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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풍함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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永豐艦事件
Yung Feng Incident
파일:external/www.gzzxws.gov.cn/W020110719603148340194.jpg
1923년 8월 14일 영풍함에 탑승한 쑨원, 쑹칭링 부부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쑨원의 광저우 귀환3.2. 6.16 사변3.3. 장제스와 영풍함의 도착3.4. 백아담으로 탈출3.5. 상하이로 퇴각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1. 개요

1922년 6월 16일 2차 광동 군정부 육군부장인 광동군벌 천중밍 쑨원의 북벌에 반대하여 일으킨 정변. 위기에 처한 쑨원을 장제스가 끝까지 보좌하면서 쑨원이 가장 신임하는 측근 중 한사람이 된다. 사건이 발생한 6월 16일을 따서 6.16 사변(六·一六事變), 천중밍의 이름을 따서 천중밍 사건, 쑨원이 광저우에서 고난을 겪었다고 광저우 몽난이라고도 한다. 간체자로는 永丰舰事件이라고 표기한다.

2. 배경

1920년 복건 남부에 주둔하던 광동군벌 천중밍은 쑨원의 계계군벌 루룽팅 토벌의 호소에 따라 루룽팅을 몰아내고 광동을 장악했다. 그와 쑨원은 노선 차이로 갈등이 있었지만 쑨원이 천중밍에게 광동성장과 월군사령관 자리 등을 약속하면서 천중밍은 쑨원을 광저우에 초청하여 1920년 11월, 쑨원은 국회의원들을 이끌고 광저우에 도착하여 2차 광동 군정부를 조직, 2차 호법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1922년 1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쑨원은 안휘군벌 돤치루이, 봉천군벌 장쭤린 직예군벌에 대항하는 반직삼각동맹을 체결하여 대대적인 북벌 준비에 착수했다.

하지만 연성자치론자 천중밍은 광동인들의 고난을 가중시키는 쑨원의 무모한 북벌에 반대하며 쑨원의 심복 등갱을 암살하는 등 강경하게 나왔다. 이에 쑨원은 천중밍을 육군부장을 제외한 모든 공직에서 해임하고 독단적으로 북벌에 나서게 되었다. 때마침 1차 직봉전쟁이 직계의 승리로 끝나 직계의 실질적인 수령인 우페이푸가 중국의 지배자가 되자 환계나 봉계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더 이상 쑨원과 합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긴 천중밍은 우페이푸와 연계하여 쑨원을 무력으로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3. 전개

3.1. 쑨원의 광저우 귀환

1922년 3월 21일 쑨원의 심복 등갱이 암살당하자 쑨원은 천중밍과의 동맹을 실패로 규정하고 천중밍을 광동성장, 내무부장, 월군 총사령관에서 해임했다. 왕징웨이 랴오중카이는 이에 반대하며 천중밍의 직위를 유지시킬 것을 건의했지만 쑨원은 듣지 않았다. 천중밍의 부하 예쥐가 12,000명의 군사들을 이끌고 천중밍의 복직을 요구했지만 쑨원은 묵살하고 5월, 강서성으로의 북벌에 착수했다. 랴오중카이는 천중밍의 위세를 잘 알았기 때문에 쑨원에게 천중밍과 담판을 지을 것을 촉구했다. 천중밍의 부대가 혜주에 집결하는 등 광저우의 분위기기 험악해지자 6월 1일 쑨원은 50명 정도의 경호원을 거느려 광저우로 돌아와 천중밍과 협상을 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천중밍은 쑨원이 비상 대총통에서 하야하지 않으면 담판 자체가 있을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쑨원을 말썽꾼으로 여기던 열강과 북벌이 시기상조라 여긴 중국공산당, 북벌이 광동의 재정에 많은 부담을 준 것에 불만을 가지던 광동의 신사층 역시 천중밍의 주장에 동조했다.

