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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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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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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대(임시), 61대, 6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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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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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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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2대 3대 4대 5대
허정무
(1984~1986)
최강희
(1987~1990)
최인영
(1991~1992)
최영일
(1993~1995)
김현석
(1996~1997)
<rowcolor=#ffffff> 6대 7대 8대 9대 10대
송주석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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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1999)
김종건
(1999)
김상훈
(2000~2001)
정정수
(2001)
<rowcolor=#ffffff> 11대 12대 13대 14대 15대
김도균
(2002)
유상철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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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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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rowcolor=#ffffff> 16대 17대 18대 19대 20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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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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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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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2022)
정승현
(2023)
김기희
(20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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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하나 시티즌 역대 이사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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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2023)
현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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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무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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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 · 1977 · 1978 · 1979 · 1984 · 1985 ·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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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허_정무.jpg
<colbgcolor=#eeeeee> 이름 허정무
許丁茂|Huh Jung-moo
출생 1953년[2] 12월 19일 ([age(1953-12-19)]세)
전라남도 진도군 의신면 초사리
거주지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 서래마을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4cm
직업 축구 선수 ( 유틸리티 플레이어[3]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행정가
축구 해설가
소속 <colbgcolor=#eeeeee> 선수 한국전력 축구단 (1978)
해병대 축구단 (1978~1980 / 군 복무)
PSV 에인트호번 (1980~1983)
현대 호랑이 (1984~1986)
감독 포항제철 아톰즈 (1991~1992 / 코치)
포항제철 아톰즈 (1993~1995)
대한민국 대표팀 (1993~1994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1995)
전남 드래곤즈 (1996~1998)
대한민국 대표팀 (1998~2000)
대한민국 대표팀 (2004 / 코치)
전남 드래곤즈 (2005~2007)
대한민국 대표팀 (2008~2010)
인천 유나이티드 FC (2010~2012)
기타 대전 시티즌 (2014 / 기술자문위원)
대한축구협회 (2013~2014 / 부회장)
한국프로축구연맹 (2015~2019 / 부총재)
대전 하나 시티즌 (2020~2023 / 재단 이사장)
국가대표 104경기 30골 ( 대한민국 / 1974~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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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더 보기
{{{#000000,#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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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colcolor=#000000> 병역 대한민국 해병대 357기
본관 양천 허씨
종교 개신교 ( 감리회)[4]
학력 중동중학교 (졸업)
영등포공업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이과대학 ( 체육학 / 학사)
수원대학교 대학원 ( 체육학 / 석사[5])
가족 아내 최미나(1954년)
장녀 허화란(1981년), 차녀 허은(1984년)
서명 파일:허정무서명.png
}}}}}}}}}}}} ||

1. 개요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2.2. 국가대표 경력2.3. 플레이 스타일
3. 지도자 경력4. 해설 경력5. 행정가, 경영인 경력
5.1. 대한축구협회5.2.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5.3. 대전 하나 시티즌 이사장
5.3.1. 2020년5.3.2. 2021년5.3.3. 2022년5.3.4. 2023년
5.4. 2024년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6.1.2. 출전 기록
6.1.2.1. 국가대표
6.1.3.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6.2.2. 개인 수상
6.3. 수훈
7. 논란
7.1. 차범근과의 갈등7.2.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폄하 발언7.3. 월권 논란7.4. 대전월드컵경기장 락 볼링장 검토 논란7.5. 인천 유나이티드 유니폼 색상 실언 논란7.6. 대전 하나 시티즌 유니폼 논란
8. 여담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인으로 선수, 코치, 감독, 해설 위원, 행정가, 경영인 등 축구인이 경험할 수 있는 자리를 두루 거쳤으며 선수 시절 유럽으로 진출해 PSV 에인트호번에서 활약한 1980년대 대한민국 축구를 대표하는 선수였다. 선수 은퇴 이후 지도자로서도 명성을 쌓아갔는데, 특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으로 1999년 당시 FIFA 랭킹 1위 브라질[6]을 A매치에서 아시아 최초로 꺾었으며[7][8],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사상 첫 원정 2라운드 진출[9]을 달성했다.[10] 또한 월드컵 본선에서 승리를 거둔 최초의 한국인 감독이기도 하다.[11] 그리고 아직까지도 유일하게 2라운드(16강)[12]에 진출을 성공시킨 한국인 감독이다.

원래 2011년까지 대표팀 감독으로 계약했으나, 휴식 기간을 갖기 위해 2010년 7월 2일 연임을 포기한 채  인천 유나이티드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지만 2012년 4월 인천 유나이티드의 성적 부진으로 사퇴하면서 지도자로서 마지막을 아쉬움으로 남겼다. 

2013년 3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선임되었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성적 부진으로 인해 2014년 7월 10일 대한축구협회에서 부회장 직을 사퇴했고, 이후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와 대전 하나 시티즌 이사장 등 축구 관련 행정이나 경영 쪽 업무를 맡아 감독은 사실상 은퇴한 상태다.

2. 선수 경력

2.1. 클럽 경력

2.1.1. 프로 출범 이전

K리그가 아직 출범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축구 팬들 사이에서 ' 고려대학교 차범근, 연세대학교의 허정무'라는 인식이 있을 만큼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선수였다.

의외로 축구는 늦게 시작했다. 7남매중 넷째였던 허정무는 경제적 사정으로[13] 고등학교를 진학할 방법이 체육특기생 밖에 없었고, 삼촌뻘인 허윤정[14]의 권유로 중동중학교 감독 유판순을 만난다. 하지만 축구 비경험자에 당시 153cm의 왜소한 신체 조건을 보고 단칼에 거절당했으나, 사정사정해서 중졸이지만 2년을 꿇고 다시 중동중학교에 편입해서 축구를 배운다.[15]


강훈련으로 유명한 유판순이 나중에 질려서 만류할 정도로 독하게 훈련을 거듭한 끝에 축구를 시작한 지 4년 만에 U-20 대표팀에 뽑혔고 다시 2년 뒤 국가대표에 뽑힌다.

영등포공고 졸업 당시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연세대와 고려대의 스카웃 전쟁이 벌어졌는데 이미 허정무는 연세대 진학이 내정되어 있었지만 고려대 역시 그를 스카웃하기 위해 은사인 유판순을 통해 허정무를 스카웃하려 했고 아예 연세대 팀이 얼씬도 못하게 고려대의 설립자 김성수의 고향인 고창군 삼양사 쪽으로 데려놨다.[16] 그러다가 허정무의 소재가 파악되어 연세대 감독 김지성과 이미 약속을 한 허정무의 아버지가 직접 설득해 허정무를 데려갔고, 이번엔 연세대 쪽 사람들이 운동부 숙소인 무학사에 데려가 대학시험 보는 날까지 사람을 붙였다고 한다.

2.1.2. PSV 에인트호번

파일:external/file.instiz.net/9a1b849763a9491b0bec95f8fc0f1181.jpg

PSV 에인트호번 시절 기록
(1980.08.23~1983.08.30)[17]

1980-81 시즌: 34경기(선발 23경기) 6골
풀타임 21경기(리그 9경기, UEFA컵 2경기 교체 출전/ 리그 2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에레디비시 28(19) 6
KNVB 베이커 2 -
UEFA컵 4(2) -
합계 34(23) 6

팀 성적: 에레디비시 5위, KNVB 베이커 4강, UEFA컵 32강

1981-82 시즌: 34경기(선발 32경기) 5골
풀타임 29경기(리그 2경기 교체 출전/ 리그 2경기,UEFA컵 1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에레디비시 30(28) 4
KNVB 베이커 1 -
UEFA컵 3 1
합계 34(32) 5

팀 성적: 에레디비시 준우승, KNVB 베이커 16강, UEFA컵 32강

1982-83 시즌: 24경기(선발 18경기) 2골
풀타임 12경기(리그 5경기, KNVB 베이커 1경기, UEFA컵 1경기 교체 출전/ 리그 3경기,NVB 베이커 2경기 교체 아웃)
대회 경기 득점
에레디비시 19(14) 1
KNVB 베이커 5(4) 1
UEFA컵 1(0) -
합계 24(18) 2

팀 성적: 에레디비시 3위, KNVB 베이커 4강, UEFA컵 64강
통산 93경기 13골(에레디비시 77경기 11골/KNVB 베이커 8경기 1골/UEFA컵 8경기 1골)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진출에 자극을 받아 해병대를 제대한 후 해외 진출을 꾀하다, 1980년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의 명문 클럽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했다. 원래는 후에 이청용이 뛰는 독일의 보훔과 먼저 계약을 하기로 했으나 탄광도시라서 우중충했던 보훔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에 비해 밝고 평화로워 보였던 에인트호벤을 선택하게 되었다고 한다.[18] 팀 적응기인 반년 정도 경기 말미에 투입되는 교체 멤버로 뛰다가 그 뒤로는 주전 선수로 활약하였다. 주로 미드필더로 뛰면서 1982-1983 시즌 팀의 준우승에 기여하였고, 1983년에 계약이 만료된 후 국내로 복귀하게 되었다.

