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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20:05:48

바랑인 친위대

타그마 톤 바랑곤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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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6년(왼쪽)과 1230년(오른쪽)의 바랑인 친위대를 묘사한 그림. 출처
위키피디아 한글 / 영어

1. 개요2. 역사
2.1. 활약
3. 서브컬처에서의 등장4. 여담

1. 개요

그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며 가족처럼 보호했고, 거룩한 믿음은 대를 거듭하며 전해져 내려왔다. 이 충성스러운 자들은 순수함을 유지했으며, 배신의 사소한 징후마저도 그대로 넘기지 않을 것이다.
콤니노스 왕조의 제2대 황제 알렉시오스 1세의 황녀 안나 콤니니의 기록
속칭 바랑인 친위대(영어명: Varangian Guards)는 10세기 말 동로마 제국이 북유럽 전사들의 원정 입대를 받아 창설한 이래 수백년 동안 존속한 금군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흔히 영어 표기인 바랑기안 가드와 번역명인 바랑인 친위대로 알려져있지만, 편제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정부 직할의 중앙군 야전부대인 타그마였기 때문에 정식으로는 타그마 톤 바랑곤(Τάγμα τῶν Βαράγγων), 즉 그저 바랑인 부대라고 불렀으며, 혹은 그냥 바랑인들이라고도 불렸다.

국내에는 본 문서의 제목인 바랑인 친위대 말고도 바랑기아 가드, 바랑기안 가드, 바랑기아 친위대/근위대 등의 표현이 혼용된다.

"바랑기"(Βάραγγοι)란 본래 동로마인들이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의 북유럽인을 뭉뚱그려 가리킬 때 쓰던 호칭으로, 학술적으로는 바이킹들 중 9~10세기에 흑해를 건너 남하해서 전쟁이나 교역을 목적으로 동로마 제국과 접촉하던 스웨덴계 바이킹이다. 어원은 고대 노르드어로 맹세를 뜻하는 "바르"(vár)[1]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이들은 주로 장사와 노략질 등 그들의 본가와 거의 비슷한 생업을 영위했는데, 그 중 일부는 북유럽식 전투 방식을 살려 동로마 제국에서 용병으로 일하기도 했다.

2. 역사

사실 바랑인들 이전에도 바이킹들이 동로마 제국으로 건너가서 용병일을 하곤 했다. 하지만 아예 외인부대 식의 정규군 전력으로 편제되기 시작한 건, 명군이자 정복군주였던 바실리오스 2세[2]의 치세때였다. 아나톨리아 반도의 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마저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키예프 루스의 대공이었던 블라디미르 1세[3]에게 군사지원을 요청했는데, 이때 블라디미르 1세의 주도로 북유럽 각지에서 모집된 바이킹 전사 6,000명의 도움을 받아 아비도스 전투(989년)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르다스 포카스의 반란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4] 최대의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바실리오스 2세가 툭하면 반란이나 일으키는 자국인 귀족 나부랭이들보다 오히려 이방인인 북유럽 전사들이 복무서약을 훨씬 잘 지키는 것을 깨닫고, 북유럽인들을 대상으로 한 원정 모집 공고를 하면서, 동로마 제국의 본격적인 외인부대원 모집이 개시되었다. 얼마나 대단한 규모였는지, 스웨덴 지역에서는 객지에서 전사한 바랑인 친위대원의 유산을 처리하는 특별법이 생길 정도였다.