천중밍의 부하 예쥐는 "유독성 포탄을 발사하는 15센티미터 대포로 3시간 안에 60개 대대를 깡그리 박살낼 수 있다."라고 쑨원이 하야하지 않으면 독가스를 살포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쑨원은 물러서지 않고 6월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천중밍과 맞붙어 싸우겠다고 천명했다. 6월 14일 천중밍은 혜주에서 랴오중카이에게 전보를 보내 은행잔고를 모조리 이체하겠다고 알려왔다. 랴오중카이는 천중밍과 쑨원의 화해를 주선하기 위해 혜주로 갔으나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구금당했다.[1] 6월 14일, 천중밍의 부대가 광저우로 진입하여 관음산 월수루의 쑨원의 사령부를 포위했다.

3.2. 6.16 사변

장제스의 저서인《손 대총통 광주몽난기》에 따르면, 쑨원은 설마 천중밍이 무력공격을 감행하리라 여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6월 15일 밤, 어떤 장교가 천중밍이 '무엄한 행동'을 할 수 있으니 총통부를 떠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 경고했지만 쑨원은 이를 흑색선전으로 여겨 믿지 않았다. 6월 16일 0시, 비서와 참사관이 총통부를 찾아 "오늘밤 정세가 아주 험악하다."라고 보고했지만 쑨원은 역시 믿지 않았다.
"천중밍은 좋지 못한 인간이지만, 그런 짓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의 부하들도 인간의 도리를 모르는 사람은 아닐 터이니 그런 악행에 가담이야 하겠는가."

그리고는 그대로 자기 방으로 들어가 잠들었다.

새벽 2시, 백운산과 관음산에 주둔하고 있던 천중밍 군대가 천중밍의 지시에 따라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천중밍의 군영을 몰래 빠져나온 장교 중 하나가 천중밍 군대가 이미 야식을 마치고 2시에 출동하기로 해으며 쑨원을 죽인 자에게 20만 원을 주고 쑨원을 몰아내는데 성공하면 3일 간의 '휴가'를 주기로 했는데 이 '휴가'라는 광저우를 약탈할 기회라는 것이었다. 쑨원은 이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으나 새벽 3시에 함성과 군홧발 소리가 가까워지자 천중밍이 정변을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하고 호위대에게 방비태세를 취하도록 했다.

쑨원은 처음에는 반란군을 평정하는 것은 자신의 책임이라는 이유로 총통부를 떠나지 않겠다고 했으나 측근들의 강요로 총통부를 나서야 했다. 쑨원은 쑹칭링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임신 중이던 쑹칭링은 자신이 따라가면 방해가 될 것이라며 남았다. 쑨원이 총통부 밖으로 나왔을 때는 이미 도로가 대부분 차단되어 있었고 보초들이 깔려 있었다. 쑨원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해군사령부로 이동하기로 결정하고 보초들의 감시를 피해 움직였다. 재정청 앞에서 한무리의 천중밍 부대와 마주쳤으나 쑨원은 매우 당당하게 병사들 사이로 걸어갔고 병사들은 쑨원의 당당한 태도에 그를 한편으로 오해해 수하조차 하지 않고 보내주었다. 영한대로를 통과한 쑨원은 겨우 해주의 해군 총사령부에 도착했고 군함 초예에 탑승하여 각 함장들과 해군 총사령관 온수덕을 소집, 반란 토벌을 논했다.

쑨원이 총통부에 남아있던 걸로 알고 있던 천중밍 부대는 쑨원이 총통부를 떠나고 30분 후에 총통부를 공격했다. 쉐웨가 지휘하는 50명의 호위대는 길에 석유를 뿌려 불을 질러 배수진을 치고 악착같이 저항했으나 정오에 이르러 포격이 시작되었고 오후에 이르러 탄환이 바닥나면서 4시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쑹칭링은 인근의 농장으로 달아났고 이후 영국령 홍콩을 경유하여 쑨원에게 합류했다. 하지만 이때 유산을 하면서 불임이 되었다. 또한 총통부가 포격으로 불타는 바람에 쑨원의 원고와 각종 기록들이 소각되었다.

