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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그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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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시초
2.1. 타그마의 시초2.2. 타그마의 성장
3. 만지케르트 전투 디라히온 공방전 이후
3.1. 아나톨리아 동부 상실과 타그마의 소멸3.2. 콤니노스 왕조의 재건
4. 몰락5. 대중 매체에서

1. 개요

동로마 제국 상비 중앙군. 복수로 타그마타라고 쓴다. 단어적 의미로는 약 400~600명으로 이루어진 연대의 의미다.

2. 시초

2.1. 타그마의 시초

로마 제국 말기부터 일정 전력의 부대를 반돈, 타그마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타그마라는 단어는 7세기 말엽부터 상비 중앙군이라는 의미로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전 황제들이 이슬람의 공세로 테마 제도를 공고히 하여 지역방어를 확충하자, 지역의 테마군을 이끄는 지방관인 스트라테고스, 즉 도독들이 테마 군대를 이끌고 반란을 획책하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또한 7~8세기 동안 로마제국이 국력을 회복하면서 수세적 의미의 지방군이 아닌 재수복 전쟁에 투입될 중앙군의 필요성 또한 강화되었다. 결국 동로마 황제들은 스트라테고스들의 반란을 억제하고 고토 수복 전쟁의 중심 전력이 될 중앙군을 건설해야 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주둔하는 황실 친위대의 숫자와 질을 대폭 상향시키면서, 단지 황실 경호와 의전이 아닌 중앙 야전군으로 재편했다.

다만 부대들 자체의 역사는 테마들보다는 다소 일천하다. 역할은 말기 로마군에서 코미타텐세스가 하던 임무를 계승했다고 볼 수 있으나, 정작 말기 로마군 코미타텐세스 부대들을 혈연, 부대 직제 등에서 계승한 건 테마 부대들이었기 때문이다. 코미타텐세스 리미타네이가 있었던 말기 로마군에서 리미타네이가 이슬람 맹진 당시 죄다 날아가자 코미타텐세스로 땜빵했고, 이후 여력이 생길 때마다 정예 상비 부대를 만들다보니 이렇게 되었다.

2.2. 타그마의 성장

야전군 재펀 경향은 8세기 중엽 콘스탄티노스 5세 시기에 더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콘스탄티노스 5세는 성상숭배논쟁에서 성상파괴운동을 지지했고, 그래서 정통 교리를 지지하던 귀족들에 대항한 물리적 강제력이 필요했기에 중앙 타그마들을 강화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성상파괴론자들을 대거 타그마에 받아들이며 일종의 친위세력을 형성코자 한 것이다. 그 결과 기존의 스콜라이 팔라티나이 친위대와 에테리아는 군제 개편을 거쳐 강화, 확대되었고 5세기에 창설 되어 궁정 경호병의 성격을 가졌던 엑스쿠비토레스, 즉 엑스쿠비티는 급격한 중기병화와 지휘관의 격상을 거쳐 야전군으로 재편되었다.[1]

성상파괴론이 끝난 후로도 타그마는 계속 성장했다. 8~9세기경 제국이 성상파괴의 홍역을 마친 뒤, 제국군은 이 시기 확충된 타그마들은 재정복전쟁의 중역으로 참전하였다. 기병화는 더더욱 강화되어, 주요 타그마들은 9세기경이 되면 2/3가 기병으로 구성되었다. 그 결과 방어 역할을 수행하는 테마군이 적을 유격전과 농성전으로 붙들고 있는 동시에, 타그마군이 적 영토 깊숙히 전진하여 파괴하는 구조가 정립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더해 9세기 경부터 유입되기 시작하는 바랑인 용병대가 정규군화하며 바랑인 친위대가 건설되고, 타그마는 더욱 거대해졌다. 결국 10세기 ~ 11세기경에 들어서면 동로마 제국은 총 병력 25만명을 헤아리는 군사 강국의 위상을 회복했다.

