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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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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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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11171><colcolor=#FFFFFF>
경력
경력 ( 2014년 · 2015년 · 2016년 · 2017년)
평가 야구 스타일 · 2015년 · 2016년
관련 인물 아들 김정준 · 김응용 vs 김성근 · 인맥
구설 김성근/구설 · 김성근의 저주
관련 밈 절이 싫어서 중이 떠났는데 절이 쫓아와요 · 위기의 XX를 구할 마지막 희망 ·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 세이콘 드립
기타 별명 · 언론플레이 · 징크스 · 노리타 · 살려조 · 최강야구 · 최강 몬스터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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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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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시즌 로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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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011171><colcolor=#fff> 투수 11 이대은 · 13 장원삼 · 19 신재영
20 선성권 · 21 송승준 · 47 유희관 ·
포수 12 박재욱 · 27 이홍구
내야수 1 유태웅** · 2 최수현 · 4 서동욱 · 5 문교원** · 8 정근우 · 10 이대호 · 16 정성훈
외야수 '''24 김문호 · 29 이택근 · 33 박용택 · 37 정의윤'''
* : 임대 선수, ** : 아르바이트 선수
단장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장시원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38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1 이광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72 오세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32 김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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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11171><tablebgcolor=#011171> 파일:최강 몬스터즈 엠블럼.svg 최강 몬스터즈
역대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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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2c,#d3dade
초대 감독 대행 2대
이승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05.02.
~2022.10.17.)
박용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10.18.
~2022.11.06.)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11.07~ )
실제 경기일 기준
}}}}}}}}}}}} ||

대한민국 체육훈장 수훈자
파일:체육훈장.png
<colbgcolor=#EF8B01><colcolor=#F8D1A6> 연도 <colbgcolor=#F8D1A6><colcolor=#EF8B01> 1975년
이름 김성근
분야 스포츠
사유 체육발전유공
체육훈장기린장(5등급)

김성근의 수상 경력 / 보유 기록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파일:두산 베어스 우승 엠블럼 V1.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코치
1982


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1.svg 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2.svg 파일:SK 와이번스 우승 엠블럼 V3.svg
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감독
2007 2008 2010

파일:한국-대만 클럽 챔피언쉽 2010_logo.png.png
한대 클럽 챔피언십
우승감독
2010

파일:KBO 리그 로고(1982~2012).svg KBO 포스트시즌
1986, 2007, 2008, 2010 최우수 감독상

파일:제일화재 프로야구대상.png 2007, 2008 제일화재 프로야구대상 프로감독상

파일:스포츠서울.png 2008 프로야구 스포츠토토 올해의 상 올해의 감독상

파일:자랑스런 한국인 대상.png 2010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스포츠부문)

파일:일구상 로고.jpg 2010 일구상 일구대상

파일: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jpg 2012 조아제약 프로야구대상 공로상

파일:external/image.chosun.com/2012061801665_0.jpg 2012 카스포인트 레전드상

보유 기록
한국시리즈 최초 퇴장 감독[1] 2009 한국시리즈 5차전
단일 구단 최다 연승 감독 22연승(2009.08.25/문학 두산전 ~ 2010.03.03/잠실 LG전)[A]
단일 시즌 최다 연승 감독 19연승(2009.08.25/문학 두산전 ~ 2009.09.26/문학 두산전)[A]
}}} ||
김성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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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320><tablebordercolor=#131230><tablebgcolor=#131230> 파일:두산 베어스 엠블럼.svg 두산 베어스
역대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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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72c,#d3dade
<rowcolor=#fff> 1대 2대 3대 4대
김영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1983)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1988)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1990)
감독대행
이재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0)
이재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1)
<rowcolor=#fff> 4대 5대
6
7대
감독대행
윤동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1)
윤동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4)
감독대행
최주억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
김인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5~2003)
김경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11)
<rowcolor=#fff> 7대 8대 9대 10대 11대
감독대행
김광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1)
김진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2~2013)
송일수 파일:일본 국기.svg
(2014)
김태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5~2022)

이승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007f55><tablebgcolor=#007f55> 파일:현대 유니콘스 엠블럼.svg 현대 유니콘스
역대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fab93d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20272c,#d3dade
1982년 ~ 2007년
<rowcolor=#b21528> 초대 (삼미 초대)
2대 (삼미 2대, 청보 초대)
박현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
감독 대행
이선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
김진영1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1984~1985)
감독 대행
이재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rowcolor=#b21528> 2대 (삼미 2대, 청보 초대) 3대 (청보 2대)
감독 대행
이선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감독 대행
박현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감독 대행
신용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5)
허구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6)
<rowcolor=#fff> 3대 (청보 2대)
4대 (청보 2대, 태평양 초대)
5대 (태평양 2대)
감독 대행
강태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6)
강태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1988)
감독 대행
임신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1990)
<rowcolor=#ff9933> 6대 (태평양 3대)
7대 (태평양4대)
8대 (현대 초대) 9대 (현대 2대)
박영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1)
정동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5)
김재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2006)
김시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
윗첨자1 : 김진영 감독이 1983년 중반 폭행 사건으로 인해 현장에 복귀하지 못했고 이재환, 이선덕 코치, 박현식 고문이 감독 대행직을 맡았다.
1985년에는 18연패로 인해 신용균 코치가 임시로 대행을 맡았고 모기업이 청보로 넘어가자 다시 복귀했다.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width=480><tablebordercolor=#074ca1>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삼성 라이온즈
역대 감독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ecd00> 1대 2대 3대 4대 5대
서영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1983)
박영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1988)
정동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1990)
<rowcolor=#fff> 6대
7대
8대 9대 10대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1~1992)
우용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3~1995)
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1997)
서정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8~1999)
<rowcolor=#fff>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김한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7~2019)
허삼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0~2022)
<rowcolor=#fff> 15대 16대 파일:삼성 라이온즈 워드마크.svg
감독대행
박진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bordercolor=#ea0029> 파일:KIA 타이거즈 엠블럼.svg KIA 타이거즈 2군
역대 감독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f> 초대 2대 3대 4대 5대
정유복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1991)
방수원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4)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5)
신용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1998)
김봉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2000)
<rowcolor=#fff> 6대 7대 8대 9대 10대
서정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
서정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
김종윤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
유남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
서정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05)
<rowcolor=#fff>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1]
장채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5)
차영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6~2007)
박승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
차영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8~2009)
김대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0~2011)
<rowcolor=#fff> 16대 [1] 17대 [1] 18대 [1] 19대 20대
박철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2)
한대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3)
김용달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
정회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5~2017)
박흥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8~2019)
<rowcolor=#fff> 21대 [1] 22대 23대 [1] 24대 25대
장태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
박흥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0)
이범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1)
정명원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
손승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
[1]: '총괄 코치'라는 명칭을 사용한 경우
※ 2002년은 공석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 align=center><tablebordercolor=#ffc81e><tablebgcolor=#ffc81e> 파일:PKPuIYF.png 쌍방울 레이더스
역대 감독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fc81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rowcolor=#000000> 초대 2대 3대
김인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0~1992)
신용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3)
한동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1995)
<rowcolor=#000000> 3대 4대
감독 대행
김우열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5)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1999)
감독 대행
김준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width=320><tablebordercolor=#074ca1><tablebgcolor=#074ca1> 파일:삼성 라이온즈 엠블럼.svg 삼성 라이온즈 2군
역대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074ca1,#5ea2f8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20272c,#d3dade
<rowcolor=#fff>
1대
2대 3대
4대
박창용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1989)
류영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0~1991)
박용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3)
김충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1995)
감독대행
조창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5)
<rowcolor=#fff> 5대 6대 7대 8대 9대
정순명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1997)
이철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8)
신용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0)
신용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2004)
<rowcolor=#fff>
10대
11대 12대 13대
장태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5~2009)
장효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0~2011)
감독대행
양일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1)
장태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2~2016)
성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7~2019)
<rowcolor=#fff> 14대 15대 16대 17대
오치아이 파일:일본 국기.svg
(2020~2021)
박진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
감독대행
최태원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
김재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정대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4~)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c30452><tablebgcolor=#c30452>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 LG 트윈스 2군
역대 감독
}}} ||
{{{#!wiki style="margin: 0 -10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bottom: -15px"
{{{#20272c,#d3dade
<rowcolor=#fff> 1대 2대 3대 4대
최정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1984)
류영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
감독대행
김충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8)
박현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0~1991)
박용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1996)
<rowcolor=#fff> 5대 6대 7대 8대
김영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1998)
이광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9)
김인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0)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
감독대행
김대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
<rowcolor=#fff> 9대 10대 11대 12대 13대
권두조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
김용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05)
김인식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6)
김영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2009)
<rowcolor=#fff> 14대 15대 16대 17대 18대
김기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0~2011)
김영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1)
노찬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2~2013)
김무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
조계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
<rowcolor=#fff> 19대 20대 21대 22대 23대
김동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5~2017)
송구홍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8)
황병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9~2021)
김동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1)
이종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2)
<rowcolor=#fff> 23대 24대 파일:LG 트윈스 워드마크.svg
황병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3)
서용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4~)
}}}}}}}}}}}}}}} ||

{{{#!wiki style="margin: -10px -10px"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c30452> 파일:LG 트윈스 엠블럼.svg LG 트윈스
역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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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5px -1px -11px"
<rowcolor=#ff0> 초대 2대 3대
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2~1983)
감독 대행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감독 대행
한동화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김동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3)
어우홍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4~1985)
<rowcolor=#ff0> 4대 5대 6대 7대
김동엽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5~1987)
감독 대행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
유백만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7~1988)
배성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89)
백인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0~1991)
<rowcolor=#fff> 8대 9대 10대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2~1996)
감독 대행
천보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6)
천보성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7~1999)
이광은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0~2001)
감독 대행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1)
<rowcolor=#fff> 11대 12대 13대 14대
김성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2)
이광환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3)
이순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4~2006)
감독 대행
양승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6)
김재박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07~2009)
<rowcolor=#fff> 15대 16대 17대 18대 19대
박종훈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0~2011)
김기태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2~2014)
양상문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4~2017)
류중일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18~2020)
류지현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2021~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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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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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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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1993)
강병철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1994~1998)
감독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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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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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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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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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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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근의 역대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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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B 베어스 등번호 38번
팀 창단 김성근
(1982)
박해종
(1984~1985)
OB 베어스 등번호 52번
팀 창단 김성근
(1983)
허준
(1984~1989)
OB 베어스 등번호 81번
팀 창단 김성근
(1984~1988)
김인식
(1995~2003)
{{{#ff9933 [[태평양 돌핀스|태평양 돌핀스]] 등번호 81번}}}
팀 창단 김성근
(1989~1990)
성기영
(1991~1993)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91번
팀 창단 <colbgcolor=#c0c0c0> 김성근
(1991~1992)
이재현
(2007)
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90번
팀 창단 김성근
(1995)
김성한
(2001~2004)
쌍방울 레이더스 등번호 91번
김인식
(1990~1992)
김성근
(1996~1999)
팀 해체
삼성 라이온즈 등번호 72번
서정환
(1998~1999)
김성근
(2000)
양일환
(2001~2008)
LG 트윈스 등번호 76번
천보성
(1993~1999)
김성근
(2001~2002)
유지현
(2007)
치바 롯데 마린즈 등번호 90번
에지리 료
(1995~1996)
김성근
(2005~2006)
타치바나 류지
(2007~2008)
SK 와이번스 등번호 38번
윤희상
(2004~2006)
<colcolor=#fff> 김성근
(2007~2011)
오수호
(2014)
한화 이글스 등번호 38번
안영명
(2014)
김성근
(2015~2017)
안영명
(2018~2020)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등번호 71번
다니엘 알바레스
(2021)
김성근
(2022)
사이토 가즈미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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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김성근 프로필 2024.jpg
<colbgcolor=#011171><colcolor=#fff> 최강 몬스터즈 No.38
김성근
金星根 | Kim Sung-keun[4]
출생 1941년 10월 30일[5] ([age(1941-10-30)]세)
교토부 교토시 우쿄구
본적 경상남도 진양군 미천면[6]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7]
신체 180cm[8], 82kg, A형[9]
종교 무종교[10]
가족 아버지 김찬숙[11], 어머니 이계수
3남 4녀 중 여섯째
배우자 오효순
아들 김정준, 딸 2명
학력 교토시립 시조중학교[12] (졸업)
교토부립 가쓰라고등학교[13] (졸업)
동아대학교[14] (명예 학사)
포지션 투수, 1루수
투타 좌투좌타[15]
소속팀 교통부 (1961)
기업은행 (1962~1968)
국가대표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1회 (1962)
지도자
[ 펼치기 · 접기 ]
마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69~1970)
기업은행 투수코치 (1970~1971)
기업은행 감독 (1972~1975)
충암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6~1979)
신일고등학교 야구부 감독 (1979~1981)
OB 베어스 투수코치 (1982~1983)
OB 베어스 감독 (1984~1988)
태평양 돌핀스 감독 (1989~1990)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91~1992)
해태 타이거즈 투수 인스트럭터 (1994)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5)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6~1999)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2000)
LG 트윈스 2군 감독 (2001)[16]
LG 트윈스 1군 수석코치 (2001)[17]
LG 트윈스 감독대행 (2001)[18]
LG 트윈스 감독 (2002)
치바 롯데 마린즈 1·2군 순회코치 (2005~2006)
SK 와이번스 감독 (2007~2011)
고양 원더스 감독 (2012~2014)
한화 이글스 감독 (2015~2017)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부 특별 어드바이저 (2022)
프런트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코치 카운슬러 (2018~2021)
응원가 라나에로스포 - 사랑해 #[가사][20]
상훈 체육훈장 기린장

1. 개요2. 학창시절 및 선수 시절
2.1. 일본에서의 초기 생활2.2. 재일동포 학생야구단과 대학 시절2.3. 일본 사회인 야구 시절2.4. 한국 실업야구 진출2.5. 한국으로의 영주귀국
3. 지도자 경력4. 지도자 은퇴 이후5. 야구 스타일6. 언론플레이7. 구설8. 김성근의 저주9. 징크스10. 야구계 인맥11. 별명12. 미디어 활동
12.1. TV12.2. 광고12.3. 홍보대사12.4. 저서
13. 발음/말투14. 야구인들이 말하는 김성근15. 기타16. 평가
16.1. 승리지상주의16.2. 관련 어록
17. 역대 감독 성적18.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前 야구인.

前 KBO 리그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SK 와이번스, 한화 이글스 감독이자 일본프로야구 치바 롯데 마린즈,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의 프런트 및 코치를 역임했다.

2022년 10월 16일, 50년의 다사다난 했던 코치, 감독 등 지도자 커리어를 접고 은퇴를 선언했다.[21] 지도자 은퇴를 선언했던 2022 시즌을 기준으로 80세(실제 만 나이로는 81세를 보름 앞둔 우리나이 82세), 일본프로야구 전체 구단 중 최고령 지도자였다.

2. 학창시절 및 선수 시절

파일:김성근 현역.jpg

2.1. 일본에서의 초기 생활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으나 상술한 대로 일본 국적이 아닌 한국 국적을 유지하였다. 이 때문에 재일교포로서 차별을 받았받았고 그 때문에 노력했다는 내용이 언론이나 매체에 자주 등장했지만[22], 정작 김성근 스스로는 재일교포라서 차별받은 적이 없다고 말한 바 있다.

