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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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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9176e><colcolor=#ffd400>
대한제국 고종의 황녀
덕혜옹주 | 德惠翁主
파일:/image/busan/2010/02/25/20100225000020_0.jpg
히노데(日出) 심상 소학교 시절[1]
출생 1912년 5월 25일
경기도 경성부 덕수궁
(現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사망 1989년 4월 21일 (향년 76세)
서울특별시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낙선재
묘소 덕혜옹주묘(德惠翁主墓)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29176e><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덕혜(德惠) (호적명)
부모 부황 고종 태황제
모친 복녕당 귀인 양씨
형제자매 6남 1녀 중 장녀
배우자 소 다케유키(宗武志, 종무지)(1930년 결혼 ~ 1953년 이혼)
자녀 슬하 1녀
장녀 - 소 마사에 (宗正惠 종정혜, 1932 ~ 1956?)[2][3]
체중 12kg (만 3세 당시)[4]
학력 히노데 심상 소학교
가쿠슈인 (졸업)
작호 덕혜옹주(德惠翁主)
}}}}}}}}} ||
1. 개요2. 생애3. 평가
3.1. 회의적3.2. 동정적3.3. 총평
4.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colbgcolor=#29176e> KBS 〈한국사전 – 라스트 프린세스 덕혜옹주〉[5]
고종 고명딸[6]. 순종, 의친왕, 영친왕의 이복 여동생이다. 생모는 복녕당(福寧堂) 귀인 양씨이다. 양씨는 본래 궁녀였다가 승은을 입어 덕혜옹주를 낳고 후궁 첩지를 받았다. 양씨의 친정 오빠는 백정으로 당시 조선에서 가장 미천한 신분이었으나, 여동생 덕분에 관복을 입고 궐에 출입하는 귀한 신분으로 벼락 출세했다.

'덕혜(德惠)'는 1921년에 이복오빠 순종이 내려준 작호인데, 그 이전에 따로 이름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한국 측의 기록에는 그냥 '아기씨', '복녕당 아기', 일본 측의 기록에는 姬(ひめ, 아가씨)로만 되어 있다. 그래서인지 훗날 대한민국 호적에도 '이덕혜(李德惠)'가 성명으로 올라갔다. 덕혜옹주의 삶을 다룬 여러 매체에서도 '황녀 이덕혜'라는 이름을 사용한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덕혜옹주는 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엄밀히 말하면 대한제국의 황녀였던 적이 없다.[7] 따라서 '대한제국(또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라는 그녀의 타이틀은 사실 틀린 셈이었다. 대한제국에는 황녀가 없었고, 조선의 마지막 왕녀[8] 철종의 외동딸인 영혜옹주였다.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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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3.1. 회의적

대중매체에서는 덕혜옹주를 비롯한 황족들이 일본에서 차별받으며 어렵게 살았다고 흔히 묘사되지만, 그건 망국의 왕녀라는 상징적인 부분의 영향이 크다. 애초에 그녀는 아주 어린시절부터 기모노를 입고 일본어를 쓰는 일본인이나 마찬가지였다.[9]

당시 대한제국 황실의 일원은 이왕가라는 새 직함을 얻고 왕공족이라는 신분이 부여되어 어마어마한 축재(蓄財)가 가능했다. 어느정도였냐면 방계 황족 출신이던 이방자 영친왕에게 시집간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의 가쿠슈인 동기들이 다들 부러워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덕혜옹주를 비롯한 왕공족들은 독립운동가를 비롯한 자국민들이 일제 치하에서 힘든 삶을 살고있을 때 일본 제국의 극진한 비호 아래 왕공족으로서 호화 생활을 마음껏 누리며 살았다.

