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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6 17:31:40

야마구치 다몬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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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제국 해군 제2항공전대 참모장
야마구치 다몬
山口多聞 | Tamon Yamaguchi
파일:다몬.jpg
출생 1892년 8월 17일
일본제국 도쿄시 고이시카와구
(現 일본 도쿄도 분쿄구)
사망 1942년 6월 6일 (향년 49세)
미국령 군소 제도 미드웨이 환초
(항공모함 히류)
복무 일본제국 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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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주요 참전 제2차세계대전 ( 태평양전쟁)
진주만 공습
미드웨이 해전
복무 기간 1912년 7월 17일 ~ 1942년 6월 6일
최종 계급 소장 → 중장[1]
학력 일본해군병학교 졸업
근무 제5함대 참모장
제2항공전대 히류
서훈 내역 욱일장[ruby(旭日章, ruby=きょくじつしょう)](4등급)
서보장[ruby(瑞宝章, ruby=ずいほうしょう)](2등급)
금치훈장[ruby(金鵄勲章, ruby=きんしくんしょう)](1등급)
묘소 도쿄도 미나토구 아오야마 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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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3. 경력4. 평가5. 미디어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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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

진주만 공습,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항모 부대 지휘관으로 활동했다.

2. 생애

도쿄 출생. 이름의 기원은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아명인 다몽마루(多聞丸)(이쪽의 기원은 비사문천의 의역인 다문천)에서 이름을 따 명명했다고 한다.

1912년 해군병학교 40기[2]를 144명 중 차석으로 졸업하여 임관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구미파견 함대에 소속되어 지중해 전선에 파견되기도 했다. 1차대전이 끝난 1918년 12월에 대위로 진급했다. 1921년에서 1923년까지는 해군의 경비지원을 받아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유학을 했다. 유학을 갔다 온 뒤 소좌로 진급하여 1926년에는 고급간부 양성기관인 도쿄의 해군대학을 갑종 24기로 다시 차석으로 졸업했다.

수뢰, 포술담당 장교였으나 그의 전문영역은 잠수함인 덕에 대전 당시에는 독일 U보트의 회항요원으로도 참가한 적이 있었다. 그후 경 순양함 이스즈와 전함 이세의 함장을 지냈고, 태평양 전쟁 당시 항공전대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특정한 계파에 속하지 않았기에 야마모토의 눈에 들지 못했고, 그 때문에 실력에 비해 낮은 평가를 받아 출세길이 막혔다는 소리도 있지만, 사실 제독까지 진급하는데 걸린 시간은 나구모 주이치보다도 빠르고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비교해도 겨우 1년 밖에 더 걸리지 않는 등 여타 엘리트들과 별 차이가 없었다.[3] 최종계급은 미드웨이에서의 전사로 인한 중장 특진이지만, 이게 아니었어도 미드웨이에서 승리하고 살아남았다면 무난히 중장으로 진급했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

영국의 해군 제독 호레이쇼 넬슨을 존경해 함대 운용에 있어서도 넬슨을 본받아 매우 공격적인 성향으로 유명했다. '상황파악이 안되고 뭐가 뭔지 모르겠으면 일단 공격하고 보자'는 주의였다는 모양. 부하들에게도 '지휘가 혼란한 상황에서 잘 모르겠으면 그냥 맹렬히 공격해라. 그러면 나의 지휘와 일치할 것이다.'라며 공격성을 강조했다고 한다. 진주만과 미드웨이의 일화 때문에 나구모와 곧잘 비교되곤 하는데, 나구모가 전력보존을 중시하는 신중파라면 야마구치는 일단 적을 두들기고 보는 닥공파였다. 야마구치의 해군병학교 동기이자 연합함대 참모장 직을 역임하는 후쿠토메 시게루에 따르면 야마구치는 "50%의 가능성만 있어도 (공격을)단행해야한다."는 말을 자주했고 성격도 적극적이었다고 회고했다. 또한 일본 검도의 격언인 살을 내어주고 뼈를 끊는다를 자주 말하곤 했다.

파일:다몬1.jpg
히류 소류가 소속된 제2항공전대의 사령관으로 부임한 이후 함재기 조종사들에게 지독한 훈련을 시켰고, 덕분에 제2항공전대의 조종사들은 실전경험이 없음에도 에이스급 조종사들로 육성되었다. 다만 이 훈련 과정에서 조종신들이 끊임없이 죽어나갔기 때문에 조종사들에게 '미치광이 다몬', '사람잡는 다몬'이라 불리기도 했다. 반면 특유의 맹장 기질로 인해 조종사들을 제외한 부하와 동료들로부터는 신뢰가 두터웠다는 모양이다.

