고, 선수들에게도 크나큰 명예를 안겨주었다.그는 개선식을 통해 호사로움과 부유함, 힘과 정신을 뽐냈으며 우승자를 부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다른 도시들을 내려다보았다.
소크라테스
개선식은 로마 지배층의 변화에 따라 크게 왕정, 공화정, 제정으로 분류된다.
이러한 개선식은 국가가 발전하며 전쟁이 잦아지자 곧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나 군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방법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특히 고대 로마에서의 개선식은 장군에게 군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을 거머쥐는 일이었다. 고대 로마에서는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가 최초로 개선식을 열었다.
공화정 시절에는 집정관이나 법무관 등 군단을 이끌고 출정할 수 있는 직무의 사람들이, 제정 시대에는 거의 황제나 황족들이 주로 개선식을 치렀다.
왕정에서 개선식은 주로 국민 통합의 기폭제로 쓰였다. 개선식의 최종 도착지로 유피테르 신전을 택한 것은 로마가 신들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여러 부족들을 뭉치게 하는 효과를 노린 것이다.
공화정 시대에는 정치 선전의 목적이 더욱 짙어지며 이 때문에 더욱 화려해지고 개선장군이 유권자인 시민들에게 선물공세를 하는 것이 관례로 정착되다시피 하였다. 개선장군은 말 4마리가 모는 채리엇('콰드리가')을 몰고 로마 성문으로 입성하여 로마 시내를 행진하고 포룸 로마눔에 당도한 후 유피테르 신전에 제물을 바쳤으며, 그의 병사들은 임페라토르를 외치며 대오를 갖추어 행진했다. 잡아온 적의 군주와 고위급 포로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로 끌려오는 조리돌림이 행해지고 빼앗은 노획품 중 값진 물건들이 수레에 실려 로마 시민들에게 공개되어 개선장군의 무공을 생생히 선전했다. 개선장군은 시민들에게 선물 명목으로 돈을 뿌리기도 했다. 이러한 관례 등으로 개선식이 민심에 끼치는 파급력이 커졌으며, 이를 적절히 이용한 사람이 바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였다.[3]
로마 최악의 위기였던 포에니 전쟁에서는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 등 명장들이 많이 치렀고 이후 티베리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 루쿨루스 그리고 공화정 말기에는 마리우스, 술라, 폼페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이 치렀다. 마르쿠스 아틸리우스 레굴루스는 개선식을 치를 뻔 했지만 카르타고가 고용한 용병 크산티푸스에게 패하여 바구니에 넣어져 코끼리에 걷어차였다(...).[4]
제정시대가 시작된 기원전 29년 이래,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사실상 군단이 딸린 모든 속주의 군사책임자가 됨에 따라 어떤 사령관이 전공을 세우더라도 무조건 아우구스투스에게 개선식의 권리가 생기는
아우구스투스 이래 개선식은 황제의 전유물이라는 공식이 관례화되면서, 중기 이후부터 황제의 존엄과 권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이유로 황제나 황족에게만 허용되었고, 황제는 조그만 승리에도 개선식을 치르게 해 황제라면 거쳐야 할 필수요소처럼 작용하였다.
