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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22:54:40

체사레 보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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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
파일:Cesare Borgia.jpg
이름 이탈리아어 체사레 보르자
(Cesare Borgia)[1]
스페인어 세사르 보르하
(César Borja)[2]
카탈루냐어 세자르 보르자
(Cèsar Borja)
출생 1475년 9월 21일
교황령 라치오 수비아코
사망 1507년 3월 12일 (향년 31세)
나바라 왕국 비아나
배우자 샤를로트 달브레 (1499년 결혼)
자녀 루이사[3]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
어머니 반노차 카타네이
형제 후안, 루크레치아, 호프레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중반기
2.2.1. 1489년 ~ 1497년2.2.2. 1497년 이후
2.3. 말기
3. 그 외 일화4. 평가5. 예수 초상화 음모론6. 대중문화

[clearfix]

1. 개요

르네상스 이탈리아 성직자, 정치가, 장군. 공식 직함으로는 환속 전 팜플로나의 주교, 발렌시아 대주교, 추기경. 환속 후 교황령군 총사령관이며 발랑스 로마냐 공작. 스페인 귀족 보르자 가문 출신이다.

체사레 보르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아들로 태어나 야심을 가지고 성직을 시작하여 불과 18세에 추기경이 된다. 1497년에는 교회군의 총사령관이 되었고, 1498년 8월 역사상 스스로 추기경직에서 사임한 최초의 인물이 된다. 그 후 아버지인 교황과 프랑스의 지원 아래 발랑스와 로마냐의 공작, 안드리아와 베나프로의 군주, 디오이스의 백작, 피옴비노 · 카메리노 · 우르비노의 지배자가 되어 한 시대를 풍미했으며,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용병대장[4]으로도 활약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 6세의 사망과 그의 라이벌이었던 율리오 2세의 즉위, 자신의 신병으로 급격하게 몰락하고 만다. 그 후 전쟁터에서 불과 31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는다.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역작《 군주론》의 모델로, 뛰어난 군사 전략과 외교술 및 정치 감각으로 한 시대를 뒤흔들었던 인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2.1. 초기

로드리고 보르자 추기경이던 시절 낳은 사생아로, 어머니는 알렉산데르 6세의 내연녀 반노차 카타네이로 알려져 있다.[5] 성직자로서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은 일단은 공적인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는 부자지간으로 등록되지 않았으나, 알렉산데르 6세는 자식들이 있다는 사실을 공공연하게 인정했다. 사실 당시엔 성직자 결혼은 못 해도 사생아를 두는 풍조가 워낙에 만연했던 터라 신경 쓰는 이도 적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적자가 아닌 사생아로만 인정되기 때문에 부친의 작위, 가문을 계승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어머니 쪽 가문이나 재산 등을 이어받는 경우가 많았다.

어머니의 미모를 물려받은 탓인지, 육중한 돼지 거구였던 아버지와는 달리 어려서부터 상당한 미남이었으며 재능 있고 야심 넘치는 소년이었다.[6] 아버지인 로드리고에게는 대단히 아낌 받으면서도 동생인 후안[7] 보르자 만큼 큰 주목과 신임을 받지 못했다. 이는 체사레의 무자비하면서도 냉철한 성격 탓도 있었지만, 로드리고의 입장에서 머리 좋은 체사레보다는 아둔한 후안이 보다 다루기 쉬웠기 때문이라는 말도 있다.

성격 면에서는 아버지의 기질을 물려받았지만, 아버지처럼 사교적이지 않아 겉으로는 솔직해보여도 속으로 은밀하고 조심스러운 타입이었다. 이러한 성격들은 후일 그가 짧게나마 로마냐를 지배하게 되는 원동력이었다. 그 외에도 열광적인 즐거움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가면 한동안 무기력과 침울함에 빠져들었다. 더군다나 자존심이 강해 명예를 훼손당하면 깊이 분노해 반드시 복수하는 인물이었고[8], 이는 후일 세니갈리아(Senigallia)에서의 집단 처형에서 표출되었다. 의심까지 많아 넓게는 가족, 좁게는 여동생 루크레치아 보르자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다.

재능면에서는 동시대의 상층 계급 청년들이 으레 그러듯 라틴어, 그리스어 등을 비롯해 고대 그리스ㆍ로마의 문학자들의 저서들을 탐구하는 고전 교육을 받았으며, 그에 더해 승마나 무기 다루는 법까지 배웠다. 체사레의 경우 장성한 후 맨손으로 편자를 구부릴 수 있다는 평판이 나돌 정도로 힘이 셌으며, 6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사냥에 나갔으며, 스페인의 친족들로부터 투우를 배웠고 이러한 교육은 그가 이른 나이에 성직에 있을 무렵에도 계속되었다.

1481년 6세로 추정되는 나이에 그의 아버지가 당시 교황을 설득해 사생아임에도 불구하고 체사레의 성직록을 허락하는 관면장을 발급해고 1482년에 아라곤의 국왕 페르디난드는 법적으로 사생아 출신에게 규정되어 있는 지위상의 불이익으로부터 구제해, 그가 스페인에서 영지를 소유할 수 있게 해주어 체사레에게 스페인의 교회들을 포기만 한다면 유리한 관직들을 모을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 그리고 3월에 교황 식스토 4세에 의해 교황청 고위 성직자가 되어 7월에 부친이 주교로 있던 발렌시아 교구 성당에서 성직록과 참사회원직을 수여받았고 아버지의 고향인 아티바에선 부주교였다.

그리고 1483년 4월에 알바르의 수도원장을 거쳐 이듬해 새 교황 인노첸시오 8세에 의해 부친 로드리고가 주교로 있던 카르타헤나 교구의 재무관으로 임명되었고, 다음엔 마요르카 성당의 수급 성직자, 레리다 성당의 참사회원로 임명되었지만 체사레의 나이에서 알듯이 어떤 의무를 떠맡을 수 없었고 거의 대리인이 수행했으며, 모든 수입은 그의 양육비와 교육을 위해 부친에 의해 사용되었다.

