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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로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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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겔로스 왕조
Δυναστεία των Αγγέλων
파일:앙겔로스 가문의 문장.png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시기 1185년~ 1204년
성씨 앙겔로스(Αγγελος)
창건자 이사키오스 2세
주요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알렉시오스 3세
알렉시오스 4세
알렉시오스 5세

1. 개요2. 역사3. 역대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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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의 세습왕조. 1185년부터 1204년까지 19년간 제국을 통치했다. 숱한 내우외환에 시달리다 4차 십자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면서 제국이 일시적으로 멸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2. 역사

2.1. 이사키오스 2세(1185~1195)

알렉시오스 1세의 딸 테오도라와 결혼한 후 유력한 장군으로서 중용받은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의 손자이자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의 6남이다. 그는 1185년 자신을 잡으려든 안드로니코스 1세의 심복 스테파노스 하기오크리스토포리테스를 엉겁결에 죽인 뒤, 아야 소피아로 피신했다가, 안드로니코스의 폭정에 폭발한 시민들의 추대로 황위에 올랐다. 당시 시칠리아 왕국군이 트라키아까지 쳐들어왔는데, 황제는 알렉시오스 브라나스에게 전권을 맡기고 남은 병력을 지원군으로 보내며 격려했다. 제국군은 브라나스의 지휘하에 전열을 정비한 뒤, 시칠리아군을 마케도니아로 밀어냈다. 시칠리아군이 강화를 제의했지만, 브라나스는 묵살하고 총공격을 가해 시칠리아군을 괴멸시켰다. 이후 이사키오스는 헝가리 왕 벨러 3세의 장녀 헝가리의 머르기트를 자신의 두번째 아내로 맞이하고, 여동생을 몬페라토 공국에 시집 보내는 등 외교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시칠리아군과 전쟁을 벌이면서 재정이 휘청거리자, 비용 마련을 위해 불가리아에 무거운 세금을 매기고 장정들을 징집했으며, 심지어 새로 황후를 맞아들인 뒤 결혼 축의금을 마련하라는 명분으로 특별세를 부과했다. 여기에 매관매직을 공개적으로 벌였고, 이를 통해 관직을 얻어낸 자들이 본전을 뽑으려고 민중을 수탈하면서, 자연히 민심은 점차 황실로부터 등을 돌렸다. 또한 이사키오스 2세는 서방인들을 총애해 그들에게 갖가지 이권을 부여했고 서방인들은 이러한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동로마인들을 괄시했다. 결국 제국 내에서 동로마인과 서방인간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1185년 불가리아의 귀족 토도르 페터르와 아센 형제는 이사키오스 2세에게 세금 경감과 자치권, 그리고 세금을 내는 데 필요한 수도원 수입을 받기 위해 하이모스 산 근교의 토지를 하사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사키오스 2세는 거부했고, 황제의 삼촌인 요안니스 두카스는 아센의 얼굴을 때리며 요구가 너무 무례하다고 꾸짖었다. 형제는 메시아로 돌아간 뒤 반란을 꾀했지만, 동료들은 쉽사리 그들을 따라 제국에 맞서려 하지 않았다. 그해 여름, 살로니카의 성 디미터르의 이콘이 터르노보에서 발견되었다. 이에 토도르와 아센 형제는 성 디미터르가 불가리아를 돕기 위해 살로니카를 포기했다고 선언했다. 그들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제국에 반기를 들었고, 가혹한 징세에 시달리던 민중이 대거 호응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수도였던 프리슬라프에는 상당 규모의 제국군이 주둔하고 있어서 즉시 점령할 수 없었기에, 반군은 타르노보에 새로운 수도를 세웠다. 토도르는 차르만이 사용하던 휘장을 채택하고 자신을 페터르 4세로 자칭했고, 아센 역시 이반 아센 1세로 칭했다.

