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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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어 영화상 수상작 | |||||||||||||||||||||||||||||||||||||||||||||||||||||||||||||||||||||||||||||||||||||||||||||||||||||||||||||||||||||||||||||||||||||||||||||||||||||||||||||||||||||||||||||||||||||||||||||||||||||||||||||||||||||||||||||||||||||||||||||||||||||||||||||||||||||||||||||||||||||||||||||||||||||||||||||||||||||||||||||||||||||||||||||||||||||||||||||||||||||||||||||||||||||||||||||||||||||||||||||||||||||||||||||||||||||||||||||||||||||||||||||||||||||||||||||||||||||||||||||||||||||||||||||||||||||||||||||||||||||||||||||||||||||||||||||||||||||||||||||||||||||||||||||||||||||||||||||||||||
제23회 ( 195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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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 195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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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 19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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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클레망 (말라파가의 성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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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 라쇼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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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클레망 ( 금지된 장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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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7회 ( 1975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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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8회 ( 197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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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9회 ( 1977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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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데리코 펠리니 (아마코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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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데르수 우잘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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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크 아노 (색깔 속의 흑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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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베니스 영화제 | ||||
황금사자상 | ||||
제14회 ( 195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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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 195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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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회 ( 1952년) |
앙드레 카야트 (재판은 끝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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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 라쇼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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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 클레망 ( 금지된 장난) |
역대 베니스 영화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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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 1953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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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회 ( 1954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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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9회 ( 1955년) |
페데리코 펠리니 (비텔로니) 존 휴스턴 (물랑 루즈) 알렉산드르 푸쉬코 (사드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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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아 카잔 ( 워터프론트) 미조구치 겐지 ( 산쇼다유) 구로사와 아키라 ( 7인의 사무라이) 페데리코 펠리니 ( 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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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여자 친구들) 로버트 올드리치 (빅 나이프) 볼프강 슈타우터 (Ciske de Rat) 샘슨 삼소노프 (Poprigunya) |
역대 칸 영화제 | ||||
황금종려상 | ||||
제32회 ( 197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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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3회 ( 19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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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 1981년) |
폴커 슐뢴도르프 ( 양철북)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 지옥의 묵시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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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 카게무샤) 밥 포시 (재즈는 나의 인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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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제이 바이다 (철의 인간) |
역대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 ||||
감독상 | ||||
제33회 ( 198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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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4회 ( 198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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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회 ( 1982년) |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 지옥의 묵시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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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 카게무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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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말 (아틀란틱 시티) |
역대 베를린 국제 영화제 | ||||
은곰상 : 감독상 | ||||
제8회 ( 195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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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회 ( 1959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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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 ( 196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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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 숨은 요새의 세 악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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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뤽 고다르 ( 네 멋대로 해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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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수 각본상 | ||||
제23회 (200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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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4회 (20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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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5회 (2002년) |
이와마 요시키, 후리하타 야스오 ( 철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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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사와 아키라 (비 그친 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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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도 칸쿠로 ( GO) |
구로사와 아키라
[ruby(黒澤, ruby=くろさわ)] [ruby(明, ruby=あきら)]|Akira Kurosaw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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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10년 3월 23일 | ||
일본 제국 도쿄도 시나가와구 | |||
사망 | 1998년 9월 6일 (향년 88세) | ||
도쿄도 세타가야구 세이조 | |||
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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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훈 |
문화공로자 (1976년 수상) 문화훈장 (1985년 수상) 도쿄도 명예도민 (1996년 수상) 국민영예상 (1998년 사후 추서) 종3위 (1998년 사후 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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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영화감독, 각본가. 프로듀서 | ||
링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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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colbgcolor=#fff,#1f2023>182cm, B형 | |
학력 |
케이카 중학교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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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기간 | 1943년 – 1998년 | ||
묘소 | 가마쿠라시 엔요인(安養院) | ||
부모 |
아버지 구로사와 이사무 어머니 구로사와 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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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야구치 요코[1] (1921년 8월 27일 – 1985년 2월 1일; 향년 63세) (1945년 – 1985년,[2] 사별; 1남 1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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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아들 구로사와 히사오 (1945~) 딸 구로사와 가즈코 (195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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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
손자 가토 다카유키 (1977~) 손녀 구로사와 유 (198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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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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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영화계에 큰 족적을 남겼고, 잉마르 베리만,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로버트 올트먼, 우디 앨런 등 전세계의 수많은 거장들로부터 존경받았다.[3] 특히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조지 루카스,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쳐서 오늘날 헐리우드 영화의 문법에 직접적인 기여를 했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종종 일본 영화계의 천황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다.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가 모두 내포되어 있는데, 그만큼 독보적인 위상을 지녔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독불장군 같은 제작 스타일을 비꼬는 것이기도 했다.
아시안위크와 CNN에 의해 20세기에 아시아의 발전에 가장 크게 기여한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2. 생애
2.1. 출발과 전성기
1910년 일본 도쿄 근교에서 태어났다. 본래는 화가를 지망하여 한때 화가로 활동하기도 했으나,[4] 26세에 화가 생활을 접고[5] 영화사 도호(東宝)의 전신인 P.C.L 영화제작소에 입사하여 야마모토 가지로(山本嘉次郞) 감독 밑에서 조감독으로 영화 감독의 경력을 시작했다.젊은 시절의 구로사와 아키라 |
1943년 흑백 영화 《 스가타 산시로》를 통해 영화 감독에 데뷔하였다.[6] 이후 주로 인간적인 휴머니즘을 다룬 《 가장 아름다운 자》( 1944년), 《 우리 청춘 후회 없다》( 1946년) 등을 제작하며 도호의 간판 감독으로서 활약했다. 그 후 도호가 공산당 계열의 노조로 인해 노동쟁의가 일어나자 도호에서 퇴사하고 나루세 미키오 등과 함께 '영화예술협회'를 설립, 다이에이 등 다른 영화사로 넘어가 영화 제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이에이와 함께 1950년에 만든 영화 《 라쇼몽》이 195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를 수상하였고, 구로사와 아키라는 일약 세계적인 감독으로 급부상했다.