2.2. 중반기

2.2.1. 1489년 ~ 1497년

1489년 교황령에 있는 교황청립 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체류했고, 이후 3년간 페루자와 피사의 대학들에서 공식 교육을 마무리했다.[9] 1491년 15세 때 사제 서품을 받지 않는 가운데 팜플로나의 주교가 되었고,[10] 그리고 그 해에 팜플로나 주교의 신분으로 피렌체 공화국 피사로 가 그곳에서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의 차남이자 추기경이며 후일 레오 10세로 알려진 조반니 메디치와 알게 된다.[11]

그 뒤 1492년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버지가 교황에 선출되자 18세에 발렌시아의 추기경으로 선출되면서 권력의 심장부에 진출했다. 성직자의 자식들은 사생아 취급을 받기에 보통 주교까지가 한계인데, 체사레처럼 교황의 사생아가 추기경까지 오른 것은 굉장히 이례적인 케이스다.[12] 물론 이 과정에서 엄청난 반발이 일어났다. 이는 비(非) 이탈리아인과 측근들로 추기경단을 꾸리려 했던 알렉산데르 6세에 대한 반감이기도 했다.

이 와중에도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체사레보다는 여전히 후안을 더 총애했다. 본인이 소풍 갈 때 체사레를 빼놓고, 인질로 잡혀왔던 오스만 제국의 황자 [13]과 대동했을 정도였다. 허나 체사레는 점차 아버지의 정치적 파트너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494년 샤를 8세 이탈리아 침공 전 주요 지역을 정찰할 때 함께 동행했으며 부친의 협상에 은밀히 관여하였고, 스페인에 있던 형제 후안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을 듣고 편지까지 보내는 등 가문의 일도 도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샤를 8세 이탈리아를 침공, 로마로 향하는 동안 아버지와 함께 속수무책으로 그것을 지켜봐야 했고, 결국 12월 18일 피신하기 위한 준비를 했고 설상가상으로 프랑스군 로마 근처에 도달했고, 로마 시민들 또한 알렉산데르 6세에게 프랑스 왕과 협상하지 않는다면 성문을 열 것이라고 통보했으나 알렉산데르 6세는 갑작스럽게 로마에 남아 샤를 8세와 협상을 했다.

샤를 8세 산탄젤로 성과 젬 왕자를 넘기는 것과 체사레를 볼모로서 나폴리 원정으로 동행하는 무리한 조건을 걸자, 협상은 결렬되었다. 알렉산데르 6세와 체사레 부자는 지하통로로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프랑스군의 포위공격으로 알렉산데르 6세 샤를 8세의 요구를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1월 28일 체사레는 프랑스군과 함께 나폴리로 향했으나 1월 30일 벨레트리에서 말구종으로 변장한 채 프랑스군 진영을 탈출해 로마로 스플레토에 있는 알렉산데르 6세에게로 돌아왔다.[14]

체사레의 탈출을 알게된 샤를 8세는 경악과 분노를 감추지 않고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체사레를 내놓으라고 항의했으나 씨알도 먹히지 않았으며, 점차 두 사람 사이에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비록 샤를은 나폴리에 무혈입성하여 나폴리 왕을 자칭하긴 했지만, 알렉산데르 6세의 제안에 의해 교황령을 주축으로 밀라노 공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최초의 신성 동맹[15]을 결성하는 한편 당시 스페인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으로 피신한 전(前) 나폴리 왕이 스페인의 지원군과 함께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자 샤를은 급히 프랑스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체사레가 이때 매독에 걸렸다는 주장이 있다.[16]

1497년 6월 14일 수요일 오후 체사레는 동생 후안과 사촌인 몬레알레의 추기경인 후안 보르지아와 함께 어머니의 집에서 만찬을 했다. 그 후 동생 후안은 귀가길에 갑작스럽게 행방불명되었다가 2일이 지나서야 하인과 함께 테베레 강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수중에 있던 지갑의 돈도 없어지지 않은 채였다. 암살범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유력한 용의자는 바로 체사레로 추정되고 있다.[17]

2.2.2. 1497년 이후

이후 체사레는 나폴리의 왕으로 즉위하는 페데리코 4세[18]의 대관식을 집전하기 위해 나폴리로 갔으나 그 이면은 보르자 가문의 이익을 더 얻기 위한 것이였기도 했다. 그리고 로마로 돌아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체사레는 환속 준비를 하기 시작했고, 아버지인 알렉산데르 6세 또한 아들의 세속 영지와 아내감을 구할 겸 동맹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폴리 왕 페데리고의 딸 카를로타와 결혼하려는 시도를 보였으나, 나폴리의 국왕이었던 페데리고는 왕가의 적녀와 교황의 사생아 간의 결혼을 탐탁지 않게 여겨 대신 가문의 서출 중 하나였던 알폰소에게 비셸리에 공작위를 주고 체사레의 동생이었던 루크레치아 보르자와 결혼하게 했고, 보르자 가문은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재혼 외엔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했다.

이에 보르자 가문은 나폴리와 그 뒤에 있던 아라곤 왕가와 결별, 당시 스페인과 대립 중이던 프랑스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샤를 8세 이탈리아 원정이 실패된 이후 알렉산데르 6세는 후안 보르지아가 암살되기 3개월 전 샤를 8세에게 우호사절을 보내 관계 개선을 꾀했으나 샤를 8세가 4월 7일 앙부아즈 성에서 사고를 당해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계획이 틀어질 위기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샤를 8세의 사망은 알렉산데르 6세에게 호기로 작용했고, 조모의 집안인 비스콘티가와의 혈연을 내세워 밀라노 지역을 노리고 있으며 불임이던 아내 '잔 드 프랑스'와 자신의 결혼을 무효화하고 막대한 영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샤를 8세의 미망인 안 드 브르타뉴와 재혼을 원하던 프랑스의 새 국왕 루이 12세와 교섭했으며, 루이 12세 교황이 원하는대로 체사레의 환속을 지원할 것을 약속했다.[19] 그리고 1498년 8월 17일 체사레는 추기경단에서 추기경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발표했고, 곧 루이 12세의 특허장을 가지고 로마에 도착한 프랑스 사절로 통해 발랑스 공작이 된다.[20]

1498년 10월 체사레는 자신의 심복들과 함께 로마를 떠나 프랑스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 있는 그곳에 있는 나폴리 공주 카를로타와 접촉할 겸 새로운 동맹인 프랑스의 왕과 귀족, 고위 성직자들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사레는 마르세유를 거쳐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가 있는 곳까지 도착해 왕과 사냥터에서 만나 이후 한동안 프랑스에 체류하게 된다. 그는 카를로타와는 결혼하지는 못했지만 확실히 프랑스 상류사회에서 유명해졌으며 1499년 5월 루이 12세의 주선으로 프랑스 왕족이자 나바라 호아네스 3세의 여동생인 샤를로트 달브레와 결혼하게 되었다.[21] 그는 2개월 동안 아내 샤를로트와 함께 있다가 그해 7월 루이 12세 이탈리아 원정에 200기의 기병을 거느린 채 참전해 이탈리아로 돌아오게 된다.

