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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자이언츠/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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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역사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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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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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 19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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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단 역대 선수 | 프랜차이즈 스타 | 역대 등번호 | 역대 필승조
영구 결번 11 최동원 | 10 이대호
기타 역대 기록 | 역대 트레이드 | 역대 신인드래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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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1970년대3. 1980년대4. 1990년대5. 2000년대6. 2010년대7. 2020년대8. 기타 역사9. 여담

1. 개요

롯데 자이언츠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이다.

2. 1970년대

2.1. 롯데 자이언트, 실업 야구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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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 창단 이전 롯데 자이언츠의 근본인 실업 야구에서의 롯데 자이언트 시절로 약체로 평가받는 KBO 리그에서의 롯데와 달리 강팀이였다.

2.1.1. 1975년

1975년 3월 11일, 롯데제과가 야구단 창단 계획을 대한야구협회에 알려 왔다. 일각에서는 실업야구 창단 추진을 신격호 사장이 했다고 하는데 사실과 다르다. 신격호는 실업야구단의 프로 구단 전환과 연고지에 대해서만 찬성했을 뿐이다. 그래도 실업야구단 창단 자체는 찬성했을 것이며, 당시 롯데는 이미 일본프로야구 롯데 오리온즈를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실업야구단을 손쉽게 창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팀에도 일본의 야구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왔다.

1975년 5월 6일 서울에서 창단식을 가지고 5월 20일 등록을 마침으로써, 대한야구협회에 10번째로 가입했다. 창단 감독은 빨간 장갑의 마술사 김동엽.

실업 팀임에도 프로 팀을 지향하는 차원에서 팀 이름도 롯데 자이언트라 짓고, 일본 전지 훈련에, 자매 팀인 일본 롯데 오리온즈(현 치바 롯데 마린즈) 초청이나 국내 최초의 여성 치어리더 응원단을 만드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지원을 했다.
파일:attachment/lotteangles1975.png
롯데 자이언트의 응원단 롯데 엔젤스(Lotte Angels)

1975년 7월 2일 선수단 구성을 완료했는데 이중 일본 출신의 재일교포 선수가 4명이나 된 것이 특이한 점이다. 닛폰햄 파이터즈 언더핸드 스로였던 주동식 주니치 드래곤즈의 백업 포수였던 카나야마(金山), 일본 사회인야구 도시 대항전 팀인 '사이노(西農) 운수'의 에이스 김호선, '산쿄정기(三協精機)'의 외야수 호시야마(星山)이 그들이었다. 그런데 일이 틀어졌는지 주동식 김호선 롯데에 입단하는 대신 일본프로야구에서 계속 선수 생활을 했다.

1975년 9월 20일에 실업야구 최초로 공개 테스트를 진행, # 광주진흥고의 박창수(투수), 대건고 박홍석(내야수), 전남고 조국현(내야수), 경동고 민경수(내야수), 선린상고 이수희(내야수) 등 5명을 뽑기도 했다.

또한 신생 팀에 대한 특혜로 1976년에는 대학 졸업생 유망주를 싹쓸이하며 팀 전력을 꾸리기 시작해 당시 실업 팀들 중 최강의 멤버를 자랑했다.
1975년 롯데 자이언트 원년 멤버
단장 신준호
부장 이영종
감독 김동엽
투수 계형철
( 성균관대학교)
남우식
( 한양대학교)
김홍곤
( 연세대학교)
양한철
( 동국대학교)
주동식
( 재일교포)
김호선
( 재일교포)
포수 송종창
( 부산고등학교)
손상대
( 한양대학교)
카나야마
( 재일교포)
박창수
( 광주진흥고)
내야수 김정수
( 한양대학교)
천보성
( 한양대학교)
윤병선
( 건국대학교)
황기화
( 건국대학교)
김인식
( 성균관대학교)
박홍석
( 대건고등학교)
조국현
( 전남고등학교)
민경수
( 경동고등학교)
차영화 -
외야수 김성관
( 고려대학교)
정현발
( 한양대학교)
호시야마
( 재일교포)
이수찬
( 선린상업고등학교)

2.1.2. 1976년

1976년 한 해 동안 거둔 총 전적은 31경기 19승 4무 8패였다.[1] 춘계리그 3위, 하계리그/추계리그 우승, 부산시장기 4강의 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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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 1977년

1977년 한 해 동안 거둔 성적은 61경기 38승 5무 18패를 기록했다. 부산시장기 준우승, 전기 2차 2위, 백호기 4강, 후기 1차 우승, 후기 2차 우승 등의 기록을 세웠지만 유독 플레이오프에서 약해 전기 통합 플레이오프 1승 2패로 탈락, 후기 1차 결승리그 1승 2패 탈락, 후기 2차 결승리그 1승 1무 1패를 기록하며 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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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 1978년

1978년은 조금 주춤했던 해다. 20승 3무 22패를 기록, 전기리그엔 8위였지만 후기리그엔 우승을 차지 코리안시리즈에도 진출했다. 하지만 아쉽게 4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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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 1979년

1979년은 다이나믹했다. 21승 16패를 기록했고 1차리그 준우승[2], 서라벌기 준우승, 그리고 코리안시리즈 우승까지 시작은 미미했지만 끝은 창대했던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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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980년대

3.1. 실업 야구의 마무리

3.1.1. 1980년

실업 시절 최악의 성적을 기록한다. 11승 24패 1무. 백호기 준우승을 제외하곤 부산시장기, 서라벌기 예선 탈락을 기록했고 정규 리그에서 승률이 50% 이상이 된 적이 전기 4차리그(2승 2패)와 후기 4차(2승 1무 1패)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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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 1981년

1981년에는 다승왕, 최우수 신인 투수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최동원(206이닝 17승 4패)[3]과 타격왕 허규옥(108타수 42안타 .389), 그리고 도루왕을 차지한 이해창(23도루)의 맹활약이 돋보인 시즌이었다.

특히나 계약금 3000만 원으로 당시 최고 금액을 받고 입단한 최동원에게 엄청난 기대를 할 수밖에 없었고 최동원은 그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팀이 기록한 36경기 324이닝 중 206이닝을 소화하며 17승 4패를 기록했고 탈삼진도 무려 173개를 기록해 1위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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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1. 프로 전환
프로야구와 관련된 떡밥들이 실업야구 창단과 더불어 나왔으나 이것이 본격적으로 공론화되기 시작한 건 1979년 신격호의 "한국프로야구 추진 계획"이 시작이었다. 당시 기사

1982년 2월 12일 프로야구단으로 전환하며 연고지를 부산으로 정했다. 아무래도 옆 나라 자이언츠를 모티브로 한 만큼 수도 연고를 원하기는 했으나, 옆 나라처럼 수도에 연고를 둔 팀의 모기업은 미디어 회사여야 흥행할 수 있다는 MBC의 리그 발전론 측면에서의 주장과 당시 정권 실세가 MBC 사장으로 있던 상황이 겹쳐 서울 연고는 주장하기 어려웠다. 한 때 프로야구 창설 과정에서 동종업계인 해태제과가 프로야구에 참여하자 반대 급부로 서울 연고를 원했으나, 리그 기획과정에서 MBC의 입김이 강했기에 이 안은 애초에 거부당했고, 리그 창설을 주도한 측에서도 럭키금성을 끌어들여 부산 연고팀을 바꿀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서 서울 연고는 최종적으로 포기하게 된다.

참고로 프로 팀 롯데 자이언츠 창단 감독인 박영길은 실업 팀 롯데 자이언츠 마지막 감독으로, 감독 뿐만 아니라 당시 실업 팀 구단 관계자들은 그대로 프로 팀으로 자리를 옮겨갔다고. 단, 선수는 연고지 원칙 때문에 프로 롯데에 계승되지 않고 대부분 각자 자기 연고지의 프로 팀으로 갔다. 다만 1982년에는 세계 (아마추어)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협회가 일부 우수 선수의 프로 전향을 막았고, 이 선수들 역시 다른 실업 팀으로 이적했다. 이 선수들은 대부분 대회가 끝나고 프로로 전향했다. 특히 부산/경남 지역이 연고지인 최동원은 프로로 전향하면서 다시 롯데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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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2월 12일,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에서 박영길 실업 롯데 감독을 사령탑으로 김용희, 노상수, 김성관 등을 주축으로 한 22명으로 선수단을 구성하여 6개 구단 가운데 가장 늦게 창단식을 거행했다.

창단 당시 선수단 명단으로는 코치 김명성, 최주억, 투수는 김덕열, 김문희, 노상수, 방기만, 이윤섭, 이진우, 천창호, 최옥규, 포수 차동열, 최순하, 내야수 권두조, 김용철, 김용희, 김일환, 김정수, 이성득, 정학수, 외야수는 김성관, 김재상, 박용성, 엄태섭, 정문섭이었다.

3.2. 한국프로야구 첫해

3.2.1. 198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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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시즌 전 대다수의 전문가들는 롯데를 중위권 전력으로 점쳤다. 비록 마운드는 약하지만, 김용희, 김용철, 박용성, 김성관, 김정수 등으로 구성된 타선은 어느 팀에게도 뒤지지 않는 화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일단 시즌 출발은 좋았다. 1982년, 해태와의 개막전에서 14:2로 대승을 거두고, OB, 삼미를 잇달아 꺾으며 3연승을 내달렸다. 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승리보다 패배하는 일이 더 익숙해지면서 이 해 0.388[4]의 승률로 최종 순위 5위에 그쳤다.

3.3. 최동원 시대

3.3.1. 198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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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에는 믿었던 최동원이 9승 16패로 부진하며 종합순위 꼴찌로 추락했다. 결국 시즌 도중 성적 부진에 대한 책임으로 박영길 감독이 물러나고, 강병철 감독대행이 지휘봉을 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락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3.3.2. 1984 시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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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우승 당시 모습
1984년에는 삼성의 져주기 논란이 있었고 이에 어부지리로 롯데가 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다. 삼성은 상대적으로 쉬워보이던 롯데를 한국시리즈 파트너로 골라놓고 자신만만 했지만, 최동원의 전설로 남은 대활약으로 (7경기 중에 5경기에 출전했다) 한국시리즈에서 4승 3패로 창단 첫 우승을 거두었다.

3.3.3. 198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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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전에서 최동원을 내세우고도 삼미 슈퍼스타즈에게 패하는 등[5] 전기리그 성적이 27승 28패로 별로 좋지 못했고,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후기리그 1위를 노리며 삼성 라이온즈를 맹추격했지만, 결국 후기리그 2위에 그쳤다. 결국 삼성이 전/후기리그 모두 1위를 함으로써 롯데는 준우승을 하였다.[6] 최동원이 1985년에도 변함없는 위용을 뽐내며 2년 연속 20승을 거둔게 위안이었다.

3.3.4. 198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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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리그는 30승 20패 4무로 순위는 3위였지만 나름 승률이 괜찮아 후기리그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으나, 후기리그는 전기리그 성적을 그대로 뒤집은 듯 20승 32패 2무로 고꾸라졌다. 덤으로 3년 연속 20승을 노리던 최동원은 마지막 경기였던 OB와의 시즌 최종전에서 8회까지 3:1로 앞선채 한 이닝만 막으면 손에 잡히는 대기록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9회말 김형석에게 동점 2점 홈런을 허용한 데 이어 신경식의 3루타와 실책으로 결승점을 내줘 19승에 머물러야 했다.

3.3.5. 198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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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리그와 후기리그 모두 5할 승률을 약간 넘는 3위를 기록하며 최종 통합순위도 3위를 기록했다. 무엇보다 이 시즌은 아직도 야구팬들에게 회자되는 선동열 vs 최동원의 연장 15회 맞대결이 있었던 해이기도 하다. 5월 16일 사직구장에서 열린 해태전이었으며, 두 선수 모두 15회까지 완투해 2:2 무승부로 경기가 종료되며 결국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그리고 윤학길이 이 시즌 첫 두 자릿수 승리[7]를 거두며 두각을 나타냈다.

3.3.6. 198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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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홍 감독이 새로 부임했으나 정작 에이스 최동원이 소위 90만원 사건으로 회자되는 연봉 협상 마찰로 팀을 이탈하는 대형 악재가 있었고, 최동원이 사라진 롯데 마운드를 지킨 이는 고독한 황태자 윤학길이었다. 이 시즌 윤학길은 18승 10패 3세이브의 기록으로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승왕에 등극하며 단번에 롯데의 에이스로 발돋움했다. 참고로 윤학길은 1989년에도 16승을 올리고 90년대 중반까지 꾸준히 롯데 마운드를 지키며, 은퇴한 1997년까지 구단 최다승인 통산 117승을 거뒀다. 승수보다 더 대단한 것은 100완투[8]를 달성한 것이다. 후기리그부터 최동원이 합류한 덕택에 나름 2위 싸움을 할만큼 선전했으나 결정적인 고비에서 꼴찌 태평양에 더블헤더 포함 3연전 스윕패, 해태에 2연패로 5연패를 당하며 포스트시즌에 실패하게 되었다.

시즌이 끝나고 1988년 11월 23일, 프로야구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롯데와 삼성이 양팀의 에이스인 최동원 김시진의 트레이드를 포함한 여러 대형 트레이드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롯데에서는 최동원, 오명록, 김성현을 삼성으로 보내고, 김시진, 오대석, 허규옥, 전용권을 받았다. 또한 12월 21일에는 김용철, 이문한을 보내고 삼성에서 장효조, 장태수를 받는 트레이드까지 단행되었다. 전력강화 목적보다는 선수협 결성에 적극적이었던 최동원에 대한 보복성 트레이드였기에 지금까지도 롯데는 이 건으로 까이고 있다. 그리고 이로부터 12년 뒤 마해영도 똑같은 사유로 보복 트레이드가 된다. 트레이드 상대팀은 이때도 하필 삼성...

3.4. 첫 꼴지

3.4.1. 198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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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전/후기리그 시절 나름 포스트시즌 진출을 놓고 다퉜던 롯데는, 단일리그제가 도입된 첫 해 시원하게 꼴찌로 말아먹는 모습을 보여 꼴데의 전설 프롤로그를 장식했다. 6위였던 MBC와는 겨우 반게임차로 아깝게(?) 꼴찌를 했다... 윤학길이 무려 250이닝을 던지며 고군분투했지만, 최동원 대신 영입된 김시진은 고작 4승에 그쳤고, 김청수는 무려 15패를 떠안는 모습을 보였다.

4. 1990년대

4.1. 전성기

롯데는 1990년대 4번 포스트시즌 진출을 하였는데, 그 중 한국시리즈에 3번 진출하여 1번의 우승과 2번 준우승을 한 나름대로 강팀의 면모를 보였던 전성기였다. 박정태, 염종석, 주형광, 펠릭스 호세 등의 프랜차이즈 선수가 나왔던 시기이기도 한다.

롯데의 포스트시즌 진출 기록은 구단 창단 이후 총 12번인데, 그 중에 4번이 바로 이때 나온 것이다.

4.1.1. 199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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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특급 신인 박동희 선동열조차 뛰어넘는 역대 최고의 계약금 1억 4천만원에 영입하며 기대를 안겼지만 팀 순위는 전해보다 딱 한계단 올라간 6위에 팀 승률은 전해보다 더 못한 .388에 그쳤다. 박동희는 데뷔전에서 구원등판해 4이닝을 던져 6연속타자 탈삼진 포함 삼진 10개, 패스트볼 최고구속은 155km를 찍는 등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데뷔전 임팩트를 안겨줬다. 그러나 한 시즌동안 무려 사사구를 117개나 허용하는 등 기복이 심한 모습으로 결국 시즌은 10승 7패 7세이브 3.04의 평균자책점이라는 다소 기대에 못미치는 성적으로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무엇보다 이 시즌은 에이스 윤학길의 부진이 매우 컸다. 승운도 따라주지 않아 겨우 3승 12패 4.07의 평균자책점에 그쳤다. 그래도 그 와중에 2승이 완봉승이었다.

4.1.2. 199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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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구단의 창단 첫 우승을 이끌었던 강병철에게 다시 감독직을 맡겼다. 그 전까지 3년간 빙그레 코치로 와신상담한 강병철 감독은 선발 로테이션을 꾸준히 지켜나갔고 야수쪽은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며 리빌딩에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윤학길(17승), 박동희(14승), 김태형(11승), 김청수(10승) 등 4명의 10승대 투수가 탄생했다. 타선에는 기존의 장효조, 김민호, 김응국 등에 신인 박정태, 전준호가 가세하며 짜임새를 갖췼고, 투수쪽에서도 고졸신인 좌완 김태형이 11승으로 인상적인 데뷔를 했다.

시즌 4위로 7년 만에 포스트시즌에 진출했고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1승 1패를 주고받은 뒤 3차전에선 박동희가 연장 13회까지 무려 10과 2/3이닝을 혼자 책임지며 5피안타 1실점 탈삼진 15개를 잡아내는 놀라운 역투를 하며 아직까지 회자되는 희대의 명승부를 펼쳤지만, 결국 무승부에 그쳐 다음날 예정에 없던 4차전을 치러야했다. 4차전은 8회까지 2:3 한점차로 뒤지며 삼성을 추격 가시권에 붙잡아뒀지만, 결국 8회말 7실점으로 빅이닝을 허용하며 2:10으로 맥없이 패하는 바람에 1승 1무 2패로 아깝게 탈락하고 말았다...

