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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베클리 테페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 화이트.svg 튀르키예 의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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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국어 괴베클리 테페
영어 Göbekli Tepe
프랑스어 Göbekli Tepe
국가·위치 튀르키예 샨르우르파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2018년
등재기준 (i)[1], (ii)[2], (iv)[3]
지정번호 1572
1. 개요2. 언어별 표기3. 조성된 시기4. 유적지의 건설5. 몰락
5.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
6. 슈미트 교수7. 기타
7.1. 아르메니아의 반발
8.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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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external/www.bibliotecapleyades.net/gobekli_tepe08_01.jpg
파일:external/thumbs.media.smithsonianmag.com/gobeklitepe_nov08_11.jpg__600x0_q85_upscale.jpg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는 튀르키예어로 '배불뚝이 언덕'이라는 이름의 지명으로, 튀르키예 남동쪽 샨르우르파(Şanlıurfa)도 외렌직(Örencik)군에 있는 석기 시대의 유적을 가리킨다.

이 유적은 해발 760미터에 위치한 언덕 정상에 묻혀 있었는데 현지인이 우연히 찾아서 몰래 파내려가다 발견되었다. 이후 1963년에 미국 시카고 대학교와 튀르키예 이스탄불 대학교가 공동조사를 하여 처음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교수였던 고고학자 클라우스 슈미트(Klaus Schmidt)[4]를 단장으로 한 조사단이 1994년부터 2014년까지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하였다. T자 형태 돌기둥 2백 개 이상이 늘어서 스무 겹으로 원을 이루는 형태가 특징인데, 기둥 중 가장 높은 것은 5.5 m에 달한다.

2018년 6월, 바레인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튀르키예의 18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2. 언어별 표기

【언어별 명칭】
<colbgcolor=#CCCCCC,#212121> 한국어 괴베클리 테페
튀르키예어 Göbekli Tepe
아르메니아어 Պորտասար (Portasar)
쿠르드어 Girê Mirazan
중국어 哥贝克力石阵
일본어 ギョベクリ・テペ

3. 조성된 시기

2010년 발표된 결과로는 가장 오래된 부분이 기원전 9675년 무렵이다. 한마디로 말해 이 구조물은 약 1만 1700년 전에 세워졌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토기 없는 신석기 시대(PPNA) 초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5] 이 정도 크기의 인공 구조물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6] 대표적인 대규모 고(古)유적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이기도 한 기자의 대피라미드가 대략 기원전 2000-2700년 무렵 건설된 유적인데 괴베클리 테페는 이 시기를 아득히 뛰어 넘는다. 단순 계산으로 따져도 피라미드가 지어진 시기와 현대까지의 기간(4천 년)보다, 괴베클리 테페가 지어지고 피라미드가 지어지기까지의 기간(7천 년)이 3천 년이나 더 길다. 심지어 최초의 문명도시라고 하는 수메르 문명보다도 앞선 것이다.

유적이 위치한 아나톨리아 지역은 현재까지 발견된 도시 중 가장 오래되고 초기 밀농사를 했다고 추정되는 유적들도 발견되므로, 수렵인들이 이런 종교시설을 건축하며 모여 살다가 농사를 지으며 정착민으로 변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새로운 학설이 제시되었다. 아래 항목 참조

물론 존재 자체로도 놀라운 유적이지만, 현재는 연구가 막 시작된 단계라 아직 모르는 부분들이 많다. 인터넷상에서는 설레발이 심하지만, 아직은 딱히 이렇다 저렇다 할 만한 명확한 성과가 나오진 않았기 때문에 좀 더 두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레이엄 핸콕 같은 사람들은 초고대문명설을 주장하기도 한다.

이 시점이 중요하다는 것은 인류가 원시 생활에서 벗어나 일정 규모의 인구가 모여 연대를 붙이는 것이 의미 있는, 즉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는 최초의 고고학적 업적을 만든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괴베클리 테페를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1993년 이탈리아계 미국인 지질학자 체사레 에밀리아니(Cesare Emiliani)는 서력기원의 연대에 1만을 더해 홀로세기원(Holocene era), 또는 인류기원(Human Era)이라고 이름지어 약칭 HE라고 쓰자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서기 2022년은 12022 HE라고 하자는 것이다.