더군다나 그 시절 상류층 여성들이 정략결혼으로 인해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는 일도 허다했을 시절에, 그녀의 남편으로 선택된 소 다케유키는 뛰어난 외모와 학식과 인격을 갖춘 귀족이었다. 조선 황실 입장에선 감히 황녀의 배우자로 일개 귀족을 천거한 일은 무례한 행동이였던 것은 맞으나, 덕혜옹주는 식민지의 왕녀였을 뿐더러 그 당시엔 일본 황족들조차 정신질환이 있으면 파혼당하기 일쑤였다.

설사 이왕가가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해도 일본 황실 입장에선 격차결혼이 아닐 수 없었는데, 덕혜옹주의 새언니인 이방자의 가문도 애초에 히로히토 황태자비 자리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정도로 명문가였을 뿐더러, 영친왕과는 거의 반강제로 혼인한 것이였다. 그시절 정략결혼은 흔했으나, 황태자비 후보에 올랐을 만큼 귀한 딸이 평생을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처지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놓인 그녀의 부모님은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어떻게 보면 정략 결혼의 명확한 피해자인 새언니 이방자는 첫 아들과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온갖 고생을 했지만 해방 후 한국으로 와서 자신을 한국인이라고 명확히 말하고 남편의 유지를 받아들여 각종 자선활동을 하는 등 왕자비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했다. 반면 덕혜옹주는 정신병을 앓기 전부터 일본인 동급생 유키카가 자기 안위 보전에만 집중했던 덕혜옹주의 행동에 의문을 표할 정도로 자신의 의무에 대해 전혀 자각[10] 못하고 있었다.

비록 덕혜옹주가 거의 평생을 신경쇠약 조현병 증상에 시달리며 본인의 의지대로 삶을 살아갈 수는 없었지만, 일제 치하와 6.25 전쟁 이후 한국 내 소시민들의 삶과 비교한다면 황족으로 태어난 그녀는 주어진 환경을 다 누리지 못했을 뿐이지 나름 축복받은 인생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3.2. 동정적

덕혜옹주가 일제 패망 이전까지는 평민들의 삶보다 물질적으로 부유했던 건 맞지만,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한 사람의 인생이 마냥 행복하지 않다는 건 누구나 알 것이다. 당장 겉으로 보기에는 황녀의 대우를 받았을지라도, 덕혜옹주는 13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도 떨어지고 낯선 곳, 그것도 아버지를 독살했을지도 모르는 일본에 가서 늘 두려움에 떨어야 했다.[11] 이방자의 기록이나 여자가쿠슈인의 일본인 학생의 기록을 봐서는, 자신도 언제 독살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느낀 듯 하다. 덕혜옹주의 조현병이나 신경쇠약 같은 정신질환이 아무 이유 없이 생긴 게 아니다.

친일 논란이 없진 않지만, 애초에 정신병 증세로 대외활동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이복오빠 영친왕만큼 친일 논란이 있진 않다. 물론 영친왕도 속을 파고보면 참작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다. 실제로 그는 아내 이방자 앞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인질 신세나 다름없는 자신을 한탄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쨌건 정신병에 시달리던 여동생에 비해 일제 치하에서 부유한 생활을 누렸고, 일제의 선전 활동에 자의건 타의건 이용당한 것도 사실이긴 하다만, 어쨌든 영친왕은 차치하고서라도 덕혜옹주는 정신병 때문에 사회적 활동 자체를 많이 하질 못했다.

오히려 덕혜옹주는 일제에게 핍박당했다는 의견도 있다. 막말로 덕혜옹주가 일본 황족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면 일본에 처음 온 이후 오빠 영친왕 부부와 같이 지내지 못하게 한 것이나, 어머니 귀인 양씨의 장례식에 상복조차 입지 못하게 한 것이 말이 안 되고, 급이 낮은 귀족인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의 신랑감으로 정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것. 물론 소 다케유키 한 사람만 보자면 괜찮은 남편감이긴 했으나, 가문적으로 보면 세력이 약한 대마도 도주 후손이라는 일개 귀족 신분은 황녀의 신랑감이라는 격에 맞지 않긴 했다. 실제로도 당시 사람들은 덕혜옹주의 남편을 황족 중에서 정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다못해 공작 정도는 되어야 했던 것이었다.

