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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소피아

성소피아 성당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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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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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 튀르키예 의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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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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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tanbul'un Tarihi Alanları
198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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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riği Ulu Camii ve Darüşşifası
1986년

하투샤
: 히타이트의 수도

Hattuşa: Hitit Başkenti
19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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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mrut Dağı
1988년

크산토스 ・ 레툰
Xanthos - Letoon
199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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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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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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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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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eropolis - Pamukk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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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agia_Sophia.jpg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이스탄불 역사지구
영어 Historic Areas of Istanbul
프랑스어 Zones historiques d'Istanbul
국가·위치 튀르키예 이스탄불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5년[1]
등재기준 (i)[2], (ii)[3], (iii)[4], (iv)[5]
지정번호 356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1. 개요2. 전경3. 역사
3.1. 중세 초기
3.1.1. 초기의 대성당3.1.2.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건3.1.3. 지진으로 인한 피해3.1.4. 성상 파괴와 십자군의 약탈3.1.5. 예언, 최후의 순간, 전설
3.2. 근세, 근현대3.3. 현대
3.3.1. 박물관으로 전환3.3.2. 모스크로 환원
3.3.2.1. 배경3.3.2.2. 경과
4. 건축
4.1. 설계, 구조와 재료, 보수4.2. 의장과 모자이크4.3. 옴팔리온(Omphalion)4.4. 서예 원판
5. 어록·기록6. 관련 건축물7. 고양이 글리(Gli)8. 기타

[clearfix]

1. 개요


튀르키예 이스탄불 소재의 과거 정교회 성당이자 현 모스크.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건설되어 537년 12월 27일 축성된 성당으로 정교회의 총본산 역할을 하였다. 1453년 5월 29일 오스만 제국의 군주 메흐메트 2세 제20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을 통해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입성하여 아야 소피아에서 금요 예배를 거행한 이래 이슬람 모스크로 개조되어 사용되었다. 튀르키예 공화국 수립 후에는 강력한 세속주의 정책을 취한 국부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지시로 1931년부터 잠시 봉쇄되었고, 1934년 11월 24일 내각의 결정에 따라 1935년 2월 1일 박물관으로서 개방되고 종교의례 거행이 금지되었으며, 회칠에 가려졌던 정교회 성화가 일부 복구되었다. 1985년 이스탄불 역사지구의 일부로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2020년 7월 10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의 행정 명령으로 같은 달 24일에 박물관에서 이슬람 모스크로 재전환되었다.

아야 소피아는 당시 세워진 그 어떠한 건축물보다도 광대한 실내 공간을 가진 건물로, 16세기에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의 성당이기도 했다. 의 직경만 하더라도 31.87m로, 로마의 건축물인 판테온 다음 가는 크기였으며 수백 년 뒤의 르네상스 시대에 세워진 피렌체 두오모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조적[6] 이기도 했다. 아야 소피아는 많은 정교회 이슬람 문화권 종교 건축물들의 기본 구조가 되었으며, 르네상스 건축물의 구조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어 명칭인 하기아 소피아·아이아 소피아(Ἁγία Σοφία)는 '거룩한 지혜'[7][8]라는 뜻으로, 그 외에는 하기아 소피아, 아야 소피아, 성 소피아 사원, 성 소피아 성당, 성 소피아 대성당, 성 소피아 박물관 등으로 불린다.
튀르키예어 Ayasofya
(아야소피아)
Ayasofya-i Kebîr Câmi-i Şerîfi
아랍어 ایا صوفیه
(아야 수피야)
مسجد ایا صوفیه الکبیر
코이네 그리스어 Ἁγία Σοφία
(하기아 소피아)
현대 그리스어 Αγία Σοφία
(아이아 소피아)
Μέγα Τζαμί της Αγίας Σοφίας
라틴어 Sancta Sophia
(상크타 소피아)
Ædes sanctæ Sophiæ
영어 Hagia Sophia Hagia Sophia Grand Mosque

2. 전경

파일:Ayasofya_in_Turkey.jpg 파일:Ayasofya.jpg
건물 둘레의 첨탑(미나레트)은 원래 있던 게 아니라 오스만제국 때 모스크로 개조되면서 축조된 것이다.
파일:ayasofyamus.jpg 파일:ayasofya_mosque.jpg
박물관 시절 실내 전경 모스크로 재개장 후 실내 전경

3. 역사

|| 건물 ||<-3> 기간 || 용도 ||
첫째 건물 360년 2월 15일 ~ 404년 6월 20일 정교회 성당
둘째 건물 415년 10월 10일 ~ 532년 1월 13일
셋째 건물 537년 12월 27일 ~ 1204년
1204년 ~ 1261년 가톨릭의 성당
1261년 ~ 1453년 5월 29일 정교회의 성당
1453년 5월 29일 ~ 1931년 모스크
1935년 2월 1일 ~ 2020년 7월 24일 박물관
2020년 7월 24일 ~ 현재 모스크

3.1. 중세 초기

파일:external/ukar.ff.cuni.cz/Hagia-01.jpg
대성당의 변화 양상. 오른쪽 아래에서 왼쪽 위 순으로(↖) 변화하였다.
558년 537년 415년
그전의 2번의 지진으로 금간 돔이 무너진 걸 복구하기 시작해서 562년에 완료했을 때의 모습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현재의 3번째 하기아 소피아를 처음 세웠을 당시 테오도시우스 2세 때 지어진 2번째 하기아 소피아

3.1.1. 초기의 대성당

330년 5월 11일 콘스탄티누스 1세 로마 제국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한 후 30년이 지난 360년 2월 15일 대제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 2세 황제가 첫 번째 아야 소피아를 건설했다.[9] 당시에는 '위대한 교회(Μεγάλη Ἐκκλησία, 메갈리 에클리시아)'[10]라고 불렸으며 건축은 목조 지붕의 바실리카였던 것으로 추정되나 창건한 지 40년도 지나지 않은 404년 6월 20일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내 아일리아 에우독시아 황후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Ο Άγιος Ιωάννης ο Χρυσόστομος)를 박해하여 추방할 때 수도에서 일어난 폭동으로 소실되고 말았다.

소실된 대성당은 11년 뒤 테오도시우스 2세 황제 치세인 415년 10월 10일에 재건되었으나, 120여 년 뒤인 532년 1월 13일경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휩쓴 니카의 반란 때 일어난 대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첫 번째 아야 소피아와는 달리 2번째 아야 소피아의 흔적은 현존하는 아야 소피아의 일부 원기둥 등에 약간 남아 있다.

3.1.2.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건

파일:external/www.byzantium1200.com/hagia1.jpg

파일:external/www.tateville.com/hagiasophia-12thc.jpg

대성당이 전소된 지 열흘 후인 532년 2월 23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아야 소피아의 재건을 결정하면서 이전보다 더 웅장한 건물을 바라며 물리학자인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Isidoros)와 수학자인 트랄리스의 안시미오스(Anthemios)에게 설계를 맡겼다. 유스티니아누스는 그의 정복 사업이 그러하였듯이 이 공사에도 엄청나게 빠듯한 기한을 주고 닥달했다. 그리스인인 두 사람은 전문적인 건축가가 아니었지만 1만 명 이상의 인력이 동원되어 532년부터 537년까지 채 6년도 걸리지 않은 공사기간[11] 통해 당시까지 사상 유례가 없는 광대한 규모의 대성당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대성당의 건설을 위해 제국 전역에서 각종 자재들이 공수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였던 에페소스 아르테미스 신전이 원기둥들을 징발당하는 불운을 겪었다.

마침내 537년 12월 27일,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가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메나스가 집전한 아야 소피아 대성당의 헌당식이 거행되었다. 이때 대성당의 웅장함에 감동한 황제는 아야 소피아가 솔로몬이 지은 성전을 능가했다고 생각해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는 일화가 있다. 완공 이후 아야 소피아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의 주교좌가 위치한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자리매김했으며, 동로마 제국 역대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정치적·종교적 의례가 거행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또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집된 다양한 성유물들이 봉안된 성소 중 하나였지만 1204년 제4차 십자군 원정때 십자군에게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면서 대성당도 약탈당했다.

헌당식이 거행될 때만 해도 벽면에는 펜던티브(돔의 지붕을 지지하는 모서리의 삼각형 부분)를 덮고 있는 긴 날개부에서 얼굴을 삐죽이 내밀고 있는 4개의 거대한 세라핌외에는 아무런 장식도 돼 있지 않았다. 그러나 성당의 측면 복도와 회랑들에는 아름다운 모자이크가 장식돼 있었고, 그것은 둥근 테두리 속의 거대한 십자가로 장식된 돔에도 반영되었다.