이사키오스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반란 진압에 나서 반란군을 다뉴브 강 이북으로 밀어냈고, 성 디미터르의 이콘을 탈취했다. 그러나 아센 형제는 다뉴브 강 이북에서 쿠만족과 연합하여 재차 공세를 개시, 이전의 영토를 되찾았을 뿐만 아니라 모이시아 전역까지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이에 황제는 반란 진압을 군사에 밝은 삼촌 요안니스 두카스에게 맡겼고, 요안니스는 반란군을 상대로 여러 번 승리했다. 그러나 황제는 요안니스 두카스가 반란을 꾀하고 있다고 의심해 경질하고 처남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를 지휘관에 선임했다. 칸타쿠지노스는 불가리아 반란군 토벌에 착수했으나 매복에 걸려 대패하고 말았다. 이에 이사키오스 2세는 패전의 책임을 물어 그를 해임하고 알렉시오스 브라나스를 선임했다. 그러나 브라나스는 부하들의 추대로 황제를 자칭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했다. 황제의 또다른 처남 몬페라토의 콘라드가 브라나스를 격파해 반란을 막아낼 수는 있었지만, 그 사이에 불가리아 반란군은 입지를 확고히 다져놓았다. 이후 제국은 반란군과 맞붙어 몇차례의 작은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험한 산지와 쿠만족의 도움을 받은 반란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하는 데 실패했고 결국 1187년에 평화협정을 체결해 2차 불가리아 제국을 사실상 인정했다.

1187년 10월, 살라흐 앗 딘이 기독교의 성지 예루살렘을 함락시켰다. 이에 제3차 십자군 원정이 결성되었고, 1189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1세가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이사키오스에게 협조를 요구했지만, 이사키오스는 그가 불가리아와 손을 잡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지도 모른다고 판단해 비협조적인 자세로 대했고 급기야 살라흐 앗 딘과 극비리에 군사 협정을 체결하기까지 했다. 이 정보가 새면서 프리드리히 1세의 귀에 들어가자 양측의 갈등은 점차 고조되었다. 그래도 예루살렘으로 얼른 갈 생각만 하고 있던 프리드리히 1세는 이사키오스 2세에게 사절을 보내 "제국에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으니 아군이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이사키오스는 인질로 삼아 버렸다. 이에 격노한 프리드리히는 즉시 디디모티코를 점령하는 한편 대규모 함대로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할 준비에 착수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프리드리히 1세의 강경한 반응에 당황하여 인질로 삼았던 사절을 돌려보내고 용서를 구하는 한편, 보스포러스 해협 대신 콘스탄티노플에서 좀더 떨어진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병력을 이동시킨다면 협조할 용의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에 프리드리히 1세는 이를 수락하고 1189년 겨울을 동로마 제국 내에서 월동한 뒤 1190년 5월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 아나톨리아로 진격했다.

1190년, 이사키오스는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재개하여 타르노보를 포위했다. 그러나 수개월에 걸친 공격에도 요새는 함락되지 않았고 설상가상으로 쿠만족 지원군이 근접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이에 이사키오스 2세는 전의를 상실하고 철수했다. 그러나 페터르 4세의 아우 아센이 트랴브나에 매복해 있다가 이사키오스 2세의 동로마군을 습격했고, 황제는 군대와 자금, 황제관과 황복을 죄다 내팽개치고 홀로 도주했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다시 일어서기 힘들 정도의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페터르, 아센 형제는 쿠만족과 함께 동로마 제국의 영역을 잇달아 공격하여 바르나와 포모리를 약탈하고 트리아디사를 파괴했으며, 불가리아의 성인인 이반 릴스키의 유물을 확보했다. 1192년, 이사키오스 2세는 사촌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두카스를 사령관으로 임명하여 트라키아에서 불가리아 약탈부대를 격파했다. 그러나 그는 반란을 일으켰다가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진압되어 실명형에 처해졌다.

1193년, 아센은 형 페터르와 함께 트라키아를 침공했다. 이사키오스 2세는 알렉시오스 기도스와 바실리오스 바티치스를 파견했지만, 형제는 이들을 아르카디오폴리스 전투에서 섬멸하고 폴로브디프를 포함한 트라키아의 일부 지역을 공략했다. 1195년 4월 8일, 킵셀라에서 군대를 소집해 트라키아를 탈환하기 위한 원정을 준비하던 중, 형 알렉시오스 3세에게 붙잡혀 실명형에 처해지고 감옥에 갇혔다.

