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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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출생 | 1892년 1월 2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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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0년 1월 14일 (향년 68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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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0313f><colcolor=#fff> 학력 | 육군대학교 (35기)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25기)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913년 ~ 1945년 | |||
최종 계급 | 중장 | ||
주요 보직 | 제4항공군사령관 |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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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 일본군의 장성.무타구치 렌야와 함께 무능한 군인으로 유명하다. 무능한 정도만 따지면 무타구치 렌야를 능가할 수준. 무타구치는 무능했지만 그나마 뭔가 해보려는 행동력이라도 있었지만, 이 사람은 무능한데 행동력조차 없었다.[1] 일본에서는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와 함께 삼대오물이라 불리며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군사적으로 무능했을 뿐, 인격적인 면으로 들어가면 평가가 180도 달라진다. 무타구치 렌야처럼 자신의 잘못을 부하들에게 떠넘기지도 않았고 병영 부조리를 일삼지도 않았다. 또한 다른 일본군의 장교들과는 달리 오히려 학살을 반대하고 전쟁범죄에도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전쟁 지역의 민간인에게 대민지원을 하고, 학살하러 오는 아군에게 팀킬 위협까지 하면서 격렬히 대립하는 등 최선을 다해서 막았다.
대한민국에서는 인지도가 낮은데, '전쟁 범죄를 저지르지 않은 일본군 장교' 이미지는 말할 것도 없고 똥별 이미지조차도 무타구치가 다 가져가서 그럴지도 모른다. 무타구치도 무능하다고 욕을 먹을지언정 전쟁범죄에 한해서는 깨끗한 사람이었다. 학살 논란이 1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무혐의 판결 났고 생존자 증언에 따르면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학살극을 한 주범들을 총살하고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2. 생애
2.1. 신이 내린 줄타기 능력과 낙하산 인사
그의 군사적 역량은 당시 전력이나 다른 부대가 세운 전과를 고려하면 실로 폐급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대신 하늘이 내린 정치질 능력이 있었다.육군대학교를 제35기로 졸업하긴 했는데[2], 육사 시절과 육군대학교 재학 시절 성적이 형편없었다고 한다.[3] 졸업한 후 도조 히데키 라인을 탄 그는 정계와 군부, 재벌을 잇는 뇌물셔틀 역할을 하면서 '도조의 돈주머니'라는 별명이 붙었다. 라인을 잘 잡은 덕분에 참모본부 참모와 관동군 보병사단 참모를 차례로 역임했고 요직 육군성 인사국장을 거쳐 육군 차관까지 승진했다. 참고로 전임자는 기무라 헤이타로. 도조가 육군대신과 육군참모총장까지 겸임하고 있었으므로 육군성의 실질적인 업무는 차관 도미나가가 대행했다. 후술하겠지만, 기본적인 업무 소양도 없는 양반이 장관 대행을 했으니 육군성의 업무가 어떻게 굴러갔는지 실로 궁금해질 지경.
그러나 패색이 짙어진 1944년 8월, 그의 보스 도조가 실각하면서 도미나가 본인도 덩달아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런데 도미나가의 다음 자리가 문제였다. 도조의 뒤를 이어 육군대신이 된 같은 삼대오물로 불리는 스기야마 하지메마저도 도미나가가 무능하다는 사실은 익히 알았지만, 그의 뒷배가 워낙 든든했기에 '이 놈을 대관절 어디에 배치해야 하나?' 하며 상당히 고민했었다고 하니 말 다 한 셈.
그러다가 스기야마는 1944년 당시에는 그나마 가장 안전했던 남방전선을 생각해 냈다. 일본 육군 제4항공군 사령관에 이 사람을 보내라고 조언한 사람이 다름 아닌 가와베 마사카즈로, 인맥과 파벌만 생각하고 일본군 최대 졸전 중 하나인 임팔 작전을 넙죽 승낙해준 전적이 있는 인물이었다. 그리하여 1944년 9월, 도미나가는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 육군 제4항공군 사령관으로 부임했다. 이때 스기야마는 도미나가가 떠난 것에 "드디어 그 딱따구리를 내 눈 앞에서 치워냈다."라며 홀가분해 했다.
