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E0DEA1><colcolor=#000000> 제16대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 Richard Neville, 16th Earl of Warwic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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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리처드 네빌 Richard Neville |
출생 | 1428년 11월 22일 |
사망 | 1471년 4월 14일 (향년 42세) |
잉글랜드 왕국 하트퍼드셔 바넷 | |
배우자 | 제16대 워릭 여백작 앤 보챔프 (1436년 결혼) |
자녀 | 이사벨[1], 앤 |
아버지 | 제5대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 네빌 |
어머니 |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 앨리스 몬타구 |
형제 | 조앤, 세실리, 토머스, 앨리스, 존, 조지, 앨리노어, 캐서린, 마거릿 |
직위 | 워릭 백작, 솔즈베리 백작, 몬타구 남작, 몬터머 남작, 가터 기사단 단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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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제16대 워릭 백작이자 제6대 솔즈베리 백작.장미 전쟁에서 요크 왕조와 랭커스터 왕조 지지를 오가며 헨리 6세와 에드워드 4세 두 왕의 운명에 큰 영향을 미친 권신이었다. 별명인 킹메이커(Kingmaker)로 후세에 알려졌다.
2. 배경
네빌 가문은 당시 잉글랜드 북부에서 가장 유력한 귀족 가문 중 하나였다. 헨리 핫스퍼나 그 아버지 초대 노섬벌랜드 백작 등 잉글랜드 북부의 대귀족 퍼시 가문이 자주 반란을 일으키자 랭커스터 왕조의 국왕들은 네빌 가문에게 작위와 영지를 선사하여 퍼시 가문을 견제하고자 했다. 핫스퍼의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랄프 네빌은 헨리 4세에 의해 퍼시 가문과 동격인 백작위와 서부 변경의 관리자(Warden of the West March) 직위를 획득했고, 곤트의 존의 딸이자 헨리 4세의 이복동생인 조앤 보퍼트와 재혼하며 잉글랜드 권력의 중심에 다가서게 되었다.네빌 가문의 재산과 영지는 야심찬 정략 결혼을 거듭하면서 점점 불어났다. 랄프 네빌이 조앤 보퍼트에게서 얻은 첫 아들인 리처드 네빌은 랄프의 전처 마거릿 스태퍼드의 자손들에 밀려 웨스트모어랜드 백작위는 얻지 못했지만, 랄프의 유언을 통해 네빌 가문의 재산 대부분을 상속받았다. 또한 리처드 네빌은 토머스 몬타구의 외동딸이자 제5대 솔즈베리 여백작인 앨리스 몬타구와 결혼하여 솔즈베리 백작이 되었다. 결혼으로 얻은 재산 자체가 크지는 않았지만 리처드는 보다 남쪽에 위치한 거점과 더 높은 작위를 얻을 수 있었다. 솔즈베리 백작 리처드의 아들이자 이후 '킹메이커'로 불리게 될 리처드 네빌은 백작위와 네빌 가문의 거대한 영지의 상속자로 태어났다.