3.1.3. 지진으로 인한 피해

축성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인 553년 8월과 557년 12월 14일 2차례에 걸쳐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강타한 지진으로 아야 소피아의 상징인 중앙돔에 금이 갔고, 결국 558년 5월 7일에 발생한 지진을 견디지 못해 중앙돔이 무너졌다. 붕괴 직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이시도로스에게 즉각적인 복구를 명령했으며, 이에 따라 젊은 이시도로스는 중앙돔을 좀더 가볍게 변경하여 구조를 보강하고, 원래의 위치보다 6.25m 가량(30피트) 높여 건축하여 562년에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로부터 약 3백 년이 흐른 859년에 발생한 화재와 869년 1월 8일에 발생한 지진으로 대성당의 버트레스(half dome)가 파괴되었다가 바실리오스 1세 황제의 명령에 의해 수리되었다. 120년 뒤인 989년 10월 25일의 대지진으로 서쪽 돔의 아치가 붕괴되자 바실리오스 2세는 아르메니아인 건축가 티리다티스에게 수리를 명령해 6년간의 공사 끝에 994년 5월 13일에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약 350년이 지난 1344년 10월에 발생한 지진으로 중앙돔에 다시 금이 가더니 2년 후인 1346년 5월 19일에 대성당 곳곳이 또 붕괴되었다. 이때의 피해는 8년 동안 공사에 들어가서 1354년에 끝났다.

3.1.4. 성상 파괴와 십자군의 약탈

730년, 레온 3세 모세의 십계명 우상숭배 금지를 내세워 성상을 파괴할 것을 내용으로 한 칙령을 공포하면서 제국 전역이 혼란에 빠져들었다. 성상파괴론자와 성상옹호론자가 너 죽고 나 살자를 외치며 갑론을박 하는 사이, 제국의 대표적인 성당인 아야 소피아를 장식하던 수많은 조각상과 모자이크 예술품들이 훼손되어 철거되었다. 성상 파괴의 광풍은 아테네의 이리니 여제가 제2차 니케아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일단락되었고, 아야 소피아에는 다시금 성상과 성화상들이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밑에서 후술할 4차 십자군 의 약탈을 생각힌면 의미심장하지 않을수없다.

1204년 4월 9일, 공격하라는 이슬람은 안 공격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해 점령한 4차 십자군은 도시를 마구잡이로 약탈하고 파괴하는 반달리즘을 자행해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당대의 부가 모여 부유하기로는 세계적으로 손꼽히던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이 때의 약탈로 전성기의 화려함이 괴멸되었다. 도시 곳곳에 있던 수많은 보물이 십자군들에게 털렸으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모후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 이래로 동로마 제국이 열성적으로 수집해 아야 소피아를 비롯한 여러 성당에서 소중하게 모시던 각종 성유물 또한 십자군들의 손에 의해 강탈되어 서유럽으로 빼돌려졌다. 이 덕분에 동로마 제국 동방정교회 신도들은 " 십자가 악마에 견주면 초승달 이교도가 그래도 사람이다."라면서 두고두고 이를 갈았다.

이것으로도 모자라 십자군들은 아야 소피아를 가톨릭 성당으로 마개조하고 정복 직후 사망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의 시신을 매장하여 무덤을 만들었다. 다만 단돌로의 무덤은 1453년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한 후 모스크로 개조하면서 파괴되어 사라졌으나, 그 자리는 아직도 남아있다. 2층 오른편에 가보면 Henricus Dandolus라고 라틴어로 쓰여진 돌판을 볼 수 있는데, 거기가 무덤 자리로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이미 그 위치가 알려져 있었다. 아무래도 무덤이라 그런지 오스만인들도 건드리긴 영 껄끄러웠던 듯하며 19세기 이탈리아에서 무덤이 있던 자리에 돌판을 세웠다. 1261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탈환된 후에야 황폐해진 아야 소피아도 정교회 성당으로 환원되었으며 1317년 안드로니코스 2세 황제가 대성당 북쪽과 동쪽에 새로운 버트레스(버팀대)를 증축했다.

3.1.5. 예언, 최후의 순간, 전설

로마 제국에서는 "언젠가 제국이 멸망할 것"이라는 숙명론적 예언이 오랫동안 전해졌다. 오스만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목표로 1453년에 병력을 동원하자 사람들은 " 로마 제국 창건자 의 이름 같은 황제 때 멸망한다"는 예언을 떠올리고는 "로마 제국 최초의 기독교도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창건자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마지막 황제가 될 것이다"라며 불길하게 여겼다.

또한 "달이 차 있을 때는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예언도 있었지만, 5월 24일에 보름달이 떠서 이제 달이 기우는 일만 남은 데다가 하필이면 바로 그날 밤에 월식이 일어나 시민들을 공황상태에 빠지게 했다. 5월 25일에는 폭우가 쏟아졌고, 비가 그친 5월 26일에는 짙은 안개가 도시 전체를 뒤덮었는데, 사람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수호하던 성모 마리아 예수 그리스도가 도시에서 떠나는 걸 숨기기 위해 안개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고 수군거렸다.

오스만의 총공세가 시작된 5월 28일, 시민들은 아야 소피아로 향해 "이교도가 성벽을 넘어 대성당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대천사 미카엘이 강림해 빛나는 검으로 그들을 지옥불에 던져 넣으리라"는 오래된 예언이 실현되기를 간절히 기도했다. 5월 29일,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오스만 병사들이 아야 소피아로 몰려들자 대성당의 거대한 청동문이 닫혔지만 얼마 못 가서 병사들이 청동문을 때려 부수고 내부로 난입했다. 반항하던 몇몇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살해되었고 예배를 드리던 나머지 사람들은 포로로 잡혔으며 성찬예배를 집전하던 사제들은 지성소에서 끌려나가는 순간까지 쉬지 않고 성가를 불렀다.

여기서 전설이 하나 생기는데, "최후의 순간 몇몇 사제들이 성반과 성작을 움켜쥐고 대성당의 벽 너머로 사라졌으며, 아야 소피아가 모스크에서 성당으로 바뀌는 날 다시 나타나 성찬예배를 마칠 것"이라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정교회에서는 사제가 집전하던 성찬예배를 중단하는 것이 용납되지 않으며, 만약 사제가 예배중에 살해당한다면 그 다음에 성당에 당도하는 사제가 아직 끝나지 않은 성찬예배를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3.2. 근세, 근현대

1920년, 오스만제국 말기의 아야 소피아 모스크

1453년 5월 29일 메흐메트 2세가 이끌던 오스만군에게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던 날, 아야 소피아 성당도 위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메흐메트 2세는 이 성당만은 남겨두라고 엄명을 내리고 말에서 내려 성당 안을 보며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른 이야기로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하고나서 그날 저녁으로 이 성당에서 저녁예배를 드렸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병사들이 성당을 약탈하자 기분나쁘듯 쳐다보긴 했지만,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면 병사들에게 대가로 사흘 동안의 약탈 행위를 허락했기에 그냥 두었다고 한다. 하지만, 몇몇 병사들이 불을 지르자 분노하면서 그들을 채찍질하며 '약탈은 허락해도 불태우는 짓은 허락 안 했다'며 주의를 주고 불을 끄게 했다. 다만, 이 약탈에 너무 신경썼는지 이스탄불 곳곳 여러 건물이 불타기도 했는데 이거에 대해서도 메흐메트 2세는 화내면서 "짐은 이 도시를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려한 만큼 방화만은 일절 용서없다!" 라면서 불을 끄게 했다.

병사들에게 약속한 사흘 동안의 약탈 기간이 끝나고 나서 그는 공석이 된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자리에 예나디오스 2세 스콜라리오스를 임명하고 정교회와의 공존을 허락했다. 정교회의 수장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대대로 동로마 황제가 임명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메흐메트 2세가 총대주교 취임식에 필요한 은제 십자가도 손수 마련해 예나디오스 2세 스홀라리오스를 임명한 것은 종교적 관용을 베푸는 것과 동시에 자신이 동로마 황제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적법한 계승자임을 나타낸 것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 내적으로도 예나디오스 스홀라리오스는 \'이교도에 정치적으로 정복을 당하더라도 서방의 기독교의 탈을 쓴 악마들보단 낫다\'는 반서방파의 수장이기도 했으므로 정교회 자체 내부의 '불순분자'들을 몰아 내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12]

이후 하기아 소피아(Αγία Σοφία) 대성당은 건물 자체는 그대로 남게 되었으며, 튀르키예어식의 아야 소피아(Ayasofya)로서 그 이름만 보존한 채 황실 모스크로 개조되었다. 내부의 모자이크로된 동로마 제국 시절 성화에 회칠을 하여 가렸고[13], 모스크로 활용하기 위해 바예지트 2세때 미나렛[14]을 하나 세우고, 셀림 2세때 미나렛 3개를 더 증축했다. 그리고 원래 예루살렘 방향으로 세워진 제대를 모스크로 바뀌면서 무슬림 예배를 위해 메카 방향으로 바꾸었고, 이 때문에 건물과 제대의 방향이 약간 틀어져 있다.

이후 아야 소피아에는 매주 금요일마다 황제가 행차해 예배를 인도했으며, 톱카프 궁전에서 아야 소피아까지 이르는 행차는 누구나 관람할 수 있었다. 이때 백성들은 황제에게 자유롭게 조언 및 상소를 할 수 있었으며, 황자의 할례식 같은 경사스러운 행사 때는 구경꾼들에게 금화를 뿌리기도 했다.

