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피르미아누스 락탄티우스 (Lucius Caecilius Firmianus Lactantius) |
출생 | 250년경 |
사망 | 미상 |
직업 | 성직자, 역사가 |
[clearfix]
1. 개요
3~4세기에 활동한 로마 제국의 기독교 수사학자이자 역사가. 저서 <박해자들의 최후>로 유명하다.2. 생애
250년경 로마 제국 아프리카 속주에서 푸닉 또는 베르베르 출신 이교도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누미디아의 중심지인 시카 베네리아(오늘날 튀니지 엘 카프)에서 수사학자 아르노비우스의 문하에 들어가 수사학을 공부했다. 이후 키르타에서 학생들을 모집해 수사학을 가르쳤다. 나중에 제국 동방 일대에 그의 탁월한 수사학 역량이 알려지면서, 그는 이집트, 시리아, 발칸 반도, 아나톨리아 등지의 여러 도시의 초빙을 받았다.284년 황위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의 명성을 전해듣고 니코메디아 궁정에 그를 초빙하여 궁정 수사학 교사를 맡겼다. 그는 그곳에서 이교도 철학자 포르피리오스, 행정가이자 변술가인 히에로클레스와 친분을 맺었다. 그는 초기에는 이교도였지만 어느 시점에 기독교로 개종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03년 2월 24일 첫 번째 기독교 박해 칙령을 발표한 후 해임되었다. 히에로니무스에 따르면, 그는 궁정에서 쫓겨난 뒤 콘스탄티누스 1세가 309년에 그를 초빙할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를 궁정 수사학자로 임명했고, 트리어에서 장남 크리스푸스에게 라틴어와 수사학을 가르치게 했다. 크리스푸스는 326년에 계모 플라비아 막시마 파우스타와 간통한 혐의로 처형되었지만, 그가 제자보다 일찍 죽었는지 아니면 제자가 죽은 걸 지켜본 후 사망했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그는 사후에 불분명한 이유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6세기의 겔라시아 칙령은 그의 작품이 외설적이니 읽혀서는 안 된다고 비난했다. 이후 묻혀졌던 그의 작품은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에 의해 주목받았는데, 그의 신학보다는 우아하고 수려한 라틴 문체 때문이었다.
3. 작품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기 전에 수사학에 관한 여러 저서와 편지를 서술했다고 전해지나 현존하지 않는다. 개종 후 그의 작품은 헬레니즘 철학자들의 비판에 맞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는 데 초점을 두었다. <Divinae Institutiones(신성한 제도에 관하여)>에서, 그는 다신교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오류이며, 기독교의 교리와 도덕을 따르는 것이 합리적인 결정이라는 걸 입증하고자 수사학적 논리를 제시했다. <하나님의 작품(De Opificio Dei)>에서는 신이 창조한 인체의 아름다움과 조화에 찬사를 보냈으며, <신의 진노(De Ira Dei)>에서는 분노하는 신이 완전한 존재인지를 묻는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의 질의를 검토했다. 한편, 신화 속 동물인 극락조의 삶과 죽음에 관한 시 <극락조(De Ave Phoenice)>라는 시를 짓기도 했다. 그는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를 무척 존경해 그의 수사법을 베낀 문체를 자주 사용하곤 했기에 "기독교인 키케로"라는 별칭으로 불렸다.3.1. 박해자들의 최후
De Mortibus Persecutorum
<박해자들의 최후>는 기독교 신자에 대한 박해를 가한 로마 황제들의 말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 신의 섭리가 기독교에 있음을 입증하려는 목적으로 집필된 저서이다. 그는 박해의 원인과 박해의 의미를 종교적인 문제, 곧 로마와 교회의 대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류 전체를 대적하는 ‘비인간적인 야만성’에서 발로되었다고 여겼다. 그가 집필한 다른 문서들과 달리, 이 책은 이론적인 배경을 전혀 드러내지 않고 ‘역사적 사건들’만 나열했다. 그는 이 책을 저술한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박해자들의 종말에 대해 이야기를 출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전능하신 신이 그의 적들을 근절하고 완전히 파괴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그의 힘과 위대성을 드러냈는지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모르는 자들과 후대인들이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처음 몇 장은 초기 기독교 박해자들인 네로, 도미티아누스, 데키우스, 발레리아누스의 최후를 다루었다. 네로는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 신자들에게 떠넘겨 끔찍한 형벌을 가했지만 나중에 모두에게 버림받자 자살했고, 도미티아누스는 자신을 살아있는 신으로 인정하지 않는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가 암살당했다. 데키우스는 신들에게 제사를 드려서 제국의 안위를 기원하라는 칙령을 따르지 않은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 간주하고 박해했다가 아브리투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발레리아누스는 기독교 박해를 명령하는 칙령을 잇따라 반포하여 여러 지도급 인사들을 살해했지만 에데사 전투에서 사산 왕조군에 의해 사로잡혀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미트라를 숭상하던 아우렐리아누스 역시 시간이 충분했다면 기독교 박해를 단행했을 거라면서, 그가 암살된 것도 신의 섭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저서의 대부분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가 303년에 시작한 기독교 대박해에 초점을 두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정에서 일했으며, 303년 2월 23일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독교 박해에 관한 첫 칙령을 반포했을 때 현장에서 목격했다. 그는 박해의 전 과정을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지켜봤고, 박해의 과정을 장소와 날짜를 명기하며 상세히 설명했다. 락탄티우스는 갈리에누스가 기독교 관용령을 발표하여 박해를 중단한 이래, 기독교인들은 40여 년간 평온하게 지낼 수 있었으며 황제의 궁정에서라도 자신들의 신앙적 신념에서 볼 때 동의할 수 없는 일이면 참여하지 않을 수 있었다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실로 갑작스러운 사태였다고 설명했다.