김성근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초등학교 고학년때 싸움을 잘해서 이후로 괴롭힘을 당한 적이 없고, 싸움을 잘해서 중고교 시절 학교의 주류에 있었으며 세간에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조선인이라고 차별이나 피해를 당하지는 않았다고 한다.[23] 한 번은 자신이 학생들을 주도해서 단체로 수업을 째고 도망가서 여선생이 울었다는 일화를 말하기도 했다. 그만큼 자신이 학교에서 주도적인, 이른바 인싸였다고 한다. 게다가 자신이 조선인 출신이라는 걸 아는 학생도 별로 없었지만, 안다고 해도 별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고3 때 재일동포야구단에 포함되면서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전교생이 다 알게 되었지만 전혀 차별받거나 불편한 점은 없었다고 한다.
파일:김성근 가쓰라 고교 시절.jpg
일본 교토 가쓰라 고등학교 시절

김성근은 교토 헤이안고를 비롯한 지역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하고 공립고교인 교토 가쓰라고에 입학했다. 야구 실력은 출중했지만 가난과 재일교포로 차별받았기 때문에 명문고 입학이 좌절되었다고 매체를 통해 알려져 있었고, 이러한 내용은 역시 노리타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며 김성근을 차별의 희생자로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김성근 본인은 지역 야구 명문고에 진학하지 못한 것도 차별보다는 순전히 실력 문제였다고 스스로 인터뷰한 바 있다. 2011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성근은 그동안 "고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나의 야구 실력은 평범했다. (실력이 부족해서) 교토의 야구 명문고인 헤이안(平安)고교 진학은 꿈도 꾸지 못했다."라고 덤덤히 말했다. #

가쓰라고에도 야구부가 있긴 했지만 야구부라고 말하기 민망할 정도였다. 김성근의 자서전이나 인터뷰를 살펴보면 가쓰라고의 야구부는 운동부로서의 야구부가 아니라, 일반계 고등학교에 있는 방과후 특활반 개념의 야구부였음을 알 수 있다. 김성근의 인터뷰에 따르면 당시 가쓰라고에서는 야구부라도 주5일 동안의 정규 수업에 모두 정상적으로 참여해야만 했고 주말에만 경기했다고 한다. 심지어 장비는 커녕, 훈련할 수 있는 운동장도 없었다. 포지션별로 선수조차 제대로 갖추어지 못해서 경기를 치르기 위해서는 다른 운동부에서 선수를 꾸어와야 할 정도였다. 또 고교 시절 김성근은 항상 야구만을 생각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김성근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학창 시절 축구, 마라톤, 수영 등 다양한 종목을 했다고 한다. 특히 축구부에서 수비수로 뛰었고, 그때 등번호까지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야신'의 축구 실력은?.
"가쓰라 고등학교 때 감독이 일반 교사였는데 한 달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해서 배울 게 없었어요. 나머지는 내가 창조하고 창의해서 해야 했죠. 야구잡지에 나오는 선수들의 연속사진을 보고 흉내 내면서 배웠어요."
- 김성근 "野神을 만든 건 두번의 '神내림'… 눈이 확 뜨였죠"
훈련이라고는 돌멩이를 강에 던지는 것이 전부였다.
- 김성근이다: 감독으로 말할 수 없었던 못다한 인생 이야기

이 과정에서 김성근은 처음으로 투수를 하게 되었다. 본래 우익수였으나 고등학교 시절 3학년들이 졸업하고 던질 투수가 한 명밖에 남지 않게 되자 한번 나가서 던져보라고 시킨 것이 그 시작이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제대로 된) 투수가 아니었다고.

아무튼 이런 수준의 가쓰라고 야구부가 전국대회에 나가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고, 가쓰라고 야구부를 졸업하고 대학이나 프로로 진출하여 야구 생활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김성근 역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야구를 접어야할 운명인 듯 했다. 그런 김성근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나타났다.

2.2. 재일동포 학생야구단과 대학 시절

고교 졸업반 시절인 1959년, 김성근은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당시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재일 대한야구협회에서 기획하였는데, 이 당시 재일 대한야구협회가 오사카에 있었기 때문에 오사카, 교토 지역 출신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가쓰라고교는 사실 별볼일 없는 팀이었지만, 김성근은 3학년 때 예선에서 나름 빼어난 활약을 하면서 여기에 포함될 수 있었다. 이렇게 김성근은 1959년 제4회 재일동포학생야구단에 포함되어 처음 한국 땅을 밟게 되었다.

그러나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은 김성근 관련 서적이나 기사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최정예가 아니었고, 오히려 비주류 선수들 위주로 구성되었다. 정확히 서술하면 조금이라도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있는 경우는 제외되었고 고시엔 출전 가능성이 없는 사람만 차출되었다. 때문에 야구 명문고에 재학하는 학생들은 대부분 재일동포 학생야구단에서 빠지게 되었다. 김성근 옹호자들은 장훈의 경우를 들며 반박하지만, 장훈은 오사카 나니와 상고의 4번타자였으나 나니와 상고 폭력 사태 가담 누명을 쓰고 고시엔 출전이 좌절되었던 것이다.

한편 김성근이 고3이었던 1959년, 김성근의 홀어머니는 북한의 재일교포 북송사업에 지원했고 김성근 가족은 곧 북한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만민이 평등하며 모두가 ' 이팝(쌀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을만큼 부유한 나라가 됐다"는 북한의 선전에 혹해서 김성근 가족도 북한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했던 것. 북한으로 가기 위한 모든 서류절차를 마쳤고 만경봉호를 탈 날짜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재일동포야구단으로 한국에 갔다 온 김성근은 남한에서는 자신이 야구로 충분히 먹고 살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발견했을 것이다. 돌아오자마자 김성근은 어머니를 간절히 설득했다. "듣던 것과는 다릅니다. 한국이 사람 살 곳이 아니라는 말은 거짓말이었어요. 한국은 나름대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에는 야구가 없다는 점이 그가 절박하게 가족들을 설득하는 계기가 되었을 터. 결국 그의 설득으로 가족은 북한행을 포기하게 됐다. 당시 재일교포 북송사업으로 북한에 간 재일교포들이 얼마나 차별받고 비참한 삶을 살았는지를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가족을 살린 선택이 된 셈.

이듬해인 1960년 부산 동아대학교에 입학했다. 김성근은 1960년 5월에도 재일동포 야구팀에 참여했는데, 이때는 동아대 재학 중에 참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성근은 동아대에서 일학년 과정도 다 마치지 못하고, 입학한 그해 가을 일본으로 돌아갔다. 동아대 재학 당시 언어불통 등으로 한국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고 한다.[24]

동아대에서 지낸 반년 남짓의 짧은 기간 동안 그는 언어불통의 고충을 겪으며 더욱 야구에 매진하였다고 서술되어 있지만, 이영미 기자와의 인터뷰에 따르면 김성근은 여러 여학생들과 러브라인을 만들기도 했다. 인터뷰에 따르면 동아대에 다닐 때 같은 학과에 김성근 본인을 좋아하는 여학생이 4명이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음식점, 제과점, 건축가 등 부유한 집안의 딸들이었다고. 안타깝게도 집에서 금은방을 운영하는 딸내미가 없었다나. 하지만 야구를 해야 한다는 일념 때문에 그들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아까워. 그중에서 제과점 딸은 부산 하숙집에까지 찾아오곤 했었거든. 그런데 사실 그때는 다른 여자한테 눈이 팔렸었어. 6명의 친구들이 하숙집에서 함께 기거했는데 옆집에 아주 잘생긴 '식모'(살림 도우미)와 어떻게 하면 데이트 한번 해볼까가 관심의 대상이었지. 6명이 본의 아니게 라이벌 관계를 이룬 셈이야." 그 중에서 친구 한 명이 그 여자와 용두산 공원으로 데이트를 갔다왔다는 소리를 듣고 밤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속 쓰려 했다고. #

2.3. 일본 사회인 야구 시절

동아대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후, 김성근은 1961년초 같은 지역에 살던 재일 대한야구협회 최태환의 인맥으로 난카이 호크스 2군 캠프에서 테스트 받을 기회를 얻었다. 이때 김성근은 프로 2군 선수들과의 실력차를 절감했고, 그들의 훈련을 보는 것만으로도 많은 공부를 했다고 회고했다. 난카이 호크스 2군 테스트에 탈락한 후 김성근은 사회인 야구팀에서 자리를 얻기 위해 여러 팀에서 입단테스트를 받았으나 번번이 떨어졌다. 훗날 김성근은 자신이 충분히 실력은 있었지만 재일교포 차별 때문에 사회인 야구팀에서 번번이 떨어졌다고 말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차원에서 볼 수 있는데, 야구를 비롯한 스포츠와 연예계는 실력제일주의 풍토로 재일교포에 대한 차별이 상대적으로 덜하였고 실제로도 스포츠 분야에서 성공한 재일교포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를 거짓으로 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구단 오너가 협회 규정을 바꾸면서까지[25] 영입한 장훈의 예시로도 김성근의 주장을 쉽게 반박할 수 있다. 김일융의 경우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당시 일본인 학생만 드래프트에 참여 가능하다는 점을 악용해 다니던 고등학교를 중퇴시킨 후 그를 입단시킨 것이 논란이 되어 이후 국적을 불문하고 일본의 학교에 소속하는 선수는 모두 드래프트를 거쳐야 한다고 규정이 변경되었다.

하지만 이건 프로 차원의 이야기이고, 사회인 야구 수준에서는 분명히 차별이 존재했다. 즉 전체를 씹어먹을 정도의 선수라면 당연히 차별에서 열외였지만, 사회인 야구단 정도에서 어차피 충분한 인원이 있는 판에 굳이 당시 일본 입장에서는 실력이 애매한 재일교포를 받을 필요까지는 없었던 것. 즉 차별을 받았던 것도 맞지만 차별을 넘어설 정도의 실력이 없었던 것도 맞았다고 보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앞서 본인 스스로 그닥 잘하는 선수는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여러차례 고배를 마신 끝에 김성근은 고향인 교토의 상호차량(相互車輛)에 취업하는데 성공했다. 이 상호차량 야구부는 사회인야구 2부리그라고 부를 수 있는 클럽팀인데, 일본 사회인 야구는 보통 생각하는 실업야구 개념의 회사등록팀이 있고, 이 밑의 단계인 클럽팀이 있으며, 그 아래 단계로 보통 일반적으로 돈 안받고 하는 동호인 야구인 쿠사야큐팀이 있다.

클럽팀은 일반적으로 오전근무만 하거나 아예 안하기도 하는 회사등록팀과는 달리 오전오후 회사 업무를 다 보고 남는 시간, 점심시간이나 주말에 훈련을 한다. 야구부 활동으로 월급이 나오며[26], 정식으로 일본야구연맹에 등록되어 도시대항전 등 실업야구 대회에 참가할 수 있다. 즉 야구로 돈을 벌 수 있는 마지노선 개념의 팀으로 클럽팀에서도 프로지명자가 종종 나온다. 이런 클럽팀 출신으로 성공한 선수는 소프트뱅크 마무리 모리 유이토가 대표적이다.

물론 프로가 아닌 만큼 같은 클럽팀이라도 수준 차이가 상당하고 상호차량은 2004년 교토 사회인대회 이후 기록이 없어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닌 것으로 보이나, 그래도 이 정도 팀은 기본적으로 비선출은 아예 받아주질 않는다. 즉 김성근이 이 시기 회사 동아리 활동이나 한 것은 아니고, 어느정도 제대로 야구를 배워 야구로 돈을 벌었다고는 할 수 있는 수준이다. 완전 아마추어들이 하는 것은 한국 사회인 야구와 같은 개념의 팀인 쿠사야큐.

여튼 프로 지명을 노릴 정도로 수준이 아주 높은 팀은 아니었음은 분명하고, 점심시간 도중 작업복을 입고 캐치볼을 하는 정도가 훈련의 전부였던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던 것은 사실. 그리고 이후 김성근은 교토 상호차량에서 몇 개월 뛴 후 한국으로 건너가 교통부 실업팀에 입단하게 된다.

참고로 김성근 안티들은 김성근이 일본 사회인야구도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곤 했다는데, 일례로 일본 사회인야구 출신 최일언이 OB에 영입되었을 때 김성근은 "최일언은 일본 사회인야구에서 정통파로 피칭을 배운 선수"라고 치켜 세운 바가 있다. #

하지만 80년대 당시 일본의 사회인야구는 KBO리그보다 두세 급 이상 수준이 높은 리그였다. 노모 히데오가 뛰던 리그가 80년대 일본 사회인 야구였으며, 당장 그 최일언만 해도 일본 프로팀을 노릴 수 있는 선수였고, OB에서 첫해부터 167이닝을 던지며 주축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지금도 일본 사회인야구는 대학졸업 후 프로로 권토중래를 노리는 인원들이 입단하는 리그로, 프로 상비군쯤 되는 리그다. 사회인야구 출신 드래프티들은 입단즉시 NPB 1군에서 주전으로 활약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일본 사회인야구 이야기는 김성근의 자기포장도 뭣도 아니고 팩트이다.

2.4. 한국 실업야구 진출

파일:김성근 1962년 국가대표.jpg
1962년 제4회 아시아 야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 당시 모습

1961년 교토 상호차량 사회인야구팀에서 뛰고 있던 김성근은 재일교포 선배 배수찬의 도움으로 한국의 실업야구팀 교통부[27]에 입단하면서 한국 실업야구리그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이듬해인 1962년에는 새로 창단한 기업은행 야구단으로 이적했다.

실업야구가 처음으로 기록을 시작한 1964년, 김성근은 그해 페넌트레이스(실업야구 연맹전)에서 다승 공동 2위(20승 5패)를 기록했다. 다만 다승 공동 2위를 차지한 백수웅의 20승 4패에 승률에서 밀렸다. 앞선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도 그의 선수생활을 말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된다. 1961년에는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김응용, 백인천 등과 함께 제4회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을 거두는데 기여했다.

다만 1963년 재일교포 신용균 김영덕이 전성기를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진출하여 리그 적응기를 거친 후 무서운 기세를 보이며 김성근의 입지가 위태롭게 되었다. 또 국내 선수들도 변화구를 배우며 실력이 일취월장하게 되었다. 거기다가 김성근이 활약하던 당시에는 팀도 많지 않았고 경기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리그 전체에 투수를 통틀어도 몇 명 안되던 시절이었다. 이 때문에 9경기 연속 완투라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지나친 혹사[28]와 당시 잘못된 야구지식으로 인한 잘못된 어깨 관리 방법[29] 등으로 인하여 4년도 버티지 못하고, 1964년 시즌이 끝나고 만 22세의 나이에 투수를 포기하게 된다. 이후 타자로 전향하여 1루수로 뛰었지만, 어깨 문제로 1968년 결국 선수생활을 그만두게 된다.

현역 시절에는 좌완 정통파 투수였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승승장구에서 자신의 현역시절 투구 폼 사진을 보더니 투구시 팔이 좀 더 높았으면 더 오래 선수생활을 할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30] 동시에 MBC 스포츠의 재일교포 야구인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김성근은 "내가 한국에서 최초로 싱커를 던진 투수"라고 말한 바 있는데, 이건 약간 복잡한 문제가 있기는 하다.[31]

즉, 나름 싱커는 개발된 지 10년 정도 된 최신 변화구였기에 김성근을 비롯한 재일교포 선수들이 가져온 선진 문물인데, 당시 지금같은 방송중계나 기록이 있던 것도 아니고, 누가 어느 경기에서 뭘 던졌네 하는 서로간의 구두 증언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즉 김성근 본인이 경기 도중 싱커를 구사했는데 다른 투수가 그걸 먼저 구사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자신이 최초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고 다른 선수도 마찬가지다. 따라서 진짜 처음이 누구인지는 명확하지 않고, 알 수도 없는 노릇. 어쨌든 최초로 싱커를 던진 몇 명의 투수 그룹에 속하는 것까지는 맞다고 볼 수 있다.

2.5. 한국으로의 영주귀국

1964년 12월, 김성근은 일본으로부터 더 이상 비자 갱신이 되지 않자, 일본 거주권을 포기하고 영주귀국을 결심한다. 이때 김성근은 홀어머니와 친척, 친구들과 모두 생이별하고 홀로 대한민국으로 영주귀국하며 많이 울었다고 밝혔다. 그때 김성근은 한국에서 야구로 인정받아 국가대표팀 감독까지 해보겠다는 의지로 눈물을 달랬다고 말하기도 했다.

다만 여기서 논란이 나오게 되는데, 김성근이 영주귀국한지 두달 후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지면서, 가족들을 만나는 것에 전혀 지장이 없게 되었다.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은 한일 국교 정상화 추진을 제1의 국정 과제로 천명했던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 취임한지 한달 후였고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한지 두달 여만에 한일 국교 정상화 기본 합의가 이루어졌다. 즉 김성근이 영주귀국을 결심했다는 1964년 12월이면 이미 한일국교정상화 논의가 크게 진전되어 거의 기정사실화된 상태였다.

하지만 또 보자면, 사실 운동이나 열심히 하던 20대 운동선수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질지 도사마냥 예측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도 운동선수가 시사 등에 어두운 것은 일종의 클리셰 수준인데 그 시기에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또 기본 합의는 이루어졌어도 일본이 64년 해외여행 자유화가 된 첫 해이고 한국은 해외여행이 자유롭지도 않았으니, 국교가 정상화되어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어쨌든 이에 대해 김성근 본인도 인터뷰에서 본인이 영주귀국한 직후에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대해 "내 인생에 참 어려운 고비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이상하게 잘 해결됐어. 참 운이 좋다고나 할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즉 김성근 본인의 말대로, 영주귀국을 결심했는데 마침 운좋게 한일 국교가 정상화되고 왕래가 가능해졌다고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리고 당대 시대상을 보면, 김성근의 가족도 처음에는 북한으로 가려고 했던 점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재일교포는 총련계가 대다수였고 지금보다 훨씬 남북간 이념 대립이 격렬했던 그 시절, 재일교포는 거의 북한 간첩에 가까운 취급이었다. 즉, 자유화는 되었어도 조국을 찾아갔다가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나 고문을 당한 재일교포들이 수두룩할 정도로 국가에서 환영받는 존재도 아니었고 이렇다보니 출입국 관리를 까다롭게 했던 시기였다.