이 시기,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 대해서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자 그의 페르소나로 불리는 배우 미후네 토시로와 만났다. 야마모토 가지로의 영화에 오디션을 보러왔다가 떨어진 미후네를 보고서 소위 필이 꽂힌 구로사와가 야마모토를 적극 설득해서 캐스팅했으며 1948년 자신의 영화 《 주정뱅이 천사》에 미후네를 캐스팅하여 스타의 반열로 밀어 올렸고 이후 구로사와와 미후네는 찰떡 콤비로 활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54년, 미후네가 주연으로 활약하였으며 구로사와에게 불멸의 명성을 가져다준 영화 《 7인의 사무라이》가 개봉. 이 영화는 베니스 영화제 은사자상을 수상했으며 단순히 한 영화로만 끝난 게 아니라 이에 지대한 영향을 받은 할리우드 감독들에 의해 이후에도 그 아우라를 드리운 작품이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스티븐 스필버그, 조지 루카스 등의 이후 작품에서 그런 모습이 드러났으며, 자세한 사항은 항목 참조.
1957년에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맥베스를 일본풍으로 바꿔 만든 《 거미집의 성》을 만들어 호평을 받았고 1958년에는 《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을 만들어 흥행 성공. 이 성공 이후 아예 독립 프로덕션인 구로사와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1961년 《 요짐보》, 1962년 《 천국과 지옥》 등을 만들며 대감독의 명성을 쌓아 나갔다. 다만 이 독립 프로덕션은 사실 구로사와 본인의 의도가 아니라 그에게서 단물만 빼먹고 싶었던 도호의 계산에서 나온 것으로,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제작 예산이 당초 예상을 훨씬 웃돌자 도호는 구로사와에게 제작비 초과에 따른 리스크를 떠넘기기 위해 독립 프로덕션 설립을 유도한 것. 결국 1965년 개봉한 《 붉은 수염》이 촬영 기간과 예산의 대대적인 초과로 인한 불협화음과 갈등을 빚어냈고 원래부터 계산적일 뿐이었던 양자의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2.2. 굴곡과 재부상
이 무렵 할리우드에서 감독직 제안이 들어오자 구로사와 아키라는 미련 없이 미국으로 건너가 《 폭주기관차》의 감독을 맡아 작품 제작에 들어갔다. 그러나 원래 각본을 맘에 들어하지 않은 구로사와가 각본을 뜯어고친 데다가 흑백 35mm 촬영을 원한 미국 프로듀서와 컬러 65mm 촬영을 원한 구로사와와의 갈등으로 결국 영화 제작이 무산되었다.[7] 1968년에는 미일 합작으로 진주만 폭격을 다룬 영화 《 도라 도라 도라》의 총감독을 맡았지만 미국 측 제작사인 20세기 폭스, 그리고 일본 측 제작사인 토에이와 촬영 일정 등의 문제로 대립했고 결국 감독직에서 강판되고 말았다.[8] 이때의 정신적 타격에다 다른 여러 가지 문제들이 겹쳐 1970년에 자살 미수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일본 영화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구로사와처럼 이미 대감독으로서 명성이 자자한 감독 역시 5년에 한 편이나 영화를 내놓을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여건이 열악해졌다. 이에 그는 1975년 소련으로 건너가 소련과 일본 합작 영화 《 데르수 우잘라(Дерсу Узала)》의 제작을 주도하고 감독을 맡았고, 이 영화로 1975년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금 게오르기상(대상)과 1976년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하면서 다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9] 이후 구로사와는 해외 자본을 끌어와 영화를 만드는 합작 영화 제작 방식으로 예술성에 치중한 여러 작품들을 만드는데 1980년 조지 루카스와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이 프로듀서로 참여해 구로사와에게 제작비를 조달해 준 대작 《 카게무샤》(당시 일본 영화 사상 최대의 제작비인 600만 달러가 투입)가 26억 엔의 수익을 올리고 제30회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며 완벽히 재기에 성공, 화려한 귀환을 알렸다.[10]
2.3. 말년
1990년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수상 후 조지 루카스 감독(좌측),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우측)과 함께 |
1990년 05월 10일 칸 영화제에서. 가장 왼쪽의 사나이가 지금 호호 할아버지가 된 마틴 스코세이지인데 보다시피 이때는 꽤 젊었다. |
노년의 구로사와 |
80대에 접어든 1990년대에도 《 8월의 광시곡》[11], 《 마다다요》[12]를 연출하는 등, 활발히 활동했지만, 차기작 '바다는 보고 있었다'와 '비 그친 후'의 각본을 집필하던 중 교토의 여관에서 골절에 따른 부상으로 요양 생활에 전념하다 뇌졸중으로 인해 1998년 9월 6일 8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제71회 아카데미 시상식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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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제작 스타일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처음에는 저예산 영화를 주로 만들었는데 일례로 초기의 걸작인《 라쇼몽》도 10명 가량의 배우들이 제한된 공간에서 촬영했다. 하지만 점차 그의 영화 제작에 드는 예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우선 그는 아래에도 서술하는 기행으로 유명한 만큼, 굉장히 까다로운 제작 방식을 고수했다. 일본어 위키백과의 내용에 따르면 1.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연출로 유명하고, 2. 몇 개월에 걸쳐 진행하는 배우들의 연기 리허설은 물론, 3. 스태프들과 배우들을 대기시키면서 연출 의도에 따른 적절한 날씨를 며칠씩 기다리기도 했으며, 4. 카메라가 찍히지 않는 곳까지도 세심하게 디테일에 신경 썼던 건 기본. 거기다 말을 빌리지 않고 몇십 마리를 통째로 구입해 장기간 다시 조교하고 사용했다든가 촬영지의 민가가 방해된다는 이유로 예산으로 사들인 뒤 철거를 강요하기도 했다. 여러 개의 카메라를 동시에 돌려 촬영한다는 멀티캠 수법까지도 사용했다.