성당 자체의 구조적 결함과 노후화된 건축물이라는 점 때문에 이미 11세기경부터 버틸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이를 보강하기 위해 고딕양식의 성당처럼 버팀대를 세웠지만 오스만 제국 시기에 들어서 이것도 버티지 못하고 기울기 시작했다. 결국 건물을 손보고 미나렛도 세우기 위해 버팀대 4개를 더 세웠다. 이때 공사를 진행한 사람이 유명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다.

3.3.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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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 들어 사원 앞에 분수대가 더해졌다.

3.3.1. 박물관으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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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수리 및 유지 비용 또한 교육부에서 담당하는 형태로서 아야 소피아 모스크를 박물관으로의 전환이 승인 및 허가된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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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11월 24일,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15]

오스만 왕정을 폐지하고 튀르키예 공화국을 수립한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국교를 없애고 세속주의 정책을 취하는 과정에서 아야 소피아 모스크는 1931년부터 1935년까지 잠시 봉쇄되었다. 1934년 11월 24일 내각의 결정에 따라 1935년 2월 1일 폐쇄되었던 아야 소피아 모스크는 박물관으로 개방하고, 무슬림만 출입할 수 있다는 제한을 폐지했으며, 더 나아가 어떠한 종교행위도 금지했다. 박물관 개관식 날 아타튀르크는 신발을 벗지 않고 아야 소피아로 들어가 자신의 세속주의 정책을 대내외에 널리 알렸다. 원래 모스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신발을 벗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야 소피아 박물관 3D 체험관

미국 및 유럽 고고학자들이 오스만 제국의 정복 당시 덧칠했던 회칠을 제거하여 성화가 드러나게 하는 것도 허락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회칠 위에 그려진 쿠란의 내용과 이슬람의 온갖 문양이 훼손된다는 반발에 1931년 회칠 제거를 금지한다. 아야 소피아 안에 꾸며져있던 이슬람식 장식과 타일들도 이미 500년 가까이 묵은 명백한 문화재이기 때문에 양쪽 모두를 보존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당시 X선으로 아야 소피아 전체를 스캔했을 때 타일과 회벽으로 장식된 부분은 성화나 모자이크의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즉 타일과 회벽을 치워봤자 안에는 별 거 없다는 소리.[16] 아야 소피아는 초기 비잔틴 건축이기 때문에 현재 정교회 성당에서 볼 수 있는 이콘으로 가득찬 성당과는 거리가 있다.

3.3.2. 모스크로 환원

파일:Ayasofya_Mosque_open.jpg 파일:Ayasofya_Signpg_large.jpg
이스탄불도 파티흐구에 위치한 아야소피아 모스크(Ayasofya Camii)의 박물관으로의 전환에 대한 1934년 11월 24일자 2/1589호 장관결정이 최고행정법원의 2020년 7월 7일자 E:2016/16015, K:2020/2595호 결정에 따라 취소됨에 따라 아야소피아 모스크(Ayasofya Camii)의 관리는 1965년 6월 22일자 633호 국가종무국(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 설립 및 업무에 관한 법률 제35조에 따라 국가종무국으로 이전됨과 더불어 예배를 위해 개방하기로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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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0일,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
아야 소피아를 박물관으로 만든 것은 실수였지만 우리 민족이 결정한 것이고, 사원으로 전환하는 것도 우리의 결정입니다. 지하의 조상들과 8,300만 튀르키예인들에 대한 책임을 다 할 뿐입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2020년 7월 10일, 튀르키예 최고행정법원의 판결에 따라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환원한다는 행정명령에 서명했으며, 로잔조약 체결 기념일인 7월 24일에 첫번째 예배가 열리고, 쿠르반 바이라므(Kurban Bayramı; 희생제) 기간에도 수많은 무슬림이 결집함으로써 아야 소피아가 이제는 명실상부한 대모스크임을 보여주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 결정을 두고 제2의 정복이라고 평했으며, 아랍어 메세지를 통해 알 아크사 모스크의 해방을 위한 예고이자, 전세계의 무슬림들이 암흑의 시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라고 선언했다. 이러한 명분을 통해 압둘 하디 빈 아왕(عبدالهادي بن اوڠ) 말레이시아 범말레이시아이슬람당(PAS) 대표 등 범이슬람권 무슬림들에게 지지를 끌어냈으며, # 무슬림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튀르키예 여론도 모스크 환원에 긍정하고 있다. #

서방권(Western Bloc)과 범기독교권의 반발과 우려에 대해서는 영어 메세지와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튀르키예의 국내법에 따른 주권 행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모스크가 관광지로서 외국인과 비무슬림에게 개방될 것임을 밝혔다. 또한 스페인 헝가리 등 과거 레콩키스타 대튀르크 전쟁,그리고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이슬람 교도를 몰아내고 회복한 지역 내 역사적 모스크들이 이미 기독교 성당으로 전환되었다는 점, 아테네에 모스크가 단 하나도 없는 점 등을 들며 서방권의 이중잣대를 꼬집어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1#, 2#

아야 소피아와 카리예 박물관 등을 박물관에서 모스크로 환원하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행보는 단순히 이슬람 근본주의 혹은 이슬람 극단주의 성향을 가진 지지층 결집을 위한 임기응변 정책이라고 볼 수 없으며, 2019년 시리아 정교회의 모르 에프렘(Mor Efrem) 사원을 신축하고 기공식에 참여하여 튀르키예가 현재 400만 명에 가까운 아랍인, 쿠르드인, 튀르크멘인과 무슬림 아시리아인 그리고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의 기타 종족들을 아우름을 강조하고, 모르 에프렘이 이스탄불의 새로운 재산이 된다고 발언한 것 #을 볼 때, '신 오스만주의(Neo-Ottomanism)' 정책의 일환으로 세브르 조약 이전 오스만 제국의 종교 시설들을 원상복귀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3.3.2.1. 배경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환원하자는 여론은 줄곧 있어왔고, 2007년에는 그리스계 미국인 정치인 크리스 스피로우(Chris Spirou)가 아야 소피아의 기독교 교회로서 본기능을 회복하지는 주장을 옹호하며 국제단체 '자유 하기아 소피아 협회'를 발족하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2013년에 들어와 아야 소피아를 다시 모스크로 환원해야 한다는 주장이 잇따라 논란이 일고 있다. 과거 에르도안 총리도 "바로 근처에 블루 모스크가 있는데 뭣하러?"라는 태도를 취하고 있고 엄청난 돈줄인 이곳을 그렇게 해봐야 좋을 거 하나 없다며 이스탄불 시장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여론도 반대가 많았다. 우습게도 이런 발언을 한 뵐렌트 아른츠(Bülent Arınç) 전 부총리는 그리스계 튀르키예인인데 이후 2014년에 "여성은 공중장소에서 큰 소리로 웃지 말아야 한다"는 발언을 하여 튀르키예 내에서도 여성계에게 신나게 비난을 들은 바 있다. 같은 해 튀르키예는 박물관의 첨탑에서 뮈에진(müezzin)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갈수록 이슬람 보수화되어 가는 튀르키예에서 이런 움직임이 거세졌다. 그리고 2015년 4월, 프란치스코 교황 아르메니아 학살을" 20세기 최초의 학살"이라고 발언하여 튀르키예에서는 분노하고 있다. 우습게도 콩고에서는 "벨기에가 저지른 ( 레오폴드 2세 참고) 학살은 거들떠도 안 본다"고 분노하고 있는데, 튀르키예도 이걸 들먹이며 "가톨릭이 대다수인 벨기에 콩고에서 저지른 20세기 초 학살을 외면하는 교황"이라고 분노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모스크로 되돌리자는 움직임까지 부채질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야 소피아의 모스크 환원에는 튀르키예 내에서 반발이 여전히 많다.

2015년 5월 말, 아야 소피아 앞에서 모스크로 되돌리는 걸 촉구하는 시위대 1,000여 명이 시위를 벌이자 이곳 근처 가게 주인들은 비난을 퍼부었고, "이들이 튀르키예를 이란처럼 신정국가로 만들려고 한다!"라는 비난이 터져나오며 세속주의자들의 반대 시위도 거세게 일어났다. 2016년 5월 28일에 수천여 명이 "박물관을 모스크로 되돌리라"는 시위를 벌였다. # 2017년 5월 13일에도 아나톨리아 청년연합이라는 무슬림 단체가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되돌리라"고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

하지만 "2012년만 해도 여기를 방문한 관광객이 330만 명이 넘을 정도로 튀르키예에서 가장 방문자가 많은 여길 모스크로 만들면 경제적, 관광적 타격이 크다"는 반발도 맞서고 있다. 용도를 모스크로 환원하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고 있다.[17]

아타튀르크의 결정에 따라 80여 년간 세속주의의 상징으로서 박물관으로 운영됐던 아야 소피아가 특정 종교를 위한 예배 장소가 될 경우 정교회 등 다른 종교와 갈등과 서방의 내정간섭을 촉발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한다. 실제로 이 논란은 그리스를 비롯한 기독교 국가로도 확대되어 2015년 5월 15일 독일의 방송 도이체 벨레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정교회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와 만난 자리에서 에르도안 정부의 이 같은 행보에 대해 강력하게 비난했다고 보도했다.