3. 생애
3.1. 결혼과 작위 상속
그의 탄생지 등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리처드는 1436년 8살의 나이로 워릭 백작 리처드 뷰챔프의 딸 앤 뷰챔프와 결혼했고, 리처드 뷰챔프의 아들 제14대 워릭 백작 헨리 뷰챔프와 그 딸이 사망하면서 제16대 워릭 백작이 되었다. 워릭 백작령과 더불어 앤 뷰챔프의 어머니 이사벨 르 데스펜서가 물려받은 데스펜서 영지 또한 리처드에게 돌아갔다. 리처드 뷰챔프의 다른 딸과 결혼한 서머싯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의 상속 분쟁이 있기도 했지만 리처드는 어린 나이에 잉글랜드의 유력 귀족 중 하나가 되었다.3.2. 랭커스터파에 대한 승리
헨리 6세의 보퍼트 가문의 측근들에 대한 저항을 주도한 요크 공작 요크의 리처드는 워릭 백작의 고모 세실리 네빌과 결혼한 그의 고모부였다. 워릭 백작과 그의 아버지 솔즈베리 백작은 랭커스터 왕조와도 친분이 있었고, 1452년 요크의 리처드가 처음으로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헨리 6세의 편에 서며 요크 왕조와 대적했다. 하지만 헨리 6세 치하에서 서머셋 공작 에드먼드 보퍼트와의 분쟁이 불리하게 돌아가면서, 워릭 백작과 솔즈베리 백작은 점점 요크 왕조의 편으로 돌아섰다. 보퍼트 가문과의 분쟁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북부에서 퍼시 가문과의 갈등이 격화된 것도 이러한 흐름에 영향을 미쳤다.1454년 헨리 6세의 첫 번째 발작 이후 워릭 백작과 솔즈베리 백작은 요크의 리처드를 호국경으로 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서머셋 공작을 쫓아냈다. 하지만 1455년 헨리 6세는 회복하여 요크의 리처드를 내쫓고 서머셋 공작을 다시 불러들였다. 이에 불만을 가진 요크의 리처드와 워릭 백작, 솔즈베리 백작은 영지로 돌아가 군대를 소집하였고, 제1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로 알려진 무력 충돌에서 두 번째 발작을 일으킨 헨리 6세를 사로잡고 서머셋 공작, 노섬벌랜드 백작 등을 죽인 뒤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 1456년 헨리 6세는 다시 회복한 뒤 요크파와의 화해를 시도했다. 이 시점에서 랭커스터와 요크간 갈등의 평화적인 해결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워릭 백작은 이 과정에서 칼레 주둔 잉글랜드군 사령관이라는 요직을 따냈고 이후 장미 전쟁의 진행 과정에서 큰 이익을 보게 되었다. 워릭 백작은 아버지 솔즈베리 백작을 대신해서 점점 요크의 리처드의 핵심 조언자가 되기 시작했다.
헨리 6세의 왕비 앙주의 마르그리트는 워릭 백작을 경계하여 보급을 끊는 등, 견제했다. 이에 대항하여 워릭 백작은 잉글랜드 해협에서 활발한 해적 활동을 펼쳤다. 1459년 워릭 백작은 병력 일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요크의 리처드, 솔즈베리 백작과 합류하고 정권 장악을 노렸지만 대부분의 요크파 병력은 왕과 직접 칼을 맞댈 준비가 되지 않았고 러드퍼드 다리에서 제대로 된 싸움도 하지 못하고 흩어졌다. 요크의 리처드와 그의 둘째아들 러틀랜드 백작 에드먼드는 아일랜드로, 워릭과 솔즈베리 및 요크의 리처드의 맏아들 마치 백작 에드워드는 칼레로 피신했다. 랭커스터파는 제3대 서머셋 공작 헨리 보퍼트를 칼레 사령관으로 임명하려 했지만 워릭 백작은 주둔군의 지지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1460년 워릭 백작은 솔즈베리, 마치 백작과 함께 잉글랜드 샌드위치에 상륙해 런던을 점령했다. 워릭 백작이 지휘한 요크파 군대는 7월 10일 노샘프턴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헨리 6세를 생포했다. 하지만 10월 런던에 입성한 요크의 리처드가 왕좌에 손을 대고 왕위를 주장하자 요크파를 직접적으로 적대하지 않던 귀족들마저도 이를 거부했다. 워릭 백작과 솔즈베리 백작은 요크의 리처드와 귀족들을 설득하여 요크의 리처드가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대신 헨리 6세의 후계자가 되고 호국경으로서 국정을 맡는 타협안을 마련했다. 이후 요크의 리처드와 솔즈베리 백작은 잉글랜드 북부의 랭커스터파 군대를 상대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지만 12월 30일 웨이크필드 전투에서 대패하고 사망했다.