2019년, 괴베클리 테페에서 38 km 떨어진 카라한 테페(Karahan Tepe)에서 T자형 기둥이 250개나 발견되는 등 괴베클리 테페보다 더 거대한 신전이 있었고, 괴베클리 테페와 카라한 테페 이외에도 주변지역 각지에서 T자형 기둥 신전이 잇따라 발견되어 상상 이상으로 거대한 집단으로 드러났다. 신전 주변에서도 곡식을 빻기 위해 필요한 맷돌과 탄화된 곡물 또한 대량으로 발굴되어 구석기 시대라 여기던 시절에 초기 농업 사회가 탄생했음이 밝혀졌다.

4. 유적지의 건설

파일:external/images.nationalgeographic.com/gobekli-full_35417_600x450.jpg
괴베클리 테페는 언덕 위에 스톤헨지처럼 원 모양으로 세운 돌기둥이 특징인데, 기둥들에는 여러 가지 곤충 동물 형상이 양각되어 있다. 돌기둥들은 T자 형상을 하였는데 사람을 나타낸 듯하다. T자형 돌기둥의 몸통 부분(ㅣ부분)에는 손과 인체형상이 조각되었지만 얼굴 부분(ㅡ부분)에는 아무 조각도 없다. T자형 유물은 한국의 솟대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 하늘과 인간을 연결해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새가 앉는 횃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다른 유적에는 사람 얼굴을 새겼으므로, 여기서는 얼굴을 조각할 수 있지만 하지 않았다고 추정한다.

돌기둥을 세우고자 인근에 위치한 석회암 언덕에서 바위를 떼어내 운반했는데, 기둥 하나의 무게가 10-20톤에 달하기 때문에 운반과 조각, 건설에 적어도 5백 명 이상 대규모 인력이 필요했으리라 보인다. 이 시기는 겨우 원시적인 농업이 시작되려던 신석기 시대 초기로 추정한다. 고고학계의 기존학설에 따르면, 인류가 이러한 거대유적을 조성하려면 체계적으로 토목활동이 가능한 대규모 노동력이 필요하고, 이를 뒷받침하려면 농경생활에 따른 체계화된 사회조직이 등장해야 한다.

5. 몰락

괴베클리 테페는 세워진 뒤 약 2천 년간 신전으로 사용된 듯하다. 이곳에 세웠던 기둥들을 고의로 땅에 묻은 뒤 새로운 기둥을 다시 세우는 등 몇 번 변화가 있었다. 역설적이게도 후기로 갈수록 기둥을 제작하는 방식은 단순해지고 조잡해지는 경향이 있었고, 결국 기원전 8천 년쯤 괴베클리 테페는 버려져 땅속에 묻혔다. 특이한 점은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땅을 파 기둥을 메운 뒤, 그 위에 석회 자갈과 석기도구들, 동물과 인간의 뼈를 묻고 버렸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고의적으로 신전을 매장한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볼 때 종교/정치적인 분쟁이나, 지배계급에 맞선 반란 등에 휘말렸으리라는 시각이 있다. 예를 들면 새로운 종교를 믿는 무리가 신전 일대를 지배하여 괴베클리 테페를 이교도의 건축물로 규정하고 묻어버렸거나, 혹은 그 이전에 누군가가 돌기둥들을 숨기거나 보존하기 위해 묻었다는 것. 후자의 주장은 돌기둥들이 파괴되지 않고 비교적 '온전하게' 묻혔다는 사실로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조사로는 인위적으로 묻힌 게 아니라 자연적으로 묻힌 것으로 보고 있다. 이유는 인위적으로 묻었다면 상대적으로 고르게 묻혔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 괴베클리 테페와 그 주변 지역에서 발견된 신전들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퇴적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인위적 몰락'과 '자연적 퇴적'을 결합하여 가설을 내놓기도 한다. 말그대로 괴베클리 테페가 모종의 이유로 방치되던 시기가 있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방치되고 버려졌다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다시 복구되고 하는 과정을 거쳤다는 것. 괴베클리 테페가 고고학적인 가치가 매우 높은 유적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기존 학설로 예상되던 발전 수준에 비해 놀랍다는 것이지 본격적인 성읍국가나 문명을 이룩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관리가 쉽게 끊어지는 것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굳이 전쟁이나 집단적인 분쟁이 아니어도, 단순히 생태 자원 고갈로 인한 서식지 이동나 재해로 인한 피난 등으로도 인적이 끊길 수 있다는 뜻이다.

