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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삼성 라이온즈의 전·후반기 통합우승으로 한국시리즈가 열리지 않았다. [B]: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개최일 연기, 고척 스카이돔 중립경기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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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한국시리즈| 역대 KBO 한국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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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롯데 자이언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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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라이온즈 |
1984년 한국시리즈 우승팀 | |
롯데 자이언츠 | |
MVP | 유두열 |
[clearfix]
1. 개요
1984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 |
롯데 자이언츠 | 삼성 라이온즈 |
현재까지도 당시 우승팀 롯데 자이언츠 구단은 말할 것도 없고, KBO 리그 역사상 최고의 한국시리즈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당시 삼성은 김시진과 김일융의 원투펀치에 더하여 황규봉, 권영호 등의 쟁쟁한 투수진을 자랑했다. 롯데는 임호균이 나름의 역할을 했지만, 최동원은 롯데가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필승 에이스였기 때문에 초인적인 완투를 해야만 했다. 거기에 타선도 홍문종과 김용희, 김용철 정도가 있던 롯데에 비해 이만수, 장효조, 김성래, 정현발, 장태수, 허규옥 등 강타자가 즐비한 삼성 타선이 훨씬 높은 평가를 받고 있었다.
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팀이 1차전~2차전을, 후기리그 우승팀이 3차전~4차전을, 이후 경기는 중립구장인 잠실에서 치르게 됨에 따라 대구 2경기 - 부산 2경기 - 잠실로 이어진다.
2. 일정
1984 한국시리즈 롯데 자이언츠 VS 삼성 라이온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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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경기 | 경기 시간 | 경기장 | AWAY | 결과 | HOME | 방송사 | |
1차전 | 9월 30일 18:00 |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롯데 자이언츠 | 4 | 0 | 삼성 라이온즈 | |
2차전 | 10월 1일 18:00 | 2 | 8 | ||||
3차전 | 10월 3일 18:00 | 구덕 야구장 | 삼성 라이온즈 | 2 | 3 | 롯데 자이언츠 | |
4차전 | 10월 4일 18:00 | 7 | 0 | ||||
5차전 | 10월 6일 18:00 |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롯데 자이언츠 | 2 | 3 | 삼성 라이온즈 | |
6차전 | 10월 7일 18:00 | 삼성 라이온즈 | 1 | 6 | 롯데 자이언츠 | ||
7차전 | 10월 9일[우천취소] 18:00 | 롯데 자이언츠 | 6 | 4 | 삼성 라이온즈 |
|
3. 진출팀 결정
1984년 프로야구는 전기와 후기리그로 각각 50경기씩 나누어 총 100경기를 치렀고, 한국시리즈는 전기리그 우승 팀과 후기리그 우승 팀이 맞붙어 승부를 겨루는 시스템이었다. 이에 따라 한 팀이 전·후기리그를 제패하면 한국시리즈는 자연히 소멸되었던 것이 그 당시의 시스템.[2]1984년 당시 삼성은 김시진, 김일융의 투톱에 이만수, 장효조를 위시한 강력한 타선을 앞세워 전기리그에서 우승했다. 삼성은 이대로 후기리그까지 우승해 한국시리즈를 무산시킬 계획이었으나, 전기리그 우승으로 인해 분위기가 안이해져 있었던 삼성과는 달리 마지막 남은 한국시리즈 티켓을 거머쥐기 위해 다른 팀들이 치열하게 경기를 치르면서 선두 경쟁에서 밀려난다. 때문에 삼성은 계획을 바꿔 한국시리즈를 대비해 주전들의 체력을 안배하고 치열한 후기리그 순위 싸움에서 한발 물러서 관망하고 있었다.
막판 2연전만이 남고 어느 정도 한국시리즈 진출 팀의 윤곽이 보이자 삼성은 한국시리즈에 대비해 전력을 비축하는 한편, 손쉽게 이길 수 있는 팀을 탐색했다.[3] 그리하여 선택된 팀이 전기리그에서 4위를 차지한 롯데 자이언츠. 전기리그에서 삼성이 9승 1패로 롯데를 호구잡고 완전히 압도해버린 데다 최동원마저 정규시즌에서 삼성 상대로는 그리 잘 던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4년 정규시즌에 무려 27승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을 찍은 최동원이었지만, 정규시즌에 삼성 상대로는 그다지 강한 모습이 없었다. 져주기 경기 제외하고는 삼성 상대로는 2승 4패 3세이브에 불과했었다. 하지만 박영길 전 삼성 타격코치만이 롯데 대신 OB 베어스를 밀어줄 것을 주장했다. 박영길은 과거 롯데 자이언트 시절 감독으로서[4] 1981년 코리안시리즈에서 말도 안 되는 최동원의 초인적인 활약상을 보았기에 그것을 우려한 것이다. 그러나 시즌 전적에서도 압살하고 그 최동원도 삼성 상대로 약했던 점이 결정적인 요인이 되어 박영길을 제외한 삼성 코칭스탭은 결국 롯데를 밀어주기로 결정했다. 이러한 밀어주기는 당시 OB 베어스 감독이었던 김성근도 당황하게 했을 정도다.
후기리그가 2경기 남은 시점에서도 리그 우승의 향방은 예측 불가 상태였는데, 위의 표를 보면 알겠지만 OB가 아무리 기를 써도 삼성이 대놓고 롯데를 봐주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올리겠다고 결정이 났기 때문에 김영덕 전 감독은 남은 2경기에서 나쁜 의미로 역사에 길이 남을 져주기 게임에 나선다.
너무 표가 나다 못해 지켜보는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며 항의, 야유를 퍼부을 정도로 노골적인 게임을 치렀다. 안타 치고 고의로 오버런해서 주루사를 당하고, 수비할 때는 플라이성 타구를 일부러 안 잡아서 롯데 선수들을 진루시켜 주고, 이만수의 타격왕도 지킬 겸 홍문종이 칠 차례만 되면 무조건 고의사구로 출루시키질 않나[5], 고의적인 실책으로 롯데 주자들을 계속 진루시켜 주는 등 그야말로 일부러 져주기 위한 발악의 연속이었다. 게다가 리그 마지막 2경기가 후기리그 우승팀을 결정짓는 경기인 만큼 전국 방송 중계였기 때문에 더욱 지탄을 받았다. 허구연 해설위원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중계를 맡았던 MBC는 대놓고 져주기 경기가 이어지자 중계를 중간에 끊을 것을 검토하였다고 한다.[6] 당시 뉴스에서는 야구장을 찾은 시민의 삼성은 져주기 게임을 해서 싫어요라는 인터뷰가 대놓고 나가기도 했다.
물론 김영덕 전 감독은 공식적으로는 져주기를 부인했다. 선수들도 자기 기록이 달려있는데 어떻게 져주기를 할 수 있냐고. 하지만 이 때 삼성이 선발 출장 시킨 선수들은 후보급이었기에 기록을 세워준다는 변명도 무의미했다. 경기력이 형편없어도 그래도 후보급이었고 한국시리즈를 위한 체력 안배 차원이었으면 말이 될 텐데 이 선수들이 감독의 뜻도 몰라주고 날아다녔다는 것 이다.[7] 거기다 삼성이 후보 선수들을 선발로 출장시킨다는 소식을 듣자 롯데도 체력을 아끼면서 무난하게 2연승을 한다는 생각으로 똑같이 후보 선수들을 출전시킨다. 그러다보니 경기가 김영덕 전 감독의 의도대로가 아닌 삼성의 일방적인 경기로 기울기 시작하자 감독의 의중을 알만한 주전들이 나오고... 그 뒤로는 저 위에 나온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삼성이 역전패로 졌다. 23일 경기에서도 삼성은 3점을 먼저 내지만 전날과 비슷한 경기 운영을 보여주며 또 역전패.