즉 말이 좋아 국교 정상화지 말 그대로 국가간에 국교만 정상화하겠다 정도고, 해외여행은 자유화되지도 않았다. 해외여행 허가 자체로도 까다로운데 간첩으로 의심받을 소지가 다분한 일본, 한국간 허가가 나올지, 또 몇 편 있지도 않을 뿐더러 당시로서는 엄청난 가격인 한일간 비행기, 배삯을 마련할 수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라 국교 정상화 이후에조차도 정말 만나는 것 자체는 쉽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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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도자 은퇴 이후

파일:김성근 2023 한국시리즈 직관.jpg
2022년 한국시리즈 2차전에 박재홍 해설위원과 함께 인천 SSG 랜더스필드를 찾았다. 후문에 따르면 원래 김성근이 시구, 박재홍이 시타로 내정되어 있었으나 이태원 압사 사고로 인해 취소되면서 대신 스카이박스에서 자리를 지켰다.

전날 중계를 통해 KS 1차전을 봤다는 김성근은 "어제 집에서 봤는데 오늘 높은 곳에서 보니 야구가 새롭다. 더그아웃에서 보는 것이랑 위에서 보는 것이랑 완전히 다르다. 위에서 보니 긴장감 없이 편하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또 " 김강민은 많이 늙었더라. 살도 많이 쪘더라"며 웃어보인 뒤 "김강민이 (한국 나이로) 41세더라. 흥미로운 부분이었다. 선수도 모자란데 우리나라도 그런 선수를 많이 남겨놔야 한다. 자꾸 바꾸니까 수준이 떨어지는 것 같다"라고 전했다. 이어 "지도자로 기분 좋은 순간이 별로 없었지만 가르쳤던 선수가 좋아지고, 성장했을 때 기분이 좋다. 어제 김강민의 홈런을 보고 기분이 좋았다"라며 "그런 홈런은 쌩쌩할 때도 못 치던 홈런이다. 어제는 깔끔하게 잘 쳤더라"라고 흐뭇한 속내를 드러냈다.

김광현에 대해서는 "2007년 당시 김광현이 신인이어서 부담감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어제는 이겨야겠다는 의욕이 앞서면서 서두르는 것 같더라"라며 "너무 오버페이스로 던져서 도중에 지친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파일:최강야구 2023 배너.jpg
그리고 11월 7일, 이승엽의 뒤를 이어 JTBC의 예능 프로그램인 최강야구의 팀 최강 몬스터즈의 2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인터뷰에 의하면 처음에는 예능을 가장해 재미를 올리고자 하는 프로그램이라고 생각해 감독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JTBC 측에서 후쿠오카로 최강야구 영상을 담은 비디오를 보냈는데, 단순히 재미를 위해서가 아닌 실제 프로야구처럼 진지하게 임하는 모습에 감명받아 해볼 만하겠다고 판단해 수락했다고 한다. 프로그램의 총연출인 장시원 PD가 지인을 통해 직접 후쿠오카로 날아가 상황 설명을 하고 간곡히 설득하였으며, 김성근이 스케줄 차 한국에 입국했을 때 그의 승낙을 받아냈다고 한다. 그리고는 바로 전적과 개인 자료를 넘겼다고. 김성근의 안티들이 나무위키로 백날 까내려봐야 그들과는 다르게 80살이 넘어도 찾아주는 사람이 있는 게 유머라기보다는 네타성이 강하면서 방송에 고정적으로 출연할 수 있는 사람이 몇 없기 때문이다. 백인천은 비슷한 나이지만 뇌출혈로 거동이 불편하며, 김응용의 경우 지도자를 은퇴한 지 10년쯤 지났고 다른 사람들은 현역 복귀 가능성을 염두에 두거나 아마추어 지도자 내지 해설진에 한 자리씩 있거나 개인 생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능 출연 이후 여러 언론이나 팬들에게 주목을 받게 되자 다시금 언론에 자주 비추고 있다. 한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암을 3번이나 걸렸으나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으려고 참았다는 등 이야기를 했고, 본인은 물론 한화 이글스에게도 흑역사였던 한화 감독 시절의 질문을 받자 "모든 분야는 세대교체가 아니라 흐름 속에서 오고, 우리나라는 옆동네서 흉내내면 너도 나도 흉내낸다면서, 한화도 거기에 빠져들었다."라고 두루뭉술하지만 결국에는 프런트 야구를 선언한 한화를 돌려까는 모습을 보였다. #

그리고 감독의 사명감으로서 말하길, 감독은 선수들이 돈을 잘 벌게 해주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 추가로 선수들이 돈을 잘 벌게 하려면 그만큼 경기에서 이겨야 한다고 덧붙였다. 그래서 송은범에게 34억을? 확실히 김성근이 여러 선수들의 복리후생(...)을 이뤼준 것은 사실이다. 김성근이 맡은 팀들은 전력 쥐어짜기를 하는 그의 성향상 은퇴를 앞둔 선수들도 여럿 영입하는 등으로 로스터를 꽉꽉 채우다 보니 선수단 연봉 총액(페이롤) 1위도 여러 번 찍었다.[32]

최강 몬스터즈의 감독으로 부임한 후 JTBC에 타격 훈련 후 " 정근우 어디 갔어?"라는 말을 하거나, 2022 시즌 최종전인 두산전 패배 후 마지막 기념촬영에서는 남들이 다 몬스터즈 시그니처 포즈를 취할 때 시합 졌다며 눈밑에 갖다대 우는 제스처를 하는 등 의외의 예능감을 뽐내면서 팬들에게 재미를 주고 있고 여러 언론에서도 꽤 나오면서 다시금 팬들에게 이미지가 좋아지고 있다. 돈 받으니까 프로라던가, 스탭들의 일자리를 생각해서 책임감을 갖고 경기하라는 어록도 덤.[33] 또한 2022 시즌 종료 후 팀 신인상을 받으며 전무후무한(?) 최고령 신인왕을 받았다.

한 기사에서는 "한국야구의 질적 저하는 독립 리그 등 아마야구와 프로야구가 구분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의 피라미드 체제를 역피라미드 체제로 바꿔야 한다."면서 역피라미드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쉽게 말해서 독립 리그나 실업야구 리그와 같이 프로 리그 외의 리그를 활성화시키면, 프로 입단에 실패한 선수들이 이런 아마추어 리그를 통해 기량을 발전시켜서 프로 무대에 재도전할 환경을 더 용이하게 만들 수 있고, 이렇게 기량이 발전된 선수들을 프로 구단들이 영입하면 프로야구 전체적으로도 긍정적인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34]

이 외에도 다른 기자들과의 인터뷰에서 박용택, 정근우처럼 아직 현역으로 쓸 수 있는 선수들을 세대교체란 명분으로 한국 프로 구단들이 쉽게 버린다며 비판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35] 물론 은퇴라는 행위는 어찌됐든 간에 선수 개인이 구단과 협의를 해서 자유롭게 선택한 것이고, 이윤을 철저히 생각해야 하는 프로 구단의 내부 사정상 선수들에게 어쩔 수 없이 은퇴를 제안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 구단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해야 할 이유는 없다.[36]
2023년 11월 13일 LG 트윈스 kt wiz의 한국시리즈 5차전에서 김응용, 김인식 감독과 함께 시구를 하게 되었다. 시포는 각 감독의 애제자라고 볼 수 있는 박경완 장채근, 홍성흔이 맡게 되었다. 이후 LG 트윈스가 kt wiz를 상대로 최종 스코어 6:2로 승리하면서 29년만에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아들인 김정준 수석코치도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로 13년만에 우승반지를 하나 더 추가하게 됐다.

5. 야구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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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언론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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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구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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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김성근의 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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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징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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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야구계 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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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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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미디어 활동

12.1. TV

<rowcolor=#fff> 날짜 방송사 방송명 비고
1998년
9월 9일 파일:KBS전주 로고.svg 사람과 사람들 - 고독한 승부사 김성근 #
1999년
4월 22일 파일:KBS 로고.svg 현장르포 제3지대 - 9회말 투 아웃 김감독의 선택 #
2008년
3월 20일 ~ 10월 13일 파일:OBS경인TV 로고.svg 불타는 그라운드 고정출연
3월 25일 파일:KBS 로고.svg 단박 인터뷰 204회
2009년
4월 6일 ~ 11월 2일 파일:OBS경인TV 로고.svg 불타는 그라운드 시즌2 고정출연
2010년
1월 14일 파일:KBS 2TV 로고.svg 세대공감 토요일
3월 25일 파일:OBS경인TV 로고.svg 명불허전 10회
11월 9일 파일:KBS 2TV 로고.svg 김승우의 승승장구
2011년
2월 6일 파일:NHK BS HI LOGO.jpg 白球 - 選手たちは海を渡った[37] #
3월 3일, 3월 10일 파일:KBS Prime 로고.svg 이금희의 특별한 만남 13회, 14회
9월 13일 파일:Mbclife.png 히스토리 후 52회
2012년
1월 3일 파일:TV CHOSUN 로고.svg 최박의 시사토크 판 19회
1월 22일 파일:KBS Prime 로고.svg 지식 기부 콘서트 N 29회
5월 19일, 5월 20일 파일:SBS 로고.svg 아이 러브 베이스볼 시즌4 37회, 38회
5월 27일 파일:SBS 로고.svg SBS 스페셜 - 나는 산다, 김성근 "9회말까지 인생이다" 293회
5월 28일 파일:MBC 로고.svg 야구 읽어주는 남자 32회
5월 29일 파일:MBC 로고.svg 희망특강 파랑새 66회
6월 3일, 6월 10일 파일:KBS 로고.svg 한국 현대사 증언 TV 자서전 69회, 70회
7월 25일 파일:tvN 로고.svg 백지연의 피플INSIDE 215회
6월 17일 파일:MBC 로고.svg MBC 스폐셜 - 김성근과 고양원더스 569회
11월 22일 파일:MBC 로고.svg 스타로드토크 명사십리
2013년
3월 30일 파일:MBC 로고.svg 휴먼다큐 사람이 좋다 - 야구의 신, 김성근 감독! 소년은 늙지 않는다 23회
6월 17일 파일:SBS ESPN 로고.svg 야구본색 - 그라운드의 지배자! 김성근 감독 5회
6월 26일 파일:EBS 로고.svg 지식채널e 1025회
7월 19일 파일:SBS ESPN 로고.svg 베이스볼 S
2014년
9월 14일 파일:KBS 2TV 로고.svg 다큐 3일 - 9회 말 2아웃, 한화 이글스 72시간 #
2015년
3월 7일 파일:대전MBC 로고.svg 특집다큐 꼴찌의 반격 #
2016년
3월 28일 파일:대전MBC 로고.svg 특집다큐 AGAIN 1999, 야신의 기적
2022년
11월 7일 ~ 2023년 2월 20일 파일:JTBC 로고.svg 최강야구 시즌1 고정출연
2023년
4월 10일 ~ 파일:JTBC 로고.svg 최강야구 시즌2 고정출연
2월 8일 파일:tvN 로고.svg 유 퀴즈 온 더 블럭 180회
6월 25일 파일:연합뉴스경제TV.png 곽수종의 경제프리즘 #
11월 26일 파일:연합뉴스경제TV.png 곽수종의 경제프리즘 #
12월 10일 파일:JTBC 로고.svg JTBC news 뉴스룸 인터뷰 #

12.2. 광고

<rowcolor=#fff> 연도 기업명 브랜드명 비고
1990년 태평양화학 고려왕 #
2007년 아레나 코리아 2월호 표지모델 #
2011년 동서식품 핫초코 미떼 #
2012년 한국인삼공사 정관장 #
넷마블 마구:감독이되자 #
2013년 카카오 나는 김성근이다 for KAKAO #
2014년 컴투스 컴투스프로야구 for 매니저 #
2015년 한화 한화 이글스 #
2024년 현대백화점 설날 현대특선[38] #

12.3. 홍보대사

<rowcolor=#fff> 위촉 기업/기관 직함 비고
2010년
12월 1일 고치현 관광 홍보대사
2012년
8월 17일 제25회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홍보대사 #

12.4. 저서

파일:꼴찌를 일등으로.jpg * 《꼴찌를 일등으로》, 자음과모음, 2009년 7월 15일
파일:김성근이다.jpg * 《김성근이다》, 다산라이프, 2011년 12월 23일
파일:감독이란 무엇인가.jpg * 《감독이란 무엇인가》[39], 새잎, 2012년 10월 6일
파일: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jpg * 《리더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이와우, 2013년 3월 18일
파일: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jpg * 《세월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다》[40], 페이퍼로드, 2014년 1월 15일
파일:인생은 순간이다.jpg * 《인생은 순간이다》, 다산북스, 2023년 11월 15일

13. 발음/말투

김성근의 말투에 녹아 있는 일본식 억양에 대해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한국에 수십 년 동안 살았는데도 왜 일본식 발음을 고수하느냐는 것이다. 김성근의 발음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다. 김응용 감독 등도 그러한 투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특히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영덕 감독이 거의 완벽한 억양과 발음으로 우리말을 구사하는 것과 대비되면서 더욱 까였다.[41] 1960년대 실업야구의 대표적인 재일교포 선수였던 배수찬도 한국어를 유창하게 했다. 김영덕 전 감독은 김성근과 같은 교토 출신으로 일본에서 8년간의 프로선수 생활을 마친 후 28세에야 처음 한국 땅을 밟았다. 반면 김성근은 18세에 동아대에 입학하면서 영구귀국했다.

김성근 감독팬들은 그의 일본식 발음의 원인이 고교 야구부 감독 시절 제자 뒤에 서 있다가 제자가 휘두른 방망이에 맞아 앞니가 모두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42]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사건 때문에 발음이 불분명해졌고 그래서 더욱 일본어투로 들린다는 것이다. 감독팬들은 이 사건 때문에 김성근의 일본어 발음 역시 다소 부정확하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 SK 와이번스의 동계훈련을 일본의 어느 TV가 취재를 나간 적이 있었는데, 일본어로 말하는 김성근 감독의 인터뷰 부분도 자막 처리했다고 하니.

하지만 아래 내용들을 참고할 때, 김성근 감독의 발음이 이가 부러지는 사고 때문에 부정확해지고 일본식 발음으로 들린다는 감독팬들의 주장도 원인의 일부분 정도는 차지하지만, 주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우선 앞서 감독팬들이 주장한 일본 방송 자막은 김성근의 발음이 부정확해서가 아니라 일본 방송사들은 원래 자막처리 엄청 자주 한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일본에서는 멀쩡한 일본어 발음에도 자막 처리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김성근은 나긋나긋한 교토 사투리를 쓰기 때문에 일반 일본인이 듣기에도 다소 불분명하다고 느낄 수 있다.

또 김성근이 방망이에 맞아 이빨이 부러진 사건에 대해 살펴보면, 김성근 본인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고 이 사실이 처음 알려진 것은 충암고 시절 김성근의 앞니 세개를 부러뜨린 당사자인 성기완 씨가 2007년 뒤늦게 사연을 공개하면서 밝혀진 것이다. 사실 성기완 씨는 이빨 부러진 사건만 언급했지 그 사건이 김성근의 말투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또 김성근 본인도 이 사건 때문에 본인의 발음이 부정확해졌다고 말한 적은 없다.

정작 김성근 본인은 실업야구 시절 술을 많이 마셔서 술집에서 한국말을 배워서 한국어가 늘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을 정도로 노리타들의 주장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야구할 때는 괜찮았는데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없으니까 힘들었지. 혼자 이불 덮어쓰고 울 때도 많았고 몸이 아플 때 어디서도 도움을 받기 어려웠어. 외로울 때. 괴로울 때 술을 마셨어. 한국에 들어와 술을 배운거야. 한국말도 술집에서 조금씩 배운 것이었는데 그래서 발음이 아직도 잘 안되나봐." - 잡초승부사 김성근을 말한다 - 5. 반쪽발이로 살아간다는 것

1970년대 후반 KBS라디오 야구 해설을 맡은 적이 있으나 이때도 일본식 발음이 문제가 된 데다 중계 도중 일본어 표현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야구 팬들의 항의를 받고 달랑 한 경기 만에 하차하고 말았다.[43][44]

그 외에도 한국에 처음 와서 부산 동아대에 다녔고, 마산에서 정착하다 보니 한국말을 쓸 때 동남 방언이 약간 섞인 모습도 보인다.[45]

사실 언어 발음 습득은 감각의 문제라, 다른나라에서도 김성근만큼 해당 국가에 오래 살았어도 현지 발음을 완벽히 익히지 못하고 한국식 발음의 영어/일본어를 구사하는 교포들도 부지기수고, 반면 몇년만 살아도 현지인과 비슷해지는 케이스도 있는 등 개개인이 타고난 언어감각에 기대는 바가 커서 김성근이 한국말을 제대로 배우려는 노력을 안 해서 그렇다고 보는 시각은 문제가 있다. 어휘력/언어구사력과 발음은 전혀 다른 영역으로 김영덕이 한국어 발음이 유창한 것은 그냥 김영덕이 언어감각을 타고난 것이다.

