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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4:54:54

김현석(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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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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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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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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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석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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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 · 1992 · 1995 · 1996 · 1997 ·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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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5cf2c><colcolor=#244694> 충남 아산 FC 감독
Chungnam Asan FC
파일:2024김현석.png
이름 김현석
金鉉錫 | Kim Hyun-seok
출생 1967년 5월 5일 ([age(1967-05-05)]세)
강원도 삼척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8cm
직업 축구 선수 ( 세컨드 스트라이커, 공격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경영인
학력 삼척초등학교 (1974~1980)
강릉중학교 (1980~1983)
강릉농업고등학교 (1983~1986)
연세대학교 (1986~1990)
소속 <colbgcolor=#f5cf2c> 선수 현대 호랑이/울산 현대 호랑이 (1990~1999)
상무 축구단 (1993~1994 / 군 복무)
베르디 가와사키 (2000)
울산 현대 호랑이 (2001~2003)
감독 울산 현대 호랑이 (2002~2003 / 플레잉 코치)
울산 현대 호랑이 (2004~2008 / 2군 코치)
울산 현대 (2009~2010 / 코치)
울산 현대 (2011~2012 / 수석 코치)
울산 WFC (2013)
강릉중앙고등학교 (2014~2017)
울산대학교 (2018~2021)
충남 아산 FC (2024~ )
행정 울산 현대 (2013 / 유소년 강화부장)
충남 아산 FC (2022~2023 / 사무국장)
국가대표 23경기 5골 ( 대한민국 / 1990~1996)
종교 천주교( 세례명: 스테파노)

1. 개요2. 선수 경력
2.1. 프로 이전2.2. 현대 호랑이 (1990~1993)2.3. 울산 현대 호랑이 (1995~1999)2.4. 베르디 가와사키2.5. 울산 현대 호랑이 (2001~2003)2.6. 플레이 스타일
3. 국가대표 경력4. 지도자 경력
4.1. 초기4.2. 충남 아산 FC 감독4.3. 지도 스타일
5. 경영인 경력6. 논란7. 여담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 선수 출신 감독. 現 K리그2 충남 아산 FC 감독. K리그1 통산 베스트 11 선정 횟수 6회로 필드 플레이어 중 두 번째로 많이 수상했다.[1] Mr.울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울산 현대 역대 최다 출장, 최다 득점, 최다 도움, 최다 베스트11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K리그 울산 현대의 레전드. 울산 현대의 레전드로 유명한 후배 유상철과 1996년 K리그 첫 우승을 함께했다.

K리그 팬들에게는 흔히 기록의 사나이로 통하며 신태용, 윤상철, 고정운과 더불어 1990년대를 풍미했던 K리그의 레전드 중 한 명. K리그와 리그컵에서 통산 373경기 111골[2] 54도움을 기록했으며, FA컵과 ACL 등 공식 경기 기준으로는 울산에서만 최소 400경기 120골 64도움을 기록했다 (일부 경기 기록 미상)

2. 선수 경력

2.1. 프로 이전

강원도 삼척시 출생으로 삼척 초등학교4학년에 축구를 시작했다. 이후 강원도 축구 명문 중학교인 강릉중학교로 진학했고 이 무렵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이태복 강릉중 감독에 따르면 100m를 12초에 끊을 만큼 준족에 기술을 보유했다고 한다. 중학교 전국 대회에서 강릉중을 이끌고 득점왕에 오르자, 여러 고등학교들의 주목을 한몸에 받았다.

그 중 강원도 최대 축구 명문인 강릉상업고등학교에서 김현석을 노렸으나, 치열한 경쟁 끝에 라이벌인 강릉농업고등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상대적 약체였던 강릉농고에서도 역시 두각을 보였고, 김현석을 지켜본 연세대학교의 스카우트로 축구를 시작한 지 10년 만에 고향 강원도를 떠나 대학 최고의 팀으로 진학했다. 2학년 연고전에서 멀티골을 터뜨리고, 팀을 1987년 전국축구선수권대회 준우승에 기여하는 등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4학년에는 주장 완장을 달고 1989년 제37회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등 대학 최대어로 평가 받았다.