한편 최종 2연전에서 해태도 OB를 상대로 져주기를 시전했다. 우리가 한국시리즈에 못 가도[8] 제과업계 라이벌인 롯데가 한국시리즈로 가는 꼴은 절대로 볼 수 없다는 자세였다. OB는 그 보답으로 김일권에게 도루를 대량 허용하면서 김일권이 세 시즌 연속 도루왕에 등극하는데에 도움을 줬다. 하지만 롯데가 2승을 거둠으로써 결과적으로 실패. 물론 삼성의 져주기보다는 훨씬 덜 알려져 있다.
이후 져주기 게임 경기는 25년 뒤 다시 한 번 나오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 OB 베어스 감독으로 져주기 게임의 피해자였던 김성근이 이끄는 SK 와이번스가 이번엔 져주기 게임의 가해자가 되었다. 이 때와 다른 점은, 무승부 = 패로 직결되는 규정의 불합리함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이런 일을 벌인 것이라는 점과 져주기를 하나 안 하나 SK에게는 이득이 없었다는 점[9]이다.
4. 엔트리[10]
엔트리 표기 순서는 전후기 우승팀 순서로 적었다. 삼성 라이온즈가 전기리그 우승팀이므로 1차전, 2차전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에서 개최하였다.4.1. 삼성 라이온즈
삼성 라이온즈 198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 ||
<colbgcolor=#fecd00><colcolor=white> 감독 | 1명 | 김영덕 |
코치 | 4명 | 정동진, 박영길, 유백만, 우용득 |
투수 | 7명 | 김시진, 김일융, 황규봉, 권영호, 성낙수, 양일환, 송진호 |
포수 | 2명 | 이만수, 송일수 |
내야수 | 9명 | 함학수, 천보성, 배대웅, 김근석, 박승호, 김성래, 오대석, 정진호, 김한근 |
외야수 | 6명 | 장효조, 허규옥, 장태수, 홍승규, 정현발, 김이수, 황병일 |
4.2. 롯데 자이언츠
롯데 자이언츠 1984년 한국시리즈 엔트리 | ||
감독 | 1명 | 강병철 |
코치 | 3명 | 도이 쇼스케, 이희수, 서말구 |
투수 | 8명 | 최동원, 임호균, 배경환, 이진우, 천창호, 안창완, 이문한, 조용철 |
포수 | 2명 | 심재원, 한문연 |
내야수 | 7명 | 김용철, 김용희, 박영태, 정영기, 이광길, 김민호, 김성호 |
외야수 | 8명 | 김성관, 유두열, 홍문종, 박용성, 김재상, 조성옥, 김석일, 김한조 |
5. 시리즈 전 분위기
이런 기사들이 나올 정도로 삼성에 대한 여론은 온통 비난 일색이었고, 희대의 져주기 경기 때문에 KBO에서는 고의로 지는 경기가 없도록 규정을 손보겠다고 했다. 박영길은 회고에서 만일 삼성이 이 해 한국시리즈에서 승리했다면 이기기 위해서는 이런 변칙을 써서 이길 수 있다는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기에 삼성의 패배가 오히려 약이 되었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강병철 감독은 한국시리즈를 준비하는 미팅 자리에서 최동원한테 1차전, 3차전, 5차전, 7차전 선발을 통보한다. 이건 너무 무리한 일정이라면서 반발하는 최동원한테 강병철 전 감독은 나직히 한 마디를 남기는데...
동원아... 우짜노? 여까지 왔는데...
그리고 최동원은 딱 한 마디를 남기고 마운드로 향한다.알겠심더. 마, 함 해 보입시더.[11]
김일융과 김시진의 확실한
원투펀치와 선발-불펜 가리지 않고 준수한 투구를 보여준 황규봉과 권영호가 있던 삼성에 비해 롯데의 확실한 에이스는
최동원뿐이었다. 비록 10승에 2.95의 성적을 기록한
임호균이 있었지만 특히 후반기에 발군의 활약을 하며 시즌 최다승을 달성한 최동원의 포스에는 한참 못 미쳤고, 그랬기에 창단 첫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리는 롯데의 강병철 전 감독은 이런 극단적인 투수 기용을 선택한 것.삼성도 위와 같은 롯데의 약한 투수진을 잘 알고 있어서, 김영덕 전 감독 역시 최동원과 임호균만 피하면 승산이 충분한 시리즈라고 판단했다. 어쩌면 그래서 최고 에이스였던 김일융을 최동원이 나오지 않는 2차전, 4차전, 6차전에 올라오도록 로테이션을 짜고, 최동원이 지친 시리즈 후반에 승부를 걸려고 했을지도 모르겠다. 당연한 계획이었겠지만 삼성도, 심지어 롯데도 간과한 점은 롯데의 유일한 에이스 최동원은 자신에게 어떤 일이 생기든 기필코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각오에 불타고 있었다는 것이다.
6. 결과
6.1. 1차전
한국시리즈 1차전, 9월 30일 일요일, 18:02 ~ 20:37 (2시간 35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롯데 | 최동원 | 0 | 2 | 0 | 2 | 0 | 0 | 0 | 0 | 0 | 4 | 7 | - | - |
삼성 | 김시진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7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정도영 | 해설: 하일성 |
- 승리: 최동원 (9이닝 0실점 완봉승)
- 패배: 김시진 (3이닝 4실점(3자책))
- 홈런: 박용성(2회초, 2점)
- 심판: 주심 이규석/1루 김동앙/2루 김옥경/3루 황석중/좌선 김광철 /우선 오광소
결국 경기는 최동원이 7개의 삼진을 잡으면서 한국시리즈 사상 최초의 완봉승으로 끝났다. 김시진 강판 이후 릴리프로 올라온 권영호가 6이닝 3피안타로 호투했고 삼성도 나름대로 최동원의 공에 대한 공략법을 가지고 있어서 7안타를 치며 분전했지만 산발로 끝나며 무득점에 그친다. 권영호의 경우에는 이후에도 선발 및 불펜으로 등판하여 준수한 투구를 보여준다.
이 경기가 김시진의 한국시리즈에서의 불명예의 시작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김시진은 통산 124승을 거뒀지만 한국시리즈에서는 0승 7패를 기록했다.
6.2. 2차전
한국시리즈 2차전, 10월 1일 월요일 17:58 ~ 20:55 (2시간 57분), 대구시민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롯데 | 안창완 | 1 | 0 | 0 | 0 | 1 | 0 | 0 | 0 | 0 | 2 | 5 | - | - |
삼성 | 김일융 | 1 | 0 | 2 | 0 | 1 | 0 | 4 | 0 | - | 8 | 9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김용 | 해설: 허구연 |
- 승리: 김일융 (9이닝 2실점 완투승)
- 패배: 안창완 (2.1이닝 3실점)
- 홈런: 장효조(3회말, 2점)
- 심판: 주심 김광철/1루 오광소/2루 황석중/3루 김옥경/좌선 김동앙/우선 이규석
3회말 장효조가 2점 홈런으로 기세를 제압하기 전까지는 1:1로 나름 팽팽한 경기였다. 이후에도 강병철 전 롯데 감독은 차례로 좌우 번갈아가며 임호균, 천창호, 배경환을 투입했지만 7회말 삼성이 4점을 득점하며 승부를 매듭지었다. 3회에 점수가 벌어지자 강병철 전 감독도 임호균을 구원으로 짧게 던지고 내려보내는 등 2차전에 더 이상 큰 미련을 보이지 않으며 이후 경기를 대비하는 모습을 보였다.