허정무는 에인트호번에서 뛴 3시즌 동안 에레디비시 77경기에 출장해 11골을 넣었다. 국내에는 이때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19] 사실 에인트호번에 공격수로 테스트를 보았으며 친선경기에서 센터포워드로 출전해 골을 넣었다는 기사가 존재한다. # 또한 공식전은 아니지만 스페인, 벨기에, 네덜란드 3개국 클럽 친선 축구 대회에서 데뷔 전을 가졌는데 이때 역시 센터포워드로 뛰어 페널티킥을 유도하는 등의 기록이 남아있다. # 이외에도 1980년대 국내 기사들을 보면 네덜란드에서 부동의 공격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는 기사들이 상당히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허정무가 PSV 에인트호번에서 주로 센터포워드로 뛴 것은 아닌데, 좌우 중앙 수비형 미드필더, 좌우 윙포워드, 센터포워드까지 말 그대로 유틸리티 플레이어로 뛰었다. 경기 라인업 및 포지션이 확인 가능한 71경기 기록을 살펴보면 센터포워드 3회, 왼쪽 윙 포워드 10회, 오른쪽 윙 포워드 5회, 왼쪽 미드필더 7회, 오른쪽 미드필더 30회, 중앙 미드필더 15회, 수비형 미드필더 1회를 뛰었다.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 포지션을 소화한 것은 아니지만 주로 미드필더로 뛰면서 대인 마크, 앵커링 등 수비적인 역할을 중점적으로 수행하였다.

PSV 에인트호번이라는 구단 자체가 워낙 네덜란드 리그의 대표적인 명문 중 하나인데다 우승 경쟁을 하는 상위권 팀이다 보니 팀의 리그 성적만 놓고 본다면 당시 비교되던 차범근에 비해 압도적으로 좋은 편이다.

분데스리가에서 차붐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차범근처럼 허정무 역시 네덜란드 에레디비시에서 '호호'라고 불렸다고 한다.[20] 다만 초반부터 엄청난 활약으로 독일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차범근과 달리 굉장한 텃세를 당했는데, 초반 교체 출전 위주로 뛰는 것은 물론 2군 경기에 출전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핍박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주전급 선수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하지만 결국 초반부터 존재하던 이 텃세 때문에 결국 지쳐 국내로 복귀하게 된다.[21]

파일:external/bimage.interpark.com/20140609141232969.jpg

네덜란드의 전설인 요한 크루이프를 전담 마크해 인상적인 경기력을 펼치기도 했으며[22], 세계적인 공격수 뤼트 판니스텔로이도 그가 어렸을 적에 허정무의 활약을 인상 깊게 보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영상 위트레흐트의 빌럼 판하네험[23]은 허정무의 밀착마크에 짜증나서 동양인을 비하하는 눈 찢기를 시전하기도 했다. 영상 5:10초 참고. 허정무가 한국에 돌아가게 되었을 무렵에는 네덜란드 측에서 가지 말라고 붙잡았을 정도로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만큼 그가 네덜란드에서의 활약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1.3. 현대 호랑이

파일:84 hyundai home.jpg
현대 호랑이 시절 허정무(왼쪽)
1983년 시즌 중 PSV와 계약이 만료되자[24][25] 귀국한 그는 1983년 12월 현대 호랑이의 창단 멤버로 입단해 초대 주장을 맡았다. 이후 1986년 월드컵 국가대표를 지낸 뒤 시즌을 마치고 K리그 통산 39경기 출전 5골 5도움의 기록을 세우고 은퇴했다.

2.2. 국가대표 경력

1974년 킹스컵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하게 된다. 김재한이나 조동현과 같은 장신의 중앙 공격수와 함께 작고 민첩한 중앙 공격수 역할로 주로 뛰었으나 팀 사정에 따라 여러 포지션을 돌아가면서 보았다. 그러다 1978년 김진국이 은퇴하면서 왼쪽 윙포워드로 뛰게 되었다. 이 때부터 국대 주전으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PSV 진출 이후로는 팀에서의 포지션에 맞춰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게 된다. 이후 1985년 김정남 감독이 부임하고 나서부터는 442에서 왼쪽 미드필더를 맡게 된다.

허정무는 현역 시절 주 포지션이 수비형 미드필더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어려서는 흔히 그랬듯 공격수였고 주포지션은 왼쪽 윙어 내지는 공격형 미드필더. 한 때 좌정무 우범근이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26] 대표팀에서 101경기 출전 30득점이나 했는데 이게 과연 수비형 미드필더의 스탯인가... 자서전에 의하면 1974 방콕 아시안 게임 중국전 후반에 사이드백으로 내려가 뛴 것(그리고 결승골을 어시스트)이 첫 포지션 변경. 이후 여러 포지션을 돌아가며 뛰게 되었다고. 수비형 미드필더가 주 포지션이 된 것은 PSV 이적 이후. 공격진에 너무나 뛰어난 선수가 많아 수비 포지션으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수비적으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77경기에서 11골이나 넣었다.

2.2.1.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파일:허정무와마라도나.jpg
파일:maradona 1986 korea.gif
허정무의 태권축구에 고통스러워 하는 마라도나




1986년 박창선, 차범근, 최순호 등과 함께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24강 본선 국가대표로 뛰었다. 왼쪽 풀백으로 출전하였는데, 아르헨티나전에서 디에고 마라도나를 경기 내내 두들겨 패면서 걷어찬 일화가 유명하다. 실제로, 마라도나는 월드컵에서 우승을 했지만 가장 활약을 못했던 경기가 한국전이기도 했다.

사실, 허정무가 마라도나를 냅다 걷어찬건 아니고, 정당하게 볼을 걷어내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라서 의도적인 반칙은 아니었다. 하지만, 고의성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고 수비수 세 명을 제끼던 마라도나를 실수를 빙자한 반칙으로 걷어찬거라서 관중들에게 심한 야유를 들었다. 그래서, 반칙 장면을 자세히 보면 지금 기준으로는 다이렉트 퇴장을 줘도 할 말이 없었던 장면인데 경고도 안 받았다. 그러나, 당시에 허정무만 이랬었던 게 아니라 마라도나와 매치업된 수비수들이나 미드필더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다 이랬다. 심지어 일부 선수들은 아예 집요하게 마라도나의 발목만 노리는 살인 태클을 했을 정도다.[27] 애시당초 마라도나 자체가 펠레에 비견될 정도인데 막을 수가 없으니 상대팀 입장에서는 손 놓고 당하기보단 태클을 해서라도 막아세워야 하는 선수였다.

그 당시의 허정무는 쓰러져있는 마라도나에게 직접 다가가서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면서 먼저 저자세로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제스쳐를 했고 심판에게도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고 해명을 해서 그냥 넘어갔다고 한다. #

마지막 경기였던 이탈리아전에서 왼쪽 풀백으로 나왔다가 후반전에서는 왼쪽 미드필더로 뛰던 김주성 대신 정종수가 들어가 왼쪽 풀백을 보고 허정무가 왼쪽 미드필더로 출전해 1골을 기록했다. 이탈리아전에서 대한민국은 2:3으로 졌으며 허정무는 1:3 상황에서 만회골을 터뜨렸다.[28] 허정무는 여러 포지션을 잘 소화했으며, 강한 승부욕과 체력을 바탕으로 많은 활동량을 자랑하는 스타일로 현역시절 차범근의 유일한 라이벌로 평가 받았었다. 상대편 에이스의 전담 마크맨의 임무를 맡겨도 별 무리 없이 수행했다. 관련한 칼럼

2.3. 플레이 스타일

경이적인 체력과 악바리 같은 근성으로 많은 운동량을 자랑하는 스타일이다.

다만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선수로서의 허정무 본인이 가장 좋은 활약을 펼쳤던 포지션은 왼쪽 윙어였다. 처음 프로 데뷔했을 때는 투톱의 중앙 공격수로 뛰었고 김진국의 은퇴 후에는 왼쪽 윙자리에서 뛰었다. PSV 진출 이후 여러 포지션에서 뛰었고 미드필더가 주 포지션이 되자 대표팀에서도 수비형 미드필더에서 주로 뛰게 되었다. 사실 전문 수비형 미드필더라 보기에는 어려운 플레이 스타일이긴 하지만 워낙 PSV에서 크루이프를 막았던 활약이 인상깊게 남았기에 수비형 미드필더로 분류되는 것이다. PSV에서도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던 횟수는 그리 많지 않다.

선수 시절 큰 장점으로는 유틸리티 플레이 능력이 있다. 수비형 미드필더 외에 양쪽 풀백, 양쪽 윙어, 중앙 공격수, 공격형 미드필더까지 거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A매치 득점을 30골이나 기록한 것이며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로 모두 대한축구협회 베스트 11을 수상한 유일한 선수인 것이다. 선수 시절 대표팀에서 유상철이 맡던 롤의 선구자라고 보면 될 듯하다. 또한 위치선정 능력이 좋아서 흘러나온 볼을 주워서 골을 넣는 경우가 많아 당시 허정무를 두고 어부지리라는 고사성어가 유행하기도 했다.[29]

허정무의 근성하면 나오는 일화가 있는데 무릎팍도사에서 본인이 밝힌 바로는 1978년 이라크전에서 상대 선수의 반칙으로 음낭이 찢어지는 바람에 고환이 노출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실밥도 빼지 않은 채 이라크와의 결승 리매치에서 악바리처럼 피치를 누비는 허정무를 보고 오히려 상대 선수들이 경악했다고 한다.

3.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허정무/지도자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감독허정무.jpg

4. 해설 경력

"슈웃!"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 전남 감독으로 재직 중인 상태에서 SBS 해설을 맡았으며,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에는 KBS 해설을 맡았는데[30]

2001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한국·일본 한국 vs 멕시코전에서 황선홍이 골을 넣자

역시 방귀가 잦으면 똥이 나온다고요라는 망언을 남겼다. 그리고 깨알같은 서기철그렇습니다
2012년 인천 감독직에서 사퇴한 후 다시 MBC에서 해설을 맡았다. 주로 지상파 국가대표 경기 해설을 하였으며, 2012 런던 올림픽 경기 해설도 맡았다.