1499년 10월 체사레는 프랑스군과 함께 밀라노로 입성했고, 로마로 돌아와 교황령군 총사령관이 된 체사레는 1499년부터 1502년에 걸쳐 로마냐와 우르비노 등 수많은 지방을 정복해 로마냐 공국을 세워 통치하기 시작했고, 다른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경쟁하기 시작했다. 그의 원정은 단번에 진행된 것이 아닌 순차적으로 진행된 것으로 첫 번째 정벌은 로마냐 지방으로 본래 교황령이었으나 아비뇽 유수를 계기로 지방 귀족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된 도시들이었으며, 그 도시들을 발판으로 이탈리아 전토를 통일하는 것이 알렉산데르와 체사레의 목표였다.[22][23]

그해 11월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에게 독이 묻힌 편지를 보낸 포를리와 이몰라의 백작부인인 카테리나 스포르차를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자신의 군사적 역량을 보였다.[24] 1500년 2월 체사레는 일부 군사를 거느린 채 로마로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루크레치아의 2번째 남편이었던 비셸리에 공작 알폰소가 갑작스럽게 암살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또 다시 모든 의혹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그해 8월에 그는 다시 군대를 몰고 내분 중인 시에나를 점령했고 그리고 여세를 몰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파문을 받은 리미니, 파엔차, 페사로를 쳤고, 수많은 용병부대 및 프랑스군으로 이루어진 12,000명을 이끌고 리미니로 진군, 리미니의 영주였던 판돌포 말라데스타는 체사레에게 항복한 후 서둘러 가족들과 함께 리미니에서 도망쳐 체사레의 교황군은 리미니에 무혈입성했다. 그의 2번째 목표는 여동생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첫 남편이었던 조반니 스포르차가 있던 페사로였고, 조반니는 옛 처남이 기세등등하게 페사로로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에 싸우지도 않고 페사로에서 도망쳐, 체사레는 또 다시 리미니처럼 무혈입성했다.

그해 11월 체사레와 그의 군대는 12세의 어린 영주인 아스토레 만프레디가 지배하는 파엔차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 피엔차는 다른 두 도시와는 달리 끝까지 저항하다가 1501년 4월 영주인 아스토레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아스토레 만프레디는 로마로 보내졌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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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사레 보르자의 전성기였던 1503년 그가 통치한 로마냐 공국의 지도
뛰어난 군사적 능력만큼 유능한 통치자로서 단기간에 로마냐 공국을 베네치아 밀라노 등에 맞설 만큼 키워냈으며, 자신이 고용한 용병대장들이 자신들도 결국 토사구팽되고 영지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여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자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 가장 아끼던 심복 부하까지 죽여가며 화해의 제스처를 보내며 이들을 세니갈리아 성에 모아놓곤 단번에 집단 처형하는 무자비하고 냉혹한 면모를 과시했다.[26]

2.3. 말기

그러나 1503년 알렉산데르 6세가 병사[27]하자 라이벌이던 율리오 2세와 비밀협약을 맺어 콘클라베에서 그를 지지했으나, 선출된 교황 율리오 2세는 간단히 손바닥을 뒤집어버렸고, 설상가상으로 자신까지 중병[28]에 걸려[29] 한순간에 몰락해버렸다.[30][31]

그는 교황의 체포령이 떨어지자 곧 로마를 빠져나가 스페인령 나폴리로 향했지만, 그곳에서 스페인 왕 페르난도 2세의 지령을 받은 나폴리 총독 곤살로 데 코르도바[32]에게 체포되어 1504년 스페인으로 이송, 수감되었으나 2년만에 탈옥해 처남인 호아네스 3세가 통치 중인 나바라 왕국에서 지내게 되었다. 여기서 그의 능력을 인정받아 나바라 왕국의 총사령관까지 오르게 된다. 1507년 31살 나이에 나바라의 친 스페인 세력인 루이 드 뷰몽이 일으킨 반란을 토벌하던 도중 전장에서 완전무장을 하고 적진을 향해 닥돌하다가 말에서 떨어지고, 적병들에게 다굴을 맞아 최후를 맞았다.[33]

사후 적병들이 그의 번쩍이는 검은 갑옷과 고급 의상이 탐나 닥치는 대로 벗겨가는 바람에 그 자리에는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알몸뚱이[34] 피를 흘린 채 누워 있었다고. 장례를 치른 뒤에도 수난은 끝나지 않아서, 처음에는 교회에 묻혔던 그 시신이 도로 파내져서 교회 계단 옆, 순례자들의 길 아래 파묻혀 깔리는 굴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사후 500년이 된 2007년, 현지 주교가 교회 안으로 다시 이장하도록 허용했다.

3. 그 외 일화

아내와 결혼한 뒤 딱 일주일 동안만 만나고 다시는 얼굴도 보지 않았다는 야사가 있다. 하지만 역사학자가 쓴 체사레 평전을 보면 실제로는 프랑스에서 3개월간 아내와 함께 살았고, 이탈리아로 아내를 데려가려 했으나 프랑스 왕이 아내를 인질로 잡아두어 다시 만나지 못한 것이라 한다. 그때 임신한 건지 아내와의 사이에 딸 하나를 두었다. 그 외에도 11명의 사생아가 있다고 한다. 이 중 헤로니모(지롤라모)라는 서출 자식은 부친인 체사레의 성격을 물려받았고, 아버지가 이탈리아에 축출된 후 고모 루크레치아 보르자의 비호를 받았는데, 당시 그 와중에 자신을 암살하려 했던 페라라인 암살자들을 끝까지 추격해 처형하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여동생 루크레치아 보르자 근친상간을 했다는 의혹이 계속해서 꼬리를 물었는데, 이는 율리오 2세가 정치적으로 이용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새로운 의혹[35]이 있으며[36], 남색은 거의 확실시되고 있다. 다만 체사레의 경우 루크레치아 보르자에 대한 감정은 사실인 듯하다. 이 설을 주장하는 학자에 따르면, 정설과 달리 반노차는 체사레의 친모가 아니라 양어머니라고 주장하고, 체사레는 양어머니인 반노차를 이상적인 여성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그 딸인 루크레치아 보르자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 설을 따른 만화가 칸타렐라.