6.3. 3차전
한국시리즈 3차전, 10월 3일 수요일 18:00, 구덕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삼성 | 김시진 | 0 | 0 | 0 | 1 | 0 | 0 | 1 | 0 | 0 | 2 | 7 | - | - |
롯데 | 최동원 | 0 | 1 | 1 | 0 | 0 | 0 | 0 | 0 | 1X | 3 | 6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이장우 | 해설: 하일성 |
김시진은 1차전과 달리 산발 5피안타로 2실점만 내주며 7회까지 호투를 이어갔으나, 8회말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홍문종의 강한 타구에 왼쪽 발목을 맞으면서 쓰러져버리고 만다.[12] 이후 긴급히 등판한 권영호가 8회를 무실점으로 마무리 지으나 9회말 1사 2루 상황에서 정영기에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면서 롯데가 승리.
1차전 완봉 이후 이틀 쉬고 나온 최동원은 12탈삼진으로 당시 한국시리즈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과 함께 완투승을 거두며 시리즈 2승째를 거둔다.
6.4. 4차전
한국시리즈 4차전, 10월 4일 목요일 18:00, 구덕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삼성 | 김일융 | 1 | 0 | 0 | 1 | 1 | 0 | 4 | 0 | 0 | 7 | 10 | - | - |
롯데 | 임호균 | 0 | 0 | 0 | 0 | 0 | 0 | 0 | 0 | 0 | 0 | 4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김용 | 해설: 허구연 |
삼성의 선발 김일융은 8이닝 4피안타 8탈삼진으로 롯데 타선을 가볍게 누르고 시리즈 2승을 따낸다.
6.5. 5차전
한국시리즈 5차전, 10월 6일 토요일 18:03 ~ 20:52 (2시간 49분),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롯데 | 최동원 | 0 | 0 | 0 | 0 | 1 | 1 | 0 | 0 | 0 | 2 | 4 | - | - |
삼성 | 권영호 | 0 | 0 | 0 | 0 | 0 | 2 | 1 | 0 | - | 3 | 6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이장우 | 해설: 하일성 |
- 승리: 김일융 (3이닝 무실점)
- 패배: 최동원 (8이닝 3실점 완투패)
- 홈런: 정현발(7회말, 1점)
- 심판: 주심 김옥경/1루 황석중/2루 김광철/3루 이규석/좌선 오광소/우선 김동앙
경기 초반은 최동원이 5회까지 3안타만을 허용하며 무실점으로 던지고 있는 롯데가 2:0으로 리드를 잡아나갔으나 계속된 연투에 지친 최동원이 6회에 홍승규의 3루타와 장효조의 적시타로 인해 1점을 내줬고, 이후 장효조의 도루와 롯데의 실책으로 2:2 동점이 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연투에 지친 최동원보다 나은 투수는 롯데에는 없었고, 최동원은 8회까지 완투한다.
이 상황에서 7회에 삼성은 원래 6차전 선발로 내정했던 김일융을 투입하는 강수를 둔다. 그리고 김일융은 그 기대에 호응하듯 이후 3이닝을 무실점을 막았으며 그 사이 7회말에 대타 정현발이 솔로홈런을 날리면서 승부를 결정짓는다. 구원 등판한 김일융은 시리즈 3승을 먼저 거둔 반면, 최동원은 6피안타 6K로 호투했으나 완투패를 기록하게 된다.
최동원을 투입하고도 진 롯데로서는 이제 남은 길이 없었다. 애초에 최동원 하나만 믿고 가기로 한 시리즈였고, 다른 투수를 믿을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도 않았다. 반면 삼성은 최동원이 등판하지 않는 6차전만 잡으면 되기에 우승은 따놓은 당상인 듯했다. 1차전, 3차전, 5차전을 모두 완투한 투수가 6차전에 올라온다는 것 자체가 상식을 아득히 벗어나는 일이고, 설령 올라온다고 하더라도 전날 8이닝을 던진 투수가 제 컨디션일 가능성은 0에 가까웠기 때문.
반면 삼성은 김시진이 등판 대기중이었고, 그 뒤에는 황규봉이라는 준수한 투수가 버티고 있었다. 여차하면 3이닝을 던진 김일융을 경기 막판에 투입하여 승부수를 던질 수도 있었다. 그렇게 시리즈의 승자는 라이온즈가 될 것이 기정 사실이었다.
6.6. 6차전
한국시리즈 6차전, 10월 7일 일요일 18: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삼성 | 김시진 | 0 | 0 | 0 | 1 | 0 | 0 | 0 | 0 | 0 | 1 | - | - | - |
롯데 | 임호균 | 0 | 0 | 0 | 3 | 0 | 0 | 0 | 3 | - | 6 | - | - | - |
중계방송사: | 캐스터: 김용 | 해설: 허구연 |
선취점은 삼성이 냈다. 이만수와 장효조의 적시타로 1점을 냈고 이제 에이스로서의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 올라온 김시진의 호투만 있으면 삼성이 이길 것 같았는데 4회말 1사에서 조성옥의 볼넷 출루에 이어 클린업 트리오인 홍문종, 김용철, 김용희가 연속 안타를 터트리고, 그 후 김민호의 땅볼로 3점을 뽑아 역전에 성공한다.
그런데 4회까지 1실점으로 호투하고 있던 롯데 선발 임호균이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훗날 KBS N 스포츠에서 강병철 전 감독이 밝힌 이유는 임호균의 손가락 살이 까져서 공을 던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14] 마땅히 구원투수로 올라올 선수도 없는 상황이었는데...
최동원이 등판했다.
벼랑 끝에 몰린 롯데는 전날 완투한 최동원을 5회부터 등판시켰다. 최동원이 등판한 5회 이후 삼성 타선은 최동원을 상대로 단 3안타만을 기록하며 맥없이 물러나고 만다. 이후 롯데 타자들이 최동원의 역투에 보답하듯 8회에 3점을 더 내며 6:1로 롯데가 승리한다.
에이스의 자존심을 찾으려 했던 김시진은 완투 끝에 한국시리즈 2패를 당한다. 5회부터 구원등판한 최동원은 5이닝 3피안타 6탈삼진 무실점으로 구원승을 기록하며 시리즈 3승을 거둔다.
3:3의 시리즈 스코어로, 롯데와 삼성이 비슷한 상황인 것 같지만 롯데는 가장 믿을 수 있는 투수들인 최동원과 임호균을 모두 소모했다. 반면 삼성은 5차전 3이닝만을 던진 김일융을 7차전에 낼 수 있었기에, 여전히 유리한 고지를 점하고 있었다.
경기 후 강병철 전 감독은 7차전에도 최동원이 나올 수 있음을 알렸다. 앞에서 다른 투수들이 원 포인트로 시간을 끌어주고, 최동원이 구원으로 등판하여 경기를 잡는다는 계획이었다. 그런데 말이 쉽지, 최동원을 제외한 다른 투수들은 시리즈에서 1승도 기록하지 못했고 그 최동원은 이틀 간 13이닝을 던진 상황이었다. 강병철 전 감독의 계획은 말 그대로 계획으로 끝날 가능성이 너무나 높았다.