이는 이민족인 게르만족의 대침공이 유발한 지방분권적인 봉건제 시대에 꿋꿋하게 중앙집권체제를 유지하며 살아남으려고 했던 중기 동로마 제국의 발버둥이었다. 더 이상 고대 시민 보병으로는 이민족의 침공을 막을 수 없었기에 기마 무사 귀족이 등장한 것이었는데, 동로마 제국의 입장에서는 부켈라리이 사병들을 보유한 귀족들을 억압하면 국방력이 약해지고, 그렇다고 귀족들을 풀어주면 반란을 당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그런데 허스칼 복무에 익숙한 바이킹들은 정치 권력에 별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웅대함과 화려함에 경도되어 '이 거대한 도성의 수령이라면 부하 대우도 잘해주겠지?'라고 생각하면서 그냥 눌러앉는걸 선호하게 되어 제국 정부와 바이킹들 사이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었다. 사실 바이킹들 쪽에서도 좋은 제의인 것이, 무적의 정복자라는 이미지와 달리 바이킹들 중 잉글랜드나 프랑크 왕국에서 한 몫 크게 잡아 현지 귀족이 되는 것은 운좋은 소수였고 대부분은 생계를 위해 농업, 상업, 수렵 등 온갖 잡일에 종사하다 굶어죽거나 얼어죽는 불안정한 처지였는데 따뜻한 곳에서 봉급도 듬뿍 받으며 오로지 전투에만 전념할 수있고 장기고용에 퇴직금까지 보장하는 멋진 일자리가 있다는데 혹하지 않을 리가 없다.

기록에 남은 첫 번째 바랑인 친위병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볼리 볼라손인데, 동료들을 이끌고 1006년에 덴마크를 경유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했다고 한다. 그가 금의환향할 때는 황제가 하사한 황금 장식의 자줏빛 옷을 입고 돌아왔는데, 볼라손이 기록된 사가에는 외국의 무구들(즉 동로마식 무구)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볼리 볼라손과 그의 동료들 외에도
'친구 누구누구를 오랫동안 못봤는데 마지막으로 들은 얘기로는 미클라가르드[5]에서 거기 여자랑 결혼하고, 거기 왕한테 충성하면서 아예 말뚝박고 산다더라...'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 바이킹 사가들이 있다.

중세 아이슬란드의 서사시인 《락스디엘리 사가》의 주인공인 볼라의 아들 볼리도 미클라가르드의 수령이 하사한 비단옷 위에 금실이 수놓인 자줏빛 망토를 걸친 화려한 모습으로 금의환향했다고 전해진다.[6] 이렇게 동로마 양식의 교회 건축과 프레스코화, 채색 《 성경》 필사본은 저 멀리 아이슬란드까지 북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동로마 제국에 상인, 순례자, 근위대로 다녀온 것을 기념하는 룬 문자 비석들이 세워졌고, 바랑인 영웅들의 무용담을 전하는 아이슬란드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드어 사가와 역사서들도 집필되었다.

당시 바랑인 친위대원의 이야기가 이러한 영웅담으로 남았다는 것은 친위대원의 성공담이 그만큼 북유럽 사회에 큰 인상을 남겼음을 의미한다. 11세기는 이미 바이킹의 황혼기였고, 더 이상 침략과 원정으로 무용을 떨치는 것은 어려웠으며, 북유럽까지 영향을 미친 중세 기사의 발흥과 전면 보급으로 인해 전장에서도 도태될 위기에 있었는데 이제는 물려받은 말과 시종이 없으면 출세는 커녕 출전도 할 수도 없게 된 상황에서 칼 한자루 빗겨찬 무사 지망생이 실직 걱정이나 노후 걱정없이 평생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랑인 친위대 복무였던 것이다.

바랑인 친위대는 동로마 제국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성 소피아 대성당의 2층 대리석 난간에는 처음에 정체불명으로 여겨진 문양이 있었는데, 기나긴 기독교 성찬의식의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새긴 듯, 하프단(Halfdan)이란 인물이 여기 왔다 감이라는 뜻으로 적은 룬 문자 낙서로 밝혀졌다. #[7] 또한 그리스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에 세워져 있었던 사자 대리석상[8]에도 룬 문자가 새겨졌다. 바랑인 친위대 병사들은 복무를 마치면 퇴직금으로 동로마 제국의 금화와 무구, 그리고 자주색 비단옷을 가지고 말 그대로 금의환향했다.[9]