301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짐승을 죽여 내장을 보며 점을 치는 과정에서 시중을 드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점괘가 나오지 않는다고 여기고, 그들에게 제물을 강제로 드리게 했다. 몇몇 기독교인이 이를 거부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들을 해임할 뿐 죽이지 않았다. 락탄티우스는 그런 그가 303년 2월 23일 기독교 박해 칙령을 내린 것은 갈레리우스의 농간에 넘어갔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피를 흘리는 것은 좋지 않다며 물러서려 하자 갈레리우스가 기독교를 박해라고 압력을 행사했다는 것이다.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기독교인에게 미움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니코메디아 궁정에 불을 두 번 질렀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기독교인이 방화했다고 여기고 마침내 대박해를 단행했다고 한다.
갈레리우스는 311년 죽기 직전에 기독교 용인 칙령을 발표했다. 그는 이 칙령에서 박해의 목적은 조상들의 전례를 따르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락탄티우스는 갈레리우스가 교회를 공격하게 된 동기를 개인적인 미움이라고 여겼다. 갈레리우스 어머니의 미신적인 성향에 기독교인들이 거리를 두고 제물에 바친 음식을 거부하자, 갈레리우스는 자기 어머니가 모욕당했다고 여겨 반감을 품었다는 것이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305년에 퇴위했던 건 자발적인 게 아니라 갈레리우스의 압력 때문이었다고 설명했으며, 그렇게 황위에 오른 뒤에는 더욱 극심한 박해를 가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갈레리우스의 박해가 약탈행위로 발전했고, 로마법에 거스르는 짓도 거리낌 없이 행했다고 비판했다.
이 인간(갈레리우스)은 선조들이 전쟁을 마치고 나서 정복당한 사람들에게 행한 것과 같이 로마인들과 로마에 복종하는 사람들에게 하였다.
그는 박해자들에 대한 인신공격을 서슴지 않았다. 데키우스를 "저주받을 짐승",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범죄와 악을 만들어내는 자"라고 비난했으며, 갈레리우스를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이 짐승 안에는 태생적인 야만적인 야수성, 로마의 피와는 너무도 다른 잔인함이 숨어있다. 놀라운 일이 아닌 것은 그의 어머니는 다뉴브 강 건너편 출신으로 카르파족의 침략 때에 강을 따라 새로운 다키아 지역으로 도망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락탄티우스는 박해의 부당성을 설파할 때 성경 등 교회의 주요 교리서 및 선지자들의 증언을 제시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빌라 예언서, 아폴로 신탁 등 로마 다신교의 교리를 인용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기독교인만 통용되는 교리로 이교도인들을 설득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여겨 처음부터 배제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신성한 제도에 관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선지자들의 증언을 제외시키려고 하는데, 그 목적은 전혀 신뢰받지 못하는 이러한 문서들에 근거를 둔 증명이 마땅하지 않아 보이게 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는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 다이아, 막센티우스 등 로마 황제들의 최후를 끔찍하고 적나라하게 묘사하면서, 독자들에게 기독교를 박해하면 이런 결말을 맞게 될 거라고 경고했다. 이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 전날 밤에 꿈속에서 신의 계시를 받고 병사들의 방패에 키로 십자가(XP)를 새긴 덕분에 승리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기독교 공인을 만방에 알리는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게 되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와 더불어 로마 황제로 군림하던 리키니우스의 316년 기독교 박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그가 313년 밀라노 칙령 전후에 이 작품을 출간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4. 여담
그는 르네상스 시대에 지구 평면설을 지지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20세기 역사가 W. G. L. 랜들스에 의해 이 이야기가 널리 유포되었다. 이는 <Divinae Institutiones(신성한 제도에 관하여)>의 다음 구절에 기인한다.Antipodiens에서는 우리와 정반대의 위치에서 산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발바닥이 머리보다 높은 사람이 있다고 믿을 만큼 멍청한 자가 있는가? 아니면 우리를 위해 바닥에 놓여있는 것이 뒤집혀서 매달려 있다는 것인가? 풀과 나무가 아래로 자라는가? 비와 눈과 우박이 위에서 땅으로 떨어지는가?
'Antipodiens'는 이론적으로 남반구 주민들을 지칭한다. 하지만 '지하에 사는 사람' 또는 지구 반대편의 거주자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가 헬레니즘 학자들이 거부한 지구 평면설을 지지했는지, 아니면 다른 이론을 비난하는지는 확언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