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지 전반의 항공뷰
유프라테스 강을 굽어보는 시타델의 성탑
1. 개요
시리아 동남부의 고대 도시 유적. 데이르에조르에서 동남쪽, 아부카말에서 서북쪽으로 각각 40km씩 떨어진 유프라테스강 서안의 언덕에 입지한다. 고대 파르티아와 로마 제국기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접경부의 국경 요새였고, 난공불락을 자랑했으나 256년 사산 제국의 샤푸르 1세에게 함락된 후 버려졌다. 이후 재기하지 못하고 폐허로 남았다가, 1920년대 들어 발굴이 시작되었다. 3세기 때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어 '동방의 폼페이라는 별명과 함께 학계의 주목을 받았으나, 인근 팔미라와 마찬가지로 2010년대 다에시의 도굴과 약탈로 크게 파괴되었다.
2. 역사
성벽에서 바라본 유프라테스 강변
메소포타미아 문명기부터 도시가 존재했고, 함무라비 대왕을 언급한 점토판이 발견되었다. 당시 지명은 다마라였는데, 바다 민족의 침공을 전후로 한 암흑기에 파괴되어 잊혀졌다. 그러던 기원전 300년경 셀레우코스 1세에 의해 재치 도시가 세워져 아람어로 성채란 뜻인 두라로 명명되었다. 다만 그리스 인들은 셀레우코스의 유럽 출신을 기리며 에우로포스라 불렀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양대 수도인 안티오키아와 셀레우키아 사이의 유프라테스 강 도하처에 입지한 덕에 도시는 점차 성장하였다.
2.1. 파르티아 왕조기의 번영
주요 성문인 서벽의 팔미라 문
기원전 113년, 파르티아 제국의 미트리다테스 2세가 일대를 점령했다. 전란으로 파괴되었던 도시는 중앙의 아고라를 중심으로 한 장방형 도시 (히포다무스식 시가지)로 재건되었다. 2세기 이상 이어진 파르티아의 안정적인 지배 하에 에우로포스는 성벽 내부가 모두 주거지로 바뀌는 등, 군사 요새의 성격에서 민간 도시의 성격으로 바뀔만큼 발전하였다. 주민 구성 역시 기존의 그리스계에 셈계, 이란계 이주민들이 더해져 다양해졌다. 이는 후일 그리스어, 라틴어, 파르티아어, 아람어, 고대 아랍어, 히브리어 등 여러 언어로 적힌 명문들이 출토되어 증명되었다. 파르티아 시기에 기존의 그리스 양식과 현지의 메소포타미아 양식이 혼합된 도시 구조가 완성되었다. 건축 양식에는 파르티아의 영향력이 미미했으나, 미술에는 일부 영향이 있었다.
절벽 위에 솟은 성벽
자연 해자를 형성해주는 남벽의 와디
기원전 1세기의 지리가 이시도로스는 에우로포스가 고대의 두라라고 기록하여, 후대 학자들의 위치 비정에 결정적인 단서를 남겼다. 당시 에우로포스는 파르티아의 국경 거점 도시였고, 기원전 50년을 전후로 하여 성벽이 둘러졌다. 서기 1세기에는 기존의 제우스, 아르테미스 신전에 더하여 미트라 등 팔미라 및 현지 신들의 성소가 세워졌다. 그러던 114년 트라야누스의 로마군이 에우로포스를 점령하였고, 제3 키레나이카 군단이 팔미라 성문 서쪽에 개선문을 세웠다. 117년, 트라야누스의 사망과 함께 로마군이 철수하며 파르티아가 수복하였으나 165년 루키우스 베루스의 로마군이 재차 점령하였다. 이후로 에우로포스는 로마령으로 유지되었다.
2.2. 로마 제국의 국경도시
바알 (벨) 신전 유적
사무엘의 지목을 받는 다윗을 그린 두라 시나고그의 프레스코화.