지난 2015년 5월 21일 미국의 국제종교자유위원회(USCIRF)도 에르도안 정부의 아야 소피아의 모스크화 주장에 대해 종교 간 다양성과 공존의 정신을 해치는 행위라고 비판했다. 지난해 그리스 정부는 아른츠 부총리의 발언 직후 “튀르키예 관리들이 옛 동로마 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바꾸자고 요청하는 것은 그리스도교인의 종교적 감정을 해치는 것”이라고 비난하기도 했다.[18] 이에 대해 이슬람 및 아랍권에서도 반발하며 '그럼 기독교도 모스크를 개조한 성당들을 도로 모스크로 만들라고 할 거냐'며 맞서는 의견이 늘고 있다.[19]

일단 비종교 건물로 개조하게끔 선포한 것이 튀르키예 국부인 아타튀르크이기에 튀르키예 건국 이념에 따라 그의 정책을 지키는 현 튀르키예 공화국이 무리하게 모스크로 환원할 가능성은 낮아 보이기는 하나, 서방으로부터 외교적으로 고립된 에르도안 정부의 행보가 어떻게 될 지는 예상하기 어렵다.
3.3.2.2. 경과
에르도안 대통령은 2019년 3월 24일의 인터뷰에서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모스크로 되돌릴 수 있다고 밝혀 논란을 빚었다. # # 실제로 2020년 5월 29일에 아야 소피아 박물관에서 쿠란을 낭송하는 행사가 있었다. #

7월 2일에 튀르키예 최고행정법원이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모스크로 환원될 수 있는지를 검토하자 각국 정부에서 우려를 나타냈다. # 이에 에르도안은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모스크 전환은 튀르키예의 주권이라고 밝혔다. #

튀르키예의 아야 소피아 박물관의 모스크 전환 움직임에 정교회의 대표인 세계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는 "박물관으로서 아야 소피아는 민족과 문화의 평화로운 공존과 대화, 기독교와 이슬람 간 상호이해와 연대를 의미하는 상징이자 장소"였음을 강조하며, 모스크로 전환될 경우 전 세계 수백만 명의 기독교인이 이슬람에 반감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반대했다.

7월 10일 마침내 튀르키예 최고행정법원은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2세의 황실 자산을 모스크 이외의 용도로 사용하도록 한 1934년 11월 24일 내각의 결정은 위법이라고 최종판결했으며, 에르도안 대통령은 곧바로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환원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 튀르키예 측은 박물관의 동로마 시대 기독교 성화는 문화유산으로서 보존되고 모스크는 관광객에도 개방될 것이라 주장하며 #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 모스크 전환 이후에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서 박탈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러나 유네스코 측은 튀르키예를 비판하며 아야 소피아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위를 재검토한다고 밝혔다.[20] #

미국 국무부 EU 등 서방 국가들은 튀르키예의 주권사항에 따른 결정에 대해 비판과 우려를 표명했다. #1 #2 그리스 정부는 아야 소피아의 모스크 환원은 문명 세계에 대한 도발이라고 비난했다. # 튀르키예내 세속주의 정당들은 튀르키예 국민들의 찬성 여론에 따라 대체로 침묵하고 있는 중이지만 오르한 파묵 등의 일부 세속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아야 소피아의 모스크 환원에 대해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우려를 제기되었다. #

세계교회협의회(WCC)도 11일 임시 사무총장 요한 사우카(Ioan Sauca) 박사 명의로 에르도안 대통령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성 소피아 성당을 다시 사원으로 바꾸는 결정은 튀르키예의 열린 태도라는 긍정적 징표를 배제와 분열의 징표로 변질시켰다”고 비판했다. 같은 날 동방 정교회 등 여러 동방 교회 종파들이 속해있는 동방교회협의회(MECC)도 성명서를 내고 튀르키예 정부의 행보를 “종교의 자유에 대한 침해”라고 규정하고 “튀르키예 시민들은 모든 층위에서 이 도발과 위법을 끝내기 위해 한데 모여달라”고 호소했다.

7월 12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 베드로 광장에서 삼종기도 연설에서 "자신의 마음이 이스탄불에 가있다"며, 성 소피아 성당이 모스크로 환원된 것에 대해 슬픔을 느낀다고 밝혔다. #

기독교권과 그리스를 위시한 서구권의 반발에 대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7월 13일 내정간섭이라며 반발했다.[21][22] # 크렘린궁에 따르면 이 날 에르도안 대통령은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통화를 나누었는데, 푸틴은 "이스탄불에 있는 아야 소피아 박물관의 지위를 바꾼 결정이 러시아 내에서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말했으며, 에르도안은 이에 대해 오해를 바로잡고 정교회 관광객들을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 EU와 미국 등의 압력 속에서 상대적으로 협력관계에 놓여있는 러시아 정부와 관계를 유지하고 동시에 러시아 정교회의 반발을 잠재우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러나 러시아 외무부 대변인은 튀르키예 정부의 결정에 유감을 표했다. #

야우즈 셀림 크란(Yavuz Selim Kıran) 튀르키예 외무차관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모스크 환원 조치가 '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에 관한 협약'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튀르키예의 입장을 재차 거론했으며, 모스크라도 과거 그리스 정교회 성당 당시 유산들이 훼손되지 않고 누구나 출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해당 협약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한 국가에 일정한 책무를 부여할 뿐, 해당 국가의 재산권과 주권을 침해하지는 않는다고 밝혔다. 메블뤼트 차우쇼을루(Mevlüt Çavuşoğlu) 튀르키예 외무장관은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튀르키예의 주권에 개입하는 성명을 거부하며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지적했다. 특히 그리스에 대해서 수도에 모스크가 없는 유일한 국가 그리스는 어떤 발언 권리도 없다고 선을 그었다. 또 그는 유네스코 측의 성명에 대해 유감을 표하며, 향후 모스크 환원 문제를 두고 유네스코와 회동할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 에르도안 대통령은 모스크 전환 결정에 대해 실수를 바로 잡았을 뿐이라고 발언했다. #

7월 14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국제위원회는 튀르키예 정부가 아야 소피아를 모스크로 환원한 것에 항의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주한터키대사관에 성명을 전달했다. #

이집트의 이슬람 최고 성직자(그랜드 무프티) 샤우키 알람은 인터뷰에서 "우리(무슬림)는 교회들을 보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며 "선지자 무함마드는 전쟁에서도 사원을 파괴하지 말고 수도자들을 죽이지 말라고 권고했다"고 말했다. # 딱히 사원을 파괴하고[23] 수도자들을 죽였다고 볼만한 것이 없음에도 이런 비난이 이루어진 것은 이집트와 튀르키예가 리비아 내전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에 따른, 즉 세속적인 정치 공격으로 보인다.

7월 19일 이브라힘 칼른 대통령실 대변인은 튀르키예 현지 방송과의 인터뷰에서 무슬림들의 기도 시간에는 모자이크를 가리지만, 모자이크에 손은 대지 않겠다고 밝혔다. # 대통령이 방문했다. # 기독교 성화 부분에는 커튼을 쳐서 가렸고, 바닥에는 다른 모스크들처럼 융단을 까는 조치가 이뤄졌다.[24]


86년만의 첫 금요 기도회에서 알리 에르바쉬(Ali Erbaş) 국가 종무국(İşleri Başkanlığı: 디야네트) 국장이 기도하고 있다.

7월 24일 아야 소피아는 예정대로 모스크로 개방되었으며, 86년만에 이루어지는 첫 금요 기도를 위해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모스크 환원 정책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상징성을 지니고 있기에 에르도안 대통령을 필두로 하여 푸아트 옥타이(Fuat Oktay) 부통령과 무스타파 쉔톱(Mustafa Şentop) 국회의장 등 고위 공직자들도 대거 참여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첫 금요 기도에서 대표로 쿠란 1장 파티하(Fâtiha)와 2장 바카라(Bakara)를 암송했다. # 이날 에르도안 대통령은 파티흐 모스크에 소재한 오스만 황제 메흐메트 2세의 묘소를 참배한 후 "아야 소피아는 원래대로 돌아갔다. 아야 소피아는 모스크였다가 재차 모스크가 되었다"고 말하면서, 모스크 환원 결정에 대해 메흐메트 2세가 동로마 제국 이후 제2의 정복이 이루어졌다고 비유했다. #

아야 소피아가 모스크로 환원된 7월 24일 당일 그리스는 튀르키예를 비난했다. 이에 튀르키예 외무부는 그리스의 적대감에 대해 "아야 소피아에서의 이슬람 예배를 받아들일 수 없는 유럽의 버릇없는 아이들이 재차 망상에 빠져 있다"고 응수했다. # 아야 소피아가 모스크로 바뀐 것에 대해 자말 카슈끄지 암살사건으로 외교적 갈등을 빚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비판 보도를 했다. #