해설자로서의 평가는 한마디로 동네 아저씨다. 공격시엔 시도때도 없이 슛을 지르라고 외치고, #[31][32][33] 실점을 하면 거침없이 앙탈 혹은 짜증을 낸다. # 반면 선방이나 득점 상황에는 그 누구보다 좋아한다. 런던 올림픽 영국전에서 남긴 명언이 '이게 하늘의 뜻입니다(?)'.

6월 4일 2014 월드컵 지역예선 레바논전에서는 경기 내내 이동국을 극딜하는 모습을 보였다.[34] 전술적 분석보다는 결과론적인 선수 비난이 잦다. 게다가 A매치 경기 해설에 있어서 사전 정보도 제대로 준비가 되지 않은 모습[35]을 보이기도 했고 페루와의 경기에서 조찬호가 과감하게 돌진하다가 공을 빼앗기자 바보 같은 플레이를 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한 축구팬들의 평가는 대체로 좋지 않다.

지나치게 슛을 많이 외치는 해설 때문에 유튜브 등지에서는 허정무 슛 스페셜이 돌아다닌다.[36] 공이 나갔는 데도 슛!, 도저히 슛을 때릴 수 없는 상황인데도 슛!을 외치는 등 슛에 유달리 집착하는 해설로 악명이 높다. 거기다가 카타르 전에서 골을 먹히자 아잇!이라며 대놓고 화를 내기도 했으며, 현재 축구팬들에게는 웃음벨로 통한다.

물론 허정무의 구력이 엄청나고 지도자 경력도 길었던 만큼 완전히 무가치한 해설은 아니다. 가끔 듣다 보면 괜찮은 얘기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철저히 데이터를 조사해서 양 팀의 전술이나 경기의 흐름을 잘 짚어주는 이영표나 한준희와는 달리 허정무는 정말로 순간순간의 영감에 따라 방송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리 본인이 명감독이라도 자료가 부족하면 경기 흐름을 잘 짚어줄 수 없는데 마치 허정무의 해설이 그런 것처럼 보인다. 쓸데없는 소리나 감탄사는 많이 터트리지만 경기의 흐름이나 방향에 대해서는 명쾌한 해설을 하지 못한다. 그래도 한 경기에 몇 번씩은 순간적인 상황 해설이 좋을 때가 있는데 이것도 시청자 입장에서 받아들이기 힘들거나 알기 어렵다. 왜냐면 대표적으로 어느 한 경기에서 아잇! 나오라고! 하는 해설을 한 적이 있는데 정말 수비가 안 나와서 중거리슛을 먹혔다. 근데 이게 허정무가 진짜 축구 보는 눈이 있다는 증명이 된다는 걸 아는 사람은 소수고, 그냥 아잇! 나오라고! 한 다음에 설명 없이 에잇 하고 짜증만 내니 대부분의 시청자에게는 그냥 어떤 아저씨가 짜증내는 걸로 들렸을 뿐이다.

2014 브라질 월드컵 홍명보호 단장을 맡으면서 MBC 해설진에 합류하지 않았다.

프로축구연맹 부총재로 취임한 이후에는 JTBC에서 국가대항전 해설을 맡기도 했다. 2015년 6월 16일 JTBC에서 생중계한 러시아 월드컵 2차 예선 미얀마전의 해설을 맡았으며, 동년에 JTBC/ JTBC3 FOX Sports가 단독 중계하는 2015 동아시안컵 대회 해설진에도 합류했다. 이후 동년 10월 8일 러시아 월드컵 2차 예선 쿠웨이트전 해설도 박찬하와 함께 맡았다.

2022년 6월 평가전 4연전에서 TV조선 소속으로 마이크를 잡았는데, 역시 안 좋은 평을 들었다. 게다가 평소에 논란이 많은 박문성과 콤비 해설을 해서 팬들의 불만은 배가 되었다. 그나마 박문성은 일반 시청자라면 모를 정보를 어느 정도 설명해주는 등 해설위원으로의 기본 도리는 지켰지만 허정무는 누구도 다 알 만한 내용을 설명이랍시고 느리고 지루하게 말하며 팬들의 원성을 샀다.또 하나의 문제는 말을 하다 만다는 것. 뭔가 포인트를 말하려고 할 때 반쪽만 말하고 침묵해 동료 위원들이 수습해야 했던 적도 많다. 이러한 엉터리 해설 때문에 실제로 네 경기 모두 네이버 응원창에 심심찮게 허정무의 해설을 까는 댓글이 올라왔으며 "허접무"라는 멸칭으로 부르는 축구팬들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9월 A매치 때도 TV조선이 독점 생중계를 했지만 허정무는 참여하지 않았다.

허정무가 비판받는 이유는 허정무의 형식이 동네 막걸리 해설인 데다가 그것조차도 방송이라고 눈치 본다고 제대로 못하는 데 있다. 거기다가 너무 특정 선수 호불호가 심하다. 허정무 해설의 편애를 받는 대표적인 선수가 박주영인데 허정무 해설을 들으면 이게 공식 해설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말도 안 될 정도로 편애를 받는다. 예를 들어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조영철이 슛을 하고 빗나갔을 때 아! 박주영 선수여더라면! 하는 식의 정말 말도 안 되는 해설을 한 적이 있다.[37] 이런 건 아프리카 파트너 bj도 이렇게는 안한다. 또한 선출만이 갖는 특유의 경험이나 감각은 몰라도 세계축구 흐름이나 전술 등을 제대로 포장할 능력이 없다. 당연히 상식적으로 허정무가 축구는 무조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더 잘 읽는다. 팬들이 정보가 많고 전술공부도 많이 한다지만 허정무와 비교하자면 실제로는 지식도 아니다. 하지만 그런 팬들을 만족시킬 만큼 포장해서 말할 수 있는 언변과 정보력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매니아 수준의 팬들에게는 다 아는 이야기만 느릿느릿 되새김질 하는 모습으로 보이게 된다. 축구 해설이란 게 이런 일반적인 매니아 팬들의 비판이 많고 격렬하고 나름대로 조리가 있으며, 실제로 이 매니아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아는 정보인데 실제 축구 종사자들은 잘 모르거나 관심없는 정보의 비대칭도 많다. 따라서 이 매니아들을 만족시키지 못하고 실망시킨다면, 예를 들어 어? 저 사람 전문가라는데 저런 기본적인 것도 몰라? 라는 반응이 나오게 된다면 비판을 많이 받을 수 밖에 없는 구조다.[38][39]

5. 행정가, 경영인 경력

5.1. 대한축구협회

2012년 인천 감독을 사퇴한 뒤, 2013년 축구협회 부회장으로 대한축구협회에 복귀했다.

2013년 3월 7일 정몽규가 축구협회장으로 선임하여 부회장이 되었다.

2014년 7월 3일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졸전을 펼친 홍명보 감독의 유임 여부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어 유임을 발표하였다.

1주일 후, 홍명보가 자진 사퇴하자 본인도 결국 대한축구협회 부회장 자리에서 물러났다.

2015년 1월 19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의 부총재로 선출됐다. 초기에는 경기위원장을 겸임하였으나, 2016년 조긍연이 경기위원장으로 선임된 이후에는 부총재 역할만 하는 듯.

2017년 6월 14일 슈틸리케호가 최종예선 8차전인 카타르전에서 2:3 참패를 겪으면서 월드컵 본선 직행에 난항을 겪게 되면서, 15일 슈틸리케가 경질되었다. 그러면서 슈틸리케호 이후를 이끌 감독 후보군에 올랐다. 기사 1 기사 2 대표팀 감독을 두 번 역임한 경력이 있으며,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때는 첫 원정 월드컵 본선 16강 진출(최종 15위) 이끌어냈다는 것이 지지의 근거. 다만 5년 동안 현장 경험이 없다는 것이 약점이다. 언론에서는 강한 지지를 받고 있는 후보임과 동시에 네티즌 여론은 상당히 싸늘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극과 극의 대비를 이루는 후보. 하지만 신태용이나 최용수 등 젊고 유망한 감독을 임시 감독으로 선임했다가 월드컵 32강 본선 진출에 실패한다면 해당 감독은 책임을 뒤집어쓰고 커리어를 망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허정무나 김호곤 등 이미 감독으로서 커리어가 비교적 최근에 끝났으면서 현역 시절 지도력이 검증된 원로가 임시 감독을 맡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축구팬들은 브라질 월드컵에서의 실책 그리고 축구협회의 파벌 그리고 5년 동안이나 현장을 떠나있었다는 점에서 반대하고 있다. 대신 국가대표 수석코치 출신이자 연령별 대표팀을 파악하며, 소방수로써 올림픽 8강 5위, 청소년 월드컵 16강 10위 등 괜찮은 성적을 내고 최근까지 대표팀을 이끌고 다양한 전술을 쓸 수 있는 신태용을 원하는 추세이다.

결국 최종적으로 신태용이 감독으로 뽑혔다.

5.2.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

2015년부터 2019년까지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 직을 역임했다.

부총재 시절 K리그1, 2 중계 확대와 유소년 시스템 구축 등에 힘써서 리그가 안정화되는데 기여하였다.