이들 모두 돈이 무수하게 들어가는 방식으로《 7인의 사무라이》 이후 구로사와가 만든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의 제작비는 예산 초과는 기본이었고 때문에 일본 내에서 제작비를 조달하기 어렵게 되자 해외 자본을 끌어들이는 데 적극 나서게 되었다. 참고로 이에 관련된 일화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그의 손으로 직접 고지라 영화를 만들고자 평생 스폰서를 구했지만 실패했다.[13] 그 발단은 어떤 배우가 구로사와에게 "감독님도 한번 고지라 같은 거 찍어보시면 어때요?"라고 농담 삼아 묻자 구로사와는 "한번 만들어볼까?"라고 대답한 것으로 시작했는데, 나중에 도호의 촬영소장이 그 이야기를 듣고 "구로사와 씨가 진지하게 고지라를 만들면 도호가 망할지도 모른단 말야!"라며 다시는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주의를 줬다고 한다.(고지라는 도호가 판권을 가진 작품이다.)
한편 영화 제작의 신기술 도입에 적극적이긴 했지만 특수촬영(특촬)에 대해서는 심드렁했다. 상술한 도호의 '고지라'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긴 했지만 도호의 장기였던 미니어처 세트 촬영에 대해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후기 작품인 《란》과 《꿈》에서는 미니어처 세트 촬영과 특촬 기술을 도입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게, 이 때는 바로 그 고지라의 감독인 혼다 이시로가 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거장이긴 했지만《 카게무샤》가 대박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본 영화계에서는 천덕꾸러기 신세였다. 그가 제작하는 영화의 제작비와 규모가 너무 커서 일본 영화계에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 카게무샤의 경우도 결국 미국에 건너가 조지 루카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도움으로 20세기 폭스사의 제작비 지원을 받아 완성되었다고 한다. 그 덕분에 한국에서 일본 영화 개봉이 금지되던 시절 "미국 자본으로 만들어진 영화니까 미국 영화"라는 논리로 개봉이 시도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당시에는 무산되었고 훗날 일본 영화 개방 후 국내 정식 개봉된 두 번째 일본 영화( 1998년 12월)가 되었다. 원래 첫 개봉작으로 예정되었으나, 프린트를 다시 뜨는 작업에 시간이 걸려 버려, 기타노 다케시 감독의 ' HANA-BI'에 최초 개봉의 영광(?)을 넘겨주었다. 인지도는 카게무샤 쪽이 더 높지만 정작 감독 본인은 후속작인《 란》을 위한 서막 정도로 생각했다고. 실제로 두 영화는 인간성에 대한 불신이나 허무주의 같은 테마를 공유하고 있다. 란 쪽의 테이스트가 너무 지독해서 문제지만…[14]
4. 평가
구로사와 아키라가 창조한 서사 방식과 영화적 표현 양식들은 일본을 넘어서 영미권과 유럽, 소련 영화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 7인의 사무라이>는 여러 명의 히어로가 하나의 목표를 위해 뭉친다는 서사 구조를 처음으로 선보였고, < 라쇼몽>은 이전까지 과거 회상을 위해서만 사용되던 플래시백을 인물들이 각자의 관점에서 풀어놓는 주관적인 이야기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한 최초의 작품이며, < 요짐보>는 자신의 이득을 좇아 행동하는 인물이 정의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스토리를 통해 '안티 히어로'라는 캐릭터 유형을 탄생'시켰고, <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은 주요 캐릭터가 아닌 두 농부의 시점에서 스토리를 시작한 뒤 주요 캐릭터의 이야기로 서서히 전환하는 서사 기법을 제시했다.구로사와 영화 특유의 회화적인 미학성 역시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서양화가로서의 이력 때문인지 구로사와의 영화는 화면의 운동감, 색채감, 구조 측면에서 매우 뛰어나다. 이러한 이유로 로버트 올트먼은 "구로사와 영화의 움직임과 구도는 나에게 클래식 음악의 베토벤"이라 말한 바 있고, 기타노 다케시는 "구로사와의 영화에서 아무 장면이나 정지시켜 놓아도 그 자체로 완벽한 사진이 된다"고 극찬했다.
구로사와의 영화들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주제는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에 기반을 둔 휴머니즘이다. < 라쇼몽>은 인간성에 대한 회의를 지속적으로 논하다가 결말에 이르러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성을 포기할 수 없음을 설득력 있게 주장한다. < 살다>에 나오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말단 공무원이나, < 카게무샤>에 나오는 타인을 흉내내다가 자신의 본질을 상실해 버린 카게무샤 같은 캐릭터들도 휴머니즘에 대한 다양한 탐구를 보여준다.
4.1. 일본 밖에서
70~80년대에 할리우드의 두 번째 전성기를 이끌었다고 평가받은 미국의 영화감독들은 젊은 시절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를 보면서 공부했던 세대다. 뉴욕 대학교 영화과는 감독의 이름을 딴 감독론 과목을 단 네 개만 개설해 놓았는데, 여기에 앨프리드 히치콕, 존 포드, 루이스 부뉴엘과 더불어 구로사와도 포함됐다.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 에피소드 4에서 <숨은 요새의 세 악인>의 서사 기법을 따라한 것을 비롯해, 이 시기의 할리우드에서는 구로사와의 영향을 받은 작품들이 무수히 쏟아졌다. 윌리엄 프리드킨은 < 프렌치 커넥션>의 전철 장면을 만들 때 구로사와의 < 천국과 지옥>에 나오는 기차 시퀀스를 참고했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 미지와의 조우>는 < 거미집의 성>의 한 장면을 따라했고, < 쉰들러 리스트>의 컬러 파트는 <천국과 지옥>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 라이언 일병 구하기>의 오마하 해변 전투 장면에서 절단된 자신의 팔을 들고 있는 남자의 샷은 < 란>의 전투 신에서 따온 것이다. 피터 잭슨은 < 반지의 제왕: 두 개의 탑>에서 전투 중에 활을 당기는 장면을 <7인의 사무라이>에 나오는 한 장면에서 따왔다. 조스 웨던이 감독한 어벤져스도 < 7인의 사무라이>를 비롯해 많은 영화를 참고했다고 한다.[15] 세르조 레오네는 구로사와의 < 요짐보>를 무단으로 표절해 데뷔작인 < 황야의 무법자>를 만들었다. 결국 말썽 끝에 흥행 수입의 15%를 구로사와에게 주고 리메이크임을 승인받았다고 한다. 혹은 구로사와가 동의한 적은 없다는 주장도 있다.