1990년 드래프트에선 이미 대학 최고의 선수로 명성이 자자했다. 같은 시기 주목을 받은 선수가 하석주. 결국 1순위 지명권을 얻은 현대 호랑이 송주석과 함께 김현석을 뽑았다. 당시 현대 호랑이는 울산과 함께 강원도를 연고지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현석은 고향팀의 지명을 받으면서 제2의 고향인 울산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2.2. 현대 호랑이 (1990~1993)

파일:91 ulsan hyundai squad.jpg
1991년 프로축구 개막전 때 현대 호랑이 선수들[3]
김현석이 입단하기 직전 시즌에 현대가 꼴찌를 차지했기 때문에, 세대교체의 주역으로 현대가 김현석에게 거는 기대는 컸다. 김현석은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음에도 28경기 5골을 넣으며 리그 득점 9위에 오르는 등 분전했지만, 팀은 여섯 팀 중 5위에 그치며 실망스러운 신인 시즌을 보냈다. 이 시기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할 만큼 주목 받는 유망주로 성장하고 있었다.

1991년 현대의 4대 감독으로 부임한 차범근 감독 아래서, 공격수로 완전히 정착하며 김현석의 첫 번째 전성기가 시작된다. 이 해부터 본격적으로 울산으로 연고 정착을 시작한 팀을 따라, 울산의 가물치로 다시 태어난다. 90년대 초반 그의 테크닉은 기존에 국내에 없던 종류의 것이었으며, 모두 팀 최다인 리그 39경기 14골 4도움을 터뜨리며 리그 득점 3위에 팀을 준우승으로 이끈다. 또한, 개인 커리어 첫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됐다.

1992년에도 활약을 이어가며 29경기 9득점 7도움으로 득점과 도움 모두 리그 2위를 기록하며 팀의 리그 3위에 기여했다. 또한 신설된 아디다스컵에서도 8경기 4골로 득점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2년 연속 리그 베스트 11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 1993년에는 11경기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던 와중, 6월에 상무 축구단에 입대하며 1년 6개월 간 팀을 떠나 있었다.

2.3. 울산 현대 호랑이 (1995~1999)

파일:external/www.kfa.or.kr/20131023133038.jpg
1998년 아디다스 코리아컵 우승 및 득점왕 수상 직후

1995년 전역 후 팀에 돌아오자 팀은 울산 현대 호랑이로 팀을 바꾼 상황이었고, 감독도 고재욱으로 바뀐 상황이었다. 고재욱 감독 역시 김현석을 중심으로 팀을 개편했다. 투박한 팀 색깔에 김현석은 그야말로 크랙이었다. 특유의 유려한 드리블과 볼터치, 킥 능력을 통해 그 중심으로 팀은 공격을 전개했다. 결국 1995년 리그 26경기 12골로 득점 2위 아디다스컵 7경기 6골, 도합 33경기 18골을 넣으며 개인 커리어 최다 골을 기록했다. 리그 베스트 11에도 3년 만에 오르며 팀의 아디다스컵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또한, 보카 주니어스 내한 당시 황선홍, 노상래와 함께 리그 간판 공격수로 이름을 올렸다.

1996년을 앞두고 주장 완장을 찬 김현석은 주장으로서 팀을 이끌었다. 득점은 리그 기준 8골로 줄었지만, 8개의 도움을 기록하는 등 솔선수범 하며 희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홍민, 송주석, 신홍기 등과 함께 공격을 이끌며 전기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후기 리그 우승은 수원에 내주며 챔피언결정전으로 갔다. 1차전 홈에서 패했지만, 2차전 수원 원정에서 김현석이 직접 선제골을 터뜨리는 등 팀의 승리에 기여했다. 역시 리그 베스트 11에 뽑혔으며, 울산의 창단 13년 만에 첫 리그 우승으로1996년 프로 축구 올해의 선수에 뽑혔다.

1997년에는 초반 팀의 상승세를 이끌다가, 7월부터 9월까지 부상으로 전력에서 이탈하게 된다. 이러한 김현석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울산은 리그와 리그컵에서 모두 우승에 실패하며 씁쓸한 한 해를 보내게 됐다. 그러나 김현석은 리그컵에서 13경기 4골, 리그에선 17경기 9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과 베스트 11에 오르며 개인 커리어를 빛냈다.