4.1.3. 1992 시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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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우승 당시 모습

신인 염종석이 17승을 거두고 평균자책점 1위(2.33)에 오르는 대활약을 펼치며 롯데 출신으로는 현재까지 유일한 신인왕이 됐다. 타선에서는 기관총 타선의 필두인 남두오성이 빛났다. 박정태(0.335), 김민호(0.322), 김응국(0.319), 이종운(0.314) 전준호(0.300) 등 다섯 명의 3할 타자를 배출한 팀 타선은[9] 8개팀 가운데 가장 적은 팀 홈런(85개)을 기록했지만, 팀 타율 0.288[10]을 기록하며 상대 마운드를 무너뜨렸다. 정규시즌 3위로 마감하여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하여,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까지 올라가 빙그레의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상대로 꽤나 드라마틱하게 우승을 차지했다. 페넌트레이스 3위팀이 포스트시즌 관문을 모두 뚫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은 이 시즌 롯데가 KBO 리그 역사상 처음이었다.[11]

공교롭게도 1992년 우승할 때의 감독은 강병철이었으며[12], 두 번 다 안경잡이 에이스 최동원 염종석을 혹사시켜 우승을 차지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우승 다툼에 참가한 것은 1995년, 1999년 단 2번 뿐이다.

4.1.4. 199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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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 한국시리즈 우승의 주축 멤버들이 건재했기에 2년 연속 우승을 노려볼만하다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었지만, 시범경기부터 단 1승도 거두지 못하고 1무 6패로 꼴찌를 하며 불안함의 전조를 보였다. 1차 지명 신인 투수 김경환은 개막하기도 전에 어깨 통증으로 이탈했고, 시즌이 개막하자 전 시즌 팀타율 1위의 타선이었다는게 믿게지 않게 박정태를 제외하곤 하나같이 무기력증에 빠졌다. 어느 정도였냐면 이 시즌 팀 홈런수가 꼴랑 29개에 그쳤을 정도였다. 이 한 시즌 최소 팀 홈런 기록은 KBO 리그가 망하기 전까지 영원히 깨지지 않을, 다른 의미에서의 대기록이다.[13] 그래도 투수진의 분전으로 꾸준히 중위권을 유지했으나, 전해 신인왕 염종석의 동계훈련 부족으로 인한 소포모어 징크스가 매우 뼈아팠다. 한국시리즈 MVP 박동희도 이 시즌 방위복무 탓에 많은 경기를 출전하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이 시즌 롯데에 타격을 입힌 사건은 5월 23일 사직 태평양전에서 박정태가 주루플레이 도중 발목 복합골절이라는 큰 부상을 입고 그대로 시즌아웃 되어버린 것. 당시 .359의 타율로 타격 랭킹 1위를 질주하며 롯데 타선을 홀로 떠받치다시피한 박정태의 이탈이 매우 컸다. 10승 투수 4명을 배출할 정도로 투수진이 분전했음에도 결국 4강싸움에서 조금씩 멀어진 뒤, 시즌이 종료될 때는 빙그레에게 5위마저 내주고 62승 63패 1무의 성적으로 6위에 그치고 말았다. 그나마 윤학길 김상현이 각각 12승에 3점대 평균자책점의 성적으로 선전했으며, 특히 윤형배가 이 시즌 14승 9패 1세이브 2.46의 평균자책점으로 팀의 1선발이자 에이스로 각성한 것, 전준호가 75개의 도루로 도루 신기록을 쓰며 1위에 오른 것, 이 시즌부터 주전급으로 도약한 내야수 김민재와 외야수 김종헌의 발굴이 위안이었다.

시즌이 종료되고 강병철 감독은 그간 누적된 구단과의 마찰로, 부산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결국 롯데와 재계약하지 않고 한화 이글스로 떠나버렸다. 그리고 롯데는 후임으로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인 김용희를 새 감독으로 선임했다.

4.1.5. 199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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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즌은 팀의 주전 선수들 상당수가 방위 복무로 정상적인 시즌을 치르지 못했다. 1선발 윤형배, 신인왕 출신 염종석, 전해 12승투수 김상현 등 전해 10승투수 네명 중 세명이 무더기로 이탈했고, 야수쪽에서도 전 시즌 75도루 신기록을 세운 부동의 톱타자 전준호와 주전 유격수 박계원을 필두로 주전급들이 여럿 빠져나가는 악재가 있었다. 그래서 롯데 구단 내부적으로도 성적보다는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를 많이 주는 것에 포커스를 맞춘 해이기도 했다. 심지어 이 해 캐치프레이즈마저도 '젊은 거인, 싱싱한 롯데'로 정했을 정도.(...) 그로 인해 개막전 선발을 투수로 전업한지 얼마 안되는 신인 강상수에게 맡겼고, 마찬가지로 신인 김종훈을 클린업트리오에 기용했으며, 그제껏 패전처리로만 활용되던 가득염이 무려 162이닝을 던지며 풀타임 선발투수로 활약했을 정도였다. 심지어 연봉 600만원의 연습생 박지철이 개막전 1군 엔트리에 뽑혀 바로 데뷔전을 치렀을 만큼 이당시 롯데의 전력 공백은 매우 심했다. 당시 방위병들은 홈경기에는 출전할 수 있어서 롯데는 홈경기에서만큼은 나름 정예멤버를 가동할 수 있었지만, 이들이 모두 빠지는 원정경기는 정말 답이 안나왔다... 신임 김용희 감독도 홈팀과 원정팀을 따로 나눠 운영해야 할 판이라며 곤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을 정도.

전력 공백을 최소화하고자 일본프로야구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에서 외야수로 활약했던 재일교포 홍순기(일본명 코오노 준키)를 당시로선 엄청난 금액인 연봉 1억 2천만원에 영입해 중심타선을 맡겼지만, 전혀 기대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111의 처참한 타율을 남기며 2군으로 내려간 뒤 다시는 1군에 올라오지 못했다. 선발진을 이끌어줄 것으로 기대한 윤학길도 이 시즌 잔부상에 시달리며 고작 4승에 그치는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나마 김민호가 전해의 부진을 떨치고 다시 부동의 4번타자로 부활했고, 건재한 김응국의 활약에, 공필성이 전반기 내내 3할 이상을 치며 커리어하이를 기록한 덕택에 팀 타선은 어찌어찌 꾸려갈 수 있었다. 커리어의 마지막 불꽃을 태운 한영준과 전해 타격부진을 딛고 다시 반등한 강성우도 나란히 시즌 막판까지 각자 3할을 넘나드는 타율을 기록하며 힘을 보태기도 했다.

그리고 신인 주형광이 11승, 강상수가 7승을 기록하며 선발진의 축을 이뤘고, 전역 후 마무리 투수로 전업한 박동희가 31세이브를 기록하며 뒷문을 든든하게 지켜준 덕택에 이 시즌 롯데는 시즌 중반 잠깐 4위 싸움에 뛰어들만큼 매우 선전했다. 또한 신임 주루코치 조 알바레즈가 강조한 공격적인 베이스러닝이 팀에 잘 녹아들어 이 시기의 롯데가 발빠른 기동력의 팀이라는 이미지를 쌓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결국 시즌은 56승 67패 3무로 마쳤고 순위는 전년도와 똑같이 6위로 마무리했지만, 이 시즌 최하위 후보로 꼽힐만큼 유독 빈약했던 팀 전력을 감안하면 매우 선방했다는 평가였다.

또한 이 시즌 김용희 감독은 자발적으로 사직 홈경기에 한정해 선발투수 예고제를 실시했다. 원정경기는 전력공백이 너무 심해 전략상 실시하기 힘들었지만, 홈경기에서만큼은 부산팬들에 대한 서비스 차원에서 선발투수 예고제를 실시한 것. 선발투수 예고제는 과거 이광환 감독이 OB시절 처음으로 시도했다가 다른 팀의 호응을 받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지만, 이 시즌의 김용희 감독을 비롯해 훗날 젊은 감독들이 릴레이로 동참하기 시작하며 오늘날 선발투수 예고제가 당연한 것으로 자리잡히게 하는데 나름 롯데의 공이 컸다고 할 수 있다.

4.1.6. 199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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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년도의 좋았던 분위기를 고스란히 이어간데다 신인 마해영과 2년차 임수혁마림포를 앞세워 시즌 초부터 꾸준히 상위권에 랭크되었다. 그전까지 롯데는 홈런타자가 없는 소총부대 이미지가 강했으나,[14] 이들이 연일 홈런을 때려내는 빅볼야구로 팀 승리를 이끌자 둘의 성을 딴 마림포라는 별칭이 붙게된 것. 또한 2년여만에 박정태가 부상을 딛고 돌아와 .337의 타율을 찍으며 부활한 것이 화룡점정이었다. 게다가 이 시즌 팀 도루를 무려 220개나 기록할만큼 공격적인 베이스러닝은 이 당시 롯데의 기동력 야구의 위력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이는 지금 현 시점까지도 한 시즌 최다 팀 도루 기록이다. 투수쪽에서도 노장 윤학길이 커리어 마지막 불꽃을 태우며 전해의 부진을 딛고 12승으로 부활했고 주형광 강상수, 가득염 등이 전해의 좋은 활약을 고스란히 이어갔으며, 이 당시 팔꿈치 부상 중이었던 염종석도 홈경기마다 선발 한 자리씩을 맡아 127이닝을 던져 7승 7패 2.98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팀의 상승세에 힘을 보탰다. 시즌 도중 전역한 김상현도 후반기부터 부진한 박동희를 대신해 마무리 투수를 맡아 뒷문을 든든하게 지켰다.

결국 정규시즌은 68승 53패 5무라는 호성적으로 3위를 기록하며 마무리했다. 4위 해태 타이거즈와 4.5게임 차이가 났고, 이 당시엔 3.5게임 이상 차이면 준PO가 안 치러지는 규정 탓에 준 PO는 캔슬되고 PO만 7전 4선승제로 치러졌는데, 그 덕분에 전후무후한 엘꼴라시코 포스트시즌이 치러지게 되었다. 결국 롯데가 객관적인 전력에서 열세라는 평가를 뒤집고 4승 2패로 승리해서 3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였다. 한국시리즈에선 입단 후 어깨 부상으로 얼마전에야 가까스로 데뷔전을 치른 투수 김경환이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불꽃을 태운 덕택에 1위인 OB 베어스를 상대로 3승 2패까지 몰아가는데 성공하였으나... 이후 6, 7차전을 연달아 패하는 바람에 3승 4패로 아쉽게 준우승을 거두었다.[15]

4.1.7. 199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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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년도의 준우승 멤버들이 건재해 이번에야말로 우승을 노리겠다고 캐치프레이즈마저 V3를 박아넣으며 야심차게 시작한 시즌이었지만, 시즌 초부터 투타 밸런스가 엇나가며 힘든 시즌을 치러야 했다. 투수진에선 오직 주형광만이 18승으로 공동 다승왕에 오르며 분전했을 뿐 나머지 선수들은 하나같이 부진을 면치 못했다. 염종석이 지난시즌 종료 후 일찌감치 팔꿈치수술로 시즌아웃된 탓에 나머지 선수들이 잘해줘야 했는데, 믿었던 윤학길은 부상과 노쇄화가 겹치며 고작 3승에 그쳤고,[16] 이 시즌부터 다시 선발투수로 전환한 박동희도 무릎부상에 시달리며 고작 4승에 그쳤다. 기대를 모았던 신인 차명주는 마무리 투수로 낙점받았으나 잇달아 블론세이브를 저지르는 등 매우 부진하면서 선발로 전환했다가, 그나마도 통하질 않아 2군으로 강등되는 등 시즌 성적은 7점대 평균자책점으로 매우 부진했다. 야수쪽에서도 김응국 박정태만이 제몫을 해줬을 뿐, 전준호, 마해영 등 나머지 선수들이 대부분 전해보다 부진했고, 시즌 초 절정의 타격감을 뽐내던 이종운은 다리 골절로 시즌아웃되는 등 악재가 이어졌다.

그래도 어찌어찌 중위권은 유지했으나 결국 시즌 중후반부터 쌍방울이 13연승을 기록하며 막판스퍼트를 내는 바람에 일찌감치 4강과는 멀어졌고 5위 싸움이나 하는 신세가 되었으며[17] 결국 5위로 시즌을 마무리했다. 비록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했지만 전해 준우승을 거둔 성과를 인정받았는지 김용희 감독은 롯데 구단 역사상 최초로 재계약에 성공했다.

4.1.8. 199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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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년도의 불안요소들이 모두 악수로 터져버린 롯데 자이언츠 역사상 최악의 시즌 중 하나. 전 시즌 공동 다승왕 주형광이 현역 입대를 해버려 투수진은 답이 안나왔으며, 그나마 전해에 팀 타선을 캐리했던 박정태 김응국마저 최악의 부진에 빠져버리는 바람에 정말 답이 없는 시즌이었다. 전해까지 선발진의 축을 이룬 윤학길이 노쇠화로 인한 기량저하로 선발투수 보직에서 탈락하고 중간계투를 맡았지만, 고작 4경기만에 12.00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고 2군에 강등되었다가 결국 시즌 도중 은퇴하며 투수진의 구심점이 시즌 도중에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지난 시즌 부진했어도 그래도 어찌어찌 선발진을 지켜주던 박동희는 무릎 부상이 회복되지 않아 시즌 시작부터 아예 개점휴업을 하고 드러누워 있다가 시즌 도중 삼성으로 트레이드되어 팀을 떠났다. 대형 신인투수 손민한도 아마시절부터 누적된 부상으로 인해 고작 1승 3패 1세이브만 찍은 시점에서 개점휴업, 시즌 도중 입단한 또다른 대형신인 문동환에게 마무리 투수를 맡겼지만 고작 2승 5패 8세이브에 그쳤다.

게다가 이 시즌 무슨 일인지 팀내 선수들이 단체로 금전 사기 피해에 연루되는 바람에 팀 분위기마저도 최악이었다. 주형광이 의병 제대를 해서 5월부터 1군에 합류했지만 애초에 동계훈련조차 못하고 몸상태도 좋지 못해 6승 13패 3세이브 5.88의 평균자책점이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팀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나마 2년차 투수인 차명주가 선발과 중간을 오가며 7승을 거두는 등 나름 고군분투했고, 커리어 하이를 찍을 만큼 각성한 투수 박지철과 3루수 박현승만이 제대로 활약했을 뿐, 48승 77패 1무로 50승조차 거두지 못한 채로 꼴찌를 기록했다. 특히 우승팀 해태에겐 1할대 승률인 3승 15패로 상대전적이 특히나 더 처참했다.

다만 LG에게 있어선 결정적인 순간 발목을 잡은게 롯데였는데 7월까진 1무 7패로 자신들의 발판이 되준던 팀이 7월 들어 갑자기 LG에게 7연패를 안겨주었던 것. 결국 그해 LG는 롯데에게 10승 1무 7패로 간신히 우위를 점했지만 7월달 롯데전 7연패의 여파로 정규리그 우승을 달성하지 못했다. 이쯤되면 롯데는 97시즌 해태의 훌륭한 도우미였던 샘.

4.1.9. 199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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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에 최악의 부진을 보였던 박정태 주형광이 완벽하게 부활했고, 문동환이 드디어 아마시절의 위용을 드러내며 12승으로 선발진을 떠받쳤지만 늘 그랬듯이(...) 다른 선수들은 여전히 부진해 시즌 초반부터 꼴찌에서 허덕였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0승 7패 0세이브 4.9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차명주. 실제로 WHIP는 데뷔 이후 제일 낮을만큼 아주 못한건 아니었지만 승운이 절망적으로 안 따라줘 시즌내내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 구단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용병 덕 브래디는 전혀 용병답지 않은 활약에 그치는 등 악재가 이어졌다.[18]

시즌 중반으로 가도 꼴찌에서 헤어나지 못하자 결국 롯데는 김용희 감독을 경질했다. 감독대행으로 당시 투수코치였던 김명성을 선임했고, 김명성이 나름 팀을 잘 추스른 덕택에 후반기에 롯데가 잠깐이나마 4위 자리가 눈에 보인다 싶을만큼 나름 선전했다. 그래도 워낙 전반기에 패를 많이 적립해 놓은 것과 시즌 막판 다시 부진이 겹쳐 결국 50승 72패 4무로 2년 연속 꼴찌를 기록했다. 그리고 시즌 종료 후 김명성은 정식 감독으로 승격했다.

4.1.10. 199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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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즌부터 리그가 양대리그제로 개편되어 드림리그 소속으로 시즌을 맞았다. 2년 연속으로 꼴찌를 했고 전력 강화요인도 그렇게 크지 않아 성적에 대한 전망은 밝지 않았으나, 전력의 불안요소들이 모조리 상수로 터져줘 개막 6연승을 기록하는 등 시즌 내내 드림리그는 물론 전체 승률에서도 1위를 질주하며 승승장구했다. 시즌 마지막 경기인 132번째 경기가 단두대 매치였는데, 바로 10월 8일 두산 베어스와 잠실에서 드림리그 1위 겸 전체승률 1위 자리를 놓고 겨뤘기 때문이다. 이 경기 직전까지 치른 두 팀의 전적은 75승 5무 51패로 동률이였다. 특히 롯데로서는 승리가 간절했는데 창단 이후 단 한번도 해보지 못한 정규리그 1위 자리도 그렇지만, 1위를 해야만 플레이오프에서 상대전적이 열세였던 삼성 라이온즈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19] 그러나 3:3으로 맞선 9회말 강혁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고 패배함으로써 결국 한 끗 차로 드림리그 2위의 성적을 받아들고 썩 내키지 않은 삼성과의 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하지만 1승 3패에서 기적적으로 역전승하게 되었고, 그 이후 한국시리즈에선 힘을 다 뺐는지, 한화 이글스를 상대로 한 한국시리즈에선 1승 4패에 그치며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이나마도 이게 현 시점까지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이다.(...)