그런데 이 사람의 행적을 짚어가다 보면 모녀덮밥, 모자덮밥, 형제덮밥, 자매덮밥, 네토리[37], 심지어 부자덮밥까지… 물론 체사레의 행적을 다루는 역사의 사료대로 치정 행각이 아니라 그저 단순히 밤새 토론만 했던 관계일 수도 있다.

한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군사고문으로 영입하여 신무기와 요새를 설계하게 했다.[38]

4. 평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체사레를 유능하면서도 냉혹하고 추진력과 결단성을 갖춘 군주의 모델로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자신의 주장의 실례로 체사레의 행동력과 결과를 예로 든 것일 뿐, 체사레가 마키아벨리의 가장 이상적인 군주상인 것은 아니었다. 마키아벨리가 체사레의 이런 저런 약점을 알고 있었음에도 전체적으로 상당히 호의적으로 평가한 것은 당시 이탈리아 통일을 염원하는 자들은 많았지만 다들 말뿐이었고 그나마 실제로 계획, 행동을 한 사람이 체사레 뿐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해석으로, 마키아벨리는 체사레가 교황령을 멸망시킬 수 있는 인물로 생각했다는 주장도 있다. 본래 마키아벨리는 교황령이 이탈리아 통일의 중요한 방해물이라고 주장했었다. 그런데 체사레와 친부인 알렉산데르 6세의 행적에서 알 수 있듯이 두 사람은 노골적으로 교황령을 세속 군주의 영토로 만들려고 했다. 즉, 체사레가 교황령을 완전히 장악하고 권력 기반을 갖추는데 성공한다면, 교황령은 더 이상 가톨릭이란 종교의 상징성이 없는 보르지아 가문의 일개 세속 국가로 바뀔 것이고, 이는 기존의 교황령이 해체된다는 걸 의미했다. 그래서 마키아벨리가 체사레를 고평가했다는 것. 르네상스를 연구한 학자인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주장이다.

역사상으로는 로마인 이후 베네치아인, 로마인, 피사인이 아닌 최초로 이탈리아인이란 개념을 심어놓은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시오노 나나미 여사가 동인녀 의혹을 받게 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유를 정확히 알고 싶다면 저서《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을 읽어보면 된다. 체사레에 대해 제대로 알고 싶다면 영국 역사가 새러 브래드퍼드가 쓴 체사레 평전인《체사레 보르자, 마키아벨리를 사로잡은 군주론의 모델》을 추천한다.

사학계에서 나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순혈주의[39]에 대한 희생양이라는 측과 율리오 2세 교황령 재통일이라는 위대한 업적[40]은 체사레가 초석을 쌓았기 때문이라는 측도 존재하기 시작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자신이 주창한 위버멘쉬에 부합하는 인물이라며 언급한다. 도덕적인 성인군자가 아니라 체사레 보르자 같은 사람이야말로 위버멘쉬라 남겼다. 온갖 불미스러운 의혹과 아버지의 빽만 제외하면 단기간에 이탈리아의 실권자 중에 한 명이 된 것을 주목한 것 같다.

묘하게 삼국지의 원소와 닮았다. 명문가의 서출이고, 미남으로 유명했으며 권모술수에 능했고, 의외로 자기 백성들한테는 인기 있는 편이었다.[41]

5. 예수 초상화 음모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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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이 냉혹한 학살자가 바로 현대에 그려지고 있는 예수의 서양식 초상화의 모델이라는 음모론이 있다. 그의 아버지인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지배 시기에 대놓고 예술가들에게 예수의 초상화를 그의 얼굴을 본떠 그리게 했다는 것으로, 이것은 프랑스의 작가인 알렉상드르 뒤마가 제기한 설인데 학술적으로는 그다지 신빙성 없는 떡밥으로 영문위키에서는 토론에서 지지 측이 근거도 제대로 제기하지 못해서 본문에는 언급조차 되지 못하는 실정이다. 참고로 위키백과 영문판에서는 위의 체사레 초상화조차 체사레 보르자의 초상화가 아니라 이제까지 체사레 보르자의 초상화라 카더라는 그림이라고만 되어 있다. 즉, "체사레를 그린 저 초상과 예수의 초상이 서로 닮았다!"라는 말에 대해, "닮지 않았다."도 아니고 "저 초상이 과연 체사레가 맞기는 한가?"라는 것이 위키백과 영문판의 공식 입장.
파일:Ravenna_Jesus.jpg 파일:sinai jesus pantocrator.jpg
라벤나의 갈라 플라치디아의 영묘의 모자이크, 5세기(左) 라벤나 대성당의 모자이크, 6세기(右) 성 카테리나 수도원, 이집트 시나이 반도, 6세기

애초에 흔히 알려져있는 예수의 초상은 체사레보다 훨씬 이른 것으로, 6세기 경 중동에서 유래한 것이며, 유스티니아노스 2세 문서에서 보이듯, 7세기쯤 되면 동로마 황제의 솔리두스 금화에서도 그러한 형상이 확인된다. 또한 오늘날 그리스도교가 흔히 묘사하는 예수의 모습이 서구의 미남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주장, 르네상스가 기원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실제로는 정작 이탈리아, 그리스 등 유럽에서는 위 이미지 중 좌측의 예시처럼 마치 아폴론 신 같은 수염 없는 청년의 모습으로 묘사했다. 지금 알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중동에서 유래된 그림이 기존의 이미지들을 밀어내고 정착한 것이다. 즉, 체사레가 예수 외형의 모델이라는 이야기는, 시간적 순서를 고려하더라도 자연스럽지가 않다

이러한 예수 표준 영정 모델 음모론은 체사레뿐만이 아니라 알브레히트 뒤러[42] 등 예수와 닮은 것 같은 사람에게 흔하게 따라오는 떡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음모론이 한국 인터넷 일부에서 사실인 양 잘못 알려져 정설로 믿는 사람들이 꽤 된다.