6.7. 7차전
한국시리즈 7차전, 10월 9일 화요일 18:00, 서울종합운동장 야구장 | ||||||||||||||
팀 | 선발 | 1 | 2 | 3 | 4 | 5 | 6 | 7 | 8 | 9 | R | H | E | B |
롯데 | 최동원 | 0 | 0 | 1 | 0 | 0 | 0 | 2 | 3 | 0 | 6 | 7 | - | - |
삼성 | 김일융 | 0 | 3 | 0 | 0 | 0 | 1 | 0 | 0 | 0 | 4 | 8 | - | - |
중계방송사[15]:
| 캐스터: 이장우 | 해설: 하일성 | 캐스터: 김용 | 해설: 허구연 |
- 승리: 최동원 (9이닝 4실점 완투승)
- 패배: 김일융 (7.1이닝 6실점)
- 홈런: 오대석(6회말, 1점), 유두열(8회초, 3점)
- 심판: 주심 이규석/1루 김옥경/2루 오광소/3루 김광철/좌선 황석중/우선 김동앙
6.7.1. 라인업
롯데 자이언츠 | 삼성 라이온즈 | ||||
타순 | 선수명 | 포지션 | 타순 | 선수명 | 포지션 |
1 | 김재상 | LF | 1 | 홍승규 | LF |
2 | 홍문종 | CF | 2 | 장태수 | CF |
3 | 김용희 | 3B | 3 | 장효조 | RF |
4 | 김용철 | 1B | 4 | 이만수 | DH |
5 | 유두열 | RF | 5 | 김근석 | 3B |
6 | 박용성 | DH | 6 | 함학수 | 1B |
7 | 한문연 | C | 7 | 오대석 | SS |
8 | 박영태 | 2B | 8 | 배대웅 | 2B |
9 | 정영기 | SS | 9 | 송일수 | C |
SP | 최동원 | SP | 김일융 |
1984 한국시리즈 7차전 / 롯데 자이언츠 선발 라인업 | ||||
LF |
CF |
RF |
||
SS |
2B |
|||
3B |
SP |
1B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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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 |
C |
|||
1984 한국시리즈 7차전 / 삼성 라이온즈 선발 라인업 | ||||
LF |
CF |
RF |
||
SS |
2B |
|||
3B |
SP |
1B |
||
DH |
C |
|||
6.7.2. 경기 내용
한국시리즈 사상 처음으로 7차전이 열리게 되었다. 당시 시리즈 시작 전부터 져주기 게임으로 삼성에 대한 숱한 비난 여론으로 화제가 되었던 시리즈였고,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으로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을 반영하듯 잠실구장에서 벌어진 7차전은 입장 정원을 훌쩍 넘는 관중 35,000명이 모이는 대성황을 이루었다.원래 일정대로라면 10월 8일에 치러졌어야 하지만, 그 날은 연고전이 예정되었기 때문에 7차전 날짜가 하루 밀려 9일이 되었다. 최동원은 그렇게 하루를 쉴 수 있게 되었고, 최동원이 7차전에서 나올 수 있다는 강병철의 말이 완전 거짓은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최동원이 무쇠팔이라 해도 5차전과 6차전 이틀간 13이닝을 던진 상황에서 7차전까지 연투를 했다면 강병철 전 감독이 6차전에 최동원을 투입하는 강수를 두긴 힘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7차전은 당시 공휴일이던 한글날에 열렸음에도 낮 경기가 아닌 오후 6시에 시작했다. 시리즈가 7차전까지 치러진 것이 양 팀의 운명을 가르는 셈이 되었다.
경기 전 KBS가 짧게 진행한 그라운드 인터뷰에서 김일융은 컨디션이 좋느냐는 질문에 "안 좋습니다"라고 답한 모습이 후일 전파를 탔다. 하기야 초인적이다 못해 상식을 벗어날 정도로 무리한 등판을 했던 최동원에 가려졌을 뿐, 2차전, 4차전, 5차전에 등판하여 20이닝 가까이 던진 김일융의 컨디션 역시 좋을 리 없었다. 후일 KBS에서 반영한 다큐 인터뷰에 따르면 김일융은 7차전을 못 던지겠다며 감독에게 말하러 갔는데 가서 들은 것은 네가 아니면 선수가 없다는 말뿐이었다.
하루를 쉬긴 했으나 최동원은 계속된 연투에 지쳐 구위가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삼성은 2회말 1사 만루에서 배대웅의 2루수 앞 땅볼과 송일수의 적시타로 먼저 3점을 내고 이후에도 오대석의 솔로 홈런을 더해 4점을 선취하며 승기를 굳히는 듯했다.
롯데의 본격적인 반격은 7회초부터 시작되었다. 3회초 박영태와 정영기의 출루 후 김재상의 적시타로 1점을 만회한 롯데는, 이전 타석까지 한국시리즈 내내 19타수 1안타의 빈타에 허덕이던 유두열이 7회초 선두 타자로 나와 김일융의 옆을 스치는 중전 안타로 출루했고, 한문연의 우측 라이너성 타구를 우익수 장효조가 낙구지점 판단을 잘못하여 머리 위로 넘겨버리는 실책성 플레이[16]를 저지르며 3루타가 되어 버렸다. 유두열이 홈을 밟으며 2:4를 만든 후 정영기도 우전 적시타로 한문연을 불러들이며 3:4까지 따라 붙었다. 정영기의 타구는 완전히 먹혀서 우익수가 조금만 앞으로 과감하게 대쉬했다면 평범한 플라이 처리도 가능했지만[17] 장효조는 바로 전에 저지른 만세 탓에 위축되었는지 주춤거리다가 바로 앞에 떨어지는 안타를 만들어주고 말았다. 7회말 2사 후 장효조는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우전 안타를 뽑아내었고 최동원의 견제 악송구를 틈타 3루까지 진루해 추가 득점의 기회를 마련했지만, 이만수가 3루 땅볼에 그치며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운명의 8회초. 롯데는 홍문종이 중견수 뜬공으로 물러났지만 김용희와 김용철이 연달아 중전 안타로 출루하면서 1사 1루, 3루[18]라는 절호의 기회를 만들었다. 이때 김일융은 3일을 쉬었다고는 하지만 2차전, 4차전 선발 등판에 5차전 구원으로 마운드에 오른 뒤 7차전에 출전했기 때문에 체력은 바닥을 보이고 있었다. 이 경기에서는 최동원보다 안타를 더 많이 맞은 상황에서 위기가 계속되자 김일융은 몇 번이고 덕아웃을 쳐다보며 교체 요청을 했고 그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김영덕 전 감독은 머리속이 굉장히 복잡했겠지만, 시리즈 내내 호투했던 김일융의 관록과 노련함을 믿으려고 했는지 결국 김일융의 애원을 외면하고 말았다.[19]
이어서 다음 타석에는 유두열이 들어섰다. 볼카운트는 1-1. 롯데 응원석에서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울려퍼지는 가운데, 김일융은 1루에 힘없는 견제구를 던진 뒤 병살 유도 내지는 최소한 장타만은 맞기 않기 위해 몸쪽으로 낮게 파고드는 패스트볼을 던졌고 유두열은 이를 절묘한 스윙으로 퍼올렸다.
쳤습니다, 좌측! 높게 날아갑니다! 높게 가느냐, 넘어가느냐, 홈런이냐... 홈러~언!! 유두열! 쓰리런 홈런!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 아~ 극적인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입니다. 아~ 이건 극적인 상황입니다. 네~ 유두열의 쓰리런 홈런! 아~ 이거 참... 유두열, 대단합니다.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 당시 MBC 김용 캐스터의 멘트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 당시 MBC 김용 캐스터의 멘트
원 앤드 원, 제3구. 레프트! 레프트 큽니다. 레프트 크다! 크다! 레프트 크다! 레프트 크다! 홈~런!! 홈런입니다. 석점 홈런!
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 당시 KBS 이장우 캐스터의 멘트
그리고 백스핀이 걸린 타구는 왼쪽 담장을 훌쩍 넘겨 폴대 오른쪽을 통과했다. 역전 3점 홈런이 터져 나오는 순간이었다.유두열의 역전 3점 홈런 당시 KBS 이장우 캐스터의 멘트
점수는 롯데 6:4 삼성, 롯데는 결국 승부를 뒤집었다.[20]
이후 김일융은 바로 강판되고 몸을 풀고 있던 황규봉이 구원등판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롯데 쪽으로 완전히 기울어졌다.[21] 거기에다 유두열의 역전 홈런을 계기로 힘을 얻은 최동원의 구위도 더욱 위력을 발휘했다. 후일 이날 포수이던 한문연이 최동원의 사망 후 방영된 KBS 다큐에 출연해서 한 말로는 공이 점점 빨라지고 살아 들어오는 느낌이었다고. 거기에 한술 더 떠 상대팀에 있던 박영길은 10일 정도 놀다 온 최동원이 던지는거 같다고 회고했다.