11~12세기가 되자 스칸디나비아 왕국들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면서 자유롭게 방랑하는 바이킹이 줄어들었고, 바랑인 친위대의 성격은 바이킹 외인부대에서 세습 게르만 혈통의 특수전 부대로 바뀌어갔다. 스칸디나비아에서도 꾸준히 모집은 이루어졌지만,[10] 이 시기에는 오트빌 왕조의 멸망에 따라 시칠리아 왕국에서 축출된 노르만인처럼 다양한 배경의 북유럽 혈통의 사람들이 친위대에 입대했다.

그리고 특기할만한 점은 정복왕 윌리엄 1세에게 패배하고 망명했다가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한 앵글로색슨족 테인[11]들이 굉장히 많았다는 것이다. 당시 앵글로색슨족 친위대원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일괄해서 앵글로바랑기 혹은 켈트인 친위대[12]라고 불렸을 정도였다. 흔히 중세 유럽사 교양서적에서는 아예 '동로마 제국의 정예 영국인 용병'이라고 소개되니 그 비중을 짐작할 만하다. 노르만인들이 선도하는 중장 창기병 중심의 전법이 확립된 시대에 나라를 잃은 구식 테인이 갈 곳이 딱히 없었기도 했고. 비록 시작은 바이킹 허스칼 부대였을지언정 나중에는 앵글로색슨 테인 부대가 된다.

애초에 이름 자체를 북유럽인 부대라고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북유럽인의 입대를 대거 받았지만, 후기 바랑인 친위대 붐의 실상은 북유럽에서도 이미 기존 부족사회를 해체하고 왕권이 강화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족 내 군인 직업이던 허스칼들이 일자리를 찾아왔던 것에 가깝다. 1차 십자군 이후 노르웨이 십자군들이 먼 이국인 동로마 제국 바랑인 친위대에 지원한 이유로 첫 째로는 당시 최고의 선진국이던 동로마 제국을 마음에 들어했다. 두 번째로는 용병으로서 자신이 잘하는 직업에 남고자하는 열망, 마지막으로는 북유럽에서 부족 시절에 비해 왕권이 강화되어 부족 군인으로서 권력 기반이 줄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북유럽에서 중요한 군역이 바이킹에서 기사와 맨앳암즈 중심으로 대체되자 당연히 북유럽 출신의 지원자는 눈에 띄게 줄었고, 최종적으로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이 앵글로색슨 7왕국 시대의 구식 테인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던 망명 앵글로색슨 귀족과 그 후손들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이들 망명 앵글로색슨 귀족들과 후손들은 알렉시오스 1세로부터 흑해 연안에 정착해 뉴잉글랜드라고 불리는 정착지를 형성해 살았다고 한다.

