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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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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골든 글로브 시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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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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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니스트)
구스 반 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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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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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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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지 스콜리모프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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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만 폴란스키
Roman Polanski
파일:Roman-Polanski.jpg
본명 Rajmund Roman Thierry Polański /
Rajmund Roman Liebling
라이문트 로만 티에리 폴란스키 / 라이문트 로만 리에블링[1]
출생 1933년 8월 18일 ([age(1933-08-18)]세)
프랑스 파리
국적
[[폴란드|]][[틀:국기|]][[틀:국기|]] |
[[프랑스|]][[틀:국기|]][[틀:국기|]] ( 복수국적)
직업 감독, 프로듀서, 작가, 배우
활동 1954년 ~
학력 우치국립영화학교
신장 165cm
종교 무종교 ( 무신론)[2]
배우자 바바라 라스 (1959 결혼~1962 이혼)
샤론 테이트 (1968 결혼~1969 사별)
에마뉘엘 세니에르 (1989 결혼~현재)
자녀 폴 리처드 폴란스키 (1969)[3]
모르간 폴란스키 (1993 ~ )
엘비스 폴란스키 (1998 ~ )

1. 개요2. 일생
2.1.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어린시절2.2. 폴란스키 가 살인사건2.3. 아동 성범죄 사건2.4. 논쟁
3. 작품 세계
3.1. 편차가 심한 감독
4. 필모그래피5. 기타6. 외부 링크

[clearfix]

1. 개요

폴란드[4], 프랑스 영화감독으로, 기념비적인 명작 ' 차이나타운', ' 악마의 씨', ' 피아니스트' 등으로 유명하다.

유년 시절에는 부모와 홀로코스트 피해를 겪고 장년기에는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이 모두 몰살당한 테이트 - 라비앙카 살인사건의 간접적인 피해자이자 유족이 되었으며, 노년기에는 과거 저질렀던 상습적 아동 성범죄 사건이 대대적으로 알려지는 등 세계적인 명성을 가진 영화 감독들 중에서 가장 어두운 삶을 산 감독 중 하나로 일컬어진다.

2. 일생

2.1.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어린시절

본래 폴란드계 유대인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으며 3년 뒤인 1936년에 부모의 고국인 폴란드로 이주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3년 뒤인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폴란스키 일가는 크라쿠프 게토에 갇히게 된다. 불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는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로 이송되어 살해되었고, 아버지 또한 오스트리아 린츠 근교에 위치한 마우타우젠-구젠 강제수용소[5]에 끌려가 노역을 당하게 된다. 끌려가기 직전, 폴란스키의 아버지는 영문도 모른 채 일제검거 현장을 기웃거리던 그에게 도망치라고 속삭였고, 폴란스키는 10살 되던 해인 1943년에 게토를 탈출해 아버지와 아는 사이였던 한 폴란드 가톨릭 교회의 보호를 받았다. 천만다행히도 그의 아버지는 살아남았고, 전후 아들과 재회하였다.
파일:결혼식에서의 로만 폴란스키.webp
1968년 1월 결혼식에서의 로만 폴란스키, 샤론 테이트

샤론 테이트와 결혼식 영상

#

폴란드에서 데뷔작 물속의 칼을 연출했으나, 폴란스키에 의하면 폴란드 공산 정부가 그 영화를 혹평했고 특히 엔딩을 싫어했다고 한다.[6] 하지만 아카데미 시상식, 베를린 영화제등에 노미네이트 되는등 인정받게 되어서 기뻤다고. 이후 프랑스로 넘어가 제라르 브라슈를 만난 후 막다른 골목의 각본을 적은 후 영국에서 영화 제작자 진 구토스키[7]를 만나 혐오를 찍고 막다른 골목의 연출을 맡았다.[8]

이후 감독, 배우 등을 하면서 착실히 커리어를 쌓았다. 폴란드 학파 시절 데뷔한 감독 중 국제적으로 성공한 감독으로, 폴란드 영화계가 자랑하는 재와 다이아몬드[9], 철의 사나이[10] 안제이 바이다 베로니카의 이중생활[11], 세 가지 색: 블루[12] 크쥐시토프 키에슬로프스키와 더불어 폴란드 거장 감독이다. 빼어난 편집 능력으로 가히 젊은 거장의 풍모를 보일 정도가 되었고, 영화 배우 아내 샤론 테이트 박쥐성의 무도회 촬영 때 만나 행복한 가정생활을 꾸리고 있었다.