5.3. 대전 하나 시티즌 이사장

5.3.1. 202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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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시즌을 앞두고 대전 시티즌 하나금융그룹에 매각되면서 기존 구단의 대표 이사직과 같은 재단 이사장직에 부임하였다.

대전으로서는 김호에 이어 두번째로 축구 선수, 감독 출신 대표이다.

2019년 여름, 당시 한국프로축구연맹 부총재였던 허정무는 하나금융그룹 김정태 회장과의 식사 자리에 의견을 나누며 대전 하나 시티즌 창단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하나금융그룹이 이사장직을 권유했다고 한다. #

당시 허정무는 “앞으로 은행도 글로벌 마케팅을 해야 할 터인데 축구단을 운영하면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며 제안을 했고, 반응이 나쁘지 않자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그 이야기를 했더니 “한번 검토를 해보자”는 반응에서 “좋다. 그러면 한번 해보자”는 단계로 진전됐다고 하며, 하나금융그룹 내부에서 TF팀을 만들어서 축구팀 창단을 준비하게 됐지만 금융 당국에서 은행이 직접 팀을 창단하는 것은 여러 가지 규정상 어렵다는 식으로 판단되면서 하나금융그룹의 뿌리 가운데 하나가 충청은행이었던 만큼 대전 구단 매각으로 선회했다고 한다.

대전에 가기로 결정하면서 프로축구연맹에는 사의를 전했다.

허정무는 대전시에 대전 시티즌 인수 조건으로 경기장 내의 주변 시설 운영권 양도를 요청했으며, 허태정 대전시장을 만나 대전월드컵경기장과 덕암축구센터 사용 권한을 하나금융그룹이 갖고, 시설 유지 보수만 대전시설공단이 2년간 지원하는데 합의했다고 한다. #[40][41]

감독으로는 황선홍을 선임하였지만, 기존 감독 이흥실의 계약 기간이 남아있고, 잘 있었음에도 사실상 토사구팽식으로 내보내고 황선홍을 데려온 것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시즌 중반 후술할 문제로 황선홍 감독이 물러나면서 9월 18일 조민국을 감독대행 자리에 앉혔다. 일단 조민국을 대행으로 임명한다고 발표했지만, 실상은 전력강화실장은 진작 팀을 떠났고, 조민국은 황선홍이 사퇴한 뒤 공석인 전력강화실장에 앉았다.

즉 청주대학교 감독 조민국을 대행으로 삼는다고 하자니 모양새가 안나서 구차한 꼼수를 쓴 것으로, 당연히 각종 축구 커뮤니티는 발칵 뒤집어졌고, 제대로 감독을 선임하지 않고 주먹구구식으로 선수단을 운영하는 비난이 이어졌다. 황새 거르고 조예스.

여론은 허정무의 월권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하나은행을 호구로 보고 막나간다며 매우 부정적이다. 관련기사

아니나 다를까 조민국 대행 체제에서 5경기 1무 4패를 기록하면서 6위로 추락, 승강 플레이오프 경쟁에서도 밀려나는 모양새다. #

김호곤이 단장으로 있는 수원 FC가 시민구단의 한계를 딛고 제주 유나이티드와 1위 경쟁을 하는 작금의 K리그2 판도를 볼 때, 허정무의 무능과 책임은 명백하다.

많은 지원에도 불구하고 성적이 좋지 않은 것에 대해 전반기엔 감독의 책임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으나, 이후 불거진 감독 불화설과 월권설, 뒤이어 감독의 석연치 않는 사퇴, 석연치 않은 감독대행 임명 등 프론트의 잘못으로 보이는 모습이 너무 많아 시즌 목표 달성 실패시 그 책임을 피하긴 어려워 보인다.

11월 25일 준플레이오프에서 대전이 경남과 1:1로 비기며 K리그 승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이후 인터뷰에 따르면 2020시즌을 앞두고 구단 매각에 있어 난항을 겪으면서 예상 외로 시간이 지체되면서 실제로 창단식은 해가 바뀐 2020년 1월에야 개최하는 등 애초 생각했던 스케줄보다 너무 늦어지면서 그해 시즌에 대비한 선수 구성을 제대로 하지 못해 그게 승격 목표 달성에도 어느 정도 악영향을 줬다고 밝히기도 했다.

5.3.2. 2021년

2021시즌을 앞두고 이민성을 감독으로 선임하였으며, 새롭게 영입된 선수들을 중심으로 기량을 면밀히 살펴 이민성에게 조언하면서 감독과 적극적인 소통에도 나섰다고 한다.

또한 박지성을 데려오려고 했는데 때를 놓쳐서 전북에게 뺏겼으며 김은중도 데려오려 했지만 올림픽 대표팀에서 필요하니 데려오지 못했다고 한다. #

이후 강원 FC처럼 2022 시즌에는 B팀을 만들어 K4리그 참여 검토를 지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허정무는 대한축구협회 부회장으로 있을 당시 디비전리그의 필요성을 주창해 왔던 터라 대전의 K4리그 참가는 전혀 가능성이 없는 얘기는 아니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

하지만 2021시즌의 경우 선수 영입 문제 등에 있어서 시즌 초반 비난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는데, 일단 가장 중요한 외국인 선수 부분에 있어 에디뉴와 바이오는 말그대로 실패였으며, 바이오는 경쟁시킬 상대조차 제대로 영입하지 못했다.

1년전인 2020년에는 이정문이 바이오의 위치를 대신할 수라도 있었지만 이정문의 가치를 트레이드 대상쯤 취급하고 보내버렸고, 2021년 그 선수의 역할은 지금 누구도 대신하고 있지 못했을 뿐더러 특히 당장 7월 3일 김천 상무전에서는 박진섭이 경고 누적으로 빠지자 이를 대체할 마땅한 미드필더가 없어서 최익진, 임덕근 같은 수비수를 미드필더 자리에 배치하는 일까지 벌어졌고, 이날 경기는 한계를 드러내며 1:4 참패했다.

다만 이후에는 빼어난 상승세를 보이며 이런 부분들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많이 사그라 들었는데, 이민성의 지휘아래 팀이 이른바 '원 팀'으로 거듭나며 순항했고, 이민성에게 언제나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라"는 등 착실히 지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지난 시즌 불거진 간섭 등의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 않고 조언을 하는 선을 잘 지키고 있는 듯 하다.

한편 내년 시즌 K4리그 참가 의향을 프로축구연맹에 제출했는데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자체 유스팀보다 다른 팀에서 많은 인원을 보강할 것으로 전해지면서 논란의 여지를 남겼다.

대전 구단은 K4리그 참가를 젊은 선수들 영입에 착수한 상태지만 문제는 대전 구단이 영입하는 과정에서 자체 유스팀이 아닌 타 구단에서 많은 선수를 영입하고 있다고 한다.[42]

당장 2021시즌만 해도 대전은 유스인 충남기계공업고등학교 축구부를 보유하고 있음에도 다른 팀에서 적지 않은 선수와 영입 계약을 체결했다.[43] #

하지만 위의 기사처럼 단지 저 사실만으로 허정무를 비롯한 대전 구단이 잘못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상식적으로 유스 산하 고등학교 3학년을 다 콜업해도 팀 구성이 안되며, 유스 고등학생들 중 한학년에 성인 무대에서 가능성 있는건 많아야 절반도 안되는데 K4리그에 참가 하려면 유스에 외부 영입, 기존 2군 이런 체제로 가는게 당연한 일이다.

한편 이후 나온 기사에 따르면 매일 새벽 훈련을 통해 대전 선수들에게 본인의 개인기 등 기술을 전수한다고 한다. 전략과 전술 훈련 등 팀 운영 전반은 이민성에게 맡기지만 새벽과 같은 개별 훈련 시간엔 허정무가 축구인 선배로서 항상 훈련장에 모습을 드러내 슛, 드리블, 개인돌파, 수비 등 개인기 연습을 지도하는 등, 유망주 육성을 위해 직접 젊은 선수에게 기술을 전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하며, 그 결과 대전 U-15 유스팀이 창단 이후 처음으로 소년체육대회 결승에 진출하는 등 우수한 성적을 거두기도 하였다. #, #

이렇듯 말이 많았던 2020시즌에 비해서는 상당히 구단 운영이 개선되고 안정화되었는데, 어린 선수들이 탄탄한 기본기를 갖게 되면 실제 경기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상황에서 선수가 스스로 생각하며 경기를 풀어 나갈 수 있게 된다고 판단, 이를 위해 12세, 15세, 18세, B팀을 거쳐 프로팀으로 성장하는 연령별·단계별 육성프로그램을 추진하며 앞서 언급한 프로 B팀을 구성해 K4리그 참가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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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구단의 재정적인 자립을 통해 장기적인 플랜을 가지고 팬과 함께 구단이 꾸준히 성장하며 발전해 나가고자 홈 경기장인 대전월드컵경기장과 주변 시설이 단순히 축구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어린이부터 노년세대까지 시민들 누구나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문화복합 시설로 자리잡게 만들기 위해 K리그 구단 중 처음으로 '공공스포츠클럽' 운영을 시작했는데, 사단법인 대전하나스포츠클럽을 설립, 대전월드컵경기장 내 최신식 스포츠클라이밍장 '하나클라이밍짐'을 개장하여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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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메타버스 활용 팬 참여 이벤트, 역대 유니폼 착용 입장객 할인, 한밭운동장 고별경기 티켓 할인 등 다양한 팬 친화 마케팅과 지역밀착활동을 통해 연달아 팬 프렌들리상을 수상하며 팬 친화적인 구단으로 행보를 이어갔다. #

특히 비록 승격은 아쉽게 못했지만 제일 중요한 성적적인 측면에서도 중간중간 몇차례 어려움은 있었지만 특유의 투지를 앞세워 팀을 하나로 만들어 드라마틱하게 어려움을 이겨내고 상승세를 이어갔다는 점에 있어서는 나름 만족할 만한 한해였다.

