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어두운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22:13:21

이석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1881년생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이석(1881)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1910년생 독립운동가에 대한 내용은 이석(1910)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운동권 관련 사건에 대한 내용은 이석 치사 사건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colcolor=#fff> 대한제국 고종의 손자
이석 | 李錫
파일:이석.jpg
운현궁에서 찍은 사진
<colbgcolor=#29176e> 출생 1941년 8월 30일 ([age(1941-08-30)]세)
경기도 경성부 관훈정 사동궁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1]
거주지 전북특별자치도 전주시 최명희길 12-6 ( 풍남동 3가)
승광재(承光齋)[2]
링크 파일:홈페이지 아이콘.svg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29176e><colcolor=#fff> 본관 전주 이씨
해석(海錫) → 석(錫)[3]
아명 영길(英吉)
부모 부친 의친왕 이강
적모 의친왕비 김씨
생모 홍정순
형제자매 이복형제: 이건, 이우, 이해진[4], 이해직[5],
이수길[6], 이곤, 이해청[7],
이경길[8], 이해룡[9], 이해선[10]
이복 남매: 이해완[11], 이해원[12], 이해춘[13],
이해숙[14], 이해경[15], 이희자[16], 이창희[17]
친남동생: 이해준[18]
친여동생: 이해란[19], 이해련[20]
배우자 최희정
자녀
슬하 2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이홍
차녀 - 이진[21]
학력 서울 창경초등학교
경동중학교
경동고등학교[22]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23] / 학사)
종교 천주교( 세례명: 바오로)[24] 유교( 성리학)
}}}}}}}}} ||


1. 개요2. 생애3. 대한제국 황실 복원 관련4. 여담5. 미디어에서6.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의 손자이자 의친왕의 10남. 이석(李錫)은 황실 족보 상 이름이고, 본명은 이해석(李海錫)이다.

황실문화재단의 이사장이다. 그리고 현재 생존해 있는 고종황제의 손자 중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가장 연장자이다.

2. 생애

의친왕이 65세에 낳은 늦둥이 자녀다.

1960년 한국외국어대학교 서반아어과에 입학했다. 스페인어과에 입학한 이유는 "왕실이 존재하는 스페인 공주와 결혼하기 위함"이라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혔다.

이석이 결혼하려 했던 스페인 공주라는 사람은 후안 카를로스 1세의 누나인 팔라르 공주(1936 ~ 2020) 또는 여동생 마르가리타 공주(1939~)일 가능성이 높다. 팔라르는 이석보다 5살, 마르가리타는 이석보다 2살 연상이다. 참고로 팔라르 공주는 1967년에, 마르가리타 공주는 1972년에 각각 결혼했다. 이석이 대학에 입학했던 1960년[25] 당시에는 팔라르 공주와 마르가리타 공주 둘 다 미혼인 상태였다.

황족이라고 하지만 이미 황실의 모든 재산은 이승만 정권이 헌법을 어기며 강탈하여 비리에 거의 다 썼고, 그나마 남은 극소수의 재산도 순종황제 사후에 황실의 직계라고 할 수 있는 영친왕과 그 부인 이방자, 그리고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에게 돌아갔다. 이것 때문에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방자 여사가 박정희로부터 다른 황족을 도우라는 명목으로 받은 자금을 이방자 자신의 자선 활동에만 썼다고 비판한 일이 있었다.[26] 실제로 해당 자금의 목적이 그랬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의친왕은 이미 일제강점기 시절 옥살이하는 수모를 겪고 재산을 몰수당해서 6.25 전쟁때 영양실조에 걸리며 막내딸을 얻은지 2년만에 사망했다.

생활고로 인해 대학 재학 중에도 DJ 일을 보았고 가수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미8군 무대에서 노래를 불렀고 워커힐 호텔에서도 밤무대 가수를 했다. 이후 방송 MC와 건전가요 가수로서 계속 활동했다. 이때 황족이 광대를 해서 돈을 번다고 집안 어른들에게 매우 혼이 났다고 한다. 특히 당시 살아 있던 본인의 큰엄마인 순정효황후에게도 크게 꾸중을 들었다고 한다. 19세기 말에 태어나서 시아버지인 고종황제와는 다르게 사진 찍는 것까지 싫어했던 순정효황후 입장에선, 망한 황족이라지만 가수 노릇을 한다는 게 곱게 보이지 않았을 듯. 참고로 아버지인 의친왕은 1955년에 사망해서 아들이 가수하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도 순정효황후 문서를 보면, 이후 TV에 나오는 이석을 보며 상궁들이 망측해하자 "시대가 변한 것"이라고 말하는 등 조카를 완전히 내치지는 않은 듯. 같이 연예계 생활을 한 동료들의 증언으로는 "할 말과 하지 않아야 할 말을 기가 막힐 정도로 잘 가렸고(구분했고), 어떤 경우에도 서로 감정 상할만한 말은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연예병사로 입대해 베트남 전쟁에 참전했고 예비역 병장으로 제대했다. 하지만 부상을 입고 귀국하는 바람에 상심한 모친 홍정순 여사는 신경성 위암을 얻어 손녀인 이홍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했다.