8회말 함학수가 아웃되어 공수교대되는 순간, 최동원과 한문연이 하이파이브를 하는 모습[22] |
롯데 자이언츠의 우승이 확정되는 순간 환호하는 최동원 |
여기서 등장한 삼성의 타자는 장태수. 풀카운트에서 최동원의 라이징 패스트볼이 들어오자 하프스윙 후 볼넷이라고 판단해서 1루로 뛰어갔지만, 이규석 주심은 이를 스윙으로 판정해 삼진 아웃으로 처리되며 경기가 종료되었다. 최동원은 환호하면서 포수 한문연과 힘차게 포옹하고, 순식간에 달려온 선수들과 기쁨을 함께 했다.
이로써 롯데 자이언츠의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이 결정되고, 최동원은 가을의 전설이 되었다.
7. 여담
당시 최동원은 10일(9월 30일~10윌 9일) 중 5일을 등판하면서 40이닝, 610구(즉, 경기당 평균 8이닝에 120구 이상)를 소화하였다. 프로야구 리그의 특정 포스트시즌 기간에 이보다 많이 던진 선수는 라이브볼 시대는 물론, 메이저리그 초창기의 데드볼 시대에도 없었다. 단일 시리즈에서 홀로 4승을 거둔 투수는 최동원 이전에는 1958년 일본시리즈의 이나오 가즈히사(47이닝 578구, 4승 2패)와 1959년 일본시리즈의 스기우라 타다시(32이닝 416구, 4승), 2명이 있었으며 최동원 이후로는 나오지 않고 있다. 선수 본인의 기량이 뒷받침되느냐는 둘째치고, 선수생명 관리 차원에서도 결코 용납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날 생각해보니까, '이상하다. 내가 정말 4승을 할 수 있었던가?' 해 놓고도, 결과가 나와 있는데도, 제가 제 자신을 못 믿는 거 있죠."
최동원이 인터뷰를 통해 당시를 회상하며 (KBS 스포츠 뉴스 1999년 10월 21일[23] 중에서)
최동원이 인터뷰를 통해 당시를 회상하며 (KBS 스포츠 뉴스 1999년 10월 21일[23] 중에서)
"아부지,
해태는
선동열이 델고 그래 우승을 많이 했는데,
롯데는 와 최동원이를 델꼬 우승을 한 번빼끼 몬 했십니꺼?"
"아들아, 해태는 해태가 선동열이를 델꼬 우승을 했지만은, 롯데는 최동원이가 롯데를 델꼬 우승을 한기라."
어느 한 롯데 자이언츠 팬 부자의 대화[24]
"아들아, 해태는 해태가 선동열이를 델꼬 우승을 했지만은, 롯데는 최동원이가 롯데를 델꼬 우승을 한기라."
어느 한 롯데 자이언츠 팬 부자의 대화[24]
- 이 시리즈에서 최동원이 거둔 성적은 5경기 등판 4승 1패 4완투 2완투승 1완봉승 1완투패 1구원승 40이닝 투구 평균자책점 1.80 WHIP 1.08.[25] 김일융 역시 최동원에 묻히긴 했으나 2차전, 4차전, 5차전, 7차전 4경기에 나와 27.1이닝을 던져 3승 1패를 기록했다. 만약 삼성이 우승했다면, 한국시리즈 4승 투수라는 전설은 김일융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 당시 롯데는 6개 구단 중 유일하게 투수코치가 없는 팀이었다. 1983시즌 종료 후 김명성 전 투수코치를 경질한 뒤에 고려대학교 최남수 전 감독을 후임으로 영입하려 했지만, 최남수 전 감독이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시즌 내내 투수코치가 공석이었고[26], 고교 때 포수였던 도위창 전 코치와 최선참 투수 김문희가 투수코치 역할까지 해야 했다.
- 한국시리즈에서 최동원의 첫 삼진 제물이었던 장태수는 7차전 9회말 2아웃에서 시리즈를 끝내는 마지막 삼진을 당하며 한국시리즈의 시작과 끝을 장식했다. 이로 인해 늘 1984년 한국시리즈 영상이 나오면 항상 마지막 삼진을 당하는 타자로 등장을 하게 된다.
- 이 결과에 경악한 삼성은 다음 해인 1985년에는 한국시리즈조차 생략해 버리고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을 일궈낸다. 그것도 당시 롯데의 홈인 구덕 야구장에서 우승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이 우승은 "한국시리즈를 치르지도 않은 게 무슨 우승?"이라며 모두가 인정하지 않는 반쪽짜리 우승으로 평가절하 당했다. 그후 삼성은 진짜 우승인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하기 위해 1986년부터 2001년까지 16년 동안 5번의 한국시리즈에 진출했지만 5번 모두 우승을 놓치면서 '우승도 없는 팀'이라는 조롱과 함께 통한의 눈물을 삼키다가 2002년이 되어서야 LG 트윈스를 상대로 극적인 역전 한국시리즈 우승을 이뤘다. 당시 한국시리즈 6차전에서 LG 마운드의 자존심 이상훈을 상대로 3점차를 뒤집는 이승엽-마해영의 연속타자 홈런. 특히 마해영의 홈런은 끝내기였다. 자세한 내용은 2002년 한국시리즈 문서 참조. 이는 원년 6개 멤버 구단들 가운데 가장 늦은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기록되었다.
- 이전에도 최동원은 혼자서 시리즈 우승을 일군 적이 있다. 정규시즌에서도 롯데 팀 전체가 소화한 324이닝 중 최동원 혼자서 206 이닝을 소화하는 괴력을 과시하기도 했고, 1981년 코리안시리즈에서도 무승부 포함 6경기에 모두 등판해 3승 1세이브를 거두며 롯데의 우승을 이끈다. 팀이 소화한 6경기 54이닝 중 혼자서 42⅓이닝을 투구했다.
- 10월 25일 - 1차전 0:3 패, 9이닝 3실점 완투
- 10월 26일 - 2차전 4:5 패, 7이닝 무실점 구원
- 10월 27일 - 3차전 6:6 무, 6이닝 3실점 구원
- 10월 29일 - 4차전 7:4 승, 7이닝 3실점 1자책 선발승, 8회 2사 만루 구원(1루수)
- 10월 30일 - 5차전 5:3 승, 3이닝 무실점 구원
-
10월 31일 - 6차전 6:4 승, 9이닝 4실점 완투
당시 삼성 코치였던 박영길은 실업 롯데 감독 시절에 이러한 최동원의 원맨쇼를 직접 보았기 때문에 혼자서 롯데가 아닌 OB를 밀어줄 것을 주장했다. 여기에 박철순이 부상으로 이탈하고 장호연만 공략하면 이길 확률이 높다는 점도 있었다. 그러나 김영덕 전 감독을 위시한 나머지 삼성 코칭스태프는 페넌트레이스에서 최동원을 상대로 잘 공략했다면서 기각했다. 그리고 시리즈 후 결과는 어느 쪽이 옳았는지를 분명히 보여주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박영길은 인터뷰에서 '영덕이 형이 내 말을 들었으면 삼성이 우승을 했을 수도 있었을텐데...'라며 아쉬운 반응을 드러냈다.
- 최동원은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무엇이 가장 하고 싶냐는 질문에 "자고 싶다"라고 말했다. 우승 축하 파티 도중에 쌍코피를 터뜨릴 정도였으니... 당시 7차전의 해설을 맡았던 허구연도 그를 보고 무척 피곤해 보인다고 얘기했다.