참고로 이때 얻은 승률은 0.591로 롯데 창단 이후 현재까지 최고 승률이다. 또한 박정태의 31경기 연속 안타 신기록이 많은 화제성과 함께 주목을 받았다. 새 외국인 선수 펠릭스 호세가 어마어마한 활약으로 롯데팬들을 사로잡았고, 무엇보다 그동안 공갈포 이미지가 강했던 마해영이 .372의 타율과 35홈런 119타점 111득점 출루율 .442로 포텐이 대폭발한 해이기도 하다. 이 시즌 3번타자 박정태-4번타자 호세-5번타자 마해영의 클린업트리오는 롯데 구단 역사상 최고의 클린업트리오라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나마 이에 비견될만한 클린업도 2010년의 홍성흔- 이대호- 카림 가르시아의 홍대갈 트리오 정도 밖에는 없다.

5. 2000년대

5.1. 폭풍전야

5.1.1. 200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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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시작전 롯데는 매직리그로, 삼성은 드림리그로 옮겨졌다.

우선 펠릭스 호세 미국 메이저 리그로 떠나버렸고, 마해영 박정태는 선수협 파동 때문에 훈련 부족으로 1999년에 막강했던 타선이 식어버렸다. 그래도 2000년에 가을야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SK 한화의 부진과[20] 롯데 투수진들의 분전, 양대리그 덕택에 강팀들과의 순위 싸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 시즌 초엔 4할대 승률에 머무르다 중반부터 LG의 하락세로 매직리그 1위를 달리다가 막판 부진과 LG의 연승으로 1위 자리를 내주고 삼성과의 준플레이오프 에서 1승 2패로 PO 진출 실패하였다. 그래도 20세기 마지막 해에 가을야구에 초대를 받아서 나름 훈훈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는가 했지만, 임수혁이 시즌 초 쓰러져 선수생활에 유명을 달리하고 말았다. 매직리그 2위를 기록했지만 드림리그 3위 삼성보다 승률에서 뒤져 3전 2선승제의 준플레이오프를 치렀는데 여기서 1승 2패로 탈락하며 가을야구를 마쳤다. 이때만 해도 암흑기가 올 줄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즌이 끝난 후, 롯데의 향후 운명을 가른 첫 번째 사건이었던 마해영 트레이드가 일어난다. 선수협 활동에 적극적이었던 마해영은 롯데 프런트에게는 눈엣가시같은 존재였고, 결국 2000 시즌 종료 후 김주찬, 이계성을 상대로 트레이드 된다.[21] 인터넷이 아직 보편화되지 않은 시기여서 망정이지 지금 같았으면 가루가 되도록 까일만한 지극히 수지에 맞지 않는 트레이드였다. 뭐가 문제냐면 당시 롯데에서 사실상 유일하게 거포라고 불릴 만한 선수는 마해영 밖에는 없었다는 것이다. 롯데가 창단 이후 처음으로 가져본 3할 30홈런 100타점을 때릴수 있는 이제 막 전성기에 접어든 부동의 4번타자를, 겨우 루키시즌을 마친 발빠른 유망주와 5년차의 그저그런 외야수 백업멤버와 바꿔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삼성으로 간 마해영은 3년 연속 30홈런을 치는 등 삼성에서 3할대의 타율과 111개의 홈런, 300개가 넘는 타점을 기록하면서 중심타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해 줬고, 중심타선의 리더가 없어진 롯데는 이후 이대호가 포텐을 터뜨리기 전까지 중심타선을 꾸리는 데 애를 먹게 된다. 물론 김주찬이 롯데에 와서 잘 해주긴 했지만 확실하게 잠재력이 터진 시점은 2008년부터였고, 그전까지는 그저 빠른 발로 도루만 곧잘 했던것만 빼면 롯데팬들의 뒷목을 잡게 하던 선수였다.

5.2. 1차 암흑기(8888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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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프로야구 사상 최초의 4년 연속 꼴찌, 2년 연속 2할대 성적이 이때 나온 것이다. 참고로 꼴데란 이미지가 만들어진 시기가 바로 이 때다.

5.2.1. 200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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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은 롯데에 있어 너무나도 불운한 해였다. 먼저 전 시즌에 2000년에 1999년 플레이오프에서 활약했던 임수혁이 심장마비 식물인간이 되어 일찌감치 전력 외로 분류되었고, 마해영은 트레이드로 삼성에 이적했으며[22], 주형광도 신인 시절부터 지속됐던 무리한 투구 혹사 탓에 시즌 초 두 경기에 등판한 뒤 시즌 아웃 되어버렸다.

게다가 2001년은 유례 없는 중하위권 팀들의 치열한 순위 싸움이 벌어진 해였는데, 이 치열한 상황에서 악전고투하던 김명성 감독이 시즌 도중 그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7월 24일에 심장마비로 사망하는 사상 유례 없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진다.

삼성 라이온즈 감독 출신으로 당시 수석코치였던 우용득을 감독 대행으로 승격시켜 어떻게든 수습하려 했고, 후반기부터 김주찬이 1번타자 3루수로 톱타자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기 시작해 시즌 막판까지 4강 싸움을 벌였다. 01시즌 출루율 5할을 찍은 호세의 하드캐리를 필두로 팀 타격이 나름 분전했지만, 시즌 막판 마산 구장에서 삼성과 1999년 플레이오프의 악연이 있던 펠릭스 호세가 배영수의 빈볼성 투구를 참다 못해 참교육이라는 드립을 탄생시키는 폭력을 행사해 잔여 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으며 팀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한화는 물론 LG, SK에게마저 역전당해 득실차 +를 기록하고도[23] 4위와 2게임 차이로 아쉽게 8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호세가 출장 정지 먹고 나서 1군에 갓 올라온 선수가 훗날 조선의 4번타자...

그리고,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5.2.2. 200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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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김민재의 FA 이적, 펠릭스 호세의 이중 계약 파동이라는 악재를 맞으며 전력 누수가 발생했다. 특히 호세는 2001년 시즌 후 재계약에 성공하면서 2002년에도 롯데에서 뛰는게 확정됐으나, 휴식을 한다면서 스프링캠프에 제때 합류하지 않다가 갑자기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는 명백히 이중 계약이었고 결국 호세는 프로야구 최초 외국인 선수 영구 제명이라는 중징계 처분을 받게 된다.[24] 물론 KBO와 롯데 구단이 항의를 안 한 건 아니었다. 메이저리그 사무국에 항의 팩스를 몇 번 보냈으나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것. 그 후 2004년에 겨우 투자를 시작한 롯데에선 부상으로 약간 안 좋았던 이시온을 포기하고 호세를 다시 데리고 오는 게 낫지 않나라는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실제로 이 즈음 호세도 롯데 구단을 통해 KBO에서 다시 뛰고 싶다는 의사를 표시했고, 이걸 반영해서 호세 재영입을 강력하게 원했던 롯데 프런트는 다른 외국인 선수는 쳐다보지도 않고 호세만 무조건 영입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영입하려 노력했으나, 당시 KBO가 호세의 영구제명 징계를 풀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훗날 2006년에야 영구제명 징계가 풀려서 롯데로 돌아오긴 했다.

이렇게 전년도의 주축 전력들이 이탈하기 시작하며 롯데는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했고, 대행에서 승격한 우용득 감독은 이러한 상황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다 무려 16연패[25]라는 최악의 성적을 찍고 감독 첫 해 중도 경질되였고 동시에 새롭게 부임한 백인천 감독이 롯데의 7년 암흑기 시대를 열었다.

백인천은 부임하자마자 시즌 포기와 리빌딩을 선언하며 온갖 무리수를 던져댔고, 그 결과 2002년 롯데는 구단 역사상 최악+모든 구단 역사상 뒤에서 3등[26]이라는 찬란한 성적인 35승 1무 97패, 승률 0.265를 내면서 독보적인 최하위를 한다. 7위 한화의 승률인 0.461와도 2할 가까이 차이가 난다. 이 때문에 2002년 시즌은 역대 최악의 승률 인플레를 자랑했다. 아니, 당시에 1위와 7위 한화의 승차보다 7위와 8위 롯데의 승차가 더 벌어졌다. 순위 경쟁이 치열하면 페넌트레이스 1위와 최하위의 승률 차이가 2할도 안 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 바로 전 해에는 한국시리즈 우승 팀과 리그 꼴찌 팀이 1할도 차이 안 났었는데... 참고로 이 때 롯데는 청보 핀토스 시절 허구연 감독의 승률 기록인 0.273을 깼다...

이 해 롯데의 홈 최종전이었던 2002년 10월 19일 한화전의 유료 관중은 겨우 69명이었다.

이 당시 관중 동원이 얼마나 저조했는지를 증명하는 에피소드가 있다. 2002년 9월 14일, 부산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참가국들을 응원하는 시민 서포터즈가 결성되었는데, 원래 주경기장에서 발대식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3만 명 이상의 서포터즈가 모이고 행자부장관, 부산시장, 각국 대사가 참가하는 성대한 행사였다. 롯데는 침체된 프로야구붐을 되살려보겠다는 생각으로 사직야구장으로 장소를 변경하길 요청했고, 행사 이후에 서포터즈가 그대로 공짜 야구 경기를 관람하게 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5년만의 만원 관중 예상이라며 보도자료를 돌렸다. 관련 기사. 그리고 야구장은 오랜만에 사람들로 붐볐는데... # 하지만 그 날 관중 수는 514명. 행사가 끝나고 경기 시작 시간이 되자 귀신 같이 관중들이 다 빠져나가 버린 것이다. # 당시 운영팀장은 "사람들이 돈 받는 줄 알고 다 갔나봐요."라며 씁쓸해 했다. 한마디로 공짜 야구도 소용 없는 지경이었다.

5.2.3. 200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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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에 새 감독이 대놓고 리빌딩을 선언하고 다음 시즌을 제대로 준비하겠다고 했고, 팀도 로고와 유니폼을 간만에 새롭게 일신하는 등 2003년 시범 경기까지는 구단과 팬들도 나름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2002년에 남발했던 무리수의 후폭풍으로 개막 후 13경기 동안 1무 12패를 서막으로 충격적인 시즌이 시작된다. 애초에 백인천의 리빌딩이 성과는 커녕 마이너스밖에 되지 않았던걸 단적으로 보여준 예로, 이 시즌 팀의 4번타자를 은퇴가 얼마 안남은 30대 중반의 노장 박정태에게 맡겼을 정도였다. 그나마 박정태가 혼자 타선에서 사람구실을 하며 고군분투했지만, 설상가상으로 주루플레이도중 큰 부상을 당해 장기간 이탈하게 되어 이 당시 롯데타선은 타점을 올려줄 수 있는 선수가 없는 완벽한 식물타선으로 전락했다. 백인천이 직접 뽑은 용병 보이 로드리게스는 7경기만에 퇴출, 일본인 투수 모리 가즈마는 개막되기도 전에 퇴출되어 용병조차도 없었다.

그나마 긴급히 수혈한 대체용병 페레즈와 이시온이 좋은 활약을 해준 덕택에[27] 5월에는 나름 선전하며 같이 최악의 초반 부진을 겪은 두산 베어스를 누르고 잠시 7위에 올랐으나, 최악의 6, 7월을 보내며 연패일로를 걷게 된다. 2002년부터 시작된 백인천의 온갖 무리수가 시너지 효과를 내기 시작하며 안 좋은 결과들을 쏟아내자, 백인천은 책임은 고사하고 아예 감독직 수행을 거의 포기하고 배째모드로 들어갔다. 결국 후반기 들어 또다시 15연패를 당하는 등 막장으로 치닫자 롯데 구단은 더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8월에 백인천을 해임한다.

대행으로 부임한 김용철이 그나마 팀을 어느 정도 수습하고 승률을 끌어올렸으나 이미 때는 늦어 39승 3무 91패, 승률 3할로 전년도에 이어서 압도적인 꼴찌를 차지했다. 게다가 두 시즌 합쳐서 190패라는 막장 기록까지는 아니어도 188패이기 때문에 거기서 거기고 무엇보다도 두 시즌 연속 90패를 기록했다는 점이 뼈아픈 기억이다. 그리고, 이 해 KIA전 1승 1무 17패[28], 현대전 2승 17패, 삼성전 4승 15패로 3팀한테 합쳐서 고작 7승이라는 충공깽의 상대전적을 기록하였다.[29] 1팀 상대로 7승이라고 해도 썩 잘한 게 아닐 텐데 한국 프로야구 사상 최초로 3년 연속 꼴찌.[30] 거기에다가 관중 수가 2년 연속으로 엄청난 삽을 푸다가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 56호 홈런공을 잡겠다는 부산 야구 팬들의 일념(...)에 사직구장에 갑자기 관중이 많이 몰렸지만 그들로부터 오물 세례를 당하는 굴욕까지 맛봐야 했다. 이승엽의 마지막 타석 때 김용철 감독대행은 1루를 채우기 위해 당시 마운드에 있던 가득염에게 고의사구를 지시했고, 이 장면을 본 관중들은 물병부터 잠자리채는 물론 쓰레기통까지 손에 집히는 물건은 그라운드로 냅다 던져버리고 불까지 질러대는 등(...) 21세기에 다시 볼 수 없을꺼라 여겼던 추태를 부렸다. 경기는 1시간 30분이 넘도록 중단됐고 소요를 진압하기 위해 무려 경찰 병력까지 투입되었을 정도였다. 결국 김용철 감독대행이 그라운드로 불려나와 마운드에서 마이크를 잡고 이승엽을 거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명하며 공개 사과를 하고서야 사태가 다소 진정됐다. #

5.2.4. 200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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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연속으로 꼴찌를 한 후 2004년부터 양상문 체제로 들어서면서 롯데의 본격적인 리빌딩 행보가 시작됐다. 이상목, 정수근을 FA로 영입하며 전력 보강을 꾀했고 이대호, 박기혁, 김주찬 등 어린 선수들을 중용하며 새로운 주축 전력들을 키워내려 애썼다. 시즌 초반 5경기에서 4승 1패로 깜짝 1위를 기록하며 모두를 놀라게 했으나 곧바로 7연패에 빠지며 수직낙하.(...) 마무리 투수로 전업시긴 손민한이 등판 기회가 없어 전반기내내 고작 8세이브에 그쳤을 정도였다. 게다가 이 시즌 양상문이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며 박정태, 박현승, 염종석 등의 노장선수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모습을 보여 당시 뿔난 롯데팬들로부터 선수 기용의 최소한의 기준조차 없다고 엄청난 욕을 얻어먹었다. 특히 당시 박기혁은 2할조차 넘기지 못하는 타율로 붙박이 주전 유격수로 기용되어 양상문이 더욱 까이는 빌미를 초래했다.

그나마 후반기를 시작하기 전 삼성에서 마무리 투수 노장진을 트레이드해왔고, 그 덕택에 손민한을 다시 선발로 전업시켜 나름 승수를 쌓아나갔다. 그 결과 승률이 전년도에 비해 1할 넘게 올랐으나 그 전까지의 누적 데미지가 워낙 컸던 탓에 50승 11무 72패로 다시 한 번, 4년 연속으로 꼴찌를 하는 역사를 쓰고 말았다. 현재까지 최초이자 유일한 기록이다.[31] 그로 인해 꼴데라는 별명 확정. 8888의 임팩트 때문에, 2019년까지 15년 동안 롯데는 꼴찌를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꼴데라는 별명을 이어가게 된다.

5.2.5. 200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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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빌딩 행보를 밟아나간 양상문호는 2005년 시즌 초반 엄청난 돌풍을 일으키며 1위까지 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이후 팍 죽어버리며 한 달도 채 안 되는 기간만에 또 다시 나락으로 추락했다. 손민한이 MVP를 수상할만큼 커리어 하이를 찍었고, 양상문이 전년도에 죽도록 욕을 먹어가며 키운 어린 선수들의 나름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재활공장장 버프를 받은 한화에 밀려 5위라는 아쉬운 성적으로 시즌을 마감하게 된다.

참고로 이때 감독이였던 양상문은 2년 계약을 해서 이 시즌이 종료되고 재계약을 해야 했는데, 많은 사람들은 4년 연속 꼴찌팀을 5위로 끌어올린 소기의 성과를 보인 양상문의 재계약 가능성을 높게 봤지만, 롯데는 재계약을 포기하고 후임으로 강병철을 다시 선임해 다소 논란이 있었다. 표면적인 감독 교체 사유는 새로운 투자계획의 일환이었지만 실제로는 양상문이 선수단 장악에 실패한 탓도 컸다.[32] 덤으로 양상문은 훗날 14년 만에 다시 롯데 감독을 맡게 되었지만, 결과는...