요크파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된 워릭 백작은 군대를 이끌고 북상했지만 제2차 세인트 올번스 전투에서 패했다. 하지만 워릭 백작은 무사히 후퇴하여 웨일스에서 랭커스터파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마치의 에드워드와 합류했고, 요크파를 지지했던 런던에 입성하여 마치의 에드워드를 에드워드 4세로 즉위시켰다. 요크파가 랭커스터파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둔 타우턴 전투에서는 전투 직전 다리 부상을 입어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이후 워릭 백작은 잉글랜드 북부의 랭커스터파를 진압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3.3. 에드워드 4세와의 갈등
에드워드 4세의 즉위 직후 워릭 백작은 권력의 정점에 섰다. 아버지에 이어 1462년 어머니 앨리스 몬타구까지 사망하면서 워릭 백작은 친가와 외가의 모든 재산을 상속받았다. 워릭 백작의 동생인 존 네빌은 퍼시 가문을 대신해서 노섬벌랜드 백작위를, 엑서터 주교 조지 네빌은 재상(chancellor) 자리과 요크 대주교직을 받는 등 승승장구했다.워릭 백작은 노섬벌랜드의 랭커스터파 잔당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및 스코틀랜드와의 외교적 협상의 도움을 받았고, 에드워드 4세를 프랑스 왕 루이 11세의 아내의 누이인 사보이의 보나 공녀와 결혼시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자 했다. 하지만 에드워드 4세는 워릭 백작에게 비밀로 부유한 과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한 상태였다. 워릭 백작은 계획을 수습하고자 큰 곤욕을 치렀고, 특히 자신에게 결혼 건을 숨겼다는 사실 때문에 에드워드 4세를 점점 불신하게 되었다. 또한 에드워드 4세는 우드빌 친족들을 대거 등용하여 워릭 백작과 네빌 가문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에드워드 4세의 누이 마거릿의 혼인 문제에서 워릭 백작은 프랑스와의 동맹을 선호한 반면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리처드 우드빌은 부르고뉴국과의 동맹을 주장했고, 에드워드 4세는 우드빌의 손을 들어 주며 마거릿을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 혼인시켰다. 조지 네빌이 재상 자리에서 해임되고 에드워드 4세가 워릭 백작의 딸 이사벨과 조지 플랜태저넷의 혼인을 불허하는 등 워릭 백작이 왕의 신임을 잃었음이 점점 분명해졌다.
에드워드 4세에 대항하기 위해 워릭 백작이 처음 세운 계획은 왕의 동생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을 새로운 왕으로 세우는 것이었다. 1469년 조지 플랜태저넷은 에드워드 4세의 허락 없이 이사벨 네빌과 결혼했다. 워릭 백작은 잉글랜드 북부에서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북부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의 시선을 돌린 뒤 잉글랜드 남부를 침공할 수 있었다. 1469년 7월 에지코트 전투에서 워릭 백작의 지지자들은 국왕파 펨브로크 백작과 데본 백작에게 승리했고, 워릭 백작은 에드워드 4세를 사로잡아 자신의 본거지인 워릭 성 및 미들햄 성에 차례로 감금했다. 하지만 왕의 지지자들은 워릭과 클래런스에게 전혀 호응하지 않았고, 기회를 감지한 랭커스터파 세력이 준동하기 시작하자 워릭 백작은 어쩔 수 없이 왕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다. 풀려난 에드워드 4세는 헨리 퍼시에게 워릭의 동생 존 네빌이 받았던 노섬벌랜드 백작위를 돌려주었다. 1470년 워릭 백작은 클래런스 공작과 함께 프랑스로 망명했다.
루이 11세는 랭커스터파의 수장 마거릿 왕비와 워릭 백작이 화해하도록 주선했다. 워릭의 딸 앤 네빌이 마거릿의 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약혼했다. 워릭 백작은 다시 잉글랜드 북부에 반란을 일으켜 에드워드 4세를 유인했고, 워릭과 클래런스가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남쪽을 공격하는 동시에 북쪽에서는 워릭의 동생 존 네빌이 결정적인 순간에 에드워드 4세를 배신했다. 포위당한 에드워드 4세는 막내동생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함께 부르고뉴국으로 망명했다. 헨리 6세가 복위되었고 워릭 백작은 랭커스터 정권에서 다시 권력자가 되었다.