체사레 모델설에서는 " 중세 때도 머리 긴 예수 그림이 있었지만, 현대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있다."는 주장도 덧붙이나, 실제 유물을 보면 6세기에 그려진 예수 초상은 이미 현대의 이미지와 거의 같다. 하기아 소피아 등 12세기면 이미 현대의 예수 초상과 충분히 같아진다.

6. 대중문화

어쩐지 만화계, 특히 순정만화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자주 각색되는 실존인물로 유명하다. 사이토 치호의《 화관의 마돈나》, 소료 후유미의《 체사레 ~파괴의 창조자~》, 히구리 유우의《 칸타렐라》, 토가와 미토모의《 순백의 피오렌티나[43] 등에서 출연한 바 있다. 르네상스를 배경으로 한 김강원의 만화《바람의 마드리갈》에서도 한 줄 언급된다.[44] 국내 로맨스 소설 중《이태리 연가》라는 작품에서도 등장해서 여주인공과 연애를 펼친다. 참고로 이 소설은 한국의 평범한 여대생 이탈리아 배낭여행을 떠나다가 비행기 사고를 당하고 당시 체자레 보르지아의 사촌 여동생의 몸에 빙의되는 내용이다. 이고깽??? 이건 뭐 용랑전 로맨스 버전도 아니고… 각색까지는 아니지만《 어이쿠! 왕자님 ~호감가는 모양새~》에서 체자레 클레멘스의 이름 모티브가 되었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 에드몽 당테스가 얻게 되는 막대한 재산도 간접적으론 보르자 가문과 연관이 있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보르자에게 숙청당한 추기경 스파다가 재산을 뺏기지 않으려고 무인도에 몰래 감췄는데 그 비밀을 상속자인 조카에게 제때 전하지 못해[45] 잊혀져버린 것이기 때문. 그리고 재산의 정체와 위치를 기록한 비밀 편지가 한 성경책에 숨겨져 있었는데 이 성경책은 가문의 남겨진 후손들이 물려받았고, 마지막 후손이 사망한 뒤 당시 그 후손의 비서였던 파리아 신부가 이 성경책을 상속받았던 것이다. 이후 파리아 신부는 비밀 편지의 내용을 밝혀내지만 보물을 찾으러 나서기도 전에 감옥에 갇히게 되고, 탈옥을 시도하다가 당테스와 연을 맺은 후 친아들처럼 아끼게 된 그에게 죽기 전에 문서로 명시하지는 못했지만 보물의 위치와 내력을 알려줌으로써 사실상 당테스에게 보물을 물려주었다.

짐승조선》에서는 아버지를 닮아 음험의 대명사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임사홍이 진실을 말함에도 이를 끊임 없이 의심한다. 이후 임사홍이 데려온 동물들을 보는데 거기서 오리너구리에게 독침이 있다는 말에 즉각 부하의 손을 이동 수조에 넣어 독침에 쏘이게 하고 부하가 고통스러워 하는 데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독의 효능을 아버지에게 보고하는 비정한 모습을 보이는 건 덤. 이후 조선 조총 시연을 보고 사절단의 조총 보유고를 알고 조선이 군사 강국인 것을 깨닫고 친밀해져야 한다고 판단, 임사홍에게 유화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도 등장. 첫 등장은 십자군을 이끌고 온 밀라노 공작을 찾아온 것인데 거기서 자신을 그리스에 보내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주인공은 환속을 조건으로 내거는데 이때 망설이지만 밀라노 공작의 밑에 있는 것이 자신의 야심과 맞다고 판단, 환속을 결심하고 즉시 자신의 이름을 건 연대급 부대를 받아 그리스로 향한다. 이후 테살로니키 전투에서 포병 지휘를 맡아 공을 세우게 되고 그 공으로 테살로니키 방위 책임자의 지위를 맡는다.

6.1. 창세기전 외전 서풍의 광시곡 체사레 보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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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

체자레를 완전히 힘에 집착하여 미쳐버린 광인으로 표현했다. 작품의 서사를 확립하기 위해서 철저한 악인으로 그려져 역사적 사실보다 과장된 면모가 많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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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영상화


2005년 스페인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다. 국내에선《보르히아: 역사상 가장 타락한 교황》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었다. 상당히 선정적이고 보르자 가문의 막장 스멜이 강조된 영화.

2011년 미드 더 보르지아》에서는 의외로 훈남 캐릭터로 등장한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선 무슨 일이든 하겠다."라는 신조로 가족과 아버지의 적들과 싸우는 전사의 입장. 자세한 것은 더 보르지아 문서에 설명되어져 있다.

위의 더 보르지아와는 다른, 유럽 방송사에서 제작된 드라마《 보르지아》에도 당연하다는 듯 출연한다. 게다가 배우의 외모가 실제 초상화와 싱크로율도 엄청 난 편. 이 드라마는 보르자 가문의 흥망성쇠를 대부분 묘사하여 그의 몰락과 죽음이 후/종반부를 장식한다. 그런데 정작 맨 마지막에는 죽지 않고,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다는 대체역사 수준의 설정, 혹은 왜곡으로 피날레를 장식. 이 부분은 시청자들마다 호불호가 엇갈린다. 그래도 저 위의 더 보르지아보다는 대체로 역사적 재현에 더 충실한 편이다.