5.2.6. 200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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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했듯이 팬들은 2년만에 팀을 5위까지 끌어올린 양상문 감독이 계속 감독을 맡을 거라 생각했었다. 투수 코치로서의 양상문은 욕을 먹고 있지만 감독으로서의 양상문은 당시 만년 꼴찌 롯데를 단기간에 중위권으로 상승시키는 등 평판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후에 양상문 감독이 승패마진 -16의 LG를 4강에 올려놓은 다음 이 때 8888577의 5가 양상문 업적이었다는 게 재발견되기도 했을 정도. 그러나 구단주가 갑작스레 발표한 롯데 투자 계획에 따라 새롭게 들어온 감독은 바로 강병철. 당시 롯데팬들은 양상문과의 재계약을 포기하고 새 감독을 임명한 것에 놀랐고, 그 새 감독이 강병철이라는데서 또 한번 놀랐다. 1984년 최동원, 1992년 염종석의 전성기와 그 후를 아는 팬들은 큰 우려와 혹시나 하는 작은 희망이 교차하며 그를 지켜봤지만 성적은 역시나 2년 연속 7위라는 기록과 함께 또 다시 시궁창으로 빠지게 되고, 대망의 8888577이 완성된다. 동시에 팬들이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없던 강병철 감독은 주구장창 까이며 잠시 야인으로 지내다 2008년 히어로즈 2군 감독직에 오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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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데팬이라고 놀림 받는 것도 지겹다
구단의 특단의 조치를 요구한다. - DC야갤 롯데팬 일동-

이 시기에 롯데팬들의 강병철 감독에 대한 분노는 극에 달해있어서, 잠실구장에서 플래카드가 걸리기도 했고 사직구장에서도 "편파적인 강감독의 선수기용 반대한다"라는 플랜카드를 걸기도 했다. 이 짤방만 봐도 이 시절 롯데 팬들의 설움이 어느 정도였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오죽하면 2006년 노무현 당시 대통령과 강병철이 부산상고(현 개성고) 동문이라는 점 때문에 어떤 초등학생이 강병철 감독 퇴진에 힘써달라는 글을 청와대 열린마당 게시판에 올리기도 했다. 부진한 롯데 때문에 인생의 쓴맛을 배우고 숙제가 안 잡힌다는 건 덤 기사.

2006년에는 호세, 이대호 말고는 그야말로 물빠따 타선이어서 그야말로 상대팀에게는 이대호만 거르면 별거 아니네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충분했다. 특히 물빠따에 지대한 공을 세웠던 FA 영입타자 정수근이 엄청난 욕을 먹었다. 브라이언 마이로우가 시즌 초반에 많은 홈런을 치면서 비교적 선전했으나 마이로우가 약점을 드러내기 시작한 5월 이후부터는 성적이 곤두박질치자 롯데는 새로운 외국인 타자를 데려오는데...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투수진도 손민한 말고는 사실상 의미가 없는 수준이었고, 그나마 2년 전 FA로 영입했다가 내내 먹튀짓을 했던 이상목이 모처럼 12승을 거두며 고군분투한 정도였다. 그리고 류현진을 거르고 뽑았던 나승현이 첫 시즌부터 16세이브를 기록하며 희망이 되었던 것 정도? 또한 이대호가 드디어 포텐을 폭발시켜 타격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해 골든글러브를 차지하고 MVP후보까지 올랐다. 롯데팬들은 김용희, 김용철, 김민호, 박정태, 마해영 이후 오랫동안 씨가 말랐던 롯데의 중심 타자가 전면에 등장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강민호가 역대 세 번째로 포수로서는 전 경기 출전의 대기록을 작성하며 최기문의 뒤를 이을 차세대 주전 포수를 발굴해낸 것도 나름 소득이었다.

5.2.7. 200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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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시즌에는 전 시즌에 22홈런으로 홈런 2위를 기록했던 펠릭스 호세와 재계약했고 마무리로 카브레라를 데려왔다. 현대와의 개막 원정경기 3연전을 모두 쓸어담는 등 시즌 초반에 이대호 등의 활약에 고무되어 4월 2~3위권을 유지하던 롯데는 5월부터 귀신같은 추락을 경험하면서 환장하는 성적을 기록했다. 그나마 꼴찌를 깔아주고 있던 KIA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도. 그리고 호세도 확실하게 노쇠화된 모습을 극복하지 못한 채 형편없는 성적을 내고 퇴출되었다. 그래서 시즌 중반 이후부터는 그 유명한 이대호와 여덟 난쟁이라는 드립이 성행했다. 이대호 말고는 홈런을 쳐줄 타자가 없었으니까. 특히 이 시즌 전역한 김주찬이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강병철 감독이 죽도록 욕을 먹어가면서도 끝까지 기용하는 바람에 강병철도 까이고 김주찬은 주찬 소리를 들으며 무한대로 까였다.

다행히도 올스타전 이후에 성적을 끌어올렸던 정수근, 처음으로 두 자릿수 홈런을 기록하며 주전 포수의 입지를 완벽하게 다진 강민호, 그리고 새로운 롯데 내야수로 이원석, 정보명 정도가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박현승도 생애 처음으로 3할 타율을 기록했다. 물론 엇박자가 심해 이들이 한꺼번에 잘한 경기는 많지 않았고 롯데는 그렇게 희망이 사라져가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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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로이스터 감독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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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시즌을 앞두고 KBO리그 역대 최초로 외국인 감독인 제리 로이스터를 발탁하는 파격 인사를 단행했고, 로이스터는 특유의 노피어(No Fear) 야구를 성공적으로 팀에 이식하며 8888577의 암흑기를 바로 끝내고 3년의 재임기간 내내 롯데를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 성과를 낸다. 로이스터 재임 기간동안의 롯데는 공격 위주의 화끈한 야구를 펼쳤기에 성적과 별개로 야구 볼 맛이 났다며 아직도 이 시기 롯데의 팀컬러를 그리워하는 팬들이 무척 많다.

5.3.1. 200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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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술했듯이 KBO리그 역대 최초로 외국인 감독인 제리 로이스터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했고, 과거 선수협 파동으로 팀에서 내쳐다시피했던 마해영을 재영입하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그리고 시즌 개막부터 롯데는 화끈한 공격력을 앞세워 승승장구하며 이번에야말로 봄데모드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보였다. 특히 공익에서 소집해제된 조성환이 개막전부터 8번타자 2루수로 계속해서 불방망이를 휘둘렀고 공포의 8번타자라는 별칭을 얻었다. 그러다가 부진한 박현승을 대신해 3번타자로 승격되었고, 4월 25일 사직 삼성전에서 2:3으로 역전당한 연장 10회말 오승환으로부터 끝내기 역전 2루타를 터뜨리며 롯데에서 없어선 안 될 레귤러로 자리잡았다.

시즌 중후반 슬슬 힘이 빠지며 순위도 포스트시즌 진출 마지노선에서 간당간당하는 등 또 가을야구를 못하는거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지만, 8월 하순부터 구단 역사상 최다연승인 11연승을 질주하며 일찌감치 가을야구 티켓을 확보했다. 정규시즌 최종성적은 69승 57패로 3위로 마무리했으며 4위 삼성과 준플레이오프를 치르게 되었다. 그러나 8년만에 가을야구를 한 롯데는 경험과 노련미에 앞선 삼성에 단 1승도 올리지 못하고 0승 3패로 허무하게 조기 탈락을 하고 말았다.

5.3.2. 200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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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선발 손민한이 어깨부상으로 시즌 시작부터 이탈하고 조성환이 사구에 맞아 부상을 입는 등 험난한 시즌을 보내야 했다. 급기야 승패마진 -12로 팀순위가 꼴찌까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 어려운 시기를 떠받친 것은 새롭게 에이스로 등극한 조정훈과, 그 해 롯데에 FA로 가세한 홍성흔의 예상 밖 활약이었다. 시즌 중반부터 다시 힘을내며 야금야금 순위를 올리기 시작해 결국 4위로 막차를 타 2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다. 두산과의 준플레이오프 1차전은 조정훈의 엄청난 호투에 힘입어 무려 9년만에 가을야구에서 승리를 따냈지만 2차전부터 내리 3연패를 당하며 또다시 준플레이오프의 고비를 넘지 못했다.

당초 2년 계약을 했던 로이스터는 이 시즌이 끝나고 재계약 협상을 했으나, 결국 구단과의 마찰로 인해 장기 계약이 아닌 1년짜리 단기 재계약했다.

6. 2010년대

간단히 요약하자면, 로이스터 - 양승호 체제의 2012년까지는 구단 역사상 최다인 5년 연속 KBO 포스트시즌 진출을 이루어냈으나, 2013년부터는 2020년까지 8년간 포스트시즌 진출이 단 한 번에 불과한, 사실상 비밀번호만 안 찍은 암흑기. 급기야 2019년에는 15년 만의 꼴찌를 기록하고 말았다. 2010년대 초반까진 프로야구 최고의 인기팀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신생팀인 낙동강 라이벌 NC 다이노스의 창단과 호성적[33]과 함께 프런트의 병크, 결정적으로 성적 부진이 겹쳐 로이스터 시절과 비교해 롯데에 등돌린 팬들이 많아졌다. 특히 옆 동네 구단이 생기고 이들이 처음으로 가을야구에 진출한 2014년 이후엔....

6.1. 로이스터, 양승호 감독 체제

롯데 팬 입장에서도 1995년 시즌과 같이 가장 아쉬운 시기로 꼽히던 때이다. 특히 2011년, 2012년은 플레이오프에서 2승 3패로 한 끗 차이로 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창단 최초 5연속으로 가을야구 진출은 값진 성과였고, 롯데 팬은 아직도 이때를 기억할 때가 많다.

6.1.1. 201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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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호가 무려 7관왕을 차지하는 KBO리그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뽐냈고, 홍성흔도 거포본능에 드디어 눈을 뜨기 시작하며 후반기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한시즌 최다타점 기록 경신이 유력한, 150타점 이상을 기록할 수 있는 페이스로 달려나가며 # 압도적인 포스로 팀의 중심타선을 책임졌다.[34] 이들은 카림 가르시아와 함께 홍-대-갈 클린업트리오를 결성했는데 이는 99년의 박정태-호세-마해영에 결코 뒤지지 않는 막강한 클린업트리오였고, 그래서 이 당시 롯데는 8개구단 최고의 거포군단으로 명성이 높았다.

69승 61패 3무로 정규리그 최종순위 4위를 확보해 3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성공했고,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 베어스를 만났는데... 1~2차전 잠실 원정경기를 모두 쓸어담아 팀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전문가들조차 '롯데가 정규시즌과는 전혀 다른 기민한 야구를 한다'며 예의주시할 정도였으나, 3차전부터 귀신같이 3연패로 리버스 스윕을 당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이게 너무나 큰 악재가 되어 로이스터는 심지어 롯데팬들이 신문에 연임 지지 광고를 낼만큼 많은 지지를 받았음에도 결국 재계약에 실패하고, 후임 감독으로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양승호가 선임됐다.[35]

6.1.2. 201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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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임 양승호 감독의 실험이 하나같이 실패로 끝나며 롯데는 2011 시즌 개막 1달만에 꼴찌로 떨어지는 등 새로운 비밀번호 시대의 서막을 여는가 했다. 시즌 초 에이스 모드였던 고원준과 용병 브라이언 코리를 미친듯이 혹사시켜 결국 퍼지게 했고, 이미 외야수와 지명타자로 확고하게 자리잡은 전준우 홍성흔을 각각 3루수와 좌익수로 전업시켰다가 둘의 장점인 타격까지 너프되게 만드는 등 이 당시 양승호에 대한 여론은 무관중 운동이라도 해야하는거 아니냐는 소리가 진지하게 나올만큼 매우 좋지 못했다.

그나마 양승호가 더이상의 실험을 중단하고 불펜야구라는 팀컬러를 새로 구축했고, 팀은 여름 이후 미친 듯이 대약진을 시작해 무려 2위까지 올랐다. 결국 성적은 우려했던 것 보다 좋은 성적이었다. 더불어 롯데의 4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도 구단 최초. 게다가 페넌트레이스 2위로 플레이오프 직행을 확정지었지만 플레이오프에서 SK와 붙었고, 결국 2승 3패로 패배하면서[36][37] 최종 순위는 3위로 마감했다.[38][39][40]

하지만 결과적으론 단일리그가 시작된 2001년 이후 무려 10년만의 최고 성적을 냈었고, 무엇보다도 이것이 롯데의 최고 승률 공동 2위[41]를 기록했기에 의미가 있었다.

6.1.3. 20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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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경기에서 3승 9패 최하위로 부진했지만, 페넌트레이스에서는 4월 20일자로 단독 1위까지 올라섰다. 단독 1위 후에는 두산과 1위 싸움을 신나게 하였다. 그러다 잠시 중위권으로 내려가다 영남 라이벌인 삼성과 1위 다툼을 치열하게 하였고, 7월 7일 단 하루 1위로 되돌아간 적도 있었지만 다음날 패배로 다시 2위가 되면서 삼성에게 1위 자리를 내주었다.

그 이후 다시 두산 베어스와 치열하게 치고박기를 하다가 9월 9일 시점에서 2위 굳히기에 나선 상황이었다. 당시 롯데가 가을야구 걱정할 때가 아니라 20년 만의 우승을 걱정할 때라고 롯데팬들은 설레발을 쳤으나, 결국 롯데는 10월 1일 KIA와 4강 싸움을 하였다. 당시 4위였던 롯데는 9월 29일부터 KIA와 경기를 치렀기 때문에 만약 KIA에게 스윕당하면 5위 KIA와의 승차가 1.5경기차로 줄어들기 때문에 어떻게 될지 몰랐었다.

그런데 롯데가 포스트시즌 진출 매직넘버를 0으로 만들고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의 쾌거를 이루었다. 이어진 준플레이오프에서 두산을 3승 1패로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함으로써 비밀번호를 종결한 이후 처음으로 포스트시즌 차기 라운드에 진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도 두산에 2연승을 먼저 거두고 3차전을 패했기때문에 팬들이나 심지어 전문가들까지 2010년의 리버스 스윕패가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가 매우 컸지만, 4차전 연장 10회말에서 두산의 실책에 힘입어 끝내기 승리를 거두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하지만 롯데는 이어진 플레이오프에서 또 SK를 만나서 2승 3패로 패배해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순서는 X-O-O-X-X)

양승호 감독은 이에 책임을 지고 감독직에서 사퇴했으며 얼마 뒤 아마야구 감독 시절 입시비리 혐의로 구속되었다. 애초에 프런트와도 사이가 벌어져 해당 혐의가 아니었더라도 중도 경질이 유력한 상황이긴 했다.

그래도 1999년 이후 13년 만에 포스트시즌 승리를 거두었기에 의미가 있었고, 그래서 다음 시즌에도 올라갈 줄 알았다. 하지만

6.2. 2차 암흑기(5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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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로이스터, 양승호 감독을 거치며 1차 암흑기를 잊는 줄 알았으나 또 다시 암흑기로 들어가며 2020년대 중반까지 이어진 암흑기의 시작이 되는 시기로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과 같은 프런트의 병폐가 들어난 시기이다.

5년만의 가을야구인 2017시즌 이후 많은 프랜차이즈 스타를 떠나보낸 것에 앞서 김주찬, 장원준과 같은 여러 선수들을 떠나보낸 시기이기도 하다.

6.2.1. 201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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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시즌 종료 이후 김시진 감독을 3년계약으로 선임했다. 구단측에선 우승을 시켜줄 수 있는 감독을 데려왔다고 했지만, 정작 김시진은 이미지는 좋았어도 성적으로 보여준 적은 없는 감독이라 많은 롯데팬들은 이 선택에 의구심을 표했다. 게다가 FA 김주찬 홍성흔이 각각 KIA, 두산으로 떠나버려 팀 전력의 약화를 피할 수 없었고, 시즌이 시작한 뒤 감독의 작전들이 모두 호구가 되면서 1위부터 7위까지 롤러코스터를 탔다. 삼성과 LG에게 나란히 제쳐지더니 9월 들어 질주하는 두산과 넥센을 끝내 잡지 못하고 결국 9월 28일자로 가을야구를 6년만에 못하게 되었다.[42]

이 승률도 한화에게 14승 2패[43]로 찍어 눌렀기 때문. 그리고 SK와 유종의 미를 위한 5위 싸움 끝에 결국 5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승률은 2012시즌보다 정작 2013시즌(.532)이 더 높다. 그리고 이는 한국프로야구 역사상 역대 최고 승률의 가을야구 실패. 그렇기 때문에 이때까지만 해도 롯데가 망한다는 생각은 어느 누구도 하지 않았다. 어찌됐든 승률 5할은 훌쩍 넘었기 때문에... 하지만 로이스터의 화끈한 공격야구, 양승호의 불펜야구라는 확고한 팀컬러가 실종된 김시진의 이도저도 아닌 야구는 그 열성적인 부산팬들마저 등돌리게 만들었고, 이 시즌 롯데는 1999년을 기념하기 위한 챔피언스 데이 행사일을 제외하곤 단 한 번도 만원관중을 기록하지 못했다.

6.2.2. 201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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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시즌 화요일 20경기중 1승 1무 18패(승률5%) 이라는 다른 의미에서의 기적적인 승률을 기록했으며 7위로 마감했다. 결국 8888577을 종결한지 7년만에 다시 7데로 돌아왔다. 그나마 경찰청에서 전역한 장원준이 10승을 기록하며 선발진을 이끌었지만 나머지가 지지리도 못했다.

시즌 후 일본의 복수구단이 장원준을 노린다는 소식이 들려오는데 정말로 장원준이 복귀 1년만에(...) 해외진출을 해버리면 선발진은 더욱 암울해질 전망. 결국 장원준과의 협상은 결렬되었다. 장원준만 붙잡았으면 그래도 전력, 특히 선발진과 타선은 타고투저를 감안해도 제법 괜찮다는 점에서 희망이 있었지만 롯데 팬들은 이것으로 점점 희망을 접고 있다.