5.3.3. 2022년

2022년부터 25년간 대전월드컵경기장 및 덕암축구센터 시설에 대한 운영 및 관리 업무를 대전광역시로부터 수탁 받았으며, 경기장 외부에 앞서 서술한 암벽 등반 코스 등을 통해 경기장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는 사업을 진행했다. #[44][45]

하지만 고유의 팀컬러 자주색이 없어지는 등 후술할 유니폼 관련 문제로 또다시 구설수에 오르게 되었다.

이러한 우여곡절로 계약 기간의 마지막 해로 만일 승격하지 못한다면 팀을 떠나야 할 것으로 전망되었으나, 승강 플레이오프 끝에 대전이 8년만에 승격에 성공하며 시즌을 잘 마무리했다.

5.3.4. 2023년

2023년 팀을 1부 리그에 승격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대전 구단과 재계약을 맺은 것으로 보인다.

지역 내 사랑받는 스포츠 구단을 목표로 사회공헌 활동을 확대하고, 홈경기 마케팅, 공공 스포츠클럽 도입 등 다양한 사업 시도가 결실을 맺으며 2023 시즌 K리그1 전반기 전체 3위인 평균 관중 1만 4천 명이라는 기록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이어갔다.

시즌 중반인 6월 30일 한 걸음 물러나 후배들을 응원하겠다며 스스로 직책을 내려놓았다.

허정무는 이사장직 취임 후 2022년 대전을 1부 리그에 승격시킴으로써 3년 내 1부 리그 승격이라는 초기 목표를 달성하고, 대전을 젊고 장래가 촉망받는 우수한 선수들이 함께하고 싶어하는 명문 구단으로의 도약을 위해 노력, 이를 통해 2023 FIFA U-20 월드컵에서 에이스로 활약한 배준호, 배서준 선수 같은 유망주를 발굴했으며, 임덕근, 전병관, 김인균 선수 등이 대전의 주축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젊은 선수들을 육성하는 데 힘을 쏟고 앞서 언급한 대로 여러 사업들 시도로 대전을 인기 구단으로 성장시키며 비록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나름 만족스러운 임기를 보냈다. #

본인은 이사장으로서 대전 구단의 자생력을 키우는 측면에서는 부족함이 있었다고 아쉬움을 드러내기도 했다. #

5.4. 2024년

대전 하나 시티즌 이사장 퇴임 이후 야인으로 지내던 중 2025년 1월 8일로 예정된 대한축구협회장 선거에 출마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 축구협회장 출마 요건은 선거당일 기준으로 70세 미만인데, 허정무는 상술했듯이 중학교 때 유급 과정에서 생일을 1955년 1월 13일로 바꿔치기(?)한 덕에 불과 닷새 차이로 출마요건을 충족했다고 한다(...)

하지만 대중의 반응은 그 역시 정몽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며 싸늘한 편이다.

6. 기록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출전 기록

6.1.2.1. 국가대표
2017년 9월 5일 기준이다.
연령 출전
U-17 0 0
U-20 0 0
U-23 0 0
A대표 103 30
합계 103 30

6.1.3.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6.3. 수훈

7. 논란

7.1. 차범근과의 갈등

현역 시절부터 차범근과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묘한 관계에 있었는데, 대학 시절에는 연세대학교- 고려대학교 선수로, 해외에선 네덜란드- 독일 리그로, 감독 생활도 포항 스틸러스- 울산 HD FC로 계속해서 라이벌 비스무리한 관계를 형성해왔다.

한편 둘의 관계가 악연으로 발전하게 된 원인이 기사로 나온 적이 있다. # #[46][47]

직접적인 충돌은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당시 감독 차범근 vs 해설 허정무 사건이 가장 유명한데, 대개 많은 사람들은 조별리그 2차전에서 네덜란드에게 0:5로 참패한 이후 허정무와 차범근이 언쟁했던 것만 알고 있으나 이전부터 둘의 충돌은 잦은 편이었다. 특히 월드컵 전부터 허정무는 차범근의 수비 중심의 전술은 안 된다고 계속해서 비판해왔으며 공격적으로 밀어붙여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상황이었다. 어쨌든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 중 가장 큰 것은 아무래도 조별리그 1차전 멕시코전을 앞두고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의 사건이었다. 이날 차범근은 황선홍이 부상으로 인해 경기에 출전할 수 없음을 밝히고 최용수도 정상 컨디션이 아닌지라 김도훈을 원톱으로 하는 3-6-1 전술로 멕시코전을 치르겠다고 발표했는데, 여기서 기자도 아닌 허정무가 불쑥 끼어들어 이런 뜬금없는 돌직구를 날리게 된다.
차 감독, 만약 황선홍이 뛰고 싶다고 하면 뛰게 해 줄 겁니까?
이게 사석이라면 별로 문제가 안 될 발언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외신 기자들까지 다 불러놓고 진행하는 월드컵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이미 감독이 황선홍의 출장이 불가능하다고 공표하고 그에 따르는 전술까지 발표한 상태에서 기자도 아닌 사람이 저런 질문을 던진다는 건 대놓고 감독을 디스하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차범근도 상당히 불쾌해하며 여기는 기자들을 위한 자리라고 언급하자, 허정무는 나도 해설위원 자격으로 온 것이라며 반박했고 차범근은 그래도 안 된다며 서로 언쟁으로 번졌다. 주변 사람들이 허정무에게 이번은 당신이 잘못한 거라며 차범근에게 사과할 것을 종용해 기자회견이 끝난 후 억지로 차범근에게 사과를 했으나, 차범근은 이 사과를 받지 않은 것으로 알려진다.

그 이후 전개는 아시다시피... 멕시코전과 네덜란드전 때 당시 MBC 해설이던 신문선 KBS 이용수는 평범한 해설을 했는데, SBS의 허정무는 작정하고 경기 내내 다른 나라 전문가들처럼 차범근을 비난했다. 이미 0:5 대패로 마음이 무거웠던 시청자들이 SBS 해설은 음소거를 하거나 타 채널로 돌렸다는 경험담이 있을 정도. 이후 차범근이 월드컵 도중 경질되고 나서도 공식 기자회견장에서 2라운드를 벌인 걸로 알려져 있으며, 허정무가 후임으로 대표팀 감독에 선임되고 나서 밝힌 모토가 용맹한 공격 축구였으니 사실상 차범근을 간접 디스한 셈이다. 이후 차범근의 K리그 승부조작 발언에 대해서도 앞장서서 차범근을 비난하였다. 어쨌든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둘의 관계는 거의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보였으며, 차범근이 공개적으로 허정무를 콕 찍어 지목하며 너무했다는 식으로 언급해 남보다 못한 사이로 결론되는 분위기였으나...

세월은 흘러 서로 갈등한 것도 인간적으로 싫어서라기보다는 서로의 축구관이 다르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방식에 대한 오해로 빚어진 일이어서인지, 아니면 허정무 본인도 처음 대표팀 감독 맡을 때 마음 고생을 많이 해서 차범근과 동병상련의 처지가 되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둘 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성질들이 죽고 감상적이 돼서 그런지 둘은 2005년에 전격적으로 공개 화해를 했다. 당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이던 차범근과 전남 드래곤즈 감독을 새로 맡게 된 허정무가 오랜만에 감독으로서 맞대결을 펼치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은 서로 아는 체도 안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우습게도 허정무가 어찌되었건 축구계 선배에 대한 예우는 확실히 지켜야 한다면서 수원 벤치로 찾아가 차범근에게 폴더 인사를 했고 차범근도 당시 감기 몸살로 컨디션이 안 좋았지만 허정무의 인사를 받고 반갑게 화답하면서 지난 앙금을 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땐 입장이 바뀌어 허정무가 감독, 차범근이 해설이었는데, 당시 허정무가 조별리그 2차전 아르헨티나전 대패로 상당히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차범근은 전쟁 중에는 장수를 흔들어선 안 된다며 허정무를 적극적으로 감쌌다. 아직까지도 본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공개적으로 언급하길 꺼리는 프랑스 월드컵 사태에서 차범근에게 가장 큰 상처를 안긴 인물 중 하나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감싸는 걸 보면 과거의 악연은 묻어둔 걸로 볼 수 있을 듯. 또한 허정무가 차범근의 아들인 차두리를 대표팀 감독 시절 다시 불러들여 주전 풀백으로 자리잡게 한 것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줬을 것이다. 남아공 월드컵 이전부터도 허정무는 차범근을 찾아가 대표팀 구성에 대한 조언을 구하거나, 월드컵이 끝난 뒤 행정안전부에서 초청한 강연에서도 차범근 때문에 해외 진출을 할 수 있었다며 고마움을 표하는 등 최소한 서로 불편했던 관계는 청산한 것으로 보인다. 2013 U-20 월드컵 때도 훈련장에서 둘이 함께 있는 사진이 기사로 올라오기도 했다. #

7.2.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폄하 발언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인식과 평가가 좋지 않다. 거스 히딩크가 자신을 밀어내고 부임해서 한창 삽질할 적에는 조광래 등 국내 지도자들과 더불어 깠고, 움베르투 코엘류 핌 베어백 등에게도 다분히 비판적이었다.