3. 만지케르트 전투 디라히온 공방전 이후

3.1. 아나톨리아 동부 상실과 타그마의 소멸

제국 중앙군은 11세기 들어서도 꾸준히 확대되었고, 콘스탄티노스 9세는 셀주크 튀르크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해 동부 전선에 무려 6만 명에 달하는 기병을 배치시켰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중앙군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렇게 제국 동부에 배치된 중앙군은 미하일 6세 치세에 이사키오스 콤니노스, 카타칼론 케카브메노스 등이 획책한 반란에 휘말리게 된다. 내전은 군부의 승리로 돌아가 미하일 6세가 퇴위하고, 이사키오스 콤니노스가 이사키오스 1세가 즉위하였지만 그 과정에서 펼쳐진 하스몬 다리 전투에서 반란군과 진압군 양쪽 모두에게 상당한 인적 손실이 발생했다. 내전 이후 그럭저럭 유지되던 제국의 군비 부담이 폭증했고, 또한 이사키오스 1세의 쿠데타는 시민, 원로원들에게 중앙군에 대한 불신을 심어주게 되었다. 이후 즉위한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시민들의 중앙군에 대한 불신과 재정적 부담 때문에 중앙군 대신 테마의 향병 위주로 동부전선을 재편했지만, 향병들은 뛰어난 기동력을 지닌 튀르크인들의 침입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다.

이어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패배하며 제국 중앙군은 거대한 피해를 입었다.[2] 1071년, 기병의 주 산지인 시리아 서북부와 아나톨리아 전역을 셀주크 제국에게 잃었고 계속되는 반란에 가용한 인적자원도 메말라갔다. 그러나 타그마군은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에도 그 수는 꾸준히 줄고 있었지만 유지는 되고 있었는데 훗날 아르콘토풀레의 모태가 될 아타나티가 만들어지는 등 아직 중앙군이 유지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1081년에 일어난 디라히온 공방전으로 이 중앙군은 1차적으로 붕괴되고 만다. 이 전투에서 바랑인 친위대와 스콜라이, 엑스쿠비티, 아타나티의 남은 병력이 대부분 증발하면서, 7세기부터 내려오던 황실 중앙군의 계보는 단절된다.

3.2. 콤니노스 왕조의 재건

콤니노스 왕조는 1081년부터 1093년까지 지옥의 3중전선을 겪고있었다. 서쪽에서는 시칠리아 왕국의 노르만족 침략자들이, 북쪽에서는 수십만의 페체네그 기마전사들이, 동쪽으로는 튀르크 계열의 룸 술탄국과, 같은 튀르크 계열이지만 반독립적으로 움직이는 에미르 챠카와 아불 카심이 건설하는 투르크멘 해적들이 쇠락한 제국을 갉아먹고 있었다.

알렉시오스 1세는 축소된 제국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새 중앙군이 필요했다. 먼저 그는 아타나토이의 소수 잔존병들과 수십년간 지속된 전쟁으로 죽어나간 아나톨리아 군사 귀족들의 고아들을 모아 아르콘토풀레 타그마를 건설했고, 잉글랜드와 스칸디나비아에서 모병을 실시해 바랑인 친위대를 재편성했다. 또한 임시 봉급지불제도인 프로니아 제도를 통해 마케도니아, 니코메디아, 트라키아 지역에서 중산 농민과 소귀족들로 구성된 타그마들을 모았는데, 이전 역사가들이 황실 근위대의 성격으로 이름붙였던 엑스쿠비티, 누메로이 등등과 달리 단지 모집한 지역의 이름을 딴 군제, 즉 '연대'의 의미로 타그마가 쓰이기 시작했다.

레부니온 전투 이후의 연승으로 얻은 많은 타종족들의 전쟁포로들 또한 프로니아 제도로 녹을 받거나 무인지대화한 아나톨리아에 땅을 받고 재이주되어 타그마로 편입되었는데, 이들이 바르다리오테, 투르코폴레스 등의 부대를 이루기도 하였다.

이러한 타그마 재건은 효과를 보아, 그의 아들 요안니스 2세 시기에는 4~5만에 이르는 병력으로 시리아 북부를 공격할 수 있을 만큼 중앙군이 성장하였다.

이들의 인적 구성은 중산층 부농들이나 군소 군사 귀족의 자제들, 콘스탄티노폴리스 관리들의 아들들이었는데 초기에는 마케도니아, 트라키아, 니코메디아에서 중심적으로 모였지만 [3] 니케타스 코니아테스가 나중에 동, 서 타그마라고 부른것을 볼 때, 재건된 아나톨리아 서부도 큰 모집처중 하나였을것이다.