- 한국시리즈 MVP는 한국시리즈 4승을 한 최동원이 아니라 7차전에서 3점 홈런을 날린 유두열. 대신 최동원은 시즌 MVP를 가져갔다.[27] 그 당시의 분위기 상 시즌 MVP와 한국시리즈 MVP를 동시에 주기는 힘들다는 정서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1993년 이종범도 1993년 한국시리즈 MVP를 가져가는 대신에 신인상을 양준혁에게 넘겨줬다. 시즌 MVP와 한국시리즈 MVP를 동시에 석권할 수 없었던 이 불문율은 2017년의 양현종이 2017년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하면서 깨졌다. 이 해 양현종은 KBO 골든글러브, 최동원 상, 플레이어스 초이스 어워드, 조아제약 프로야구 대상, 카스포인트 대상, 일구상 최고 투수상과 동아스포츠 대상 프로야구 부문 올해의 선수상을 모조리 쏟아담으며 상금만 2억을 넘게 가져갔다.
- 유두열의 한국시리즈 MVP 사례로 비교되는 사례는 2009년 한국시리즈 당시 나지완이나 2018년 한국시리즈 당시 한동민이 언급되긴 하지만 2009년 한국시리즈 당시 나지완은 4차전 이전에는 부진했으나 4차전, 5차전, 6차전 모두 안타가 하나씩 있었고 7차전에서는 SK가 초반 대량득점해 5:1까지 벌어진 상황에서 추격의 투런 홈런과 9회말 끝내기 홈런을 친 공로가 있었다. 물론 시리즈 동안 2승을 거둔 아킬리노 로페즈가 받는 게 타당한 상황이긴 했지만, 유두열과 비교하기는 어렵다. 2018년 한국시리즈 당시 한동민은 1차전 선제 홈런, 6차전 결승 홈런을 쳤다. 비록 1할대 타율이긴 했지만.
- 최동원 사후 방영된 다큐멘터리에서 김시진이 고백하길, 절친이기도 하지만 라이벌이었던 최동원을 이겨보는게 소원이었다고. 본인에게 1984년은 악몽이고, 최동원에게는 지금까지도 팬을 만들어준 시리즈라고 회고하기도 했다. 아마 때부터 최동원에 번번히 막혀서 우승을 못했었던 것이 큰 듯. 한양대 시절 연세대의 최동원에게 밀려서 우승 실패, 육군 경리단에 복무하면서 실업야구 우승을 노렸지만 코리안 시리즈 전경기 출장을 한 롯데 자이언트의 최동원에 밀려서 또 실패, 프로에 와서 한국시리즈 우승을 노렸지만 또 다시 실패.
- 7차전에 롯데는 유두열을 5번이 아닌 6번으로 내려고 했었으나 기록원의 실수로 원래 5번 박용성과 타순이 바뀌었다. 기록원이 다시 라인업을 적으려고 했으나 강병철 전 감독은 그냥 그대로 놔두라고 했다. 강병철 전 감독은 "왠지 그냥 바꾸고 싶지가 않았다"라고 말했다.
- 유두열은 7차전의 홈런으로 인해 이듬해 공포의 1할타자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렇다고 1985년에 결코 못친 건 아니다. 팀내 최다 안타에 타율도 0.287을 기록했다.
- 7차전 4:3으로 지고 있던 유두열의 타석 때 강병철 전 감독이 잠시 타임을 부르고 유두열에게 "스퀴즈 사인을 낼지도 모르니 벤치를 주시하라"고 말했다. 그때 유두열의 대답은... 네에?라고 놀라면서 반문했고, 이때 강병철 전 감독은 속으로 '그렇게 번트에 자신이 없나...'라고 생각하면서 결국 스퀴즈 사인을 내지 않았다고 한다. 유두열이 반문할만도 한게 당시 3루 주자가 김용희였기 때문이다. 김용희는 빠른 주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작전 실패의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던 듯.
-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롯데의 페넌트레이스 전후기 통합 승률은 전체 4위인 .510. 역대 한국시리즈 우승팀 중 2001년 한국시리즈 우승팀인 두산 베어스의 .508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승률이다. 또한 이 시리즈는 1999년 한국시리즈와 더불어 정규시즌 승률 4위팀이 우승한 둘뿐인 시리즈이기도 하다.
- 우승 이후 롯데는 자사 계열사 중 하나인 롯데제과에서 만드는 빼빼로 광고에 우승 당시 멤버들을 기용한 광고를 제작하여 방영했다. 당시 광고 영상 참고로 이때 돈을 제대로 주지 않았는지 당시 광고를 찍고 돈을 제대로 못 받았다는 유두열의 회고가 있다. 롯데 'V1의 주역' 유두열을 만나다.
- 이후 롯데 자이언츠의 두 번째 우승까진 꼬박 8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 때도 안경잡이 우완 에이스 염종석은 팔이 빠져라 던져야 했고, 감독은 여전히 강병철이었다. 이후 모든 야구팬들은 롯데의 우승에는 안경 우완 에이스와 강병철, 그리고 혹사가 필요하다는 미신 아닌 미신을 믿게 되었다.
- 삼성 라이온즈의 초대 구단주였던 당시 이건희 부회장이 이 시리즈 이후 영원히 야구장을 찾지 않았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야구장에 갈 때마다 삼성이 매번 졌다. 한국시리즈 1차전에 삼성 구단 대표자 자격으로 대구구장을 찾았는데 이날 삼성은 앞서 서술한대로 한국시리즈 사상 첫 완봉패의 희생양이 됐다. 그리고 아직도 많은 이들의 입에서 회자되는 것이 7차전 직관. 이 부회장은 자신이 야구장에 갈 때마다 지는 것이 마음에 걸려 이날도 태평로 삼성 본관 집무실에서 TV로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삼성이 4:1로 앞서고 최동원의 구위가 떨어진 것을 확인한 이건희 부회장은 그때서야 잠실 야구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가 잠실 야구장 좌석에 앉자마자 발생한 것은 장효조 만세 사건. 결국 삼성은 거짓말처럼 대역전패를 당했고 이후의 충격으로 그는 죽을 때까지 야구장 직관은 안했다고 한다.[28]
- 한국시리즈가 전후기 우승팀의 대결로 치러진 시리즈에서 후기리그 우승팀이 승리한 유일한 시리즈이다.
- 강병철과 김영덕은 8년 후 다시 한국시리즈에서 재회한다. 당시 김영덕 감독은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을 맡아 복수를 노렸으나 또 다시 패.
- 경기가 마무리되고 선수단이 마운드로 뛰어나와 환호할 때, 손팻말을 든 관중 1명을 시작으로 관중들이 그라운드에 난입해 같이 펄쩍펄쩍 뛰면서 선수들의 등짝을 때려대거나 끌어안는 장면도 볼 수 있다. 어차피 우승 확정 순간이어서 딱히 제재하려 하지도 않았던 듯하지만 희귀한 장면인 건 사실이다. 사실 1980년대만해도 중요한 야구 경기가 끝났을 때 몇몇 관중들이 경기장에 뛰어 들어오는 일이 제법 있었다. 1982년 프로야구 개막전에서도 끝내기 만루홈런으로 승리한 MBC 청룡 백인천 전 감독이 승리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 어린 팬 한 명이 멀리 뒤에서 카메라를 보고 V싸인을 하는 모습도 보였을 정도였다. 그러나 꽤나 최근인 2017년 한국시리즈에서도 양현종이 KIA 타이거즈의 우승을 확정짓자 잠실구장의 기아 팬이 난입해 같이 펄쩍펄쩍 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 옛날에는 이러한 장면을 메이저리그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다. 행크 아론이 베이브 루스를 뛰어넘는 715호 홈런을 칠 때도 관중 두 명이 뛰어들어 같이 베이스를 돌았으며, 1960년 월드 시리즈에서도 빌 매저로스키가 7차전 끝내기 홈런을 치자 피츠버그 관중들이 무더기로 몰려나오는 바람에 빌 매저로스키가 손으로 이리치우고 저리치우며 홈을 밟았다. 심지어 비교적 최근인 1993년 월드 시리즈에서도 조 카터가 끝내기 홈런을 치자 소수지만 그라운드로 뛰어나오는 일반인들이 보인다. 이렇게 좋게 되는 경우도 많았지만, 반대로 선수들에게 물건 던지거나 덤벼드는 것도 많았다.