7월 28일에 그리스와 스페인은 리비아 등 지중해 문제에 대해 논의하면서 하기아 소피아의 모스크 전환에 대해서도 논의했다. #

7월 31일, 튀르키예 국가종무국은 쿠르반 바이라므(Kurban Bayramı; 희생제)에 아야 소피아 모스크에서 예배를 주최하여 수천여 명의 무슬림이 아야 소피아 모스크와 블루 모스크 일대에 모여들었다. 알리 에르바쉬 국가종무국장의 집전 하에, 무스타파 쉔톱 국회의장, 아딜 카라이스마일로을루(Adil Karaismailoğlu) 교통인프라부 장관, 알리 예르리카야(Ali Yerlikaya) 이스탄불 주지사 등이 예배에 참석했다. #

유엔 인권 전문가들은 아야 소피아의 모스크 전환과 관련해 그 여파로 종족 우월주의(supremacist)가 기승을 부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

그리고 에르도안은 600여 년 전에 정교회 성당이었다가 아야 소피아처럼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 모스크로 바뀌었던 카리예 박물관(성 코라 성당)도 모스크로 전환하였다. # 이를 두고 정교회 인사들은 유감을 표명했다. 정교회 매체 《Orthodoxie.com》에 따르면 바르톨로메오스 콘스탄티노폴리스 세계 총대주교는 “성 소피아에 이어 성 코라를 이슬람 사원으로의 지위변경한 것은 가슴 아픈 일”이라며 “이스탄불의 이 고유한(?) 유산은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지어졌다”는 점을 강조했다. 프랑스 일간지 《 르몽드》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카리예 박물관 환원조치 역시, 아야 소피아와 마찬가지로 “경제 약화와 코로나19 재발이라는 배경 속에서 지지율이 하락하자 여당의 보수적이고 독실한 기반의 비위를 맞추려고 애쓰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우습게도 반대로 모스크였다가 성당이 된 메스키타는 최근 들어 이슬람 색깔을 지우려고 하자 이슬람 측에서 비난했는데, 아야 소피아나 카리예 모스크의 상황을 보면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느냐고 역으로 비난 받고 있다.

4. 건축

4.1. 설계, 구조와 재료, 보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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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 건축의 전성기의 정수라 할 수 있을 정도로 크고 웅장하며 또한 대단히 빠르게 완공한 역사적 건물이다. 하지만 기존 건축물을 뛰어넘는 규모와 공사기간을 맞추기 위한 무리한 공사와 실패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건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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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은 로마의 판테온, 오른쪽은 537년 당시 하기아 소피아 성당.

기본 구조는 "막센티우스 바실리카"와 같은 석조 볼트 천장을 활용한 광대한 면적의 건물과 " 판테온"과 같은 돔형 천장을 가진 건물의 조합을 시도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로서는 새로운 형태의 건물이었다.

물리학자인 이시도로스와 수학자인 안시미오스가 설계한 것도 특징적인 부분인데, 당시의 건축물은 일반적으로 장인 집단의 축적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설계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부분이다. 물리와 수학 이론을 동원하여 건축물의 구조를 설계하려고 했던 것은 오늘날의 건축 공학으로 이어지는 초기 단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전례없이 큰 건축물을 원했고, 전례가 없다는 것은 기존 장인들의 경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것이었기에 새로운 방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물리적인 계산이 불가능했던 당시로써는 한계가 명확하여 아야 소피아의 구조는 불완전했고, 완공되기 전부터 거대한 돔과 단기간의 완공을 위한 부실 공사 때문에 붕괴될 위험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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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소피아가 가진 문제의 핵심은 거대한 반구형의 무게를 버티는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돔은 가볍고 내구성이 좋은 건축자재들을 활용해 만들어졌지만, 높이 56m에 직경 31m가 넘는 거대한 크기로 인해 엄청난 무게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지지하기는 돔을 받쳐주던 30.5m 폭의 대형 아치 4개로도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볼트의 일종인 펜덴티브(삼각궁륭)를 사용해 대원개를 형성한 결과, 펜덴티브가 각 아치 사이의 틈을 메꾸어 돔의 무게로 인해 옆으로 벌어지려는 아치의 수평추력을 완화시켰다.

그러나 돔이 계속해서 아치와 그 밑의 기둥을 짓눌러 기둥이 바깥으로 쓰러지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 공사 와중에 붕괴 위기가 오자 돔을 지탱하는 중앙 기둥들의 바깥 부분인 회중석 부분에 좌·우에 4개의 대형 버팀목을 만들고, 한 쌍의 버팀목을 연결시켜 위·아래로 아치형의 회랑들을 개축해 기둥이 밀려나는 것을 버티게 하였다.

이런 급한 땜질에도 불구하고 회랑들의 가장 윗쪽 아치에 균열과 함몰, 뒤틀림이 발생했는데, 이는 아직도 버티는 힘이 모자라다는 증거였다. 각 버팀목마다 4군데의 아치형 회랑을 너무 크게 뚫어서 버팀목이 약해진 것이었다. 만약 회랑의 아치를 좀 더 작게 만들거나 메꿔버렸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버팀목 위에 기둥과 아치를 더 세워 힘을 보태고, 가로 지지대를 추가한 후 가장 위에 있는 아치를 벽돌로 겉을 메꿔서 좁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진행된 상단부의 뒤틀림을 고칠 수는 없어 지금도 이 공간에 가면 천장이 뒤틀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중앙 기둥들이 밀려나게 되자 당연히 돔이 올라갈 공간 역시 정사각형이 아니라 좌우로 길쭉한 직사각형 모양이 되게 되었다. 하지만 시간이 부족했던 건축가들은 완전한 원형 돔은 포기하고, 대신 타원형으로 돔을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봤을 때 타원형 돔은 완전한 원형 돔보다 비균일하게 무게를 전달하므로 다소 불안정했다. 아무튼 이런 과정을 거쳐서 성당은 완공될 수 있었지만, 이게 끝이 아니었다(...).

성당이 건설될 때부터 이시도로스와 안시미오스는 이 지역이 지진대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기둥이 허용된 것 이상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지하는 턱을 만드고 주두와 기둥, 기둥과 주초 사이에 납판[25]을 넣는 등 어느 정도 내진 설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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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완공 이후 20년이 지나기도 전에 발생한 기록적인 지진으로 인해 558년에 돔이 붕괴되고 만다. 안시미오스와 이시도로스는 이미 사망하였기에 이시도로스의 조카인 젊은 이시도로스가 공사를 맡게 되었다. 새로운 이시도로스는 이 성당의 돔을 연구한 뒤 돔의 결함을 발견하게 된다.

기존의 돔은 채광을 위해 짧은 기둥들을 빙 둘러 원형으로 세운 드럼인 스트롱길롱을 놓은 뒤 그 위에 돔을 올렸는데, 이는 지진에 매우 취약하였다. 그래서 젊은 이시도로스는 기둥을 사용한 스트롱길롱 대신 훨씬 두꺼운 벽들로 바꾸고 돔의 위치를 6.25m 정도 낮춰 벽에 좀 더 안정되게 지지되도록 바꾸었다. 또, 젊은 이시도로스는 전체 공사기간과 비교하면 매우 긴 4년이란 시간 동안 돔을 보수할 수 있어 돔에 쓰인 회반죽 등이 마른 후에 건축용 지지대를 철거하는 등 안정된 방법을 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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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벽에 추가된 버팀목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이후로도 지진 등으로 인해 돔과 성당은 부분적으로 계속 파손되었고, 수백년이 흐르면서 돔의 무게 때문에 점점 기둥들이 바깥쪽으로 기우는 것이 보이게 되었다. 9세기에 이르러서는 건물 외부에 서유럽의 고딕 성당에서나 볼 수 있는 버트레스와 비슷한 버팀목을 추가하기 시작했고, 훗날 오스만 제국 시절에도 비슷한 땜질을 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기울어져 있는 기둥들이 보인다.

