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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식의 수상 경력 / 역대 등번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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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O 리그 한국시리즈 우승 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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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 |
도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등번호 14번 | ||||
미야모토 타카오 (1969~19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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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식 (1972~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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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와하라 쇼지 (1982~1989) |
[[한신 타이거스|한신 타이거스]] 등번호 27번 | ||||
미야타 노리카즈 (1976~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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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식 (1982) |
→ |
카사마 유지 (1984) |
[[해태 타이거즈|해태 타이거즈]] 등번호 15번 | ||||
결번 | → |
주동식 (1983~19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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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수 (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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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동식 朱東植 | Joo Dong-Si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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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명 | [ruby(宇田, ruby=うだ)] [ruby(東植, ruby=とうしょく)] (우다 토쇼쿠) |
출생 | 1948년 8월 23일 ([age(1948-08-23)]세) |
도쿄도 스기나미구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1] |
학력 | 타쿠쇼쿠대 제일고 - 주오대 |
포지션 | 투수 |
투타 | 우언우타 |
프로 입단 | 1971년 드래프트 4라운드 ( 토에이) |
소속팀 |
토에이-닛타쿠홈 플라이어즈-닛폰햄 파이터즈 (1972~1981) 롯데 자이언트 (1975)[2] 한신 타이거스 (1982) 해태 타이거즈 (1983~1984) |
지도자 |
KIA 타이거즈 투수 인스트럭터 (2002) KIA 타이거즈 2군 투수코치 (2002~2003) |
해설위원 | 테레비 사이타마 히트나이트 (1989~2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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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프로야구,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었던 대한민국 국적의 前 야구선수. 일본식 통명은 우다 토쇼쿠(宇田東植). 일본에서 뛸 당시 장훈의 직속후배였다.[3]2. 선수 경력
2.1. 아마추어 시절
다섯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와 둘이 살았다.[4] 소학교(초등학교) 때부터 야구, 농구, 배구 등 운동에 소질이 있었으며 일본프로야구 선수가 되겠다고 아버지에게 말하자 아버지는 '프로야구 선수되는게 도쿄대학 입학보다 어려워''공부를 하는게 어때? 공부를 하면 진출할 수 있는 분야가 많아'라고 말하며 말렸다. 그러나 공부에 별 흥미가 없었으며 야구선수의 길을 택했다.타구쇼쿠대학 제일고교 입학 후 6개월밖에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감독의 선발 등판 지시를 받고 메이지진구 야구장에서 열린 고시엔 대회 지역 예선전에 등판해 호투하였다.[5] 원래는 오버스로 투수였으나 동급생 투수가 '너는 체구가 호리호리하니 아래로 던지는 게 어때?'하며 권유했고 실제로 그렇게 던져보니 구속이 빠르게 나오자 언더핸드 스로 투수로 전향했다.
주오대학으로 진학했으며 4학년 때 방한하여 한일은행 야구단 등 한국실업야구 팀들과 시합했다. 시합에서 호투하여 김응용 당시 한일은행 감독의 눈에 띄었다. 대학 졸업 후 사회인야구 혼다 팀에서 1970~1971년 두 시즌간 활약했고 1971년 드래프트 4위로 도에이 플라이어스의 지명을 받아 프로에 입단했다.
2.2. 일본프로야구 시절
언더핸드 타입으로 슬로커브와 역회전 공을 주무기로 삼던 주동식은 1972년 데뷔 후 초창기엔 주로 패전처리 투수로 나섰으나 이스턴 리그( 일본프로야구/2군)의 최우수 평균자책상을 받는 등 잠재력을 발휘하였다.1975년 8월 27일 다이헤이요 라이온즈( 헤이와다이 구장)와의 경기에서 구원승으로 데뷔 첫 승을 기록했고 9월 6일 미야기 구장에서 열린 롯데 오리온즈와의 경기에 첫 선발 등판하여 첫 완투승이자 데뷔 후 두 번째 승리를 거둔다. 1976~1978년에는 뚜렷한 실적을 올리지 못했다.
