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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제87대 황제
테오필로스 Θεόφιλος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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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필로스 (Θεόφιλος) |
출생 | 812년 |
동로마 제국 | |
사망 | 842년 1월 20일 (향년 30세) |
동로마 제국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829년 10월 2일 ~ 842년 1월 20일 (13년) | |
전임자 | 미하일 2세 |
후임자 | 미하일 3세 |
부모 |
아버지 :
미하일 2세 어머니 : 테클라 |
배우자 | 테오도라 |
자녀 | 미하일 3세 |
종교 | 기독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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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느님을 사랑하는 자.[1]
로마 제국의 87대 황제이자 성상 파괴주의를 제창한 마지막 황제이다.
당시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바스 왕조와 2번이나 전쟁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일방적으로 밀리지만은 않는 모습을 보이며 동로마 제국이 중흥기에 다가섰음을 알린 황제이다. 다만 동맹국 세르비아의 성장, 불가리아 제1제국의 칸 말라미르와 아바스 조의 칼리파 알 마문이 급사하는 등 천운이 따르기도 했다. 국력의 회복과 더불어 문예 부흥도 시작되었다.
2. 생애
2.1. 팔방미인 황제
812년경 아모리아 왕조의 창시자인 미하일 2세와 테클라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820년 12월 25일 아버지가 황제 레온 5세를 성찬예배 도중 시해하고 황위에 오르면서 8살의 나이에 황위 후계자가 되었다. 그는 열렬한 성상 파괴주의자이자 문법학자였던 요안니스 하릴라스로부터 우수한 교육을 받았기에, 무식하다는 평을 받은 아버지와는 달리 상당한 지식과 교양을 갖췄다. 음악과 미술 등 예술에 식견이 있었으며, 신학에 열정이 있었고, 철저한 군사 훈련을 받아 군사적 역량도 상당했다. 또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히포드롬에서 열린 전차 경주에 한 차례 참여할 정도로 활발한 성격을 보유하기도 했다.829년 10월 2일 미하일 2세가 사망하면서 17세의 나이에 황위에 올랐다. 다소 어린 나이에 황위에 올랐기에 미하일 2세의 두번째 황후이자 테오필로스의 계모인 에우프로시나가 초기에 통치를 도왔다. 830년, 에우프로시나는 18세의 황제를 위해 신부 경연대회를 열었다. 그 결과, 대단한 미녀였다고 전해지는 테오도라가 황후로 선출되었다. 이후 테오필로스가 빠르게 황제로서의 업무에 적응하자, 에우프로시나는 정계를 은퇴하고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그는 정의로운 황제가 되는 데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권력을 잡자마자 레온 5세를 성찬예배 때 잔혹하게 살해한 자들을 규탄하고 처벌했다. 또 한 번은 시리아에서 막대한 사치품을 실은 채 콘스탄티노폴리스 항구로 찾아온 배가 있었다. 테오필로스가 이 배가 누구에게 화물을 전달하러 왔는지를 묻자, 선장은 황후에게 전달하러 왔다고 답했다. 이에 테오필로스는 배를 불태운 뒤 테오도라 황후에게 먼 속주에서 물건을 사지 말고 콘스탄티노폴리스 시장에서 구매하라고 권고했다.
또한 그는 일주일에 한 번씩 수도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민중의 고충을 듣고 그들을 괴롭힌 이들을 가차없이 처벌했다. 한 번은 한 과부가 테오필로스에게 자신이 시 교구장에게 말을 빼앗겼다고 호소했다. 테오필로스는 즉시 조사를 명령했고,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즉시 그 고위관리를 엄히 처벌한 뒤 과부에게 말을 돌려줬다. 한편, 그는 변장한 채 시장에 숨어서 상인들이 물건을 정당한 가격에 팔고 있는지를 확인하곤 했다고 한다. 그리고 황제는 학식이 뛰어난 사람 답게 가능한 많은 이가 우수한 교육을 받기를 희망해 수도에 있는 대학을 늘리고 수도원의 필사본을 집필하는 필사실을 늘렸으며, 교사들이 국가로부터 급여를 받도록 보장했다.