2.2. 알렉시오스 3세(1195~1203)

동생을 폐위하고 황위에 오른 알렉시오스 3세 가짜 알렉시오스 2세의 반란으로 민심이 흐트러진 아나톨리아를 안정시켰다. 또한 거듭된 전쟁으로 인해 극도로 악화된 재정을 재건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고, 돈을 많이 잡아먹는 해군을 대폭 축소했다. 1198년 일찍이 제국에 귀순했던 이반코가 불가리아 차르 칼로얀의 회유를 받아들여 반기를 들자, 마누일 카미치스를 보내 진압하게 했으나 오히려 마누일이 잡혀버렸다. 카미치스는 몸값을 보내달라고 청했지만, 알렉시오스 3세는 응하지 않았다. 카미치스는 이에 격노하여 칼로얀의 지원하에 사위 도브로미르 크리소스[1]와 함께 동로마 제국에 쳐들어가서 펠라고니아와 프릴레프를 점령하였다. 이후 크리소스는 프릴레프에 남았고, 카미치스는 테살리아로 진격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우선 트라키아의 콘스탄티아 요새를 파괴하고 바르나를 공략한 이반코와 접촉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제안했다. 이반코는 젊은 약혼자를 보내고 자신의 영역을 인정할 것이며, 황제가 자신을 해치지 않는다고 성경에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황제는 그렇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사위 알렉시오스 팔레올로고스와 테오도로스 라스카리스를 파견했다. 이반코는 협약을 논의하기 위해 그들을 만나러 갔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1201년 7월 31일 비만자 요안니스 콤니노스가 수도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궁궐을 장악하는 바람에 실각할 뻔했지만, 바랑인 친위대의 활약으로 진압했다. 또한 마케도니아 동부의 스믈레나 테마 총독이었던 요안니스 스피리도나키스의 반란을 진압했다.

1201년 가을 카미치스의 난을 진압하러 출진하면서, 크리소스와 접촉해 손녀 테오도라를 아내로 삼게 해주겠다고 제의했고, 크리소스는 곧 이에 동의하여 카미치스와 관계를 끊고 펠라고니아와 프릴레프를 넘겨줬다. 이에 동시에 환관인 요안니스 오이노폴리티스는 테살리아로 가서 카미치스에게 신분을 원상 회복하게 해줄 테니 귀순하라고 제안했다. 카미치스가 거절하자, 알렉시오스 3세는 친히 테살리아를 침공했다. 카미치스는 이에 맞섰으나 패배했고, 스타노스 요새로 피신했지만 곧 함락당하자 불가리아로 도망쳤다. 하지만 비슷한 시기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레온 스구로스가 아티카, 보이오티아, 코린트 일대를 석권하는 걸 막지 못했다. 그러던 1203년 7월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쳐들어오자 끝까지 항전했지만, 베네치아군이 후퇴하면서 지른 불이 시가지에 번지면서 절망한 시민들의 질책과 원망을 듣자, 더 버티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그해 7월 18일 수도를 탈출했다. 이후 시민들이 성문을 열면서, 십자군이 도시에 입성하고 알렉시오스 4세를 옹립했다.

2.3. 알렉시오스 4세(1203~1204)

이사키오스 2세의 장남 알렉시오스 4세는 부친이 실명형에 처해진 뒤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옥고를 치르다가 석방된 후 누이 이리니의 재혼 상대였던 슈바벤의 필립에게 의탁했다. 4차 십자군 베네치아 공화국의 의뢰로 자라를 함락한 후 정박하고 있을 때, 그가 찾아가서 자신과 아버지 이사키오스를 복위시키는 조건으로 다음 세 가지를 제시했다.
1. 십자군이 지고 있던 빚 탕감과 이집트 원정을 위한 비용으로 20만 마르크를 지불한다.
2. 이후 성지 수호를 위해 병사 1만과 기사 500여 명을 파견한다.
3. 교황의 수위권을 인정하고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 교회와 통합시킨다.

십자군은 이에 응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해 공성전을 벌인 끝에 7월 18일 도시에 입성했다. 이후 눈먼 아버지를 감옥에서 꺼내 공동 황제로 삼았지만 실권은 자신이 쥐었다. 그러나 정작 황제가 되고 나니 3가지 약속 모두 준수하는 게 불가능했다. 제국의 국고는 텅 비어 있어서 20만 마르크를 당장 마련할 길이 없었고 불가리아와의 전쟁과 오랜 내전으로 제국군은 사실상 궤멸되어서 병사 1만 명, 기사 500명을 파견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또한 당시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 간의 대립은 수백 년간 이어진 해묵은 문제인데 하루아침에 동방 정교회더러 교황의 우위를 인정하고 통합하라는 것은 제국의 정교회 성직자들과 신자들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알렉시오스는 일단 새로 세금을 부과하고 금을 징발하여 20만 마르크를 어떻게든 마련해보려 했다. 백성들은 황제가 빚을 갚으려고 특별세를 거두는 데 불만을 터트렸고 주교들은 그가 성당을 장식하고 있는 금까지 거두어 녹이는 것에 불만을 품었다. 게다가 황제가 자신들을 교황의 산하로 복속시키려는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 탄로나자, 정교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알렉시오스의 인기는 점점 추락했고 십자군과 콘스탄티노플 시민들 간의 감정 대립은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십자군 병사들 몇명이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성 이리니 성당 뒤편의 사라센 지구에 있는 조그만 모스크를 약탈하고 불을 질러 잿더미로 만들어버리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 불길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 이후 48시간 동안 콘스탄티노플은 화재에 휩싸였다. 마침 알렉시오스 3세를 체포하러 출격했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알렉시오스 4세는 폐허로 변한 수도에 경악했다. 백성들은 이젠 황제에게 살의에 가까운 적의를 품었고 상황은 극한에 달했다.