2.2. 폴란스키 가 살인사건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테이트 - 라비앙카 살인사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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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하십시오.
그러나 1969년,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 버린 최악의 사건이 발생한다.

2.3. 아동 성범죄 사건

현재까지 알려진 피해자만 12명에 달하며, 이 중 한 명을 제외하면 전부 미성년자이며 성폭행 할 때 술과 약물도 이용했다.

1977년에 배우 잭 니콜슨의 집에서[13] 당시 13살이었던 사만다 가이머에게 계획적으로 술과 마약을 먹이고 성폭행 한 혐의로 체포된 후 미국에서 재판을 받았다. 사법거래를 통해 유죄를 인정한 그는 본래 집행유예로 풀려날 것이라 생각했으나, 폴란스키의 성범죄 사건을 담당했던 로렌스 J. 리튼밴드 판사[14]는 사법거래를 기각하고 그에게 징역 50년을 선고할 것을 요청한다. 그러자 폴란스키는 1978년 1월 31일 미국에서 도망쳐 런던을 거쳐 프랑스로 도피한다.[15] 미국 정부는 프랑스 정부에 폴란스키의 송환을 요구했지만 폴란스키가 프랑스 시민권자인 데다가 프랑스 형법상 자국민이 외국에서 저지른 범죄를 처벌할 권한이 없어서 송환 요청을 거부했다.

미국에서 아동 성범죄는 아주 엄격하게 다루며, 폴란스키 감독은 이후 미국에서 도피하여 쭈욱 유럽에서 활동을 이어갔다.[16] 피아니스트》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을 때도 참석할 수 없었던 건, 귀국하자마자 아동 성범죄로 잡혀서 교도소로 직행할게 뻔하기 때문이었다.[17] 그래도 많은 영화계 인물들의 비호 속에서도 멀쩡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다가 결국 2009년 9월 스위스에서 공로상을 받으러 가다가 체포되어 32년간의 도피생활이 끝나고 가택연금 중이었으나,[18] 2010년 7월에 스위스 법원이 가택연금을 해제했다. 맨슨은 이 사실을 알고 폴란스키가 아동 성범죄를 저질렀으니 자신이 저지른 폴란스키 가 살인 사건이 옳은게 아니냐는 망언을 퍼부우며 헛소리를 했었다.[19] 이 말로 결국 차이나타운의 감독이 등장인물인 노아 크로스와 다를 바가 없게 되었다.

여담으로 폴란스키가 유럽으로 도피하기 전 당시 10대였던 데미 무어가 그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고 한다. # 참고로 이때 그의 나이 44세. 79년 감독을 했던 영화 테스의 주연 나스타샤 킨스키와는 아예 연인 관계였는데, 참고로 당시 나스타샤의 나이는 18세로 미성년자였고, 폴란스키는 46세. [20] 강력 성범죄자인 데다가 미성년과의 이런 관계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은 더욱 좋지 않았다.

2017년 7월 6일, 피해자였던 사만다 가이머가 사건 종결을 탄원했다. 기사

하지만 8월에는 자신을 '로빈 M'이라고 밝힌 한 여성이 1973년 16세 때 로만 폴란스키의 성범죄 희생자가 됐다고 고소했고 이 외에 로만 폴란스키를 고소한 한 명의 여성이 더 있다. 게다가 10월에는 독일 배우 레나테 랑어(Renate Langer)가 10대 시절에 로만 폴란스키에게 성폭행 당했다고 그를 고소한다. 뉴욕타임스의 2017년 10월 3일(현지시간) 보도에 따르면 랑어는 그가 15세 때인 1972년 2월 스위스 그슈타트에 위치한 폴란스키 감독 자택에서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또 한 번 그 같은 일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이로써 로만 폴란스키는 네 번째 고발을 당한다. 스위스 경찰은 최근 랑어를 만났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인터뷰에서 랑어는 당시 부모님이 걱정할까봐 친구나 가족에게 털어놓지 않았고 수년 후 애인에게만 이 일을 고백했다고 밝혔으며 그의 아버지는 지난 여름, 어머니는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2019년 11월에도 프랑스 국적의 발렌틴 모니에라는 여성이 일간 르 파리지앵과의 인터뷰에서 자신도 10대 때 폴란스키 감독에게 성폭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