2.2. 카미카제 명령
항공군 복무 시절 |
그런데 도미나가는 항공군을 지휘한 경력이 전혀 없었고, 기본적인 항공전 전략전술조차 하나도 몰랐다. 차라리 무능하면 가만히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항공기를 출격시킬 때마다 마치 중2병 환자 마냥 군도를 휘두르며 "발진!"만 줄창 외쳤다. 전후 참모들은 어차피 파일럿들에게는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았는데, 쓸데없이 활주로 바로 옆에 나가서 군도를 휘둘러서 이륙에 큰 방해가 됐다고 회상하였다.
무엇보다 그의 최대 삽질은 일본군의 귀중한 육군 항공대 전력을 카미카제로 말아먹었다는 것이다. 1944년 9월 카미카제 허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도미나가는 줄기차게 특공만 지시했다. 그래서 총 62차례 특공을 시도하여 그 비싼 전투기를 400대나 내버렸다. 심지어 기체가 고장나서 돌아오거나 간신히 생존한 대원에게 충성심이 모자라다고 훈시히고는 다시 전투기에 태워 강제로 특공을 보냈다. 이는 비인간적인 전술일 뿐더러, 귀중한 항공기와 더 귀중한 조종사를 1회용 폭탄으로 삼아도 10회 중 1회 성공할까 말까 한 전술적/전략적으로 손해인 희대의 뻘짓이다. 더군다나 400여 대를 62차례로 나누어 순차적으로 투입했으니, 피해를 입히기는 커녕 대놓고 날 잡아줍쇼 하는 꼴이었다.
이러한 도미나가의 특공 명령 때문에 레이테 만 해전 이후 서진하는 미군에게 충분한 위협이 되었을 육군 제4항공군의 항공 전력은 절반 이하로 뚝 떨어졌다. 이오지마 전투와 오키나와 전투에서 희생된 미군의 수를 생각한다면, 제4항공군이 전력을 보존한 채 일본 열도나 필리핀 탈환전 방위에 나섰으면 미군은 더 심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이를 예방했다는 점에서 도미나가가 얼마나 멍청하고 한심하게 병력을 굴렸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생존자에 의하면 특공전이 되면 술 한병을 매달고 나타나서는 훈시를 내리는 능력밖에 없는 사령관이었다고 한다. 그는 특공하는 항공대원들 앞에서 술을 마시며 자주 이렇게 훈시했다.
제군은 이미 신이다. 제군만 보내지 않는다. 본관 역시 마지막 일전에서 특공혼을 불살라 제군을 따라갈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실상은 평생 전투기를 한 번 못 타 본 인물이다. 상식적으로 항공기 조종 자격도 없는 양반이 조종을 할 수 있을 리가 있나? 더욱 더 황당한 건 이미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2번이나 사임서를 냈었다는 것이다.
2.3. 적전도주
1945년 1월, 일본의 패색이 더욱 짙어졌다. 가장 안전했던 남방전선은 임팔 작전의 대실패로 영국, 인도군이 인도차이나 반도로 진공해 미얀마까지 탈환했으며, 태평양의 미 해군은 레이테 만 해전 이후 필리핀까지 밀고 들어왔다. 이들은 해가 바뀌자마자 이미 마닐라 코 앞까지 와서 해병대의 상륙을 위한 함포사격을 개시했다.그리고 1945년 1월 16일, 도미나가는 위궤양이 악화했다면서 수송기를 타고 타이완의 타이베이 기지로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총애하는 기생들을 잊지 않았고 수송기의 남은 공간에는 위스키를 실었다. 즉, 남방전선 전역의 제공권을 책임지는 총사령관이 적전도주한 것이다.
게다가, 레이테 섬을 잃자 제 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마닐라를 포기하고 루손 섬으로 후퇴하기로 결정했지만 "사령관님, 이미 많은 특공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닐라를 포기할 여유는 없으니 여기서 옥쇄를 각오하겠습니다." 하며 허세를 부렸다.