비판에 대한 이유는 이들이 코앞의 성적에 급급하고 세대교체나 유망주 발굴에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코앞의 성적에 급급해서 히딩크를 영입한 건 축구협회다. 코엘류는 김호곤의 올림픽 대표팀으로 지원이 쏠리는 바람에 이렇다할 힘을 쓰지 못했고, 이후 취임한 본 프레레는 몰디브 쇼크를 만회하기 위해 영입한 인사였다. 그 본프레레를 부진하다고 쫓아내고 월드컵 1년 앞두고 부임된 사람이 딕 아드보카트였고, 그 후임을 찾지못해 허둥지둥하다 지휘봉을 맡게 된 사람이 베어백이다. 결국 외국인 지도자들이 성적에 급급하게 된 것은 축구협회의 근시안적인 행보 탓이다. 이에 대해 올바른 비판을 하지 못하고 애꿎은 외국인 지도자들을 탓하는 건 문제가 있다.

그리고 허정무는 외국인 지도자들이 세대교체에 힘쓰지 않았다고 비판하는데, 그 히딩크도 부임 초기에는 울산 수비수 서덕규를 전격 기용하기도 했으며, 월드컵 대표팀에 청소년 대표인 정조국, 여효진, 최성국, 염동균을 훈련 파트너로 합류시켜 키우기도 했다. 거기다 부지런히 뛰는 것 밖에 못한다던 조재진을 원톱으로 발탁한 건 코엘류였고, 약관을 겨우 넘긴 김진규를 차세대 대표팀 센터백으로 점찍은 게 본프레레였으며 아드보카트는 홍명보 김태영 은퇴 후 난황을 겪던 수비진에 유경렬이나 김영철 등 중견 선수들을 영입해서 젊은 김진규와 신규 조화를 꾸려 안정을 꽤하기도 했다. 2007 AFC 아시안컵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베트남 졸전으로 욕먹은 베어백은 연령대 대표팀과 국가 대표팀을 동시에 맡는 버거운 상황속에서도 오범석, 김치우, 김정우, 염기훈, 이근호, 강민수 등을 자연스럽게 대표팀에 연착륙시켰고 상당한 진통 끝에 프리미어리거 3인방이 모두 부상으로 참가하지 못하는 아시안컵에서 김치우-김진규-강민수(김치곤)-오범석의 포백을 완성시켰다. 역대 외국인 감독들이 끊임없이 시도했던 포백은 베어백 시기에 비로소 완전히 자리잡는다.[48]

다만 허정무는 무릎팍도사에 출연해 거스 히딩크를 존경한다고 밝혔으며 당시 논란이 된 기사 내용은 오보라고 밝혔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이후 행정안전부에서 초청한 특강에서도 거스 히딩크를 존경한다며 대표팀 차기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외국인 감독과 국내 감독을 굳이 나누고 따지는 데 대한 문제 제기를 하는 과정에서 말 실수가 있었고 표현이 서투른 데 대해서도 반성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 "외국인 감독이라고 다 좋은 지에 대해선 의문이다. 국내 감독도 장점이 많고 능력도 좋아 무작정 외국인 감독을 선호하는 건 반대다. 거스 히딩크 전 감독 다음에 온 외국인 감독이 한 일이 뭔지 묻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외국인 지도자에 대한 인식 자체는 다소 편견이 있음을 보여줬다.

7.3. 월권 논란

2020년 9월 대전 황선홍 감독이 돌연 사임하였는데, 문제는 구단 고위 관계자인 허정무가 드레싱룸에 들어가거나 훈련장에서 개입을 해 황선홍이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다는 내부고발이 나오면서 감독 출신인 허정무가 감독의 전술 등에 개입한 것 아니냐는 비난 여론이 나왔으며, 7월 초 황선홍이 수원 FC전 패배 이후 “좋은 팀이 되기 위해선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오늘 승리를 위해 구단에서 무엇을 했는지 묻고 싶다. 각자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기대하겠다. 믿음과 신뢰가 형성되지 않으면 좋은 팀이 될 수 없다”며 구단에 대한 불만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등 허정무의 구단 운영에 문제가 있다는 것과 더불어 불화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소문이 나돌기도 하였다. #

하지만 대전 구단 사정을 잘 아는 축구인에 따르면, 주위에서는 FC 서울에서 실패한 지도자라는 인식 때문에 황선홍의 선임을 반대했지만 허정무 이사장이 한국 축구를 위해서라도 황선홍과 같은 스타 플레이어 출신의 지도자가 명예 회복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며 황선홍을 강하게 밀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황선홍이 이끄는 선수단은 특징없는 축구로 내용면에서는 낙제점에 가까운 모습을 보였으며, 처음에는 여름까지 대대적인 선수 영입으로 선수단을 전폭 지원한 허정무도 제자이자 후배인 황선홍에게 몇 차례 조언을 해준 것으로 보이는데 황선홍 입장에서는 그걸 구단의 월권이자 간섭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라고 언급하면서 허정무도 황선홍에게 섭섭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 다만 이는 좀 걸러들어야 하는데, K리그 지도자 경력만 보자면 리그 우승 2회, FA컵 우승 2회, FA컵 준우승 2회, 더블까지 달성한 황선홍이 허정무보다 압도적으로 위다. 인천에서 금지어 수준까지 내몰리고 결국 지도자 커리어가 끝장난 허정무가 명예회복이니 조언이니 운운하는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이후 이민성 감독 체제에서는 새벽 훈련 때 본인의 개인기 등의 기술을 조언해 주었다고 했고 별다른 얘기가 없는 것을 보면 본인도 이러한 행보에 문제 의식을 느꼈는지 많이 자제한 것으로 보인다.

7.4. 대전월드컵경기장 락 볼링장 검토 논란

2020년 1월부로 하나금융축구단이 대전월드컵경기장 시설 운영권을 양도받아 운영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사장으로 허정무가 경기장 내 볼링장을 락볼링장으로 바꾸는 사업을 추진했다가 대전시 볼링동호인과 지도자들로부터 큰 반발을 샀다.

1만여 명의 볼링 동호인과 지도자들의 성명서에 따르면 경기장 내볼링장이 2020년 7월 말 대전시설관리공단으로부터 임대계약이 만료되는 가운데 대전 구단이 기존의 국제규격 볼링장을 락볼링장으로 전환 운영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고 한다.

특히 대전에서 전국대회와 국제대회를 유치할 수 있는 국제규격은 대전월드컵경기장 볼링장 단 한 곳만 있는데, 충청권 4개 시·도가 공동유치를 추진하는 2030 아시아게임 볼링 종목 경기장으로 꼽혀 왔던 시설이 락볼링장으로 전환될 경우 이 같은 활용이 어렵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어 기존 볼링장을 주류 판매가 가능한 락볼링장으로 업종을 바꾸게 되면 선수들이 훈련하는 데 있어서 엄청난 차질을 빚을 수 있고 경기력 향상에도 많은 저해가 되며 대전월드컵경기장은 공공체육시설로서 대전 볼링 동호인과 엘리트 선수, 대전체육계와 하나시티즌이 같이 상생 방향을 찾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한편, 대전시볼링협회는 허정무 이사장에 면담을 신청할 계획을 밝히면서 대전 구단이 락볼링장 추진검토를 계속한다면 대대적인 서명운동과 함께 반대 운동까지도 예고했다.

한편, 이에 대해 대전 구단은 중도일보에 "경기장 내 시설 활용을 위한 제안서를 받고 있는 중이며 아직 결정된 것은 없다"고 밝혔다.

이후 임대 계약이 만료되고 나서 기존의 볼링장은 영업을 종료했는데 락볼링장이 들어서지 않은 것을 봐서는 해당 사업이 무산된 것으로 보인다. #

7.5. 인천 유나이티드 유니폼 색상 실언 논란

인천 유나이티드 감독으로 재직 중이던 2012년, 유니폼에 팀을 상징하는 파랑-검정이 아니라 생뚱맞은 빨간색이 사용되었는데, 문제를 이를 두고 "파란색이 우리의 전통이라고 하는데 누가 정한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며 논란이 일었다.

이에 바로 그 다음에 발표회장 뒤에서 긴 휘파람 소리를 비롯한 팬들의 원성이 터져나왔다.

한 팀의 감독이라는 사람이 언론사 기자들 말고 일반 팬들도 충분히 드나들 수 있는 공개된 자리에서 '구단 전통' 관련 발언은 오랜 시간 팀을 사랑한 팬들의 함성과 자존심으로 하루하루 쌓아 온 구단의 소중한 역사이자 전통인데, 이러한 것들은 부정하고 팬들의 자존심을 심각하게 건드린 것이다. #

7.6. 대전 하나 시티즌 유니폼 논란

파일:20220409_16090ㅈㅁ8.jpg

2022시즌 홈 유니폼에 있어서는 팬들로부터 큰 실망감을 안겼는데, 일단 유니폼 업체를 마크론으로 바꿨는데, 유니폼 컬러가 기존의 아이덴티티 컬러인 자주색이 거의 없어졌을 뿐더러 리그 개막이 2월인데 4월에야 판매를 시작하고, 가격이 터무니없이 고가에 형성되는 등 여러 방면에 있어서 미흡함을 드러냈다.