거기에다, 시즌 후 감독 선임 문제로 시작되어 터진 프런트의 막장행각으로 인해 구단 내부 및 구단과 선수단 간의 불화가 만천하에 드러나기까지 해, 이로 인한 후폭풍이 팀에 미칠 악영향을 생각하면 더욱 전망이 어두워지고 있다[44]. 당연히 이번에도 FA들은 다 놓쳤으며 여기에 최하진 당시 롯데 구단 사장의 세이버메트리션 코스프레[45], 전횡까지 알려져 욕을 먹었다.

김시진 감독이 자진사퇴 형식으로 물러났고, 4강에 들지 못한 5팀 중 준플레이오프 기간에 KIA가 먼저 선동열 감독 계약 2년 연장을 발표하고(하지만 선동열은 재계약 포기, 2014 시즌 중 LG 감독직에서 자진사퇴한 김기태가 선임된다) SK 김용희 감독을, 두산 김태형 감독을 선임하고 뒤이어 한화 김성근 감독을 선임했다. 하지만 유독 롯데만 새 감독 소식이 들려오지 않고 있다가 공필성 감독 내정설이 나오고 롯데 자이언츠 선수단 CCTV 사찰 사건까지 터져 분위기가 어수선해진 가운데 플레이오프 4차전이 되어서야 이종운 감독이 선임되었다는 발표가 난다. 하지만 팬심은 이종운 감독에게 별로 호의적이지 않았고, 암흑기를 다시 연장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6.2.3. 201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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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경기에서 선전하고 4월까지는 승패마진 +2로 선방하면서 이종운 감독의 평가가 좋아지는 듯 했다. 5월 시작하자마자 한화를 상대로 루징 시리즈를 당한 후 SK와 NC를 상대로 연속 스윕 패를 당해 침체되다가 kt 상대 스윕 승을 포함한 6연속 위닝 시리즈로 반등에 성공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6월 들어 귀신같이 연패 행진을 거듭하며 순위가 8위까지 떨어졌다. 게다가 이 시기에 위닝시리즈 하나 못가져갔고, 이승엽에겐 400호 홈런을 허용, kt에겐 구단 최초의 피스윕 팀이 되었다. 게다가 6월 한 달간 성적도 10개 구단 중 꼴찌, 9위 LG와 0.5게임 차로 추격당하며 6월을 마감해야 했다.

그리고 7월 14일 한화에게 패배하면서 기어코 9위까지 내려왔다. 하지만 아직 꼴찌 kt 위즈가 시즌 초반 연패를 거듭하면서 바닥 수준의 전력을 보여줬지만, kt가 6월부터 제대로 된 프로야구 팀의 실력을 발휘하는 탓에 kt와의 게임차는 10경기 내외에서 점점 좁혀지고 있는 상황. 만약 kt에게 역전당하는 사태라도 일어나기라도 한다면... 그대로 무관중 운동이 시전될 가능성도 높은데다가 최근 롯데家 소송 분쟁으로 한창 시끄러운 가운데 기업 이미지 자체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된다. 당시 부산에서도 롯데 불매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걸 생각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8월 사이 한화, 기아, SK가 모두 하향세를 타버리면서 그 사이 롯데는 9월 5일 현재 5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결과론적으로 현재 5강 티켓의 마지막 주인공은 개싸움이 된 상황.

그러나 다시 도로 내려갔고 결국 9월 30일 트래직넘버가 0이 되면서 가을야구 탈락 확정이 되었다. 그리고 10월 2일 패배하면서 최종 순위는 8위가 되었다. 팀 수가 10개로 늘어났으므로 꼴찌는 아니지만 어쨌든 11년만의 8위.

여기에다가 시즌 후 2015 프리미어 12 기간 전에 손아섭 황재균 MLB 포스팅에서 모두 0원이 나와버리면서 각 구단들의 비웃음을 샀다. 반면 김현수는 그 해 두산의 우승으로 우승 팀 프리미엄까지 받고 볼티모어 오리올스로 이적하는데 성공했다!

그 외의 내용은 롯데 자이언츠/2015년, 이종운, 이종운/평가 문서를 참조. 이 시즌을 기점으로 부산, 경남권 팬들은 NC로, 수도권 팬들은 두산으로 많이 넘어갔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이 시즌 롯데는 팬심마저 잃어버리는 모습을 보였다.

6.2.4. 2016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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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원우/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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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운 감독이 1년만에 경질되었고 신임 감독으로 예전에 롯데에서 코치로 활약한 적이 있었던 SK의 수석코치 조원우를 선임했다. NC를 제외한 상위팀들이 모두 전력 약화가 되면서 1~2팀 정도 가을야구가 물갈이가 될 것으로 보인다. 투수진 강화를 위해 FA로 윤길현, 손승락을 영입했는데, 가을야구의 가능성이 충분히 보인다.
모 기사에 따르면 3강-4중-4약 중 4중에 속한다고 한다.

7월 14일 전반기가 종료된 시점 롯데는 39승 43패(승률 .476)로 5위이며 4위 SK와는 2.5게임차, 6위 KIA와는 1게임 차[46]로 가을야구의 희망을 이어나가고 있었으나... 머지 않아 DTD가 시작되었다.

일단, 7월 마지막 주 엘 꼴라시코에서 루징이 나온 이후 KT 원정에서 스윕을 당했다. 그리고 여기서 족발게이트가 터져버리면서 팀 분위기가 뒤숭숭해지게 된다. 이후 강팀인 두산-넥센과의 홈 6연전에서 3승 2패로 선전했다.넥센전 1경기는 우취되었으며 1승 1패를 거두었고 두산에게 위닝시리즈를 거두었다.

헌데 그 이후 2연전 체제로 재편되면서 이 기간 동안 투수진은 더 무너지고, 타격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강민호와 맥스웰이 부상으로 빠진데다가 김문호가 대타자모드에서 대타 모드가 되어버렸다. 하는 수 없이 백업 멤버들로 시즌을 운영해나갔다. 그러다가 8월 4주차에서 KT전 1승 1패 이후 두산 원정에서 결국 우취가 떠버려 이기고 있던 경기가 날아가면서 1패만 추가해버렸고, 대구 원정에서도 우취 1경기 제외하고 다시 1패를 추가, 결국 8월 29일 기준 삼성과 승차 없는 8위에 랭크되어있는 상황이다. 이러는 와중에 감독은 전준우를 제대하자마자 복귀시키겠다는 말을 하고 있다. 만에 하나 FA를 오프시즌 도중 영입하게 되면 보상 선수를 묶을수 있는 폭이 좁아져 현재 많은 팬들이 우려하고 있다. 멀리 안 가고 이런 식으로 선수 보호를 대충 처리한 한화에서 박한길 최영환을 데려왔다. 그리고 진짜 전준우와 같이 제대한 신본기, 김사훈까지 등록하면서 현실이 되었다.

결국 10월 02일 NC에게 지면서 가을야구 탈락을 확정지었다. 경기 결과에 상관없이 이미 기아가 kt를 이겨서 롯데의 트래직넘버가 소멸되었다. 가관인 건 NC와의 전적이 무려 1승 15패라는 것.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번 시즌 압도적 1위였던 두산에 유일하게 열세를 면한 팀이 바로 롯데다. 그러나 시즌 마지막 대결에서 승락극장이 개봉하여 결국 두산에게 한 시즌 최다 승(92승)을 선물해주고 말았다. 같은 엘롯기 멤버인 LG와 기아가 가을야구에 진출, 그것도 와일드카드전에서 맞대결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충격적인 결과. 게다가 이번 시즌을 앞두고 전문가들 사이에서 가장 가을야구가 유력했던 팀은 롯데였다. LG와 기아는 이번 시즌은 리빌딩 모드로 가기로 해 큰 기대가 되지 않은 데다가 롯데의 작년 투타 밸런스는 괜찮았으나 델동님이 말아드셔서 망했기 때문에 새 감독 하에서는 잘 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기 때문. 뭐 결과는 잘 알다시피...

결국 시즌 최종전인 10월 09일 넥센전에서 이기게 되면서 작년에 이어 최종 8위를 확정짓게 된다. 결국 5788 생성.

6.3. 5년만의 가을야구

6.3.1. 2017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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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홍성민 김준태는 내년 시즌에 군 입대 관계로 없을 예정이다. 여기에다가 2016년 11월 7일, 이성민 프로선수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했음이 확인되어 선수 생명이 끝날 위기에 몰렸다. 그렇잖아도 허약한 불펜의 부담이 더더욱 가중화될 듯.

황재균이 1월 23일 부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타선이 거의 최약체가 될 수 있었지만, 다음 날 이대호가 롯데로 컴백을 하면서 일단 큰 위기는 면할 수 있게 되었다.

7월 초에는 무려 1,099일만에 NC 다이노스 3연전을 모두 쓸어담는 스윕을 했다. NC와의 총 상대전적은 6승 6패로 작년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기아 상대로 1승 8패를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었는데, 7월 4째주 주말 3연전에서 광주 원정을 스윕하면서 4승 8패까지 올렸다.[47]

전반기까지의 모습은 가을야구와 거리가 다소 멀었다. 김원중, 박진형[48]의 선발진의 성장이 더딘데다가, 윤길현은 기아전만 되면 불지르고 있고,[49] 신본기, 문규현, 정훈, 앤디 번즈 등의 내야 자원이 부상과 부진에 빠진데다가, 레일리는 부활했고 애디튼은 배팅볼 투수짓 하다가 전반기 막판에 살아났지만 구단이 린드블럼을 재영입해 방출되었다. 게다가 이대호는 6~7월 들어 급격하게 득병이 되어버리면서 심각하게 욕을 먹는 중이다.[50] 일단 전반기를 41승 44패 1무 승패마진 -3으로 7위를 기록하며 마쳤다. 4위권과는 4~5경기 차이이니 그 사이에 차이를 얼마나 좁힐수 있으냐가 관건이 될 듯 하다.

후반기부터 박진형을 불펜으로 전환시킨게 대성공을 거두고, 7년만에 복귀한 조정훈의 호투에 힘입어 양떼불펜을 구축해 차츰차츰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8월 18일, 4, 5위인 LG, 넥센과 게임차는 단 0.5게임차까지 좁혀졌고. 같은날, 롯데가 넥센을 잡고 4위를 탈환했다. 참고로 5위는 LG.

8월 31일 이제 NC와 마지막으로 붙게 된다. 이번 시리즈 결과에 따라서 손시헌이 억울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3위 싸움을 할지 다시 내려갈 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일전이 될 상황이다. 결국 NC와의 마지막 두 경기를 이기면서 8승 8패도 아닌 9승 7패로 롯데의 우세로 끝났다.

9월 17일 SK 와이번스를 스윕하면서 드디어 포스트시즌 매직넘버를 1로 줄이면서 다음 경기만 이기면 무조건 순위결과에 상관없이 포스트시즌 진출을 확정짓게된다. 그리고, 9월 21일 LG가 삼성에 패해 자력진출이 좌절되면서 롯데는 5년만에 가을야구를 확정지었다. 그리고 10월 3일, 3위의 고지에 오르게 되어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롯데에게 찾아왔...으나 NC 다이노스와의 준플레이오프에서 1차전에서 한 선수의 실책으로 9-2로 지고, 이후 승-패-승-패를 해서 2승 3패로 탈락하고 말았다. 말그대로 2011년 플레이오프의 재림이 된 것이다. 경험 부족이 가져온 아쉬운 결과인 것이다.

참고로 롯데의 2017시즌 성적은 80승 2무 62패로 구단 역사상 최다승 기록이기도 하다. 특히 후반기 한정으로 무려 39승 18패 1무를 기록하면서 후반기 승률은 6할 6푼에 근접했다. 그리고 조원우 감독은 이 시즌의 성과를 인정받아 3년 재계약에 성공했다.

하지만

6.4. 3차 암흑기(7A788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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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만의 가을야구로 암흑기를 벗어나느것으로 보였으나 또 다시 프런트의 문제로 또 다시 강민호, 황재균, 조시 린드블럼등 많은 스타들을 떠나보낸 시기이며 15년만의 꼴지를 기록하기도 했던 시기이다.

6.4.1. 2018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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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롯데는 지난 2년 동안 288억을 투자한 탓에[51] 내부 FA들을 모두 잡기는 매우 힘들고, 그렇기 때문에 어느 정도 연봉 총액의 증가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잡아야 하지만, 최대어인 손아섭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했는데, 결국 4년 98억에 재계약을 하면서 일단 한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강민호가 타 팀으로 이적하면서 2018년 KBO 리그 2차 드래프트에서 괜찮은 수비형 포수를 구해오는 것 역시 필요한 과제였는데, 강민호의 보상선수로 같은 포수 포지션의 나원탁을 지명하면서 위기를 넘겼다. 그리고 문규현을 2+1년, 10억에 잡으면서 일단 유격수 구멍을 최소화했다.

한편 군 제대 자원으로 투수로는 최영환, 이인복, 구승민 타자로는 내야수 자원인 오윤석이 새롭게 합류할 예정이다. 그리고 이 해 시즌 말미에 홍성민 김준태가 드디어 돌아온다.

신인인 윤성빈 이승헌도 합류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 11월 28일 민병헌이 영입되면서 중상급 외야진을 구성하게 되었으나 오프시즌 도중 12월 13일 SBS 유영민 기자의 보도로 조쉬 린드블럼의 계약서 파동이 터지면서 꼴런트는 무지막지하게 까였다. 결국 대신에 2013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우승 멤버이기도 했던 펠릭스 듀브론트를 새로 영입하면서 일단 구멍을 메웠다. 그러나 듀브론트의 경우 몸관리, 워크에씩 면에 문제가 있다는 평이 전 소속팀 보스턴, 오클랜드 팬들 사이에서 나오는 중.

그리고 개막전부터 경남고 출신 신인 3루수 한동희가 데뷔 첫 적시타를 기록하며 기대를 높이고 있다.

강민호는 놓쳤지만 그야말로 돈을 들이붓는 FA 지출과 KBO 페이롤 2위 팀[52]이라는 점으로 인해 여러 전문가들도 5강 멤버에 롯데를 놓을 정도로 희망적인 전망이 점쳐졌으나...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투타의 난조[53], 불안한 수비로 인해 6연패를 기록하며 단독 꼴찌를 차지했다. 롯데가 보인 한심한 경기력으로 인해 경기 이후 청와대 국민청원 롯데자이언츠 해체 청원이 올라왔을 정도. ???: 야! 그러면 작년에 6연패한 우리는 뭐가 되는데?[54]사실 26년 전에 이미 답변했다고 한다.

4월 6일 기준 2018년 첫 엘꼴라시코 이후 1승 10패로 1할 승률도 붕괴되었다. 역대 KBO 역사상 이런 초반 승률로 가을야구를 한 팀은 전무하다. 총체적 난국의 경기력에 개선해야 할 부분을 굳이 꼽기도 힘들 지경. 그냥 꼴데 그 자체다. 오죽하면 롯데 팀 전체에서 손아섭만 야구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 하지만 4월 10일~12일 넥센전에서 첫 위닝 시리즈를 가져가고 13일 현재 5승 12패까지 오르면서 조금씩 반등을 보이고있다. 그리고 4월 24일부터 6연속 위닝시리즈(중간에 1승 1패 시리즈 1번)를 거두며 5월 14일 기준으로 승패마진 -1까지 줄이고 4위에 위치해 있다. 여러 모로 2009시즌과 비슷한 시즌인데 오랜만에 가을야구 진출한 다음 시즌 초반에 꼴찌에 몰려있다가 반등하는 점이 비슷하다.

다시 5월 하순에 또 3월 초반의 승패 재림이 일어나서 하위권으로 떨어졌는데, 또 6,7,8월에 승패마진을 채우다가 또 1승 10패로 무너지고 다시 9승 2패로 또 마진을 채웠고, 마침내 5위 KIA와 승차없는 6위까지 쫒아왔다. 하지만 kt와 치른 더블헤더에서 2연패했고, KIA가 한화 상대로 승리해서 1.5게임차까지 벌어졌고, 결국 KIA를 상대로한 맞대결에서 3승 혹은 2승 1무를 해야 가을야구에 갈 수 있는 역대급 희망고문이 시작되었다. 물론 첫 경기에선 이겼지만, 그 다음 경기에서 패하는 바람에 트래직 넘버가 소멸해서 가을야구 진출에 실패했고, 마지막 두산과의 경기에서도 패해서 7데가 되었다. 결국 조원우 감독은 재계약 1년차만에 경질당하는 수모를 맛봤다.

6.4.2. 2019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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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롯데 감독으로 리빌딩의 초석을 다진 양상문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며 롯데팬들의 기대를 받았지만, 정작 시즌 내내 형편없는 경기력을 보여주며 구단 역사상 최초의 10위로 추락했다. 결국 시즌 도중 감독 단장이 동시에 사퇴하는 초유의 상황을 맞이했다. 특히 감독의 경우 KBO 리그로 명칭이 바뀐 후로 감독 부임 첫 해 중도 사퇴라는 최초의 기록까지 달성하였다(...). 후반기부터 수석코치 공필성을 감독대행으로 선임해 탈꼴찌를 노렸지만 결국 15년만의 꼴찌, 10개 구단 체제 최초 원년팀 10위, 그리고 또 KBO 역사상 최초로 한 시즌 90패를 세 번이나 기록한 최초의 팀이 되었다.[55]10개 구단 체제 이후 50승을 거두지 못한 첫번째 팀[56]이라는 불명예까지 기록하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10승을 기록한 투수가 단 한 명도 없는 기록까지... 더불어 10개 구단 체제 역대 최악의 승률마저 갱신하였다. 결국 꼴데의 시대를 다시 불러오게 된 거나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결국 롯데는 성난 민심을 달래기 위해 팀을 혁신적으로 강도 높게 개혁하겠다고 팬들에게 약속했으며, 그 일환으로 성민규를 신임 단장으로 영입했다.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파격적인 인사라 롯데팬이건 타팀팬이건 할거없이 모두 놀랐고 야구인들도 마찬가지 반응이었다.