1979년 선발로 39게임에 등판하며 데뷔 후 처음으로 규정이닝을 채웠고, 9승 3패 평균자책 3.47의 괜찮은 성적을 남기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이후 다시 중간계투로 떨어지며 이렇다 할 활약은 없었고 1981년 일본시리즈 4차전에 중간계투로 등판했으나 아와구치 켄지에게 싹쓸이 2루타를 시원하게 맞았다. 1981 시즌이 끝나고 구단측에서 야쿠르트로 트레이드 시켰으나 새로 생기는 한국야구에서 제의를 받고 트레이드를 거부하고 일본야구 은퇴를 선언해 충격을 주었다. 기사 하지만 일본 야구계쪽에서 반발하여 한국행은 무산되었고, 1982년 한신 타이거즈로 트레이드되어 1시즌을 뛰었다.
2.3. 해태 타이거즈 시절
1983년 대선배인 장훈의 권유를 받고 한국프로야구로 이적하기로 결심[6], 장명부가 KBO와의 1차 협상을 위해 입국했을 때 같이 입국했고 계약금 4천만 원, 연봉 3천만 원, 총 7천만 원이란 조건에[7] 해태 타이거즈로 배정되었다.[8][9]당시 주동식의 나이는 35세로 해태의 코치이던 조창수, 백기성보다도 1살 많았고 투수코치 유남호와는 3살이나 연상이었지만 주동식은 누구보다도 성실히 동계훈련에 임하며 선수들의 귀감이 되기도 했다.
35세로 이미 은퇴에 가까운 나이였음에도, 투구 인터벌과 완급을 노련하게 조절하며[10] 호평을 받았다. 하지만, 1983년 주동식의 성적은 30게임 등판에 7승 7패 3세이브 평균자책 3.35로 기대치엔 못미쳤는데, 주동식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전반기에만 7승을 올렸지만, 후반기엔 본인이 던지고 싶다고 해도 구단에서 "넌 한국시리즈 때 쓰려고 아껴두는 거다" 라면서 일부러 등판을 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10승을 하면 받기로 되어있었던 보너스와 연관이 있지 않겠느냐는 추측.
장명부가 30승을 거두고 팀의 에이스 이상윤도 20승을 거두었는데 일본에서 뛰었다는 베테랑이 7승에 그치자 구단의 실망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찬찬히 따져보면 주동식은 그해 전기리그 막판에 삼미 슈퍼스타즈 와의 광주 3연전에서 이상윤- 김성한에 이어 선발승을 거두며 시리즈 스윕을 확정지어 순위를 뒤집었고 이는 해태의 전기리그 역전 우승으로 이어졌다. 또한, 1983년 한국시리즈에서 4승 중 2승을 혼자 따내며 맹활약, MBC 청룡을 물리치고 해태를 한국시리즈 제패로 이끌며 중요한 길목에서 제 몫을 해줬다.[11]
시즌 후 주동식은 한국시리즈 우승에 기여한 바를 감안하여 연봉 20% 인상을 주장하였지만 해태는 "시즌 7승에 그쳐놓고 무슨 소리 하는거냐?"면서 동결을 제시, 감정이 상한 주동식은 일본으로 돌아가버렸고 전지훈련 차 일본에 온 해태 선수단에도 합류하지 않으며 신경전을 벌였다. 보다 못한 김응용 감독이 내놓은 연봉 10% 인상(3천 3백만원)에 10승 달성시 보너스 3백만원 추가 라는 수정안을 구단이 수용하여 주동식에게 제시하였으나 주동식은 "그럼 보너스 지급 기준을 10승에서 5승으로 깎아달라" 라고 요구하는 바람에 또 결렬.[12] 급기야 재일교포 선수를 보유하고 있지 않던 MBC 청룡으로 트레이드를 추진하기도 했으나 MBC가 주동식이 제시한 계약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이마저도 허사가 되었고, 결국 장훈의 중재로 시즌 개막을 20여일 앞두고 연봉 3천 3백만원[13], 시즌 10승시 보너스 3백만원 추가라는 조건으로 간신히 계약을 매듭지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1984년 시즌을 맞이한 주동식이었지만 어깨가 망가지며 전반기에는 별로 나오지 못했다. 그해 18경기 등판에 6승 5패 평균자책 2.27에 그쳤고, 특히 전기리그엔 단 3게임, 1패만 거두며 팀내 최고연봉 선수에 걸맞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후반기에 6승을 거두며 제 모습을 보이긴 했으나 팀은 5위에 그치면서 주동식에 대한 구단의 시선은 결코 곱지 않았고, 그에게 10% 삭감된 2천 7백만원의 연봉을 제시하자 주동식은 오히려 자신의 코치 승격과 연봉인상을 요구, 3천 6백 60만원을 달라고 맞서며 또다시 연봉 협상은 해를 넘기고 말았다.
