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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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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단 기본 정보 쌍방울 쌍방울 레이더스 쌍방울 레이더스 2군
구단 역사 정보 구단 역사 역대 시즌 | 1996년 플레이오프 1997년 준플레이오프 역대 감독 역대 주장 사건 사고
구단 세부 정보 선수단 등번호 유니폼
기타 쌍방울 홈 17연승의 비밀 쌍방울 레이더스/1997년/8월/23일
경기장 관련 정보 전주 야구장(홈구장) 월명 야구장(제2 홈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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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PKPuIYF.png
<colbgcolor=#ffc81e><colcolor=#000000> 쌍방울 레이더스
SBW Raiders
창단 1990년 3월 31일([age(1990-03-31)]주년)
해체 2000년 1월 7일([age(2000-01-07)]주년)[1]
법인명 ㈜쌍방울레이더스
상장 유무 비상장 기업
기업 규모 중견 기업
모기업 쌍방울
연고지 전라북도[2]
홈구장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 (10,000명)
월명 야구장 (12,000명)[3]
마스코트 파일:external/s20.postimg.org/Bangwool_i.png
방울이
워드 마크 파일:쌍방울 레이더스 워드마크.svg
해체 당시의 구단 사무국 (1999년)
구단주 이의철[4]
대표이사 박효수
단장 유은수
감독 김준환[5]
포스트 시즌 진출 (2회)
플레이오프 1996년
준플레이오프 1997년
프랜차이즈 팀 기록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ffc81e><colcolor=#000> 최고 승률 0.573
1997년 126경기 71승 2무 53패
최저 승률 0.224
1999년 132경기 28승 7무 97패
최다 승 71승
1997년 126경기 71승 2무 53패
최다 패 97패
1999년 132경기 28승 7무 97패
최다 관중 265,918명
1996년[6]
최소 관중 49,956명[7]
1999년[8]
}}}}}}}}} ||
1. 개요2. 역사3. 쌍방울의 유산
3.1. 주요 기록3.2. 연고지3.3. 선수
4. 선수단
4.1. 선수단 목록4.2. 등번호4.3. 프랜차이즈4.4. 2군4.5. 주요 선수4.6. 최후의 선수단4.7. 외국인 선수4.8. 기타 선수
5. 유니폼6. 마스코트7. 역대 성적
7.1. 역대 포스트 시즌 상대 전적
8. 사건 사고9. 여담

[clearfix]

1. 개요

"내가 소싯적에 쌍방울이란 팀이 있었는데 말야..."
"정말 그런 팀이 있었어요?! 설마 팀 이름을 그렇게...?"
최훈, 프로야구 카툰 추억은 쌍방울 방울...’편
1991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프로야구에 참가한 대한민국의 프로 야구단. 프로야구 원년 6구단 이후에 창단한 두 번째 신생 구단으로 8구단 시대를 열었다. 홈구장은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이었으며 제2 홈구장 군산시 사정동에 있는 월명 야구장이었다. 구단의 상징색은 노란색.

연고지 전북특별자치도. 구단이 존재할 당시만 하더라도 KBO 리그의 연고지 운영 방식은 광역 연고제였다. 특정 도시로 연고지를 국한하는 '도시 연고제'로 변경한 것은 쌍방울이 해체된 후인 2000년부터다. 따라서 홈구장이 전주시에 있기는 했어도 엄밀히 따지면 전주시만의 구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북 연고 구단인데도 홈경기가 열렸던 전주시 군산시, 이들 지역과 연담화된 익산시 등 3개 도시 이외 지역에서는 공기 취급 받았다. 그나마 부안군, 김제시 전북특별자치도 북부권은 군산 시리즈 때문에 나름 팬들이 몰리기라도 했지만[9] 전북 남부권인 고창군, 정읍시, 남원시 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지인 광주광역시에 가까운 지역일수록 영향력이 약했다. 더구나 전북 동부는 더더욱 영향력이 약했다.