도미나가가 도주하자 제4항공군은 지휘체계가 완전히 무너졌고, 2월 13일부로 완전히 해체해 육군 보병 부대에 편입되었다. 필리핀 탈환전은 지상 병력이 서로 비슷하고 기동에 필요한 공간이 충분해서 일본군의 전투 능력을 확인할 좋은 사례인데, 여기서 40만 대 40만 전투를 벌여 전사자가 미군 1만여 명, 일본군 39만여 명이다. 사령관이 도망간 제4항공군의 대부분이 필리핀에서 뼈를 묻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나마 인원은 육군이 거두어서 전투병으로 써먹었지만, 육군의 주력 전투기 Ki-43 하야부사의 상당수는 조직적인 반격도 한 번 못하고 카미카제에 축차적으로 들어가 미군 전투기 조종사들이 에이스 칭호를 달기 위한 제물로 쓰였다. 그나마 카미카제에 안 쓴 전투기 500여 대는 고스란히 필리핀을 탈환한 미군 손에 넘어갔다. 그나마, 말레이 반도에서 기동전으로 대활약을 펼쳐 '말레이의 호랑이' 라고도 불린 필리핀 방면군 총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 장군은 여타 일본군 지휘관들과 달리 군사적 능력이 있어 7개월 가까이 지연전을 해냈다.
그런데 도미나가는 적전에서 도망쳐 온 주제에 대낮에 군용 차에 기생을 데리고 다닌 데다, 위궤양이 심하다며 타이베이에 있는 베이터우 온천에 갔다. 당시 이 지역에 일본군 부상병을 위한 요양소가 있었고 기생 관광으로 유명했다. 이런 개념 없는 행동으로 순식간에 대본영 전체에 도미나가의 소문이 쫙 퍼지자 어떤 병사도 그에게는 경례를 안 했다. 주위에서는 군인으로서 명예로운 최후를 맞으라며 할복을 권유했으나 그는 끝내 거부했다.
사실 카미카제 부대의 지휘관들 대부분은 전후에도 살아남았다. 도미나가는 아예 대놓고 적전도주를 해서 더 까일 뿐이다. 카미카제 부대 지휘관 중 해군 제1항공함대 사령관이었고 전후 할복 자살한 해군중장 오니시 다카지로 제독을 빼면, 부대원들과 함께한 사람은 해군 제5항공함대 사령관 해군중장 우가키 마토메 제독뿐이다. 1945년 2월 초, 그는 위궤양 진단서를 떼서 직속상관인 육군 제14방면군 사령관 야마시타 도모유키에게 자기 행동이 적전도주가 아니었다는 인증을 받으러 갔다. 당연히 야마시타 장군은 빡쳐서 부하를 버리고 도주하는 놈 따위와는 만나고 싶지도 않다며 문전에서 박대해 그의 승인을 각하시켰다. 하지만 당시 필리핀의 상당 부분이 미군의 손에 들어가며 영인군이 인도차이나로 밀고 들어오니, 일본 육군은 일개 중장 1명에게 신경 쓸 틈이 없어 군법회의도 어영부영한 끝에 예비역으로 편입했다. 게다가 이미 이 자의 상관인 기무라 헤이타로가 버마에서 일본군 7만 5천명을 전선에 남겨두고 도주하였지만 처벌받지 않은 탓에 형평성을 고려해서라도 처벌이 힘들었다.