1998년 리그 시작전 연봉 1억 2천만원으로 황선홍과 함께 리그 최고 몸값 선수가 됐다. 그리고 월드컵 이전 시행한 아디다스코리아컵에선 10경기에서 무려 11골을 기록하며 팀의 3년 만에 리그컵 우승과 득점왕에 올랐다. 프랑스 월드컵이 끝난 7월 리그가 개막했다. 10월 10일 동해안더비에서 정정수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며 고정운에 이어 리그 통산 두 번째 40-40 클럽 가입한 선수가 됐다. 고정운과는 달리, 김현석은 울산에서만 기록한 것이라 최초의 원클럽맨 40-40 클럽 가입자가 됐다. 그리고 K리그 플레이오프 2차전 포항과의 경기에서 김병지의 헤더골로 연결된 프리킥을 쏘아 올리는 등 많은 활약을 펼쳤지만 리그에선 수원 삼성에게, FA컵에서는 안양 LG에게 각각 밀려 아깝게 준우승을 기록한다. 하지만 김현석은 이번에도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4년 연속 리그 베스트 11에 선정되는 역사를 썼다.

1999년에는 유상철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했고, 김도균 김병지 등 핵심 선수들이 줄부상에 빠지며 플레이오프에도 오르지 못하는 부진에 빠졌고, 김현석은 혼란스러웠던 고재욱호 대신 새로운 도전을 모색한다.

2.4. 베르디 가와사키

파일:Verdy Kawasaki Kim Hyun Seok.jpg
베르디 가와사키 시절
그리고 1999년 시즌이 끝나고 FA로 풀린 12월, J리그 베르디 가와사키와 1년 계약을 맺었다. 연봉은 약 4천만엔.

개막과 동시에 팀 공격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리그에서 16골을 기록한다. 시즌 초반부터 유상철과 득점왕 경쟁을 벌였고, 나비스코컵에서도 1골을 기록하는 등, 활약했다. 특히 당시 베르디에는 재일교포인 이국수 총감독이 팀을 이끌고 감독에 장외룡,[4] 선수로 김도근, 량규사 등이 함께 활약하여 팀 적응에 도움을 받았다.

김현석의 활약상에 만족한 베르디는 김현석과 2년 재계약을 추진했는데 울산이 2000년 K리그 꼴찌를 기록한다. 그러자 높으신 분들이 나서서 복귀를 요청했고, 김현석은 흔쾌히 울산으로 복귀한다.

지금도 울산 팬은 단연코 김현석을 울산의 레전드이자 프렌차이즈 스타로 꼽는 데는 바로 이런 사연이 있다. J리그 통산 29경기 17골.

2.5. 울산 현대 호랑이 (2001~2003)

파일:external/sccdn.chosun.com/2011020701000243100019201.jpg
2003 시즌 선수단 프로필 사진 촬영 때
2001 시즌을 앞두고 울산과 1년 계약했다. 등번호는 16번.

복귀한 울산은 김정남 체제에서 포백으로 출발했다. 그러나, 새롭게 출발한 팀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김현석도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심지어 리그 개막전 열린 아디다스컵에선 공격포인트를 하나도 기록하지 못했다. 김현석은 투톱의 한 자리에 나서며 세트피스 키커를 전담했다. 결국, 자신의 국내 프로통산 300번째 경기인 2001년 7월 21일, 리그 9라운드 전남 드래곤즈 원정에서 마르코스의 헤더를 도우며 K리그 최초 50-50 클럽 가입했다.[5]

그리고 4일 뒤인 10라운드 부천 SK와의 홈경기에선 경기 종료 직전 부천 페널티 지역에서 얻어낸 파울로 발생한 PK상황에서 침착하게 동점골을 집어넣으며 국내 프로 축구 2호 100호골 기록했다. 그리고 정규리그 마지막 경기인 수원 삼성 블루윙즈와의 홈경기에선 후반 역전 결승골을 넣으며 통산 104호골을 기록, 윤상철을 넘어 역대 최다 득점자 자리에 오르게 됐다.