보통은 이렇게 수백 년에 걸쳐 기득권화된 전사 집단은 피할 수 없는 후진성 때문에 예니체리 스트렐치, 팔기군처럼 점점 전투력이 쇠퇴하는게 일반적인데 바랑인 친위대는 전투력이 떨어지지도 않았던 모양이다.1204년에 제4차 십자군을 무진장 애먹이고, 끝까지 황궁을 지키다가 궤멸당했던 친위대는 테오도로스 1세 시절에 재건되었고, 최소한 1259년까지는 존속했다.[13] 훗날 1400년대까지 '바랑인'이라는 단어가 동로마 제국의 역사에 등장하지만, 이것이 선대의 바랑인 친위대와 같은 집단인지 아니면 서유럽, 특히 잉글랜드에서 온 용병 집단인지는 확실하지 않다.[14]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제위 계승자와 충성서약을 맺었는데 이는 북유럽 바이킹들의 허스칼 맹세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허스칼들이 그의 주군과 생사를 같이 한 것과 달리 친위대의 충성서약은 특정 개인보다는 제위 자체, 그러니까 신분상 법적 고용주에게 있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한 예로 니키포로스 2세 요안니스 1세에게 암살을 당했을 당시, 바랑인 친위대는 전임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지막까지 싸웠지만, 결국 찬탈자가 니키포로스 2세를 죽이자 그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방금까지 싸우고 있었던 적인 요안니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또한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참패한 로마노스 4세 알프 아르슬란에게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부제인 요안니스 두카스의 명령을 받고 로마노스 4세를 실각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콤니노스 왕조 당시, 아들인 요안니스 2세를 내치고 딸 안나 콤니니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황후 이리니 두케나가 바랑인 친위대를 시켜 요안니스 2세가 입궁하지 못하도록 저지했지만, 황제의 인장을 찬 요안니스 2세의 모습을 보고 바로 충성을 바쳤다는 설화도 있다. 이들은 적어도 현지인이 보기에는, 정변이 잦았던 제국에서 특정 황족 개인에 대한 충성보다는 현재 제위를 보유한 신분상 법적 고용주에 대한 계약에 충실했다. 수령이나 족장 중심의 바이킹 전사들의 세계에서는 지배권에 대한 도전이 일상적인 일이었고, 도전에서 이긴 자가 지배권을 가지며, 지배자가 바뀌면 사회 구성원들은 그에 따라야 하는 전통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랑인들은 동로마 황제의 지배권에 직접 도전하거나, 도전하는데 가담하지는 않았는데, 단순한 징집병이 아니라 용병부대인 이상 그들에게 봉급을 주는 법적 고용주를 직접 배신하는 것을 금기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결국 역적으로 규정하고 공격하다가도 황제가 되면 바로 충성서약을 바치는 대신, 새 황제도 바랑인 친위대의 과거를 따지지 않았다.

어쨌든 이들은 스위스 용병의 등장 이전부터 법적 고용주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 것으로 명성이 높았다. 혼란한 시기였고 배신과 반란이 매우 많았던 동로마 제국에서 그만큼 강하고 크며 결속력이 높은 집단이 대규모 반란을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더구나 혈통은 같지만 프랑스 왕국의 봉신으로 잔머리가 굵은 노르만인들이 툭하면 제국군의 뒤통수를 쳐댄 것과 비교하면 엄청나게 놀라운 일이었고, 황제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들었다.[15]

바랑인 친위대는 전원 보병으로 구성되었고, 주로 도끼와 방패로 무장했는데, 황녀 안나 콤니니의 기록을 따르면 쇠사슬로 된 체인메일을 이용해서 중갑을 착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이들은 도끼뿐만 아니라 롱소드와 롬파이아[16]로도 무장했다고 한다.
파일:Screenshot_20240415_020623_Chrome.jpg
후기의 바랑인 친위대(맨 좌측)를 묘사한 그림 출처
이들이 1400년대까지 기록에 등장했기에 1453년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서의 패배로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남아있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후기의 동로마가 군사적으로 튀르크나 서유럽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만큼 흔히 떠올리는 도끼를 들고 있는 바이킹의 모습이 아닌, 서유럽의 기사와[17] 비슷한 모습을 취했다.