아야 소피아에서 설계상의 문제가 계속해서 터져나오고, 세월의 풍파를 맞아오는 와중에도 지금까지 무너지지 않고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자재의 품질 덕도 있다. 먼저 벽돌의 경우 로도스 섬의 점토로 만들어진 것인데 물에 던져도 뜰 정도로 가볍고 미세한 균열같은 것들은 벽돌의 탄산염 등의 물질에 의해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메워진다고 한다. 또 로마의 시멘트와 콘크리트 기술이 쇠퇴한 중세 유럽과는 달리, 포졸란 시멘트와 콘크리트 기술이 이어져서 이를 성당을 개축할 때 사용하였다. 포졸란 시멘트는 지중해 서부의 채석장에서 발견되는 화산재인 포졸라나와 석회 등을 사용하여 만든 시멘트로 인장강도가 매우 우수하다.[26] 하지만 최대 강도에 이를 때까지 소요되는 시간이 길어서[27] 단기간에 공사가 이루어졌다면 위에 언급된 뒤틀림 문제에 꽤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28] 포졸란 시멘트 기술은 계속 전승되어서 오스만 제국까지 이어졌다.[29][30]

물론 21세기의 H빔을 넣어 만든 공법으로 지어진 건물에 비해서는 넘사벽으로 허약한 건물이긴 하나 그래도 저게 건축될 당시 기준으로서는 최고로 견고한 재료를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4.2. 의장과 모자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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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유명한 데이시스 중앙부의 그리스도 모자이크

원래의 아야 소피아 내부는 유스티니아누스의 닦달로 인해 빠르게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금빛 모자이크를 쓰되 비교적 장식이 간단한 편이었다. 기둥 하단 등도 조각 장식이 없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비교적 이른 시절이라 성인들의 인물 묘사인 이콘의 법칙이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였다는 점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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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에 기독교 성화를 복구하는 사진

이후 수백년 동안 성당은 다채로운 마감재를 사용해 예수 마리아를 비롯한 성인, 천사, 황제, 황후 및 각종 도안으로 구성된 모자이크로 장식하게 되었다. 1204년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면서 성당에 그려진 1000년 가까이 이어지던 성화들을 다 지우고 가톨릭 화가가 그린 성화들을 채웠다. 이교(離敎/Schism)도가 더럽힌 곳을 탈환했다고 명분을 내세운 십자군은 성당을 천주교 양식으로 개조하고 정교회 성화를 천주교 성화로 다시 그렸다. 그 후 1261년 여길 되찾은 정교회 측은 천주교 성화들을 싸그리 지우고 그림들을 예전 기록 및 그림을 토대로 재현, 복원했다.

오스만 제국 시기에 아야 소피아가 성당에서 모스크로 바뀌면서, 동로마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던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로 덮여졌다. 회칠 자체는 상당히 오랜 시간 후에 해서, 모스크 개조 이후 18세기까지도 모자이크 성화들은 회칠 없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18세기 황실 모스크로 사용되던 아야 소피아를 방문하는데 특별히 허락을 받은 코르넬리우스 루스(Cornelius Loos)가 1710년에 그린 그림과 프랑스 여행가 기욤조제프 그를로(Guillaume-Joseph Grelot)가 1680년에 그린 아야 소피아 내부를 보면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모자이크와 현재는 흔적도 안 남은 모자이크를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림보기

20세기부터 시작된 복원 작업으로 몇몇 모자이크가 다시 세상에 드러났지만, 회칠하고 역시 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진 문화재인 이슬람 문양을 제거하는 데 따른 반발이 커 이 작업은 80년 넘게 중단된 상태이다.[31] 사실 1000년에 이르던 옛 성화들을 제거하던 게 다름아닌 기독교 십자군이었다.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제거된 성화들이나 모자이크를 복원한 것도 1261년 일이므로, 200년 남짓 남아있다가 1453년 이후 회칠로 덮여졌기에 500여년이 넘은 이슬람 문양도 문화재로서 가치가 있는 만큼, 함부로 제거할 당위성은 없다. 2000년대 이후에는 최첨단 비파괴 검사를 사용하여 겉면의 회칠을 파괴하지 않고도 내부 성화를 관찰하고 보존 상태를 모니터링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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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전용 입구 모자이크
아야 소피아를 출입하는 입구 중에서 오직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문의 위쪽 박공벽(tympanum)을 장식하는 9세기 말~10세기 초의 작품으로, 옥좌에 앉은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Ο Χριστός Παντοκράτωρ)'에게 엎드려 경배하는 사람은 레온 6세 (재위 886 ~912년) 또는 콘스탄티노스 7세 (재위 913 ~ 959년)로 추정된다. 그리스도가 든 책에 적힌 문구는 요한 복음서 20장 19절 "평화가 너희와 함께"와 8장 12절 "나는 세상의 빛이다"이다. 좌우의 원형 공간에는 각각 성모 마리아와 대천사 가브리엘을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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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서쪽 입구 모자이크
우측에서 콘스탄티누스 대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좌측에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아야 소피아를 성모자에게 바치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옥좌에 앉은 성모는 무릎에 앉힌 아기 예수를 감싸고 있는데, 아기 예수는 왼손에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성모자의 좌우에 있는 ΜΡ와 ΘΥ는 Μήτηρ(어머니)와 Θεού(하느님의)의 모노그램으로 하느님의 어머니, 곧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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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apse) 모자이크
후진의 반 돔 위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쎄오토코스(Θεοτόκος, 하느님의 어머니) 모자이크라고도 하며, 6세기에 제작되었다가 8세기의 성상 파괴 때 훼손되었던 것을 9세기 경에 복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옥좌에 앉은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서 받침대 위에 발을 올려놓았는데 대좌와 옥좌 모두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다. 2020년 모스크로 용도변경된 이후로 이 모자이크 바로 밑에 기도방향인 미흐랍이 자리잡고있기 때문에 모자이크 앞에 커튼이 설치되었으며, 평소에는 흰 커튼이 올려져있으나 이슬람 예배시간동안은 커튼을 내려 가리게 되었다. 다만 작고 긴 모양의 커튼 여러개로 가리는거라 커튼으로 가려져있는 동안에도 보는 각도에 따라 다 보이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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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로스 2세 모자이크
2층 천장 어두운 구석에 위치한 이 모자이크는 알렉산드로스 2세 (912 ~ 913년)가 왼손에 보주를, 오른손에는 두루마리를 든 모습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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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여제의 모자이크
조이 여제와 그 남편 콘스탄티노스 9세가 파란색 옷을 입고 왼손에 성경을 든 '전능하신 지배자 그리스도'의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세기에 제작되었다. 그리스도의 좌우에 있는 IC와 XC는 그를 상징하는 Ιησούς Χριστός의 모노그램이다.[32] 콘스탄티노스가 들고 있는 돈자루는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상징한다. 여담이지만 조이 여제는 결혼을 3번 했는데 남편이 바뀔 때마다 이 모자이크의 남편 얼굴과 문구도 바뀌었다고 한다.
파일:external/www.pravoslavie.ru/47777.b.jpg 파일:prince alexios_Agia_Sophia.jpg
콤니노스 모자이크
요안니스 2세 (재위 1118 ~ 1143년)와 이리니 황후(Ειρήνη, 1088~1134.8.13), 그리고 황태자 알렉시오스 콤니노스(Ἀλέξιος Κομνηνός, 측면에 그려져 있어서 정면에서는 안보인다)가 아기 예수를 품에 안은 짙은 청색 옷차림의 성모 마리아로부터 축복을 받는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122년에 제작되었다. 조이 여제의 모자이크에서와 마찬가지로, 요안니스 2세 콤니노스 황제의 손에 들린 돈자루 역시 교회에 대한 황실의 기부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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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시스('Δέησις) 모자이크
'데이시스'란 간청, 애원을 뜻하는 단어로, 심판자 그리스도가 죄인의 벌을 가볍게 해달라고 요청하는 성모 마리아 세례자 요한을 거느린 모습을 형상화했으며 1261년에 제작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내부의 다른 모자이크보다 훼손 상태가 심각해 성모는 얼굴과 왼쪽 어깨 부분만 남아 있고 그리스도와 세례자 요한은 그보다는 양호한 편이라 상반신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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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쪽 박공벽(tympanon) 모자이크
세계 총대주교를 역임한 성 요한 크리소스토무스(왼쪽)와 성 이그나티오스(오른쪽)가 십자가로 장식된 하얀색 성의를 입은 모습과, 이들을 포함한 여러 성인을 형상화했다. 이 모자이크들에는 유독 회칠이 가해지지 않았는데, 그리스나 기독교권에서는 "높은 곳에 못 올라서 회칠을 칠하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튀르키예에서는 "높이로는 무시 못할 블루 모스크라든지 그런 건 누가 지었는가"라며 그냥 놔둔 거라고 주장한다. 다만 트라브존의 아야 소피아도 그렇고, 오스만 시대에 모스크로 개조된 많은 옛 동로마 건축물에서 이런 현상이 발견된다. 아마도 성화 한 두개 정도는 남겨두어 이 건물이 원래 성당이었음을 밝히는 목적이었는지도 모른다.[33]

4.3. 옴팔리온(Omphal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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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 바닥에는 세계의 중심을 상징하는 옴팔리온이 있다. 옴팔리온은 그리스어로 배꼽이라는 뜻이다. 원형 대리석들이 바닥에 끼워져 있는 형태이며, 동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가 이 자리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아야 소피아를 세운 이래 니케아 제국 시대를 제외하면 이곳에서 대관식을 거행하지 못한 황제는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유일하다.

아야 소피아가 모스크로 전환되고 나서, 1층 바닥에 카펫을 깔았지만 옴팔리온 위에는 깔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처럼 볼 수 있다. 또한 남성이 예배하는 곳은 미흐랍 앞 일부로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여자들도 옴팔리온까지 가서 관람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4.4. 서예 원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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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압뒬메지트 1세 때 서예가 카자스케르 무스타파 이제트 에펜디가 도안한 원판이다.

직경은 7.5 m이다. 원판은 8개가 있는데, 적혀 있는 이름은 아래와 같다.