- 한국시리즈의 잠실 중립경기 규정(5차전-7차전 잠실 중립경기)이 이 해부터 확립되어 2014년까지 지속되었다. 이전에는 1차전 전기리그 우승팀 홈구장, 2차전 후기리그 우승팀 홈구장, 3차전-7차전 동대문야구장(1982), 잠실야구장(1983) 순으로 치러졌으나 1983년에 MBC 청룡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면서 2차전~7차전을 잠실에서 치러야 하는 상황이 일어나면서 규정을 수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 플레이오프 및 단일리그 도입 등으로 1차전~4차전 경기장의 선택은 변경되었지만 5차전~7차전은 잠실에서 개최되었다. 단, 1998년부터는 서울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시에는 잠실은 중립구장이 아닌 서울팀 홈구장으로 치러졌다. 1차전, 2차전, 6차전, 7차전 리그 1위팀, 3차전~5차전 플레이오프 승리팀.
- 이해 KBO 한국시리즈 최종 7차전 날짜가 10월 9일인데 이는 역대 한국시리즈 중에 가장 빠른 날짜에 최종전이 열린 기록이다. 다만 이 당시만 해도 포스트시즌이라고는 전기리그 우승팀과 후기리그 우승팀이 맞붙던 한국시리즈 밖에 없었기에[29] 이런 기록이 가능했다.
- 이해 한국시리즈의 뒷얘기로는 6차전 종료 후 박현식 전 심판 위원장이 7차전 구심으로 당시 나이로 마흔을 앞두고 있었던 이규석 심판으로 배정하겠다라고 밝히자, 이규석 심판은 경기 개시 1시간 전까지 "원래 7차전 구심은 최고참(팀장)이 보기로 했었는데, 팀장급이 아닌 내가 왜 구심을 봐야 하느냐?"하면서 버티면서 심판부 쪽에서 발칵 뒤집힐 뻔했다. 뒷날 알려진 사실은 "이런 명승부에는 젊은 심판도 한 번쯤은 봐야 된다"하는 여론이 있어서 롯데, 삼성 쪽에서는 원했던 심판이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 시리즈 종료 이후 삼성 구단은 져주기 게임에 대한 그룹 감사를 받았다고 하며 코칭스태프들은 져주기 게임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단체 사표를 제출했는데 당시 구단주였던 이건희 회장이 총대메고 책임 지려고 하는 모습을 높이 사서 오히려 사표를 반려시키고 해외 전지훈련을 보내줬다고 한다.
- 이후로 삼성은 달구벌의 저주에 걸려 1986년 한국시리즈, 1987년 한국시리즈, 1990년 한국시리즈, 1993년 한국시리즈,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패하게 된다. 심지어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당시 삼성을 달구벌의 저주에 빠지게 했던 김응용 전 감독을 모셔오고도 저주를 깨지 못하다가 2002년 한국시리즈에서 9회말 연속타자 끝내기 홈런으로 깨지게 된다. 이 기간중 한국시리즈 12연패, 한국시리즈 잠실 구장 10연패라는 불명예를 기록하면서 1985년 삼성 라이온즈 통합우승을 제외하고 단 한번도 우승하지 못했다. 이 기록은 원년 구단 중 가장 늦은 한국시리즈 우승 기록이다.
- 이 한국시리즈 결과로 인해, 전년도에 최종 순위 최하위를 기록한 팀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는 진기록을 세우게 되었다. 전년도인 1983 시즌에 롯데는 후기리그 최하위인 6위를 기록했는데 전기리그 최하위인 OB 베어스에게 1경기차로 밀려 최종 최하위를 기록한 바 있다.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다시 나오지 않고 있는, 이 한국시리즈가 유일한 기록이다.
- 한국시리즈 당시 경남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최동원의 막내동생 최수원은 훗날 심판이 되어 형이 투혼을 바쳤으나 버림받은 고향팀과 그렇게 방출된 형이 말년을 보내다가 은퇴한 팀이 가졌던 또 다른 일생일대의 경기의 심판을 맡는다.
- 2023년 우승 트로피 보관함을 만들면서 우승 당시는 없던 우승 로고를 만들었다.
- 이 당시 양팀이 착용했던 유니폼은 현재까지도 클래식 시리즈로 명맥이 이어지면서 계속이어지고 있다. 특히 롯데 팬들은 유이한 한국시리즈 우승 당시 입던 유니폼이란 역사성 때문에 많이 입고들 경기를 관람한다.
8. 관련 문서
- 삼성 라이온즈/1984년
- 롯데 자이언츠/1984년
- 클래식 시리즈
- 1984 최동원
- 1958년 일본시리즈, 1959년 일본시리즈 - 두 시리즈 모두 한 투수가 4승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을 이끈 시리즈다. 대기록의 희생양은 두 시리즈 모두 일본시리즈 최다 우승 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요미우리는 추가로 1958년에는 일본시리즈 최초의 리버스 스윕으로 우승 헌납, 1959년 4연패 피스윕으로 우승 헌납이라는 굴욕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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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41e42><colcolor=#fff> 구단 기본 정보 | <colbgcolor=#041e42><colcolor=#fff> 모기업 | 롯데 | 롯데그룹 산하 스포츠단 | |
구단 |
롯데 자이언츠 | 롯데 자이언트(실업시절) |
|||
롯데 자이언츠 2군 | ||||
프런트 | 선수단 | ||||
경기장 |
1군 메인
사직 야구장 (
재건축) 과거 |
|||
1군 보조
울산 문수 야구장 과거 마산 야구장 |
||||
2군 상동 야구장 | ||||
현재 시즌 | 2024 시즌( 시즌 후) | |||
구단 역사 정보 | ||||
통합 역사 | 역사 | |||
우승 |
1984년 | 1992년 | |||
암흑기 | 암흑기 ( 8888577, 5788, 7A78877) | |||
선수단 | 역대 선수 | 프랜차이즈 스타 | 역대 등번호 | 역대 필승조 | |||
영구 결번 | 11 최동원 | 10 이대호 | |||
기타 | 역대 기록 | 역대 트레이드 | 역대 신인드래프트 | |||
구단 세부 정보 | 특징 | 팀 컬러 | 유니폼( 얼터너티브) | ||
라이벌리 | 상대전적 | |||
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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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시리즈 vs | 클래식 씨리즈 vs | 헤리티지 시리즈 vs | 항구 시리즈 vs | 엘꼴라시코 vs | 경부선 시리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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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연고 학교 |
개성고 |
경남고 |
부경고 |
부산고 |
부산공고 |
부산정보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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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덤 관련 정보 | 유튜브 | Giants TV(자티비) | ||
응원 | 응원단장 | 응원단 | 마스코트 | |||
선수 응원가 | 팀 응원가 | 마! | 부산 갈매기 | 돌아와요 부산항에 | ||||
팬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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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천취소]
10월 8일에
연고전 일정이 잡히면서 7차전이 다음날로 순연되었다.