〈비둘기집〉이라는 건전가요를 불러 유명해졌다. 1979년 황실을 챙겨줬던 박정희가 사망하고, 12.12 군사반란으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한 뒤 전두환은 이들을 궁에서 쫓아냈다. 결국 이석은 1980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고, 그 곳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어찌어찌 영주권까지 취득했지만 결국 1989년에 귀국했다.

2005년부터 전주대학교 사학과 강사로 일하면서 전주시 소유의 승광재[27]에서 가이드를 해주고 얼마간의 사례비를 받고 있다고 한다.

2013년 12월 2일 KB국민카드 광고에서 세종대왕 역할을 했다.

2013년 10월 9일, 채널A 프로그램 〈쾌도난마〉에 출연해서 자신만이 황위 계승권이 있는 정통 황손이라느니, 광화문에 있는 세종대왕 동상을 제작할 당시에 모델이 필요하자, 현존하는 황족인 이석을 모델로 삼았다는 언급을 했다.[28] 일본 천황 아키히토 아베 신조 총리가 자기 앞에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해야 역사가 바로 선다고 하면서, 일본 때문에 사라진 우리나라 황실을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다.

사죄를 받는 주체가 자신이어야 한다는 건 시대 착오도 이만저만이 아니다.[29] 거기다가 위안부 할머니들까지 팔아댔으니 더 문제. [30] 거기에다 자기 조상 이성계 왕씨 몰살을 저질렀으니 살아남은 개성 왕씨의 후손들에게 사과부터 해야한다는 비판여론도.[31]

여기까지면 노인네 망령인가보다 하고 넘어갈 텐데, 명성황후 시간설을 사실인양 방송에서 주장해 버렸다. 정작 본인은 명성황후가 살아 있던 그 당시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밖에도 자신의 초등학교 운동회 때 사동궁 상궁과 나인들이 잔치상을 줄줄이 내왔다고도 회고하는데 1941년생인 그가 국민학교를 다녔던 시절이 미군정 ~ 정부 수립(1948년) ~ 한국전쟁 기간인 점을 감안하면... 찾아보면 아침 방송 등에서 풀어대는 이러한 거짓 썰(?)이 한둘이 아니다. 다른 황손들이 이석을 대놓고 비판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존한 황족 중에 이석이 그나마 제일 웃어른인 탓도 크다.

아들이 없이 딸만 두 명인 이석은 2018년 10월 재미교포 인터넷 사업가 앤드류 리(Andrew Lee)를 자신의 양자로 받아들여 세자로 책봉했다. 기사에 따르면 앤드류 리를 '조선 왕실의 후손'이라고만 소개할 뿐, 구체적인 혈연관계는 밝히지 않았다. 앤드류 리는 2020년에 저택을 구입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이 앤드류 리가 소유한 롤스로이스 차량이 권총강도를 당했고, 운전자는 중태라고 한다. #. 앤드류 리는 최근 King Lee라는 예명의 래퍼로 활동하고 있다.