3.3. 장제스와 영풍함의 도착

쑨원은 각 함정들에게 황포 섬으로 집결할 것을 지시하고 쉬충즈가 지휘하는 북벌군에게 회군하여 토역군을 진압할 것을 지시했다. 6월 17일 아침, 외교부장 우팅팡, 위수총사령관 위방평이 초예에 탑승하여 쑨원에게 합류했다. 쑨원은 위방평에게 육군을 대사두에 집결시켜 해군과 호응하여 광저우를 탈환할 것을 지시했고 우팅팡에게는 각국 외교공관을 방문해 중립을 요구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대다수 인물과 세력들이 쑨원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오로지 천두슈가 영도하는 중국공산당만이 천중밍을 반혁명분자로 규정하고 천중밍과의 단절을 선포했다.[2]

영국과 미국은 쑨원이 단순한 이상주의자, 무모한 테러리스트를 넘어 공산주의를 추종하는 인물이라 의심하여 그의 몰락을 기뻐하였고 채원배 등의 옛 동지들도 호국전쟁 이후 약법과 국회를 회복시켰던 리위안훙이 6월 11일 베이징에서 다시 총통에 당선된 것을 지적하며 호법운동의 당위성이 없으니[3]대원수에서 사퇴할 것을 권고했다. 실제로 직예군벌들이 차오쿤을 대총통으로 옹립하기 위해 약법과 구국회 회복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었고 8월 1일 구국회가 복구되었다. 하지만 쑨원은 사퇴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17일 오후, 8척의 군함이 집결하자 쑨원은 황포를 출발, 차왜포대를 거쳐 백아담으로 향했고 대사두와 백운산의 천중밍 부대를 향해 포격을 가했다. 천중밍 부대는 함포 사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으나 육군이 부족했기 때문에 광저우를 탈환할 수는 없었다. 쑨원은 더 큰 배인 영풍함으로 이동했고 영파에 있던 장제스에게 <사태가 급박함. 신속하게 도착하기 바람.>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전보를 받은 장제스는 분노로 날뛰었다.
"예상한 대로야! 내가 진작부터 예상한 대로라니까!"

장제스는 장징장에게 편지를 써서 자신이 죽을 경우 가족들을 돌봐줄 것을 부탁하고 아내 천제루를 대동하여[4] 즉각 홍콩으로 이동하여 모터보트를 빌려 광저우로 이동했다. 6월 29일 장제스가 영풍함에 오르자 쑨원은 눈물을 흘리며 장제스를 반겨주었다. 장제스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자 천중밍은 장제스가 '매우 많은 음험한 계략'을 꾸밀 것이라 것이라 경고했다.[5]

이후 42일 동안 쑨원의 해군과 천중밍 부대 사이의 포격전이 벌어졌다. 장제스는 천제루를 갑판 아래에 은폐시키고 자신은 갑판에서 포격전을 지휘했다. 쉬충즈의 북벌군이 회군한다는 소식에 천중밍은 쑨원에게 화해를 제의했지만 쑨원은 거절했다. 이에 천중밍은 쑨원 휘하의 해군을 매수하여 3,4천 톤급 순양함 3척이 천중밍 측에 합류하여 쑨원에겐 1천톤급 이하의 소형 군함만 남게 되었다. 쑨원은 아직까지 자신이 통제하는 장주요새의 후방인 신조촌으로 퇴각하여 천중밍의 봉쇄를 피하려고 했다. 신조촌으로 가는 해로는 수심이 얕아 군함이 통과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쑨원은 가까스로 군함이 통과할 수 있는 위치를 발견하였다.

허나 7월 9일 오후 1시, 어주포대의 천중밍 부대가 장주요새를 공격했다. 수비대는 치열하게 저항하여 적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으나 해군 육전대 지휘관 손상부가 천중밍에게 투항해버리면서 장주요새는 천중밍에게 함락되었다. 이로 인해 주강 하류로 퇴각하는 일은 불가능해졌다.