2.4. 항복과 말년
그러나 일본 육군 본부는 적이 무서워 적전도주한 놈에게 본토에서 예비역으로 편하게 살라는 건 말도 안 된다는 이유로 1945년 7월에 그를 현역으로 전격 복귀시켜 만주에 주둔한 관동군 육군 139사단 사단장에 임명했다. 본토결전 대비 등의 이유로 당시 예비역들을 대거 재소집하면서 이 자도 소집된 것이다. 이 당시 일본은 그 전까지 대소전을 대비하여 모든 작전을 연구해왔던게 무색하게 소일 불가침조약이 깨지지 않을 것이라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해 가면서 미국과의 전쟁에 신경을 다 쓰고 있는 판이었다. 그래서 관동군의 정예들을 죄다 남방이나 본토로 빼내면서 신규사단의 병사들과 예비역 지휘관들을 대거 소집해서 그쪽으로 보내버렸던지라 나이가 들었거나 폐급인 지휘관들이 관동군으로 많이 갔던 게 그 시기였다. 대표적으로 최후의 관동군 사령관인 야마다 오토조 대장은 예비역으로 한참을 썩고 있다 이때 현역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도미나가는 만주 작전을 편 소련군이 만주로 밀고 내려오자 전투에 나섰으나 겁이 나서 싸우지도 않은 채 곧바로 항복해 소련군에 체포되었다. 이후 전범으로서 재판받아 소련의 수용소에 억류받았고, 하바롭스크의 굴라그에서 10년 가까이 수용소 생활을 했다. 그 뒤 소련-일본 간 국교 정상화로 포로 송환을 통해 1955년[4] 일본으로 돌아왔다.1955년 본토 귀환 후 야스쿠니 신사에서 눈을 잃은 상이군인을 영접하는 도미나가 |
그리고 1960년 노환과 포로 수용소 생활의 후유증이 겹쳐 사망했다. 향년 68세. 유일하게 항복한 장군이라서 대접이 좋아서 좋아하는 위스키를 실컷 마시며 수용소 생활을 즐기다, 그 후유증인 위궤양에 걸려 사망했다는 설도 있다. 소련군은 일본군 포로들에겐 별다른 원한이 없어서 (일본 군인들이 각오했던 것보다는)제법 괜찮은 대접을 했다고 한다.
경험자의 그림일기 해당 그림일기를 쓴 주인공도 139사단 출신이다.( 원 출처 참조.) 소련인 배신자들 대우가 그야말로 지옥보다 조금 나은 수준이며 독일군 포로들도 사망자가 수십만에 이를 만큼 혹독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이건 독소전 초중반에 잡힌 포로들이 워낙 많이 죽어서 그런 것도 있다. 이때는 소련군이 쓸 물자도 부족해서 스탈린그라드에서 활약한 장성급 정치장교조차 병으로 죽어나가는 판국이었으니. 그리고 이러니저러니해도 독일이 소련한테 한 짓거리에 비하면 무척 관대했던지라 딱히 독일을 동정할 거리도 못 된다.
반면 일본군은 진작에 할힌골 전투에서 소련- 몽골 연합군에게 쪽도 못 쓰고 참패한 지 오래라서 서로 적대감이 그다지 없었으며, 그 덕에 초기 물자가 극히 모자라던 시절 등을 빼면 그나마 좀 나은 생활을 했다. 물론 소련군도 인간인지라 세균전에 가담한 731 부대에게는 독일군 포로보다 더 혹독한 대우를 했는데, 731 부대 실험 대상으로 러시아인들도 쓰였던 전례가 있어서 더욱 그랬다.
3. 후대의 평가
3.1. 군사적 측면
일본에서는 무타구치 렌야, 스기야마 하지메와 묶여 삼대오물이라 부른다. 그 가운데서도 도미나가는 카미카제로 멀쩡한 항공 전력을 말아먹었고, 무엇보다 군의 사령관이 적을 눈 앞에 두고 도망쳐서 남방전선 항공군을 완전히 무너뜨렸다.문제는 기본적인 업무 소양은 있었던 무타구치 렌야나 스기야마 하지메와는 달리 이 인간은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점이다. 천하의 무타구치 렌야는 임팔 전투때 기생을 데리고 갔어도 정해진 업무 시간에는 나름 일을 했지만, 도미나가는 그런 점에서 무타구치만도 못했다. 오죽했으면 스기야마도 능력은 쥐뿔도 없으면서 연줄만 좋은 이 인간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했을 정도. 업무 능력만 보면 뻘짓을 일삼은 무타구치와 스기야마도 이 인간보다는 유능했다는 것.