결국 비판적인 여론을 의식하고 유니폼 가격을 낮췄는데 이를 두고 근본적인 문제를 구단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채 그냥 이번 일만 넘어갈라고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가격만 줄인 것 아니냐는 원성이 나왔고, 4월 9일 서울 이랜드와의 서포터즈들이 허정무를 질타하는 내용의 걸개까지 걸기도 하였다.

결국 이날 경기 종료 후 간담회를 가졌고, 간담회를 통해 해당 사실에 대해 팬들에게 사과했는데, 정작 허 이사장은 선수단 운영만 거의 신경 쓰고 이외의 구단 운영은 민인홍 대표가 책임지는 탓에 허 이사장은 이러한 문제를 불과 며칠전까지 몰랐다고 했다.

또한 유니폼 사태에 대해서 이날 간담회에서 모든 잘못은 마크론 코리아에 있다고 언급했는데, 문제는 이후 커뮤니티 사이트 등에서 돌아다니는 마크론 코리아 측의 입장과는 전혀 말이 달랐고, 이에 팬들을 기만했다고 대전 러버스는 격노하며 공식 성명서를 통해 허 이사장의 사퇴까지 언급하는 등 강하게 질타했다.

앞서 인천 감독 재직 시절에도 홈 유니폼 색상에 대해 실언을 했던 것을 보면 홈 유니폼의 색상과 팀 컬러의 훼손에 대한 문제의식을 잘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내용은 대전 하나 시티즌/사건사고 문서 참조.