어쨌든 전주 시민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빠르게 쇠락하면서 손 쓸 새 없이 해체했다. 또한 역대 KBO 리그 참가 구단 중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진출 경험도 없이 해체된 비운의 구단이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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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쌍방울의 유산

3.1. 주요 기록

3.2. 연고지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고 지역이었던 전북특별자치도 지역은 쌍방울이 창단할 당시에는 거의 연고 공백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프로야구 원년부터 쌍방울이 참가하기 전인 1989년까지 호남지역 연고는 해태 타이거즈에 할당되어 있었고 전주에서도 해태 홈 경기가 분산 개최됐지만 엄연히 해태의 핵심 본거지는 광주광역시였고 전북특별자치도는 사실상 비어있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그 빈틈을 쌍방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쌍방울이 있었다면 KIA 타이거즈와의 호남 시리즈가 확고하게 자리잡아 리그의 흥행 요소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다.

쌍방울 레이더스 말년 때는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의 시설 노후화 문제로 군산시 월명 야구장에서 경기가 자주 열렸다. 그러던 것이 2000년부터는 월명 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한 경기도 열리지 않았다가 2001년부터 2013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군산 경기가 다시 열렸다. 하지만 이후 2014년부터 기아의 홈구장이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로 바뀌면서 군산 경기는 중지되며, 군산상고와 전주고 선수들을 대상으로 1차 지명권을 갖게 된 NC 다이노스가 군산 홈경기를 유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1차 지명권 행사와 제2홈구장 경기는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기에 조용히 접었다.

쌍방울의 해체는 전북지역 아마야구에도 타격을 주었다. 군산상일고와 전주고 모두 타 지역으로 전학하는 선수들이 속출하며[16] 야구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군산상일고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낫지만 전주고는 아예 중학교 선수들이 전주고 야구부로 입학을 기피한 나머지 한동안 선수 부족으로 선수권 대회나 고교 리그에 참가조차 못할 정도로 심각한 흑역사를 보내야만 했다. 2010년대 들어 새로운 아마야구 팀들이 속속 창단하고 있지만 전북 지역은 정읍시와 고창군, 그것도 읍면 지역에 속한 학교에서만 창단했을 뿐[17] 정작 전주시, 군산시, 익산시에는 단 한 팀도 창단 소식이 없다.[18]

3.3. 선수

전주시민들에게 남겨진 추억이나 좋은 기록이든 나쁜 기록이든 범접하기 어려운 기록들도 눈여겨 볼 만하지만, 쌍방울이 야구계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역시 선수들일 것이다. 비록 팀은 해체되었지만 돌격대에서 발굴(혹은 부활)한 선수들은 이적한 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일부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KBO 리그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19]

2011년 기준, 쌍방울 출신 선수는 김원형, 박경완, 오상민, 이진영 이렇게 4명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2011 시즌 초에 오상민은 도박 관련 사고로 방출되어 사실상 선수 생활이 끝났고, 2011년 시즌을 끝으로 김원형은 은퇴했다.

2013년 10월 22일 박경완이 은퇴를 선언하고 2014년 4월 5일 한화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하면서 마지막 쌍방울 출신 선수는 이진영이 되었다. 군산상고 졸업하고 1999년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이진영은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마지막 신인 선수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 이진영만 계약했고, 당시 모기업에서 계약금으로 줄 돈도 부족하여 김성근 당시 감독이 일부 보조했다고 한다. 2018년 정규시즌이 끝난 뒤 10월 19일 이진영의 은퇴가 공식 기사화 돼 쌍방울에서 1년이라도 뛰었던 선수는 전원 추억 속으로 떠났다.