1973년 당시 LA에 있던 그의 자택에서 당시 16세였던 자신에게 술을 먹이고 성폭행했다고 피해자의 주장 건은 합의했다. #

이로써 폴란스키는 벼랑 끝에 내몰리게 되었고, 영화계에서의 그의 위상도 거의 평가 받지 못하는 처참한 수준이 되었다.[21]

2.4. 논쟁

폴란드와 프랑스의 정부가 로만 폴란스키를 적극적으로 보호한 점이나[22], 중립국인 스위스의 영화제에 참석한 폴란스키를 미국 경찰이 체포한 점 때문에 2차적인 논란이 생겼다.

성범죄 건으로 서구권의 영화계에서도 큰 논란이 생겨, 그의 불행한 인생에 대한 동정이나 외교적인 문제 때문에 선처를 부탁한 이들( 마틴 스코세이지, 닐 조던, 이자벨 위페르, 틸다 스윈튼, 제러미 아이언스, 모니카 벨루치, 웨스 앤더슨, 데이비드 린치, 페드로 알모도바르, 알레한드로 곤살레스 이냐리투, 우디 앨런, 하비 와인스틴, 대런 애러노프스키, 왕가위, 밀란 쿤데라 등)과 #[23], 불행한 인생과는 별개로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는 이들( 셀마 헤이엑[24], 케빈 스미스, 그렉 그룬버그[25], 제시 아이젠버그, 제이미 폭스, 존 레전드, 지미 키멜, 아놀드 슈워제네거[26], 닐 게이먼, 빌 마허, 존 스튜어트, 크리스 락, 제이미 리 커티스, 슬라보예 지젝, 패트리샤 아퀘트, 아그네츠카 홀란드[27] 등) 으로 의견이 나뉘었다.

그리고 2017년에 터진 하비 와인스틴 성범죄 파문에 로만 폴란스키를 옹호하던 할리우드 연예인들이 나서서 비난하면서 이 문제로도 논란이 되고 있다. 하비 와인스틴이 저지른 성추행에는 그리도 비난하면서 로만 폴란스키는 왜 옹호하냐는 것. 할리우드가 미투 운동을 이용하면서 폴란스키의 성범죄에 모르는 척하고 다른 성범죄에 비난하는 것에 할리우드가 비판받고 있다. 결국 할리우드에서 이 여파인지 2018년 5월, 빌 코스비와 함께 미국 영화 예술 과학 아카데미(AMPAS)로부터 제명당했다. 그것 때문에 불만인지 폴란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미투 운동을 집단 히스테리라며 비난했다. # 2019년 4월에 아카데미 회원 회복 소송을 진행하였으나 # 이후 패소하였다. #

이후 배우나 감독중에 그의 구명운동에 참여했던것이나 그와의 영화 작업을 후회한다고 고백한 경우도 꽤 있다. 나탈리 포트만, 케이트 윈슬렛이 대표적이다.

2020년 2월 28일에 열린 프랑스 세자르상에서 로만 폴란스키에게 영화 장교와 스파이로 감독상을 수여해 큰 논란이 일었다. 감독 입후보 시기때부터 논란이 되어 프랑스의 문화부 장관이 세자르상 위원회에 공개적으로 폴란스키에게 상을 주지 말것을 명령했으며 압박을 느낀 세자르상 위원진이 총사퇴하는 일까지 있었으나 기어코 그에게 수여한 것이다. 폴란스키에게 시상되는 순간 배우 아델 에넬[28]은 "프랑스의 수치!", "페도필리아 브라보" 라며 소리를 지르곤 자리를 박차고 나갔으며, 다수의 영화인들이 자리를 떠났다. 영상 백스테이지 폴란스키는 페미니스트가 무섭다는 이유로 세자르에 참석하지 않았다. 시상식 직후 프랑스에서는 폴란스키 수상을 반대하는 격한 시위가 일어났고, 한때 일부 시위대가 시상식장 진입을 시도해 경찰과 최루탄을 쏘며 막는 등 충돌도 빚어졌다. 폴란스키는 성범죄로 인해 미국 아카데미에서도 이미 제명당한 상태인데, 프랑스는 자국 영화인이라는 이유로 계속 감싸려다가 세자르상의 권위를 심각하게 실추시켰다는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3. 작품 세계