8. 여담





보다시피 5전 4승 1무로 한일전에서는 무적인 감독이다. 대한민국 홈경기도 1경기에 불과하고 전부 원정이거나 중립 지역이다. 일본 입장에서는 A대표로는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감독이다.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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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0년부터 대전 구단이 기업 구단 전환에 따라 재단 법인이 됨에 따라 허정무부터는 직함이 대표 이사나 사장이 아닌 이사장이다. [2] 1953년 음력 11월 14일 생이지만, 주민등록상에는 1955년 1월 13일로 나와 있다. 기사 [3] 가장 많이 뛴 포지션은 좌측 윙 포워드로 골키퍼, 센터백 제외 전 포지션에서 뛸 수 있었다. [4] 반포동에 있는 남산감리교회에 출석한다. 신앙은 운동을 위해 중학교를 전학가게 된 과정에서 서울특별시 학교 친구들을 통해서 갖게 되었다고 한다. [5] 석사 학위 논문: 大學 蹴球팀에서의 指導者 行動類型 集團凝集力 成員滿足度와의 關係(1992) [6] 당시 브라질은 1994년 미국 월드컵 우승, 1997년 코파 아메리카 전승 우승, 1997년 컨페드컵 우승,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준우승, 1999년 코파 아메리카 전승 우승, 1999년 컨페드컵 준우승, 2002년 한일 월드컵 전승 우승을 달성한 최전성기였다. [7] 김도훈의 결승골로 1:0 승리. [8] A매치가 아닌 브라질 모든 연령 매치 경기까지 포함하면 니시노 아키라 전 감독의 U-23 일본이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종목에서 마리우 자갈루 전 감독의 호나우두가 있던 당시 피파랭킹 1위의 U-23 브라질을 1:0으로 승리하였고, 아시아 최초로 모든 연령 매치에서 브라질을 이긴 적이 있다. [9] 사상 첫 원정 16강 진출로 알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첫 16강 진출은 일본을 이기고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6개국 본선에 진출(월드컵 16위)로 이미 한 번 달성한 바 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틀린 표현이다. [10] 4전 1승 1무 2패 승점 4점 6득점 8실점 득실차 -2 전체 15위로 현재까지 원정 월드컵 최고 순위이다. 참고로 최고 기록은 히딩크호의 2002년 한일 월드컵 4위이며 2022년 카타르 월드컵 벤투호는 16위를 기록했다. [11] 두 번째가 2018년 러시아 월드컵 독일전에서 승리한 신태용이다. 둘다 공교롭게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으로 유럽팀에게 2:0 승리하였다. [12]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당시 이유형 전 감독이 대한민국을 이끌고 일본을 이기고 16개국 본선에 진출을 성공시킨 적이 있어서 허정무 전 감독은 한국인으로서 두번째 원정 16강 진출이었다. [13] 개인의 가정사가 아니라 1970년대 대한민국 경제 사정이 그랬다. 장남, 그것도 신동 소리는 들어야 공부하라고 대학을 보냈고 보통은 상고를 나와 고졸로 은행원이 되는 것이 출세였던 시대였다. 하물며 차남부터는 중졸도 감지덕지, 곧장 생업 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허정무의 아버지는 교장선생님까지 지낸 교사였지만, 자식이 7남매나 되었기 때문에 어려웠다고 한다. [14] 진도에는 양천 허씨 집성촌들이 있는데 대동보를 보면 허정무는 35세손이고 허윤정은 항렬자를 쓰지 않아서 모르지만 진도 출신이다. [15] 막판에는 영등포공고로 진학하기 위해 서울에 있는 영도중학교로 전학을 갔다. 참고로 양천 허씨의 본관이 양천구이기도 한데다, 영등포공고 영도중학교와 같은 재단이기에 영등포공고 출신 교사가 영도중으로 오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16] 참고로 이때 함께 있던 선수가 축구 선수는 황재만, 야구 선수는 김용희다. [17] 허정무의 PSV 에인트호번 이적 후 첫 경기인 ADO 덴하흐 전과 마지막 시즌 마지막 경기 FC 즈볼러 전 날짜 [18] 당시 분데스리가는 팀당 한 경기에 비 독일인 선수를 2명만 출전 시킬 수 있던 외국인 쿼터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함에 따라 꺼린 부분도 있다고 한다. 한편으론 그런 경쟁을 뚫고 10년간 주전으로 뛴 차범근의 위대함을 알 수 있다. [19] 이전 문서에도 수비형 미드필더 치고 준수한 기록이라고 쓰여있었다. [20] '후'라고도 불렸다는데 사실 그냥 별 뜻 없이 성씨인 Huh(허)를 '호'나 '후'로 발음하여 부른 걸 국내 언론에서 라이벌 기믹이 있던 차붐에 대치되도록 띄운 느낌이 강하다. [21] 해가 지날수록 허정무를 주전으로 기용할 때마다 팀 내에서 반발이 거셌다고 한다. [22] 이때 크루이프는 팔꿈치로 허정무의 코를 박살낸적도 있다. 당연히 팬들, 언론들한테도 비난을 받았고 왜 그랬냐는 질문이 나왔을때 "훌륭한 선수니까."라고 한 말이 유명하다. [23] 1970년대 네덜란드를 빛낸 레전드로 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1974년 서독 월드컵에서 월드컵 준우승을 경험하였고 네덜란드 올해의 선수상을 받는 등 화려한 실력을 뽐낸 선수다. 특유의 드리블과 제공권이 압권이었고 일반적인 패스를 뛰어넘는 중장거리 패스가 정확성을 가미할 만큼 일품이어서 아직도 네덜란드 역대 레전드에 뽑히는 선수로 기억된다. 대충 전문 용어로 설명하면 '딥-라잉 플레이메이커' +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의 모습을 보여준 선수라고 할 수 있다. [24] PSV에서 3년만 뛰고 돌아온 이유는 아내의 향수병이 심했기 때문이다. 정작 본인은 더 뛰고 싶은 마음도 있었으나 타향살이에 지친 아내의 뜻을 존중했다. 마침 1983년부터 K리그가 출범하면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25] 만약 1년만 더 있었다면 거스 히딩크와 함께 했을것이다. 히딩크는 1984년에 PSV 에인트호번의 지도자로 들어왔다. [26] 원조는 좌진국 우범근이고 이게 더 유명했다. [27] 마라도나가 바르샤에서 당했던걸 생각해보자. [28] 첫 번째 골(1:1 을 만든 동점골)을 넣은 선수는 최순호이며 허정무의 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 각각 대한민국의 월드컵 경기 3번째와 4번째 득점이다. [29] 현재도 어부지리성 골을 주워먹기라고 놀리는 경우가 많지만 실전에서 선수들은 세컨드 볼을 예상하고 볼이 흘러나오리라 예상되는 위치를 점하기 위해 쉴새없이 수싸움을 하며, 흘러나온 볼을 주워먹는 상황이라고해서 상대 수비가 없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않다. 결국 '어부지리' 골도 예측력, 위치선정, 민첩성, 집중력, 마무리 능력 등이 요구되는 쉽지않은 득점이다. [30] 2002년 당시 해설로는 부진했다. 경쟁사인 MBC는 차범근, SBS는 신문선이었다. KBS는 허정무 단독으로는 이기기 힘들다고 판단해 이상철도 불렀고, 공동 해설자로 최수종을 옆에 앉혀놓았으며, 폴란드전에서는 고종수가 마이크를 잡기도 했다. [31] 대표팀 선수들이 슈팅을 너무 아끼고 있으니 더 잦은 슈팅을 해달라고 조언한 것을 보면 나름 본인의 철학에 맞게 해설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심하게 지나쳤는데, 공이 골라인에 걸쳐있는데 슛을 외치는건 기본이고 아예 하프라인 조금 넘은 시점에서 무작정 슛을 외치거나 심지어 공이 밖으로 나갔다는데도 슛을 외치기도 한다. [32] 이 "슛!"이라고 외치는 소리가 묘하게 중독성 있어 역대 해설위원 중 가장 슛을 찰지게 외치는 사람이라고 평가받는다. [33] 동영상이 거의 웃음참기 수준이다. 우울할 때 댓글을 읽으며 보면 정말 좋다. [34] 이동국은 허정무가 2002년을 대비한다고 연령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을 겸임할 때, 연령별 대표팀과 국가대표팀에서 동시에 소집하면서 뼛골까지 빨아먹은 선수였다. 특히 허정무가 아시안컵 3위를 할 때 이동국이 대회 득점왕을 먹으며 수훈갑 역할을 했는데 이 때 이동국은 허정무가 혹사시킬 정도로 출전 시간을 늘리는 바람에 대회 내내 무릎에 테이핑을 하고 경기를 뛰었다. 즉 무슨 말이냐면 이 당시 이동국에 대해 느리다는 비난을 많이 퍼부었는데, 사정을 아는 사람이 듣기에는 아니 자기가 이동국을 혹사시킴으로 신체능력을 저하시켜서 느리게 만들어놓고 왜 느리다고 욕을 하냐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35] 자기 기준에서 A대표팀 해설하면서 오랜만에 본다는 뜻이다. [36] 선수 시절 슛 스페셜인줄 알고 누른 사람도 있다. [37] 박주영이 이 대회 한국팀 최다득점자이긴 한데 조영철의 2골과 비교해 볼 때 4골이라 막 압도적으로 많이 넣은 대회도 아니었다. [38] 선수 출신 해설진의 경우 자신의 선수시절 경험이나 팬들이 모를 수 밖에 없는 선수의 심리나 판단 등을 설명해서 신선함을 안기기도 하지만 선수 출신 해설위원이 정작 눌변인 사람도 많고, 무엇보다 본인이 자신의 선수 경력만 믿고 축구에 대한 공부를 소홀히해서 팬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사례가 많다. [39] 제주 유나이티드를 이끌고 K리그의 강팀으로 만들었던 K리그의 명장인 박경훈 감독도 아시안컵 해설에선 팬들을 졸게 만드는 답답한 해설로 원성이 자자했다. [40] 허정무가 선수 시절 처음 네덜란드에 진출했을 때 경기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하는데, 네덜란드 축구장의 경우 그라운드만 덩그러니 있는 한국과 달리 레스토랑을 비롯해 마트 등 여러 상업시설이 있었으며, 경기장은 축구 경기가 없는 날에도 사람들이 일상생활을 즐기는 곳이었다고 한다. [41] 영화관과 대형마트가 있는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제외하면 대부분 프로축구장은 경기가 없으면 텅텅 비는게 현실이다. [42] 이러한 점 등을 두고 B팀 운영에 대해서도 축구계에서 여러 구설수가 많이 나오자 허정무는 답답해서 문제가 있었다면 사법 처리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고 말하며 하나금융그룹 쪽에 감사를 철저하게 해보라고 요청 했었다고 한다. [43] 물론 실력좋은 선수들이라면 어디서는 영입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지만, 적잖은 비용을 투자해 운영 중인 자체 유스팀 영입은 미미한 수준으로서 2021년 대전 구단은 U-18에서 강세혁만 프로로 콜업했다. [44] 과거에는 대전월드컵경기장시설관리공단이 주체가 돼 운영했지만 현재는 하나금융그룹이 위탁 운영하게 되면서 2022년 싸이 흠뻑쇼’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흠뻑쇼를 준비하려면 그라운드에 크레인이 들어와 무대를 설치하는데, 그러면 잔디가 다 죽는다. 거기에 수만 명이 그라운드에서 공연을 보며 뛰고, 물인지 음료수인지 맥주인지를 다 흘리고, 수백 톤의 물이 쏟아져 도저히 잔디가 살 수 없고, 이렇게 잔디가 훼손되면 대전 구단의 경기력에 영향이 갈 수 밖에 없다. # [45] 사실 하나금융그룹 측이 매각 전부터 스포츠산업진흥법이 허용하는 최대치인 25년간 장기 임대를 원했지만 대전시는 5년 단위로 계약 연장하는 것을 주장하면서 좀처럼 의견이 좁혀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회의에서 허정무는 “장기 임대가 핵심 사안이다, 구단이 경기장을 장기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반드시 25년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지만 대전시는 이제 하나금융그룹이 인수를 하는 단계가 되니까 아쉬울 게 없는 쪽으로 생각이 바뀌는 분위기이자 결국 “대전시 의견처럼 5년으로 할 거면 구단 인수할 필요가 없다. 그냥 접고 없던 일로 하시죠”라고 아주 강하게 나가자 대전시가 양보를 해서 25년 계약을 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어렵게 구단 인수를 결심한 하나금융쪽에도 대전시가 선물을 하나쯤 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주장해서, 경기장 잔디 전면 교체 약속도 받아냈다고 한다. [46] 첨언하자면 대강 허정무와 차범근의 현역 시절 둘을 촬영하기로 했는데 차범근의 아내가 이를 펑크내고 허정무를 깎아내렸다는 기사이다. 다만 이 건에 대해서는 오직 저 기사 하나에서만 언급되고 두 선수 사이의 공식적인 언급도 없으며, 댓글에도 나오듯이 기레기의 농간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차범근이 이유 없이 허정무를 깎아내려 문제를 만들 필요도 없고, 더욱이 한국에서 서로 귀한 해외파 선수들끼리 문제를 일으킬 이유도 없다. 여러 면에서 살펴봐도 근거나 타당성이 상당히 부족한데다 느닷없이 2007년에 나온 기사라는 것 역시 신빙성이 의심된다. [47] 다만 훗날 자서전에서 허정무는 차범근을 만나기로 했다가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 사실이 있다는 점은 인정했다. 그러나 자서전 내용에 따르면 디테일한 부분은 다소 차이가 있는데, 둘이 함께 뛰는 모습이 아닌 부부 동반으로 모임을 하는 걸 촬영하기로 했고 약속 장소도 경기장이 아닌 공원이었다. 모임이 파토난 과정도 차범근의 부인의 폭언이 아닌, 차범근 쪽에서 주선한 특파원에게 약속을 취소한다고 특파원 사무실에 미리 연락을 했는데 이미 특파원은 출발을 해버려 전달이 되지 못한 탓이 가장 컸다.(휴대폰이 없던 시절이다.) 하지만 당일날 특파원이 이미 허정무가 500km나 달려왔다며 사정을 설명하고 만남을 요청했음에도 차범근은 휴식을 이유로 거절했고, 이를 전해들은 허정무는 "차 선배에게 이런 대접밖에 못 받는 남편이라 동행한 만삭의 아내에게 미안했다"라는 표현으로 이 당시의 서운한 감정을 회고했다. # # [48] 거스 히딩크는 3백과 4백을 번갈아 쓰며 마지막 프랑스와의 평가전때까지 4백을 시험했으나 빌드업을 담당할 홍명보가 4백에 적응 못해서 포기. 움베르투 코엘류나 딕 아드보카트도 4백 체제 안착을 시도 했지만 정작 중요한 경기에서는 3백과 3-4-3 전술을 사용했다. 4-5-1과 4-2-3-1 같은 전술이 대한민국 대표팀에 안착한 건 베어백 시절부터다. [49] 실제로 뛰어 보면 국제 리그 선수들의 경우는 축구 좀 한다고 하는 일반인과 리듬과 템포, 몸싸움, 발재간이 차원이 다르며 중앙선에서 골을 넣을 정도의 킥력을 보유하고 있다. 빅리그 선수 정도 되면 만약 EPL 선수가 먼저 공을 가지고 시작한다면 1:11로 뛰어도 EPL 선수에게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한다. 한국 내셔널리그 선수랑 시합 하다가 그냥 대놓고 몸통박치기를 시전했는데 그냥 튕겨나갔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어떤 군대 축구 대회에서는 한 팀이 영혼의 9백 수비를 하고, K리그 수비수 출신이 혼자 공격을 했는데, 나름대로 축구 좀 한다는 사람들을 전부 꺾고 결승까지 올라온 상대팀이 그 혼자서 공격하는 걸 못 막아서 패했다고 한다. 이건 비단 축구 선수만 그런 건 아니고, 모든 운동 선수가 다 이렇다. 보스턴에서 쫓겨난 채태인이 사회인 야구에서 타자로 잠깐 뛰었는데 그야말로 무쌍 찍었다. 그만큼 프로에서 아무리 못 한다고 해도 아마추어와의 갭은 상당히 크다. [50] 허정무가 네덜란드에서 활동했을 당시 불렸던 별칭이다. [51] 지난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비례대표 당선인은 25명이었다. 이번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의 의석 수가 줄면서 17~18, 많게는 20번를 안정권으로 본다. 실제로 새누리당이 국회의원 선거에서 참패를 당해 비례대표는 17번까지 당선되었다. [52] 이 경기는 A대표가 아니라 올림픽 대표를 겸임하던 때의 올림픽 대표 U-23 경기이다. 1999년 9월 7일 도쿄에서 열린 경기. [53] 겸임했던 U-23 대표 성적으로는 이 시절 기록한 2전 2패로, A대표와는 대조적으로 가장 안좋다. [54] 이 시절은 A대표 대회였다. [55] 사실 축구 선수들 중 흡연자가 의외로 많다. [56] 2023년 1월 초부터 시행한 '고향사랑기부제'는 수도권 중심으로 편중된 세수를 지방으로 재분배하고 모금된 기부금은 주민 복리증진과 지역발전을 위해 사용하는 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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