2.1. 활약

사실 이들이 이름을 날린 대규모 ' 전투'는 얼마 없다. 그럴 만한 것이 황제의 친위대인데, 이들이 참전할 정도로 큰 회전이 쉽게 안 터졌기 때문이다.[18] 바실리오스 2세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포카스 내전을 종식시킨 계기가 된 아비도스 전투나 요안니스 2세가 튀르크계 페체네그족을 격파한 베로이아 전투 정도이다.[19] 하지만 참전한 전투마다 상당히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칸나이 전투[20] 당시 바실리오스 보이오안니스와 바랑인 친위대를 파견하여 노르만 기사대를 격파했고, 역사적인 만지케르트 전투에서는 목숨을 걸고 싸워 셀주크 튀르크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제4차 십자군 전쟁때도 침략자들에 맞서 용맹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이들이 치른 전투들 중 가장 유명한 전투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랑인 친위대가 패인을 제공한 디라키움 전투이다. 이 전투에 투입된 바랑인 친위대는 정복왕 윌리엄 1세가 이끈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과정에서 숙청을 피해 살아남은 앵글로색슨 전사들로 구성되었다고 전한다. 이들은 어찌나 전투의지가 충만했던지 석궁 집중사격을 맞으면서도 전열을 유지하며 전진했고, 당대 최고의 충격기병 집단인 노르만 기사대의 돌격을 정면과 측면으로 연이어 받고도 모조리 씹어먹으며 패퇴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중세 기병을 맞상대할 수 있는 최초의 보병이었던 스위스 할버드병과 스코틀랜드 파이크병이 등장하기 200년도 전의 일이었다. 그마저도 스위스 할버드병과 스코틀랜드 파이크병이 산악 지형과 습지 지형에서나 전력을 냈던걸 생각하면 가히 전쟁사에 길이남을 전설적인 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쫓기며 패주하던 노르만 기사들이 로베르 기스카르의 아내이자 당대의 여걸이었던 시켈가이타의 대갈일성에 재집결하여 반격을 가하자 밀리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근처 성당에 들어가 저항했다. 그러자 로베르 기스카르는 성당에 불을 질러 이들을 불태워 죽였다. 귀중한 정예부대를 통째로 잃은 알렉시오스 1세는 로베르 기스카르의 공세를 버티지 못한채 패퇴하고 말았다.

바랑인 친위대의 전투 스타일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면, 자신들의 고향인 북유럽과 잉글랜드에서와 같이 엘리트 보병으로서 전투에 임했을 확률이 높다. 많은 역사가들이 흔히 펠레키포로이 바르바로이(pelekyphoroi barbaroi), 즉 '도끼를 진 야만인'이라고 묘사했던 만큼 배틀액스 아밍 소드로 무장했을 것이다. 그래서 친위대들은 거대한 도끼를 들고 칼을 찬 모습으로 잘 묘사되는 편이지만,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머무르며 현지 문화를 받아들인 이들은 트라키아인들의 팔크스를 사용하기도 했다.

황실 근위대라는 특징으로 인해 마상에 올라서 전투를 했다는 기록도 흔하게 등장한다. 상기한 페체네그족과의 베로이아 전투에서도 처음에는 기병들과 함께 돌격했다가, 황제가 하마 전투를 지시하자 내려서 전진했다는 묘사가 나오고, 훗날 제4차 십자군 당시에도 말을 타고 성벽 위를 돌아댕겼다는 라틴인들의 기록이 있다. 아마도 기동을 위해 말을 타다가 전투 시엔 하마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투와 숙위 외에 첩보 업무를 수행한 사례도 있다.