3.4. 백아담으로 탈출

장주요새가 함락되자 쑨원은 영국 조계지 인근의 백아담 쪽으로 탈출을 기도했다. 천중밍이 영국 조계지까지 추격할 수는 없다는 점을 노린 것이었다. 함장은 백아담으로 가는 지형이 반군에게 유리하고 반군이 대포도 많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반대했으나 쑨원은 죽을 곳을 찾아야 살길이 열리는 법도 있다면서 백아담으로의 탈출을 강행했다.

7월 10일 함대가 출항했다. 오전 2시, 영풍, 초예, 예장, 광옥, 보벽 등의 군함들에게 해심강에서 삼산강 나루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새벽에 차왜포대의 천중밍 부대에 발포하라고 지시했다. 천중밍 부대 역시 즉각 응사했고 격렬한 포격전이 벌어졌다. 함대는 차왜포대의 많은 대포를 보고 전진하지도 퇴각하지도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쑨원은 "민국의 존망이 이 일전에 있다. 오늘의 싸움은 오직 전진이 있을 뿐이고, 후퇴는 일보도 용서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9시 30분에 기함인 영풍을 전진시켰다. 포대 뿐만 아니라 강 양쪽 기슭에 포병 2개 대대가 배치되어 함대에 포화를 퍼부었지만 20분 간의 항해 끝에 함대는 백아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풍함만 해도 6발의 포탄을 맞았으며 후속함대도 하나같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백아담에 도착하자 영국 해관세무사가 나타나서 백아담에 정박할 수 없다고 통보했다.[6] 이에 쑨원이 분노해서 외쳤다.
"백아담은 중국의 영토이고, 나는 중국혁명의 지도자이다. 나는 중국에서 행동할 자유가 있고, 내가 군함을 정박시키고자 하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정박시킬 권리가 있다. 그런데 왜 내가 그대의 간섭을 받겠는가. 나는 온몸이 담력으로 뭉쳐 있다. 천하에 나를 협박할 자가 있을 줄 아느냐!"

이에 영국 해관세무사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백아담에 정박한 후에도 고난은 계속되었다. 식수와 식량이 부족하였으며 무더운 더위가 병사들을 괴롭혔다. 유일한 희망인 쉬충즈의 북벌군도 7월 26일 소관전투에서 패해 남웅으로 퇴각했고 천중밍을 따르지 않는 광동군 제2군도 광서 방면으로 퇴각했다.

3.5. 상하이로 퇴각

"모두가 우리에게 맞서는 것 같았다."
쑨원의 회고.

쑨원은 북벌군이 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자 백아담에서 광주 영사단을 통해 천중밍과의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이 시점에서 쑨원의 권위는 매우 낮아져서 장제스조차도 쑨원에게 짜증을 느낄 정도였다. 그런데 8월 9일, 천중밍이 영풍함의 장병들을 매수하여 쑨원을 죽이고 다른 함선을 매수하여 외국 조계지에 포격을 가해 열강의 간섭을 유도하고 쑨원의 함대를 백아담에서 쫓아낼 계획이라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같은날, 광저우로 진격하던 북벌군 역시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이에 쑨원은 각 함장들을 소집하여 회의를 열었다. 함장들은 전국이 위험하여 광동을 떠나 상하이로 갈수밖에 없다고 의견을 떠났다. 이에 쑨원은 각국 영사들에게 광동을 떠난다는 것을 통보하였고 미국 정부에 안전한 퇴각을 주선해달라고 했지만 미국은 불간섭주의를 표방하며 거절했다. 하지만 영국 측에서 영국 해군 포함 HMS 마한함로 홍콩으로 쑨원과 장제스 부부를 이송해주겠다고 제안했다. 쑨원은 함대 장병들에게 1개월 분의 수당을 지급한 후 장제스 부부와 함께 오후 3시 45분 마한함에 탑승했다. 그날 밤 쑨원은 장제스와 함께 천중밍 토벌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다.
쑨원:"나는 이제 여생이 10년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네. 자네는 아직도 50년은 더 살 수 있을 테니까, 주의를 위해서 분투하고 자중해주기 바라네."
장제스:"저도 이제 36세가 됩니다."
쑨원:"우리 당의 혁명은 이렇게 커다란 재난을 당하고 있네. 그런데도 우리는 목숨을 잃지는 않았어. 앞으로도 생명을 빼앗기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겠지. 그러나 자네가 선두에 서서 쉬지 않고 앞으로 50년을 분투해도 혁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모자랄 줄 아네."