다음 시즌 감독은 외국인 감독으로 정했으며, 그 후보군으로 제리 로이스터, 스캇 쿨바, 래리 서튼 등을 공개했다. 그런데 이후 협상이 잘 안 되었는지 다시 국내 감독 중에서 정하기로 해 비난을 받았다. 이후 각종 썰을 보면 이만수, 김기태, 김한수, 조원우, 허문회, 홍성흔, 조성환, 제리 로이스터, 스캇 쿨바, 박경완, 손혁 정도인데, 의외의 인물을 선택할 수도 있다. 롯데는 각종 썰을 빗나간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렇게 각종 썰들이 오간 끝에 롯데의 새 감독은 허문회가 되었다.

7. 2020년대

7.1. 3차 암흑기, 성민규 단장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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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꼴지 이후 선임된 성민규 단장의 시기이다. 초반 성적은 못내었지만 괜찮은 FA 영입과 혁신적인 신인 드래프트로 팬들에게 미래를 꿈꾸게 해주었지만 팀의 전설과의 이별, 재계약 이후 의 최악의 FA 3인방과 더불어 감독과의 갈등, 로이스터를 꿈꾸며 데려온 신입 외국인 감독의 실패, 이후 감독 대행의 최악의 결과와 함께 결국 미래를 매듭짖지 못하고 암흑기를 이어가게 되었다.

7.1.1. 2020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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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19 사태로 대부분의 일정을 무관중 경기로 치르게 된 시즌이었다.[57]

성민규 단장의 팀 체질개선이 효과가 있었는지 개막하자마자 5연승을 기록하는 이변을 일으켰지만, 그 뒤에 4연패를 두 번 하는 바람에 11승 12패로 부진했었다. 하지만 5월에 승패마진을 0으로 만들고, 이후 계속 5할승률에서 왔다갔다가하다가 7월에 승패마진 -2로 다시 마이너스가 되었지만, "8월에 치고 올라간다"는 소위 8치올 발언을 했던 허문회 감독의 장담이 들어맞아 8월에 14승 8패의 호성적을 거두며 5할 승률 위로 올라갔다. 늘 그랬듯이 타선의 중심축을 잡아준 이대호, FA 혜자 전준우, 전해의 아쉬운 모습을 딛고 .352의 고타율로 다시 비상한 손아섭, 그리고 허문회 감독의 중용으로 제 2의 전성기를 맞은 정훈 등이 타선을 이끌었고, 고질적인 문제였던 센터라인 수비를 딕슨 마차도가 안정화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투수진에선 댄 스트레일리가 1선발로 선발의 중심이 되어준데 이어 김원중의 마무리투수 전환이 성공해 무려 8월까지 1점대 평균자책점의 완벽한 모습을 보였고, 구승민과 함께 2020년대 롯데 필승조 구축의 발판을 놓게 되었다.

그러나 9월엔 다시 11승 14패로 다소 부진했고 5할 +1이 되었다. 게다가 10월에 그나마 약간 있던 마진조차 다 깎아먹고 -1이 되어 결국 가을야구 진출에도 실패했다. 게다가 이 시즌 롯데는 전 구단 상대로 끝내기 패배란 굴욕도 세웠다. 또한 시즌 중반부터 성민규 단장과 허문회 감독의 불화설이 끊이질 않으며 야구 외적으로도 미숙한 모습을 보였다.

팀 성적은 7위에 그치고 말았지만 71승 72패 1무로 5할 승률에 준하는 승률을 올렸다. 전해의 48승에 비해 무려 23승을 끌어올리며 루징팀의 역사를 재빨리 끊고 다음 시즌에 대한 기대감을 남겨놓은 점은 절반의 성공으로 평가받았다. 다소 논란이 되긴 했지만 덕아웃에서 선수들이 짝짝이나 징으로 응원을 펼치는 등 전해의 암울한 팀 분위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밝아진 팀 분위기를 보였던 점도 고무적이었다.[58]

7.1.2. 2021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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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초엔 중상위권에 있었다가 DTD를 했고, 꼴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시즌 중후반부터 논란이 있던 허문회 감독이 시즌 초 숱한 논란을 야기하며 결국 30게임까지 치른 시점에서 경질되고 말았다. 허문회가 경질된 후 2군 감독이었던 래리 서튼이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지만 감독 부임 이후 15경기 동안 3승 1무 11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혹독한 시행착오를 거쳤다.

그나마 6월부터 반등을 시작해 꼴찌를 탈출했고, 전반기 종료 후 올림픽 휴식기 때 준비를 잘 했는지 후반기부터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윗순위 팀들과의 게임차를 점점 줄여갔고, 급기야 10월 7일 두산 베어스와의 서스펜디드 게임을 포함해 2경기를 싹슬이해 5위 키움에 불과 1.5게임차로 추격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이후 불과 5승 4무 6패를 하는 데 그쳤다. 특히 SSG를 비롯한 5강 경쟁팀들에게 잇달아 덜미를 잡힌게 컸다. 2021년 10월 26일 현재 트래직 넘버는 단 1이었고 다음날 10월 27일 KIA전에서 패함으로써 가을야구에 진출하는 데 실패했다. 결국 시즌 성적 65승 8무 71패로 순위는 전년도보다 한 계단 내려간 8위를 기록했다. 타이틀처럼 여러모로 2018 시즌의 재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데, 전반기 동안은 죽을 쑤다가 후반기부터 반등을 시작한 점, 시즌 막바지 5강권이 손에 잡힐듯 하다가 미끄러진 점, 원래 감독이 경질된 점까지 공통점이 있다.[59]

팀 타격은 10개 구단 중 1위를 기록할 정도로 제 몫을 했으나, 꼴찌에 그친 팀 평균자책점과의 엇박자가 매우 심각했던 시즌이었다. 특히 1선발 댄 스트레일리를 비롯한 투수진의 부진이 굉장히 뼈아팠다. 기대를 모았던 한동희가 정체된 모습을 보였고, 슈퍼루키 나승엽 김진욱도 미미한 활약에 그치는 등 전력상승 요인을 기대하기 힘든 점도 한 몫 했다. 그나마 박세웅이 4년만에 10승과 3점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선발투수로 다시 부활했고, 리그 최강의 프라이머리 셋업맨으로 자리잡은 최준용과 마무리 2년차에 35세이브를 수확한 김원중으로 이어지는 필승조의 재발견, 젊은 선수들을 많이 기용하며 리빌딩을 병행한 서튼 감독 체제 하에선 53승 8무 53패로 딱 5할 승률은 맞췄던 점 등은 나름 소득이라 할 만한 시즌이었다.

7.1.3. 202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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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막 이후 5할 승률에서 왔다갔다하다가 삼성과 LG와의 3연전을 스윕하는 등 4월엔 14승 9패로 단독 2위까지 오르며 모두를 놀라게 했다. 드디어 포텐이 터졌다는 평가를 받은 한동희가 4월 한 달 .427의 타율에 홈런 1위 타점 2위에 오르며 월간 MVP를 수상했고, 투수진에서는 4월에만 5승 무패에 0.65의 평균자책점으로 투수진을 이끈 찰리 반즈가 돋보이는 활약을 펼쳤다. 롯데가 올해만큼은 다르다는 설레발성 기사와 커뮤니티 반응도 많이 나왔으나, 김원중의 시즌 초반 이탈로 헐거워진 불펜과 상하위타순의 심각한 양극화 등의 요소는 불안요소였는데...

아니나다를까 5월 5일 어린이날 참사로 회자되는 스파크맨의 제로퀵 사태를 기점으로 팀이 나락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바로 다음날인 5월 6일부터 삼성과의 3연전은 소위 '만만한 삼성'으로 회자되는 마이데일리 이석희 기레기의 낚시성 기사로 잔뜩 독이 오른 삼성에게 스윕을 당하며 4연패에 빠졌고, 17일부터 KIA와의 3연전을 스윕당한데 이어, 마지막 주는 SSG와 키움을 상대로 모조리 스윕패를 당해 6연패에 빠졌다. 결국 5월 한달에만 스윕을 4번이나 당하면서 9승 17패에 그쳐 제대로 DTD를 했다. 투타의 양 축을 이뤘던 한동희는 5월 들어 부진의 늪에 빠진뒤 부상으로 이탈했고, 반즈도 4월의 위력을 보여주질 못했다.

김원중이 복귀했으나 그 반대급부로 시즌 초반 좋은 공을 던지던 최준용이 부진에 빠지는 등 불펜 문제는 여전히 해결되지 못했으며, 마차도가 빠져나간 유격수 자리와 손아섭이 이탈한 외야 한 자리의 공백은 계속해서 롯데를 괴롭혔다. 그나마 은퇴시즌에 회춘했다는 평을 받는 이대호의 놀라운 활약과, 선발투수 한 자리를 맡아준 이인복의 분전에 힘입어 팀을 꾸려갔지만 6월엔 9승 2무 12패, 7월에도 별반 다르지 않은 승률을 유지하며 고전했다. 그나마 전반기 종료 직전 한화와의 3연전을 스윕하며 승패마진 -6을 기록해 후반기에 대해 기대감을 높였지만, 후반기 시작하자마자 KIA와의 첫 경기에서 주심의 볼판정 논란과 더불어 경기를 내준 뒤, 3연전 마지막 경기는 0:23으로 리그 역사상 최다점수차 영봉패를 당하는 소위 일요일 대참사 수모와 함께 또 스윕을 당했다.[60] 이 충격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롯데는 뒤이은 두산과의 3연전 또한 스윕을 당하며 6연패를 당해 7월은 7승 1무 13패를 해서 5할 -12(...)까지 내려갔고, KIA전 대참사 이후 딱 2주 뒤 NC에게도 0:14로 영봉패를 당하며 사직 일요일 경기에서 두 번 연속으로 참사를 당했다. 롯데팬들이 참다참다 결국 폭발해 롯데월드타워 앞에서 단장과 감독의 퇴진을 요구하는 트럭시위를 벌인 것도 이 시점이다.

그나마 8월 한달 간의 승률은 다시 재영입한 댄 스트레일리의 호투와 고승민이 타선에서 팀에 활력을 불어넣어준 데 힘입어 13승 11패로 4개월만에 월간 승률이 5할을 넘었다. 6-7위를 왔다갔다하며 포스트시즌 진출의 마지노선인 5위 KIA를 추격 가시권에 붙들어뒀지만, 사실상의 마지막 기회였던 9월 6~7일 KIA와의 2연전에서 1승 1패에 그치며 포스트시즌 진출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9월 9일 현재 5위 KIA와 승차는 6.0게임차, 남은 경기는 17게임이고 트래직넘버는 16이다.

이후 생각지도 못하게 KIA가 장장 2주에 걸쳐 9연패를 당해 어부지리로 승차를 2.0게임까지 쫒아가 다시 한 번 기회가 오는 듯 했으나, 여기서도 치고 올라가지 못하고 결국 주저앉았다.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고문을 이어갔지만, 9월 29일 KIA와의 마지막 맞대결마저 1점자로 패하며 사실상 가을야구 탈락 선고를 받았다. 9월 30일 기준 5위 KIA와 승차는 4.5게임차, 남은 경기는 4경기며, 트래직넘버는 2이다.

10월 2일 기준 남은 경기는 3경기며, 트래직넘버는 단 1이다. 그리고 10월 3일 두산전에서 패함으로써 가을야구 가능성을 소멸시켰다. 이로써 사실상 3차 암흑기가 시작된 것이다.

10월 5일 NC전에서 패함으로써 6위 트래직 넘버가 소멸되었다. 삼성이 3경기 중 1경기라도 이기면 8위가 확정된다.

삼성이 두산과의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거둠으로써 7위 트래직 넘버도 소멸되었고, 결국 8위로 시즌을 마쳤다. 최근 5년 연속 포스트시즌 실패(7A788)를 기록했다.

7.1.4. 2023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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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규 단장 재계약이 이뤄져 부임 4년차를 맞는 시즌. 유강남, 노진혁, 한현희를 영입하며 FA 영입가능수 3명을 풀로 채웠고, 김상수, 안권수, 신정락, 차우찬 등 즉시전력감 내지 베테랑급 방출선수들을 대거 영입했으며, 유니폼과 팀 로고도 완전히 일신하는 등, 올해야말로 성적을 내겠다는 의지와 함께 시작한 시즌이었다.

시즌 초반은 늘 그랬듯이 5할 승률과 그 밑을 왔다갔다하다가 갑자기 4월 하순부터 연승행진을 시작, 2023년 4월 30일 시즌 20경기를 넘긴 시점에서 8연승을 기록하며 리그 1위로 올라섰다. 롯데가 1위 자리에 선 것은 2012년 7월 7일 이후 10년 10개월 만이다. #

2023년 5월 3일 KIA 타이거즈와의 경기에서 승리하며 9연승을 달성했다. 롯데가 9연승 이상을 한 것은 2008년 7월 27일~8월 30일 이후 5358일 만이다. #[61] 5월 31일 27승 17패로 승률이 6할을 넘었는데 1999년 이후 무려 24년만의 5월 기준 6할이다.

시즌 초반 투수진에선 나균안을 제외한 선발진이 극도의 부진을 보였고, 타선 또한 이대호의 은퇴에 따른 공백을 제대로 메우지 못해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등 전력의 불안요소는 여전했다. 하지만 리그 최강급 불펜과 득점권에서의 집중력으로 이를 커버하며 6월 3일까지 29승 18패, 승률 .617로 승패마진 +11을 기록하며 승승장구했다. 특히 방출 영입생 듀오인 김상수 안권수가 시즌 초반 각각 리그 최강급 불펜투수와 테이블세터로 팀에 활력을 불어넣어줬고, 슈퍼루키 김민석과 2년차 윤동희가 1군 레귤러로 자리잡는 등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선수들이 상수가 되어준 게 플러스 요인이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랬던 롯데가 귀신같이 DTD를 시전하며 추락하게 되는데 그 시발점은 6월 6일부터 시작된 최하위 kt와의 3연전이었다. 롯데가 어렵지 않게 위닝시리즈를 확보할 것이라 예상되었지만 2차례 연장전을 모두 패하는 등 생각지도 못하게 3연패로 스윕을 당했다. 이 시점에서 롯데는 시즌 초반 기세를 잃고 이어진 삼성, 한화, SSG와의 3연전에서 잇달아 루징시리즈를 기록하며 점점 내려가더니, 급기야 6월 20일부터 벌어진 kt와의 리턴매치 3연전에서 스윕을 당하는 참상으로 팀이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뒤이은 LG와의 3연전마저 루징시리즈에 그치며 팀 성적은 33승 33패 딱 5할까지 하락했다. 6월 3일까지 벌어놓았던 승패마진 +11이 한 달도 채 되지않아 눈 녹듯이 사라져버린 것.

시즌 초반 팀에 활력소가 된 안권수가 팔꿈치 부상으로 이탈하고, 불펜의 한 축인 김상수가 퍼져버렸으며, FA로 영입한 주전 유격수 노진혁 또한 허리부상으로 이탈하는 등 악재가 이어졌고, 외국인 선수 3인방인 찰리 반즈, 댄 스트레일리, 잭 렉스가 하나같이 부진한 점 또한 팀에는 악재가 되었다. 그나마 시즌 초반 좌완 불펜으로 번뜩이는 활약을 해 준 김진욱도 예전의 답없는 모습으로 돌아가버렸고, 특히 시즌 초반부터 일관되게 부진으로 일관한 한동희는 골수 롯데팬들의 욕받이 대표가 되었다. 여기에 코칭스태프 간 마찰로 시즌 도중 큰 폭의 코칭스태프 개편이 이뤄지는 등 DTD 기간동안 안되는 집안의 전형적인 모습은 다 보여주다시피 했다.

그나마 코칭스태프를 개편한 6월 27일부터 힘겹게 3연승을 거두며 36승 33패로 조금 올라가 한숨을 돌리긴 했지만, 앞서 언급된 악재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라서[62] 7월에도 퐁당퐁당식으로 승패를 기록했다. 그 와중에 어떻게든 승률 5할은 무너뜨리지 않고 지켜왔으나, 전반기 마지막 NC와의 3연전에서 우천취소된 첫 경기를 제외한 나머지 2경기를 2:11, 3:13으로 잇달아 대참패를 당하며 결국 38승 39패, 승률 5할 이하로 팀순위 5위에 그치며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전반기 종료 후 부진했던 외국인 투수 댄 스트레일리와도 결별하고 대체선수로 애런 윌커슨을 영입했으며, 이미 퇴출된 외야수 잭 렉스를 대신해 유틸리티 내야수 니코 구드럼을 영입했다. 또한 7월초 다시 복귀한 최준용과 더불어 그간 부상으로 이탈했던 안권수 고승민, 노진혁을 조기복귀 시켜가면서까지 베스트 전력을 꾸리려 애썼다.