로만 폴란스키의 영화들은 대체로 무겁고 암울하며 비극적인 분위기로 관객을 압도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특히 감독이 살아오면서 겪어온 온갖 어두운 사건들이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공포/스릴러 영화계에서는 매우 중요한 감독으로 유명하다. 폴란스키의 영화들은 심리묘사를 잘해 관객들한테 어두운 분위기를 선사한다.

폴란스키 본인이 자기 영화에 자주 카메오로 등장하기도 한다. 테넌트에선 아예 주연을 맡지만.

데뷔작부터가 그리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으나 아내가 될 샤론 테이트를 만났을 때에는 의외로 코믹하면서도 풍자적이고 해학적인 분위기가 묻어나는 《 박쥐성의 무도회》와 같은 영화도 감독하는 등 나름대로 밝은 분위기의 영화를 만들 것 같았다.[29]

그러나 찰스 맨슨의 추종자들에게 아내와 아기가 살해당하는 참변을 겪고 난 후에 그 암울한 작품 세계는 아예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특히 살인 사건 직후에 만들었던 《 맥베스》를 보면 폴란스키의 정신이 어디까지 붕괴되었는가 실감할 수 있다.[30] 폴란스키가 만든 《맥베스》는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작품 중 처음으로 X등급을 받았다. 비슷하게 잔인한 영화인 《 타이투스》보다 20년도 훨씬 전의 일이었다.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아 명작으로 인정받는 피아니스트도 일단 실존 인물의 일대기와 역사 그대로를 다룬만큼 그에 비하면 훨씬 담담한 편이긴 하나, 이쪽도 폴란스키 스스로가 겪어보기까지 한 홀로코스트를 다루는만큼 어두운 건 똑같아서 여러모로 관객을 괴롭힌다.


다만 마냥 어두운 분위기로 일관하는 게 아니라 시니컬한 블랙 유머가 따라붙는다. 차이나타운의 어두운 엔딩이나 《테넌트》같은 영화에서 드러난다.

사건의 영향 때문인지 본인의 욕망을 투영했는지 몰라도 차이나타운, 테스, 비터 문 등에서는 강간 같은 성범죄 묘사가 자주 나온다. 사건 전에 나온 악마의 씨에도 나온다. 다만 이건 원작의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

3.1. 편차가 심한 감독

영화를 잘 만들 때는 한없이 잘 찍는 명감독이지만 반대로 못 만들 때는 작품성과 재미가 한없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특이한 감독이기도 하다.

특히 《 대해적[31], 《 더 팰리스》는 대표적으로 두고두고 욕먹고 있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영화이며, 로저 이버트 같은 유명 평론가가 별점을 1개 줄 정도로 형편없는 영화다.[32] 나인스 게이트》, 《 올리버 트위스트》는 호불호가 갈릴지언정 대해적 만큼 욕먹는 작품까지는 아니다. 《 나인스 게이트》를 제외하면 《 대해적》은 대자본을 들여 나름대로 블록버스터 혹은 코미디를 의도한 작품이어서, 이 방면에서 약하다는 걸 여지없이 드러냈다.

4. 필모그래피

로만 폴란스키 감독 장편 연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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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물속의 칼 로고.png 파일:폴란스키 혐오 로고.png 파일:막다른 골목 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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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비터문 로고.png 파일:로만 폴란스키의 진실 로고.png 파일:나인스 게이트 로고.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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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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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외부 링크