김성근의 한국어는 충분히 유창하다. 실제로 한국에 사는 외국인들 중 정말로 한국어를 배울 의지 자체가 없어서 일이십년 살아도 한국어 몇마디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김성근은 그런 케이스는 아니기 때문에 그가 일본식 발음을 고집한다, 한국어를 제대로 배우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주장은 맞지 않다. 애초에 김성근의 발음에 약간 일본식 발음이 들리거나 해서 그렇지 선수단 내외에서 의사소통으로 문제된 적도 없고, 인터뷰에서나 실생활에서나 자기 할 말을 명확하게 잘 해내기 때문에 사실 문제 삼기엔 어렵다 볼 수 있다.

보통 야구팬들은 발음 개선에 대한 기대는 하지 않는다. 사실 그게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마, ~~~ 아닌가 시프요" 등 은 김성근만의 고유 말투로 보고 일종의 캐릭터성으로 잡아 패러디하곤 한다.

최강야구 출연 이후에는 김성근 감독 특유의 발음을 그대로 자막화하면서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였으며, 선수단 대부분이 감독의 발음을 한 번에 못 알아듣기 때문에 가장 익숙한 정근우"동시통역사" 역할을 해주고 있다. 여담으로, 주장 박용택 역시 김성근 감독을 잘 알기 때문에 대변인 역할을 해주면서 그의 발음 문제를 커버해주고 있다.[46] 정의윤의 별명이 ' 정의용'이 된 이유도 다 이것 때문이다.

14. 야구인들이 말하는 김성근

송창식
김성근 전 감독님과 함께하면서 육체적으로 힘든 부분도 분명히 있었지만, 그래도 야구하면서 가장 즐거웠다. 그때 내가 아주 좋은 피칭을 한 것은 아니었어도 선수들이 다같이 해보자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때 야구장 나갔던 게 가장 재미있었다.
'김성근 감독이 원망스럽지 않았나'라는 질문을 던지자 송창식은 "많은 기회를 주셔서 감사했다"며 "아직 연락을 못 드렸는데, 조금 뒤 전화를 걸어 감사 인사를 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주변에선 걱정을 많이 했는데, 정말 힘들 때는 조금 쉬고 싶다고 감독님께 말씀드린 뒤 며칠 쉬기도 했다"고 강조했다.

최경환(야구)
한국으로 돌아와서 엘지에서 1차지명을 받고 두번째 시즌(2001년)을 준비하려고 할 때 김성근 감독님이 오셨다. 김성근 감독님은 일본식 야구를 추구하시고, 나는 미국식 야구를 추구했다. 감독님은 다운스윙(단타 위주의 실리타격)을 강조하셨고, 나는 슬라이트 업스윙(장타 위주의 화려한 타격)을 하는 스타일이었기에 그런 시절이었고, 둘이 정 반대였다. 나랑 같은 포지션이었던 심성보가 주전으로 뛰었었다. 내가 뛸 수 있는 기회가 2군에서 3할 6푼을 쳤지만, 1군에선 2001년도에 12타석뿐이 없었다.
2001 시즌이 끝나고, 감독님이 다음 해에 오키나와 캠프로 가라고 콜을 하셨는데, 하필 캠프 하루 전에 발목 인대가 돌아가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감독님이 결국 자유 계약으로 풀어주셨다.

박진철(야구선수)
나는 애들 (임창용, 이호준, 노후룡)을 잡으러 다녔다. 창용이보고 "야! 임창용! 야구 그만하고 가!" 이랬던 감독님이었다.
김응용 감독님의 지시에 투구폼을 오버스로로 바꾸다가 2군으로 갔는데, 방수원 코치님이 계셨고, 가르쳐 주는 곳이 없었다. 1년 뒤에 김성근 감독님이 오셨는데, 정말 말도 안되게 연습을 시켰다. 그랬더니 2군에서 다승왕을 하고 구속도 140이 넘어갔다.

임창용
해태 2군 시절, 항상 이호준, 노후룡 [47]과 함께 놀러다녔다. 운동을 해도 이틀 하고 3일 안나오고 그랬었다. 동계 훈련 기간인데도 놀러다녔으니 쫓겨날 뻔 했다.

"본래 내가 정말 아침잠이 많다. 늦잠 때문에 홈게임에 지각한 일도 여러 번이다. 그런 내가 김성근 감독님 때문에 아침 6시에 일어나 훈련을 시작했다"

"6시에 일어나서 일단 다같이 산책을 한다. 그후 아침식사를 하고 나서 웨이트트레이닝이 이어진다. 그냥 계속 하는거다. 러닝도 하고, 점심식사 후에는 몇시간씩 계속 공을 던졌다. 마냥 던졌다. 그리고 저녁 먹고 또 웨이트트레이닝을 했다" 2군에서 6~8개월인가 정말 열심히 훈련을 했다. 그리고 95년 삼성전에 1군 데뷔를 하니 그때부터 야구가 정말 재밌어졌다.

이호준

윤석환
하루는 김성근 감독한테 "선발 시켜주세요" 라고 말하면 10만원을 주고 돌려보냈다. 하루 가서 놀으라고. 어린 마음에 좋은 자리를 하고 싶었는데, 그 때는 6이닝을 던지면 집에서 놀 수 있었다. 계룡에서 놀다 왔더니 딱히 할 것도 없고 다시 돌아온 적도 있었다.

김일권
해태에서 트레이드 되어 태평양에 왔는데, 그 수모 다 삭히면서 운동하고 했었다. 그때 독하게 하던 김성근 감독한테 걸렸다. 그 분은 고참이고 스타플레이어고 다 인정을 안해준다. 징그러운 오대산 입수 때도 군대 유격 훈련 하는거 같았다. 몇 초 있다가 욕이 절로 나왔고, 펑고를 하는데 바구니에 고봉으로 담으면 600개가 들어가는데, 다 받아내고 똥물까지 게워냈다. 서른 다섯살에 그걸 받으니 "야 새끼야 쳐라" 라고 했더니 김성근 감독이 "알았다 이 새끼야!" 하고 받아쳤고, 구토를 하면서 훈련했다. 하드 트레이닝 덕택에 도루를 62개를 하고 골든글러브도 받았다.

김성근 감독은 경기 막판까지 계속 상대 팀에 끌려가면서 지고 있어도 이유 있는 지는 게임을 하는, 단 한 번의 기회가 오기만 하면 동점이나 역전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반드시 가지고 있는 야구를 한다고 밝혔다.

김원형
선수때는 잘 몰랐지만, 서운한 점도 있었는데, 지금은 감독이 되면서 김 감독님을 많이 느꼈다. 연습의 중요성을 가지고, 선수들 다 공평하게 훈련시키고, 성장시키고, 그런 열정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김동기(야구)
오대산 극기훈련 때는 새벽 4시 기상을 해서 주먹만한 눈이 떨어지고, 1km 정도 뛰어갔던 적도 있었다. 오대산에서 대청봉까지 막 뛰어간다. 지금 와서 보면 아무 상관없는 훈련이었는데, 팀워크 강화하는 측면에서 보면 우리 팀이 돌풍에 어느정도 작용을 한 건 사실이다.

김성근 감독님이 부임해서 죽을 맛이었고, 우리가 한 만큼 대우를 해 주니까, 자신감도 생겼고, 이길 수 있었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기니까 도원야구장이 거의 꽉차다시피 했다. 1989년 한 해는 매일 축제 분위기였다. 너무나 좋았었다.

김우열
노장이다 싶은 선수도 "넌 더 해야 된다." 라고 하면서 젊은 선수보다 훈련을 더 많이 시켰다. 이기는 게임을 하기 위해 그 훈련만큼 사람을 강하게 만들었다.

유지훤
뛰는 걸 그렇게 많이도 시켰다. 완전 실미도지, 야구단이 아니었다. 승부에서는 이겨야 되고, 전쟁터에선 이겨야 되었었다.

박철우(야구)
쌍방울 때인 96시즌에 원래 은퇴하려고 했었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시고 운동을 그만두다시피 했는데, 포스트시즌 엔트리에 포함되었다. 공교롭게 대타를 나가게 되어 동점 상황이었는데, 정명원 을 상대로 굿바이 홈런을 쳤다. 김성근 감독이 한 얘기가 "맞아라" 였는데, 살아나가라고 했다. 그런데 홈런을 쳐서 운이 좋았다. 그리고 2년 동안이나 선수생활을 더 했고, 그 이후에도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언급했다.

임호균
펑고 만큼은 역대 감독님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이나 잘 치셨다. 얄미울 정도로 잘 쳤고, 오대산 극기훈련 때 1월 날씨에는 미터 두께로 얼음이 얼어 있었다. 끝나고 내려오는데 오른쪽 무릎에 물이 차 있었다. 동기 부여를 해 준 것과 마찬가지였다. 좋은 성적을 내야 되었었다.

정수근
강병철, 김성근 이 두명이 훈련 제일 많이하는 감독.

이대호
감독님이랑 한번도 안 쳐봤는데, 야구 인생에서 사랑할 정도로 좋아하지만 선수 때 감독님을 만나지 않은게 하늘의 복이라고 생각한다.

김준환
쌍방울에서 10년 동안 타격코치를 했었다. 거기서 정말 많이 배웠다. 경제위기가 와서 (모기업이 부도가 났으니까) 김성근 감독이 계실 때도 선수들을 많이 팔았었다.

김태완(1966)
해태에서 선수 은퇴 후 2군에서 김성근 감독님을 모시고 있었다. 한번은 게임을 하는데 그라운드에 특출나신 분이 한번은 야구장에서 경기 중 비가 와서 중단시켜야 하지 않겠냐고 물었다. 승부욕이 엄청나셔서 끝까지 경기를 했다. 외야수 실책으로 삼성 라이온즈에게 2:1로 진 게임이 되어 버렸는데, 그 비가 쏟아졌는데도 펑고를 계속 시켰다.

2군 게임을 이기기 위해서 1군으로 올라갈 선수도 오늘까지 쓴다. "야! 오늘 던지고 올라가!" 이런 스타일이다. 보이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야구를 하시는 분이다.

김현욱(야구)
쌍방울로 딱 트레이드가 되니까 18연패를 하고 있었다. 감독님을 안 만났으면 지금의 김현욱은 없지 않았을까 싶었다. 삼성에서는 직원으로 일할 생각이 없냐고 물었는데, 1년만 더 하고 싶었다. 내가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서 손목을 붙잡고 '폼을 봐달라' 고 얘기했다. 감독님이 뒤에서 서 있던게 내 야구 인생이 바뀌었고, 96년도에 성적을 내면서 굉장히 감사한 시즌을 보냈다.

97시즌에도 오키나와 캠프를 가는데 커브를 던진 후 각이 딱 잡혔다. 1,2점차 지고 있을 때 꼭 나를 썼고, 악착같이 막았다. 무릎 부상이 왔어도, 바닥부터 올라왔으니까 97시즌은 정말 감사하고 행복한 시즌이었다. 일본에서 코나미컵을 만난 적이 있는데, 언론과 기자들은 냉정히 판단을 했겠지만 나는 이기기 위해서 던졌다. 감독님한테는 감사한 마음 뿐이다.

구한성
주전자리에서 밀리고 이제 김성근 감독님이 해태 인스트럭터를 한 시절이었다. 2군 내려와서 밤 12시까지 훈련을 하며 "너 홍현우 이길수 있다!" 하면서 격려를 해 주셨다. 나를 눈여겨 봐주셨는지 나중에 현금 트레이드로 쌍방울에서 사갔다. 쌍방울에서 보답 못해드린게 지금도 마음에 걸렸다.

박재벌
나도 야구를 보면 김성근 감독님한테 제일 많이 배웠던 것 같다. 몸이 아프신데도 불구하고 저녁 늦게까지 1:1로 코칭을 해 주시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받아본 적이 없었다.

최일언
김성근 감독이 프로 구단을 처음 했을 때였다. 그 당시에는 내가 대학교 4학년 때 에이스로 던지고 있으니까, 일본에서도 관심을 보였는데, 홍신차[48] 때문에 강제로 한국으로 올 수밖에 없었다. 김성근 감독은 비슷한 게임에서 에이스를 집어넣고 이기는 운용을 잘 하시는데, 중간계투 나를 쓰기가 편했다고 하며, 1986년도에 한 게임은 190개를 던졌다. 연장 12회까지 혼자서 던졌던 것이다. 또 하나는 정말 중요한 게임이었는데 [49] 이틀 쉬고 던졌는데 엄청 힘들었다. 내 몸이 (정상적인) 몸이 아니라는게 느껴진 경기였다.

신윤호
공은 빠른 투수였는데, 차츰차츰 위기가 오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김성근 감독님을 뵙고 나서 야구를 더 알게 되었다. 감독님이 기다려 주셨고, 아주 많은 배려를 해 주셨다.

심성보
김성근 감독님이 오시면서 쌍방울 고등학교로 변신했다. 운동을 너무 심하게 하셨다. 산만하거나, 훈련을 게을리 하면 감독님이 주시하다가 "너 가라!" 했을 정도였다. 다만, 진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다. 지는게 너무 억울했다.

박노준
말 그대로 지옥훈련이었다. 끝나고 나면 파김치가 되었고, 밥도 서서 먹어야 했다.

김광림(야구)
그때의 그 훈련랑은 잊지를 못한다. 매년 꼴지만 하다 가을야구 진출하니까 야구 할 맛도 났다.

최태원(야구선수)
95년 시즌이 끝나고 '김성근' 이라는 이름을 소문으로 들었더니 '죽었다' 라고 생각했다. 야구장이 전혀 관리가 되어있질 않아 낫을 가지고 선수와 직원들이 제초작업을 했다. 나중에 감독님이 타격하시는걸 보시더니 타격훈련 하지 말고 수비훈련 해라. 캠프 끝날때까지 계속 수비 훈련만 했던 기억이 있다. 상상할 수 없는 훈련을 했었고, 특히 감독과의 미팅 시간은 죽을 맛이었다. 잠을 안 자려고 허벅지를 꼬집다 보니 멍이 생겼고, 그게 더 고통이었다. 훈련에 점차 적응하다 보니 내 것을 찾았고, 부상을 달고 살았지만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양준혁
2001년도 엘지 시절에 게임하다가 4타수 무안타를 쳤다. 그랬더니 숙소까지 뛰어오라고 했다. "프로 선수가 아마추어도 아니고 다 큰 선수를 뛰어오라고 하나?" 수치심이 많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게 내가 새롭게 태어나는 계기가 되었고, 더 길게 프로야구 선수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김성근 감독님 스타일은 하나같이 다 관리해주시고 하는 유형이다.

김광수(1959)
내 이름을 킨칸수라고 불렀다. 그 당시에는 코칭스태프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에 투수코치가 펑고를 쳐 줬다. '펑고 천개'. 점심으로 스테이크를 먹자고 했다. 알고보니 그 메뉴가 '펑고 치는 메뉴' 였다. 수프, 야채, 고기, 디저트 모두 펑고 치는 메뉴였다. 기진맥진 하는 순간 메인 메뉴가 나온다길래 '아 죽었다' 싶었다. 나도 펑고를 잘 치지만 김성근 감독님과는 게임도 안 된다.

그 당시에는 김성근 감독의 성향을 잘 모를 때였는데, 현재 와서 보니 남에게 표시를 절대 하지 않는 분이었다. 2루수를 할 수 있게 믿음을 준 감독님이었기 때문에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동현(1983)
감독님과 제주도에서 훈련을 엄청 많이 했었다. 저녁 식사 끝나고 한시간 뒤에 미팅을 항상 했다. 많은 얘기를 해 주셨고, 그 당시 감독 말이면 다 법이었다. 가는 길에 뛰어가면서 워밍업을 시켰고, 꼼수를 부리려다가 걸린 기억도 있었다. 활용도를 높여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숨어 있는 잠재력을 폭발시켜 주셨다.

박용택
2016년 2천안타 대기록 달성 이후 가장 먼저 생각나는 분이 김성근 감독이었다. 감독님을 만나면서 야구하는 계기가 되었고, 프로가 얼마나 어려운 곳인지 느꼈다.

최동수
하루에는 스윙을 7천개까지 한 적도 있고, 배팅만 9시간을 한 적이 있었다. 김성근 감독님 훈련은 시키는거 전부 다 과한 훈련이었다. 타자는 공이 오면 반응하는데, 처음 느꼈던게 내가 스윙을 하니까 공이 와서 맞는 느낌이었다.

김성근 감독님은 인생에 은인 같은 분이었고, 인생에서 터닝포인트였으며, 포기하지 않는 삶을 만들어주신 분이었다.