후반기 시작 후 키움을 상대로 루징을 거두고 두산 상대로 위닝을 거뒀지만, KIA 상대로 피스윕을 당하면서 7월 성적이 5승 12패에 그쳐서 41승 45패로 승패마진이 -4가 되었다. 8월을 시작하는 홈 6연전에서도 NC에게 루징을 거두고 이어진 SSG와의 3연전도 첫번째 두번째 경기를 모조리 패하며 승패마진 -7이 되었으나, 8월 6일 SSG와의 3연전 마지막 경기에서 애런 윌커슨 구승민, 김원중이 이어던지며 1:0으로 팀 역사상 최초이자 KBO 리그 역대 3번째 노히터 게임을 완성해 반전의 계기를 만들었다. 이때부터 8치올을 재현하려는 듯 8월 8일부터 키움, KIA에 모두 위닝을 거뒀고, 특히 15~17일동안 벌어진 SSG와의 리턴매치 3연전을 모두 쓸어담는 스윕을 달성하며[63] 승패마진을 -1로 줄이고 5위를 0.5게임차로 추격하며 팀 사기는 최고조에 올랐다. 복귀한 안권수와 고승민, 노진혁은 전반기 초반의 좋은 폼을 회복하지 못했고 구드럼 또한 영 좋지 못한 활약에 그쳤지만, 윌커슨이 '사직 예수'라는 별칭을 얻을 정도로 원래 스트레일리에게 기대했던 1선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고, 후반기부터 중용되며 8월까지 무려 4할타율을 기록하며 기세를 올린 방출 영입생 이정훈과, 마찬가지로 그동안 타격에서 물방망이 만렙으로 팬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포수 정보근이 갑작스레 타격 포텐이 터져 한때 4할타율을 찍으며 야구 커뮤니티에서 롯데팬 타팀팬 할 것 없이 화제가 되며 팀의 상수가 되어준 탓이 컸다. 그러나...

이랬던 롯데가 귀신같이 연패를 시작하는데, 8월 18일 꼴찌 키움과의 3연전 첫 경기에서 8회까지 3:2로 앞서던 경기를 8회말 역전 쓰리런 홈런을 얻어맞고 멸망하더니, 나머지 두 경기를 모두 패해 스윕패를 당했다. 우천취소로 인한 강제 휴식 이후 24일 재개된 잠실 LG전에서도 1:3으로 무기력하게 패했고, 롯데 입장에선 복수혈전이 되어야했던 kt와의 사직 3연전을 모조리 패하며 7연패의 시궁창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특히 8월 26일 kt와의 3연전 두 번째 경기에서 7회까지 5:2로 앞서며 승기를 잡아놓고도 8, 9회에 걸쳐 믿었던 필승조인 구승민 김원중이 도합 6실점으로 거대한 불을 질렀고, 구드럼의 결정적인 실책까지 더해지며 8:6으로 충격의 역전패를 당한 게 굉장히 컸다. 결과적으로 이날 경기가 서튼 감독의 마지막 경기가 되어버렸으며, 이전부터도 건강 문제로 종종 자리를 비웠던 서튼 감독은 이 경기에 대한 충격이 컸던지[64] 다음날 경기에 건강 문제로 팀을 지휘하지 못했고 팀은 또 패하며 7연패 달성. 결국 그 다음날 서튼 감독은 자진 사임으로 시즌 도중에 물러나고 말았다.[65] 서튼이 물러난 후 이종운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으로 잔여시즌을 맡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7연패를 당하며 8치올에 실패하였고 사실상 이 시점에서 가을야구 가능성이 희박해졌다. 특히 kt에게 내리 10연패로 호구잡힌 것과 더불어, 고비마다 꼴찌팀에게 스윕패를 당한 게 결정적이었다.[66] 그나마 8월 마지막 경기인 한화전에서 이기면서 간신히 7연패를 끊었지만 8월 한달간 10승 13패로 최악만 면한 상황이다.

9월부턴 연승도 연패도 3게임 이상 이어지지 않는 퐁당퐁당식의 승패를 거두며 좀체로 승률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9월 28일 현재 61승 67패로 승패 마진은 -6이다.그리고 5위 KIA와는 4.0게임차로 희박한 확률로 희망고문 중이다. 참고로 5강 트래직넘버는 11이다. 필승조 김상수 구승민의 부상 이탈로 헐거워진 전력으로도 나름 선방하는 와중 SSG의 역대급 추락과 더불어 9월 마지막주부터 4연승을 이어가 5위 SSG를 3.5게임차로 좁히며 실낱같은 희망을 쫒았지만, 10월 2일 홈에서 열린 삼성과의 더블헤더 2경기를 모조리 패하며 이 시점에서 사실상 가을야구 탈락 선고를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10월 10일 LG에게 0-7로 지면서 트래직 넘버가 모두 소멸해 가을야구에서 탈락한 건 물론 두번째 비밀번호도 쓰고야 말았다.

성민규 단장 부임 이래 4년차로 FA까지 3명을 풀로 지르며 반드시 성적을 내야만 했던 시즌이었던데다[67] 무려 6월까지 1위도 몇 차례 찍어보고 승률도 6할 이상으로 잘나가던 팀이 그야말로 제대로 DTD를 해버려 그 어느때보다도 충격파가 큰 시즌이었다. 덤으로 함께 20년 이상 한국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던 LG 트윈스마저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바람에 그 충격의 크기만큼 시즌 종료 후 후폭풍도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결국 정규시즌이 종료되고 며칠 뒤 구단측에서 발빠르게 김태형을 신임 감독으로 선임하면서 후폭풍의 서막을 알렸다. 유독 프런트 중심의 운영을 선호하는 롯데가 다수의 우승 경험이 있는 강성의 감독을 선임한 건 구단 역사상 최초라 굉장히 이례적인 무브이며, 수 년 전부터 야구단을 직접 챙기기 시작한 구단주 신동빈 회장의 의중이 강력하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68] 으로 이와 더불어 성민규 단장이 재계약 1년차에 중도 경질되었으며, 이종운 감독대행을 비롯해 전준호, 박흥식 코치 등 기존 코치들 8명이 대거 팀을 떠나게 되었고 이 빈자리는 김광수, 김민재, 김주찬, 고영민. 김민호 등 김태형 감독과 현역-지도자 시절 함께 했던 코치들이 채우게 되었다.

7.2. 3차 암흑기, 김태형 감독 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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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규라는 단장이 쌓아둔 유망주의 팀에 영입된 21세기 KBO 최고의 명장 중 하나, 김태형 감독을 선임하며 암흑기를 벗어나려 하는 시기이다.

부임 첫해 많은 부상과 투수진의 핵심 선수들의 부진이 이따라 10위로 쳐지며 암흑기의 연장이 눈 앞에 다가왔지만 손호영 트레이드의 성공과 윤나고황이라는 유망주의 성장을 성공시키며 가을야구의 꿈을 향해 다가가고 있다.

7.2.1. 2024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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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장 김태형 감독을 영입해 의욕적으로 시작한 시즌이었으나 개막하기 전부터 나균안의 사생활 문제로 잡음이 있었고, 김민석 한동희가 각각 부상으로 이탈하는 등 불안함의 전조를 보였다.

그리고 역시나 SSG와의 개막 2연전을 모두 패한걸 시작으로 4연패로 시즌을 시작했다. 홈 개막전을 잡아내 첫 승을 신고했으나 다시 연패가 시작되었고, 그 와중에 4월 2일 한화전은 9회말 무사만루 대위기를 김태형 감독의 용병술로 막아내고 1:0 진땀승을 거둔 뒤 주말 두산과의 3연전에서 첫 위닝을 거두며 반전을 꾀했으나, 그 다음 삼성과 키움에 내리 스윕을 당하고 4월 17일까지 꼬박 8연패로 최하위에 떨어진 뒤 반등하질 못하고 있다. 새로 영입한 외국인 선수 빅터 레이예스 혼자만 야구한다는 소리가 나올정도로 타선은 한때 팀 wRC+ 60대에 그칠만큼 역대 KBO 리그 전체를 통털어 최악의 물방망이질을 했고, 투수쪽도 박세웅을 제외한 선발진의 전원 부진과 더불어, 필승조 구승민이 완전히 무너져 2군에 내려가 불펜도 차질이 생겨 신인 전미르가 중용될만큼 투타가 모조리 붕괴해 김태형 감독조차도 손을 쓰질 못하는 상황이다. 2023시즌을 앞두고 총액 170억에 영입한 FA 3인방 유강남, 노진혁, 한현희는 한때 셋다 사이좋게 2군으로 사라졌었으며, 급히 즉시전력감을 수혈하느라 사이드암 유망주 우강훈을 내주고 손호영을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단행했고, 김민석 한동희를 조기 콜업시켜 분위기 반전을 꾀해보려 했으나 둘은 최악의 부진에 허덕이며 다시 2군에 내려갔다.

그 즈음 심재민까지 사생활 문제가 불거지자 팬들은 이제 이 팀은 욕하기도 지친다는 식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4월 마지막 주말 NC와의 3연전도 내리 3연패로 스윕을 당했고, 4월 마지막 경기인 키움전을 또 패하면서 4연패로 4월을 마감했다. 4월까지 8승 21패 1무의 단독 최하위로 5위와의 게임차는 벌써부터 7게임이나 벌어져있는 상태다.

5월 첫경기도 그나마 필승조로 버텨주던 전미르가 7회초 구원등판해 4실점으로 와르르 무너지며 또 패해 5연패에 빠졌으나, 다음날부터 갑작스레 팀이 5연승을 거두며 조금 살아나는가 싶었다. 그러나 워낙에 4월 승률이 좋지 않아 5연승을 했음에도 팀순위는 꼴찌에서 한계단도 못올라갔으며, 그나마도 5연승 후 LG와의 주말 홈 3연전을 또 스윕당하는 등 다시 연패에 빠지며 갈길이 멀다는 냉혹한 현실만 보여주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4번타자이자 주장인 전준우, 팀내 서열 2위 정훈, 트레이드되어와 제법 잘 해주던 손호영이 줄줄이 부상으로 이탈하는 악재를 맞았으나 '마황' 칭호를 얻을정도로 종횡무진 활약해준 황성빈의 발야구로 몇 게임을 건진데다, 고승민의 2루수 컨버전 성공, 부진한 노진혁 대신 주전 유격수로 나선 이학주의 활약과 더불어[69] 유강남, 윤동희의 폼이 올라오는 등 센터라인이 안정화된데 힘입어 5월 승률은 4월의 처참했던 승률보단 꽤 좋아졌다. 여세를 몰아 5월 20~22일 1위 KIA와의 홈 3연전을 모두 쓸어담는 스윕을 달성하고[70] 뒤이은 삼성과의 주말 홈 3연전도 위닝을 거두며 해당 주간 5승 1패로 간신히 탈꼴찌에 성공했다. 그러나 5월 마지막주 한화와의 주중 원정 3연전에선 감독이 막 사퇴해 뒤숭숭한 한화였음에도 첫 경기를 3:13으로 대패해 다시 꼴찌로 내려앉았으며, 뒤이은 두 경기도 0:3, 0:15의 대참패로 스윕을 당하는 등 5월도 여전히 꼴찌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분명히 경기력이 올라온 것은 고무적이었고, 실제로 6월 한 달동안 무려 6차례나 위닝을 거두며 월간 승률 1위에 등극해 6월말 기준으로 꼴찌에서 7위까지 순위를 끌어올렸다. 비록 선발진의 부진은 여전했지만 시즌 초 물방망이가 언제 그랬냐는 듯 폭발적인 타격으로 이를 상쇄하는 화끈한 야구를 펼쳤으며[71] 그 와중에 역대 KBO 정규이닝 최장시간 3위 경기와 더불어 MLB & NPB까지 포함해도 역대 최초인 13점차를 뒤집는 경기까지 만들며 대첩을 두 개나 생산했다. 이 기간동안 손호영이 30경기 연속 안타를 치며 분위기를 이끄는 호재도 있었고, 홈런을 칠 때마다 덕아웃에서 선수들이 둘러모여 격한 세리머니를 펼치는 광경이나 #[72] 심지어 김태형 감독이 경기 도중 선수에게 장난치는 모습까지 포착되는 등 # 밝아진 팀 분위기와 함께 타격으로 위닝시리즈를 가져오는 경기가 늘어나면서 많은 롯데팬들은 과거 로이스터 시절처럼 순위와 별개로 야구볼 맛이 난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6월말부터 장마로 인한 우천취소가 이어지다 전반기 종료 직전 치러진 두산과의 잠실 원정 2경기를 모두 내주며 35승 42패 3무 승패마진 -7로 전반기를 마무리했다. 비록 순위는 8위지만 5위와의 게임차는 3게임차로 많이 줄여놓은 상태이다.

하지만 결국 9월 24일자로 트래직 넘버가 소멸하며 7년 연속 가을야구 실패로 비밀번호를 작성하게 되었다.

7.2.2. 2025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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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A78877라는 비밀번호 작성을 끊어내는것이 매우 중요한 시즌으로 김태형 감독의 2년차이다.

8. 기타 역사

8.1. 역대 암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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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 역대 상대전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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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역대 트레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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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4. 역대 은퇴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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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순번 <colcolor=#000> 이름 <colcolor=#000> 활약 기간 <colcolor=#000> 날짜 <colcolor=#000> 비고
1, 2호 한문연 1983년 ~ 1992년 1992년 7월 7일 구단 최초 은퇴식
합동 은퇴식
노상수 1982년 ~ 1991년
3, 4, 5호 장효조 1989년 ~ 1992년 1992년 9월 26일 합동 은퇴식
유두열 1983년 ~ 1992년
박영태
6, 7호 김민호 1984년 ~ 1996년 1996년 9월 7일 구단 최초 은퇴 경기
합동 은퇴식
한영준 1985년 ~ 1996년
8호 윤학길 1986년 ~ 1997년 1997년 8월 13일
9호 김응국 1988년 ~ 2003년 2004년 6월 6일
10호 박정태 1991년 ~ 2004년 2005년 4월 5일
11호 주형광 1994년 ~ 2007년 2008년 4월 1일
12호 염종석 1992년 ~ 2008년 2009년 4월 5일
13, 14호 박현승 1995년 ~ 2009년 2012년 4월 14일 합동 은퇴식
최기문 1999년 ~ 2010년
15호 조성환 1999년 ~ 2014년 2014년 8월 23일
16호 이대호 2001년 ~ 2011년
2017년 ~ 2022년
2022년 10월 8일 영구 결번
은퇴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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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타 구단들과는 다르게 합동 은퇴식으로 자주 치뤄주는 편이었다. 첫 번째 은퇴식은 최동원의 전담 포수로 활약했던 한문연과 언더핸드 에이스였던 노상수이며 가장 최근에 열린 은퇴식은 롯데 자이언츠의 두번째 영구 결번 이대호다.

2016년 롯데 자이언츠에 FA 계약으로 이적해 4년간 팀의 마무리 투수로 활약하고 현역 은퇴를 선언했던 손승락도 구단에서 은퇴식을 치뤄줄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이례없는 대유행으로 연기되었고 그 사이 손승락이 KIA 타이거즈 전력강화 코디네이터로 부임하게 되면서 취소되었다. 당시 손승락은 롯데 팬들을 위해 롯데에서 기록한 94세이브를 의미하는 글러브 94개를 선물로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었다.

영구 결번 중 한 명인 최동원의 경우 공식 은퇴식이 열리지 않았고 사후에 추모 행사와 영구 결번식만 진행되었다.[73]

9. 여담

롯데가 얼마나 한국시리즈 진출 공백이 긴지는 그 이후 한국 야구 역사만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지금은 해체된 현대 유니콘스도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 이후에 3번 진출( 2000년, 2003년, 2004년)해서 모두 우승했다. 즉 2000년 1월에 해체된 쌍방울 레이더스를 제외한 전현직 모든 구단은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을 경험했고, 그 쌍방울도 마지막 시즌이 롯데가 한국시리즈에 오른 1999 시즌임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전현직 모두라고 봐도 틀린 말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롯데의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 연도인 1999년 이후 롯데는 고작 가을야구만 7번[74] 나가는 데 그쳤고[75], 한국시리즈는 단 한번도 나간 적이 없다.

그리고 1999년 마지막 한국시리즈 진출 이후 지금까지 정규시즌 최고성적은 2011년의 2위였는데 이때도 플레이오프에서 SK에게 2승 3패로 업셋당하는 바람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고, 심지어 다음 단계로 올라간 것도 2012년 준플레이오프[76] 단 한 번 밖에 없을 정도다.

한편 롯데 자이언츠는 부산에 연고를 둔 프로구단 중에서도 21세기의 유일한 결승 무관팀[77]인 건 물론 경상도 전체로 넓혀도 결승전을 경험해보지 못한 현직 프로구단은 경남개발공사 여자 핸드볼단 롯데 자이언츠 단 둘 밖에 없을 정도다.[78]만약 2024-25 핸드볼 H리그에서 경남개발공사가 결승전에 진출만 하더라도 부산은 물론, 영남권 통틀어서 유일한 21세기 결승전 무관팀이 된다.