2002년을 앞두고, 팀과 플레잉 코치로 계약했다. 지난 시즌부터 불안했던 팀 수비에 대한 해결책으로 전반기에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뛰었고 후반기부터는 스리백으로 포메이션을 변신한 팀에서 리베로로 보직을 변경했다. 서른이 넘은 황혼기에 김현석의 활동량은 현저히 떨어졌고, 팀은 이천수라는 슈퍼 루키와 함께 공격진을 개편하게 됐다. 이에 김정남 감독은 김현석을 스위퍼 자리에 놓은 것이다. 하지만 그의 특유의 킥과 경기 운영 능력은 스위퍼 자리에서 더욱 돋보였고, 프리킥과 페널티킥 상황에서 주로 나서 2002년에도 시즌 6골과 2도움을 기록하며 리그와 아디다스컵에서 준우승을 차지하는데 기여하는 등, 팀을 다시 정상화하는데 앞장선다. 또한, 9월 4일 창원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리그 15라운드 홈경기에서 출전하며 프로 통산 339번째 출장하며 김경범이 갖고 있던 당시 프로 통산 최다 출전 기록도 세우게 됐다. 당시 기준 최다 출장, 최다 득점, 최다 도움 기록을 모두 갖고 있던 선수였다.

2003년에는 16번을 후배 김정우에게 넘겨주고 8번을 달았다. 이번 시즌에도 플레잉 코치로 1년 계약했지만, 변함없이 팀에서 주전으로 나섰다. 그러나, 유상철, 이천수 등 핵심 멤버들이 여름에 떠나며 팀은 새로운 세대교체를 시작했다. 김현석도 단 하나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못하며 그의 마지막 목표였던 60-60 클럽이 사실상 어려워짐을 느꼈다. 결국 2003년 8월 15일 K리그 올스타전에서 은퇴했다.[6] 김현석은 올스타전에 출장해 1골 1도움을 기록했다. 하지만 이날 각 구단 서포터들이 올스타전 응원을 거부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져[7] 그 빛이 바랬다.

2.6. 플레이 스타일

전성기로 뛰던 90년대 후반 대한민국 축구가 차범근 감독을 필두로 독일 축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장신에 준족 공격수를 요구하던 팀 전술에도 맞지 않았다. 말하자면 피지컬을 무기로 삼는 공격수가 득세하던 시기에, 순수한 테크닉으로 불멸의 기록을 쌓아나간 이단아였다.

김현석의 특징은 21세기 대표팀 선수보다 한수 위인 퍼스트 터치와 슈팅. 때문에 문전에서 김현석에게 볼이 가면, 수비가 슈팅 타이밍을 예측하기가 힘들어서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데드볼 처리 능력도 정교해서 소속팀에서 프리킥을 전담하기도 했다. 흔히 말하는 '볼을 참 얄밉게 찬다'는 스타일.

흔히, 김현석의 전성기 때 연소했던 팬들은 김현석의 플레이스타일이 상당히 투박했다고 잘못 기억하고 있기도 한데, 이는 그의 불같은 성격 때문이다. 웬만큼 짬밥을 먹은 후에는 상대 팀의 어린 선수가 자신에게 태클을 걸면 폭풍갈굼을 시전 하는 일은 예사였었고, 경기 뒤지고 있을 때, 볼보이가 공 늦게 갖다준다고 폭언을 퍼부은 적도 있다, 2001년 울산-안양 경기에서는 경기 시작 10분만에 퇴장당했는데, 안양의 김성재와 자리다툼을 하다 주먹다툼으로 이어졌기 때문. 이에 심판 판정에 불복하면서 5분 넘게 경기가 중단되기도 했다. 상당히 부정적으로 써놓았는데, 역으로 보자면 그만큼 승부욕이 강했던 선수.

3. 국가대표 경력

K리그에서의 엄청난 활약상에 비해, 국가대표에서는 그다지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역시 K리그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레전드임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로서는 이렇다 할 족적을 남기지 못한 신태용, 윤상철, 김기동, 우성용, 김은중, 정조국 등과 비슷하다. 1994년, 1998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 참가했으나, 눈에 띄는 성과를 올리진 못했다. 때문에 번번히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다. 그러자 국내용이란 불명예스러운 꼬리표가 붙었다. 국가대표로서 통산 기록은 23경기 5골.

어찌 보면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운한 선수였다. 하필 90년대에 황선홍(1968년 183cm), 김도훈(1970년 183cm), 최용수(1971년 184cm) 걸출한 공격수가 바통 터치라도 하듯 나타났을 뿐더러 워낙 황선홍이 끝판대장이라 좀처럼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당시 아시아권 어느 팀에 갖다놓아도 꿀릴 게 없던 김도훈, 최용수가 만년 2인자 신세를 면했고, 우성용(1973년 191cm)은 아예 선발되지도 못했을 정도니.