3. 서브컬처에서의 등장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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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어로 '우리'를 뜻하는 'Our'와 같은 어원이다. [2] 마케도니아 왕조의 제9대 황제 [3] 이 자도 바이킹 출신이었다. [4] 당시 동로마 제국이 외국에 절대 넘겨선 안 될 세 가지로 콘스탄티노스 7세가 규정한 내용 중에 있는 포로피니예니타(황실의 공주)를 블라디미르 1세에게 넘겼다. 하지만 이 딜(?)로 키예프 공국을 필두로 한 루스계 공국들이 정교회로 개종했고, 그 인연으로 동로마 제국의 멸망 직전까지 동로마 제국과 루스계 공국들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다. [5]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북유럽식 표기로, 중세 노르드어로는 '거대한 도성'이었다. [6] 당시 기준으로 금실과 자줏빛 염료는 평범한 천에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값진 물건이었으므로, 망토의 소재는 당연히 비단이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금의환향인 셈이다. [7] 바론 바이킹들의 Norse Futhark 룬 문자로 적힌 글귀인데 9세기쯤에 새긴 듯하다. 뜻은 Halfdan carved these runes 혹은 Halfdan was here으로 해석되는데 즉, 'Halfdan이 쓰고 감 혹은 왔다 감'이라 적힌 낙서였다. [8] 지금은 베네치아에 있음 [9] 출처 - 《비잔티움 : 어느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 [10] 1015년부터 1130년까지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한 사람의 룬 비석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에는 북유럽 지방에서도 룬 비석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문서로 남아있거나 동로마의 기록으로 전해진다. [11] 테인(Thegn) : 앵글로색슨 7왕국 고유의 하급귀족 가신병 [12] 이는 원래 앵글로색슨족의 브리튼 섬 도래 이전 로마 제국령 시절, 브리타니아의 원주민은 켈트족이었기에 로마인들이 브리타니아인을 켈트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13] 《모레아 연대기》에서는 1259년까지 언급이 된다. 다만 이것이 제4차 십자군 이전까지의 그 바랑인 근위대 모병의 부활이라기 보다는 각 요충지에 파견되었던 소수의 바랑인 분견대들을 다시 중앙에 결집시키는 방향으로 재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 [14] 마누일 2세 시기에 사신의 자격으로 유럽으로 온 동로마 제국의 관료가 자신들의 나라에 도끼를 든 잉글랜드인들이 있다고 언급을 했다. 이를 보면 최소한 마누일 2세 시기까진 우리가 아는 형태의 바랑인 친위대가 유지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15] 이 부분은 당시 동로마 제국 내에서 망명 이방인 집단인 바랑인 친위대가 가졌던 입지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대 기준으로 고도화된 정치 시스템을 갖추었던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만큼 내부의 정치적 알력이 강하고, 외부에서도 노리는 세력이 많았지만 바랑인 친위대는 반란에 참여한다는 자체가 반란이 성공한들 계약 위반으로 해고감이었던데다가 중후기 앵글로바랑기들은 다른 갈 곳이 전혀 없는 망명자였던지라 자손들의 일자리까지 위태로워질 일을 벌일 수는 없었다. 이 점은 직접 정부를 뒤엎고 정권을 잡기까지 했던 맘루크 등의 다른 외인부대들과 차별화된다. [16] 트라키아 지방에 전해지는 낫 형태의 검인 팔크스(Falx)를 개량한 무기이다. # [17] 진짜 기사가 바랑인 친위대에 합류하는 경우도 있었다. [18] 물론 수백 명 정도의 소수 바랑기안을 황제가 직접 장군들에게 파견해 싸우게 하거나 분견대를 성에 주둔시켰다거나 하는 얘기들이 흔한 걸 보면 그냥 장식은 절대 아니었다. [19] 짐마차를 방패삼아 활과 화살을 보관해두고, 스웜 전술을 구사하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페체네그족을 바랑인 친위대 480명이 요안니스 2세와 함께 돌격해 두꺼운 사슬갑옷으로 페체네그족의 화살을 튕겨내며 양손도끼로 짐마차를 부수고, 페체네그족을 도륙내어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20] 1,000년도 더 이전, 명장 한니발 바르카 로마군을 격파한 칸나이 전투와는 다르다. [21] 위의 이미지를 보면 바이킹 특수 유닛 버서커와 맞아 떨어진다. [22] 게임상으로는 이집트 왕위를 가진 인물- 보통은 술탄 -의 봉신 용병단이다. [23] 바랑기안 가드 복무 중에 아버지가 승하할 경우 입대 중인 아들이 왕국으로 돌아와 즉위하게 되는데, 시스템상 이 귀환 시간에 딜레이가 없다. 