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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19-09-11 22:05:30

2차 장계전쟁

반장전쟁의 전개 순서
봉소전쟁
(1929.7.20~1929.12.22)
2차 장계전쟁
(1929.9.7~1929.12.19)
2차 장풍전쟁
(1929.10.11~1929.11.20)
소련의 만주 침공 장파쿠이의 반란 펑위샹의 2차 반란

1. 개요2. 배경3. 전개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29년 9월 7일부터 12월 19일까지 월계군벌 장파쿠이 계계군벌의 잔여세력과 연합하여 장제스에 대항하여 일으킨 반란.

2. 배경

장파쿠이는 국민혁명 시기, 리지천의 4군 휘하에서 활약하였다. 4.12 상하이 쿠데타 이후 그는 우한 국민정부를 옹호하며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와 적대했고 1927년 7월 탕성즈, 주페이더와 함께 동정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8월에 장제스가 하야하여 동정의 명분이 없어졌고 9월, 우한 국민정부와 난징 국민정부는 통합을 결정하고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국민당 중앙특별위원회의 실세였던 계계군벌 서산회의파는 우한 국민정부가 용공적이었다고 비난하며 우한 국민정부의 정통성을 부정하였다.

장파쿠이는 우한 국민정부의 상징이었던 왕징웨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당계전쟁 이후 탕성즈가 몰락하자 왕징웨이는 장파쿠이와의 합작을 시도한 바가 있었다. 1927년 11월, 장제스와 왕징웨이 및 광동파 사이의 합작이 시도되는 와중에 장파쿠이는 천궁보의 사주를 받아 우한 국민정부를 광저우에서 재건하기 위해 장황사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12월에 중국 공산당이 이를 틈타 광저우 폭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광동파의 입지만 좁아졌고 장파쿠이는 일본으로 망명해야 했다. 그러던 중 1차 장계전쟁이 발발하자 장파쿠이는 장제스를 지지하여 제4사단장에 임명되어 복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장파쿠이 역시 편견회의에 불만을 품어 왕징웨이를 옹립하여 장제스와 맞설 생각을 하고 있었다.

3. 전개

1929년 5월 1차 장풍전쟁이 벌어지자 장파쿠이는 농해(隴海) 철로 수비를 명령받고 펑위샹 토벌에 동원되었으나 편견회의와 정치분회 폐지 등 장제스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국민혁명 기간 중에 장제스와의 악감정도 있었으므로 9월에 반장파에 합류, 왕징웨이 서산회의파의 장제스 비판에 호응하여 반장을 호소하는 통전을 보냈다. 여기에 광서성 주석 유작백(兪作柏)과 사장 이명서(李明瑞) 등 계계군벌의 잔당이 호응하여 1929년 9월 7일 광서성의 독립을 선언하여 장파쿠이와 합세, 호당구국군을 조직하고 광동으로 진격했다. 장파쿠이의 병력은 석문, 자리, 도원을 통과하여 서포, 신화, 안화 일대의 산악지대에서 농성하였다. 장제스는 9월 20일 장파쿠이를 면직시켰고 사천과 호남의 병력으로 장파쿠이 토벌을 명령했다. 10월 7일 장제스가 광동성 수정주임 천지탕에게 장파쿠이 토벌을 명령하였고 천지탕의 광동군이 오주 방면에서 광서로 진격했다. 광서군 간부 양등휘(楊騰輝)는 항복하였으나 유작백은 용주로 달아났다.

이 와중에 2차 장풍전쟁이 얼아났고 봉소전쟁이 벌어져 소련군이 만저우리를 점령한 가운데, 장파쿠이가 광서 북부로 이동하여 1929년 11월 16일 공성에서 광동탈취를 선언하고 호당구국군 제8로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이에 유작백을 대신한 신임 광서성 주석 여염환이 합류하고 리쭝런의 잔당이 호응하였다. 국민정부는 안휘성 정부주석 스여우싼에게 광동 방위를 지시하는 한편 허잉친을 광동 행영 주임으로 임명하여 토벌을 명령했다. 허잉친은 수개 사단을 지휘해 12월 2일 광저우에 도착했고 12월 10일 광저우 북부 50킬로미터 지점인 화현에서 장파쿠이 군대를 격파했으며 12월 19일 광서성 오주에서 다시 반란군을 섬멸하였고 이로서 2차 장계전쟁도 종식되었다.

4. 결과

하지만 2차 장계전쟁이 완전히 마무리되기도 전인 12월 2일 안휘성의 스여우싼이 호당구국군 5로 사령관에 취임하면서 반장파에 가담했고 12월 5일 탕성즈가 호당구국군 4로 사령관에 취임하여 난징을 공격하면서 장당전쟁이 발생했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