5.1. 천문 현상과의 연관성?

파일:external/thehiddenrecords.com/taurus-lascaux-gobekli-tepi.jpg
마치 황소자리 플레이아데스 성단과 비슷하여 천문학적인 요소가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하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괴베클리 테페가 시리우스의 위치를 기록하는 천문대의 역할을 해왔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현재 시리우스는 북반구 대부분의 위치에서 볼 수 있는 밝은 별이지만, 기원전 1만 년 전에는 1년 내내 지평선 아래에 있는 전몰성, 즉 관측이 불가능한 별이었다. 지구의 세차운동으로 적위가 증가하여 기원전 9300년 무렵 시리우스는 터키에서 처음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해당 지역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못 보던 밝은 별이 남쪽 지평선 부근에서 나타난 듯이 보였을 것이다. 이 시기는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연도와 맞아떨어진다.

또한 시리우스가 지평선에서 떠오르는 위치는 지구가 세차운동을 함에 따라 수백 년 단위로 변화하는데, 이들이 돌기둥들이 배치된 방향을 연장한 선과 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만일 정말로 시리우스 출현이 괴베클리 테페를 건립하는 동기가 되었다면, 시리우스 숭배는 고대 이집트보다도 더 과거부터 전해져 내려온 유서 깊은 종교적 믿음이다. 하지만 수렵채집 활동으로 살아가던 원시부족이 문자도 없이 천문 관측기록을 어떻게 후세에 전할 수 있었냐는 의문이 남는다.

'떠돌아다니던 수렵민들이 갑자기 어떤 계기로 모여서 신전을 건축하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에 대답하고자 '혜성 소나기'를 거론하기도 한다. 그린란드의 아이스 코어, 지구 궤도 이심률 변화, 북아메리카 지질 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기원전 1만 1천 년 무렵에 지구는 황소자리 유성우의 극대기에 돌입했고, 이때 대규모 혜성 충돌이 발생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혀졌는데, 이 사건이 괴베클리 테페의 건립 동기가 되었다는 주장이 있다. # # 이 주장은 넷플릭스 고대의 아포칼립스 다큐멘터리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다만 이 다큐멘터리의 제작자는 유사역사학으로 악명높은 그레이엄 핸콕이다.

한 발 더 나가자면, 혜성 충돌로 인해 전 지구적인 재앙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에 종교적인 영감을 얻은 한 무리가 이를 기록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한곳에 정착하여 모여 살게 되었고, 자연히 농업을 터득하게 되었다는 것. 앞의 황소자리의 예와 비슷하게 돌기둥에 새겨진 동물들의 형상과 배치는 별자리와 관련이 깊으리란 추측이 많다.

6. 슈미트 교수

파일:external/www.hurriyetdailynews.com/n_69418_1.jpg
클라우스 슈미트 Klaus Schmidt 1953.12.11-2014.07.20

이 유적의 발굴 시작부터 모든 것을 관리했던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교,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의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는 2014년 7월 20일 수영 중 심장마비로 만 60세 나이에 급사했다. 이후 클라우스 슈미트 교수의 튀르키예인 아내이자 튀르키예 고고학자 치으뎀 쾩살 교수가 유적을 관리한다.