주동식과 해태의 협상은 요구차를 좁히지 못하며 파국을 맞이했고, 결국 그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주동식은 은퇴를 선언하여 한국 프로야구와의 인연을 끊어버렸다.
1984시즌 중 슬럼프에 빠졌을 때, 대구에서 원정 경기 중이던 어느 날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데, 술에 취한 김성한이 사이가 좋아서 그랬으리라고 생각되어 경주법주를 건넸다. "이걸 마시고 던지면 어떨거 같냐" 라고 얘기했더니, 주동식 본인은 어떤 의미인지는 알았지만 불안해 하던 때여서,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이유였는데 기분을 억누를 수가 없어 공기밥을 내던지고 방으로 갔다. 유니폼을 벗고 락커에 던져버리며 일본으로 돌아가버렸다.[14]
3. 은퇴 이후
이후 주동식은 일본에서 야구해설가로 활동하였는데, 후배 재일교포 선수들이 해태에 관심을 보이면 자신의 경험을 예로 들며 쌍수를 들고 말렸다.[15] 주동식을 소개한 장훈도 해태의 태도에 실망하여 더 이상 재일교포 선수들을 소개해 주지 않았고, 그래서 해태의 재일교포 선수 계보는 1994년 전성철[16]이 입단하기 전까지는 맥이 끊겼다.1989년부터 2001년까지는 세이부 라이온즈(현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중심 방송인 테레비 사이타마 히트나이트에서 해설을 맡았다.
그러나 해태가 KIA 타이거즈로 바뀐 후 주동식은 현역 시절 친하게 지낸 김성한 당시 감독의 요청으로 2002년 KIA의 투수 인스트럭터로 영입되어 이듬해엔 정식 2군 투수코치로 계약하여, 옆구리 투수인 신용운을 길러내는 등 약 2년간 KIA 투수를 지도하면서 예전의 악감정은 다 털어 버렸다고 한다. 아래 인터뷰에서도 "처음에 한국에 온 걸 많이 후회했지만 지금 와 돌이켜 보면 그것도 참 소중한 경험이고 추억이었다. 난 안 좋은 일이 있으면 버럭 화를 내도 금방 잊고 돌아선다. 다른 한국인들처럼 말이다" 라면서 너털웃음을 지을 정도로 해태 시절에 대한 유감은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김성한 감독이 영입 당시에 "다른 코칭스태프들과 동일한 수준으로 급여를 줘도 되겠느냐"고 묻자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로 승낙했다고 한다.
2010년 NHK 다큐멘터리인 "백구(白球), 선수들은 바다를 건넜다"에 김무종과 출연하여, 재일교포로써 출전했던 당시를 회상하기도 했다.
2013 시즌을 앞두고 오키나와로 동계 훈련을 온 한화 이글스 캠프를 찾아가 옛 스승인 김응용 감독과 절친 김성한 수석 코치를 만나 같이 식사도 했고, 한국에 오면 김성한이 상무지구에서 운영했던 중국요리점 '하이난'을 종종 찾기도 했다. 또한 KIA 코치 시절 주동식의 룸메이트이자 친해진 최해식은 술만 마셨다 하면 주동식에게 전화를 거는 등 해태 시절의 야구인들과 아직도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잠실에서 김응룡 감독을 만나 선수 시절 감독과 의견충돌이 있어 싸웠던 걸 사과했다고 한다. 김성한을 일컫어 ' 사무라이 같은 남자'라고 했으며 시원시원하고 급한 성격이 주동식 본인과 같았다고 밝혔다.
일본에 거주하면서 종종 한국에 건너와 야구 관련 강연회도 여는 등 최근까지 야구계와의 연은 유지하고 있었지만, 현재는 일본식 주점 운영, 무역업 등 사업가로 활동 중이라 한다. 본인은 한국 국적은 유지하고 있지만[17] 주동식의 자녀들은 결국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고 한다. 주동식의 인터뷰에 따르면 아들과 딸 모두 "아빠 죄송해요, 더 이상은 (불편해서) 안 되겠어요." 라며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는데, 아버지의 입장에서 매우 섭섭했지만 자녀들의 생각을 존중해서 결국 허락해줬다고.