굳이 쌍방울에 지명되거나 연습생 시절을 거치고 현역으로 있는 선수를 찾자면 이대수(SK 연습생)가 있었는데, 2018년 정규시즌 종료 시점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따라서 유일하게 박정권(2000 지명, SK) 한 명만이 남아있었다. 박정권은 쌍방울의 지명은 받았지만 바로 동국대학교로 진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쌍방울의 지명권을 가져간 SK에 입단하게 되었다.[20]

결국 2019년을 끝으로 박정권도 은퇴하면서 이제 쌍방울 출신 현역 선수는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선수단

4.1. 선수단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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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등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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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프랜차이즈

이름 등번호 포지션 소속년도
김기태 10 내야수 1991~1998
조규제 18 투수 1991~1998
김원형 16 투수 1991~1999
박경완 28 포수 1991~1997
김기덕 30 투수 1991~1999
최태원 7 내야수 1993~1999
김현욱 46 투수 1995~1998
김광림 33 외야수 1994~1997, 1999
김호 5 내야수 1990~1999
성영재 17 투수 1993~1999
조원우 36 외야수 1994~1999
심성보 35 외야수 1995~1999
박성기 31 투수 1991~1998
박진석 11 투수 1991~1999
김성근 91 감독 1996~1999

4.4. 2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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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주요 선수

파일:attachment/쌍방울 레이더스/SBWRaiders2.jpg
불암갑이 그린 리즈시절 쌍방울의 스타 선수들

4.6. 최후의 선수단


얼핏 보기엔 괜찮은 멤버 같지만 송구홍, 김성래, 박정현 등 과거의 스타플레이어들은 이미 선수생활의 황혼기, 심성보는 당뇨병 투병, 조원우는 부상, 이진영은 고졸 신인이었으며 김원형 장종훈의 타구를 얼굴에 맞은 후 이때까지 재기 못했다.

4.7. 외국인 선수

외국인 선수 도입 첫해인 1998년은 자금난으로 외국인 선수를 선발하지 못했다. 아래 2명은 모두 1999 시즌에 뛰었던 선수들이다.

4.8. 기타 선수

5. 유니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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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스코트

파일:선수단과 함께 등장하는 방울이.gif
마스코트는 방울이였다.
파일:external/www.1101.com/ball.jpg
방울이는 1980년부터 1991년까지[31]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공식 마스코트였던 "배트에 탄 소년(バットに乗った少年)"의 표절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았다.[32] 사실 야구공 머리의 인간형 마스코트는 1960년대부터 미스터 멧이나 미스터 레드 같은 사례가 메이저리그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요미우리 마스코트 역시 완전한 오리지널 창작 캐릭터라고는 할 수 없다.

아무튼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과거 마스코트가 총출동한 2022년 kbo 40주년 기념 올스타전에서도 대놓고 표절인 삼미와 더불어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33]
파일:VRGvINx.jpg
구단 해체 이후 마스코트 방울이 인형탈은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 버려져 있다. 이 사진은 2006년 3월 26일, 어느 야빠가 전주구장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하여 촬영한 사진이다. 언뜻 보면 진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괜히 소름끼치기도 하다. 이 사진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3집 앨범커버에 사용되었는데, 해당 포스팅에는 이미 고인이 된 달빛요정의 사진 사용 문의 댓글이 가장 먼저 달려 있어 더욱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쌍방울의 선수단을 이어받은 SK 와이번스가 창단 되고 21년 후, 야구단이 신세계로 넘어간 이후 마스코트 또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7. 역대 성적

­ 우승
­ 준우승
­ 포스트 시즌 진출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
드 = 드림리그, 매 = 매직리그
* = 공동 순위
연도 정규 리그 순위 최종 순위 구단명 경기수 승률
1991 *6위 / 8팀 *6위 쌍방울 레이더스 126 52 3 71 0.425
1992 8위 / 8팀 8위 126 41 1 84 0.329
1993 7위 / 8팀 7위 126 43 5 78 0.361
1994 8위 / 8팀 8위 126 47 5 74 0.393
1995 8위 / 8팀 8위 126 45 3 78 0.369
1996 2위 / 8팀 3위 126 70 2 54 0.563
1997 3위 / 8팀 3위 126 71 2 53 0.571
1998 6위 / 8팀 6위 126 58 2 66 0.468
1999 매4위 / 4팀 8위 132 28 7 97 0.224
KBO 리그 통산 9시즌 1140 455 30 655 0.410