2.2. 아바스 전쟁
테오필로스는 아랍 세력이 수시로 쳐들어와서 큰 타격을 입히곤 했던 아나톨리아 방비에 힘을 기울였다. 830년, 그는 아나톨리콘 테마의 일부를 카파도키아 테마로 분리했다. 카파도키아 테마는 서로는 타타 호, 북으로는 할리스 강, 남으로는 타우로스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역이었다. 그는 테마를 가로지르는 타우로스 산맥에 20개 이상의 요새를 설치하거나 강화했다. 특히 시리아에서 아나톨리아로 진입하려면 일반적으로 통과해야 하는 킬리키아 관문의 방위를 대폭 강화했다. 칼리파 알 마문은 이에 대응해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가 카파도키아 테마의 수도인 코론을 점령하고 순두스와 시난 등 2개 요새를 함락시킨 뒤. 지난날 동로마 제국으로 끌려갔던 백성들을 도로 아바스 왕조의 영역으로 데려갔다.831년 봄, 킬리키아의 아랍인들이 아다타 고개를 통해 아나톨리아로 진입했다. 테오필로스는 즉시 기병대를 이끌고 이들을 요격하여 하시아논 인근에서 적을 급습해 섬멸하고 7,000명의 포로를 잡았으며, 뒤이어 타르수스를 공략하고 무슬림 1,600명을 살해했다. 그 후 금문교를 통해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서 아야 소피아로 행진하며 군중의 환호를 받은 뒤, 승리를 기념하는 경마 대회를 개최했다. 알 마문이 이에 보복하고자 그해 가을 킬리키아로 이동했을 때, 테오필로스로부터 평화 협약을 맺을 용의가 있다는 전갈과 함께 500명의 아랍인 포로를 받았다. 그러나 알 마문은 이를 무시하고 형제 알 무타심, 아들 알 아바스와 함께 각각 한 개 분견대 씩 거느린 채 카파도키아로 진입하여 티아나 요새를 공략하고 테오필로스가 이끄는 구원 부대를 격파한 뒤 상당량의 전리품과 포로를 확보한 후 귀환했다.
테오필로스는 다시 사절을 보내 평화 협약을 맺자고 청했지만, 알 마문은 서신에서 동로마 황제가 칼리파보다 우선 순위로 두었다는 이유로 거부했다. 832년 봄, 아랍군은 다시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이 지역의 주요 군사 거점인 로우론 요새를 포위했다. 그러나 요새가 좀처럼 함락되지 않자, 알 마문은 부하에게 포위를 맡긴 뒤 다마스쿠스로 귀환했다. 로우론 수비대는 야간 기습을 가해 적장을 포로로 잡는 등 분투했지만 포위망을 풀지 못했다. 그해 9월 테오필로스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왔지만 아랍군에게 패해 철수했고, 결국 로우론 수비대는 신변의 안전을 보장받은 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는 대가로 항복했다. 아랍군은 그해 겨울을 로우론에서 보내면서 카파도키아를 점진적으로 공략하고자 했다.
테오필로스는 이러한 상황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평화 협약을 맺자고 호소했지만, 알 마문은 이슬람교로 개종하지 않으면 평화는 없다며 못을 박았다. 833년 5월, 알 아바스가 이끄는 아랍군이 재차 카파도키아를 침공해 동로마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카파도키아 전역을 석권하려 했다. 이에 테오필로스는 총대주교 요안니스 7세를 알 마문에게 파견해 금화 10만 개와 아랍 포로 7천 명을 석방할 테니 물러가달라고 청했고, 알 마문은 일단 이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알 마문은 장차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공략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준비했다. 그러던 833년 여름 돌연 중병에 걸려 쓰러졌고, 그해 8월 7일에 사망했다. 이후 이복동생 알 무타심이 새 칼리파로 등극했지만, 각지에서 그에 대항하는 반란이 일어났기 때문에 이를 수습하느라 동로마 제국에 대한 원정을 벌이지 못했다.
834년, 나스르가 이끄는 15,000명의 호람딘 반란군이 아바스 왕조군의 공세를 피해 동로마 제국으로 망명했다. 나스르는 테오필로스의 지시에 따라 기독교로 개종하고 테오포보스로 개명했으며, 그의 부하들 역시 기독교로 개종했다. 황제는 아내의 누이를 테오포보스에게 시집보내고, 그가 데려온 병사들을 로마군에 편입시켜 전력을 대폭 강화했다. 그렇게 준비를 갖춘 그는 837년 7만 대군을 일으켜 타우루스 산맥을 넘어 소조페트라를 공략한 뒤 메소포타미아 북부를 휩쓸며 사모사타를 함락시키고 멜리테네( 말라티아)를 조공 도시로 만들었다.