최후의 순간에 옥쇄나 다름없는 명령을 받아 만주에서 싸우다 붙잡혔고 죽을 고생을 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실제로는 싸우긴 커녕, 소련군이 온다는 소식에 바로 항복해 만주 전선을 순식간에 붕괴시켰다. 사실, 엄밀히 따지고 보면 이것 역시 적전 도주였어도 전후관계를 고려하면 사실상 후퇴에 가까웠다. 애초에 상부도 사실상 실패한 작전 취급했으나, 본인이나 직속 상관이나 체면상 철수에 관해 언급만 안 했지, 어느 정도 묵인도 했다. 물론 예비역에 편입하는 징계를 먹고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좌천 되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일본군 입장에서 싸울만한 상황, 심지어 저 정도면 다른 나라들도 싸우는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상황임에도 대놓고 적전 도주를 하여 대본영의 심기를 거슬렸다.
필리핀 탈환전에서 미군과 일본군의 병력은 서로 대등했으나, 질적인 요소는 빼더라도 전차는 3:1로 미군이 우세했다. 1944년 당시 미 육군 보병사단에는 셔먼 전차가 최소 60대 이상은 있었다. 야포 또한 2:1 수준으로 미군이 우세했다. 항공기의 경우, 육군끼리는 서로 비슷한 상황이나, 필리핀 주변의 항공모함에 배치된 해군 항공대 전력을 고려하면 일본군이 상당히 불리했다.
그나마 이것이 일본군 입장에서는 있는 것 없는 것 모두 투입해서 끌어올린 전력이었고, 방어전임을 고려하면 지더라도 미군에게 큰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위궤양이 명분이라지만, 그 와중에도 자기가 좋아하는 술과 기생을 챙겨 도주한 점을 보면, 설득력이 매우 떨어진다. 결국 대본영의 심기를 제대로 건드렸다.
하지만 항공군사령관 시절 대민지원을 하거나 부하들의 전쟁범죄를 철저히 통제한 것으로 보아, 의외로 이런 쪽으로는 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인 업무 소양도 없다는 평을 들을 정도의 인간이 부하들의 인망도 없으면서 부하들의 전쟁범죄를 철저히 통제한다는 건 아무리 빽이 튼실하다지만 보통내기가 아니다. 도미나가의 성격을 고려할 때 관심 있는 쪽에만 실력을 발휘하는 인간이었을지도 모른다.
3.2. 인간적 측면
군사적으로는 매우 무능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성은 좋은걸 넘어 일본군에서 몇 안되는 양심적인 사람이었다.참모본부 제2부장 시절, 중국 저장성의 닝보를 방문하여 세균전을 놓고 이시이 시로와 그 측근들과 토의했을 때 "야 이 미친 놈들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거기 있는 민간인들은? 그들은 사람이 아니냐?"라고 호통을 친 일화가 있었다. 그의 격렬한 반대 덕에 세균전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게다가 이는 제4항공군 사령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시 모든 일본군이 주민들에게 약탈과 방화를 저지를 때 그의 부대만은 약탈이나 방화, 학살이 없었고 오히려 피난민들과 원주민들의 생활을 지원하면서 대민지원을 했다고 한다. 더불어 마닐라 대학살 때도 기겁하면서 제4항공군이 맡던 지역의 학살을 강력하게 막았다. 다른 부대가 필리핀 사람들을 죽이러 오자 "만약 우리가 점령한 지역에서 너희들이 민간인을 학살한다면 아군이라 해도 거리낌없이 공격할 것"라고 단단히 엄포를 놓아 못 건드리게도 했다.
국제법을 준수하고 위법행위를 방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당시 일본군은 대본영에서부터 민간인 약탈과 학살을 적극 장려할 정도로 막장이었으며, 거의 대부분의 일본군 장성들도 전쟁 범죄를 당연하게 여겼다. 모두가 잘못된 일을 당연하게 여길 때 혼자서 아니라고 외치기 위해서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다. 아군과 대립하면서까지 아군의 전쟁 범죄를 막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결전에 나설 용기는 없었으면서 이런 쪽으로는 제대로 된 용기를 보여줬다는 게 놀랍다.