7.1. 역대 포스트 시즌 상대 전적

상대 구단 개별 경기 전적 시리즈 전적
현대 유니콘스 96 PO : 2승 3패
PO 1패
삼성 라이온즈 97 준PO : 1승 2패
준PO 1패
<rowcolor=black> 총합 3승 5패 2패

8.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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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담



[1] 법인 청산일은 2002년 12월 31일. [2] 現 전북특별자치도 [3] 제2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쌍방울 해체 이후에는 KIA 타이거즈의 제2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2014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개장 후에는 KIA 경기가 열리고 있지 않다. [4] 창단 당시 구단주였던 이봉녕 쌍방울 창업주의 아들이다. 다만 1990~1998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이용일 쌍방울그룹 부회장이 구단주 대행을 맡았다. [5] 1999년 올스타전 이후 김성근 감독의 해임으로 감독 대행을 맡아 시즌을 마무리했다. 2000 시즌 감독으로 내정됐으나 구단의 해체 후 SK 와이번스 수석 코치가 되어 한 시즌을 보내고 해임 당했다. [6] 경기당 평균 4,221명 [7] 코로나19로 제한적 입장할 수 있던 시즌을 제외하고 KBO 역사상 가장 적은 연간 관중 수 [8] 경기당 평균 757명 [9] 그래도 전북 지역의 시장 수요 대부분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 전북 인구가 200만 명선에 턱걸이하던 1990년대 중반 당시 도내 인구의 70%에 육박하는 약 140만 명이 전주-완주, 익산, 군산, 김제 등 전북 북서부에 거주했다. 물론 지금도 전북 인구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살고 있다. [10] 한술 더 떠서 1992년에는 140피홈런, 1999년에는 187피홈런으로 한 시즌 최다 피홈런 기록도 갈아치운 전력이 있다. 홈런공장 이 기록은 다음해에 이 팀을 대신하여 창단된 SK가 195개란 다시 나오기 힘들 기록으로 경신했다. [11] 2002년에 롯데가 타이기록을 세웠다. [12] 쌍방울이 치른 1999년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홈 4연전 중 (사실상) 세 번째 경기이자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경기(상세한 내용은 다음 각주에 후술). 이날 쌍방울은 2-3으로 패했는데 이 패배로 1995년 이상훈 이후 4년 만에 정민태단일시즌 선발투수 20승 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코로나19로 인한 무관중 경기를 제외하고 KBO 리그 역사상 한 경기 100명 이하의 관중이 들어온 적은 총 네 번이다. [13] 쌍방울은 1999년 10월 8일 전주구장에서 LG와 경기를 치렀고 이날 7:5로 승리를 거뒀는데, 이 경기는 원래 10월 6일에 치렀어야 할 더블헤더 2차전이었다. 10월 6일 대낮에 열린 1차전 개최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저녁 시간대에 편성된 2차전이 시작되자마자 전주구장의 낡은 조명탑이 고장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경기를 일단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처리하고, LG가 다음 날인 10월 7일 잠실 롯데전이 예정되어있어서 일단 그 경기를 먼저 끝내고 다음 날인 10월 8일 다시 전주로 돌아와 6일 경기를 재개한 것이다. 그래서 공식 기록으로는 17연패 이후 6일 DH 2차전에서 1승을 거두며 연패를 끊고, 7일 마지막 경기인 현대전을 패배하며 시즌을 마무리한 것으로 남았다. [14] 재밌는 점은 이 기록이 원정팀들이 묵었던 전주 코아호텔의 귀신 목격담과도 관련있다는 것이다. 