다만 미국에서 인정받은 구로사와 아키라도 생전에 아카데미상 작품상 후보에는 오르지 못했고, < 란>이 감독상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은 하지 못했다. 아카데미상은 20세기까지는 외국어 영화에 작품상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자국 영화에 경도(傾倒)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
4.2. 일본 안에서
세계적인 명성에 비해서 일본 내에서는 영화 업계와 마찰을 빚으면서 순탄치 않은 경력을 이어갔다. 베니스 영화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 라쇼몽》은 생소한 플롯 때문에 제작 승인 과정도 험난했고, 제작 중에도 제작사인 다이에이의 대표 나가타 마사이치한데 제작비를 아끼라는 압력을 받았다. 참고로 《라쇼몽》은 등장인물이 10명도 안 되고, 배경도 나생문 세트를 제외하면 거의 숲 속 장면만 등장하는 저예산이었다. 영화가 완성된 뒤에도 나가타는 시사회 도중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렇게 구로사와를 구박하던 나가타는 정작 라쇼몽이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유명세를 타자, 제작자인 자신의 공로를 자랑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 《 7인의 사무라이》 역시 제작비 문제로 일부 수정을 가할 수밖에 없어서 구로사와 본인은 매우 안타까워했다. 늘어지는 제작 일정과 눈덩이처럼 불어가는 제작비 때문에 영화사 사람들이 촬영 현장까지 찾아와 제동을 걸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구로사와 아키라가 서구 평론가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은 것에는 그들로서는 이국적인 일본적 요소의 영향이 크다는 일본 영화계의 평가도 있다. 1986년 BBC 인터뷰 일본의 저명한 영화 평론가 하스미 시게히코는 다른 일본 감독들의 영화와 비교해서 구로사와의 작품들이 진정한 일본인들의 삶의 모습을 표현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1990년에 한국의 월간 영화 잡지 로드쇼에서 게재된 인터뷰에서 "해외에서도 알아주는 감독님이신데 일본에서는 뭔가 어려운 점이 있었나요?" 라는 질문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해외에서만큼, 아니 그 절반이라도 일본에서도 인정했더라면 더욱 좋을 텐데 말이죠." 라고 대놓고 말할 만큼, 본인은 이런 대접을 불쾌해 했다.
다만 구로사와의 불만과 달리 실제로 그가 일본 국내에서 대접을 제대로 못 받았던 것은 아니다. 1976년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문화 공로자로 선정되었고, 1985년에는 영화 감독으로서는 최초로 문화훈장을 수상하였으며, 비록 사망한 이후에 받기는 했지만 국민영예상(1998년에 14호)을 수상하는 등, 일본에서도 거장으로서의 대우를 꾸준히 받은 영화감독이었다. 구로사와 아키라가 일본 영화 업계에서 기피당했던 것은, 영화 작가로서의 평가와는 별개로, 점점 불어나는 제작규모와 지나치게 긴 제작 일정, 그리고 원만하지 못했던 인간관계 때문이다.
구로사와는 독선적인 성격 탓에 오래 같이 작업한 스텝이나 배우들조차도 사적으로는 데면데면하거나 아예 결별하고 돌아서는 경우들이 적지 않았다. 구로사와와 9편이나 같이 작업한 각본가 기쿠시마 류조(菊島隆三)와도 대판 싸우고 갈라섰고, 데뷔 때부터 알게 되어 16편이나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던 미후네 토시로하고도 붉은 수염을 끝으로 말도 섞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구로사와의 저서인 『자서전 비슷한 것(蝦蟇の油 自伝のようなもの, 1984)』을 보면 소학교 시절부터 친구인 소설가 겸 각본가 우에쿠사 케이노스케(植草圭之助)와의 일화를 자주 언급하면서 종종 글 속에서 다정하게 애칭으로 부르고 있는데, 실은 이 우에쿠사와도 이 책을 쓴 후에 절교 당했다. 이 쯤 되면 구로사와가 60년대 후반부터 일본 영화계에서 기피당했던 것에는 본인의 탓도 있다고 봐야 한다. 구로사와 본인은 스스로 책에 쓴 것처럼 "남자들끼리는 원래 싸우고 다시 친해지게 마련"이라고 생각했다지만, 상대방도 그렇게 여겼는지는 모를 일이다.
4.3. 단평
5. 일화
5.1. 출연 배우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작품에는 대개 주성치 사단처럼 같은 배우가 계속 나왔다. 상술한 대로 그의 페르소나 관계의 인물로 불린 미후네 토시로(16작품)가 그 필두로 보통 미후네는 건달 깡패 떠돌이 사무라이 등 강자 역할을 맡으며 얼굴과 이름을 알렸다. 하지만 붉은 수염을 이후로 둘은 작품을 같이 하지 않게 된다. 그 후론 미후네 토시로와 나올 때 주로 조연으로 나온 나카다이 타츠야가 구로사와 아키라의 페르소나로 나온다. ( 카케무샤, 란)한편 가장 많은 작품에 출연한 배우는 《7인의 사무라이》와 《 살다》에서 명연을 펼친 시무라 타카시로 무려 21작품이며 그는 보통 스승, 지도자, 나약한 인간을 맡았다. 이외에는 《백치》,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와 《라쇼몽》의 모리 마사유키나 초중기 작품 모두에서 주요 조연을 맡은 지아키 미노루, 히다리 보쿠젠 등이 있다. 보다 자세한 사항은 참조.
오즈 야스지로의 페르소나로 유명한 류 치슈도 구로사와 작품에 조연으로 세 편 출연했다.
5.2. 기행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와 관련 기행은 거미집의 성 등 일본에서 활동할 적에도 유명했지만 할리우드 진출작인 《 도라 도라 도라》에서 극에 달했다.[16]- 연기 경험이 전무한 일본 최대 화학 회사 사장에게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 역을 맡기고, 마찬가지로 연기 경험이 없는 저명한 일본인 사업가 15명을 주요 배역에 캐스팅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는 자본가들에게 대가로 제작비를 투자받기 위해 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 모든 실내 장면에 대한 촬영은 오후 4시에서 자정 사이에만 해야 했다. 또한 모든 스태프들은 본 영화의 제목이 쓰여진 맞춤복과 해군모를 착용해야 하며, 배우들이 지나갈 때마다 인사해야 했다.