다혈질에 주당이어서 그런지 한번은 술에 취해 상관 나구모 제독에게 달려들어 목을 비튼적도 있다고 한다. 물론, 나구모는 나구모대로 대좌 시절에 술에 취해 같은 대좌계급이던 이노우에 시게요시를 베겠다고 협박한 적이 있었으니 할 말은 없었을 것이다.

3. 경력

3.1.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당시 나구모 주이치 제독의 제1항공함대 소속 제2항공전대 사령관으로 진주만 공습에 참가한다.

사실 원래 2항전의 히류와 소류는 진주만 공습에 참가하지 않고 보조 공격인 필리핀[4]을 공습하는 방안이 검토되었다. 하와이까지 워낙 먼거리까지 진출해야되니 비교적 순항력이 열세한 소류와 히류는 진주만 공습에서 빼자는 소리였다. 진주만 공습이 주공이었음으로 야마구치 휘하의 숙련된 2항전 파일럿들은 진주만 공습에 참가하게 될 5항전(쇼카쿠, 즈이카쿠)과 맞바꿀 계획이었다. 헌데 야마구치 다몬이 이 계획에 반대하였고 조종사들을 뺏길 바에는 차라리 목숨을 끊겠다고 협박엄포를 놓으면서 2항전도 진주만 공습에 참가하게 되었다⋯. 항공모함과 함재기의 집중운용이 분명 효과적이긴 하지만, 야마구치의 반대 논리는 항모의 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체면을 내세우는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었다. 심지어 야마구치는 소류와 히류의 순항력이 걱정되면 소류와 히류를 진주만 공격 지점까지만 간 뒤에 버리고 오면 되지 않느냐는 황당한 소릴 하기도 했다 한다.

어찌됐든 결국 진주만 공습에는 1, 2, 5항전의 항모 6척이 모두 참가했다. 전과 자체는 대단한 것이었으나 당초 목표는 진주만의 항모를 격침하는 것이었다. 이에 야마구치는 나구모에게 '2차 공격 준비 완료'라는 신호를 보내어 에둘러 표현함으로써 계속 공격할 것을 재촉했다. 그의 휘하에 있던 장교들 역시 3차 공격을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야마구치는 "아마도 나구모는 공격하지 않으려 할걸?"이라며 나구모의 속내를 읽어내고는 직접 공격 요청을 넣지는 않았다. 같은 시각 연합함대 본부에서도 참모들이 진주만을 3차 공습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야마모토 이소로쿠 역시(…) '나구모는 공격하지 않을 거다'라며 명령을 내리지 않고 현장의 판단을 우선했다.

나구모는 자신들이 가져온 폭탄과 어뢰들을 정박 중인 미 함대를 폭격하는 데 9할 이상 써버렸는데 언제 미군 항공모함과 맞닥뜨릴지 알 수가 없었고, 미군 잠수함이 탐지되고 있던 상황인지라 철수를 결정한 것. 거기다가 함대결전사상의 입장에서 미국 태평양 함대의 전함을 모두 항해불능으로 만들었으니, 목표도 90%는 이룬 것 등을 들어 철수를 결정한다.

3.2. 미드웨이 해전

원래 야마구치 본인 역시 미드웨이 공략은 강하게 원하던 바였으나 그가 희망하던 시기는 겨울 무렵이었고, 준비 부족을 이유로 6월 공략에 반대한다. 하지만 결국 묵살당하고 미드웨이 해전에 참가한다.