[1] 이 이름으로도 이 문서로 들어올 수 있다. [2]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무신론자이다. [3] 테이트가 임신하고 있던 아들로 테이트가 찰스 맨슨 일당에게 살해당해 뱃속에서 사망했다. [4] 흔히들 러시아인의 성으로 생각하는 -스키는 폴란드인의 성이다. [5] "계도 불가능한 정치범"들로 분류된 사람들이 끌려온 3등급 노동수용소이다. 1938년 빈과 린츠에 화강암 석재를 공급하고자 한 비너-그라벤 사의 요구로 세워졌다. 이 회사는 SS(나치 친위대) 소유의 DEST(독일 토목 및 석재 유한공사) 소속이었으며 대표인 오스발트 폴 또한 후에 친위대 대장까지 진급하는 열성 친위대원이었다. 이를 위해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일부 인원이 재배치되어 건설하였다. 마우타우젠 수용소와 구젠 1, 2, 3 수용소를 중심으로 하여 오스트리아 전역의 101개의 보조수용소(Außenlager)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거대한 콤비나트를 형성하고 있었다. 절멸수용소들과 같은 가스실은 없었으나 노동을 통한 절멸(Vernichtung durch Arbeit)을 추구하던 곳인 만큼 수감자들은 이곳에 부속된 벽돌 공장, 군수공장에서 끔찍한 중노동과 학대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고 DEST 소속 회사들뿐만 아니라 바이엘, 마우저, 하인켈, 메서슈미트 등 독일 유수의 대기업들 및 수많은 오스트리아 향토 기업들은 이곳의 이러한 참상에도 아랑곳 않고 저렴한 노예 노동력을 착취했다. 그 과정에서 총 12~32만 명의 수감자들이 이곳에서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45년 소련군이 오스트리아로 몰려오자 나치는 수감자들을 동원해 방어선을 건설함과 동시에 남은 수감자들을 지하공장에 집어넣고 붕괴시켜 매몰시키려 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학살 명령은 수행되지 않았고, 이후 SS가 물러가고 그 자리를 오합지졸인 빈 출신 국민돌격대원들이 채우면서 수용소의 실질적인 주도권은 수감자들에게로 옮겨갔다. 이들은 자체적으로 무장하여 인근 독일군 패잔병들의 공격을 격퇴하다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전후 이곳은 1970년 박물관으로 재개장되었고, 현재까지도 끔찍한 나치 정권의 범죄를 증언하는 역사적 장으로서 남아 있다. [6] 그것 때문에 좌절하고 프랑스로 여행을 잠시 떠났다고 한다. [7] 폴란스키의 피아니스트의 제작자 중 한 명이며, 이쪽도 폴란스키처럼 홀로코스트 피해자다. [8] 폴란스키는 막다른 골목을 자신의 영화들 중에서 가장 자랑스러워 한다고 한다. [9] 칸 영화제 비평가협회상 [10]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11] 칸 영화제 비평가협회상,여우주연상 [12]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수상. 세 가지 색: 레드,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등이 대표작이다. [13] 그때 니콜슨은 한 때 연인이었던 안젤리카 휴스턴과 함께 휴가를 간 상태였다. 나중에 둘이 있을 때 돌아왔는데, 휴스턴이 의심하고 문을 두들기자 폴란스키가 촬영 중이라고 거짓말 했다고 한다. [14] 판사 경력이 60년에 달하며, 엘비스 프레슬리의 이혼, 말론 브란도의 자녀 양육권 소송, 캐리 그랜트의 친자 확인 소송 등 유명한 사건을 담당했었다. [15] 판사는 1993년에 사망하였다. [16] 테넌트를 찍은 이후에 폴란스키 성폭행 사건이 일어났다. 때문에 차이나타운 이후 폴란스키 영화는 언어만 영어고 프랑스에서 할리우드 배우들을 불러다가 찍었다. 아예 프랑스어로 찍은 영화도 있다. 김기덕이 2018년 미투 운동의 가해자로 지목된 뒤 라트비아에 가서 영주권을 얻으려 했던 건(하지만 그 곳에서 코로나19 감염으로 인해 사망한다.) 