- 전함 내부에 칠한 흰색 색조가 마음에 안든다며 24시간 분량의 촬영물을 폐기하고, 전 스태프들에게 오후 동안 다시 색칠하라 지시했다고 한다.
- 또 한번은 슬레이트[17]를 치는 스태프의 머리를 말은 종이로 때렸고, 이를 말리는 조감독을 구타하고서 조감독에게 전 스태프의 머리를 때리라고 지시했다. 이에 조감독이 거부하자 그를 해고했고, 이에 경악한 영화사 관계자들이 찾아와 구로사와를 질타했다.
- 이렇게 스태프들과의 관계도 나빠지고, 영화사에서도 압박을 가하자 보디가드, 철모, 방탄 리무진을 요구했고, 실제로 얻어내서 타거나 대동하며 다녔다. 이에 더해 자신을 노리는 저격수가 있다고 생각해 차를 탈 때는 항상 시트 아래로 몸을 구부리며 다녔다. 이에 영화사 관계자들은 정신과 의사를 보내어 진정제 수십 알을 처방시켰다.
- 크리스마스 며칠 전, 새벽 2시에 프로덕션 코디네이터 스탠리 골드스미스를 호출해 전 스태프를 해고해 달라 요청했으나, 잘린 것은 구로사와였다. 언론에는 피로 누적으로 인해 강판되었다고 발표되었으며, 구로사와가 '도라 도라 도라'를 촬영한 지 23일째 되던 날이었다. 덤으로 구로사와의 23일에 걸친 촬영분 중 단 8분 만이 영화에 실렸다.
- 《 거미집의 성》의 마지막 씬 촬영을 할 때 실감 나는 연출을 위해 주연 배우 미후네 토시로에게 진짜로 화살을 쐈다. 그 탓에 미후네는 그 장면에서 정말 실감 나는 연기를 보여줄 수 있었다. 아래에 있는 죽음의 공포가 서린 표정을 주목하자(...).
사실 이 자체는 촬영상의 트릭으로, 사실 화살은 한참 옆에 날아가는 것인데 촬영 각도로 바로 옆에 맞는 것처럼 속인 것이고, 화살을 낚시줄로 고정해서 날아가는 방향을 정했기 때문에 미후네 토시로가 진짜로 화살에 맞을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래도 진짜 화살이 날아오는 상황인지라 미후네 토시로는 도저히 진정할 수 없었고 결국 '실감 나는 연기'를 해버렸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서 혼자서 술을 마시던 중에 촬영 시의 생각이 떠오르자 술김에 칼을 들고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자택에 찾아가서 차로 빙빙 돌면서 "구로사와 바보!"라고 소리쳤다는 증언이 있다. 당시 사건은 도호에서 유명한 전설로 남아있다고 한다. #
5.3. 《8월의 광시곡》 논란
《8월의 광시곡》(八月の狂詩曲 Rhapsody In August, 1991년)은 구로사와 감독의 작품 중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비평가들과 평화운동가들에게 혹평을 받은 유일한 작품이다. 덧붙여서 이 영화는 1991년 칸 영화제에 출품되었지만 그 어떤 상도 수상하지 못했다.[18] 이 영화의 줄거리는 나가사키의 피폭자 친척을 일본계 미국인( 리처드 기어 분)이 방문하여 미군의 잔인한 원폭 투하에 대해 죄책감을 느낀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일본인 피폭자들에 대해서는 홀로코스트 피해자처럼 묘사한 반면, 전쟁의 원인이나 일본군의 잔혹 행위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는 것. 때문에 이 영화만 보면 미국만 나쁜 놈이고 일제는 그런 미국을 용서해 주는 대인배로 착각할 수밖에 없다.이는 이 영화의 1년 전에 개봉한 전작 《 꿈》에서 나오는 한 에피소드에 2차 대전 당시 옥쇄를 명령하지만 부하들은 죄다 죽게 하고 홀로 살아남은 장교가 일본으로 돌아오던 길에 부하들의 원령이 나타나 절규하고 원망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 장교가 울면서 사죄하며 "미안하다! 전쟁을 일으킨 우리가 미쳤다."고 말하는 장면이 담겨 있었던 것과는 너무나 대비되어 한국 비평가와 관객들에게서 충격과 공포 수준으로까지 받아들여졌다. 본인 역시 이 영화에 대해서는 언급을 꺼려 이 엄청난 돌변에 당시 한국 영화 기자가 인터뷰에서 "《꿈》을 만들고 극우파에게 살해 협박이라도 받아서 이렇게 만들었나요?"라는 비꼬는 듯한 질문을 하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을 정도.[19]
다만 이 영화에 대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전쟁은 정부, 국가들 사이의 것으로 민중들과는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밝힌 바 있다. #
5.4. 황당한 청혼
1945년,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이 짙어지자 일본인들은 집단 자살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구로사와 아키라는 자신의 2번째 감독작 가장 아름다운 자(一番美しく)의 주연 배우인 여배우 야구치 요코에게 청혼했는데 그 청혼문이 실로 황당하기 그지없어 전설로 회자되고 있다."일본이 패전할 것 같다. 만일 일본 국민 전체가 집단 자살해야 한다면, 우리 역시 죽어야 해. 죽기 전에 결혼 생활이 어떤지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런데 놀랍게도 이 어이없는 편지가 효력을 발휘하여 두 사람은 결혼에 골인했고, 부부는 1985년 야구치 요코가 사망할 때까지 39년을 별 탈 없이 해로했다.
주변 증언에 따르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적극적인 대시로 결혼까지 골인했다고 하며, 부부 사이의 금슬은 매우 좋았다 한다. 야구치 요코는 결혼 후 배우로서는 은퇴했지만 대외적으로 구로사와 기요란 본명 대신 야구치 요코란 예명을 계속 사용했었다. 그녀는 남편이 영화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구로사와뿐만 아니라 그 밑의 직원들의 도시락까지 싸는 극진한 내조를 했다고 하며, 그래서 구로사와 아키라 주변인들이 대모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한다. 딸 구로사와 카즈코 증언에 따르면 아버지 구로사와 아키라가 유일하게 꼼짝 못 했던 사람이 어머니였다고.