2021년 김성한, 김종모, 장진범, 송일섭이 유튜브 채널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하여 밝힌 일화로 어느 날 게임에서 패하여 화가 난 김응용 감독이 선수단을 모두 차에 태워 전남 담양군에 내리게 하고 광주광역시까지 뛰어서 돌아올 것을 지시했는데[18] 뛰다가 목이 말라서 가게에 들어가자마자[19] 음료수를 한 번에 벌컥 들이켰으며 같은 재일교포 출신인 김무종과 같이 한국말이 서툴러서 "이건 야구 아니야!" " 빠가xx" "감독님 나빠요 나빠요" "우린 프로에요"를 연발하며 불만을 내뱉었다고. 지금도 김성한과 가끔씩 통화한다고 하며 현재는 할아버지가 됐다고 한다.
2023년 6월 전설의 타이거즈에 김성한과 최해식과 함께 출연하며 근황을 알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 본인의 유해를 고국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집에 목뼈만 남기고 목포 앞바다에 유해를 뿌리고 다음날 녹화에 참여했다고 한다. 아버지의 고향인 함경북도에는 방문할 수가 없어서 고민하다가 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인 광주-목포를 생각하여 목포 앞바다로 정했다고 밝혔다.
4. 사건, 사고
2012년에는 성매매 영업 금지 구역에서 안마방을 운영하다 풍속영업법 위반으로 그 외 2명과 같이 체포당한 흑역사가 있다.
5. 연도별 성적
역대 기록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선발 | 완투 | 완봉 | 평자책 | 승 | 패 | 세 | 홀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1972 |
도에이 닛타쿠홈 닛폰햄 |
12 | 16⅔ | 0 | 0 | 0 | 4.86 | 0 | 0 | - | - | 20 | 4 | 4 | 10 |
1973 | 12 | 22⅓ | 0 | 0 | 0 | 6.04 | 0 | 0 | - | - | 27 | 5 | 8 | 9 | |
1974 | 2 | 2 | 0 | 0 | 0 | 0.00 | 0 | 0 | 0 | - | 2 | 0 | 0 | 2 | |
1975 | 18 | 51 | 2 | 1 | 0 | 3.88 | 2 | 2 | 0 | - | 61 | 5 | 9 | 13 | |
1976 | 1 | 3⅓ | 0 | 0 | 0 | 0.00 | 0 | 0 | 0 | - | 4 | 0 | 1 | 0 | |
1977 | 13 | 37⅔ | 4 | 0 | 0 | 4.54 | 0 | 1 | 0 | - | 38 | 4 | 7 | 9 | |
1978 | 54 | 37⅔ | 9 | 2 | 0 | 5.00 | 2 | 3 | 0 | - | 68 | 7 | 8 | 16 | |
1979 | 39 | 135 | 7 | 2 | 0 | 3.47 | 9 | 3 | 0 | - | 151 | 15 | 20 | 34 | |
1980 | 22 | 84 | 12 | 2 | 1 | 3.54 | 3 | 6 | 0 | - | 89 | 11 | 14 | 37 | |
1981 | 8 | 23⅔ | 5 | 1 | 0 | 6.08 | 0 | 3 | 0 | - | 87 | 3 | 3 | 9 |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선발 | 완투 | 완봉 | 평자책 | 승 | 패 | 세 | 홀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1982 | 한신 | 29 | 42 | 0 | 0 | 0 | 2.57 | 0 | 1 | 0 | - | 35 | 5 | 11 | 16 |
연도 | 소속팀 | 경기 | 이닝 | 선발 | 완투 | 완봉 | 평자책 | 승 | 패 | 세 | 홀 | 피안타 | 피홈런 | 사사구 | 탈삼진 |
1983 | 해태 | 30 | 134⅓ | 21 | 3 | 2 | 3.35 | 7 | 7 | 3 | - | 133 | 14 | 38 | 56 |
1984 | 18 | 83⅓ | 10 | 4 | 2 | 2.27 | 6 | 5 | 0 | - | 74 | 4 | 21 | 27 | |
<colbgcolor=#ffff88>
NPB 통산 (11시즌) |
171 | 471⅔ | 39 | 8 | 1 | 3.97 | 16 | 19 | 0 | - | 532 | 59 | 85 | 155 | |
KBO 통산 (2시즌) |
48 | 217⅔ | 31 | 7 | 4 | 2.94 | 13 | 12 | 3 | - | 207 | 18 | 59 | 83 |
6. 관련 문서
[1]
아버지가
민단에서 활동을 해 국적을 바꿀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이로 인해 보너스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차별을 받았다.