[1] Cesare는 카이사르 이탈리아식 표기로, 본인도 생전에 자기 이름의 원래 주인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 욕망이 있었으며, "Aut Caesar, Aut Nihil" (황제이거나, 무(無)이거나)라는 표어를 좌우명으로 삼았다. 북부 방언으로는 '체자레 보르자'라고 하고, gia 표기 때문에 '체자레 보르지아'라고도 표기하지만 외래어 표기법에 맞는 표기는 '체사레 보르자'이다. [2] 보르자 가문은 스페인에서 성직을 지냈고, 체사레 보르자 본인도 스페인에서 성직을 맡았기 때문에 그를 " 스페인 이탈리아인"으로 소개한다. [3] 이외에 10명이 넘는 사생아가 있다. [4] 콘도티에로( 이탈리아어: Condottiero) [5] 체사레는 차남인데, 체사레와 동생들은 큰 형인 페드로 루이스와 어머니가 다르다. 페드로 루이스는 전장에서의 공적과 부친의 후광으로 20대에 간디아 공작에 서임되는 것과 함께 아라곤 왕의 사위가 되었지만 요절했다. 원래대로라면 페드로 루이스의 작위와 약혼녀는 차남인 체사레에게 넘어가야 했겠지만, 당시 체사레는 이미 성직자가 되었기 때문에 3남인 후안에게 넘어갔다. [6] 다만 체사레 생전의 초상화들은 한 점도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 위의 초상화 또한 둑스 발렌티누스(Dux Valentinus, '발렌시아 공작'이란 뜻의 라틴어)라고 새겨져 있기에 체사레의 초상화로 추정하는 것뿐이다. [7] 이탈리아어 조반니라고도 부른다. [8] 다만 이런 점은 중세 유럽의 귀족들이 가진 보편적인 성향이었다. 16세기에 인도를 침입한 포르투갈 귀족들도 포르투갈 국왕을 모욕한 이슬람 상인인 마마이라를 붙잡아 고문했는데, 자신을 놓아주면 큰 돈을 주겠다는 마마이라의 말에 "왕의 명예는 돈으로 살 수 없다."라며 거부했다. [9] 이때 페루자는 약 2만 명의 인구가 모여 사는 도시와 그 도시를 둘러싼 부유한 농촌 지역(Contado)으로 이루어진 교황령의 중요한 도시였지만, 실세는 교황이 파견한 관리가 아니라 지방 귀족인 발리오니 가문에게 있었다. 아비뇽 유수 이래로 교황의 지배를 받던 로마냐 지방의 여러 도시들이 형식상으로만 교황의 지배를 인정하고 실질적으로는 모조리 떨어져나갔기 때문으로, 훗날 체사레 보르자는 이 도시들을 형식 지배에서 실질 지배로 바꾸고 자신의 왕국의 영토로 삼았다. [10] 이때 팜플로나 주민 전원이 분개해 봉기를 일으켰다. 그의 아버지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임명 이유를 순진하게 "그의 공적, 미덕, 신조"라고 발표했고 체사레 또한 대리인을 보냈다. 그러나 사태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다가 결국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개입해 유야무야된다. [11] 둘은 동갑이긴 했지만 조반니의 서기였던 세르 스테파노의 기록을 보면, 서로에게 호의적이지 않았고 사교적으로나 학문적으로도 경쟁 관계이기도 했다. [12] 물론 사생아 출신으로 교황의 자리에 오른 사람도 있긴 한데, 이쪽은 태어나자마자 큰 아버지에 의해 집안에 정식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바로 위에서 거론되었던 레오 10세의 사촌 동생인 클레멘스 7세. 아버지는 피렌체의 명문가 메디치 가문 출신인 줄리아노 디 피에로 데 메디치로, 큰 아버지가 그 유명한 로렌초 일 마니피코 로렌초 디 피에로 데 메디치이다. 파찌 가문의 음모로 동생이 죽고 난 뒤 동생의 애인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은 로렌초 일 마니피코가 메디치 가문의 적자로 받아들였던 것. 다른 설도 있는데, 당시 교회법에서는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두 커플이 서로 배우자가 되겠다고 맹세만 하면 그 자식은 적자로 인정을 받았는데, 클레멘스 7세의 양친은 그것을 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로렌초가 그 조카를 받아들인 건 생모가 죽은 뒤였다. 하지만 체사레의 경우 확실한 사생아였기 때문에 내연녀였던 반노차와 그녀의 남편이었던 도메니코 다 리그나노의 아들로 해야 했고 후일 공식석상에서 조카로 기록된다. [13] 사정이 조금 복잡한데, 먼저 오스만 제국에서는 황제가 죽으면 황태자들끼리 하나뿐인 옥좌를 두고 내전을 벌이는 것이 관습이자 법이었다. 이에 젬도 부황인 메흐메트 2세가 죽자 형인 바예지드 2세와 내전을 벌였는데, 그 결과 패배하여 구호기사단이 차지하고 있던 로도스 섬으로 망명. 이를 전해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8세가 기사단 측에 "얘를 개종시켜서, 이교도 오스만에 대한 십자군 총사령관으로 삼아야 겠음."이라고 통보하여 신병을 넘겨받았다. 하지만 젬은 기독교로 개종할 뜻이 없었고, 파디샤가 된 바예지드 2세도 "우리 나라로 돌아오면 골치 아프니, 그냥 계속 붙들고만 있으시오."하고는 그 대가로 금과 성유물을 보냈다. [14] 체사레의 탈출 계획은 그가 프랑스군을 따라 로마를 떠나기 전에 계획된 것으로 보이며, 그는 잠시 로마에 들려 사람들로 하여금 주둔하고 있던 스위스 용병들을 습격하게 만들었는데, 어머니였던 반노차의 집이 이들에게 약탈당했기에 보복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15] 교황령이 주창하긴 했지만, 주도권은 많은 병사를 제공한 베네치아에 있었다. 따라서, 이 동맹을 베네치아 동맹이라고도 한다. [16] 추기경직을 버리고 나폴리를 다녀올 때 몬토바 후작부인의 밀정이었던 도나토 데프레티의 보고에서, 그가 당시 프랑스 질병으로 불렸던 매독에 걸렸다고 보고했다. [17] 단, 이는 아무 이유도 없이 수사가 중단된 것과 당시로서는 형제간 살해가 드물지 않았다는 것, 후안이 살해당했다는 것을 전해들은 알렉산데르가 "범인이 누군지 알겠다."라고 중얼거렸다는 소문 등을 근거로 한 추측일 뿐 확실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체사레의 정적이자 용의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졌던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도 체사레를 범인으로 생각지 않았으며 체사레는 한참 뒤에나 용의자 명단에 올랐다. 