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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15 21:12:26

사토 고토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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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일생
2.1. 평범한 시작2.2. 임팔 작전, 그리고…2.3. 해임과 연금2.4. 패전 이후
3.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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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佐藤 幸徳
1893년 3월 5일 출생 ~ 1959년 2월 26일 사망(향년 65세)

일본군 육군 장교, 최종 계급은 중장.

2. 일생

2.1. 평범한 시작

야마가타(山形) 현 출신으로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소위로 임관하였고, 1921년 육군대학을 졸업하였다. 사토는 천황으로부터 직접 예도를 하사받을 정도로 우수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1930년에 육군 참모본부의 전사과에 2년간 근무했으며, 이때 같은 부대의 총무과장과 싸운 적이 있다고 한다. 통제파에 속해 있었으며 2.26 사건 당시에는 6사단 참모 자리에 있었고 반란군 진압을 주장했다.

하산 호 전투 당시 19사단 75연대장으로 참전, 부대의 피해가 절반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진지를 사수하는데 성공했다. 이 전공 덕분인지 순조롭게 출세하여 1943년 3월 31사단장을 맡게 되었다.

2.2. 임팔 작전, 그리고…

1944년, 그가 속한 제15군은 임팔 작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사토는 임팔 작전이 무모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기에 사령부에 보급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진언했지만 그의 말은 무시당했다. 그리고 작전이 시작된 후 아니나 다를까 보급 문제는 일본군의 행보를 심각하게 괴롭혔고 병사들은 굶주림에 시달렸다. 31사단은 적의 식량과 무기를 탈취해 어떻게든 싸움을 이어갔지만 당연히 거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병사들은 뼈와 가죽만 남은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하는 노래를 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토는 사태가 이 지경이 되자 분노하며 사령부에 탄약과 식량을 보급해 달라고 요청했지만, 무능한 사령부는 꿈쩍도 안 하고 그저 공격을 계속하란 명령만 내릴 뿐이었다. 15군 참모들이 사토를 달래기 위해 찾아왔지만 사토가 노기를 터트리며 "너희들은 무슨 낯짝으로 여기 왔느냐! 우리들의 적은 영국군이 아니야. 바로 너희들 제15군이란 말이다!"라고 길길이 날뛰는 바람에 별 말도 못하고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러다간 다 죽는다.' 하는 결론을 내리고는 부하들 앞에서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우리들의 위에는 세 머저리가 있다! 그것은 제15군과 미얀마 방면군과 남방총군이다![1] 이런 머저리들을 믿고 기다리다간 우리 사단이 전멸하고 말 것이다! 이에 본 사단의 퇴각을 본관 책임 하에 독단 결행하기로 결정했다!
사토는 자신의 직속부하였던 미야자키 시게사부로에게 그나마 멀쩡한 소수의 병력을 맡겨 사단의 후미를 엄호하게 한 후, 소총을 들 기운조차 안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무단으로 전선에서 이탈하여 후퇴하였다. 그 미야자키 시게사부로 역시 옥쇄금지라는 신의 한 수를 두어 후미방어를 훌륭하게 해내면서 31사단의 남은 병력들은 안전하게 퇴각할 수 있었다.

사토의 31사단이 후방의 안전한 지대에 도착하자 15군 사령관 무타구치 렌야은 사토 고토쿠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뜻에서 부하에게 단도를 건네라고 시키고는 자기는 숨어버리는 추태를 부렸다. 그러나 사토는 할복할 생각 따위는 추호도 없었고, 오히려 "이 칼을 가지고 그놈의 배를 갈라버리겠다."라고 이를 갈면서 그 칼을 들고 돌아갔다.

당시 31사단장 사토 중장이 전장의 상황에 얼마나 분개했는지는 그가 무타구치의 15군 사령부에 보낸 전문에서 절절히 알 수 있다.
공격 계속 명령 접수했음. 그러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귀하의 사고방식이야말로 이 작전을 실패로 이끌어가는 중대요인이 되고 있음. 눈 앞의 본 사단의 1만 장병은 아사 직전 상태에 놓여있음. 탄약은 고갈되어 맨손의 병력이 되어버렸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른 것은 모두가 귀 제15군에게 그 책임이 있음. 귀군은 이상 사실을 판단, 반성하여 본 작전을 즉시 중지함으로써 폐하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이끄는 일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과감한 조치를 강구하기 바람.
의외로 임팔에서 사토가 한 항명은 당시 일본군 군법상으로도 정당한 항명이었다. 전문에서 보면 알 수 있다시피 임팔 전선에서 31사단은 명백한 전투불능이었다.