[2]
이해 한국시리즈에서 롯데에게 우승을 내준 것에 열받은 삼성이 이듬해인 1985년 각각 25승을 기록한 김시진과 김일융을 앞세워 전·후기리그 통합 우승을 달성, 한국시리즈가 소멸된 것이 이 시스템이 발동된 처음이자 마지막 사례였다.
[3]
롯데도 마찬가지였지만 삼성 역시 이왕 한국시리즈에 올랐으니 우승해야한다는 당위성은 늘 갖고 있었다. 특히 KBO 창단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OB에 패한 쓰라린 기억을 갖고있었던 삼성에게 1984년 한국시리즈는 반드시 우승을 해내야하는 입장이었다. 물론 천신만고로 올라왔고 만년 하위권에서 맴돌던 롯데의 절박함이 더 했다는게 함정이지만.
[4]
아울러 롯데 자이언트가 프로로 전환, KBO 리그 창단 원년팀으로 출발했을 당시에도 감독이었다.
[5]
이만수의 타율이 .340으로 .339인 홍문종에 불과 1리(.001) 차이로 앞서 있어서 홍문종의 안타로 타율 역전이 일어나는 것을 막으려 했던 것. 결국 이만수는 트리플 크라운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했는데도 불구하고 시즌 MVP를 최동원에게 내주었다. 이후 이 사건은
25년 뒤에 재현된다. 그리고 비슷한 일이
2021년에도 재현된다.
[6]
이 일과 청보 감독 시절 삼성 상대로 관광당한 것으로 인해 허구연은 2013년까지만 해도 삼성 경기의 중계 방송을 할 때 의도적으로 멘트를 줄였었다. 허구연이 싫어하는 구단 유형이 신인이 두각을 나타내지 못 하거나, 인프라가 안 좋거나, 대외적으로 논란되는 사고를 친 팀인데, 이 당시 삼성이 져주기 게임이라는 사고를 친 팀에 걸렸다.
[7]
후보급들의 목표야 주전으로 살아남는 것이니 그 심정을 이해 못하는건 아니지만, 분위기 파악을 못했다는게 잘못이었다.
[8]
위의 표를 봐도 알다시피 해태는 여기서 OB를 두 번 잡는다더라도 후기리그 2위로 끝나서 그냥 한국시리즈를 못 간다.
[9]
승률 계산시 무승부가 패배로 간주되기 때문에 어차피 막아도 무승부로 0.5게임을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 끌 필요가 없었다. 이 경기가 그냥 무승부로 끝났더라도 KIA와 SK의 2009년 페넌트레이스 승률은 .602로 같지만(두 팀 모두 133경기 중 80승) KIA가 SK와의 상대전적에서 앞섰기 때문에(본 경기 제외 10승 2무 7패) 승자승 원칙에 따라 SK는 그대로 2위가 됐을 것이다.
[10]
볼드체는 당시 주장이었던 선수.
[11]
33년 후인 2017년, 롯데 자이언츠는 5년 만에 진출한 가을야구인
2017년 준플레이오프 캐치프레이즈로 이 문장을 걸어놓는다.
[12]
이 타구로 김시진은 왼쪽 복숭아뼈에 금이 가버렸고, 이는 한국시리즈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13]
임호균이 최동원의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어주었기에 최동원이 그렇게 활약할 수 있었다는 데에는 대부분의 팬들이 이견을 달지 않는다.
[14]
이후 임호균은 당시의 투수교체가 자신이 자청한 것이었다고 말해왔고, 한동안 최동원 신화의 여러 일화들 중 알려졌다.
[15]
역대 한국시리즈 경기 중 최초로 KBS와 MBC에서 동시에 생중계한 경기.
[16]
일명 장효조 만세 사건이라 부르는 실책이였다. 라이온즈의 승리의 아이콘인 이재용과 달리 부친 이건희는 필패의 아이콘으로 유명한데, 당시 이기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이겼다 싶어 직관을 오자마자 장효조의 실책이 터졌고 연이어 유두열에게 홈런을 맞고 패배한 것에 질려서 더는 야구장을 찾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에도 장효조는 팀 동료인 투수 김시진과 함께 '큰 경기에 약한 선수'란 이미지가 박혔다.
[17]
거리도 짧아서 3루 주자가 태그업 하기엔 다소 힘든 상황이었다.
[18]
1루 주자 김용희가 런앤 히트로 스타트를 빨리 끊고 3루까지 질주한 것이 주효했다. 김용희는 원래 발이 빠른 선수가 아니어서 중계 플레이가 제대로 되었다면 3루에서 아웃될 수도 있었지만, 송구가 빗나가면서 간신히 세이프되었다.
[19]
2011년 최동원이 세상을 떠난 후 방영된
KBS 스페셜 - 무쇠팔 최동원 인생을 던지다 인터뷰에서 '피로가 겹쳤다'고 술회하였다.
[20]
유두열이 홈으로 들어올 때 감격에 겨운 3루 코치
이희수가 그를 업으려고 했지만 유두열은 "일단 홈부터 밟자"며 사양하고 동료들의 과격한 환영을 받으며 득점을 올렸다.
[21]
훗날 김영덕 전 감독은 이 일을 두고 자신이 마운드에 올라가서 직접 지시를 내리지 않은 걸 후회했다고 한다. 유두열은 몸쪽 직구밖에 못 치니 그 공만 조심하라고 확실히 얘기했어야 했다고...
#
[22]
이 사진은 이듬해인 1985년도판 KBO의 프로야구 연감 표지를 장식했다.
[23]
그해 플레이오프에서 롯데가 다시 삼성을 상대로 4승 3패의 역전 드라마를 쓰며
한국시리즈에 진출한 비록 힘이 바닥나서 한화에게 졌지만 직후의 일이다.
[24]
이 대화와 같이 해태와 롯데는 우승을 하던 상황이 너무나도 달랐다. 해태는 물론 선동열이라는 또 다른 슈퍼 에이스가 있기도 했지만 김봉연, 김성한, 김준환, 김일권, 그리고 이종범이라는 강력한 타선이 아울러 해태에 존재하고 있었기에 선동열은 최정예 군단의 간판스타 정도의 위상이었던 반면, 롯데는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강력한 선수가 최동원 단 한 명뿐인, 말 그대로 일당백을 강요받는 팀이었다는 점이다.
[25]
후일 최동원 사후 다큐에 나온 민훈기 해설위원이 포스트시즌 철이 되어 미국 등으로 나가면 꼭 포스트시즌 진기록 이야기가 나오는데 본인은 언제나 대한민국에는 한국시리즈에서 4승 1패 평균자책점 1.80을 기록한 투수가 있다고 말을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대부분이 깜짝 놀라거나 믿지 못했다고 하는데 메이저리그에선 월드시리즈에서 한 투수가 4승을 거둔 사례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26]
최남수 전 감독은 이후에도 고려대학교 야구부의 감독직을 지키다가, 1993년 가을의 한 경기에서
조성민의 노히트 노런이 무산된 순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27]
그해 최동원은 시즌 27승으로 다승 1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당시에는 별도의 수상 부문이 아니었지만 탈삼진 역시 1위로, 이 해 최동원이 세운 탈삼진 기록은 2021년 두산의 아리엘 미란다가 225K를 달성하기 전까지 단일 시즌 최다 탈삼진 자리를 공고히 지켰다.
[28]
그러나 이건희 회장의 야구사랑은 실로 대단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도 연습구장으로는 국내 최고인
삼성 라이온즈 볼파크의 건립을 지시한 사람은 다름아닌 이건희 회장이었다. 생전에 병상에 누워 있었을때도 야구 중계는 거의 매일 시청했었다고 전해진다.
[29]
플레이오프 제도가 신설된 것은 1986년,
준플레이오프 제도가 생긴 것은 19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