즉, 아버지가 승하하면 바로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 그런데 이 아들이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를 치르고 있는 중 이었을 경우,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지휘관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전투를 지휘하게 되는 것. 사실은 일종의 버그에 가깝다. [24] 가난한 북유럽 영주의 기준에선 정말 큰 돈이다. 그나마 왕급 작위면 모를까, 구석 백작 같은 경우는 몇십 년이 걸려도 모으기 힘든 막대한 액수인 경우도 있다. [25] 얼핏 보면 나쁜 트레잇같지만, 실은 매달 위신 보너스를 주는 좋은 트레잇이다. 특히 위신으로 건물을 올릴수 있는 부족정에선 정말 중요하다. [26] 동로마 제국으로 플레이할 경우 바랑인 친위대원 중 한 명이 하필 공주랑 눈이 맞아서 연인이 되는 이벤트가 있다. 이때 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주어지는 선택지 중에 그 친위대원의 눈을 뽑고 거세해버리는 선택지가 있다. 그래서 그 이벤트와 연관된 이벤트 아니냐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 [27] 출산율 -15%, 봉신관계도 -5, 같은 트레잇끼리 관계도 +30 [28] 아마 동로마 제국이 고대 시절 동성애로 유명했던 그리스 지역이 주 영토라 넣은 개그성 이벤트로 보이는데 실제 고증대로 따지면 적합한 이벤트가 아니다. <크루세이더 킹즈 2> 배경 시기의 그리스 지역은 기독교 전파와 그에 따른 황제들의 동성애 탄압으로 동성애 기조가 사라진 상태였다. 즉, 동로마에 가서 동성애를 배울 수 없으며, 설령 배웠다하더라도 거기서 바로 처형되지, 몸 성히 돌아올 수가 없다. [29] 다만 지도자마다 개성이 풍부한 대사를 구사하게 된 것은 <문명 6>에 들어와서이긴 하다. [30] 컨셉면에서는 <문명 4, 5>에 나왔던 카타프락토이의 연장선이다. [31] 전반적인 보너스가 해군 쪽에 몰려 있는 게 크다. 문명 시리즈는 대대로 해전의 비중이 실제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낮다는 전통 아닌 전통이 있기 때문이다. [32] 징병한 도시국가 유닛하고 용병하고 무슨 관계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검은 부대'라는 용병군을 거느린 것으로 유명한 헝가리 왕 마차시 1세도 도시국가 징병과 관련된 보너스를 가지고 있으며, 그의 어젠다의 원문을 보면 이 유닛들을 직접적으로 '용병들'(mercenaries)이라고 지칭한다. [33] 다만 여기의 바랑인 근위대는 밀라노 군 중 일부를 돌려서 재건한 것이라 잉글랜드나 스칸디나비아 출신들이 아닌 밀라노 출신들로 구성되어 있다. [34] 서유럽의 사회문화적 발전상이 동방 세계를 따라잡기 시작한 기점은 대략 길드와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중세 후기 무렵이었다. [35]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은 지중해 고둥(Murex)이라는 생물에게서만 추출할 수 있는데 이 과정이 정말 복잡하고 노동 집약적으로 이루어져 다른 국가는 생산하기에 엄두도 낼수가 없는 염료였다. [36] 북유럽보다는 좀 더 부유했던 프랑스나 신성 로마 제국의 귀족들도 황제나 왕, 교황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하게 되면 '비단을 사는 것' 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전매품인 자줏빛 비단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사적인 거래로 살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꼭 사고 싶어했다. 동로마를 동경하던 프랑크인이 동로마 제국 정부의 전매품 통제령 때문에 비단을 구입할 수 없게 되자 순식간에 극단적인 동로마 반대파로 태세를 바꿔 동로마에 대한 폭언과 욕설을 가득 남긴 일화까지 있을 정도이다. [37] 십자군에서 노르웨이 십자군은 큰 공을 세우면서도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았으며 이를 통해 노르웨이인 수천여 명의 모집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38] 이 사건은 미국의 중세 드라마인 <미디벌 오디세이> 시즌 4에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