로마 지배 하에서도 주민들은 상당한 자치를 누리며 팔미라와 마찬가지로 셈계 정체성을 유지했고, 그리스 문화는 점차 희석되었다. 일례로 에우로포스에는 로마식 신전, 김나지움 (체육관), 극장 등이 부재했고 금석문 기록이나 시의회 등 관료 조직이 미비했으며 도시 규모가 컸음에도 자체적인 화폐 주조소 역시 없었다. 194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종종 반란을 일으키던 시리아 총독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시리아 속주를 삼분했는데, 에오로포스는 그중 시리아 코엘레에 속하였다.
한동안 민간 도시로 유지되던 에오로포스는 198년 세베루스 황제의 오스로에네 (북부 메소포타미아) 및 파르티아 원정의 출정지가 되며 군사적 중요성을 회복했다. 209년, 에우로포스 성의 북부에 분리벽이 세워져 형성된 북성 구역에 로마 군단의 주둔지가 들어섰다. 그 끝부분의 절벽 위에는 사령관의 궁전이 세워졌고, 216년에는 병사들을 위한 작은 경기장이 추가되었다. 군단기지화와 함께 군인들의 계급에 따라 일대의 농지가 면적 및 비옥함의 순서로 주어졌다.
민간 부문의 발전도 계속되어 244년, 성벽가의 한 가정집이 시나고그로 개조되었다. 비슷한 시기 또다른 가정집이 기독교 예배당으로 개조되었다. 두 건물 모두에서 로마 튜닉과 파르티아 바지를 입은 인물들이 묘사된 프레스코 벽화가 출토되어, 당대 에우로포스의 다양상을 드러낸다. 254년에는 '셀레우코스 니카토르의 에우로포스'란 칭호 하에 콜로니아, 즉 식민도시 지위가 부여되었다. 당시 인구는 약 1만 전후로 추정된다.
2.3. 샤푸르 1세의 함락과 파괴
포위 당시 수비대가 성벽 강화를 위해 덮어버렸던 시나고그 일대
로마령 시리아의 정복을 위해 사산 제국의 샤한샤 샤푸르 1세는 시리아의 관문인 에우로포스를 노렸다. 238년, 254년의 공격은 실패하였고 이후 로마군 역시 (시가지를 희생하면서까지) 성벽을 보강하며 공격에 대비했다. 사산 제국군의 땅굴 작전에 대응하기 위해 로마군은 성벽 밖에 보축을 더해 두께를 늘리고 진흙 벽돌에 덧칠을 하는 등의 방법 외에도 성벽 내부와 접한 건물 및 골목을 돌과 잔해로 메워버리는 강수를 두었다. 그 위에는 제방 형태의 내벽이 추가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성벽에 인접했던 시나고그, 기독교 예배당, 미트라 신전 등이 함락 전에 매몰되어 후일 고스란히 옛 벽화가 보존된 채로 발굴될 수 있었다. 이렇게 성벽이 강화된 에우로포스는 로마령 시리아가 자랑하는 천혜의 요새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지하 갱도 폭발로 파괴된 성벽 부분
256년, 샤푸르는 대군을 동원해 에우로포스를 포위하였다. 그는 우선 주요 성문인 팔미라 문 일대를 공략했으나, 수비대의 결사 항전에 격퇴되자 서남쪽 성탑에 공격을 집중했다. 공격군이 땅굴을 파자 로마군 역시 대응 땅굴을 팠고, 양측이 만나자 사산 병사들은 황으로 만든 화약 폭탄을 터뜨려 로마군에 큰 피해를 입히기도 했다. 한 갱도에선 그렇게 죽은 로마군 유해 19구와 화학 폭탄을 직접 터뜨린 사산 병사의 유해가 발굴되기도 하였다. 이는 여태껏 확인된 역사상 첫 화학전으로 알려져 있다. 공격이 연달아 실패하자 샤푸르는 두꺼워진 성벽을 더 깊숙한 지하에서 우회하는 장거리 갱도 굴착을 지시했고, 그중 몇개가 서남쪽 시가지에 닿자 총공격에 나섰다. 결국 불멸의 요새 에우로포스는 함락되었고, 샤푸르는 생존자 전부를 포로로 잡아갔다. 이후 도시는 버려져 재건되지 않았다.