현재 이 원판은 이슬람권에서 가장 큰 서예 원판이다.

5. 어록·기록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
537년 12월 27일에 거행된 헌당식에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외친 말.
하늘에 닿을 만큼 높이 솟아, 마치 다른 건물들의 복판에서 바로 솟아난 듯 높은 곳에 서서 도시를 내려다보며, 도시의 일부로서 도시를 장식하는 한편으로 그 자체의 아름다움으로 찬연히 빛나고 있다
-프로코피오스
..다음으로 우리는 로마로 가서, 로마인들이 하느님을 예배하는 곳으로 안내받았습니다.
그리고, 소신들은 그곳이 지상인지 천국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습니다.
지상에는 그러한 장려함이, 그러한 아름다움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신들이 그 광경을 도대체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단 한 가지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곳에 하느님이 거하고 계시며
그들의 예배가 그 어느 나라의 의식보다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 아름다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키예프 공국 블라디미르 1세 대공이 파견한 사절단이 아야 소피아에 대해 남긴 기록.
아야 소피아 모스크의 영적 분위기에서 신앙, 예배, 역사, 그리고 묵상으로의 여정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대로( inşallah) 지속될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영광스러운 역사 속에 특별한 장소이자, 우리 마음에 특별한 가치가 있는 아야 소피아 모스크에서 섬길 수 있기를.
2020년 7월 24일, 86년만에 재개된 첫 기도회에서 터키 국가종무국장 알리 에르바쉬(Ali Erbaş)의 기도 中.

6. 관련 건축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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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소피아 모스크에서 멀지 않은 남쪽에는 '소(小) 아야 소피아 모스크(Küçük Ayasofya Camii)'라는 비교적 작은 건물이 있다. 하기아 소피아보다 조금 빠른 527년에 기공식을 하였으나 완성은 536년에 하였다. 아야 소피아의 건축가들이 이 성당을 설계하였기 때문에 작게 만들어진 일종의 구조 테스트 건물이란 통념이 있지만, 큰 구조를 제외한 디테일들은 다르기 때문에 그렇지 않았을 것이란 견해가 맞선다. 완성된 이후에는 성 세르기오스와 바코스 성당(Church of the Saints Sergius and Bacchus)으로 쓰였고, 이름대로 현재는 모스크로 쓰이고 있다.

아야 소피아의 북쪽 가까운 곳( 톱카프 궁전 안)에는 아야 이리니(Aya İrini)라고 불리는 비교적 작은 건물이 있는데, 이곳도 532년에 같이 완공된 곳이다. 아야 소피아와 유사하지만 작고, 장식 없이 벽돌이 노출되어 있다. 원래 아야 소피아, 아야 이리니, 아야 다이나미스(Aya dynamis)라는 사원이 같이 건설되었는데, 각각 신의 지혜(wisdom), 평온(peace), 힘(power)을 상징한다고 한다. 아야 이리니은 모스크로 변하지 않은 몇 안되는 동로마 시절의 사원이다. 오스만 시대에는 무기고로 사용되었다. 2014년부터는 정식으로 박물관으로 개장하고 있지만, 성상 파괴주의 시대의 양식을 대변하는 성십자가 문양을 제외하고 모자이크는 사실상 전무하다. 대신, 이스탄불 서쪽의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 너머 에윱구(Eyüp Belediyesi)에 카리예 박물관(Kariye Müzesi)[34]이라는 이름의 동로마 성당이 하나 더 있는데, 동로마 양식의 성당 건축과 모자이크를 보기 위해서는 그쪽도 함께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카리예 박물관 또한 오스만 시기에 회칠로 덮여 모스크로 사용된 적이 있지만, 오히려 회칠로 덮힌 덕에 훨씬 더 나은 상태로 이콘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 이곳은 트라브존(구 트레비존드)의 아야 소피아 성당과 마찬가지로 13-14세기, 즉 팔레올로고스 양식의 이콘들 가운데서도 걸작품들을 볼 수 있으며, 회칠 전부가 벗겨진 상태라 성당으로서의 옛 모습도 확인해 볼 수 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접수한 오스만 제국의 사람들은 아야 소피아를 파괴하지는 않고 모스크로 고쳐 사용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들도 이와 비슷한 위대한 건축물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16세기에 쉴레이만 대제는 대 건축가 미마르 시난(Mimar Sinan)에게 돔이 좀 작지만, 아야 소피아와 유사한 구조와 부피를 가진 쉴레이마니예 모스크를 이스탄불의 높은 언덕에 세우게 하였다. 이후 술탄 셀림 2세는 역시 시난에게 아야 소피아와 거의 비슷한 크기의 돔을 가진 모스크를 에디르네에 세우게 하였다. 그것이 1574년 완성된 셀리미예 모스크다. 아야 소피아와 비교하였을 때 돔은 대등하며, 높이는 작지만 구조적, 외형적으로는 보다 발전되었다. 또한 1617년에 술탄 아흐메트은 건축가 메흐메트 아아(Mehmet Ağa)에게 아야 소피아의 가까운 곳에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블루 모스크)를 세워 마주보게 하여 자신들의 업적을 과시했다. 다만 술탄 아흐메드 모스크는 쉴레이마니예보다 돔의 크기나 건물의 높이가 작은 편이다. 물론 아야 소피아는 이것들보다 천 년이나 전에 지어졌다는 점에서 오스만의 건축물들을 과소평가하기 쉽지만 오스만의 건축물들이 보여주는 구조적인 발전이나 의장은 무시할 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다. 또한 오늘날 아야 소피아 모스크가 멀쩡한 상태로 서 있는 것은, 오스만 제국 시대에도 계속해서 유지, 보수, 관리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 크다. 특히 중앙의 돔이 무너지지 않은 데에는 쉴레이만 대제 시대의 위대한 건축가이자 세계 최초로 지진을 염두에 둔 건축가로 알려진 미마르 시난의 역할이 지대했다. 튀르키예에서도 그리스가 저렇게 비난하면, 우리가 코웃음치며 그냥 놔뒀더라면 진작에 무너져 그림이나 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받아친다.

아야 소피아는 당연히 정교회 성당들에도 큰 영향을 주었는데, 일례로 20세기에 지어진 세르비아의 성 사바 성당(Church of Saint Sava)은 아야 소피아와 돔 지름이 같고 구조도 유사하다. 돔 높이가 좀 더 높고, 평면이 그리스 십자가형이란 것이 주된 차이.

7. 고양이 글리(Gl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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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li The Hagia Sophia Cat 인스타그램

아야 소피아에서 사는 귀여운 14살 유러피안 숏헤어 고양이. 성당에 오는 여행객들을 잘 반겨주었다, 암컷 동생인 크즘(Kızım)도 아야 소피아에 살고 있었는데 2019년 12월에 죽었다. 크즘은 "내 딸" 이라는 뜻의 터키어이다.

튀르키예 일간지 휘리예트의 2009년도 인터뷰에 따르면 글리는 2004년에 아야 소피아 출구의 근무자 휴게실 지붕 밑에서 태어났다 하며 글리의 엄마도 아야 소피아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원래 박물관 직원들은 털 색깔이 회색이라서 그리(Gri)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했지만 좀 더 웃기는 이름이 좋겠다고 해서 중간의 r를 l로 바꿔서 글리가 되었다고 한다. 글리는 다른 아야 소피아에 사는 고양이들이 사료만 먹고 사는데도 글리만큼은 새들을 사냥해서 먹곤 했으며, 그럼에도 관광객들이 다가오면 친근하게 대하고 포즈도 취해주었다고 한다. 박물관장인 아흐메트 할룩 두르순은 "비잔틴 제국의 고양이들"이란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다고. 글리는 2006년에 한 길고양이와의 사이에서 암컷 새끼를 낳았다. 박물관 직원들은 이름을 카라크즈(Karakız, 검은소녀)라고 지어주었는데 애석하게도 10월 29일 공화국 기념일날 버스에 깔려 죽고말았고 하나뿐인 글리의 새끼가 이렇게 죽고 나서 글리도 그 해에 중성화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털이 회색이어서 재미있으라고 이름을 글리라고 지어주었지요(휘리예트 2009년 4월 11일자 기사)

그리고 글리가 유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에르도안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 기념사진을 찍을때 함께 포즈를 취하게 된 이후라고.