3.4. 패배와 죽음
루이 11세는 랭커스터파 잉글랜드 정권과 함께 부르고뉴 침공을 계획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은 에드워드 4세에게 병력을 지원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하게 했다. 1471년 3월 14일 요크셔에 상륙한 에드워드 4세는 노섬벌랜드 백작 헨리 퍼시의 방조를 기회로 윌리엄 헤이스팅스 등 지지 세력을 결집해 나갔다. 워릭 백작은 클래런스 공작과 합류하여 에드워드에 맞서고자 했지만 랭커스터 정권에서 입지가 좁아진 클래런스 공작은 워릭 백작을 배신하고 에드워드 4세에게 다시 합류했다. 4월 짙은 안개 속에서 펼쳐진 바넷 전투에서 랭커스터 군대는 아군을 공격하며 혼란에 빠졌고, 에드워드 4세의 요크파 군대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워릭 백작과 그 동생 존 네빌은 이 전투에서 사망했다.4. 사후
바넷 전투와 같은 날 마르그리트 왕비가 이끄는 랭커스터파 군대가 잉글랜드에 상륙했지만, 튜크스베리 전투에서 에드워드 4세에게 패하고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랭커스터파 주요 귀족들이 살해당했다. 이후 에드워드 4세의 왕위는 그가 죽을 때까지 위협받지 않았다.워릭 백작이 남긴 막대한 유산은 두 딸들인 이사벨 네빌과 앤 네빌에게 나뉘어 상속되었다. 헨리 6세의 외아들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와 결혼했던 차녀 앤 네빌은 에드워드 4세의 동생인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와 재혼했다. 이사벨의 남편이자 리처드의 형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는 워릭의 유산을 나눠가져야 하는 것에 거세게 반발했지만, 리처드는 솔즈베리 백작령, 워릭 백작령 등 남부 영지와 왕실의 시종장(Great Chamberlain) 자리를 조지에게 양보하면서 겨우 결혼할 수 있었다. 대신 워릭 백작의 잉글랜드 북부 거점인 요크셔의 미들햄 성은 그대로 리처드와 그 가족의 거점이 되었다. 워릭 백작의 유산은 리처드가 잉글랜드 북부에서 대귀족이자 왕의 대리인으로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북부인들의 지지를 받는 데 영향을 미쳤다.
한편 리처드 네빌이 죽을 당시 살아 있었던 그의 아내 앤 보챔프는 사위들인 클래런스 공작 조지와 리처드 3세의 등쌀에 버티지 못하고 보통 영주의 미망인이 받는 권리를 대부분 빼앗겼다. 심지어 1474년에는 아직 죽지도 않았는데 사위들의 분쟁을 끝내기 위해 법적으로 죽은 사람으로 취급되어 유산이 딸들에게 분배되는 박한 대우를 받았다. 둘째 사위 리처드 3세가 죽은 뒤 앤 보챔프는 헨리 7세에게 영지를 돌려달라고 탄원했지만 헨리 7세는 그 중 일부만을 돌려주고 나머지는 자신이 차지했다.
이후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가 에드워드 4세의 사후 그의 자식들을 전부 사생아로 격하시키고, 자신이 리처드 3세로서 왕위에 오르면서 워릭 백작의 차녀 앤 네빌도 함께 왕비가 되었다. 하지만 리처드와 앤의 외아들로 왕세자인 웨일스 공이 된 미들햄의 에드워드는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왕이 되지 못했다.
1478년 맏사위 클래런스 공작 조지가 에드워드 4세에게 처형당했을 때 클래런스 공작의 아들 에드워드가 워릭 백작위를 물려받았고, 솔즈베리 백작위는 리처드 3세의 아들 미들햄의 에드워드에게 돌아갔다. 미들햄의 에드워드가 죽은 뒤 솔즈베리 백작위는 왕실로 반환되었다가 조지의 딸 마거릿 폴에게 내려졌다. 워릭 백작 에드워드는 리처드 3세의 죽음 이후 플랜태저넷 왕조의 마지막 남계 후손이었고, 헨리 7세에 의해 줄곧 런던탑에 갇혀 있다가 퍼킨 워벡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5. 가족 관계
5.1.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녀 |
클래런스 공작부인 이사벨 네빌 (Isabel Neville, Duchess of Clarence) |
1451년 9월 5일 | 1476년 12월 22일 |
클래런스 공작 조지 플랜태저넷 슬하 1남 1녀[2] |
2녀 |
잉글랜드의 왕비 앤 (Anne, Queen of England) |
1456년 6월 11일 | 1485년 3월 16일 |
웨일스 공 웨스트민스터의 에드워드 |
리처드 3세 슬하 1남[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