구로사와가 외국에서 기념품으로 아내를 위해 옷을 사 왔는데 옷이 크다며 "영감은 나랑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아직 내 치수도 모르시오."라고 구박당한 적도 있다 한다.
5.5. 관동 대지진
1923년 일본 관동 지방에서 발생한 대지진은 구로사와 아키라의 집안에도 직격탄을 날렸다. 집은 무너져 내렸고, 혼란 중에 그가 살던 마을에도 조선인들이 범죄를 저지르고 다닌다는 루머가 돌아 집집마다 보초를 내기에 이르렀다.이에 구로사와의 형은 비웃음을 보내며 보초에 나가지 않으려 했기에, 어쩔 수 없이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죽도를 들고 보초로서 나갔는데, 엉뚱하게도 고양이 한 마리나 겨우 드나들 수 있는 하수관에 조선인들이 드나들 수 있다는 이유로 보초로 배치되었다.
하루는 어른들이 마을 우물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고, 우물에 조선인들이 독을 탔다며 그 증거로 흰색 분필로 쓴 수상한 기호를 지목했는데, 그것은 당시 13살이던 구로사와가 이전에 아무 의미 없이 끄적거린 낙서였다고 한다. 관련 기사
조선인들을 잡아 죽이기 위해 결성된 자경단은 수염을 기른 사람[20]을 무조건 조선인으로 지목하고 뒤쫓았는데, 구로사와의 아버지도 수염을 길렀기 때문에 일가족이 미친 자경단에게 포위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구로사와의 형은 무리를 비웃고 있었고, 어린 아키라는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을 때, 아버지가 그들을 에워싼 무리를 향해 '바보 자식들!' 이라고 호통치자 어리둥절한 자경단은 하나둘씩 사라졌다고 한다.
이 유년 시절 기억이 인간의 존재에 대해 생각[21]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5.6. 혼다 이시로와의 협업
잘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고지라의 아버지로 유명한 혼다 이시로 감독과 평생 절친이었다. 둘다 야마모토 카지로(山本嘉次郞) 감독의 문하생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해서 함께 조감독 생활을 했고, 나이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한 살 많지만, 영화사 입사 시기로는 혼다 이시로가 선배였다.감독 입봉은 구로사와 쪽이 빨랐는데[22], 그의 초기 걸작인 들개에 혼다가 조감독으로 참여했다. 주인공인 신참 형사( 미후네 토시로)가 범인을 찾아 전쟁으로 황폐화된 도쿄의 뒷골목을 탐문하는 장면들이 바로 혼다 이시로가 연출한 부분이다.
1970년대 말 카게무샤를 기획하면서 긴 슬럼프에서 재기하려던 구로사와는, 이 때 사실상 은퇴한 상태였던 혼다 이시로에게 도움을 청해서 다시 제작 일선에 끌어들인다. 혼다는 주로 군중 신이나 대규모 전투장면, 특수 촬영 등의 연출을 맡으면서, 한편으론 구로사와의 성질머리를 다독이고 현장 스텝과의 소통을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구로사와는 이후 란, 꿈, <8월의 광시곡>, 그리고 유작인 <마다다요>까지 5편 연속으로 혼다와 함께 작업했다. 크레딧에는 혼다가 연출보좌 등으로 표기되지만, 구로사와 자신은 스텝들에게 혼다를 자신과 동등한 공동감독으로 예우하게끔 했다고 한다.
상술된 대로 독선적이고 괴팍한 성격 탓에 인간관계가 삭막했던 구로사와 아키라지만, 혼다 이시로와는 죽을 때까지 친분을 유지했다. 도호에서 특활물 전문 감독으로 굴려지던 혼다였지만 구로사와는 그의 연출 역량을 인정하고, 카게무샤나 란 같은 대작을 찍으면서도 건강 문제로 촬영장에 나가지 못할 때는 혼다에게 현장의 전권을 넘길 만큼 감독으로서 신뢰했다.
생전에 구로사와의 생일에 여러 감독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린이용 특촬물만 만든다는 이유로 혼다가 따돌림 받는 모습이 보이자 구로사와가 "고지라는 미국 사전에도 올라가있다고"라고 일갈하면서 다른 감독들을 영알못 취급했다는 일화가 있다. 시간이 흘러 21세기에 들어서야 특촬물에 대한 편견이 걷히면서 혼다 이시로의 영화들이 재평가받기 시작한 것을 보면, 이런 면모도 구로사와의 거장으로서의 선견지명을 보여주는 셈이다.
6. 여담
- 참고로 이름의 청탁음을 확실히 구분한 표기는 쿠로사와 아키라지만 국립국어원 표준 표기법에 따라 구로사와로 표기하며 이는 당 문서에서 언급되는 그의 모든 작품에도 공통된다.[23]
- 1952년 라쇼몽[24]으로 #, 1976년 데르수 우잘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는데 #, 2번 다 불참했다. 대신 수상소감문을 다른 사람이 낭독했다. 2번 다 구로사와는 차기작 준비로 바빴다 한다.