오늘날의 역사가들은 절반은 믿고 절반은 불신하는 추세. [18]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 때 나폴리 왕이었던 페르디난도 2세는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으므로, 삼촌인 페데리코가 뒤를 이었다. [19] 전문은 대략 이렇게 된다. 첫째, 체사레에게 프랑스의 영토인 발랑스와 두아즈를 수여해 발랑스 공작위를 수여하는 동시에 금화 2만 프랑을 지급, / 둘째, 체사레를 창기병 100기의 지휘관으로 임명, 이탈리아뿐 아니라 어디에서든 운용 가능하고 비용은 프랑스 국왕이 부담하며, 왕의 선택에 따라 2, 300기를 증원하는 것과 최대 2천 기 규모로 확대할 수 있다. / 셋째, 체사레는 국왕으로부터 매년 금화 2만 프랑의 개인 보조금을 받음, / 넷째, 밀라노를 정복할 시 체사레에게 아스티를 봉토로 수여, / 다섯째, 체사레에게 성 미카엘 기사단 훈위를 수여함. 이 정도면 그야말로 횡재한 것이었다. [20] 역대 추기경 가운데, 스스로 사임한 것은 체사레가 처음이었다. 덧붙여 이때를 계기로 체사레는 동시대의 사람들로부터 발렌티노 공이라고 불리게 되는데, 바로 발랑스 공작과 그가 대주교로 있었던 발렌시아가 이탈리아어로는 같은 발렌티노로 불려졌기 때문이었다. [21] 이때 아버지인 알렉산데르 6세에게 자기 신혼 첫날밤을 상세히 기록한 편지를 보냈다. [22] 당시 이탈리아에서는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입 등 프랑스, 신성 로마 제국, 스페인 등이 땅 따먹기를 벌이는 데에 여념이 없었는데, 이에 알렉산데르는 이탈리아 통일이야말로 땅 따먹기를 조속히 끝낼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교황으로서의 최대 목표로 삼았던 것. 다만 여기에서 대단한 것은 교황령의 이탈리아 통일이 아니라 새로운 세속 국가의 이탈리아 통일이었다는 데에 있다. 즉, 교황령은 오늘날의 바티칸 시국과 마찬가지로 세속의 권력에는 일체 간섭하지 않고 종교적인 일에만 신경을 쓰겠다는 것인데, 교황령 천 년 역사상 이러한 생각을 한 교황은 알렉산데르 6세유일하다. [23] 훗날 율리오 2세 교황령의 이탈리아 통일을 교황으로서의 최대 목표로 삼은 일이 있다. 즉, "알렉산데르와 정 반대로 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으로 이탈리아 통일에 방해가 되는 국가를 차례로 약화시켰지만, 결국 막다른 골목에 몰리게 된다. [24] 카테리나에게서 항복을 받아낸 후 체사레는 자신에게 온갖 막말을 퍼붓는 카테리나를 겁탈하는데, 이에 당시 체사레의 동맹이었던 프랑스인들은 기겁을 했으나 카테리나는 오히려 체사레를 향해 "니가 하도 괜찮게 생겨서 나도 언제 너 한번 따먹으려고 했다."라며 패기넘치게 말했다고 한다. [25] 이후 아스토레 만프레디는 다음 해인 1502년 1월 산타젤로 성에서 암살되었고 범인은 두말할 것도 없이 체사레로 추정되고 있다. [26]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세니갈리아에서의 숙청을 훌륭한 계획이었다고 평가했으며, 의사이자 성직자, 역사가이자 전기 작가였던 파올로 조비오(Paolo Giovio)도 "멋진 속임수"라고 긍정적으로 기술했다. [27] 당시 사람들은 독살로 믿었으나 사실은 말라리아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28] 말라리아에 걸린 것으로 추정된 아버지처럼 그 역시 말라리아라고 한다. [29]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 율리오 2세가 교황으로 선출되던 날, 공작(체사레)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자신은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어떠어떠한 일이 있으리라는 것을 전부터 생각해 두었으며 그에 대한 대책도 세워놓았지만, 다만 아버지가 죽을 때 자신 역시 병상에 누워있을 운명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고." [30] 보르자 가문에 충성하는 스페인계 추기경들의 표를 몰빵해줄 테니 교회군 총사령관과 로마냐 공작이라는 작위를 유지해달라는 협약을 맺었지만 배신당한 것으로, 체사레를 새로 나라를 세운 자가 본받기에 더없이 좋은 예라고 극찬했던 마키아벨리는 다만 한 가지 비난할 수 있는 것은 교황을 잘못 선택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다만 현대의 역사가 사라 브래드퍼드는 협약을 맺지 않았더라도 율리오 2세의 즉위는 막을 수 없었으며 체사레는 그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협상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31] 즉위하자마자 율리오 2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보르자가 살았던 방에서는 살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신성한 교회를 전례가 없을 정도로 훼손했으며, 악마의 도움을 받아 교황직을 찬탈했다. 나는 보르자라는 이름을 말하거나, 생각하는 자는 그 누구든 파문에 처할 것이다. 그 이름과 기억은 반드시 잊혀져야 하며, 그에 대한 모든 문서와 기념비는 지워져야 한다. 보르자를 그린 모든 그림은 검게 덧칠되어야 한다. 보르자 가문이 묻힌 모든 무덤을 파헤쳐, 그 시신들을 그들의 조국, 스페인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32] 그 유명한 테르시오를 창안해 내고 이탈리아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박살낸 굉장히 유명한 명장이다. 전부터 체사레와 친하게 지냈기에 체사레는 그를 믿고 있었던 모양. 