7월 아야 소피아의 모스크 환원 정책에 따라 글리가 다른 곳으로 보내지는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었지만, 7월 24일 이브라힘 칼른(İbrahim Kalın) 에르도안 대통령실 대변인이 글리를 비롯한 고양이들은 아야 소피아 모스크에 머물 것임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35]

2020년[36] 11월 8일. 세상을 떠났다. #

8. 기타


[1] 2017년 부분수정 [2]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3]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4]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5]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6] masonry. 돌이나 벽돌을 쌓아 만들어진 것. 하기아 소피아의 돔은 벽돌과 모르타르로 구성되어 있다. 판테온의 돔은 고대의 콘크리트로 지어졌다. [7] 잠언에 등장한다. 옛부터 성자(聖子)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았고, 특히 정교회에서는 거의 예수와 동일시된다. 일부 신학자들은 성령으로 해석하기도 하며, 러시아 정교회에서는 성모 마리아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8] 그리스어 소피아(σοφία / sophía)는 '지혜'라는 뜻이다. 철학으로 번역되는 영어 필로서피(philosophy)는 그리스어 필로소피아(φιλοσοφία / philosophía)에서 유래한 것으로 문자적으로는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9] 원래는 아르테미스 신전이 있던 곳에 지었다고 한다. [10] 이 당시의 그리스어는 이미 고전 그리스어와는 1,000여 년의 갭이 있으며 확연히 다르다. 이후에 나오는 그리스어 어휘들도 모두 중세식으로 수정함. [11] 600여 년이 지난 서유럽에서 노트르담 대성당을 짓는 데에 100여 년이 걸린 것을 생각하면... [12]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 등은 ' 서방 교회에게 머리 숙이고 통합 당하더라도 서방의 도움을 받아 오스만 제국을 격퇴하자'고 주장한 친서방파를 지지했고, 최후에는 동서교회의 통합을 선언하였으나 이로써 흐지부지 됐다. [13] 그러나 성화들은 18세기까지도 상당수가 회칠이 칠해지지 않은 채 그대로 보존되었다. 1710년, 대북방전쟁 당시 벌어진 폴타바 전투에서 패전하여 망명한 스웨덴 국왕 칼 12세와 함께 코스탄티니예를 방문한 네덜란드인 코르넬리위스 로스(Cornelius Loos)는 오스만 제국의 파디샤 아흐메트 3세의 특별허가를 받고 아야 소피아 내부를 그렸는데 이 그림에서 현재까지 보존되어있는 주요 모자이크와 성화들, 그리고 현재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성화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림보기 오스만 제국 시기 모스크로 개조된 이후에도 300여년 가까이 옛 성화들이 보존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8세기 말 지진으로 아야 소피아 내부 벽면에 금이 가고 훼손되자 급하게 보수를 하면서 전면적인 회칠이 칠해졌고, 1847년 압뒬메지트 1세 이탈리아인 가스파레 포사티와 주세페 포사티 형제에게 수리를 맡겼다. 이때 현재 볼 수 있는 이슬람식 내부장식이 완성되었다. 아야 소피아는 오스만 제국시기 동안 황실 전용 모스크였기 때문에 아무나 들어갈 수도 없었고 황제의 명령 없이는 손을 댈 수도 없었다. [14] 무슬림들에게 예배 시간을 알리는 뾰족한 등대모양의 첨탑 [15] 2009년에 해당 문서의 사본을 공증받았기 때문에 2009년 10월 2일자 공증인이 찍혀있다. [16] 정부로써는 뭐가 어찌됐든 이렇게 발표하는 게 불가피하다. 정말로 회칠을 제거하다가 벽이 훼손되면 감당하기도 힘들고, 책임지기도 골치 아프다. 따라서 이전 그림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 [17] 다만 유네스코는 주권국가의 정책에 대해 어떠한 강제성을 발휘할 물리력도, 그것을 행사할 권한도 없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서'의 상징성이다. 실제로 아야소피아 모스크에 대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18] 아야 소피아는 500년 가까이 오스만 황실의 모스크로 활용되었기에, 성당을 모스크로 바꾼다는 비난은 편향적인 발언이라고 볼 수도 있다. [19] 스페인 소재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코르도바 대성당이 대표적인데, 최근 현지 무슬림 단체가 성당을 성지순례하는 것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하면서 사회적 논란을 빚었다. 그러나 데메트리오 페르난데스 주교는 “이웃과 자신의 아내를 공유하는 이는 없다"며 무슬림 단체의 호소를 일축했다. # 이외에 세비야 대성당도 하단은 모스크 시절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리스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스페인의 아란차 곤잘레스 라야 외무장관이 아테네를 방문해 그리스 정부인사들과 함께 튀르키예가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모스크로 환원한 문제에 대해 논의를 했다고 한다. # [20] 에르도안 대통령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위를 유지할 것을 요구한 것은 진짜 관광객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의 지지층을 집결시키기 위한 큰 그림으로 보인다. 아야 소피아 정도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위가 흔들린다고 해서 관광자원으로써의 가치가 낮아지기는 않기 때문이다. 모스크 전환과 함께 아야 소피아를 관광객에게 무료로 개방하겠다는 말이 이를 반증한다. [21] 한 국가에서 자국의 국유 시설의 용도를 법적 절차를 거쳐 변경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주권 사안이며, 동시에 예배시 흰 천 등으로 기독교 성화를 가리는 것은 반달리즘으로 보기도 어렵다. 튀르키예 측에서는 이러한 스탠스를 자국에 대한 유럽의 냉담한 외교의 연장선상을 넘어 내정간섭으로 해석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아야 소피아 모스크를 정치적으로 이용함에 따라 촉발된 정치적, 문화적, 종교적 논쟁은 튀르키예 주권 내에서 해결돼야 할 과제다. [22] 2010년대 말부터 중국 정부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지역에서 모스크들을 중국 내 법적 절차를 거쳐 용도를 "변경"한 것에도 이와 같은 방어 논리가 밑바탕에 있으며, 실제로 중국 정부에서도 해당 사안에 대한 튀르키예를 포함한 국제 사회의 비판을 내정간섭이라며 무시한 바가 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한 기본적인 제스처를 취한 튀르키예와 달리 중국은 철거와 같은 극단적 반달리즘도 동원하고 있다는, 그리고 종교 시설 자체를 위협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인 차이점이 있다. 애시당초 튀르키예는 박물관을 모스크로 전환한 것일 뿐, 특정한 종교 세력을 탄압하고자 한 것이 아닌 반면, 중국은 이슬람 종교 탄압의 일환으로 모스크를 파괴하거나 용도 변경하는 것이다. [23] 이곳은 교회나 사원이 아닌 박물관이었다. [24] 파일:Ayasofya_christ art in Mosque.jpg [25] 이것은 기둥과 천장 간의 유연성을 주어서 지진이 일어나도 건물이 붕괴되지 않게 하는 역할을 했고 이후 돔의 무게로 인하여 천장과 바닥의 어긋나는 등 건물 자체가 변형이 되어가는 과정에도 기둥 등의 구조물이 파괴되지 않게 하는 작용을 하게 된다. [26] 1993년도 논문 Materials analysis of the Masonry of the Hagia Sophia Basilica, Istanbul 참고 [27] 거의 연 단위로 현태의 포틀랜드 시멘트(100-150일)에 비해 꽤 긴 편. [28] 1993년도 논문 Materials analysis of the Masonry of the Hagia Sophia Basilica, Istanbul 참고 [29] 오스만 제국 때에는 포졸란 모르타르를 Khorosany mortar라고 불렀다는 설명. 1993년도 논문 Materials analysis of the Masonry of the Hagia Sophia Basilica, Istanbul 참고 [30] 오스만 제국 시기 댐을 지을 때 포졸란 시멘트를 사용했다는 설명. 책 Hydraulics of Dams and Reservoirs, p.15 링크 [31] 종종 한국의 개신교 책자에서 이걸 비난하는데, 수백여년 이슬람 문양도 문화재임은 틀림없다. 반대로 어느 목사는 이슬람만 고생한다고 말하기도 했는데 회칠 제거 비용과 인력 동원은 모조리 미국이나 유럽 서구권 나라들이 부담한 것이라서 튀르키예 측은 크게 힘들이지 않았다. [32] 중세시대 그리스어 철자로는 C가 시그마의 소문자(σ,ς)형태였으며, 이는 키릴문자에도 전해져 С,с가 's'음가를 갖는다. [33] 참고로 트라브존의 아야 소피아 같은 경우, 같은 건물을 둘로 나눠 한쪽은 정교회 성당으로, 한쪽은 모스크로 나눠 썼다. [34] 이 박물관도 현재 모스크로 환원되었다. [35] 이슬람권에서는 고양이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좋은 편이다. 당장 성사 무함마드가 예배 직전에 손 씻으려고 담아둔 물을 고양이가 마셨지만 상관없다고 그대로 그 물로 손을 씻고 예배를 보았다거나, 무함마드가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려는데 옷소매 위에 고양이가 자고 있는 걸 보고 고양이가 깨지 않도록 칼로 옷소매를 잘라내고 나왔다거나 하는 일화가 대표적. 고양이가 개와는 달리 주인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거나 일방적으로 따라다니지 않는 습성이 있는 것을 “고양이는 인간도 자신과 같은 알라의 피조물이라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개와는 달리 인간 주인을 숭배하거나 복종하지 않는다”라고 해석하는 것도 있다고. [36] 공교롭게도 해당 년도에 아야 소피아 박물관이 모스크로 환원되었다. 사실 모스크로 전환된 이후로도 아야 소피아에서 살지는 못했다. 노환때문에 이미 2019년 말에 동물병원으로 옮겨져서 치료중이었고 모스크 전환으로 인한 공사기간에는 아야 소피아의 모든 고양이들을 전용 공간으로 모아 키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