권혁
“힘드냐는 질문은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는 행복하다.”
“누군가 날 믿어준다는 건 굉장히 기쁜 일이다.”

심수창
김성근이란? 혹독하지만 사람 마음을 움직이는 감독
선수들은 그때가 행복했다

배영수
한화에 새둥지 튼 배영수
우선협상 끝난 다음날 김성근감독의 전화
“날 인정해주셔서 눈물 참느라 힘들었어요”
배영수는 “감독님 때문에 한화를 선택했다. 변하고 싶었다. 현재 상황을 냉정하게 봤을 때 내 실력은 떨어진 것이 분명하다. 감독님과 함께 한다면 충분히 지금보다 2~3단계는 상승 효과를 볼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송은범
김성근 감독님과 한 팀에 있으면, 신체적으론 힘이 들지만 정신적으론 행복하다. 많은 사람들은 야구선수들이 육체적인 고통으로 힘들어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걸 알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님과 다시 하고 싶었다. 행복하다

정우람
김성근 감독님은 제가 야구를 하면서 기술적인 측면보다도 ‘어떤 야구선수가 돼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왜 야구를 해야 되는지’ 그런 생각을 하게끔 해주신 분이에요.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갖게 해주신 것과 제가 거기에 보답하고, 부합하는 것은 별개잖아요. 결국에는 말씀을 듣고 내 자신이 바뀌어야 하는 거니까요. 항상 생각하고 감독님 말씀을 새겨들으면서 어린 시절에 열심히 하고자 했던 게 지금의 저를 만드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김태균
은퇴 기자회견 때 가장 기억에 남는 지도자로 이정훈, 김인식, 김성근 전 감독을 꼽았다. 그중 김성근 전 감독을 떠올린 이유가 흥미로웠다. 김성근 전 감독에 대해 ‘내 자신을 안주하지 않게끔 이끌어주신 분’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감독이 한화 감독으로 취임하는 자리에서 김태균 선수를 지목해 “앞으로 김태균은 당분간 3루에서 반 죽을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타깃을 정하고 팀을 이끌었는데 그런 부분이 부담스럽지 않았나.
“취임식 때 감독님이 나를 지목해서 그런 말씀을 하실 때는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3년 여 동안 감독님과 함께 지내며 감독님의 진심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다. 감독님은 앞에선 강하게 채찍질 하시지만 뒤에서는 선수들을 진심으로 따뜻하게 챙겨주신다. 그러니까 선수들이 (감독님을) 따르는 것이다.”

강경학
“김성근 감독님은 하늘의 선물”

김회성
김성근 감독님 시절에 훈련이 엄청 힘들었지만 경기에 많이 나갔다.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행복했다. 그때 당시는 너무 힘들었지만 김성근 감독님 덕분에 야구하면서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남겼다. 요즘 살이 쪘는데 감독님 만나서 다시 펑고를 받아야 할 것 같다(웃음). 모든 감독님, 코치님들께 감사하지만 김성근 감독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감독님께 새해 인사를 전화로 드렸는데 전력 분석 잘해보라고 격려를 해주셨다.

정근우
한화에서 김성근 감독을 다시 만났어요. 기분이 묘했을 텐데요.
“계속 이어져 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SK 때는 잘 몰랐는데 감독님이 SK를 나가신 후 제 타율이 2할대로 떨어지더라고요. 그냥 슬럼프의 시기인가보다 생각하고 넘겼는데 한화 와서 감독님 만난 후 타율이 3할대로 올라가는 거예요. 감독님이 한화를 떠나신 후 그제야 깨달았어요. 감독님은 선수들이 더 안 좋아지기 전에 빨리 붙잡아주는 분이구나 하는 사실을요. 그 덕분에 제가 그동안 결과를 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한편으로는 싫기도 했어요. 감독님이 나가신 후 또 슬럼프를 겪었거든요. 슬럼프가 길어지면서 벗어나려고 해도 잘 극복이 안 되더라고요. 누가 잡아줬으면 좋겠는데 팀에서는 알아서 잘 하겠지 하며 지켜보는 상황이라 저 혼자 발버둥 치면서 절망을 반복했습니다. 감독님이 계시는 동안 제 걸 제대로 만들어 놓지 못한 부분이 저를 힘들게 했던 셈이었죠.”
술 마시면 김성근 전 감독한테 전화를 자주 했다고요?
“목소리 듣고 싶어서요. 감독님이 그리웠습니다. 전화를 못 받으시면 다음날 꼭 전화를 해주세요. 전화해서 감독님이 “또 술 먹었냐”면서 “누구랑 먹었냐”고 물어보세요. 제가 “(박)재상이랑 먹었습니다”라고 말씀드리면 “XXX들끼리 먹었구나”하시면서 껄껄 웃으세요. 그 한 마디 듣고 싶어서 전화드렸어요. 감독님이랑 통화하면서 힘내고 싶어서요. 선수들이랑 만나면 감독님 이야기가 많이 나와요. 그러다 전화 버튼을 누르게 되고요. 전화를 받으실까, 안 받으실까 하면서 전화하다 안 받으면 애들한테 “야, 할배 전화 안 받는다”하면서 웃고.”
은사' 김성근 감독님과 어떤 얘기를 나눴나.
"시즌 종료 후 은퇴 결정에 대해 말씀드렸다. '왜 벌써 그만두느냐'고 하시더라. '이제 은퇴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감독님 덕분에 잘 성장했고, 이 자리까지 온 것 같아 감사드린다'라고 인사했다."

신성현
"김성근 감독님, 예쁘게 봐주세요"
김 감독은 "트레이드된 신성현이 감독실로 인사를 왔다. 잘됐다고 했더니 '가기 싫어요'라고 하더라"며 "이 세계가 그런 세계 아닌가. 우리가 알게 된 것이 몇 년이냐. 5년이다. 처음으로 나한테 편하게 얘길 하더라. 예전 같으면 긴장해서 말 못했을텐데"라고 제자와 마지막 인사를 나눴던 순간을 떠올렸다.
신성현에게 김 감독은 은인과도 같다. 신성현은 2013년부터 2014년까지 고양 원더스에서 김 감독의 지도 아래 기량을 발전시켰다. 원더스 해체 후에는 무릎 부상으로 드래프트 참가가 무산됐지만 한화 사령탑으로 부임한 김 감독이 신성현을 육성선수로 영입했다.

이용규
올해로 프로 12년 차인 한화 이용규가 반성을 했다. 그는 "지금까지 나는 편하게 야구를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용규는 "이제는 김성근 감독님이 추구하는 야구를 이해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런 이용규도 김성근 감독을 만나 '부족함'을 느꼈다. 이용규는 "훈련을 해도 해도 끝이 없더라. 근데, 해도 해도 부족한 부분이 보였다. 야구를 하면서 어느 순간 쉽게 생각했던 부분이 없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 생각이 김 감독님을 만나 사라졌다"고 말했다.
깨달음도 얻었다. 이용규는 "김성근 감독님에게 야구라는 것은 그냥 흐르는 것이 없더라. 한 순간도 놓치지 않는 것이 감독님이다. 경기에서 한 구 한 구를 승부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신다"면서 "감독님의 그런 모습 때문에 팀 더그아웃 분위기도 달라졌다. 선수들의 집중도가 상당히 높아졌다. 1회부터 9회까지 단 한 순간도 긴장감을 놓을 수가 없다. 선수들 모두 소홀했던 것에 대해 반성한다. 감독님이 원하는 야구를 선수들도 알고 있다"고 전했다.

송신영
한화 이글스에서 만난 김성근 감독
송신영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은퇴를 준비했다고 말한다. 2015년 시즌 이후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김성근 전 감독의 낙점을 받고 다시 한화로 방향을 틀었고, 이곳에서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보내게 된다. 송신영은 김성근 전 감독을 중앙고에서 처음 만났다고 회상한다.
“당시 인스트럭터 신분으로 감독님이 중앙고를 방문하셨다. 그때 내가 공 던지는 모습을 보고 감독님은 ‘야구 선수로서 자격이 없다’고 말씀하셨고, 자격 없는 선수에게 커브 던지는 걸 알려주셨다. 직구와 슬라이더 밖에 던질 줄 모르던 내가 감독님 덕분에 커브를 배운 것이다. 그리고 한화에서 감독님으로 다시 만났을 때 내게 나이를 물어 보셨다. 한국 나이로 마흔 한 살이라고 말씀 드렸더니 감독님은 ‘대단하구나. 앞으로 네가 해오던 대로 훈련하고 몸 안 다치게 잘 만들어라’며 감동을 주셨다. 그때 야구 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감독님의 말씀이 고마운 나머지 잘 보이려고 오버 페이스하다 결국 부상을 입었고 한화에선 줄곧 좋은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사실 지난 시즌 마치고 감독님이 내게 코치를 권유하셨다. 미련 때문에 ‘1년만 더 하겠습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감독님은 그대로 받아주시더라. 그때 느꼈다. 밖에서 감독님을 평가하는 것과 선수들이 감독님을 생각하는 마음에 왜 차이가 나는지를. 혹사, 퀵후크 등 논란이 끊이질 않았지만 투수들 대부분은 감독님의 상황과 결정을 이해했다. 물론 옛날 야구 방식을 고집하신 부분도 있다. 그래도 야구에 대한 열정과 선수를 챙기고 존중해주는 배려만큼은 김성근 감독님을 따라갈 지도자는 없다.”
송신영은 한화를 떠나면서 김성근 전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그는 “감독님 덕분에 2년 더 야구했습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했고, 김 전 감독은 “이럴 줄 알았으면 넥센에서 은퇴하게 놔둘 걸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것 같다. 미안하다”며 송신영을 위로했다.

15. 기타

15.1. 악성 팬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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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평가

파일:김성근 프로 감독 경력.jpg
한국프로야구 역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을 정도로 공과 과가 갈리며 사람마다 다른 평가를 내리는 인물로, 그 누구보다 명암이 뚜렷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KBO 리그를 통틀어 남긴 족적이 매우 크기에,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20세기까지의 올드스쿨 스타일을 상징하는 감독[79]으로 평가된다.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 LG, SK, 한화 총 7개팀의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각 팀 별로 받은 평가가 천차만별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점이다. 태평양, 쌍방울, LG, SK, 고양 시절에는 신구조화가 일어날 정도로 선수풀도 어느정도 있어서 좋은 평가를 받아서 한때 김응용이 지어준 '야신'이라는 별명까지 붙었으나 삼성 시절에는 구단의 전폭적인 지원과 선수풀도 충분한 삼성에서 선수단 불화, 이중오더로 나락을 갔고 리빌딩의 대가로 추앙받아 부임한 한화 시절에는 리빌딩 하랬더니 노장 선호와 투수 혹사로 리빌딩 따위는 내팽개치고[80] 선수단을 쑥대밭으로 만들 정도로 나쁜 점이 부각되며 팀 팬들에게 매우 나쁜 평가를 받고 세이콘, 살완마라는 부정적인 별명으로 불리는 것에서 김성근의 평가가 얼마나 갈리는 지 알 수 있다.

초창기 프로야구 시절부터 불펜을 중심으로 한 야구를 구사했고 이는 2000년대 후반 SK 감독시절 이른바 ' 벌떼야구'로 불리기도 했다. 감독 커리어 전반기에는 태평양, 쌍방울을 맡아 특유의 쥐어짜기식 혹사 운영으로 하위권이었던 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키는데 성공하여 하위권 팀의 성적을 끌어올리는데 능하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OB, 삼성 등 강팀을 맡고도 성적을 내는데 실패하기도 했다. 특히 쌍방울 시절은 가난하고 힘든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하위권팀을 포스트시즌에 진출시켰다는 점에서 그의 개인 팬들에 의해 '김성근의 쌍방울 신화'로 포장되기도 했다. 그러나 쌍방울이 무척 가난했다는 김성근 본인의 주장과는 달리 당시 쌍방울은 오히려 선수 연봉 총액 1위 구단이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기도 했다. 재임 기간 동안 마른 수건 쥐어짜듯이 선수들을 혹사시키기 때문에 그가 퇴임한 후 예외없이 암흑기에 빠져들었다. 2002년 LG가 정규순위 4위로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해 3위, 2위를 꺾고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포스트시즌에서 준우승을 차지하기 전까지 OB, 태평양, 삼성, 쌍방울을 거치는 동안 포스트시즌만 나가면 번번히 탈락했기[81] 때문에 단기전에 약한 감독, 새가슴 감독의 대명사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SK 와이번스 감독 시절 페넌트레이스와 포스트시즌 모두 뛰어난 성적을 거두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투수 운영 방식과 단기전 승부사 기질을 가진 명감독으로 평가받기도 했다. SK 시절 거둔 뛰어난 성적 덕분에 이면의 모든 부정적인 면들이 가려진 채, '야신'이라고 불리며 야구계 안팎에서 추앙받으며 수많은 기업과 대학을 비롯해 심지어 청와대에서까지 초청받아 리더십과 성공론, 인생론에 대한 강연을 했다. 또한 그를 추종하는 팬덤이 생겨나기도 했다.

긍정적으로는 승부사 기질을 통하여 팀의 전력을 짜내는 방식으로 승리를 쟁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과거부터 이런 윈나우식 운영으로 약팀을 맡아 호성적을 낸 경험이 꽤 있었으며, 언론플레이를 통한 좋은 이미지와 더불어 매우 높은 현장 평가를 통하여 30년동안 한국프로야구의 각종 팀들의 감독을 맡았다. 그의 전성기인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스타 선수를 발굴하는 안목으로 김광현, 최정, 정근우, 김강민, 박정권 등의 스타 선수를 발굴하였고 이후 왕조를 창건하기까지 했으며, 정신력을 강조하는 야구로 다른 많은 야구인들에게 귀감이 되었다.[82]

그러나 현재의 야구팬들 다수는 김성근에 대하여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데, 그 시발점이 된 것은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다시 야구계에 복귀하면서 그에 대한 재평가가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부터다. 이전부터도 김성근에 대해서는 실적 이면에 스타일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있어왔는데, 이 시기 본격적으로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온갖 비매너 플레이, 꼼수, 편법, 심리적 도발을 동원하는 비열하고 더러운 야구, 팀을 철저하게 쥐어짜서 거덜내는 운영 스타일, 선수를 소모품으로 여기고 "투수는 던질수록 강해진다"는 자신만의 야구철학으로 인한 선수들의 혹사와 그로 인한 부상,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식의 좋지 않은 언행으로 끊임없이 상대팀을 도발하고 흔들기, 프런트의 권한을 전부 가져가 자기 양껏 운용하면서도 항상 프런트와 마찰을 빚는 독선적이고 모난 성격, 심한 뒤끝으로 팀을 떠난 후 자신이 몸담았던 팀을 극렬히 비난하는 행태 등으로 야구계 안팎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왔다.

그런 와중에도 계속된 언플로 그는 항상 프런트라는 기득권에게 쫒겨나는 강직한 야구인으로 포장되었다. 김성근이 경질되고 난 후 팀은 혹사로 망가진 선수들과 은퇴할 시기가 지난 노장들만 남은 황폐한 상황이 된다.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키울만한 자원도 없다. 게다가 밖에서는 김성근이 끊임없이 팀을 맹렬히 비난하면서 팀을 더 흔들어 놓는 상황이다. 김성근의 후임 감독들[83]은 이렇게 어려운 암흑기 상황의 팀을 맡아 이끌게 되고, 당연히 좋은 성적을 내기 어렵다. 그러면 김성근의 추종자들은 "거봐라 역시 김성근 아니면 안된다"는 식으로 언플을 했다. 물론 김성근이 2017년 한화에서 물러난 직후 2018년 후임 감독으로 한용덕이 오자마자 10년 동안 꼴찌와 하위권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던 한화가 11년만에 단숨에 포스트시즌까지 진출했고, 이후 추종자들은 많이 없어졌다. 물론 남은 추종자들이 한용덕의 가을야구 진출을 보고 김성근의 유산 덕이라고 포장하는건 덤이다.

김성근은 그가 활동하던 20세기식 야구관을 타협하지 않으려 하였으며, 이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는 점 때문에 위에서 전력 짜내기의 연장선으로 현대야구에서 용납되지 않는 투수 혹사가 발생하였고, 이 과정에서 한화 이글스의 살려조를 포함하여 박정현, 이동현, 전병두 등 여러 선수들의 커리어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또한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계속된 언론플레이로 인하여 팬들에게 인식이 매우 나빠졌다. 올드스쿨 스타일 감독의 대표주자답게 스타 선수들을 발굴하는 안목은 높았지만 스스로 시스템을 만들어서 유망주를 육성하지는 못했으며, 투수 혹사 성향과 겹쳐져 김성근의 부임 이후 팀들의 성적이 나빠지는 현상인 김성근의 저주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특유의 승리지상주의 매니징 스타일로 인하여 타 팀 팬들에게 여러 비매너 논란과 구설을 만든 것도 그의 평가 하락에 한몫했으며 결국 구시대적 야구관을 통하여 성적을 내지 못한 한화 이글스 감독 시절 이후 과거의 명성을 잃고 평가가 폭락하였다. 이후 타협하지 않는 스타일의 연장선으로 프런트와의 갈등을 빚으며 결국 한화 이글스의 감독을 불명예스럽게 사퇴하였다.