3. 대한제국 황실 복원 관련

<colbgcolor=#29176e><colcolor=#fff>
이석이 BBC 코리아와 가진 인터뷰 영상

4. 여담

5. 미디어에서

6. 관련 문서



[1] # [2] 전주 한옥마을에 있으며, 건물 이름은 본인이 지은 것으로 광무제(光)의 뜻을 잇는다(承)는 의미라고 한다. [3] 원래는 항렬자에 맞춰서 이해석(李海錫)이었으나 현재는 황실 이름으로 개명했다. [4] 황실명 이방. [5] 황실명 이창. [6] 황실명 이주. [7] 황실명 이광. [8] 황실명 이현. [9] 황실명 이갑. 아명 충길. 이원 황사손의 생부이다. [10] 황실명 이환. [11] 황실명 이영. [12] 황실명 이진. [13] 황실명 이찬. [14] 황실명 이숙. [15] 황실명 이공. [16] 황실명 이장. [17] 황실명 이민. [18] 황실명 이정. [19] 황실명 이용. [20] 황실명 이현. [21] 출처 둘째 딸에 따르면 셋째 부인에게서 이미 결혼 전 낳은 아들 1명이 있었다고 한다. 이석 본인은 쾌도난마에 출연했을 때 친아들이 없다고 발언했다. [22] 17회 졸업생이다. 동창이 요시 그란도시즌으로 매우 유명한 백인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있다. [23] 서양어대학 스페인어과 [24] 아버지를 따라 영세를 받았지만 현재는 성당을 잘 나가지 않는다. [25] 스페인은 당시 프란시스코 프랑코 치하 스페인국으로 명목상 왕정에 불과했다. [26] 실제 이방자 여사의 자선활동은 영부인이었던 육영수 여사의 지원이 매우 많았다. [27] 전주 한옥마을에 위치 [28] 근데 이건 진행자가 은근 유도를 한 부분이며, "동상 제작자가 세종대왕 초상화에 나온 용안이 유약한 느낌이 들어 고민할 때 텔레비전에 나온 이씨를 보고 동상의 형상을 만들어 갔다"는 내용이다. [29] 황실 수장인 이원이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도 아니고 황위와 관련 없는 이석이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이원의 발언을 보면 나라와 백성을 위하는 발언들이 많은데 이석의 발언들에서는 그런 것들을 찾기 어려운 점을 봐도 그렇다. [30] 일본이 적어도 자기들이 멸망시킨 대한제국 황족들을 후우(厚遇)하긴 했다고는 하지만 이는 대한제국 백성들의 반발을 막기 위함이었다. [31] 물론 왕씨 몰살은 실제로는 일반적 추정보다는 규모가 작았다고 여겨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대략 130명대~150명대 정도로 학살한 것으로 추산되며, 이들 죽인 왕씨 외의 나머지 왕씨는 성을 바꾸거나 외가쪽 성을 따른 왕씨는 친가쪽 성으로 바꾸고 사성 왕씨는 원래 성을 쓰게 하는 조건으로 살려두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쳐도 조선 이씨의 몰락에 비하자면 훨씬 잔인하기는 하다. 그도 그럴게 최소한 일본은 순종을 죽이진 않았지만 이성계는 공양왕은 물론 그 후계자들까지 학살했기 때문, 심지어 자신이 즉위시킨데다가 자신의 친척이기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그러면서도 공양왕을 비롯한 왕씨 몰살 전에 이성계는 조작사건에 조작투표까지 벌여가며 본심이 아니었다는 쇼를 했다. 애초 조선 건국 자체가 선양도 찬탈도 아닌 애매한 형태로 이뤄졌다는 것과 선양이라 쳐도 그 전에 이미 피를 엄청나게 흩뿌렸다는 점에서 예견된 일이라 할 수 있겠지만. [32] 영친왕의 후사가 끊긴 상황에서, 형제인 의친왕의 손자가 황실 후계자가 되는 것 자체는 적절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왜 9남 이갑의 장남인 이원이 황사손이 되었는지 의문을 가지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서열상으로 의친왕을 계승한 6남 이곤의 아들 이준 다음으로 이원이 가장 높았다. 왜냐하면 장남 이건(일본명 모모야마 켄이치)은 일본으로 귀화했고, 의친왕을 계승한 6남 이곤 외에 2남부터 7남까지는 이미 각각 출계하여 법적으로는 다른 방계 황족의 후사를 이었고(2남 이우, 3남 이방, 4남 이창, 5남 이주, 7남 이광) 8남 이현은 독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명목상이지만 황실 후계자이니만큼 나름 안정적이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있는 것 역시 중요한 선정 기준이었다. 또한, 2020년 10월에 이원은 〈정영진, 최욱의 매불쇼〉에 출연하여 황사손으로 지명받은 또 다른 이유에 대해 "이구가 한국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자신이 영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요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열과 현실적인 이유를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때 그가 가장 적합했던 것이다. [33]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으며, 여론의 반응은 냉담하거나 대부분은 무관심한 반응이었다. 결과적으로 여론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 [34] 과거 이 단체 이름은 황실재건XXX. [35] 모자 때문에 참전용사 출신이라는 말이 많으나, 쓰고 있는 모자는 DMZ 모자로 파주시에서도 기념품으로 팔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참전용사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이와는 별도로 이석은 할매부대를 몰고 다니는 남진처럼 베트남 전쟁에 연예병사 신분으로 끌려갔다. 이때 부상을 당하고 귀국하더니 모친이 쇼크를 받고 돌아가시는 바람에 이때부터 인생이 꼬였다고 한다. [36] 2006년에 정식으로 데뷔하였으나 별다른 반응을 얻지는 못했고, 2009년에 출연한 불꽃처럼 나비처럼 작품을 마지막으로 연예 활동을 접었다. [37] 인터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황실 복원을 주장하는 아버지와 이복 언니 이홍과는 달리 황실 복원에 대한 반응은 부정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