이게 가능했던 건 상술했듯 당시 이 양반의 뒷배가 워낙 빵빵했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의견이 안 맞아 아군과 대립하더라도 크게 손해볼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당장 육군대신, 즉 한국군으로 치면 육군참모총장(4스타)이나 국방부장관 급인 스기야마조차도 이 인간을 어떻게 해야 치워버릴 수 있을지 고심했다는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읽어보자. 육군 NO.1인 육군대신도 대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을 그보다 계급도 권력도 훨씬 낮은 현장 준장~중장급 지휘관들이 맘대로 할 수 있었을 리가 없었으니 매우 강력한 빽을 가진 그의 주장이 비교적 잘 받아들여졌을 것이다. 보통 이렇게 능력이 없는데 정치질과 빽으로 자리를 얻은 사람은 조직을 침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도미나가 교지 또한 그런 인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그가 속한 조직이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에 인도적이고 긍정적인 결과가 나온 셈이다.
도미나가 말고도 민간인을 도왔던 일본군은 있었지만, 이런 사람들은 소수이거나 직급이 낮았던 만큼 뭘 바꿔보려고 노력해도 한계가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수만의 군대를 이끄는 장성의 위치에서 올바른 행동으로 수천 명의 죽음을 막은 도미나가의 선행은 더욱 빛을 발한다. 만약 당시 일본군이 정상적인 조직이었고 도미나가 또한 전투 지휘가 아니라 점령지 안정화 임무를 맡았다면 더욱 크나큰 공을 세웠을 인물이다. 비슷한 예로는 미라이 학살 당시 민간인 구출을 시도한 톰슨 준위가 있다.
태평양 전쟁을 미화하고 전범들을 찬양하는 일본 내 극우파들에게는 오히려 민간인 학살을 막기 위해 내전을 불사하고, 반인륜적인 명령을 거부한 점 때문에 삼대오물이라 불리며 무능한 전범들보다 훨씬 더 많은 욕을 먹기도 한다. 반대로 책임 의식 있는 일본 내 자유주의자들과 혁신계 인사들은 무능했을지언정 인간성만큼은 지킨 장군이라는 평을 내리기도 한다.
3.3. 이런 모습을 보인 이유
도미나가에게는 군인에게 꼭 필요한 가치관인 충성심과 애국심이 전혀 없었다. 최대한 좋게 말하자면 소시민적인 성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당시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였기 때문에 직업 군인이 아주 높은 대우를 받았다. 전역을 해도 연금을 두둑히 받았으며,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으며, 좋은 직장에 취직할 수도 있었다. 육사 출신이면 한국 나이로 21~22세 정도의 어린 나이에 소위로 고시 합격자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설령 육사를 나오지 못했더라도 근속 승진으로 소좌까지는 큰 문제가 없으면 보장되었다.[5]
군인에 대한 취급이 이렇게 좋다 보니 진급이 안 되어 소좌로 퇴역한다 하더라도 제법 많은 은사금을 받을 수 있었고, 고등학교나 전문학교의 교련교사가 되기도 했다. 이 경우 교장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치였다. 그리고 고향에서도 군대에 몸 담았다는 것을 커리어 삼아 상당한 정치력을 행사하는 등, 군대에 발을 들인 이상, 출세하지 못해도 남 부럽지 않은 삶이 보장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아버지인 도미나가 키치타로는 아들들을 군인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의 동생 중 두 명은 해군병학교를 졸업한 후 해군장교로 임관했으며, 한 명은 소장까지 다른 한 명은 중좌까지 진급하였다. 도미나가 교지는 구마모토 육군 유년학교로 갔으나 그는 여기서도 사명감이나 책임의식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육사 시절 도조 히데키를 만나, 그의 눈에 든 이후로는 군 내부의 정치질이나 파벌 싸움에 줄 잘 타서 이득을 챙기는 것에만 힘을 쏟는다. 의외로 줄타기 능력 하나는 끝내줬는지 능력은 전혀 없으면서 장성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군 내부에서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은 이후에는 꼭 필요한 업무만 관료적으로 처리하면서 황도파와 통제파의 파벌 싸움이 한참일 때 중간에서 많은 이득을 챙겼다. 그렇게 중장 자리까지 올랐으니 그의 위세가 어땠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보신주의자였던 도미나가는 오로지 자기 목숨만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 결과로써 나타난 것이 바로 항공군사령관 시절에 보인 수동적인 모습과 가미카제, 무사안일주의, 탈영, 도주, 항복이다.