- 고기를 무척 많이 먹는 식습관이 있었고 그 육식 체질에 기타노 다케시도 크게 감탄했다고 한다. 구로사와는 기타노에게 "식사는 밸런스가 중요해."라고 말했는데 이는 야채나 과일도 먹어야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돼지고기, 닭고기 등의 다양한 고기를 먹어야 된다는 의미였다고.(…) 고기를 자주 먹는 서양의 식사와는 달리 고기를 적게 먹는 일본의 식사 문화의 입장에서는 진보적인 발언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식성 때문인지 1910년대 출생 일본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182cm #의 엄청난 거구였다.[25] 본 문서에도 실린 아카데미 영화제 공로상 시상식에서 루카스, 스필버그와 나란히 서있는 사진을 보자면 그 덩치에 깜짝 놀라는 사람이 다수. 183cm인 존 포드 옆에서도 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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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포드 감독의 1958년작 Gideon of Scotland Yard 촬영장에서의 구로사와 아키라 아내 야구치 요코와 함께. |
- 술도 엄청나게 마신 애주가였다. 이에 관련된 일화로 이란의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일본에 방문해서 구로사와를 만났을 때 그가 웬일로 술을 안 마셔서 그 이유를 묻자 "더 마시고 싶었지만 주변에서 '더 이상은 안 돼요!' 라고 신호를 보낸 탓에 어쩔 수 없이 끊어야 했다."라고 말했다는 키아로스타미 감독의 회고도 있다. 젊었던 시절에는 워낙 말술을 마시는 탓에 미후네 토시로는 구로사와가 취한 듯 보이면 도망쳐 버리고 대신 다른 배우가 구로사와에게 붙들려 고생 좀 해야 했다는 이야기도 회자된다.(…)
- 미야자키 하야오를 《 루팡 3세 칼리오스트로의 성》을 통해 알고서 열렬한 팬이 되었다고 한다. 장녀 구로사와 가즈코의 말에 의하면 《 마녀 배달부 키키》를 보고 눈물까지 흘릴 정도로 감동했다고 하며, 미야자키의 작품들 중에서는《 이웃집 토토로》를 제일 좋아했다고.[26] 다만 《 반딧불이의 묘》를 미야자키의 작품으로 착각해 찬사가 담긴 편지를 보내는 바람에 미야자키가 일순 굳었다는 이야기도 있다.(…)[27] 한편, 일설에 의하면 '미야자키가 실사 영화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그가 없는 자리에서 한 적도 있다고 한다.[28]
- 대한민국의 거장 임권택 감독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영화를 재밌다면서 즐겨 보곤 했다고 한다. 각기 한일 양국 영화계에서 거장의 대우를 받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재미있는 사실이다. 1990년 월간 로드쇼에서 인터뷰를 했을 때에도 그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 임권택 3대 걸작'을 뽑을 정도였다고 한다. 만다라와 씨받이, 아벤고 공수군단이 바로 그것이다.
- 소련의 영화감독 안드레이 타르콥스키랑도 절친한 사이였다고 한다. 둘이 술을 마시면서 7인의 사무라이 주제가를 합창할 정도였다고.
- 서양권으로부터 인정받은 최초의 아시아인 영화감독답게 타임지 아시아판이 2006년에 창립 60주년 기념으로 선정한 60년간 아시아의 영웅 65명 리스트에 포함되었다.
- 구로사와 아키라의 대표작으로 일컬어지는 7인의 사무라이나 라쇼몽, 거미집의 성 등을 본다면 자막판을 추천한다. 일본인들도 제대로 대사를 알아듣기 힘들다는 평이 많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필름이 오랜 기간 열화되어 그렇다거나, 대사에 집중하도록 하는 의도적인 장치라는 설도 있지만 영화 개봉 당시에도 알아듣기 힘들었다고 한다. 깨끗하게 소리를 입힐 수 있는 후시 녹음을 택하지 않고, 일부러 현장감을 살리기 위해 동시 녹음을 고집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는데, 감독의 성격을 보았을 때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 일본 영화 최초로 극 중에 재즈를 삽입한 감독이다. 해당 장면은 1948년작 '주정뱅이 천사'에 나온다.
- 구로사와 아키라가 유년기 감상한 영화들 #
- 구로사와는 젊은 감독들에게 "고통스러워도 각본을 직접 써보라"란 말을 남겼다. #
- 2020년 PS4로 출시되는 오픈 월드 액션 어드벤처 게임 고스트 오브 쓰시마의 흑백 모드 플레이는 '구로사와 모드'란 이름이 붙여졌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 구로사와 프로덕션의 공식 허가를 받고 이 명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
- 세가타 산시로라는 캐릭터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데뷔작인 <스가타 산시로>를 패러디했다.
- 구로사와 아키라 영화들의 블루레이는 주로 해외에선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일본 내수에선 도호에서 발매되는데, 어째선지 도호판 블루레이는 2.35:1 스코프 화면비인 영화들이 전부 2.5:1 내외 정도로 화면 위아래가 잘려나가 있다는 문제가 있다.
7. 필모그래피
||<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81818><tablebgcolor=#181818>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장편 연출 작품
||제목 번역은 모두 국내 개봉명 혹은 수입명을 따른다. 다만 공동 감독을 맡았으나 후에 자신의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한 明日を創る人々(미국 개봉명 Those Who Make Tomorrow)의 경우 국내 번안 제목이 확인되지 않아 임의 번역으로 기재한다.
한국 제목 | 원 제목 | 개봉년도 |
스가타 산시로 | 姿三四郎 | 1943 |
가장 아름다운 자 | 一番美しく | 1944 |
속 스가타 산시로 | 續姿三四郎 | 1945 |
호랑이 꼬리를 밟은 사나이 | 虎の尾を踏む男達 | 1945 |
우리 청춘 후회 없다 | わが青春に悔なし | 1946 |
내일을 만드는 사람들 | 明日を創る人々 | 1946 |
멋진 일요일 | 素晴らしき日曜日 | 1947 |
주정뱅이 천사 | 醉いどれ天使 | 1948 |
조용한 결투 | 静かなる決闘 | 1949 |
들개 | 野良犬 | 1949 |
추문 | 醜聞 | 1950 |
라쇼몽 | 羅生門 | 1950 |
백치 | 白痴 | 1951 |
살다 | 生きる | 1952 |
7인의 사무라이 | 七人の侍 | 1954 |
산 자의 기록 | 生きものの記録 | 1955 |
거미집의 성 | 蜘蛛巣城 | 1957 |
밑바닥 | どん底 | 1957 |
숨은 요새의 세 악인[29] | 隠し砦の三悪人 | 1958 |
나쁜 놈일수록 잘 잔다 | 悪い奴ほどよく眠る | 1960 |
요짐보 | 用心棒 | 1961 |
츠바키 산주로 | 椿三十郎 | 1962 |
천국과 지옥 | 天国と地獄 | 1963 |
붉은 수염 | 赤ひげ | 1965 |
도데스카덴 | どですかでん | 1970 |
데르수 우잘라 | デルス・ウザーラ | 1975 |
카게무샤 | 影武者 | 1980 |
란 | 乱 | 1985 |
꿈 | 夢 | 1990 |
8월의 광시곡 | 八月の狂詩曲 | 1991 |
마다다요 | まあだだよ[30] | 1993 |
[1]
야구치 요코는 배우로서 예명이고 처녀 적 이름은 가토 기요, 호적상 이름은 구로사와 기요
[2]
IMDb에선
1945년 5월 21일 결혼했다고 나오고,
일본어 위키백과에선
1945년 3월경에 결혼했다고 나온다.