[1] 시범 경기나 친선 경기는 제외. [2] 1차리그 풀 리그는 4전 전승으로 우승, 결승리그에서 준우승. [3] 데뷔 첫 해 최우수상을 받은 건 77년 김재박 이후 처음이다. 그리고 전기리그에서 거둔 13승 2패 중 12승을 최동원이 거뒀다. [4] 당시 최약체 팀이었던 삼미만 아니었으면 최하위였다. 2005년 당시 KIA의 승률이 0.389였던 것을 보면 어느 수준이었는지 예상이 될 것이다. [5] 하지만 삼미는 개막전 승리를 마지막으로 한 달 남짓 18연패를 적립하다가 4월 말에야 최계훈의 완봉역투로 MBC 청룡을 잡아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삼미는 구단 매각을 발표했다. [6] 참고로 당시 삼성이 통합우승을 확정 지은 곳은 바로 구덕 야구장이였다. [7] 13승 [8] 74완투승 26완투패이며 완봉승은 총 20회를 기록했다. [9] 게다가 규정타석을 채우지 못한 강성우의 .303까지 포함하면 라인업 가운데 3할타자가 6명이었다. [10] 당시에는 역대 2위, 현재는 역대 4위, 1위는 1987년 3할을 기록한 삼성 [11] 1992년 당시의 롯데와 2001년 두산, 2015년 두산에서만 나온 기록이며, 일본의 경우도 2010년 지바 롯데에서 사상 최초로 나온 기록이다. [12] 상대 팀 감독도 공교롭게도 김영덕 감독이었다. [13] 물론 이 시즌은 비단 롯데뿐만 아니라 KBO 리그 역사상 최악의 투고타저 시즌이었던 탓에 다른 팀들도 미친듯이 타격이 하락한 해이긴 했다. 그나마 삼성 정도가 괴물신인 양준혁과 부활한 김성래를 축으로 위력적인 타격을 보유했을 뿐...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이 시즌 롯데의 타격지표 하락은 매우 심각한 수준이었다. 팀타율도 .248에 그쳤고 전술했듯이 한 시즌 팀 홈런 29개는 그 무슨 말로 쉴드를 쳐도 쉴드가 되지않는 막장 기록이다. 그나마 김민호가 11개의 홈런으로 간신히 두 자릿수 홈런을 쳐서 망정이지 김민호 아니었으면 한 시즌 내내 두 자릿수 홈런 타자가 아무도 없는 기록까지 함께 작성될 뻔 했다. [14] 그간 부동의 4번타자 김민호가 통산 100홈런을 넘기며 나름 선방했지만, 엄밀히 따지면 홈런타자라기보단 중장거리 타자에 가까웠다. [15] 만약 롯데가 우승했다면 김용희 감독은 선수, 코치 그리고 감독으로써 모두 한팀에서만 우승을 이룰수 있었다. [16] 그래도 이 시즌 2완투를 추가해 통산 100완투라는 불멸의 대기록을 작성했다. [17] 이 시즌은 상위 네팀과 하위 네팀의 승률이 극단적으로 엇갈렸다. 1위와 4위의 게임차가 고작 4.5게임인 반면 4위 현대와 5위 롯데의 게임차는 무려 9.5게임... 이렇게 된 이유에는 전반기까지만 해도 중위권 경쟁을 벌였던 OB와 LG가 신인 드래프트를 위해 대놓고 최하위를 차지하려고 한 탓도 있다. [18] 심지어 이 해 롯데가 막장인게 전해에 꼴찌를 한 덕택에 외국인 선수 드래프트에서 전체 1순위로 빅터 콜을 뽑았지만, 계약 조건을 맞추지못해 영입조차도 하지 못했다. 결국 상대적으로 염가인 덕 브래디 한 명만 활용했는데 이러니 성적이 잘 나올 턱이 있나... [19] 당시 플레이오프는 리그 1위팀이 상대리그 2위팀, 리그 2위팀은 반대로 상대리그 1위팀을 7전 4선승제로 상대해야 했다. 그래서 매직리그 1위인 삼성을 피하기 위해선 롯데가 드림리그 1위가 되어야 했다. [20] SK는 1999시즌의 쌍방울 전력을 거의 그대로 가져온 거라 좋은 성적을 기대하기에는 어려웠고, 한화는 투수진이 폭망해서 시즌 초부터 일찌감치 떨어져 나갔다. [21] 박정태도 마해영과 마찬가지로 선수협에 적극적으로 가담해 활동했지만 팀의 간판스타라 차마 박정태만은 건드리지 못했다. [22] 익히 알려진 대로 선수협 사태의 주동자로 찍혀 보복성으로 트레이드 됐다. 1988년 최동원 김용철의 사례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23] 한편 한국시리즈 우승팀 두산은 732득점 733실점으로 득실차가 -1이었다. [24] 사실 이중 계약 파동으로 논란을 겪은 건 롯데만이 아니었다. 한화도 2002년 프란시스코 캄포스라는 투수를 영입했으나 밀워키로 뒤통수 치고 가버렸다(...) 그리고 대체 선수가 바로 레닌 피코타이다. [25] 16연패 도중 축구 대표팀은 월드컵 조별리그 첫 경기 폴란드전부터 독일과의 준결승까지 치렀다. [26] 모든 구단 역사상 뒤에서 1등은 1982년 승률 0.188의 삼미 슈퍼스타즈, 2위는 주전을 모조리 팔아치웠던 1999년 승률 0.224의 쌍방울 레이더스. [27] 이나마도 백인천의 안목을 믿지 못한 구단 프런트에서 현장과 조율하지 않고 거의 독단으로 뽑아오다시피한 대체 용병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이 나름 괜찮은 활약을 해주며 백인천은 선수보는 눈이 프런트보다도 못하다며 또 까이게된다. [28] 그 1승조차도 19차전, 즉 마지막 경기에서 겨우 거둔 1승이다. [29] 백인천이 있었을 땐 현대전 1승 14패, 삼성전 1승 13패, KIA전 1무 13패로 세 팀 상대 합쳐 2승 1무 40패 승률 4푼대라는 말도 안 되는 성적이었다. [30] 두번째 3년 연속 꼴찌는 한화 이글스가 2012년부터 2014년까지, 세번째는 KT 위즈가 2015년부터 2017년까지, 네번째는 한화 이글스가 2020년부터 2022년까지 기록하였고, KT위즈는 그당시 신생팀이란것을 감안해야한다. [31] 그 한화 이글스마저도 4년 연속 꼴찌를 한 적은 없다. [32] 고참 선수들을 의도적으로 내치는 과정에서 고참들과 하나같이 척을 지는 바람에 투수조의 모 고참선수와는 기자들이 지켜보는데서마저 서로 언성을 높이는 불미스러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고, 젊은 선수들을 중용하면서 너무 싸고돌았는지 당시 모 신인선수는 팬들이 보는 자리에서 감독을 우습게 여기며 양상치라는 멸칭을 함부로 불러대는 등 선수단 장악에 실패했다는 모습을 고스란히 노출하고 말았다. 물론 이는 초보 감독이자 당시 최연소 감독으로 어린 나이에 감독직을 수행한 양상문의 시행착오 정도로 봐야 한다. [33] 2016년에는 상대전적 1승 15패라는 엄청난 굴욕을 겪었다. [34] 실제로 8월 중순 손등 골절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타점 단독 1위에 무려 116타점을 쌓아놓은 상태라 150타점이 산술적으로 불가능한 수치가 아니었을 뿐더러, 시즌 초반 15경기 30타점을 올릴때같이 다시 한 번 스퍼트를 낸다면 이승엽의 144타점 기록을 넘어 충분히 150타 이상이 가능하단 평가를 받았지만 부상으로 잔여시즌을 대부분 결장하게 되면서 기회가 날아갔다. 당시 홍성흔은 안타를 치고 주자로 나갔을 때 타 팀 후배선수들에게 "형 진짜 올해 타점 기록 깨시겠는데요?"라는 식의 응원도 많이 들었고, 타점 기록 보유자인 이승엽도 홍성흔에게 자신의 기록을 깨라며 응원을 보내주는 등 팬들 뿐 아니라 야구인들까지 모두가 홍성흔의 기록 경신을 기대하는 분위기였지만, 안타깝게도 부상으로 기회 자체가 날아가버렸다. [35] 양승호의 부임 당시 반응은 '20년 동안 우승하지 못한 것'이 로이스터의 해임 사유였는데 후임 적임자로 적당한지에 대한 의문이 컸고 무엇보다 양승호 본인이 인품이 좋다는 이미지는 있지만 성적을 잘 뽑아낸 실적이 아직까지는 없어 여론은 그냥 로이스터에게 돈 주기 싫어서 뽑았다는 쪽이 지배적이어서 감독 부임 초기에는 평이 좋지 않았다. 물론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감독으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어 부임 기간동안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하는 성과를 이루어내었다. 게다가 역대 롯데 감독 승률 1위 기록 및 정규리그 단일시즌 최초 2위를 기록하는 성과를 남겼다. [36] 패-승-패-승-패, 참고로 6년 뒤인 2017년 준PO때도 NC를 상대로 이 구도를 만들었다. [37] 1차전 9회말 1사만루 끝내기 찬스만 살렸어도 한국시리즈에 진출할수 있었다. 외야플라이만 쳐도 이길 수 있는 상황에서 손아섭이 초구를 건드려 병살타로 말아먹고 팀은 연장에서 패하는 바람에 아직도 이때 얘기가 나오면 손아섭은 까이고 있다. [38] 최종 2위팀으로 기록되는 팀은 한국시리즈 준우승팀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플레이오프에서 진 팀이 3위라고도 할 수 있으나 정규시즌 4위로 준플레이오프를 이겨서 플레이오프로 간 팀은 져도 3위가 안 된다. (결국 정규시즌 2위나 3위만 최종 3위가 될 수 있다.) [39] 2008년에는 최종 순위가 3위였지만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게 스윕당해 최종순위는 4위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준플레이오프는 최종순위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이것은 3위에게 주어지는 약간의 어드벤티지. 그러나 만약 2008년에 삼성이 두산을 이기고 한국시리즈에 올라갔으면 롯데의 최종순위는 4위였을 것이다. 한국시리즈 진출 후 패배한 팀이 2위이기 때문에. [40] 이 시기 롯데 구단 직원 출신인 김태룡이 두산 단장으로 부임하여 롯데에 유리한 것으로 의심되는 선수이동을 많이 해서 두산팬들에게 까였는데 정작 두산 구단은 김태룡이 입사한 1990년부터 그가 롯데에 있을 때(1983~1989)보다 우승을 많이 했다. 그리고 꼴태룡이 되었다 [41] 1992년과 같이 0.563으로 2위다. [42] 다만 13시즌에는 시즌 최하위 팀이 대놓고 개그를 선보여서(...) 승률 5할 3푼 2리를 찍고도 5위를 한 것이다. [43] 여담이지만 한화와의 마지막 맞대결에서 승리했지만, 넥센 LG를 잡으면서 가을야구에 실패했다. [44] 이 사건은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국회의원까지 나서서 사법처리까지 촉구할 정도로 중대한 인권침해 행위이다. [45] 이문한 전 운영팀장이 공개한 카카오톡 캡쳐에서도 야알못이 훈수 두는 수준으로 세이버메트리션 코스프레를 하고 있는데, 진짜 세이버메트리션을 둔 팀 프런트는 별도 데이터팀을 두고 통계, 수학 및 야구 전문인력을 영입해 현장의 의견을 신중하게 듣고 분석한다. [46] 당시 LG는 중하위권이었다. [47] 그리고 NC는 이후 기아와의 전반기 마지막 3연전에서 스윕을 당하며 3위로 추락했다가 이후 DTD로 인해 두산과 3위 싸움을 하게 된 상황이다! [48] 결국 후반기 불펜으로 전환. [49] 사실 다른 투수들의 사정도 좋지만은 않다. 박시영의 경우 경기를 많이 뛰어서 구위가 많이 죽었으며, 손승락은 잊을때만 하면 가끔 블론이 나온다. 배장호는 패는 없었지만 6월 14일 경기 첫 패를 떠안았다. 그나마 롱 릴리프로 뛰고 있는 강동호 김유영이 잘해주고 있는 부분은 다행인 상황. [50] 9월 3일 경기에서 31호포를 쳐내면서 일단 30홈런-100타점은 성공했다. 3할 유지 여부가 관건. [51] 이대호 150억 + 손승락 60억 + 송승준 40억 + 윤길현 38억 [52] 2017년 KBO에서 발표한 자료 기준으로, 신인선수와 외국인선수는 계약금, 환율 등의 영향으로 인해 제외되었다. 연합뉴스 기사에서는 외국인선수와 신인선수를 제외한 연봉총액 1위가 KIA, 2위가 롯데라고 명시되고 있는데, 이건 이대호, 민병헌, 손아섭의 영향이 크다. [53] 홈런이 안 터지다 보니 오죽하면 강백호 선수와 김롯데 선수가 2018년 최다홈런 경쟁에 들어갔다는 농담도 돌았다. 민병헌의 경우 두산 재적시 월별 타격지표가 극과 극을 달렸다는 지적도 있었다. [54] 결국 이 국민청원은 부산일보 매일신문로 떴다. 그런데 삼성 텃밭인 매일신문 기사가 더 자세한 건 함정 [55] 2002년(97패)과 2003년(91패) [56] kt도 50승은 거두었다(...). 당시 성적은 50승 94패. [57] 시즌 도중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의 완화에 따라 경기장 정원의 10~20%선에서 유관중 경기를 치르기도 했지만, 롯데를 포함한 전 구단이 가장 많이 치른 경기는 무관중 경기였다. [58] 허문회 감독이 직접 짝짝이를 흔들며 선수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중계 카메라에 자주 잡혔다. [59] 물론 2018시즌 조원우 감독은 시즌이 끝나고 경질됐고, 2021시즌 허문회는 중도 경질이라는 점이 다르긴 하다. [60] 이날 경기에서 이대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장면이 고스란히 중계카메라에 잡혔다. [61] 약 15년 [62] 그 와중에 외국인 타자 잭 렉스는 결국 퇴출되었다. [63] SSG로 팀이 바뀐 이후 롯데가 최초로 거둔 스윕승이었다. [64] 실제로 9회초 구드럼이 게임을 터뜨리는 실책을 저질렀을때 눈에 띄게 안색이 좋지 않은채로 좌절하며 고개를 푹 숙이는 모습이 중계카메라에 잡혔다. [65] 야구계 일각에서는 예전 양상문의 사례처럼 자진 사퇴를 빙자한 중도 경질로 보고 있으나, 일단 공식 발표는 건강 문제로 인한 자진 사임이다. [66] 잘나가던 롯데가 추락하던 시작점이 꼴찌 kt와의 3연전 스윕패였고, 후반기 스퍼트를 내던 롯데가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 것 또한 꼴찌 키움과의 3연전 스윕패였다. [67] FA 3명이 모조리 커리어 로우 내지 그에 준하는 부진에 그쳐버린 점을 감안하면 참 운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3명이나 땡겨온 FA가 첫해에 셋 다 모조리 망한 사례는 유례를 찾기가 힘들다. [68] 이 팀이 40년 역사상 우승 경험이 있는 감독을 선임한 것은 롯데에서 우승을 한 적 있는 강병철의 두 차례 재선임을 제외하면 이미 현장 감각이 많이 떨어져있던 백인천 단 한 명 뿐이다. 그나마도 백인천의 우승 경력이래봤자 1990년 LG에서 해 본 딱 한번이며 타 팀에서 2회 이상 우승을 해 본 감독이 선임된 적은 아예 없다. 거의 대부분 코치 출신의 초보 감독이나, 이미 감독 경력이 있어도 우승은 고사하고 한국시리즈 문턱조차 밟아보지 못한 감독들이 롯데 감독으로 선임됐다. 김성근이나 김인식을 영입할 수 있는 타이밍에도 이를 배제하고 초보 감독 위주로 선임해온 롯데 입장에서 7년 연속 한국시리즈 진출과 3차례 우승 경력이 있는 김태형 감독 선임은 정말 파격적인 인사라고 할 수 있다. [69] 이 시기에 김태형 감독이 "이학주보다 수비 잘하는 유격수 없다"며 이례적으로 칭찬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학주는 이후 타격 감이 급격히 떨어지며 제 자리로 돌아가버렸다. [70] KBO 리그가 10개구단 체제가 된 이후 꼴찌팀이 1위팀을 스윕한 최초의 사례다. [71] 실제로 한때 1번부터 6번타순까지 3할타자들로만 라인업이 채워져 있을 정도였다. [72] LG 트윈스의 홈런 세리머니와 같은데 윤동희의 인터뷰에 따르면 다름아닌 LG에서 올시즌 롯데로 이적한 김민성이 제안해서 시작한 세리머니라고 한다. 우승팀의 사소한 것도 따라하며 우승 기운을 받기 위한 목적이었다고. [73] 이와 유사한 사례로는 삼성 라이온즈 이만수와 LG 트윈스의 김용수가 있는데 이만수는 은퇴식과 영구 결번식 모두 거행되지 않았고 김용수는 공식 은퇴식은 없었어도 현역 시절에 영구 결번식이 미리 거행된 적이 있다. [74] 2000, 2008, 2009, 2010, 2011, 2012, 2017 [75] 대부분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하였다. [76] vs 두산, 3승 1패 [77] 부산시설공단 여자 핸드볼단은 2019-20, 2022-23 시즌에 경험했으며, 부산 KCC 이지스는 부산 연고 이전 이후만 봐도 2023-24 시즌에 우승했고, 부산 BNK 썸은 2022-23 시즌에 결승전을 경험했으며, 부산 아이파크조차도 K리그 우승은 없지만 FA컵에선 2004년에 1번 우승했고, 2010,2017년에도 결승전을 경험했다. [78] 대구 한국가스공사 페가수스 타 지역에서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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