한 마디로 그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동네 부잣집 아저씨 스타일의 사람이었다. 꼰대스럽고 이기적인 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것치고는 인심이나 인간관계는 좋다는 평가를 받았다. 성격이 소심해서 크게 나쁜 짓을 한 적도 없었고, 크게 인생을 걸만한 모험도 없이 그저 자기 자리 지키는 것에만 힘 쓰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어떻게 봐도 군인과는 전혀 맞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렇듯 도미나가 교지는 애국심이나 국가에 대한 충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자신들의 권력 유지와 이익만을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몬 일본군 지도부나, 맹목적으로 국가를 추종하여 제국주의, 군국주의에 심취해 온갖 막장 짓을 저지른 전범들과는 달리 군 수뇌부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있으면서도 일본 제국의 광기에 물들지 않았던 몇 안 되는 정상인이었다. 어떻게 보면 애국심이 전무했기에 당시 미쳐 돌아가던 일본 제국의 사상적 굴레에서 벗어나 최소한도 인간적인 존엄성을 부지할 수 있었던 인물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어떻게 보면 악한 인간일수록 훌륭한 군인이라는 말의 정확한 반례인 셈.
따지고 보면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의 정상인이라기보다는, 보통 사람이라면 으레 생각하는 '쓸데없는 일에 목숨 걸 필요가 없다', '살 사람은 살아야 한다', '불필요하게 죽인다고 좋은 일 생기는 것도 아니고, 안 죽여도 내가 크게 피해 볼 일 없는데 다른 사람을 막 죽이는 건 좀 그렇다' 정도의 생각을 가지고 행동하는 지극히 상식적인 선의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정상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권력을 최대한 활용해서 상부의 반인륜적인 명령을 거부하거나 아군의 민간인 학살을 막는 등 끝까지 인의 하나만큼은 지켰다. 사실 기본적으로 보신주의 성향이 강한 인물이었던 만큼, 그런 악행까지 저질러 가면서 취할 만한 속셈이나 악랄함 또한 없었을 것이다.[6]
4. 팔라완 학살 관여 의혹
팔라완 학살 당시 근거가 된 2항공사단 테라다 세이치 중장의 포로 학살 명령에 관여하지 않았냐 하는 의혹이 있다. 포로 학살 지시를 내리기 전 테라다 중장이 직속상관인 도미나가 교지와 협의했는데, 그 내용이 알려진 바가 없기 때문. 때문에 학살 지시를 내렸거나 방조한 거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지만 증거가 없고, 무엇보다 상술했듯 도미나가가 소련군에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미군이 전범 조사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그러나, 정말 도미나가 교지가 학살에 연루되었다면 소련에게 요청해서 바로 전범재판에 회부시켰을 텐데, 그냥 내버려둔 걸 보면 어쩌면 전혀 관련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도미나가는 소련에서 풀려나고 5년 뒤에 죽었는데 정말 도미나가의 명령으로 미군 학살이 진행됐다면 5년 동안이나 미국이 편하게 내버려둘 리가 없다. 미국은 자국군 포로 학살에 대해서 결코 넘어가지 않고 엄벌에 처했기에 최종 책임자로 전범 재판을 받은 테라다 중장을 종신형을 선고하고 간접적으로 참여한 이들까지 싸그리 처벌했는데 도미나가가 관여했다면 결코 가만히 놔둘 리 없다.
애초에 위에서 언급했듯 도미나가는 인맥이 너무나도 든든하여 본인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위에서 제발 좀 하라고 명령해도 할 사람이 아니고, 결정적으로 자기 손으로 전쟁범죄를 저지를 만큼 깡이 좋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도미나가 교지랑 테라다 세이치 중장은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테라다 세이치가 일방적으로 도미나가 교지를 증오했는데, 그 원인이 포로 학살 명령을 도미나가 교지가 거역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밝혀진 바가 없다. 그래서 학살에 관련이 있다는 해석에서도, 그가 직접 학살을 명령하거나 방조했다기 보다는 테라다 세이치가 일방적으로 학살 명령을 내리고 도미나가 교지에겐 제대로 보고도 하지 않았고, 교지는 그걸 알아볼 생각도 하지 않았다는 간접적인 직무유기 형태라는 주장이 있다.