다만 혼인 상대를 물색할 때쯤엔 덕혜옹주가 이미 정신병이 발발하여 조현병 진단이 내려져 앓고 있을 때였고, "말이나마 조금은 조리있게 하게 되어 결혼을 한다"는 이방자의 말을 보면, 이미 결혼 한참 전부터 정신병 증세를 보이며 조현병 특유의 지리멸렬한 언어를 보이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제 아무리 황녀라도 말까지 횡설수설하는 여자를 황족과 혼인시키긴 힘들었을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이방자의 유일한 형제인 여동생 노리코(規子) 여왕은 다케히코 왕의 후처가 될 예정이었으나, 다케히코 왕의 정신병으로 인해 약혼이 취소되었다. 이처럼 정신병을 앓는다는 것은 일본 남성 황족에게도 파혼당할 명분이 되는데, 하물며 식민지인 조선 황족 여성이였던 덕혜옹주가 어떤 인식을 받았을지 충분히 짐작이 된다.

영친왕은 '이왕가의 수장' 라는 이름뿐인 명분이라도 있었고, 아내 이방자와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오기도 하는 등 나름 개인으로선 유복한 생활을 누릴 수 있었으나, 덕혜옹주는 그야말로 아무런 실권도 없었고 마음의 병으로 일반적인 생활조차 제대로 영위하지 못했다.

3.3. 총평

사실 이 부분은 대중매체의 과도한 왜곡으로 형성된 이미지가 오히려 덕혜옹주를 욕보인 측면이 강하다. 덕혜옹주는 말 그대로 수동적이고 평범한 그 시대의 보통 여성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미디어 매체에서는 마지막 왕녀라는 써먹기 좋은 소재를 가진 덕혜옹주를 어떤 식으로든 독립운동 및 애국과 연관지으려 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매체로 이런 부분을 접했다가 실제 덕혜옹주의 삶을 알게 된 대중에게 괜히 애꿎은 눈칫밥을 먹게 된 측면이 있다.

덕혜옹주에게 어떤 역할을 기대하고, 그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고 하여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은 일반적인 공/옹주들의 삶과 비교했을 때도 공정하지 않다. 한국사 공주 / 옹주들은 대부분 덕혜옹주처럼 나름 호강하며 살다 어른들이 정한 부마와 혼인해서 정치적으로 어떤 역할도 하지 않은 채 조용하게 살았으며, 애초에 태어났을 때부터 그녀들에게 기대하고 교육하는 것은 딱 그 정도 뿐이었다.

덕혜옹주가 조선을 위해 무언가 해야 했다는 기대의 근거는, 그저 왕가의 딸로 태어났다는 것 뿐이다. 당시 여자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 수도 없었던 일제강점기 시대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망국의 마지막 황녀가 되어버린, 그것도 정신병을 앓고 있던 여성에게,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까지도 이기는 강한 정신력과 제 한 몸 내던져 조국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희생 정신을 가진 히어로가 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한 문장으로 정리하자면, 너무 어렸기에 평생을 정치적으로 이용만 당했으나, 어린 나이였기에 그나마 독립 후 발전해가는 한국 땅에 돌아올 수 있었던 최후의 왕족이라 할 수 있다.