그러나 이미 코르도바는 그를 체포하라는 황제의 밀명을 받은 상황이었다. [33] 결국 1512년 나바라 영토 중 남부 2/3는 스페인에게 합병당하고 나머지 1/3의 영토만 가진 소국으로 전락했다가 1589년 나바라 왕 헨리케 3세가 프랑스 왕 앙리 4세가 되면서 프랑스에 완전 합병되어 소멸한다. [34] 특히 적병들에게 무려 25군데나 찔려 죽었다. [35] 보르자 가문 몰락 후 바티칸의 꽃이라고 불릴 정도였던 루크레치아 보르자에 관해 갑자기 소문이 빠르게 번졌던 것을 생각할 때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36] 즉위하자마자 위의 각주에 달린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데에서 알 수 있지만, 알렉산데르 6세와 보르자 가문을 증오하다 못해 혐오한 율리오 2세는 알렉산데르 6세를 가까이에서 섬긴 시종들을 체포해 고문, 그의 기독교 수장으로서의 잘못(성직 매매나 족벌주의 등)을 실제보다 크게 부풀린 자백을 받아냈으며 알렉산데르 6세가 한 적도 없는 암살이나 독살그리고 삥뜯기에 대한 자백마저 받아냈다. [37] 베네치아 공화국 고관에게 시집가는 아가씨를 신행길에 납치 강간하고 자기 첩으로 삼았다. 해당 여성은 체사레가 율리오 2세에게 체포될 때까지 체사레에게 붙잡혀있다가 체사레 몰락 후에 원래 시집가기로 되어있던 남편에게 반환되어 결혼했다고. [38] 후원자 없이 실업자 신세였던 다빈치가 제 발로 찾아와 "당신을 위해 제 재능을 바치고 싶습니다."했던 것. 비범한 인물은 비범한 인물을 알아보는 것인지 체사레는 머지않아 다빈치를 "나의 아르키메데스"라고 높이 평가했고, 자신의 영토 내에 지어지고 있거나 지어질 예정인 건축물을 감독하려는 목적이라면 어디든 마음대로 다녀도 된다는 허가증을 써주기까지 했다. [39] 현재나 다른 나라 출신 교황이 나오는 거지, 당시만 해도 교황 이탈리아 출신이 대부분이었다. 원래 교황은 로마 총대주교니까. 베네딕토 16세까지 265명인 교황 가운데 로마 출신만 해도 108명이고, 이탈리아 출신만 해도 81명으로 70%를 넘는다. 가톨릭 역사, 특히 교황의 권한이 강해진 중세 이후 역사에서는 비(非) 이탈리아계 교황은 아비뇽 유수기( 프랑스 출신 7명, 대립교황 제외)를 제외하고는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로 극소수다. 아비뇽 유수 이후 교회가 통합되자 스페인 출신의 알렉산데르 6세 (1492년 ~ 1503년) 이후 20세기까지 비(非) 이탈리아 교황 네덜란드 출신 하드리아노 6세 (1522년 ~ 1523년) 단 1명 뿐이었고, 그나마도 1년을 재임했다. 이런 관행을 깨고 정말 파천황적으로 등극한 게 1978년 즉위한 폴란드 출신 요한 바오로 2세다. 비(非) 이탈리아인으로는 500년, 동유럽 출신 교황으로 따지면 달마티아(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의 카이오 교황 (283년 ~ 296년), 요한 4세 (640년 ~ 642년)을 제외하곤 최초다. [40] 이탈리아를 교황령 중심으로 통일하려 하기는 했지만, 그 방법이라는 것이 당장 보이는 적을 쓰러뜨리기 위해 다른 세력과 손을 잡고 이 세력이 강대해져 눈앞의 적이 되니 다시 다른 세력을 끌어들이는 줄타기 외교에 불과했다. 이 과정에서 교황령 자체의 군사력을 키우려는 노력은 거의 기울이지 않았으니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며, 심지어 이 과정에서 스페인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스페인 출신의 교황 알렉산데르 6세도 인정하지 않은 스페인의 남부 이탈리아 영유를 인정하는 병크까지 저질렀다. 결국에는 스페인을 몰아내기 위해 끌어들인 신성로마제국이 스페인과 싸우기는커녕 결혼동맹을 맺으면서 교황령의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꿈은 완전히 붕괴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위대한 업적은 커녕 업적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율리우스 2세가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상의 전임 교황인 알렉산데르 6세가 워낙에 악명 높은 탓이다. [41]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원소라는 인간군상으로 비교한다면 정사 쪽보다는 연의에서 표현되는 치졸하고 소인배 기질을 가진 원소 쪽에 가깝다고 할 수있다. 삼국지 정사의 원소는 정치적 면모나 군사적인 면에서는 체사레와 감히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죽어서도 하북의 백성들은 물론 한나라 안에서 칭송받을 정도였다. [42] 참고로 뒤러는 자신이 예수와 닮았다는 점을 이용해서, 자신의 모습을 부각시켜서 나타낸 자화상을 그린 바 있다. 그래서 그는 서구권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자화상을 그린 최초의 인물이다. [43] 순백의 피오렌티나에선 루크레치아 보르지아가 남주인공인 알폰소가 오빠와 닮았다고 언급했을 뿐 직접 등장하진 않았다. 시대적으로 그로부터 몇 년 후 사망했기 때문이다. [44] 체자레 보르지아가 본편에 등장하는 건 아니고, 배경만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이고 주인공이 남장 여자인 체자레인데, 자기 이름을 밝히자 어떤 사람이 "혹시 체자레 보르지아 아니냐?"고 묻자 아주 정색하며 "아뇨, 피렌체 사람이오."라고 답한다. 참고로 로마냐 전역을 정복한 체사레가 다음 목표로 노렸던 곳이 피렌체였고 마키아벨리는 체사레라는 놈이 언제쯤 쳐들어올 것인가를 사전에 탐지할 목적으로 체사레와 붙어지냈던(?) 것이기에, 충분히 정색할 만 하다. [45] 작중 묘사에 따르면 로드리고와 체사레 부자는 스파다 추기경을 연회에 초대해 독살하는 식으로 처리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스파다 추기경도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니라 "교황이 부르는 대로 가면 나는 틀림없이 죽을 것이다. 하지만 교황이 부르는데 추기경으로서 안 갈 수도 없고, 설령 이번엔 안 가더라도 어떻게든 나를 죽여버리고 재산을 빼앗겠지? 어차피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내 한 목숨은 버리고, 내 가문의 재산은 잘 숨겨서 조카에게 넘기자."라고 판단했는데, 연회에 가 보니 보르자 부자가 선수를 쳐서 조카까지 이미 연회에 불렀던 것이다. 결국 추기경과 조카는 이 연회에서 독살당하고 말았다. 그나마 조카에겐 처자식이 있어서 가문 대가 이대로 끊기지는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