4. 지도자 경력

4.1. 초기

파일:2009 ulsan coach Kim Hyun Seok.jpg [8]

은퇴 직후인 2004년부터 2012년까지 울산 현대의 코치로 재직하였다.

ACL 우승 시즌인 2012년 이후 코치진에서 물러나며 유소년 강화 부장으로 보직 변경하였는데, 당시 주변 얘기로는 선수들을 강압적으로 휘어잡고 심지어 김호곤 감독과 마찰을 빚는 등, 김현석 코치의 주관이 강한 성격 때문에 좌천된 게 아니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2013년 여름 창단한 울산WFC 여자축구단의 창단 감독으로 부임하며 여자 축구계에 데뷔했다.

2014년부터 모교 강릉중앙고등학교 감독으로 부임해 2017년까지 전국 고교축구대회 준우승, 전국 고등리그 왕중왕전 3위, 권역리그 우승 등을 이끌었다.

2018년부터는 유상철 감독의 후임으로 울산대학교 축구부 감독으로 부임하며 울산으로 복귀했다.

애초 울산대는 내부 승진을 통해 사령탑 공백을 메우고자 했지만 김현석 감독 카드를 꺼내든 건 최근 모기업 차원에서 프로 구단부터 유스까지 연계 시스템을 확고히 하며 울산대에 사실상 울산 현대의 ‘U-23팀’ 구실을 맡겼기 때문이었다.

조금 더 프로 1군으로 활용가치를 높일 자원을 육성하는 데 초점을 두면서 구단 문화와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경험해온 김 감독을 선임한 것이라고 한다.

짧은 패스에 집착하기보단 상황에 따라 복합적인 루트를 제시하며 팀을 이끌었고, 2021년까지 울산대 축구부를 지도했다.

4.2. 충남 아산 FC 감독

2023년 12월 1일 박동혁의 후임으로 충남 아산 FC의 사무국장에서 감독으로 보직을 변경하며 프로팀 감독으로 데뷔하게 되었다. #

김현석은 “선수들과 화합하고 소통하며 열심히 뛰고 이길 수 있는 축구를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선수단과의 상견례에서는 기술보다는 체력을 중요시 할 것이며, 원활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선수들과는 언제든 소통하며 이야기 나눌 것이라는 의지를 드러냈다.

그리고 훈련 이외의 사생활에는 일절 터치하지 않으므로 자유롭고 즐겁게 지내되, 밖의 생활의 연장선이 훈련장 안으로 들어오면 절대 안된다고 강조하면서 사생활 문제가 훈련과 축구에 영향을 줘서는 안됨을 명시했다. #[9]

4.2.1. 2024 시즌

1라운드 수원 삼성 와의 원정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렀고, 아쉽게 2:1 패배하였다.

경기 이후 인터뷰에서 "선수들이 원정에서 수원 팬들의 응원에 눌리지 않고 경기에 임해줘 고맙게 생각한다." 고 데뷔전 소감을 전했다.

2라운드 부천 FC 1995 와의 홈경기에서 후반전 부천에게 선제실점을 내줬지만 후반전 71분 주닝요의 동점골이 터졌고 부천에서 퇴장이 나왔지만 팀은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3라운드 경남 FC 와의 원정경기에서 2:1 승리와 K리그2에서 리그 첫 승을 거두었다. 부임 세 번재 경기 만에 라운드 베스트팀을 수상했다.

4라운드 충북 청주 FC와의 충청 더비 홈경기에서 4:1 승리 및 시즌 첫 2연승을 거두었다. 2경기 연속 라운드 베스트팀을 수상했다.

3월 한 달 동안 승점 7점으로 K리그2 단독 선두를 달리며 프로 지도자로서 첫 달을 완벽하게 보냈다. 기존 팀의 핵심인 박세직, 이학민, 강준혁, 강민규, 박대훈 등에 새로 합류한 박병현, 최희원, 황기욱, 김종석, 그리고 U-22의 젊은 신송훈, 정마호 등으로 적절히 벨런스 있게 팀을 꾸리며 초반 돌풍을 선보이며 리그 내 충격을 주고 있다.

