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쿠마에의 시빌라가 집필하여 로마 왕국의 마지막 왕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는 예언서. 고대 로마의 긴 역사 동안 로마인들의 정책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책으로 유명하다.
2. 상세
전승에 따르면, 아폴로로부터 영원히 살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았지만 영원히 젊을 수 있는 능력은 받지 못해 수 세기 동안 늙어가던 쿠마에의 시빌라가 로마의 7번째이자 마지막 왕인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를 찾아가 예언서 9권을 바치며 막대한 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타르퀴니우스는 웬 볼품없는 노파가 터무니없는 가격에 형편없는 책을 팔려고 한다며 거부했다. 그러자 시빌라는 3권을 불태우고 나머지 6권을 같은 가격에 사라고 요구했다. 타르퀴니우스가 이번에도 거부하자, 시빌라는 또 다시 3권을 불태운 뒤 마지막 3권을 같은 가격에 사라고 권했다. 타르퀴니우스는 그제야 그 책의 진가를 깨닫고 3권을 원래 가격에 사기로 했다. 그는 이 책들을 로마로 가져가서 유피테르 신전 아래에 있는 지하실의 석관에 보관하고, 안 좋은 일이 생기거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이 오면 그 책을 열람했다고 한다.타르퀴니우스가 혁명으로 축출되면서 왕정이 폐지되고 공화정이 들어선 후에도, 시빌라의 예언서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처음에는 귀족 2명이 예언서 관리를 맡았고, 기원전 367년부터는 귀족과 평민 각 5명씩으로 구성된 일군의 벼슬아치들이 '데켐브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decemviri sacris faciundis: 10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로서 예언서를 관리했다. 기원전 1세기부터는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quindecimviri sacris faciundis: 15명의 신성한 책 관리자)'가 편성되어 책 관리를 맡았다.
이들은 대체로 전직 집정관이나 전직 법무관이었다.[1] 그들은 평생 이 직책을 맡았고, 다른 모든 공직에서 면제되었다. 또한 예언서들을 철저히 안전하게 보관하고 책의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평생 함구해야 했다. 그들은 원로원의 명령이 내려지면 유피테르 신전 지하실 석관에 보관된 예언서를 살펴보고 특정 문구를 찾아내서 원로원에 알리는 역할을 수행했다. 로마인들은 전염병이 창궐하거나 자연재해가 발생하거나 전쟁에서 패하는 등 국난에 처할 때마다 예언서를 살펴보고, 그 사건에 가장 적합한 에언을 찾고 이를 해석한 뒤 정책에 반영했다.
고대 기록에는 로마 정부가 예언서에 따라 정책을 집행한 수많은 사례가 열거되었다. 기원전 390년 알리아 전투 패전으로 로마가 켈트인들에게 짓밟힌 뒤, 독재관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는 신전을 재건하고 정화를 실시하는 절차를 어찌 수행할지 알아보기 위해 시빌라 예언서를 참고했다. 기원전 218년 겨울 한니발 바르카가 이끄는 카르타고군이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군을 상대로 완승을 거두자, 로마인들은 시빌라 예언서에 따라 대규모 희생제를 치렀다.
그럼에도 한니발이 연이은 승리를 거둔 끝에 기원전 216년 칸나이 전투에서 7만에 달하는 로마군을 궤멸시키자, 원로원은 '예언서에서 인간을 희생제물로 쓰라고 했다.'는 이유로 그리스인 2명과 날리나 남녀 2명, 총 4명을 포룸에 생매장했다. 기원전 205년에는 예언서에서 "이다 신(神)들의 어머니를 로마로 데려온다면 낯선 사람이 이탈리아에서 추방될 것이다."라는 예언이 발견되었다. 이에 원로원은 키벨레의 상석을 프리기아에서 모셔오기로 했고, 기원전 204년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의 주관하에 상석이 로마로 옮겨져 승리의 신전에 놓여지고 특별 경기가 개최되었다.