쌍방울 홈 17연승의 비밀 문서 참조. 당시 쌍방울을 맡았던 김성근 감독은 SK의 감독을 맡던 2009년 시즌 막판과 2010년 시즌 초에도 22연승 기록을 달성한 적이 있다. [15] 이 해에 쌍방울 불펜의 핵심이던 김현욱구원승으로만 20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 [16]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KBO 리그 선수 중에서 전북에서 태어났지만 타 지역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와 타 지역 연고팀의 지명 선수로 입단한 사례가 꽤 있는데 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점 내지는 높은 학년이던 시절 쌍방울이 해체되고 도시 연고제 전환으로 광주 연고팀으로 한정된 해태의 우선지명도 어려워지면서 서울 등 수도권 학교로 전학을 간 이들이 많다. 대표적 사례가 군산 태생의 오지환과 전주 태생의 강지광 등이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참조. [17] 정읍이평중학교, 정읍인상고, 고창영선고 등 3개교가 야구부 창단을 했지만 전북특별자치도교육청과의 갈등으로 고창영선고는 2019년을 끝으로 해체되었다가 2023년부터 다시 운영을 재개할 예정이었으나 진전이 없다. [18] 특히 익산시는 초중고팀이 아예 없다. [19] 하지만 쌍방울 선수 출신 지도자들은 현대야구에 역행하는 행보와 쌍방울 시절 구시대적 사고로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서 우승을 선물했지만 말년에 악평을 받은 김기태. 심지어 박경완도 SK 감독 대행 시절 구단에서 장기적으로 지도자감으로 믿고 키워줬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야구에 역행하는 투수관리 및 혹사로 비판을 받았으며, 윤재국도 김성근 사단에서 영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비단 지도자 뿐만 아니라 프런트에서도 고형욱 송구홍이 부실한 선수 영입 등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나마 김원형이 투수코치 시절의 평가가 무난했고 감독으로서 2022년 한국시리즈를 우승시켰으나 여러 문제점이 도마 위에 오르다 2023년 포스트시즌 탈락의 책임을 물어 경질되는 등 끝이 좋지 못했다. [20] 참고로 당시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은 말년을 쌍방울에서 보냈던 한대화. [21] 은퇴 후 경기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부임했으며 곽연수 감독의 퇴임 후 감독으로 승진했다. 현재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22] 통산 최다승(70승), 최다패(73패), 최다이닝, 최다완투, 최다완봉, 최다 탈삼진 등등 여러 기록보유. [23] 2군 코치 시절 육성 쪽에서는 괜찮은 평을 들었으나 1군 투수 코치를 맡은 뒤에는 투수 교체 타이밍 쪽에서는 평가가 나쁜 편이다. 1군 투수코치 김원형의 경우 롯데, 두산 모두 1년차에는 괜찮으나 2년차에는 투수들이 망가져서 나쁜 평을 받았으며, 2021 시즌은 한 팀을 이끄는 감독의 포지션이 되었으니 책임이 막중하다. [24] 만들어진 기록에는 상을 줄 수 없다는 기자들 사이의 불문율에 의한 것이었다.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에 대해서 기자들은 기록은 영원해도 상은 영원히 없다라고 맞불을 놓았다. [25] 이후 2년간 다소 폼이 떨어지긴 했지만 초창기 벌어들인 승수 덕택에 1996년까지는 팀 내 유일 통산 50승 이상 투수였다. 이후 김원형이 50승 돌파와 함께 꾸준한 활약으로 팀내 선발투수 관련 모든 기록 1위로 올라간다. [26] 2001년 조웅천과 함께 당시 신생팀이었던 SK의 전력 보강 목적으로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으나 2003 시즌을 앞두고 FA 박경완의 보상 선수로 현대 유니콘스에 돌아와 그해 우승 반지를 하나 더 끼고 KIA로 이적했다. [27] 기록 정정으로 1014경기에서 1009경기로 수정. 