5라운드 성남 FC 홈경기에서 후반전 강민규의 선제골이 있었지만 후반전 83분 동점골을 내주면서 아쉽게 1:1 무승부를 거두었다

7라운드 천안과의 아산천안더비 홈경기에서 강민규 김종석의 연속골이 나오면서 리드를 잡았지만 이내 동점골을 허용하며 아쉬운 2:2 무승부를 거뒀다.

8라운드 전남 드래곤즈 홈경기에서 후반 12분 정마호의 선제골이 터졌지만 1:1로 무승부를 거뒀다.

9라운드 서울 이랜드 FC 원정경기에서 5:0으로 대패를 하며 처참한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특히 수비 실책으로 먹힌것들이 다수이다.

첫 라운드 로빈을 리그 9위로 마무리했다. 3월엔 좋은 출발을 보였으나 이후 전력의 한계를 보이며 순위가 많이 내려갔다.

14라운드 수원 삼성 홈경기에서 후반전 93분 황기욱의 극장 중거리슛으로 팀의 1:0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가 끝난 뒤 직전 김포전 패배 직후 사퇴 의사를 전했으나 구단이 만류했다고 밝혔다.

18라운드 경남 FC 홈경기에서 4:0 대승을 거두었다. 수원 FC에서 자유계약으로 영입한 호세의 쐐기골 주닝요의 멀티골로 시원하게 이겼다.

19라운드 성남 FC 원정경기에서 또 4:0 대승을 거두었다. 공격 축구답게 주닝요의 발끝에서만 3득점이 터졌다.

20라운드 서울 이랜드 FC 홈경기에서 2:0으로 승리하며 지난 번 대패를 갚아줬다. 이 승리로 리그 3위에 올랐다.

7월을 끝으로 두 번째 라운드 로빈을 4위로 마쳤다. 쟁쟁한 구단들 사이에서 플레이오프 진출 순위권을 유지하며 아산의 돌풍을 이끌고 있다. 의문 부호가 많은 지도자 데뷔 시즌이었지만 시즌 3분의 2를 마친 시점에서 성공적인 감독 데뷔 시즌을 보내고 있다.

9월 마지막 경기인 선두 안양 원정 경기에서 1:0으로 승리하며 리그 2위에 올랐다. #

2024년 10월 10일 K리그 9월 이달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9월 5경기 동안 고작 3실점밖에 하지 않으며 2위까지 올라왔지만, 10월 2경기에서 무려 5실점으로 잠깐 기우는 듯 했지만, 37라운드 서울전 승리로 구단 창단 첫 플레이오프 진출을 확정지었다.

하지만 수원 삼성전이 끝나고 논란을 일으켰다.

4.3. 지도 스타일

2009년에 P급 라이센스를 취득하고 이후 청강을 두 번 더 들어갔을 만큼 학구열이 높은 지도자이다.

서술한 바와 같이 기술보다는 체력을 중요시 하며 펩 과르디올라가 추구하는 인버티드 전술을 선호한다.

울산대 시절에는 4-2-3-1과 4-4-2 포메이션을 오가며 짜임세 있는 패스 플레이를 통해 공격 찬스를 만들어내는 것을 중요시했다.

하지만 아산 감독 부임 첫 해에는 이와 상반되게 K리그1, 2를 통틀어 비대칭 백쓰리를 활용하는 유일한 감독이었는데, 실제로 후방 빌드업에 강점을 띠는 미드필더가 수비진에 배치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비대칭 백쓰리', '인버티드 윙백'으로 대표되는 자신의 전술 철학은 J리그의 사간 도스를 많이 참고했다고 하는데, 스위칭도 많아 상대 선수끼리 헷갈리게 만든다.