[3]
앨런은 '
리어왕'을 영화로 옮긴 구로사와의 <
란>을 보고 나서 "셰익스피어를 찍을 수 있는 감독은 구로사와밖에 없다."고 평한 바 있다. 또한 "당신은 왜 젊은 사람들을 싫어합니까?"라는 인터뷰어의 질문에 "내가 왜 구로사와 아키라가 누군지도 모르는 (젊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내야 합니까?"라고 답한 적도 있다.
[4]
가와바타 미술학교 출신으로 1928년에는 일본의 미술가 단체 중 하나인 이과회(二科会)에서 개최한 이과전(二科展) 회화 부문에서 입선하기도 했다. 그 후 일본 프롤레탈리아 미술가 동맹에 참여했는데 이때 프롤레탈리아 화가이자 서양 화가인 오카모토 토키에게 그림을 배웠다고 한다.
[5]
완전히 손을 뗀 건 아니고, 취미+스토리보드용으로
계속 그렸다. 감독으로서 명성이 생긴 이후로는 그의 그림이 영화 포스터에 쓰이기도 할 정도. 화풍은 본인이 좋아했던
빈센트 반고흐를 위시한
인상파와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모습을 보인다.
[6]
이 영화는 흥행에서 대히트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영화 전문 잡지 '영화평론'에서 실시한 1943년도 우수 영화 전형에서 2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평단의 호평도 받았다.
[7]
후에 이 영화는 안드레이 콘찰롭스키 감독에 의해 완성되었다. 줄거리는 두 죄수가 탈옥을 감행하여 기차에 올랐다가 그 기차가 폭주하는 바람에 생기는 일을 다루는데, 구로사와는 영화가 시작하면 이미 기차가 폭주하고 있고 그 상황에서 점차 인물들의 사정이 밝혀지는 구조를 원했었으나 콘찰롭스키 감독의 손으로 완성된 영화는 그냥 두 죄수가 탈옥하는 부분부터 차근차근 따라간다.
[8]
이후 구로사와 대신에 투입된 일본 쪽 감독은 한국에서는 《
배틀로얄》로 유명한
후카사쿠 킨지 감독이다.
[9]
다만 외국어 영화상 수상국은 일본이 아니라 소련이 받았다.
[10]
카게무샤의 배급 수익은 당시 일본 영화 역대 1위를 기록했다.
[11]
이 영화는 그 내용으로 인해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12]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유작이며, 일본 작가 우치다 햣켄의 삶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다.
#
[13]
이 일화는 로버트 슈네이큰버그의 《위대한 영화감독들의 기상천외한 인생이야기》에서
고릴라로
오역되었지만 그 일러스트는 누가 봐도 고지라이므로 고지라를 잘못 번역한 것이 확실하다.
[14]
란은 인간성을 처참히 부정하는
배드 엔딩으로 끝마치는 영화라 셰익스피어의 리어왕보다도 인간성을 더 비관적으로 파고든 작품이라고 평가받는다.
[15]
출처 글
[16]
사실 구로사와는 《
콰이강의 다리》, 《
아라비아의 로렌스》, 《
닥터 지바고》 등으로 유명한
데이비드 린 감독과의 공동 프로젝트인 줄 알고 승낙한 것인데, 막상 와보니 린은 구로사와를 끌어내기 위한 미끼였고, 애초에 '도라 도라 도라'와는 전혀 무관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 구로사와는
20세기 폭스에게 사기 계약을 당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래의 기행은 어느 정도 이해의 여지가 있다.
[17]
촬영 시작, 종료를 알리는 소품.
[18]
다만 해외에서의 혹평과 달리 일본 국내에서는
일본 아카데미상 우수 작품상, 우수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그럭저럭 준수한 평가를 받았다.
[19]
당시 한국의 영화 월간지 로드쇼에서도 1990년 칸 영화제 특집 기사 때 구로사와의 영화
꿈에 대해서 엄청 크게, 호의적으로 기사를 실어 주었던 거랑 달리 8월의 광시곡에 대해서는 비판 일색의 기사를 내보냈다.
[20]
당시 조선인들은 대부분 면도를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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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들의 행동이 이러하거늘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도대체 인간이란 어떻게 된 존재인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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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문제보다는, 혼다 쪽의 군생활이 단단히 꼬여서
중일전쟁에 투입되어 8년이나 복무하고 포로생활까지 하다 뒤늦게 일본으로 돌아와서 감독 승진이 늦었다.
[23]
간혹 구로자와라고 표기하는 매체가 있지만, 구로사와가 맞다. 여담으로 같은 성을 쓰고 있는 영화감독
구로사와 기요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남남이다.
[24]
1952년은
아카데미 국제영화상 분야가 신설된 1957년 보다 한참 전이라 당시 상 이름은 Honorary Foreign Language Fil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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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생 일본 남성 평균 키는 162cm 정도였고, 2022년 1월 기준 일본 남성 평균 키는 170c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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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토토로는
구로사와 아키라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100선에도 포함되었다.
애니메이션 영화로서는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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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 작품은
타카하타 이사오가 감독이었다. 물론
스튜디오 지브리 작품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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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는 이에 대해 구로사와의 발언이 만약 사실이라면 그가 실사 영화와 비교해서
애니메이션을 낮잡아 보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에 자신은 구로사와의 말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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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의 스토리라인을 이 영화에서 대부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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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역하자면 "아직이야"란 뜻인데
숨바꼭질에서 "아직 다 안 숨었다."라는 뜻으로 외치는 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