아군 정찰기가 미군의 함모를 발견한 시점에서 "무장을 교체[5]하지말고 최대한 빨리 출격시켜서 미 항모를 공격하자"는 건의를 했으나 나구모에게 각하당했다. 나구모가 이 건의를 듣지 않은 이유는 미드웨이 비행장의 미군기들로부터 함대를 보호하느라 출격한 전투기들의 연료가 바닥난 시점이라 공격대에 호위 전투기를 붙일 수 없다는 점, 또한 미드웨이섬을 폭격하기위해 출격한 1차공격대가 이제 막 귀환했다는 점이었다. 한마디로 야마구치의 공격대 출격 건의는 적합하지 않은 무장으로 인한 공격의 비효율은 넘어가도, 출격하는 공격대를 이렇다할 전투기 호위없이 방치하고 방금 귀환한 공격대가 연료부족으로 바다에 빠져 죽게 하는 약 200여명의 정예 조종사들의 손실을 깔끔히 무시하자는 소리였던 것. 후대에 이 판단은 전투기의 호위 없이 출격한 공격대가 미군측 전투기를 뚫고서 미항모에게 타격을 입힐 수 있었을지, 미항모에게 타격을 입혔다 치더라도[6] 수백의 함재기와 조종사가 손실된 상황에서 작전 목표였던 미드웨이 섬의 공략이 가능했을지가 의문시되고 있다.

어쨌든 결국 정찰기의 보고와는 달리 미군 항공모함의 공격은 훨씬 빠른 시각에 이뤄졌고, 일본군은 나구모의 제1항공함대 소속의 4척의 항공모함 중 3척이 5분만에 날아가는 참패를 겪는다. 이 와중에도 그가 지휘하던 항공모함 히류만은 살아남는데 성공했다. 2척 이상의 미국 항공모함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퇴각을 생각한 나구모와 달리 미 항모 수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야마구치는 자신이 불리하지 않다고 판단해 공격을 계속해서 미 해군 항모 USS 요크타운을 대파시키는 수훈을 세우나[7][8] 나머지 항모인 엔터프라이즈와 호넷의 역습으로 히류도 공격당해 부하 장병들을 퇴함시키고 그는 함장인 가쿠 대좌와 함께 히류와 운명을 함께하며 생을 마친다.[9]

4. 평가

당시 일본군에서 항공모함을 주력으로 한 기동부대와 항공전력의 강화를 적극적으로 주장했던 선진적인 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 다만 항공전에 대한 지식 자체는 그리 해박하지 못했다는 모양이다. 기동부대의 사령관이 된 뒤로 언제나 부하들에게 '이러면 되나?'라는 식으로 일일이 물어보며 지휘를 내렸다고 한다. 체면치레 신경 안 쓰고 부하들에게 물어봐가면서라도 제대로 된 지휘를 하려 한 자세 자체는 높이 살만 하다.[10] 똥군기 권위주의의 의 끝판왕인 일본군에서 이런 자세는 대단히 이례적이다. 당시 해군 관례상 항공전 관련 분야는 함대의 항공참모의 조언을 필수적으로 구하고 그 조언을 그대로 채택하는 경향이 있긴 했으나, 야마구치 제독은 그걸 넘어 체면 상한다는 평을 들을 만큼 적극적으로 조언을 구했다.

상술한대로 밤낮을 가리지 않는 지옥 훈련 탓에 조종사들의 실력은 뛰어났으나 휴식을 주지 않았고, 중일전쟁 당시에도 폭격기들을 호위 없이 저공폭격을 강행시켰다가 큰 피해가 발생해 당시부터 조종사들에게 쓴소리를 많이 들었다. 함재기 운용 개념도 마치 함포를 쏘는 것마냥 일단 닥치고 날리고보자는 식으로 조종사들을 인간 취급하지 않았던지라 조종신들 사이에서의 평가는 영 좋지 않았던 모양. 괜히 사람 잡는 다몬이라 불린 것이 아니다. 덕분에 병기와는 달리 한번 잃고나면 보충이 어려운 인적 자원을 경시하는 성향이 강했던 인물로도 평가받는다.

단, 의외로 미드웨이에서 히류 한 척만 남아 분전할 때, 그답지 않게 조종사들이 도저히 출동할 상황이 아니라고 보고 각성제를 복용시키려는 가쿠 대좌를 말린 다음 식사를 하고 휴식을 취하게 한 경우도 있는 걸 보면 인간 취급을 안 했다기 보다는 조종사들의 고충을 잘 이해하지 못했던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조종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혹사하는 야마구치 제독조차 마음이 흔들릴 만큼 조종사들의 상태가 안 좋았던 것일 수도 있는데, 당시 조종사들은 식사 후 휴식 명령을 받아 식사 중 밥먹다 졸거나 그대로 쓰러져 잠드는 이들이 대부분일 정도였다.