838년 봄, 알 무타심은 작년의 패배에 보복하고자 타르수스에 8만 대군을 집결시킨 뒤 아나톨리아로 쳐들어갔다. 아바스군은 칼과 방패에 테오필로스 가문의 고향인 아모리움 글자를 새겨 복수 의지를 다졌다. 이들은 알 아프신과 칼리파의 부대로 나뉘었다. 알 아프신의 부대는 카파도키아로 진군했고, 칼리파의 부대는 칼라키아 관문을 통해 진격했다. 테오필로스는 두 부대의 합류를 저지하기 위해 토카트 인근의 다지몬(얀첸)에서 알 아프신의 군대와 대적했다.
당시 동로마군에 귀순한 뒤 용맹을 떨쳤던 페르시아인 장군 테오포보스가 이 전투에서 맹활약하여 아바스군에 큰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알 아프신이 급파한 튀르크 궁기병이 갑자기 튀어나와 돌격하는 동로마 대열을 파괴하자 전세는 역전되었다. 게다가 테오필로스가 말을 잃고 친위대와 함께 동분서주할 때, 병사들이 황제가 보이지 않자 죽은 줄 알고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해버렸다. 이리하여 테오필로스가 얼마 안 남은 친위대와 함께 언덕에서 무슬림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아르메니아인 마누일이 사력을 다해 싸워 황제를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으나 곧 전사했다.
결국 다지몬(얀첸) 전투에서 동로마군은 완패했고, 아바스군은 여세를 몰아 앙카라를 공략한 뒤 아모리움을 포위해 2주만에 함락시키고 7만에 달하는 시민 중 절반을 학살하고 나머지는 노에로 끌고 갔다. 그러나 승리를 거두고 귀환한 알 무타심은 알 마문의 아들 알 아바스가 주변인들의 권고에 따라 칼리파를 찬탈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즉시 얄 사흐르 이븐 샤히, 아므르 알 파르하나, 우제이프 이븐 안바사, 아흐마드 이븐 알 할릴을 처형하고 아바스는 감옥에 갇힌 뒤 가혹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사망했다. 심지어 다지몬 전투의 승리를 이끌었던 알 아프신 마저 정적들의 모함으로 인해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되었다.
한편, 테오포보스는 다지몬 전투 패배 후 잔여 병력을 수습한 뒤 시노페에서 아랍군에 대항할 준비에 들어갔다. 이때 병사들은 테오필로스가 전사했다는 소문을 믿고 그를 황제로 추대했다. 하지만 얼마 후 테오필로스가 살아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그는 테오필로스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하겠으니 직위를 유지해달라고 요청했다. 테오필로스는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 대신 그가 이끌고 있던 부대를 여러 연대로 나누어 각지의 테마로 분산시켰다. 이후 839년 소규모 아랍군이 카파도키아로 쳐들어왔다가 격퇴되었고, 841년에는 동로마군이 게르마니키아와 아다타를 약탈했다. 842년 1월 테오필로스와 알 무타심이 잇따라 사망하면서 전쟁은 중단되었다.
2.3. 시칠리아 전쟁
827년 시칠리아에 쳐들어온 아글라브 왕조 휘하 아랍군은 한때 시칠리아 대부분을 장악하며 시라쿠사를 위협했지만 828년 여름 전염병 창궐과 보급품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다. 829년 봄, 미하일 2세는 테오도토스가 이끄는 새로운 함대를 시칠리아로 파견해 반격에 착수했다. 그는 처음에는 엔나에서 아랍군에게 패배했지만, 얼마 후 적장 무함마드 이븐 아부 엘 자와리가 병사하면서 적군이 어수선해진 틈을 타 반격을 재개해 연이어 승리하고 적군을 미네오 성으로 몰아넣었다.이제 무슬림이 시칠리아에서 축출되는 건 시간문제인듯 했지만, 테오필로스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830년 초 코르도바 토후국이 파견한 베르베르 지휘관 아스바흐 이븐 와킬이 시칠리아에 도착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는 미네오에 포위된 수비대와 연락을 취했고, 자신이 그들을 구하는 대신 시칠리아 방면 무슬림군 총사령관이 되기로 했다. 830년 7월 또는 8월, 테오도토스는 아스바흐와 미네오 수비대의 합동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엔나로 퇴각했다. 그 후 무슬림군은 미네오를 불태운 뒤 바라프랑카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병이 또다시 발생하면서 아스바흐를 포함한 수많은 무슬림들이 죽었다. 무슬림들은 가을 무렵에 바타프랑카를 함락했지만, 숫자가 매우 줄어들었기 때문에 테오도토스의 역습에 버티지 못하고 서쪽 해안 요새로 도주했다. 그러나 테오도토스 역시 이 시기에 알려지지 않은 전투를 치르던 중 전사했다.