대주자로만 출장한 경기가 있었기 때문. [28] 2위는 OB 베어스에서 뛰었던 김형석의 622경기, 현역 중 1위는 500+ 경기를 연속 출전한 황재균. [29] 사이드암 투수 자체가 우완일 경우 우타자에 강하기 때문에 기용되는데, 좌완 사이드 암은 우타자에게 약하다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30] 선수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의 불펜포수로 취직했다가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불펜포수로 재직 중이다. [31] 1992년부터는 '자빗' 이라는 토끼를 사용한다. [32] 1980년대 교진군의 마스코트로 유명. [33] 실제 삼미 슈퍼스타즈는 구단 로고에 슈퍼맨을 그대로 갖다 썼으며 여성 마스코트도 원더우먼이라 오늘날이면 DC 코믹스에 고소먹어도 할 말이 없다... [34] 축구 응원가로 잘 알려진 Ole Ole Ole 노래의 음정이다. [35] 이는 동시에 현대의 인적 승계팀인 히어로즈와의 마찰을 일으켰다. 2008년 SK 와이번스 태평양데이 행사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벌이면서 이 논란은 더욱 커졌다. [36] 인천시민들은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 이전과 새로 생긴 SK 와이번스의 정착 때문에 혼란스러워서 옛 쌍방울 팬들까지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타 팀 팬들이야 자신들과 무관한 옛 구단의 팬들과 친할 이유가 더욱 없었고... [37] 한편 현대 유니콘스 해체 이후 재창단한 히어로즈 역시 처음에는 현대 색을 지우고 선을 그으려고 했었다. 이에 맞춰 현대 출신 고액 연봉 베테랑들을 트레이드하려고 시도했고, 현대 시절 마지막 감독인 김시진이 아닌 이광환을 감독으로 선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레이드는 실패했고, 또한 이광환 체제는 안정적이지 않았으며, 이러한 현대의 외면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구 현대빠들을 흡수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으며 처참한 인기와 관중 동원에 그친다. 여기에 SK와의 정통성 경쟁 문제도 있었던 탓에 2009년부터는 전략을 바꿔 자신들의 전신격 팀인 현대 유니콘스 과거 인천 연고 구단 시절의 팬들을 끌어안으려 애쓰게 된다. [38] 여기서도 오랜 기간 동안 광주 전남 팬들에게 경멸과 왕따를 당하며 살아야 했다. "니네 팀은 어디갔냐?", "걍 야구팬 관두지 그랬냐? 우린 니네들 필요 없어."라고 조롱을 듣는 건 흔한 일. 이마저도 쌍방울이 해태의 멀쩡한 연고지를 빼앗아 간 것이라 쌍방울 건에 대해선 타이거즈 팬들이 피해자였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특히 군산은 해태의 모체와 같은 곳인데 그곳을 가져가버렸으니...) [39] 유년 시절 쌍방울을 응원했던 침착맨이 현재까지도 쌍방울 선수단을 인수한 SSG 팬으로 남아있는 것이 대표 사례다. [40] 게임 내 닉네임도 '복실이돌격대'이다. [41] 그 대신 한화는 동군으로 나온다. [42] 이들 중 조규제와 성영재는 잠시나마 타이거즈 유니폼을 입고 선수로 뛰었다. [43] 현재는 구단이 KIA 타이거즈로 바뀌면서 구타, 똥군기 등 구시대적 문화들은 사라지고 있다. 해태 타이거즈에서부터 구타를 없앤 인물이 바로 이종범. [44] 오상민이 받고 싶은게 아니라 트레이너가 해준 것 [45] 결국엔 태평양 돌핀스를 470억에 인수했다. [46] 다만 쌍방울 역사상 최고의 시즌이던 1996 시즌에는 팀간 상대전적에서 해태를 앞섰다. [47] 1991년 6위, 1993년 7위, 1996년 3위, 1997년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