홍콩에 도착한 쑨원 일행은 8월 10일 새벽, 소련의 호화 정기 여객선에 탑승하여 상하이로 출발했다. 8월 14일 오전, 쑨원은 상하이에 도착하여 군중의 환영을 받았다. 천중밍이 반란을 일으킨지 55일 만이었다.

4. 결과

쑨원을 축출한 천중밍은 광동 최고사령관에 취임했으며 우페이푸로부터 광동과 광서의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일부 보도에 따르면, 우페이푸는 쑨원 축출을 축하하며 천중밍에게 500만원을 보냈다고 한다. 연성자치론자들 또한 쑨원의 축출을 환영하며 이를 연성자치론의 승리라 환영했다.

하지만 쑨원은 상하이에서 국민당을 재건하며 천중밍에 대한 반격을 계획하고 있었다. 천중밍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한 중국 공산당은 천중밍을 지지한 광동성 조직책임자 담평산을 면직시키고 천궁보에게 경고 처분을 내리며 당내의 친천중밍 세력을 엄히 징계했다. 중국 공산당 역시 2.7 사건으로 우페이푸를 비롯한 군벌 세력과의 합작을 포기하게 되어 국민당과 손잡는 길만이 남아 있었다. 1922년 9월, 바이마르 공화국, 소련과 연계하려던 쑨원의 외교문서가 천중밍에게 노획되면서 이것이 홍콩 언론을 통해 폭로되었고 바이마르 공화국은 쑨원과의 공식적 관계를 부정하게 되었다. 영미와도 바이마르 공화국과도 합작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쑨원은 소련과의 합작을 추구하게 되었고 1923년 1월 주중국소련전권대표 아돌프 요페와 상하이에서 회담하면서 본격적으로 국공합작을 논하여 1924년 1차 국공합작을 형성하고 국민당 개조를 단행했다.

1925년 3월 20일 쑨원이 사망한 후, 영풍함은 쑨원의 이름을 따서 3월 21일 중산함으로 개명되었고 중산함 사건의 주인공이 되어 다시 한번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5. 참고문헌

6. 관련문서


[1] 이후 부인 허샹닝이 8월 백운산에서 열린 천중밍의 군사회의에 찾아가 랴오중카이 석방을 강력하게 요구한 덕분에 풀려나게 되었고 8월 21일 상하이의 쑨원에게 합류했다. 자세한 것은 허샹닝 랴오중카이 문서 참조. [2] 이는 1922년 1월, 천중밍과 직접 회담했던 코민테른 대표 마링이 천중밍의 연성자치론에 실망하여 코민테른이 천중밍에게 관심을 끊었고 천중밍과의 접촉 자체를 중국 국민당과의 당대당 접촉으로 여겼지 천중밍 개인과의 접촉으로 여기진 않았단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3] 1916년 7월의 예를 떠올려 굳이 호법운동을 하지 않아도 북양정부가 약법을 회복시킬 수 있다는 것에 기대를 건 것이다. [4] 장제스의 처가 식구들은 위험한 전쟁터에 천제루가 가는 것에 대해 반대했으나 천제루가 남편과 동행할 것을 고집하여 같이 가게 되었다. [5] 장제스는 자신의 일기에서 자신이 도착하자 천중밍이 파랗게 질렸다고 쓰고 있지만 글쎄... [6] 장개석비록은 이것이 천중밍의 사주라고 주장하는데 사실 조계지 입장에서는 중국의 내전에 휘말리고 싶지 않은 것이 정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