한화 감독에 부임하면서 그 동안 가려져 있던 김성근 야구의 문제점들인 비열하다 못해 추악한 야구, 살려조로 대표되는 혹사, 마구잡이식 기용, 쥐어짜기 운용, 구시대적 훈련 방법 등 그동안 가려져 있었던 추잡하고 역겨운 민낯짝이 완전히 드러나면서 지금까지도 야빠들의 무수한 비난을 받고 있다. 또한 그간 묻혀있던 김성근의 각종 어두웠던 과거 행적들이 속속 다시 밝혀지게 되었다. 동시에 그동안 저평가되어있던 후임 지도자들에 대한 재평가도 이뤄지고 있다. 이는 아래 두 인용문으로 잘 설명된다.
"LG 김성근 감독이 워낙 잘했어요 '신이 아닌가' 그렇게 느낄 정도로" - 김응용
사실 이것은 김응용 당시 삼성 라이온즈 감독이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성근을 이긴 뒤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김응용은 패자를 배려하기 위해 한 말이라고 밝혔지만,김응용 본인의 의도와 다르게 이 말은 김성근 팬들에게 윤색되어 김성근을 추앙하기 위해 오랫 동안 인용되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실제로 후속 인터뷰로 "그 신도 여러 가지의 이 있잖아요."라는 후세에 재평가되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며 본인을 더 띄우기 위한 의도의 인터뷰였다. 김성근 팬들이 주장하는 야신이라는 단어는 김응용 감독에게 더 어울리는데 말이다. 사실 그 김응용도 한화에서의 행보는 심각하기 그지 없긴 했다.

그리고 이후...
'김성근 야구'는 몰인간적이고 폭압적이다. 그리고 비민주적이다. 자율화와 인간 중심이란 우리 사회의 소중한 가치를 그는 송두리째 부정했다. … 그는 한국 야구를 황폐화시켰고, 리그가 지향해야 할 가치관을 흔들어 놓았다. 그는 독단적이고 획일적이고 강압적이다. 한국 야구에 더 이상의 불행이 있어서는 안 된다.
[김대호의 야구생각] '김성근 야구'의 실패가 주는 교훈
이 두 기사에서 설명하는 김성근이라는 인물은 모두 동일 인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2002년에 김성근을 바라보는 시선과 2016년에 김성근을 바라보는 시선이 확연히 바뀐 셈이다. 선수를 몰아붙여 선수에게 내재된 잠재력을 극대화 시켜주는 능수능란하고 성실한 지도자라는 긍정적 평가와 승부에 지나치게 집착하느라 선수를 혹사시키고 황폐화시키는 강압적 꼰대라는 부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았던 것이다. 김성근 감독과 당시 한화 이글스의 팀컬러가 상극이었다는 후일의 평가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렇게 한국에서 이미지가 매우 나빠졌지만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계속 지도자 생활을 이어가고 싶었던 김성근은 결국 본인이 가장 익숙하게 느끼는 일본프로야구에서 1군 코치[84]까지 부임하였으며, 80세가 다 되어가는 말년까지 현역 지도자로 활동하였다.[85] 이러한 면모를 통하여 현재는 그를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상당수의 현대야구팬들에게조차도 야구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인정받고 있다. 이러한 점 때문인지 그와 함께한 거의 대부분의 야구인들, 특히나 그를 거치며 선수 생활에 악영향을 받은 선수들도 그에 대하여 좋은 평가를 내리고 있다.[86]

2022년 프로리그 지도자로서는 완전히 은퇴했고, 이 해 하반기에 JTBC의 프로그램인 최강야구 최강 몬스터즈 2대 감독을 맡으면서 노리타를 필두류 다시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이러한 재평가도 잠시, 시간이 지나자 송창식 벌투 사건을 "선수들은 감각을 찾기 위한 노력을 안하니 내가 기회를 줬다."라고 미화를 시도하고 KBO 선수들의 MLB 도전을 "야구로 돈을 번다.", "위치에 맞는 노력을 해야한다.", "난 지도자 시절 선수 탓을 하지 않았다." 등등 온갖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갔을 야구 팬들의 여론을 다시 하락시키고 있다. 예능 복귀 당시에도 "예능에서 이미지 미화하고 나중에 언론 플레이로 세탁하는게 아니냐"라며 탐탁치 않아하는 야구 팬들이 적지 않았는데 그 우려가 제대로 들어맞은 셈.

16.1. 승리지상주의

김성근의 매니징 스타일을 요약하자면 승리지상주의 야구라고 볼 수 있다.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 어떠한 수단도 마다하지 않는다. 명성 때문에 다른 사람까지 도구로 사용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이러한 행태 때문에 온갖 구설수와 비판에 시달리면서, 더욱 성적에 집착했다.

과거에는 이러한 방식이 꽤 잘 통용되던 시기도 있었다. 김성근이 한국으로 영주귀국한 1960년대에는 인기에 힘입어 실업리그가 출범은 했지만 명색이 돈 받고 야구한다는 선수들이 변화구는 구경도 못 해본 선수가 태반에, 체계적인 몸관리 등도 제대로 모르던 때였다. 그 시절 김성근이 일본에서 배워온 방식은 무식하게 많은 훈련량으로 밀어붙이는, 지금 와서 보면 주먹구구나 다름없는 방식이었으나 그마저도 못 되던 프로 이전 실업야구 수준에서 당시 기준으로는 엄청나게 혁신적이었고, 덕분에 실업 시절 명선수로서 다승왕, 국가대표로 이름을 날렸으며 감독으로서도 초창기 프로야구판에서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혹사 감독이지만, 이건 딱히 김성근만 그런 게 아니라 그 때는 정말 누구나 다 그랬다. 장명부가 427이닝 30승을 거둔 게 프로야구 2년차고, 최동원이 정규리그 284.2이닝 후 한국시리즈 7경기 중 5경기에 올라온 게 3년차였다. 미국이나 일본이라고 다를 것도 없는 게 저 당시 에이스인 이나오 카즈히사, 게일로드 페리같은 선수들은 지금 와선 상상도 할 수 없는 300이닝을 척척 먹어줬고[87], 마지막 이닝만 책임지는 전문 마무리 투수가 최초로 등장한 것이 당시 한국프로야구 출범 7년차였던 1988년의 데니스 에커슬리이었을 정도로 마무리 투수가 3~4이닝 이상을 책임지는 것이 당연한 시대였다. 또한 그 당시에는 스포츠 의학, 관리같은 개념도 없었고 애초에 한국에서는 프로스포츠로 평생을 먹고 살 돈을 번다는 개념이 희박해서 젊었을 때 잠깐 하다가 금방 은퇴하고 소속팀 모기업에 취직하거나, 모아둔 연봉으로 가게를 열어 자영업을 하거나 하는 그런 시절이었기에 관리를 하는 방법도 몰랐고, 할 필요조차도 없었다.

김성근처럼 선수를 굴렸다간 30대 찍기도 전에 은퇴하게 되지만 그 땐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게 당연한 것이었기에 당시 기준으로는 문제가 될 일은 아니었다. 샌디 코팩스를 최연소 명예의 전당 헌액자로 만든 월터 올스턴, 페르난도 발렌수엘라를 3일 텀으로 6번씩 완투를 시킨 토미 라소다같은 감독이 메이저리그 명감독으로 칭송받던 시절이었다. 그땐 누구나 애초에 선수를 제대로 휴식을 주어가며 관리를 해 본 적이 없고, 그래야 할 필요도 몰랐으며 그게 문제인지도 몰랐다. 야구가 아니라도 당시 노동자들은 일주일에 하루도 휴일이 없이 달에 2일 혹은 아예 못 쉬거나 일일 근로시간이 14~15시간을 넘기는 경우가 허다했는데, 심지어 그게 불법도 아니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발암물질인 석면을 뭔지도 모르고 마스크도 없이 일하면서 마구 흡입해댔고, 야구도 그런 것이었다. 물론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모두 터무니없는 일들이지만, 그땐 그렇지 않았다. 어떤 사람의 행적은 반드시 그 사람이 살아온 시대적 배경과 함께 평가되어야 한다. 지금 기준으로 그 당시의 김성근을 평가하는 것은 베이브 루스 타이 콥 같은 100년 전의 위대한 선수들을 변화구도 커브 한 종류밖에 없었던 시대에서 활동한 주제에 전설 대접 받는 범부, 세종대왕을 민주주의도 모르는 구시대적 왕조 체제 하의 독재자라고 평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시대에 태어나서 그들의 시대에 최고가 된 그들을 세상은 아무도 무시하지 않는다.

그 시대에 김성근의 방식은 몸관리는 커녕 프로의식이 덜 정착되어 그냥 타고난 재능으로 야구를 하며 남는 시간에 술 먹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던 많은 선수들에게는 필요한 것이기까지 했는데, 이것은 사실 지금도 어느 정도 해당되는 얘기다. 손민한이 임페리얼 위스키에 떡이 돼서 토하고 나가 완봉했다는 이야기가 그리 먼 옛날이 아니고, 선수들이 경기 끝나고 숙소에서 술마시다 코로나 집단 감염 사태를 터뜨린 게 2021년이었다. 지금도 한국 야구선수들은 철저한 몸관리는 커녕 흡연자 수도 적지 않다. 지옥훈련이 지나치면 그것도 문제가 되지만, 어느 정도는 훈련과 몸관리를 철저히 해 줘야 제 기량을 낼 수 있는데, 과거 실업야구 시절부터 현재까지도 한국야구계는 훈련을 지나치게 해서 문제라기보다는 훈련을 너무 적게 해서 문제라고 평가받는 여론이 많았다.

그러나 시대는 진보하면서 90년대의 라루사이즘, 00년대에 화두가 된 스포츠 과학 등 과학이 진보하며 스포츠에 체계가 잡히기 시작했으며 스포츠 외적으로도 인권의식이 상승하였고 오히려 시대착오적 혹사보다는 적당한 휴식과 회복, 관리가 선수의 능력을 더욱 끌어내준다는 사실을 발견해내고 각종 새로운 사실들이 발견되었으나 김성근은 시대의 변화를 거부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 권혁이나 각종 살려조의 투구는 김성근이 젊은 시절을 보낸 70~80년대 기준으로 보면 별 이상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2010년대에는 야구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시대에 뒤쳐진 터무니 없는 행위여서 문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김성근이 사이코패스거나 뿌리까지 악인이여서 그런 기용을 한 게 아니다. 김성근 본인도 그런 혹사와 관리 소홀로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지만 그땐 그게 당연한 것이었다. 본인이 젊었을 때 당연했던 것을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했고 그냥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 구시대 야구인이었을 뿐이다.

아직 아마추어리즘과 적은 경기수, 미국이나 일본보다 발전이 늦고 최신메타의 도입이 늦은 한국 프로야구 환경 등 김성근에게 유리한 조건이 충분히 남아있던 SK 시절까지는 전임 감독이 물려준 풍부한 선수팜, 본인의 강훈련, 모기업의 대대적인 지원 등 여러가지 요소가 겹쳐 '야신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대단한 실적을 낼 수 있었다. 사실 대략 SK 때부터 혹사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며 시대와 조금씩 어긋나는 감이 있었으나, 김성근에게 유리했던 외적 조건을 바탕으로 결과적으로 좋은 성적을 냈기 때문에 이를 커버할 수 있었다고 봐야겠다.

그러나 김성근이 현장을 떠나 있던 대략 5년간 프로야구에는 수많은 일들이 있었고 김성근식 불펜 짜먹기 야구는 이미 시대에 뒤쳐져 있었다. 특히 신구단 창단이 매우 크게 작용했는데, 그전까지는 1년 133경기라는 상대적으로 적은 경기수로 불펜을 막 짜먹어도 그럭저럭 팀을 유지할 수 있었다. 김성근의 혹사를 대표하는 선수들을 자세히 보면 망가진 선수는 대부분 1년에 한 명이지, 여러 명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진 경우는 한화 시절 정도밖에 없다. 1년에 한 명 정도만 작살나게 기용하면 성적도 낼 수 있고 불펜에서 1년 반짝하는 정도의 자원은 매년 나오기에 또 내년이면 다른 노예가 등장해서 그럭저럭 팀 전체의 전력은 유지가 되는 것이다.[88] 개중에는 정우람처럼 롱런하는 특이한 노예가 나오기도 했고. 1년에 한둘쯤 망가지는 선수는 나오지만 팀 전체의 투수력이 동시다발적으로 망가지지는 않았기에 혹사라는 비판은 일각에서 나와도 팀의 전체적인 전력은 유지하고 있었고, 어찌 됐건 팀 성적은 좋았으니 주류 여론이 되지는 못했다. 이것이 김성근의 SK 시절이었다.

그러나 한화 시절은 이미 10구단 체제로 들어서서 1군 출전가능 로스터 수는 일본보다 1명 적은데도 일본보다 많아진 경기수, 늘어난 팀 숫자로 인해 줄어든 투수 인재풀, 돌아온 빅볼메타로 인해 힘들어진 '지키는 야구', 기후변화로 폭염의 증가와 장마철에 우천으로 인한 휴식 확보가 예전보다 안 되는 등 온갖 조건이 다 김성근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더이상 필승조 한 명을 불펜 노예로 쓰는 정도로는 시즌을 이끌어나갈 수가 없게 되었고, 3~4명을 동시에 망가지도록 기용해야 할 정도로 김성근식 야구는 힘들어졌다. 이렇게 되면 투수력이 시즌 후 회복이 되어서 김성근 물러날 때 정도까지는 어찌어찌 투수력이 유지되는 노예 1명 체제 때와는 다르게 팀의 투수력이 1년 정도로는 회복이 힘들 정도로 빠르게 망가진다.

선동열 등 비슷한 불펜야구를 하던 감독들은 잘리거나 은퇴해서 뒷전으로 물러나고 새로운 메타에 맞는 젊은 감독들이 나타나거나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김성근은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수했고, 결국 성적도 명분도 둘 다 잃은 채 잘리는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89]

결국 현역 시절에는 명선수로, 감독 시절에는 명감독으로 이름을 날렸으나 변화를 거부하고 자신의 옛날 방식을 고집하다가, 비슷한 길을 걸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오명을 뒤집어쓰고 물러나게 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 성공한 사람들은 자신의 성공 비결을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자신을 잘 바꾸려 하지 않아서 점점 시대의 변화에 도태되기 시작하고, 또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방식대로 성공한 사람들이 등장하며 사라져 간다. 김성근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2021년에도 '타협을 하면 안된다', '한계를 넘어야 한다', ' 시대는 변해도 조직이 룰을 바꾸면 안된다'고 이야기했는데, 이 점에서 김성근은 결코 자신의 철학을 바꿀 생각이 없었다. 물론 초,중,고 야구부에서 최고의 선수들만 모은 엘리트 선수들을 통제하려면 이러한 에고가 필요하기도 했고, 김성근을 겪었던 선수들 중에는 김성근을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선수들은 많다. 객관적으로 그러한 훈련과 기용이 선수의 기량을 향상시키고, 오랜 선수 생활을 보장해줬는지와는 별개로 말이다. 김성근은 무자비한 훈련과 혹사, 그리고 꼼수를 성과로 합리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역으로 한화 이글스에서 그 성과가 무너졌을 때 김성근을 보호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야구 내적인 평가와 별개로 프로야구 선수의 팬 서비스를 중요하게 여겼다. 프로선수는 팬 서비스보다 성적이 더 중요하다고 여겨졌던 시대에도 이미 김성근은 팬 서비스를 소홀히 할 경우에 벌금을 내는 내규를 선수단에게 지키게 하는 등 팬 서비스에 대해 선수들에게 철저히 교육시켰다.

그리고 야구팬들의 평가 외로 선수들의 평가는 희한할 만큼 높다. 어느 정도 립서비스는 필요한 언론 인터뷰는 차치하더라도 한때 김성근 감독 밑에서 뛴 박현준 LG 트윈스 갤러리에서 썰을 풀었을 때도 선수로 거쳐가면 존경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고 추켜세우는 등[90] 팬들의 평가와는 별개로 야구선수들에게 인망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화 부임 초창기인 2015년 전반기까지는 야구 팬들 사이에서 '야신' 등 극도의 신격화가 성행했다면, 이후 약 7년간은 극도의 혐오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점. 김성근의 감독 스타일과 전술은 말년까지 거의 변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한국 프로야구의 환경 변화나 그의 극단적인 명암을 상징하는 대목이기도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한국 야구팬들의 냄비근성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다.