파일:external/media.licdn.com/1a9e2e0.jpg
치으뎀 쾩살 Çiğdem Köksal

치으뎀 교수의 페이스북에 발굴 관련상황과 더불어 남편 클라우스 교수의 일화를 터키어로 설명했다. 꽤나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7. 기타

7.1. 아르메니아의 반발

아르메니아는 이 지역이 원래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살던 영토라고 주장한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구약성경 창세기에서 방주를 만들었다고 기록된 노아의 5대손 하이크(Hayk)를 민족의 시조로 보며, 대홍수 직후 처음 땅을 밟은 노아가 야훼에게 제사를 드렸다고 알려진 아라라트 산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삼았고, 고대 아르메니아 시절에는 그 유명한 로마 제국과 전쟁을 벌일 정도로 깊은 역사를 가졌다. 그러다 1915년부터 1918년에 걸친 아르메니아 대학살 이후 튀르키예에 여러 영토를 빼앗긴 채 아라라트 산 바깥쪽 작은 땅으로 내몰렸다. 아르메니아인들은 그들의 긍지가 담긴 이 유적지를 원래부터 자신들의 역사인 것마냥 광고하는 튀르키예에 대해서 분노를 느끼고 있다. 반면 지금의 튀르키예인들의 정체성은 오스만 제국의 무슬림으로, 중세에 동양에서 이주해 온 자들의 후손이다. 민족적 자부심이 담긴 주장을 다 논외로 하더라도, 이 지역 원주민이 아르메니아인이라는 건 성경에도 나올 정도로 오래된 이야기고, 터키인들은 이주민이라는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들은 튀르키예 이름인 괴베클리 테페 대신 예전 아르메니아 이름인 '포르타사르(Portasar)'로 불러주길 희망한다. 그래서 포르타사르라는 알파벳으로 구글 검색하면 뜨는 사이트들도 죄다 아르메니아 관련 사이트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국제적으로는 딱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주장이며, 영어나 프랑스어 등 위키피디아를 봐도 괴베클리 테페를 아르메니아어 명칭으로 설명하진 않는다. 다만 본문에 '아르메니아에서는 포르타사르라고 불린다.' 정도로만 언급할 뿐이다. 단순히 정치적인 논리 때문만이 아니라, 이 유적을 만든 이들이 아르메니아인이라는 증거 또한 없기 때문이다.

괴베클리 테페가 발굴된 지역은 전통적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이자 문명권이었던 지역인데, 이 지역은 역사가 너무나 오래되고 문명 간 교류도 많이 오고 갔던지라 진짜 토착민족이 누구인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찾기 힘든 곳이다. 현재 괴베클리 테페 유적의 정착 시기는 1만 2천 년 전 쯤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아르메니아인이 이 지역에 이주해 온 시기는 아무리 길게 잡아도 기원전 4천 년 전 즈음으로 추정되고 다수 민족이 된 것은 이슬람 발흥 이후인 7세기 즈음부터다.[7] 그리고 설령 아르메니아인들이 그 이전부터 여기 살았다 하더라도, 1만 2천 년 전 선조들을 민족으로 따지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이 정도 시간이면 혈통이 전부 뒤섞였거나 이 지역 근방 토착민족 모두의 공통조상이라고 보는 편이 맞지, 현재의 민족분류를 대입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괴베클리 테페를 지은 사람들이 튀르키예인들의 조상이 아님은 확실하지만, 아르메니아의 주장처럼 꼭 아르메니아의 조상들이 지은 것도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결국 괴베클리 테페는 튀르키예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고, 2018년부터 관광객들도 관람할 수 있게 되었다.

8. 관련 문서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 [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4] 이후 독일 프리드리히 알렉산더 대학교 에를랑겐-뉘른베르크로 이직했다가 2014년 작고했다. [5] Dietrich, Oliver & Schmidt, Klaus. (2010). A Radiocarbon Date from the Wall Plaster of Enclosure D of Göbekli Tepe.. Neo-Lithics. 2/2010. 82-83. [6] 어디까지나 이 정도 대규모 유적으로 한정했을 경우다. 소규모 유적이나 사람의 손길이 덜 들어간 유적들 중에는 그보다 오래된 것으로 여겨지는 것들이 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테오페트라 동굴(Theopetra Cave) 같은 것들이 있다. [7] 이 지역이 동로마와 이슬람의 분쟁지대가 된 이후 기존 원주민인 셈계열 아람-아시리아인들이 떠나기 시작했고, 이슬람의 위협을 피해 동로마 쪽으로 이주한 아르메니아인들이 그 공백을 채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