2.3. 해임과 연금

임팔 전투 이후 무타구치 렌야는 사단장 자리에서 사토를 해임했다. 그런데 당시 일본군의 체계에서 장성은 친임관(親任官) 또는 칙임관(勅任官)으로서 천황이 임명하는 형식을 취했다. 따라서 아무리 상급자인 사령관이라 할지라도 휘하의 사단장을 멋대로 해임할 권리는 없었다. 본래라면 사령관이 대본영에 해임을 건의하면 대본영 또는 총리가 천황에게 보고한 뒤 해임한다는 재가를 받아야 했다. 휘하 사단장을 사령관이 독단으로 해임함은 천황의 통수권을 무시하는 심각한 월권행위로 해석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물론 대본영에서 사후 추인의 형식으로 사단장을 교체하였지만 어쨌건 명백한 월권행위였다. 이때 15군 휘하의 15사단장과 33사단장도 같이 해임되었는데, 세 사단장은 나중에 '임팔 작전 실패의 원인'으로 비난받게 된다.

애초에 무타쿠치 렌야는 독단적으로 루거우차오 사건을 일으켜서 중일전쟁의, 더 크게 보면 태평양 전쟁의 불씨를 당긴 인물이기도 했다. 이후 사토는 군법회의에 회부되면 제15군의 졸렬한 지휘를 규탄하려고 했지만, 판단력상실 진단을 받아 불기소처분되고 연금되었다. 만일 사토를 군법회의에 회부한다면, 사토는 임팔 전황의 현실을 폭로할 게 뻔했다. 이런 폭로를 어찌어찌 묵살한다 할지라도 이런 문제 있는 인물을 천황이 사단장으로 임명하게끔 한 군 수뇌부도 문제가 있다는 질책을 받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이 모든 불편한 상황을 회피하고자, 공식 항명자인 사토를 군법회의에 회부하는 대신 정신병자라는 명목으로 연금시켰다.

2.4. 패전 이후

사토는 죽을 때까지 '독단으로 퇴각한 불명예스러운 군인'으로 비난을 받았지만, 그 자신은 끝까지 자신의 행동이 부하들을 구했다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병사한 후 대부분이 시코쿠 출신인 31사단의 생존자들은 카가와현 타카마츠시에 추모비를 세웠고 야마가타현 소냐이 촌에도 추모비가 세워졌다. 반대로 무타구치 렌야는 정신 못 차리고 임팔 작전의 실패가 자기 잘못이 아니라 부하들 때문이라는 찌라시를 돌렸다가 욕을 먹고 물세례를 맞았다는 전설이 있다.

3. 평가

구 일본군 장성 중에서 양심이 있는 인물로 높으신 분들에게는 패배의 원흉으로 지탄을 받았지만, 31사단의 부하들에게는 자신들을 살려준 은인으로 존경받았다. 그는 대본영으로부터의 모든 처벌을 감내서라도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작전 명령을 거부하고 부하들을 살려보내고자 했다.

다만 군사적 부분 외에는 부정적 평가도 존재하는데, 임팔 작전 중에는 상관인 무다구치 렌야 외에도 직속부하인 미야자키 시게사부로와도 마찰이 있었다고 한다. 정작 그 미야자키는 사수 명령이나 다름없는 후미 엄호 명령을 받자 지체없이 수행했다. 문제는 저 명령이 미야자키가 죽을 때까지 남는 트라우마가 됐다는 것이지만. 그 외에 군인들 먹일 식량도 부족한 전방 부대에 위안소를 만들려고 했다거나 연회에서 음담패설을 솔선하고, 부하들은 텐트에서 생활하는데 자신은 일본풍의 화려한 사단장실을 만들게 해 지낸 것 등을 불만으로 여겼다고 한다. 사단의 참모장이었던 카토우 쿠니하루 대좌도 육군대학 동기였던 15군 참모와 면담 중 사단장은 상관으로서도 군기, 군율상으로도 최악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1] 그렇다, 상급부대 전부를 대놓고 깐 것이다. 후일 여기에 대본영을 추가했기 때문에 네 머저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