개선식을 치른 대표적인 황제 / 황족에는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게르마니쿠스, 칼리굴라, 클라우디우스 1세, 베스파시아누스, 티투스,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이 있다. 황족이 아닌 장군의 경우는 4두 전차 대신 백마를 타거나 도보로, 병사들을 거느리지 않고 혼자 로마 시내를 행진하는 약식 개선식(ovation)을 거행하기도 했고, AD 1세기 이후에는 약식 개선식도 없이 개선장군 훈장만 수여하고 끝내는 경우가 점차 많아졌다. 약식 개선식을 거행했던 장군들 목록
개선식의 풍습 중에는 재미있는 점도 있는데, 개선식에서 행진하는 장병들은 개선식의 주인공인 장군을 놀리는 구호를 외치는 풍습이 있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첫 번째 이유는 개선장군이 너무 교만해지면 신들에게 질투를 사서 다음 전투에서 질 수 있었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함이었고, 두 번째 이유는 당당하게 대중 앞에 선 개선장군을 신나게 놀려먹음으로써 개선식 행사의 분위기를 더욱 재미있게 만들고 시민들에게 로마의 군대는 친절하고 유쾌한 시민의 군대라고 홍보하기 위해서였다. 가령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개선식 때는 "시민들이여 마누라를 숨겨라. 대머리 난봉꾼이 나가신다네!"와 "카이사르는 갈리아를 정복했고, 니코메데스[5]는 카이사르를 정복했다!"라는 내용의 구호를 외쳤다.[6] 그리고 개선장군이 전차에 타고 있으면 그 뒤에서 월계관을 개선장군 머리 위에 받들고 있는 노예가 있는데, 이 노예는 개선식이 끝날 때까지 "당신도 한낱 인간입니다."라는 말을 계속 되풀이해 장군이 교만해지는 것을 방지했다는 기록도 있다. 여기서 나온 격언이 바로 Meme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 즉 메멘토 모리이다. 그리고 위에 실린 드라마 ROME의 한 장면처럼 개선장군은 얼굴을 붉게 칠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고대 에트루리아 시대부터 내려오던 관습이었다고.
올림피아 제전경기에서 우승한 선수들은 고향의 도시에 돌아오면 성대한 개선식을 치르기도 하였다.
참고로 개선식은 로마에서만 치러졌는데 안토니우스가 로마 시민에게 욕을 먹은 것 중 하나도 개선식을 로마가 아닌 알렉산드리아에서 치른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그 개선식에서 로마를 양분하여 클레오파트라의 두 자식에게 물려주겠다고 한 것.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동로마 제국 시대에도 이 개선식 행사는 장소만 로마 시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바뀐 채 계속 유지하였다. 동로마의 황제 이라클리오스 역시 사산 왕조의 군대를 대파한 뒤 되찾은 성십자가를 앞세우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개선식을 거행했는데,[7] 그 자리에서 원로원은 이라클리오스에게 새로운 스키피오라는 호칭을 부여하며 황제의 위업을 칭송했다. 한편 예시를 제정도 아니고 아예 공화정 시절의 스키피오로 들었다는 것에서 짐작이 되듯이 이 당시의 7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동로마와 종래의 라틴 · 이탈리아적인 고대 로마의 연결고리는 확실했다고 볼 수 있겠다.
[1]
이때는 제정 로마 시기인데 아리우스
집정관은 황제가 아니기 때문에 아래에 서술된 것처럼 이 장면은 사실
재현 오류다.
[2]
개선식의 클라이막스에서 카이사르의 명령으로 처형당하는 포로는 갈리아 전쟁에서 카이사르에 맞서 끈질기게 저항했던 아르베르니족의 족장인
웨르킨게토릭스이다.
[3]
하지만 카이사르는 자신의 관용을 끝까지 거부하고 자살한
소 카토에게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개선식에서 카토가 할복자살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을 공개전시하여 카토를 능욕했다가 원로원 계급의 분노를 불러오기도 했다.
[4]
단, 레굴루스는 카르타고측에 포로로 잡혀 평범한 대우를 받다가 현지에서 자연사했고 이걸 로마 공화정이 선전 목적으로 사실을 왜곡했다는 역사적 연구도 존재한다.
[5]
비티니아 왕국의 왕인
니코메데스 4세. 카이사르는 젊은 시절 로마 특사의 자격으로 니코메데스의 궁전에서 오래 머물렀는데, 이 때 카이사르와 니코메데스가
동성애 관계였다는 스캔들이 터졌다. 이 이야기는 카이사르가 죽은 뒤까지도 유행했다.
[6]
그리고 이러한 조롱을 듣는 개선장군 또한 이를 문제 삼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다만 카이사르는 게이 드립까지는 웃어넘겼지만 대머리 소리는 정말 기분 나빠 했다고...
[7]
개선식 후 성십자가는
예루살렘으로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