이런 폴란스키의 도피 행각처럼 대륙권 유럽 국가들에서는 성범죄에 대한 처벌이나 사회적 인식이 영미권이나 동아시아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으로 보인다. [17] 그래서 해리슨 포드가 5개월 뒤 도빌 미국 영화제에서 폴란스키에게 트로피를 주었다고 한다. [18] 이것 때문에 만들고 있었던 영화 <유령 작가>를 가택연금 중에 완성해야 했다. [19] 당연하지만 상대가 아동 성범죄자라고 한들 사법 체계가 아닌 일개 개인이 심판한다는 것 자체가 사적제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일이거니와 말 자체도 사실이랑 앞 뒤가 안 맞는게 애초에 저 인간은 당시 쳐들어가는 집에 누가 살았는지도 몰랐다. 거기다가 살해당한 피해자는 로만 본인이 아니라 애먼 와이프인 샤론 테이트였다. 만약 저 논리대로라면 맨슨 본인이 교도소 내에서 또는 경찰에 체포되기 전 누군가에게 보복 살인을 당해도 그 가해자는 죄가 없게 된다. 괜히 보복 폭행이 일반 폭행보다 죄가 무겁고 자경단 활동과 사적제재를 범죄로 처벌하는 것이 아니다. [20] 그녀의 주장으로는 둘 사이에 성관계는 없었다고 하지만 어쨌든 미성년자인게 문제였다. [21] 이미 2002년 폴란스키에게 감독상을 줬던 아카데미는 그를 제명한 상태이지만, 유럽의 영화제에서는 여전히 비판 가운데에서도 폴란스키에게 수상을 하고 있다. [22]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큰 피해를 입은 국가들이라 나치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폴란스키에게 동정여론이 형성되어 있다. [23] 선처를 부탁한 전체 명단이다. 아시아 아르젠토, 나탈리 포트만, 자비에 돌란은 선처를 요구한 것에 후회한다고 밝혔다. 엠마 톰슨도 원래 목록에 적혀 있었지만, 자신이 빼달라고 요청했다. [24] 폴란스키 관련 인터뷰를 받았을 때 그를 비난한 적이 있다. [25] J.J. 에이브럼스의 절친이며, 그가 제작한 미션 임파서블 3, 스타트렉 비욘드, 스타워즈: 깨어난 포스에 까메오로 참여했다. [26] 슈워제네거는 주지사 시절 때 그의 작품을 존경한다고 발언했지만, 그의 사건에 대해선 다른 범죄자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발언한 적이 있다. 그래서 폴란스키에게 특별대우는 없다고 발언했다. [27] 폴란드 출신의 여성 영화감독. 세 가지 색 연작의 각본가로 유명하며, 유로파 유로파, 비밀의 화원, 미스터 존스의 감독으로 유명하며, 이쪽은 폴란스키뿐만 아니라 폴란스키를 옹호한 영화계 또한 비판했다. [28] 아델 역시 12세 때 출연한 작품의 감독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실제 아동 성폭력의 피해자이며, 본인도 2019년에 자신의 성추행 피해를 폭로한 적 있어서 더더욱 이번 일에 분노할 수 밖에 없다. [29] 다만 비슷한 시기에 만든 《 악마의 씨》는 내용이 꽤 무겁고 무섭다. [30] 1971년 개봉 당시 영화의 핏빛 묘사가 너무 지나치다는 평론가들의 평에 로만 폴란스키는 "당신들은 작년 8월의 내 집을 보지 못했다. 나는 '유혈이 낭자하다'는 것의 의미를 안다."고 대답했다. [31] 1985년작으로, 《컷스로트 아일랜드》와 더불어 영화사를 말아먹을 수준으로 쫄딱 망한 해적 영화로 유명하다. 미국에 못 돌아오다보니 프랑스와 튀니지 합작 투자로 만들었는데, 4천만 달러를 들여서 미국에서 164만 달러를 벌어들였기에 제작자인 타라크 벤 암마르는 이후 영화 제작을 포기했을 지경이다. 두 영화 때문에 캐리비안의 해적 이전에는 해적 영화를 만들면 망한다는 인식이 생겼다. [32] 이버트는 올리버 트위스트에 3.5점을 주고 나인스 게이트에 2점을 줬다. [33] 2002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아카데미 시상식 감독상 수상. 폴란스키의 영화 중 가장 대중적으로 히트한 영화이자 평단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34] 독일계 성씨 Seigner여서 국내에서는 '자이그너'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으나 프랑스에서 태어난 프랑스인이라 세니에르가 맞다. [35] 세니에르는 1966년생으로 알려져 있다. [36] 이 무렵에 김길태 살인 사건, 김수철 사건 등 연이은 아동 성폭력으로 온 나라가 들썩였다. [37] 유일한 흑인이라 대놓고 닉 퓨리를 패러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