1204년 1월 25일, 원로원 의원, 성직자, 일반 백성들이 아야 소피아에 모여 알렉시오스를 폐위하고 후임자를 선출하는 문제를 논의했다. 그들은 사흘 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하다가 니콜라오스 카나보스라는 인물을 선출하려 했지만, 니콜라오스는 고사했다. 이 상황을 지켜본 알렉시오스 두카스는 어느 날 한밤 중에 황제의 침실로 가서 황제를 깨우고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알렸다. 그리고는 유일한 탈출구라면서 황제의 몸을 긴 외투로 감싼 뒤 옆문으로 황궁을 나와 동료 공모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알렉시오스는 그곳에서 붙잡혀서 족쇄로 손발이 묶인 후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고, 두 차례 독살 시도를 넘겼으나 결국 활줄로 교살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눈 먼 아버지 이사키오스 2세도 죽었다.

2.4. 알렉시오스 5세(1204)

알렉시오스 4세 이사키오스 2세를 처단한 알렉시오스 5세는 황위에 오른 후 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 지도부에게 전임 황제의 채무 조건은 무효이며 동로마 제국과는 관련이 없다며, 당장 수도에서 떠나라고 요구했다. 이에 십자군 지도부와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분노하여 콘스탄티폴리스를 공격했다. 알렉시오스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도시가 함락되자 4월 13일 탈출하였다. 그는 모시노폴리스에 가서 전임 황제인 알렉시오스 3세와 재회한 뒤, 이전부터 정부 관계였던 알렉시오스 3세의 딸 에우도키아 앙겔리나와 결혼하려 하였다. 그러나 알렉시오스 3세는 그를 붙잡아서 실명형에 처한 뒤, 십자군이 그를 잡도록 내버려뒀다. 알렉시오스 5세는 폐인이 된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끌려간 후 온갖 조롱을 받다가 테오도시우스 기둥에서 십자군에게 밀려 추락사했다.

한편, 알렉시오스 3세는 십자군의 추격을 피해 테살로니키, 테살리아, 테르모필레, 코린토스까지 이동하였고, 레온 스구로스를 회유하여 십자군에 저항하게 하기도 했다. 그러나 1204년 8월 코린토스를 떠나려다 체포되었고, 테살로니키로 끌려갔다가 다시 탈출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탈리아의 몬페라토에 이송되었다. 1209년 이피로스 전제군주국의 초대 데스포티스 미하일 1세 콤니노스 두카스의 도움을 받아 겨우 풀려났고, 아내 에우프로시나 두케나 카마테리나를 이피로스에 두고 니케아 제국으로 건너가 사위 테오도로스 1세에게 제위를 넘기라고 요구했다. 테오도로스가 거부하자, 룸 술탄국으로 달아나서 술탄의 원조를 받고 1211년 니케아 제국으로 쳐들어갔다. 그러나 테오도로스에게 참패하였고, 그는 미처 탈출하지 못하고 붙잡힌 뒤 실명형에 처해졌다. 이리하여 앙겔로스 왕조는 부활의 가능성을 완전히 상실하고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3. 역대 황제

대수 이름 재위 기간
1대 이사키오스 2세 1185년 9월 12일 ~ 1195년 4월 8일
2대 알렉시오스 3세 1195년 4월 8일 ~ 1203년 7월 18일
3대 알렉시오스 4세 1203년 7월 18일 ~ 1204년 1월 28일
3대 이사키오스 2세(복위) 1203년 7월 18일 ~ 1204년 1월 28일
4대 알렉시오스 5세 1204년 2월 5일 ~ 1204년 4월 13일


[1] 이반 아센 1세의 조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