어쨌거나 도미나가 교지가 학살 관련해서는 해당 사건에 대해 개입한 의혹은 있지만, 도미나가가 제대로 정보를 알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본다. 테라다 세이치가 도미나가와 사무적인 일로 접촉했을 수는 있지만 관련 정보를 공유했을 가능성은 낮다. 결정적으로 도미나가는 전쟁 기간 내내 일본군 내에서 벌리는 학살이나 약탈 당 전쟁범죄에 대해서 결사 반대의 입장이었고 실제로도 그 신념을 실천했음을 감안하면, 팔라완 학살 관련해서 도미나가가 개입했을 가능성은 많이 낮은 것 같다.
5. 가족, 친족
- 아버지: 도미나가 키치타로, 의사
- 장남: 도미나가 야스시
- 차남: 도미나가 교지 = 부인: 토미나가 세츠 - 아들 도미나가 야스시
- 삼남: 도미나가 쇼죠
- 사남: 도미나가 켄고
- 처남: 모리타 이타루
- 사위: 카와무라 지로
장남 도미나가 야스시는 삼대오물인 아버지와는 완전히 반대로 모범적이고 훌륭한 군인이라 평가받는다. 그는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라서 징집이 없었으나 태평양 전쟁의 패색이 짙자 본토를 지키러 육군 항공대에 자원 입대했다. 전쟁 발발의 원인이 어쨌든 자기네들 입장에선 본토인 그의 조국을 지키기 위한 전쟁이니, 동기 자체는 군인으로서 훌륭했다.
그리고 1945년 5월에 아버지가 준 일장기를 들고 오키나와 전투에 출격했으나, 전세가 기울자 카미카제로 22세의 짧은 삶을 마감한다. 아버지인 도미나가 교지가 수많은 젊은이들을 특공으로 산화시켰던 걸 생각하면 이건 운명의 장난이라 해도 무방하다. 도미나가가 자폭으로 수많은 이들을 하늘나라로 신속하게 내보냈는데, 정작 그의 아들도 특공 때문에 죽었다.
아버지와는 정반대인 인품의 도미나가 야스시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가 특공을 나가기 직전에 101항공단의 한 참모에게 격려를 받았는데, 무서워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혼자서만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출격했다. 그가 특공으로 산화한 뒤 그 참모가 "그 용감한 청년은 대체 누구였는가?"하고 물어보니 "도미나가 장군의 아들입니다." 하고 전혀 예상 못한 대답을 듣자 놀라며 이 청년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6. 매체에서
하츠 오브 아이언 4에서 몽강국의 보병참모로 등장한다. # 성능은 보병 공격력과 방어를 올려주는 전문가로 실제 역사와 달리 쓸만하지만, 문제는 몽강이 너무 쓰레기라 아무것도 안 한다는 거다.
[1]
물론 무능한 주제에 쓸데없이 나선 무타구치가 더 고약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후술할 이 작자의 행동을 보면 반드시 그렇다고 보기도 어렵다.
[2]
육군대학 동기가
영친왕과
홍사익 중장이다(...).
[3]
다만
육군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공부를 꽤 잘해야 했기 때문에, 도미나가가 육군대학교에 들어는 갔다는 점에서 육군대학교에 합격할 정도의 공부머리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문제는 입시 능력과 군사적 능력은 같지 않다는 것이다.
[4]
당시 만주와 북한지역에 주둔했던 일본군들은 모조리 굴라그로 끌려가 10년 고생하다가 겨우 일본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5]
대한민국 육군 기준
소령에 해당한다.
[6]
이 사람 인생사를 보면 애초에 상류층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일반 서민과 생각하는 방식이 비슷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의 아버지 도미나가 키치타로는 의사였다. 근대시절 의사는 신분이 아주 낮지는 않았으나, 귀족은 당연히 아녔고 현대의 중산층 느낌이었을 것이다. 당장 아들을 셋이나 군대에 보낸 것도 자식 대에서라도 상류층으로 올라가고 싶은 열망에서였으니. 이런 마인드는 아마 본인도 비슷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