이후에도 재난이 닥치거나 국가의 중대한 결정을 내릴 때마다 참고되던 시빌라 예언서는 술라의 내전이 진행되던 기원전 83년 로마에서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이에 원로원은 사모스, 시칠리아, 에트루리아, 아프리카 등 각지의 사원들에 사절들을 보내 시빌라가 남겼다는 예언서들을 가져오게 했다. 이후 각지에서 모인 예언서들의 진위 여부를 판별한 뒤 기원전 76년 푸블리우스 가비니우스, 마르쿠스 오타킬루스, 루키우스 발레리우스 등이 약 1천 줄에 달하는 예언서를 편찬했고, '퀸데킴비리 사크리스 파키운디스'가 승인하여 새 예언서로 확정한 뒤 재건된 유피테르 신전 지하실 석관에 보관하였다.
기원전 57년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에게 추방된 이집트 파라오 프톨레마이오스 12세가 원로원에 자신을 파라오직에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했다. 원로원은 관리자들로부터 예언서의 내용을 전달받은 뒤 이집트에 군대를 보내지 말고 외교로 해결하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시리아 총독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는 프톨레마이오스 12세로부터 거액의 뇌물을 받고 기원전 55년 이집트로 쳐들어가 알렉산드리아를 접수한 뒤 프톨레마이오스 12세를 복위시켰다. 그런데 기원전 54년 티베르 강이 범람하면서 로마 시가 피해를 입자, 로마인들은 이를 신이 천벌을 내린 것이라 여기고 가비니우스를 신성모독 혐의로 재판에 회부했다. 하지만 가비니우스는 폼페이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지원 덕분에 무죄 선고를 받았다.
기원전 44년 초, 로마 전역에 "오직 왕만이 파르티아인들을 물리칠 수 있다"라는 예언이 시빌라 예언서에서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이에 많은 이들이 파르티아 원정을 단행하려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의도를 의심했다. 예언서 관리자 중 한 사람이었던 루키우스 코타가 카이사르의 원정 시작 직전에 개최될 3월 15일 원로원 회의 때 예언서 내용을 보고할 예정이었지만, 율리우스 카이사르 암살 사건이 벌어지면서 무산되었다. 기원전 18년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시빌라 예언서의 재편 작업이 이뤄졌고, 기원전 12년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레피두스 사망으로 폰티펙스 막시무스가 된 아우구스투스의 지시에 따라 시빌라의 예언서를 제외한 모든 예언서가 불태워지고 시빌라의 예언서는 팔라티노 언덕의 아폴로 신전 아래 금박 상자 2개에 보관되었다.
서기 64년 로마 대화재 이후에도 네로가 예언서를 접한 뒤 여러 신전에 제물을 바치는 등 로마의 역사 내내 시빌라 예언서는 매우 존중받았다. 그러나 363년 율리아누스가 페르시아 원정 때 열람했음을 끝으로[2], 더 이상은 로마 정부에게 존숭받는 대상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대중종교/국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비그리스도 신자이며 시인이던 루틸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나마티아누스는 플라비우스 스틸리코가 405년 그리스도교도들이 시빌라 예언서를 불태우는 신성모독을 저지르도록 조장했다고 비난했다. 반면 그리스도교에 가장 적대적인 역사가였던 조시무스를 포함한 다른 고대 역사가들은 스틸리코를 배후로 지목하지 않았다.
시빌라 예언서는 이렇게 사라졌지만, 오랜 세월 로마 정부의 정책에 반영된 만큼 지중해 세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를 모방한 '시빌라 신탁'이 동부 지중해 세계에 널리 유포되었다. 유대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는 시빌라 신탁의 일부 구절을 인용했고, 아테네의 아테나고라스를 포함한 2세기의 수많은 기독교 작가들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그리스도교 탄압을 중단해 달라는 청원서를 보낼 때 시빌라 신탁의 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기독교가 로마에 유익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애썼다. 고전후 시대에도 쿠마에의 시빌라의 예언과 이를 인용한 베르길리우스의 '전원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한 것으로 평가받았고,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경당 천정화 천지창조에 시빌라의 여러 모습을 기독교의 예언자들과 함께 그렸으며 레퀴엠 Dies irae곡의 가사에도 '다윗과 시빌라가 예언한 날'이라는 표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