이렇듯 유능한 제독임은 인정받지만 의외로 평가가 많이 갈리는데, 미래의 해전에서 중역이 될 기동부대의 육성에 힘썼지만 동시에 그 기동부대의 핵심인 조종사들에 대한 처우는 정작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 그 핵심적인 이유들이다.

5.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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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전쟁 영화인 《연합함대 사령장관 야마모토 이소로쿠》에서도 등장한다. 아베 히로시가 분하여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여주며 해군 내에서의 개혁적 사상을 갖고 있는 해군 제독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영화에서는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상당히 친분관계가 있는 모습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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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영화 《미드웨이》에서는 배틀쉽과 토르에 출연한 아사노 타다노부가 분하여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측근으로 각종 작전을 입안하는 역할로 나온다. 극중 미드웨이 해전에서 가장 개념잡힌 일본함대 지휘관으로 묘사된다. 당황해하는 부하를 "침착해라, 자넨 장교잖나"라며 바로잡아 주기도 하고, 미군기가 대공포화에 격추되면서도 돌격하는 모습을 보자 용감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등 적을 인정하는 대인배로 묘사. 최후에 항모를 뇌격자침 시킬 때 남아서 죽는다. 함장이 같이 남겠다고 할 때는 받아들이지만, 위에서 당황하다 지적받은 젊은 장교가 남겠다고 할 때는 젊은이들은 살아야 한다고 마지막으로 퇴함을 명령한다. 아베 히로시보다는 확실히 실제 다몬과 닮은 편인데, 평소 샤프한 체형을 유지하는 아사노 특성상 외모를 유사하게 하려고 일부러 살을 찌운 것으로 보인다.

6. 기타


[1] 사망후 추서 [2] 야마구치의 동기 중에는 연합함대 참모장을 역임한 우가키 마토메와 후쿠토메 시게루가 있다. 야마구치가 17세에 해군병학교에 입학했음으로 우가키가 나이는 2살 더 많았다. [3] 오히려 첫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되어 자식들(첫 아내인 토시코와는 아들이 둘 있었고, 삼남을 출산하던 와중에 사망)을 홀로 돌보느라 난처해 하는 야마구치 다몬에게 재혼을 권유한 게 당시 해군 작전본부 기술부장인 야마모토 이소로쿠이다. 개인적인 일까지 충고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던 관계였던 사람인데도 눈에 들지 못해서 출세길이 막혔다는 건 전형적인 헛소문이다. [4] 당시 맥아더의 미군- 필리핀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진주만 공습과 거의 동시에 일본군의 공습을 받았다. 결과는 맥아더가 병력 운용에 실수를 하여 극동의 육군 항공대 전력이 반파되는 큰 피해를 입혔다. [5] 일본군의 공격기 대부분이 함대를 공격하기 위한 어뢰가 아니라 비행장을 폭격하기 위한 육상 폭격용 폭탄을 장비하고 있었다. [6] 타격이라는 것도 당시 일본의 육상 폭격용 폭탄으로는 미항모를 격침시키는 것까지는 힘들고 갑판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기능을 상실시키는 정도. [7] 세 번째 공격을 준비할 때 녹초가 된 조종사들에게 "이렇게 사람을 막 부리는 나를 용서해주게나."하면서 담배를 권했다는 일화가 있다. [8] 다만, 공격 명령은 차석 지휘관인 아베 코우키 제8전대 사령관이 내린 것으로, 나머지 함선이 퇴각하는 동안 시간벌이를 위한 공격명령이다. 야마구치 다몬은 자의적으로 공격을 한 게 아니라 명령에 따른 것. [9] 단, 이 침몰은 공격 직후 침몰이 아니라 수시간에 걸쳐 매우 천천히 침몰했다고 한다.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할 수도 있었으나 사실상 자살이기 때문에 평가가 엇갈리게 되는 최후다. [10] 애초에 잠수함과 전함을 맡아왔던 그가 항공전에서까지 해박하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군인들에게는 각자 자신만의 분야가 있는 셈인데, 자기보다 항공전에서 좀 더 전문적인 부하들을 믿고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 또한 제독으로서 상당히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괜한 고집으로 비전문적인 결정을 내려 아군을 사지로 내몬 군인들도 역사 속에선 수두룩하다. 지휘관은 무기가 아니라 사람을 부리는 자리라는 사실을 명심하자. [11]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오자와 지사부로는 외모가 영 별로여서 당대엔 오니가와라(鬼瓦)란 별명까지 있었다. [12] 역사와 달리 침몰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