4. 대중매체에서


[1] 덕혜옹주의 사진들 중 가장 대표적이고 많이 알려진 사진으로, 일본 제국으로 강제 유학가기 직전의 시기(14세 이전)이다. 덕혜옹주는 같은 시대를 지내온 다른 황실 친족보다 유년 시절 사진이 자주 노출되는데, 요절하지도 않았고 성인이 된 후의 사진도 상당하지만 굳이 유년기 사진을 애용하는 것은 '옹주'라는 세간의 인식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2] 1956년 8월 26일에 자살하러 간다는 유언을 남기고 사라져 버려서 행방 불명이 되었고, 졸년미상(卒年未詳)으로, 2007년 전남편 소 노보루가 발표한 시집 내용을 통해 시신과 유류품으로 신원을 특정하여 사망 사실이 확인된 것으로 알려졌다. [3] 마사에(정혜)의 남편이자 데릴사위는 소 노보루(宗昇 종승) [4] 출처 마지막으로 측정된 체중은 3관 140량인데, 3관 140량을 kg으로 환산하면 만 3세 당시의 덕혜옹주의 체중은 12kg이 된다. [5] 썸네일 오른쪽 사진에서 덕혜옹주를 부축하는 사람은 덕혜옹주의 7촌 조카(덕혜옹주의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의 형 흥완군의 증손자)이자 사진가인 이해선이다. [6] 이복 언니들이 몇 있기는 했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죽고 말았다. 고종의 정실인 명성황후 민씨도 딸을 낳았으나 태어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며, 이는 정식으로 공주 책봉을 받기도 전이었다. 그 외에 자신이 고종의 딸이라고 주장하는 이문용도 있었지만,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 [7] 일제강점기 이후에 태어난 덕혜옹주, 이우 등도 고종의 자손이라는 이유로 일반적으로 대한제국의 황족으로 간주되지만, 엄밀하게 따지자면 이들은 대한제국의 황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역시 대한제국의 황태자비였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영친왕의 배우자라는 이유로 황태자비로 간주되는 이방자와 마찬가지로, 덕혜옹주도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고종의 딸이라는 점에서 통상적으로는 대한제국의 황녀로 간주된다. [8] 유아기 때 요절하지 않고 정식으로 봉작받아 작호를 받은 왕녀 [9] 공식 사진에선 당의를 입거나 딸의 이름을 조선어로 지어주는 등 아예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이 없는건 아니었으나, 그녀의 어린시절 기록을 살펴보면 동요나 친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다 일본어를 사용하였으며, 비록 자의는 아니었으나 1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일본 유학을 가면서 인생의 절반을 일본에서 보냈다. [10] 당시에 덕혜옹주가 너무 어렸기에 모를 수도 있다는 반론도 있지만 전술한 유키카의 지적에도 덕혜옹주는 독립운동과 조국에 대해 거의 무관심하였다. 게다가 후일 일이지만 당시 10대 소녀에 무려 차기 왕위 계승자였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제 2차 세계대전 때 보급부대에서 군복무를 성실하게 수행했다는 걸 감안하면 덕혜옹주의 평가는 더더욱 박해질 수 밖에 없다. [11] 회의적 평가 문단에는 급우 유키카의 일화를 들어 '자주독립에 무관심'했다고 적고 있는데, 갓 10대에 접어든 청소년더러 비밀결사나 독립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질책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가 싶다. 더욱이 이왕가는 말이 왕공족속이지, 1920년대에 이르러서는 명목상 '여행의 자유'(식민지 한국민은 국권피탈과 함께 국내를 비롯한 어떤 종류의 자유여행이 금지되었다)마저 의친왕의 대동단 사건으로 말미암아 원천 금지되었다. [12] 어린 시절 배우는 불명이다. [13] 극본은 김진숙, 연출은 이창섭이 각각 맡았다. [14] 해당 드라마에서는 '영왕'이라고 한다. [15] 데라우치 마사다케는 조선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1916년에 일본 총리가 되었다가 1919년 사망하였다. [16] 조선총독부의 명령하에 이씨 왕가를 감독하는 관직. [17] 1924년으로 추정. [18] 이 회고 또한 오류로 한창수씨는 1921년에 사망하는데 1935년에도 살아서 등장한다. [19] 의친왕의 서11남 이석의 장녀. [20] 어린 시절은 아역 배우 신린아, 청소년 시절은 배우 김소현이 각각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