한편, 마자라로 피신했던 무슬림군은 아프리카 본토에서 온 병력과 일부 코르도바인들을 규합한 뒤 팔레르모로 진격했다. 팔레르모는 831년 9월까지 1년간 스파타리오스 시메온의 지휘하에 격렬하게 항전했다. 그러나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고 식량이 바닥난데다 전염병까지 돌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시메온은 도시의 고위 관리들과 수비대가 안전하게 떠나는 대가로 항복했다. 아랍 역사가 이븐 알 아티르에 따르면, 본래 팔레르모에는 7만 명이 있었지만 공방전이 끝났을 때 3천 명만 남았고, 그들 모두 노예로 끌려갔다고 한다. 832년 3월 아글라브 왕조가 파견한 왈리(총독) 아부 피르 무함마드 이븐 압달라가 팔레르모에 도착한 뒤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무슬림과 아프리카에서 온 무슬림 간의 불화를 누그러뜨리고 현지 주민들을 온화하게 대하는 등 국정을 잘 다스렸다.
그 후 시칠리아 전쟁은 2년간 소강 상태였다. 무슬림들은 새로 확보한 지역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고, 동로마 제국은 아바스 왕조 칼리파 알 마문이 아나톨리아 지역을 잇따라 침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기에 멀리 떨어진 시칠리아에 지원군을 새로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834년 초, 아부 피르 무함마드 이븐 압달라는 엔나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수비대를 격파한 뒤 포위를 벌였지만 쉽게 공략되지 않자 철수했다. 835년 다시 시칠리아 중부로 진군해 동로마군을 격파한 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령관의 아내와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아부 피르는 시칠리아 동부로 깊숙이 진군하려 했지만, 도중에 그에게 불만을 품은 무슬림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아글라브 에미르 지야다탈라 1세는 아부 피르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알 파딜 이븐 야쿱 알 파지리를 새 왈리로 선임했다. 야쿱은 도착하자 마자 시라쿠사 주변 지역을 습격한 뒤 엔나 주변 지역을 잇따라 공격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무찌르러 출격했지만, 습격대는 적이 쫓을 수 없는 산악지대와 울창한 숲 지역을 가로질러 철수했다. 이에 로마군은 철수했지만, 도중에 매복하고 있던 소규모 무슬림군에게 습격당하자 전의를 잃고 달아났다. 무슬림군은 상당량의 무기, 장비, 동물들을 확보했다.
하지만 야쿱은 그해 9월에 자야다탈라 1세의 사촌인 아부 알 아글라브 이브라힘으로 교체되었다. 이브라힘은 팔레르모로 함대를 끌고 가던 중 동로마 함대의 급습을 받고 후퇴하다가 폭풍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가까스로 팔레르모에 소규모 잔여 함대와 함게 도착한 이브라힘은 판텔라리아 등 여러 해군 기지를 급습한 후 포로로 잡은 기독교인들을 참수하는 방식으로 복수했다. 이와 동시에, 무슬림 기병대가 에트나 산 주변 일대를 습격하여 마을과 농작물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837년, 아브드 알 살람 이븐 아브드 알 와하브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엔나를 공격했으나 크게 패했고, 아브드 자신도 포로로 전락했다. 이브라힘은 이에 대응해 엔나를 포위 공격했다. 838년 겨울, 무슬림군은 도시로 통하는 산길 하나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도시를 급습하여 성채를 제외한 도시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후 성채를 마저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이브라힘은 수비대와 협상한 끝에 거액의 몸값을 받는 대가로 철수하기로 했다.