타그마라는 단어가 친위대나 근위대를 넘어 중앙군의 일정 전투력을 지닌 부대로써 사용되자, 똑같이 대대 혹은 연대를 의미하는 반돈, 알레기온이라는 단어 또한 자주보이게된다.

4. 몰락

그러나 중앙 정부의 지원으로 중무장하고 집중화된 타그마는 능력있는 황제의 관리가 없으면 운영되기 힘들었다. 1180년 즉위한 알렉시오스 2세는 이 거대한 행정체제를 운영하기에는 너무 어렸고, 결국 안드로니코스 1세의 쿠데타로 정권을 넘겼다.

안드로니코스 1세와 그를 몰아내고 뒤를 이은 앙겔로스 왕조의 황제들은 타그마 중앙군을 제대로 운영할 능력이 되지 못했고, 병력은 각지에 흩어져서 3~4차 십자군에게 격파당하거나, 반란을 획책했다. 결국 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 중, 끝까지 저항하던 중앙군은 괴멸되고 만다.

이후 니케아 제국의 테오도로스 1세와 요안니스 3세가 마지막 여력을 쥐어짠 끝에 중앙군은 다시 부활해 8천명까지 불어났고 이는 라틴 제국과의 전쟁에서 큰 보탬이 되어 1261년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의 기반이 되어 주었으며 미하일 8세 시기에는 1260년대의 다중전선 속에서도 각 전선마다 최소 수천명, 작정하고 조직하면 1만명 이상은 넘겨서 파견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된다.

그러나 이렇게 늘어난 중앙군은 돈먹는 하마였기에 안드로니코스 2세 시기에 재정 적자를 면하기 위해 군축을 단행하면서 중앙군은 다시금 무너진다. 추후 자신의 이러한 군축이 멍청한 짓이었음을 카탈루냐 용병의 통수, 튀르크 유목민들의 서진 등으로 깨달은 안드로니코스 2세가 뒤늦게나마 군사력 재건에 힘쓰면서 안드로니코스 3세 시기에 다시금 해외 원정이 가능할 정도로 회복은 되지만 안드로니코스 3세가 사망하고 터진 흑사병으로 인한 인구 자원 감소 + 수십년간 이어진 팔레올로고스 내전으로 중앙군은 회복 불능의 수준까지 떨어지고 말았고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시기가 되면 제국군은 외국 용병이나 징집 가능 인원, 중앙군 다 합쳐서 7천여명에 불과할 정도까지 떨어지고 만다.[4]

5. 대중 매체에서

문명 6에서 비잔틴 문명의 지도자 바실리오스 2세가 생산할 수 있는 고유 유닛으로 등장한다. 기사를 대체하는데, 과학 기술인 등자 대신 사회 제도인 신권을 연구해야 생산할 수 있으며 인접한 전투 유닛의 전투력과 종교 유닛의 신학 전투력을 높여 준다. 바실리오스 자신도 기병 계통 유닛에게 전투력 보너스를 제공하는 지도자 특성을 가지고 있고 비잔틴의 고유 지구인 히포드롬이 중기병 유닛을 무료로 제공하므로, 이래저래 비잔틴을 강력한 정복 문명으로 자리잡게 해 준다.


[1] 이전 엑스쿠비티는 서유럽으로 치환하면 백작급의 단위인 '코메스'가 지휘했다면, 개편 후 엑스쿠비티는 동, 서방 야전사령관직인 '도메스티코스'가 지휘했다. [2] 다만 만지케르트 전투에 참여한 제국 전력 중 상당수는 테마의 향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3] 당시 역사가들이 마케도니아 타그마, 트라키아 타그마 라고 지역명을 적었는데, 거기에 주둔했다기보다는 해당 지역에서 모인 연대라는 뜻에 가깝다. [4] 7천명이면 적지 않은 숫자로 보일 수 있지만 이건 말그대로 훈련 안 받은 징집 가능 인원까지 닥닥 긁어모은 인원이다. 거기다 외국인 용병까지 제하면 실제 타그마에 해당되는 중앙 상비군은 이보다도 수가 더 적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