2018년 이후 계속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간간히 인터뷰하는 걸 제외하면 논란이 줄어들었고 나이가 나이인지라 앞으로 새로운 감독직을 수락할 가능성도 적어 보이며, 한화 감독에서 경질된 지 시간이 흐르면서 한화 시절 응원가가 재발굴되고 김성근의 철학의 밈화[91] 등으로 여론이 많이 완화된 것도 없지 않아 있다. 물론 당연히 감독으로서의 평가는 여전히 심하게 호불호가 갈려 농담으로라도 김성근 복귀를 말하는 순간 팬들의 뭇매를 맞을 수 있었다. '감독'으로서의 김성근보단 '밈'으로서의 김성근이 대세가 된 셈.

어찌보면 대한민국의 6.25 전쟁 이후 노력, 혹사에 대한 각 세대별 가치관, 변화하는 시대와 그에 따른 갈등을 야구로써 가장 잘 보여준 인물이 김성근이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야구 뿐만 아니라 60~70년대는 모든 분야에서 무조건 혹사시켜가면서도 열심히 공부하고 일을 하면 성공할 수 있었던 시대였고, 그것이 80년대까지 쭉 이어져 오다가 1997년 외환위기로 전환점을 맞게 되고 역성장이 이어지며 공부, 노력에 올인하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성공할 수 없는 사회가 되었고, 가치관의 다양화 및 구세대간의 갈등으로 이어져 온 것이다.

16.2. 관련 어록

김성근의 예고된 몰락, 적폐가 되어버린 '야신' 신화
단순히 성적 부진만 아니라 김성근 부임 이후 끊임없이 거론된 선수 혹사 논란, 독선적이고 권위적인 팀 운영, 구단과의 마찰 등으로 수많은 구설수를 초래했고 한때 든든한 우군이었던 팬들과 구단조차도 질린 나머지 잇달아 등을 돌리게 했다.

김성근에게 야구를 바라보는 기준이란, 철저히 자기 자신의 주관적 신념과 경험에만 의지하고 있었고 이는 필연적으로 독선과 불통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야구는 냉정하게 말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김성근만의 야구에 가깝다. 투수 운용 패턴이나 훈련과 휴식의 구분, 혹사의 개념 등 어떤 측면에서 봐도 원칙이나 일관성을 도무지 파악할 수 없는 야구다.

김성근 야구에 대한 모든 판단의 옳고 그름, 타당성과 개연성을 가늠할 수 있는 절대 기준은 오로지 '김성근 그 자체' 밖에 없었다. 불펜투수를 매일 연투시키고, 돌아가면서 부상자가 끊임없이 발생하고, 유망주들은 트레이드로 유출되어 미래마저 암울해지는 부작용이 아무리 심각해도 김성근이 그렇게 해야 했다고 믿는다면 그런 것이다.

철저하게 눈앞의 효율성만 강조하여 선수들을 소모품처럼 다루는 야구는 뒤로 갈수록 혹사와 부상 논란, 팀의 노쇠화 같은 많은 부작용을 양산하기 일쑤였다. 선수들의 보이지 않는 희생이나 구단의 지원·시스템같이 조직을 지탱하는 다양한 구성 요소들이 제대로 부각되지 않고 오직 김성근 덕분에 성공했다는 잘못된 환상이 퍼진 것도 갈등을 유발하며 '김성근 리더십'의 공과에 대한 객관적인 조명을 흐리게 만들었다.

김성근은 자신을 둘러싼 비판 여론이 나올 때마다 '핍박받는 아웃사이더'나 '소신 있는 리더'라는 이미지로 스스로를 포장하며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을 적으로 돌려 내부를 결속시키는 방식을 고수했다. 수많은 인터뷰나 자서전 등을 통하여 자신의 업적을 미화하는 데도 열을 올렸다. 말 그대로 1970~80년대에나 통하던 낡은 성공 방식이나 언론플레이를 21세기에도 그대로 답습하려다가 역풍을 맞고 몰락했다는 점에서 마치 몇몇 정치인들 혹은 우리 현대사의 데자뷔를 보는 듯 묘한 느낌까지 든다.

한화도 김성근과의 불편한 동거에 우여곡절 끝에 마침표를 찍기는 했지만,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결별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던 만큼 김성근 전 감독이나 그를 추종하는 팬들이 당분간 외부에서 구단을 비난하며 갈등을 일으키는 구도가 형성될 수도 있다. 2011년 SK 시절에도 당시 이만수 후임 감독과 구단 프런트는 김성근 측의 악의적인 여론몰이에 꽤 오랫동안 적지 않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 당시 폭도로 돌변한 일부 극성팬들이 홈구장에 방화를 저지르고 난동을 부리는 불상사도 있었다. 이번에도 김성근의 사퇴가 알려지면서 박종훈 단장을 비롯한 한화 구단 관계자들이 일부 극성팬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의 타깃이 되고 있어서 주의가 요구되는 상황이다.

김성근 전 감독이 망가뜨린 유망주 육성 시스템과 1군 라인업의 고령화, 고비용 저효율의 선수단 구조를 개편하고 팀을 재건하려면 후임 감독이 누가 되든지 당분간 고생이 불가피하다. 지난해까지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했던 한화로서는 당분간 암흑기가 언제까지 계속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김성근은 드디어 떠났지만, 한화가 구시대의 적폐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아직도 험난한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김성근을 무너뜨린 것은 그 자신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한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이다. 최근 몇 개월간 얻어 먹은 술의 일정 부분을 한화팬에게 얻어먹었기에 오히려 한화를 저주하면 안 될 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내년 시즌 한화가 부진했으면 좋겠다.

이런 방식으로 한화가 성공을 거둔다면, '김성근식 성공법' '이글스식 성공법' 등이 판치면서 이미 야근, 주말근무가 당연한 나라에 정신나간 일들이 당연스럽게 받아지는 날이 오게 될 거란 걱정이 들기 때문이다. 거기에 직장에서 머리까지 빡빡 밀고 다니라고 한다면…
"꼴찌가 어디서 놀아" 지옥훈련 부추기는 폭력적 한국인, 2014년 12월 4일, ㅍㅍㅅㅅ

17. 역대 감독 성적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순위
1984 OB 베어스 100 58 41 1 1위/6팀[92] 3위/6팀[93]
1985 110 51 57 2 4위/6팀[94] 4위/6팀[95]
1986 108 56 48 4 4위/7팀[96] 4위/7팀[97]
1987 108 55 52 1 4위/7팀[98] 4위/7팀[99]
1988 108 54 52 2 5위/7팀[100] 5위/7팀
통산 534 274 250 10 ­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순위
1989 태평양 돌핀스 120 62 54 4 3위/7팀 3위/7팀[101]
1990 120 58 59 3 5위/7팀 5위/7팀
통산 240 120 113 7 ­
연도 경기수 정규리그 최종순위
1991 삼성 라이온즈 126 70 55 1 3위/8팀 3위/8팀[102]
1992 126 67 57 2 4위/8팀 4위/8팀[103]
통산 252 137 112 3 ­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순위
1996 쌍방울 레이더스 126 70 54 2 2위/8팀 3위/8팀[104]
1997 126 71 53 2 3위/8팀 3위/8팀[105]
1998 126 58 66 2 6위/8팀 6위/8팀
1999 81 17 59 5 8위/8팀[106] -
통산 459 216 232 11 ­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1 LG 트윈스 98 49 42 7 6위/8팀 6위/8팀
2002 133 66 61 6 4위/8팀 준우승/8팀[107]
통산 231 115 103 13 ­
연도 경기 정규리그 최종순위
2007 SK 와이번스 126 73 48 5 1위/8팀 우승/8팀
2008 126 83 43 0 1위/8팀 우승/8팀
2009 133 80 47 6 2위/8팀 준우승/8팀
2010 133 84 47 2 1위/8팀 우승/8팀
2011 93 52 41 0 3위/8팀[108] -
통산 611 372 232 13 ­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최종순위
2015 한화 이글스 144 68 76 0 6위/10팀 6위/10팀
2016 132[109] 64 65 3 7위/10팀 7위/10팀
2017 43 18 25 0 9위/10팀[110] -
통산 319 150 166 3 ­
총계 2646 1384 1202 60 ­