838년 봄, 테오필로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시칠리아 구원 작전에 착수한 알렉시오스 모셀레가 현장에 도착했다. 알렉시오스 모셀레는 당시 남자 후계자가 없었던 테오필로스에 의해 카이사르(부제)로 지명되었고 황제의 막내딸 마리아 공주와 결혼한 인물이었다 그는 먼저 무슬림군에 포위되었던 세파루 요새를 구원한 뒤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하여 그들에게 몇 차례의 패배를 안겼다. 그러나 838년 말 새로운 무슬림 지원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공세가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테오도로스의 막내딸이자 자신의 약혼자였던 마리아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테오필로스와의 인맥이 끊긴 데다, 정적들이 그가 무슬림들과 결탁하여 시칠리아에서 황제가 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했다. 테오필로스는 시라쿠사 대주교 테오도로스 크리티노스를 보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오라고 권고했다. 그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직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 알렉시오스 모셀레는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의 권고를 받아들인 테오필로스 황제에 의해 풀려난 뒤 지위와 재산을 회복했다.
838년 6월 11일, 시칠리아 정복 전쟁을 이끌었던 지야다탈라 1세가 사망하고 형제 알 아글라브 아부 이칼이 계승했다. 그는 시칠리아에 새 병력을 파견해 전쟁을 조속히 마무리하려 했다. 무슬림군은 콜레오네, 플라타니, 칼타벨로타, 마리노, 게라치 등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841년 엔나에서 그로테까지 공격했다. 이 무렵, 베네벤토 공국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던 나폴리 공국이 시칠리아의 무슬림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은 이를 빌미삼아 이탈리아 본토로 쳐들어가서 브린디시를 약탈했다. 얼마 후 베네벤토 공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이 기회를 노려 840년 타렌툼을 함락하고 847년 바리를 공략한 뒤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바리 토후국은 871년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30년 가까이 이탈리아 해안과 아드리아 해 연안지대를 주기적으로 습격했다.
2.4. 불가리아 제1제국과의 전쟁
836년, 테오필로스는 816년 동로마 황제 레온 5세와 오무르타그 칸의 평화 협약 이래 20년간 이어지던 불가리아 제1제국과의 평화를 파기하고 불가리아로 쳐들어가 국경 지대를 황폐화시켰다. 이에 말라미르 칸은 카반 이스불이 이끄는 불가리아군을 파견해 필리포폴리스와 그 주변 일대를 공략했다. 그런데 말라미르 칸은 얼마 안가 갑자기 사망했는데, 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후 칸위에 오른 프레시안 1세는 837년 다시 한번 카반 이스불을 파견해 동로마 제국을 꽁략하게 했다. 카반 이스불은 필리포폴리스 인근에서 동로마군을 격파한 뒤 콘스탄티노폴리스와 테살로니카 사이의 육로를 차단했고, 때마침 동로마 제국을 상대로 반기를 든 테살로니카 인근의 슬라브인들을 불가리아의 산하로 포섭했다.839년 블라스티미르 대공을 위시로한 세르비아 부족들이 테오필로스 황제의 동의하에 자치국을 세우고 불가리아에 반기를 들었다. 이에 프레시안 1세는 세르비아를 전격 침공했다. 그러나 3년간의 전쟁에서 아무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842년 별다른 영토 변경 없이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합의했다. 불가리아는 세르비아의 독립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에 대한 공세를 이어갈 여력이 없었기에, 발칸 전선은 안정되었다.
2.5. 하자르와의 동맹
9세기경, 크림 반도와 폰토스-카스피 스텝 지대를 장악하고 있던 하자르는 갈수록 강성해지는 키예프 루스의 공세에 시달렸다. 이에 그들은 돈 강 유역을 사수하기 위해 동로마 제국에 구원을 요청했다. 테오필로스는 하자르인들이 패배해 루스인들이 크림 반도로 남하한다면 동로마 제국이 보유한 헤르손 지역을 포함한 크림 전체가 루스인들에게 넘어가고 흑해의 패권이 위험해질 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이에 기술자인 페트로나스 카마테라스를 파견해 돈 강 하류 왼쪽 둑에 위치한 사르켈에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게 했다. 하자르인들은 이에 대한 대가로 헤르손 주변의 영토를 제국에 양도했다. 이후 테오필로스는 지금까지 제국의 별다른 간섭 없이 자율적으로 운영되던 헤르손 테마에 스트라테고스(군사 지휘관)를 배치해 루스인들의 침략을 막게 했다. 그러면서도 838년 루스 사절단을 맞이하여 무역 협정을 맺음으로써 그들과 지나치게 갈등을 벌이는 것을 방지했다.