2.4. 256년 이후
20세기 말엽, 유적지 남부 언덕에 대한 발굴 및 보수 작업
파괴된 후 중세 아랍인들은 이곳에 살라흐 앗 딘이 주둔했다는 설화와 함께 살리히예로 명명되었고, 이는 서북쪽의 현대 마을의 지명으로 이어져 있다. 오스만 제국기에는 '피의 성채'란 뜻인 칸 칼레시라 불렸다가, 1885년 미국 조사팀의 당도 후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관심이 이어졌다.
다에시 강점기의 도굴 흔적
1920년 참호를 파던 병사가 벽화를 발견하며 미국-프랑스 팀의 발굴이 시작되었고, 1937년까지 일대를 발굴한 프랑스 학자들에 의해 현재와 같은 두라-에우로포스라 명명되었다. 1986년부터는 시리아-프랑스 합동 조사팀이 발굴에 나섰다.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도 올랐으나, 2014-15년 ISIL이 자금 마련을 위해 무차별 도굴과 약탈을 하며 파괴를 겪었다.
3. 유적
유적지 개황
유적지 개황 간략판 (남북 반대)
수백년간 일대의 중심지로 성장하다, 서기 3세기 중반에 일부 파괴된 채로 흙 속에 묻혀 방치된 덕에 두라는 3세기 로마 제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동방의 폼페이'로 평가된다. 유물들은 대부분 데이르에조르 박물관 및 예일대학교 미술 갤러리에 소장 중이다.
좌측이 시타델, 우측이 스트라테고스 궁전 언덕이다
유적지의 넓이는 45 헥타르, 해발 고도는 약 220m인데 최대 20m의 편차가 있다. 유적 내부는 크게 서부의 종교 시설 구역, 동부의 시타델, 북부의 로마 군단기지로 나뉜다. 그중 프레스코화가 발견된 서부와 여러 조각상이 발견된 시타델 옆의 스트라테고스 궁전이 주요 발굴지였다. 유적지 중 제대로 발굴된 곳은 일부고, 나머지는 대부분 미발굴지로 남아있다.
로마군 보병 방패 | 로마군 기명의 말 갑옷 |
발굴을 통해 발굴된 무수한 유물들 중에, 여러 정교한 조각상과 생활 용품들을 제치고 학자들의 관심을 받은 것은 바로 도시의 성격에 부합하는 군사 유물들이었다. 두라에선 현존하는 유일한 로마군 방패 (스트라툼)과 기병대의 투구 및 철갑 말갑옷이 발견되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3세기 로마 기병이 고구려 개마무사와 유사한 비늘 갑옷으로 전신 무장했음을 증빙하고 있다.
3.1. 시타델
유프라테스 걍변의 암석 절벽 위에 세워진 내성으로, 높고 두터운 성벽을 자랑한다. 강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형성되었고, 동쪽의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굽어보고 있다. 본래 셀레우코스~파르티아 시기에는 남쪽의 언덕이 시타델이었으나, 2세기 로마제국 하에서 스트라테고스 궁전으로 전환되었고 현 위치에 새로 시타델이 세워졌다. 둘레 300m, 높이 20m 의 성벽은 압도적인 장관을 선사한다. 다에시 강점기에도 일대는 가장 적은 피해를 보아 온전한 편이다.
3.2. 시나고그
내부의 벽감과 프레스코화
(기단부 외의) 형태가 제대로 남아있는 세계 최고의 시나고그. 처음에 발굴한 학자들이 신전이나 성당 유적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유대교에서 보기 드문 생생한 프레스코화로 주목받는다. 주로 출애굽기에 나오는 내용이 묘사되어 있고, 교육용으로 그려진 곳으로 보인다. 초기 기독교 미술에 영향을 준 고대 유대교 미술의 대표적인 예시이자, 당시 유대인들이 그리스어나 아람어를 주로 사용했음을 알려준다. 벽감에는 토라 경전이 안치되어 있었다.
3.3. 극장
로마 제국 산하 도시인 것을 감안할 때에, 시가지의 규모에 비해 심각하게 공공 오락 시설이 적은 에우로포스의 거의 유일한 위락 시설이었다. 군사도시 답게 극장 주변도 벽으로 둘러져 있고, 형태가 거의 타원형으로 특이하며 부조도 없는 등 매우 투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