18. 관련 문서



[1] 선수로서 한국시리즈 최초의 퇴장은 1996년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해태 타이거즈의 포수 최해식이다. [A] 공동 2위는 총 16연승으로 1986년 김영덕 감독의 삼성 라이온즈2010년 김성근 감독의 SK 와이번스. [A] [4] 일본명은 가네바야시 세이콘(かねばやし せいこん, 金林星根, 김림성근). 지바 롯데 마린즈 / 소프트뱅크 코치 등 일본에서 지도자로 재임 중이던 시기에는 일본명 대신 한국명인 金星根을 사용했다. [5] 호적상 생일은 1942년 12월 13일생으로 태어날 당시에는 쇼와 17년이라는 연호나 황기 2602년을 사용했다. [6] 경상남도 진주시 미천면 # [7] 1964년 12월에 영주 귀국했다. 일본 출생이긴 하지만 재일교포일 뿐이며 일본 국적을 가진 적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태어날 때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는 일본 국적이었겠지만 그 이후부터는 평생 한국인이다. [8] 나이를 먹은 지금은 신장이 꽤 줄은 듯 하다. # 영상에서 175cm인 유희관보다 살짝 작은듯 보이나 이는 선수 스파이크와 감독의 운동화 차이 및 자세를 바탕으로 감안하면 비슷하거나 좀 더 크고, 172cm인 정근우보다 더 큰 걸 보면 현재 신장은 175cm~177cm 사이인 듯. 박정진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면 얼마 전인 한화 시절에는 진짜로 180cm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추간판탈출증 수술 이후 키가 줄은 듯 하다. [9] zum 프로필 기준 [10] # [11] 김성근이 중학교 1학년 때 별세했다. [12] 京都市立四条中學校. [13] 京都府立桂高等學校. [14] 60학번. 1학년 2학기 도중에 학교를 중퇴하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2011년 동아대로부터 명예 학위를 취득했다. [15] 최강야구에서 선발 라인업 작성할 때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도 왼손잡이인 것으로 추정된다. 최강야구 뿐만 아니라 프로팀 감독 할때도 종종 포착되었으며 이때도 좌타자와 좌투수 기준 포즈를 취하며 시범을 보이거나 펑고를 칠때도 좌타로 친다. [16] ~4월 15일 [17] 4월 16일~5월 15일 [18] 5월 16일~ [가사]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예예예 예예예 (X7) 예~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20] 2015 시즌 전반기에만 잠시 사용된 응원가인데, 인터넷 방송인 케인을 시작으로 여러 방송인의 방송에서 영상 도네이션으로 활용되면서 다른 의미로 유명해졌다. 김성근 감독 외에도 선동열 KIA 타이거즈 감독, 카를로스 수베로 한화 이글스 감독도 전용 응원가가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한화의 김성근 감독님 사랑해 문서 참고. [21] 은퇴기사 [22] "김 감독은 일본에서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이기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그때부터 독기를 품고 이기기 위해 노력했다." 출처 - # [23] 1940년대생인데 프로필상 키가 (지금도 작지 않은) 180이다. 물론 덩치가 크다고 차별이나 괴롭힘을 안 당하는 것은 아니지만, 당시 학생 김성근에게 함부로 할 사람이 누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 압도적인 피지컬이라 할 수 있다. [24] 지금이야 나이가 들어서 더 심하지만 사실 이전에도 한국어 발음은 부정확했다.NHK 방송국에서 다큐멘터리를 찍으러 왔을 때 일본어를 더 유창하게 쓰기도 했다. [25] 태어날 당시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던 외국인 선수(장훈이 태어날 당시엔 한국 일본의 식민지였으니 장훈도 일본 국적을 가지게 된다)도 일본인 선수로 대우하도록 바꿨다. [26] 팀에 따라 오히려 활동비를 내야 하는 경우도 있긴 한데, 사회인 클럽팀이 본격적인 프로진출 교두보가 되고 컨소시엄팀까지 등장한 이후 이야기지 김성근 시절은 그런 거 없었고 100% 월급을 받으면서 선수생활 했다. [27] 국토교통부의 전신. [28] 나중에는 전등을 키는 것조차 어깨가 안움직여서 힘들었다고 한다. [29] 당시 투수들은 경기 후 아이싱은커녕 오히려 뜨거운 걸 어깨에 대고 있었다고 한다. [30] 참고로 들고 온 사진은 대한민국 최초의 연속사진이라고 한다. [31] 박영길 재일동포 출신인 신용균이 최초로 싱커를 던졌다고 증언했고, 김영덕은 한국야구위원회와 대한야구협회가 공동출판한 "한국야구사"에서 본인이 한국에서 최초로 슬라이더를 던진 인물로 기록된 것을 스스로 부인하면서, 신용균이 최초로 슬라이더를 던졌으며, 김영덕 본인은 싱커를 처음으로 던졌다고 말했다. 일단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싱커 자체가 없었다. 싱커를 처음으로 던진 투수는 47년 데뷔한 커트 시몬스인데, 이 선수의 본격적인 커리어는 한국전쟁 이후다. [32] 단 김성근이 감독을 맡았던 팀 중 최고의 전성기를 보냈던 SK 와이번스SK 왕조라는 이름으로 불릴 정도로 막강하여 2000년대 후반 최강팀으로 자리잡아 한국시리즈 3회 우승, 1회 준우승의 엄청난 커리어를 기록하여 전임 조범현 감독 시기에 비해 높은 성적을 낸 선수들이 월등히 많았기에 팀 페이롤이 올라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거기에 한국시리즈 우승이면 우승 프리미엄은 그 어떤 구단이든 붙여준다. 결국 김성근의 말처럼 성적이 결국 연봉으로 직결되는 것이고, 그만큼 성적을 잘 내서 SK 선수들의 연봉이 올라갔으니 맞는 말을 한 셈이다. 실제로 대체 선수의 표본으로 평가되는 조동화가 억대 연봉을 받은 것이 좋은 예시이다. 오히려 김성근과 페이롤을 엮으려면 1990년대 중후반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시절을 예시로 드는 게 적절하다. 흔히 김성근 재임 시절 쌍방울은 모기업 지원을 거의 받지 않는 대표적인 스몰마켓 팀인데다 없는 전력을 어떻게든 쥐어짜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외인구단 이미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김성근 재임 2년차인 1997년의 쌍방울은 오히려 팀 페이롤 1위였다. 즉 당시 한국시리즈 우승팀이던 해태 타이거즈는 물론이고 자금력이 풍부한 대기업을 모기업으로 둔 삼성 라이온즈, 현대 유니콘스보다도 페이롤이 높았다는 것. 다만 김성근 부임 전 당시 쌍방울은 가을 야구는 커녕 하위권을 전전했던 약팀이었고 김성근을 감독으로 앉힘과 동시에 확실한 성과를 내기 위해 지원을 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33] 그리고 스탭들과 출연진에게도 진지함이 아닌 웃음을 보여주는 경우도 많은데, 위의 프로필 사진을 새로 촬영하고 스탭들이 이를 김성근에게 문자로 보여주자 잘 생기게 나왔다고 좋아했으며, 최강 몬스터즈의 신입 선수들을 뽑은 이유도 "투수들이 머리가 큰데 얘도 머리가 크네" 등의 예능적 요소도 많이 보여준다. [34] 실제로 프로 구단들은 매년 하는 신인 드래프트만으로는 선수층을 두텁게 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버려진 옥석을 다시 재감정하고자 독립리그 및 아마야구 팀에도 스카우트를 보내 가능성이 있는 선수가 있다면 프로 계약을 맺고 입단시킨 뒤 성장세를 보기도 한다. 이렇게 입단한 선수들 중에는 1군에서도 출전을 많이 하는 이들도 있는데, 대표적으로 윤대경 윤산흠 등이 있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일본프로야구를 보면, 매년 정규 드래프트에서 독립리그 출신, 사회인야구 출신들이 여럿 뽑히고 시즌 중 독립 리그에서의 영입도 한국보다 굉장히 활발하다. 김성근 감독은 우리도 지금처럼 고작 1~2명만 영입하지 말고, 일본처럼 적극적으로 선수를 영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아마야구는 열악한 지원과 재정 탓에 소속 선수들이 프로 무대에 진출하는 것은 소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더 어려울 정도로 힘들다. 연천 미라클도 예산 부족으로 매우 허덕이는 추세고, 송진우가 감독으로 있었던 스코어본 하이에나들 구단도 2020년에 창단했다가 1년만에 예산 문제로 해체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입단 희망자는 많고 오히려 회비를 내야하는 환경임에도 이런 특성 때문에 정원이 남을 정도다. 이렇게 기반이 제대로 안 된 독립 리그 팀에서는 좋은 선수를 키워내기 힘드니, 김성근 감독은 제대로 선수를 키워낼 환경이 갖추어진 프로의 문호를 더 넓힌 뒤, 프로 팀에서 독립 리그 소속 선수들을 구제하고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찬반은 개인의 자유겠지만 나름 근거도 확실하니 한번쯤은 생각해 볼 만한 주장이다. 다만 이렇게 독립 리그에서 프로 리그로 진출하는 데 성공한 선수들 중에는 프로에서도 성공하는 사례도 몇 있지만, 대부분은 버티지 못하고 1~2년 안에 정리되는 게 현실이다. 아마추어와 프로의 기량 차이를 극복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35] 김성근의 의견에 공감하는 이들은 일본프로야구와 비교 했을때 KBO 리그는 실제로 연봉을 깎으면 아직 좀 더 뛸만하고, 선수 본인들도 현역 연장을 원하는데도 나이 많은 선수들에 대한 대우가 박한 경향이 있다고 공감하는 편. 나이가 많아도 쓸 수 있는 자원이라면 어떻게든 끌어다 쓰는 일본에 비해 훨씬 선수풀이 얇으면서도 나이많은 선수를 적극적으로 기용하지 않는 것에 대해 여러 이유가 있지만 모기업의 펫스포츠인 영향이 크고, 구단이 모기업의 광고판 역할을 하는 특성상 나이든 선수는 연봉만 많이 먹고 기업이 구단 운영을 통해 얻고자 하는 젊고 활기찬 이미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허나 이는 끼워 맞추기 식 주장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애초에 고령의 선수들의 기량이 여타 젊은 선수들에 비해 떨어지니 자연스레 밀려나는 것일 뿐이다. 또한 연봉을 깎으면 어느정도 기회를 줄 수 있는 실정이나 연봉은 선수 본인의 자존심과 같은 부분으로 이를 감수하고 뛰겠다는 선수부터가 별로 없는 편이다. 그리고 오히려 선수층이 얇기에 베테랑 선수 본인부터 자리를 차지하지 않고 젊은 선수들이 기용 될 수 있도록 양보하는 경향이 강하며 실제 기량이 되는 경우라면 송진우, 박정진, 김강민, 최영필처럼 선수 생활을 오래 이어간 사례도 많다. 미국과 일본에 비해 선수 생활이 짧은 것 자체도 한국 야구의 특성상 두 나라에 비해 체계적인 관리가 시작된지 10여년조차 되지 않았고 고교시절, 젊은 시절 무리한 혹사로 인한 후유증으로 인해 말년에 기량이 추락하여 은퇴를 택하게 된 것이며 이 부분은 김성근 감독 본인의 책임이 일부 있는 실정이다. [36] 실제로 야구선수로서 50대까지 뛰었던 선수들이나 1970년대생 선수들이 프로로 뛰는 이유는 그만큼 재능이 있고, 자기 관리를 철저히 했기 때문이다. 장원삼처럼 제구가 날리는 것도 아니거니와, 여러 구종을 장착해 롱런하는 선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 매덕스도 부상 하나 없이 3000이닝 이상을 먹은 이유는 원체 매덕스의 투구폼이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고. 모이어는 몸관리를 굉장히 열심히 했고, 사첼은 데뷔가 늦었다 뿐이지 역시나 몸관리가 뛰어났고, 프랑코는 이 분야 최강자이다. 나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 최소 50대 중반에 메이저에서 3할을 치고 있었다는 게 정설이며, 60대에 나이에 독립리그 등에서 선수로 3할을 치기도 했었다. 노미 아츠시는 플레잉코치를 하던 도중, 본인의 몸이 올라오지 않아 결국 선수 은퇴를 선언했고, 후쿠도메 코스케는 사실상 말년을 보냈다는 게 정설. 물론 한국에서는 어쩔수 없는게 최근에만 봐도 박수칠때 은퇴한 이대호와 꾸준히 버티지만 부진하는 오승환의 사례가 있다. 물론 구단에서 말년에도 계속 뛸 수 있게 프런트와 현장에서 특급대우를 해주는 것은 오승환이 거의 유일할 것이다. 물론 이 대우에는삼성의 암울한 불펜 사정도 큰 몫을 했다. 실제 23시즌 삼성 불펜은 오승환 빼면 WAR이 음수대로 떨어질 정도로 답이 없었고 오승환은 올시즌 부진했다지만 그럼에도 30세이브는 해줬기에 대우를 함부로 할 수가 없다. 실제로 저 부진이란 단어도 오승환이라는 이름값에 비하면 부진이라는 거지 이름값 빼고 40 넘은 투수의 기록이라 본다면 준수하다 못해 뛰어난 편이다. [37] 백구, 선수들은 바다를 건넜다. [38] 정근우와 같이 나오며 설날 선물을 서로 교환하는 내용이다. [39] 김인식, 손윤, 유효상 공동 저자. [40] 김운경, 이영만, 김봉석, 권태호 등 공동 저자. [41] 단, 말년에는 연로한 탓에 일본어투도 많이 느껴지고 말 자체도 어눌해졌다. [42] 이때 선수들을 모아놓고 '내가 한눈을 팔아 이렇게 되었으니 너희들도 정신 똑바로 차려라'라고 훈계를 한 뒤 병원으로 갔다고 한다. [43] 이후 김성근의 후임 해설자가 바로 하일성. [44] 타자가 가라스윙(헛스윙)를 했어요, 바깥쪽 직구가 이빠이(꽉차게) 들어왔어요 등의 표현을 2000년대 이후까지도 썼다고 한다. [45] 그의 본적은 경상남도 진주다. [46] 박용택의 발음 자체가 워낙 또렷하고 좋은 편이기 때문에 김성근 감독의 말을 대변해주게 된 셈이다. 그리고, 그 대가는 특타 1번이 되었다고. [47] 광주일고 출신으로 95년 해태 고졸연고지명으로 입단했다. 1군 출전 기록은 없었고, 2001년 은퇴했다. [48] 재일교포 선수로, 학다리 신경식의 방위병 입대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선수였다. 다만 수비에서 약점을 드러내어 박종훈과 교대로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49] 1986년 플레이오프 향방이 결정되는 게임이었다. [50] 1세대 야구 전문 기자. 아래 링크 기사의 본문 역시도 과거 김성근 태평양 돌핀스 시절의 기사를 그대로 퍼온 것이다. [51] 이북 황해도 출신인 김동엽 감독이 38번을 달게 된 이유는 한국전쟁 시절 38선을 월남해서 남한에 정착했다는 이유로 달게 된 등번호라고 한다. 자세한 건 김동엽 항목 참조. [52] 우연의 일치로 동명이인인 1990년생 삼성 외야수 김동엽도 등번호 38번을 달고 있다. [53] 무리뉴는 첼시 FC 감독으로 돌아오면서 로만 아브라모비치 구단주에게 전권을 요구했고 김성근 역시 한화 이글스 감독을 할 때 전권을 요구했었다. 또한 주전 혹사도 심하다. [54] 특히 야구계는 운동선수들이 많음을 감안하더라도 유독 패션 테러리스트들이 많기에 더더욱. [55] 물론, 상의는 최강야구의 트레이닝 유니폼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저 후드티를 입은게 김성근 감독말고 없다. [56] KBS에서 언제 마지막으로 피서를 갔냐는 질문에 1978년이라고 대답하면서 이제는 야구장이 피서지라고 대답했을 정도다. [57] 1970년대와 2000년대의 반일감정 차이를 고려하면 어떤 의미에서는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1970년대는 왜색이 진하다는 이유로 모든 일본 매체의 수입이 금지되던 시절이었고, 백인천의 요시는 2000년대 이승엽이 출전하는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중계방송에서 나온다. [58] 나지완 타석 때, 자신이 감독으로 있어서 통한의 준우승을 당했던 2009년 한국시리즈 끝내기를 SBS Sports에서 틀어 버렸다. 중계를 보던 야구팬들은 단체로 빵 터졌다. [59] 국방부 진중문고로 지정된 적이 있었다! [60] 김인식 전 감독과 같이 저술한 책이다. [61] 아들 김정준 해설위원이 직접 쓴 책이다. [62] 하지만 김성근은 많은 선수들의 팔을 소모품처럼 갈아버리고 트레이드 처분해버렸다. [63] 선두타자 김창열에게 기습번트를 맞고 출루를 허용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본 다른 천무단 선수들은 김창열에게 '왜 그랬냐'고 투정을 부렸다. [64] 하지만 무턱대고 체중을 감량해 버리는것도 좋지 않은게, 그 선수의 신체 피지컬이나 밸런스 등이 한번에 무너져 내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메이져리그의 사바시아가 대표적인 예시이다. 물론 둘 다 비시즌에 감량을 엄청 하는 편이지만, 시즌 중에는 여러가지 이유로 다시 살이 찌기 때문에 관리 차원에서 비시즌에 빼는 것이다. [65] 가령 혹사로 인해 부상병동에 오르는 선수들이 많아진다던지, 임기 내 성적을 최대한 내야 하기 때문에 유망주를 즉전감 노장선수와 트레이드한다던지, 본인 임기 내에 최대한 많이 써먹기 위해 어린 선수들의 군 입대를 막은 결과 30살이 다 돼서 공익근무로 군 문제를 해결하는 바람에 제대 후 실전감각이 죽어 있다던지, 또 많은 선수 영입을 요청하는 바람에 구단 연봉총액이 급상승해 버렸다. [66] 수원야구장 으로 추정된다. [67] 한때 음치가수 컨셉으로 이름을 알렸던 이재수가 이 광고를 패러디하였는데 패러디에서 나온 꼬마 이름에 이만수 감독의 이름을 갖다붙여서 디스하였다. [68] 1999년 10월에 한 번 압류된 적도 있었으나 다시 되찾았다. [69] 특히 이 쪽은 유망주 정범모의 성장을 염두에 두고 영입한 선수였으나 1년만에 정범모의 성장이 되돌아가면서 조인성이 2015년 혹사로 굴려지다 16년부터 나락으로 떨어지는 원흉을 제공했다. [70] 권용관은 딱 2013년 LG때처럼 기용해야 하는 선수였다. 그보다 약간 더 나올 순 있어도 100경기 넘게 선발로 나와선 안 될 선수였다. [71] 일부 커뮤니티에서 울산에 김성근이 사퇴 직후 나타났다는 썰이 있었다. [72] 매입 당시 이시영 소유의 건물은 23억, 남편 소유의 건물은 17억이었으며 김성근은 2동에 각 20억을 더 얹어 구매했다.이시영 부부는 40억의 이익을 본 셈. [73] 과거 방송에서 김성근 감독 부임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적이 있다. 이 때문에 도네이션 합성에 김성근이 이용되기 시작했다. 정작 부임하고 나서 선수들을 혹사시키고 성적도 안 좋았기에 현재 케인은 김성근을 싫어하므로 김성근 도네를 보면 정색한다. [74] 실제 2007년 한국시리즈 우승 인터뷰 당시 쌍방울 감독 시절 구단에도 알리지 않은 채 신장암 수술을 하였다고 밝혔다. 이후 암은 아니지만 한화 감독 시절 추간판탈출증 증세로 수술로 인하여 감독직을 잠시 비우기도 하였다. 이후 수술 후 다시 감독직에 복귀하여 팀을 이끌었다. [75] 롯데 시절 백인천이 한 행동의 원인에는 구단과의 심한 불화가 원인으로 꼽히지만, 뇌졸중으로 인한 지능이나 기억력 감퇴도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의견도 많다. [76] 김성근 감독이 태평양 돌핀스 감독으로 부임했을 당시 선수로 첫 인연을 맺었다. 이후 은퇴를 하게 되자 김성근 감독의 권유로 지도자 생활을 하게 되었으며, SK 와이번스의 SK 왕조 시절을 함께 보낸 당사자 중 한명이기도 하다. [77] 김성근 감독의 LG 트윈스 감독 시절 코치를 역임하며 인연을 맺었다. [78] 김성근 감독과 고등학교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다. [79] 올드스쿨 스몰볼 스타일과 정신력을 강조하는 야구, 투수 혹사 등 여러가지 면에서 올드스쿨 KBO 리그의 전형을 보여주는 감독이다. [80] 사실 선임 자체가 잘못된 게 김성근은 리빌딩에 적합한 인물이 절대 아니고 오히려 윈나우형 감독이다. [81] 1986년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하여 최종 4위, 1987년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하여 최종 4위, 1989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을 꺾고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해태에 패하여 최종 3위, 1991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를 꺾고 플레이오프에 올랐으나 빙그레에 패하여 최종 3위, 1992년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하여 최종 4위, 1996년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 패하여 최종 3위, 1997년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했으나, 삼성이 플레이오프에서 LG에 지면서 최종 3위. [82] 특히 김성근이 SK 감독을 맡았던 시기가 2008 베이징올림픽, 2009 WBC 등으로 야구에 대한 인기도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SK 왕조시기를 구축한 강팀으로서도 더더욱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었다. [83] OB 베어스의 이광환, 삼성 라이온즈의 우용득, SK 와이번스의 이만수, 한화 이글스의 한용덕. [84] 정확히는 1군 코치 + 감독과 다른 코치에게 어드바이저 역할까지 겸했다. [85] 사실 일본에서 김성근의 스타일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고시엔 내내 에이스를 투입시키거나, 완투를 바라며 6선발체제를 굴리는 등, 일본도 이전보다는 낫지만 투수혹사는 엄청나다. 물론 그렇다고 한화시절 김성근 처럼 선발투수를 불펜에 투입시켰다가 불펜으로 뛴 투수를 다음날 선발 예고시키지 않는다... [86] 사실 투수 혹사도 당하는 투수 입장에서 '기회 부여'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꽤 많기 때문에 김성근 말고도 의외로 혹사당하여 커리어가 망가진 선수들이 혹사 감독을 옹호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당장 혹사가 직접적으로 커리어에 영향을 미친 전병두, 송창식 같은 케이스가 대표적. [87] 일본이나 미국이나 마지막 시즌 300이닝 투수가 한국프로야구 초창기인 1980년대에 나왔다. [88] 실제로, 그 유명한 SK 시절 김성근의 혹사로 탈이 난 선수는 전병두, 채병용, 고효준, 송은범, 김광현 정도고 장기 이탈자는 전병두와 김광현 2명이다. 채병용과 고효준은 각각 인대, 뼛조각 제거 수술 받고 공익 근무하러가서 사람들이 잘 모르고(채병용은 김성근의 전임 강병철과 조범현도 혹사시켜서 묻힌 감도 있다.) 송은범은 데드암과 잔부상, 그로 인한 극심한 기량 하락은 있었지만 큰 부상은 없었다. 사실 정우람도 다른 투수 같으면 망가지도록 기용하긴 했는데 운 좋게 역대급 내구성을 타고나 FA까지 무난히 먹었다. [89] 그나마 이런 소위 말하는 옛날식 불펜야구를 하던 감독들 중 오래 버틴 쪽이 김경문인데, 김경문은 오히려 타격면에서는 김성근이랑 정반대로 당시 메타에 딱 맞는 빅볼야구를 해왔고, 투수진도 거의 김성근 살려조급 혹사를 했음에도 김진성, 원종현, 이민호 등이 상식을 뛰어넘는 내구성을 보여주며 그냥 우연히(...) 오래 버텨준 덕에 김성근보다는 좀 더 성적을 내며 오래 감독직을 유지할 수 있었다. [90] 심지어 박현준은 김성근 감독과의 불화설로 인해 트레이드되었고, 경기 중 김성근 감독을 도발하려고 로진을 과하게 불어대기까지 했던 인물이다. [91] 지옥 펑고, ~은 ~할 수록 강해진다 등 [92]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2위. 전·후기 리그 통합 승률 1위 [93] 전후기 모두 2위에 그쳤기 때문에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하여 최종 순위는 3위 [94]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 [95] 삼성 라이온즈가 전·후기 통합우승을 달성하며 한국시리즈 자체가 열리지 않았다. [96] 전기리그 5위, 후기리그 1위 [97] 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 [98] 전기리그 2위, 후기리그 5위 [99]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 [100] 전기리그 3위, 후기리그 5위 [101] 플레이오프에서 해태에 패배 [102] 플레이오프에서 빙그레에 패배 [103] 준플레이오프에서 롯데에 패배 [104] 플레이오프에서 현대에 패배. 심지어 2승을 한 뒤 3연패 당하면서 KBO 포스트시즌 사상 처음으로 리버스 스윕을 당했다. [105] 준플레이오프에서 삼성에 패배 [106] 김성근 경질 당시 쌍방울 레이더스는 승률 0.224로 8위였으며,
시즌 종료 후 쌍방울은 김성근 경질 당시와 똑같은 0.224의 승률로 8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107] 커리어 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를 통과한 것이 이 해의 일이다. [108] 경질 당시 [109] 허리 디스크 수술로 12경기 김광수 대행 체제 [110] 경질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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