2.6. 문화적 번영
테오필로스의 치세는 아랍과의 전쟁이 이어지는 시기였지만 동로마 제국과 아랍의 문화가 교류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테오필로스는 예술을 사랑하는 황제로서 미술과 음악을 적극 후원했고 이슬람 문화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그는 황궁을 새로 지었는데, 그 구조엔 아랍의 문화가 깊게 배여 있었다. 테오필로스는 마그나우라 궁전에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옥좌를 설치했다. 황제를 영접한 대사들은 황금 플라타너스의 그늘 아래 놓은 옥좌의 위용을 보고 감탄했다. 황금 플라타너스 나뭇가지에는 보석으로 만든 새가 가득했는데, 그 중에는 막 옥좌로 뛰어내릴 듯한 자세로 조각된 새들도 있었다. 또한 나무 주위에는 황금으로 제작된 사자와 그리핀[2]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하지만 대사들은 그 다음 장면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신호가 내려지자, 동물들이 모두 제각기 소리를 내며 움직였다. 이후 황금 오르간 소리가 울러퍼지면서 사방이 조용해졌고 황제와 손님들의 접견이 시작됐다. 이윽고 접견이 끝나고 손님들이 떠나가려는 순간, 다시 동물들의 합창이 시작되었고 황제는 자리에서 물러난다.테오필로스는 건축 사업을 활발하게 시행했다. 그는 황궁을 확장하고 대리석과 모자이크로 장식했으며, 테오도시우스 성벽 바깥에 자리잡은 블라헤르네 지구 개발에 전념했다. 그리고 해상 성벽의 대대적인 강화에 착수했으며, 하기아 소피아의 청동 문을 복원했다. 또한 성 판틸레이몬 수도원 등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여러 수도원을 후원했으며, 트라키아 비제에 성 소피아 교회를 세웠고,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시아쪽 해안에 아바스 왕조의 양식에 영향을 받은 별궁을 세웠다. 또한 그는 9세기 동로마 제국 최고의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히는 수학자 레오(Λέων ὁ Μαθηματικός)를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레오는 테오필로스 사후 콘스탄티노폴리스 대학을 설립했으며, 소아시아의 로우론 요새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연결하는 광학 전신 시스템을 개발해 수도에 아랍인의 공격을 가능한 한 빨리 알릴 수 있게 했다.
한편 테오필로스의 치세에서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나고 있었다. 종교에 대한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풍조는 사그라졌고, 새로운 인문주의의 분위기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하여 이성과 명증성을 지지하는 옛 고전 정신이 부활해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자 및 문학자들의 서적이 재연구되었다. 또한 사람들은 오랫동안 시각적 아름다움을 갈망했고, 옛 시절의 성화상을 갈망했다. 테오필로스 본인은 아버지처럼 성화상 파괴주의자로, 당대 최고의 성상 화가 라자로스를 비롯한 여러 인사들을 탄압했으며, 성상 파괴주의를 가장 열렬히 지지했던 요안니스 7세 하릴라스를 총대주교로 지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상 파괴주의는 사양길에 접어들고 있었다. 사실 황후 테오도라를 포함한 황제의 친척들 조차 성상 파괴를 지속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결국 테오필로스가 사망한 직후 성상 파괴주의는 황후 테오도라에 의해 자취를 감추었다.
2.7. 말년
테오필로스는 830년 테오도라 황후와 결혼했다. 그러나 831년 이전에 태어난 콘스탄티노스 왕자는 얼마 안가 요절해버렸고, 이후로 다섯 딸 테클라, 안나, 아나스타시아, 마리아, 풀케리아가 잇따라 태어났지만 아들을 좀처럼 갖지 못했다. 이에 황제는 아들이 태어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여기고 막내딸 마리아 풀케리아의 남편인 알렉시오스 모셀레를 카이사르(부황제)로 지명했다. 그러던 840년 1월 19일, 차남 미하일 3세가 뒤늦게 태어났다. 이로 인해 알렉시오스 모셀레의 입지는 위태로워졌다. 결국 알렉시오스는 842년 이전에 테오필로스의 압력을 받고 크리소폴리스의 안테미오스 수도원으로 은퇴했다.842년 1월 20일, 테오필로스는 30세의 나이에 이질일 가능성이 있는 질병으로 임종을 눈앞에 두었다. 그는 2살밖에 안 된 어린 황태자 미하일의 섭정으로 테오도라 황후와 누이 테클라를 지명했다. 또한 반란을 또다시 일으킬 지도 모르는 테오포보스를 처형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테오필로스의 처남 페트로나스가 테오포보스를 처형했고, 테오필로스는 테오포보스의 수급을 확인한 뒤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