[2]
입단 계약은 맺었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공식 경기에는 출전하지 못하고 그대로 일본프로야구에서 선수 생활을 지속했다.
#
[3]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재일교포들이 받는 차별은 어마어마했다. 국적을 유지한 후배가 입단하니 장훈이 많이 챙겨줬다고 한다.
[4]
일본에서 재일교포로 살아가면서 아무도 도와주려 하지도 않고, 아버지가 힘겹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애틋하다고 하며 지금도 항상 아버지 사진을 가지고 다닌다고 한다.
[5]
1964년
고시엔 대회 3라운드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전설의 타이거즈에서 고시엔 본선이 아닌 도쿄 지역예선이었다고 본인이 정정했다.
[6]
1982~1983년 한신과 2년 계약을 맺었으나 장훈이 한신 프런트와 협상하여 한국으로 건너올 수 있었다.
[7]
같은 시기
삼미에 입단한
장명부와 같은 대우를 요구했지만 짠돌이 구단으로 악명높던 해태에겐 깜도 안먹힐 요구였고, 결국 해태 구단 관계자가 직접 일본까지 건너가 주동식과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8]
배정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일본 내의 재일교포들을 직접 접촉해서 영입할 능력이 없던 대부분의 초창기 국내 구단의 실정상 장훈 소개 → KBO의 배정이 당시 재일교포 선수들의 일반적인 영입 방법이었다.
[9]
히로시마 카프 2군 포수이던
김무종도 같이 입단했는데, 사실 이 둘은 1982 시즌 한국 프로야구 순위상
롯데 자이언츠에 배정되었어야 했으나 82년 해태의 선수난이 워낙 심각해 해태 타이거즈에 배정되었다. 롯데에는 최동원의 입단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점 또한 재일교포 선수 배정에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10]
허를 찌르듯 투구간격을 짧게 하며 던지는 인터벌에, 적응하지 못한 타자들이 헛방망이질을 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속구와 변화구도 레퍼토리를 다양하게 가져갔다.
[11]
1983년 한국시리즈 시상식에서 주동식, 김무종, 장명부는 일본에서의 차별과 고생 등이 떠올라 같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12]
주동식은 뒷날 "5승 거두고 보너스 3백만원은 나로서도 낯간지러운 요구였지만 구단이 하도 짜게 굴어서 한번 질러나 본 것" 이라고 털어놓았다.
[13]
사실 3백만원은 보너스 형태로 주는 것이라 동결이나 다름없었다(...).
[14]
이후 김성한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국내 선수와 재일교포 선수 간의 문화나 입장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있고 아마 말이 안 통하니까 아주 짧은 언어로 소통하다보니 오해가 생길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15]
실제로 1986년 해태가 야심차게 영입을 준비하여 입단 직전까지 갔던
김성길을 뜯어말려 계약을 무산시킨 바 있다. 결국 김성길은 이듬해인 1987년 라이벌 팀
삼성 라이온즈에 입단했다.
[16]
1994~1995년 해태에서 뛰었으며 포지션은 1루수였다.
[17]
주동식의 부친인 고 주광희씨는
민단 부단장까지 지낸 사람으로 생전 민족의식이 강하여 외아들인 주동식은 부친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한다.
[18]
김성한은 택시를 타고 돌아왔다고 한다.
김준환과
김일권, 장진범, 송일섭은 뛰어서 왔고 송유석은 '스타 선수들은 손만 들면 팬들이 차에다 태워주는데 본인처럼 인상이 강하고 무명인 선수들은 운전자가 태워줬다가 행여나 해코지 당할까봐 태워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경운기를 타고 돌아왔다'고 재밌게 일화를 이야기 했다.
[19]
버스에서 강제로 내리라고 할 때 이상함을 직감한 김종모가 미리 돈을 챙겼고 그 덕분에 음료수를 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