5. 경영인 경력

2013년 울산 현대 유소년 강화부장으로 재직하며 경영, 행정 쪽 업무를 시작하였으며, 2022년부터 2023년까지는 충남 아산 FC의 사무국장을 맡았다. #

6. 논란

2024년 K리그2 37라운드 수원 삼성 원정경기에서 전반전 39분 코너킥에서 박대훈의 선제골이 있었지만 후반전 연달아 실점을 함에 따라 2:1 역전패를 당하며 우승에는 실패한 것은 물론 2위 자리도 위태로워진 만큼 마지막 청주와의 경기는 승리가 반드시 필요해졌다.[10][11]

한편 이날 경기 심판 판정을 두고 "할 말이 없다. 선수들에게 미안하다. 열심히 준비를 잘했는데 실력적인 이유보다는 누가 봐도 명백한데 수원한테 유리하게 판정이 된 것 같다. 주심이 무엇을 보는 것인가? 선수들에게 너무 미안하다"고 언급하며 심판 판정에 대해 강하게 질타하기도 하였다. #[12][13][14]

하지만 경기 종료 후 팬들 앞에서 “우리 구단이 돈이 많았었다면” 등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올랐으며, 이에 수원 팬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판정이 알고 보니 정심이었던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설령 진짜 편파라고 한들 공개석상에서 할 말이 있고 안 할말이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냥 괜히 수원 구단에게 시비를 건 것이다.[15]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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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위는 9회의 신태용. [2] 기록 수립 당시 K리그 최다 골 기록이었다. 이후 김도훈(114)과 우성용(116), 김은중(121), 데얀(198), 이동국(228) 등이 뛰어넘었다. [3] 사진 앞줄 맨 좌측이 김현석. [4] 이국수 총감독은 베르디 부임 전에는 고교급 감독만 15년을 한 젊은 지도자로 일본에서 프로 수행에 필요한 일본축구협회 S급 자격증( AFC P급에 해당)이 없었다. 그 때문에 총감독으로 2년만 재임했고 S급 자격증 보유자를 명목상 감독으로 두어야 했다. 당시 요미우리가 손을 떼어 경영에 난맥상을 겪던 베르디라서 나왔던 특수상황이라고 볼 수 있다. [5] 2024년 4월 2일,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기록 정정 과정에서 고정운의 기록이 발견되며 최초 50-50 클럽 가입자는 고정운이 됐다. 김현석은 역대 두 번째 가입자가 됐다. [6] 여담으로 이해 올스타전은 K리그 20주년 기념이었고, 1980년대 올스타팀과 90년대 올스타팀이 맞붙는 이벤트가 있었다. 또한 프로축구연맹이 은퇴식을 열어준 세 번째 선수[16] 였다. [7] 올스타전을 매년 지방에서 돌아가며 열기로 한 원칙을 깨고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연 것에 대한 항의였다. [8] 2009 시즌 울산 현대 코치 시절 사진으로 좌측부터 김성수 GK 코치, 김호곤 감독, 이상철 코치, 그리고 김현석 코치. [9] 사실상 황의조를 의식하고 한 발언으로 보인다. 황의조의 사생활이 결국 본인의 경기는 물론 대표팀에까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10] 아산과 3위 서울이 승점 2점 차인데 아산은 한 경기를 남겨뒀고, 서울은 두 경기를 남겨뒀기 때문에 설령 아산이 마지막 경기를 승리한다 하더라도 서울이 두 경기를 다 이긴다면 순위가 바뀌고, 만일 아산이 청주에게 승리하지 못하면 서울이 한번이라도 이긴다면 순위가 바뀌는 위험한 상황이다. [11] 김현석 감독도 우승은 애초에 기대를 안했던 것으로 보이인다. 수원전 경기 시작 전 인터뷰에서 전날 1위 안양이 전남 드래곤즈와 1-1로 비겨 우승 확정에 실패한 것을 두고 "솔직히 안양이 이기길 바랐다. 우승을 바라기 보다는 승강 PO 진출이 현실적이기 때문"이라고 속내를 털어놓으면서 "시즌 동안 머릿 속에 감춰둔 희망 순위는 5위였는데, 지금 뎁스로 2위를 달리고 있는 것은 기적"이라고 말하면서 자칫 승강 플레이오프에서 상대로 만날 수 있는 전북 경기를 챙겨본다고 밝혔다. # [12] 다만 경기 내내 김영수 주심이 전반적으로 수 차례 아산에게도 관대한 판정을 했고, 후반 내내 아산의 수비가 무너진 것을 감안하면 본인도 할 말은 없는 셈이다. [13] 전반전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파울리뇨의 유니폼을 잡아 늘어져서 넘어뜨렸는데도 PK를 주지 않았고, 그 외에도 자잘한 판정 이익은 아산도 많이 봤음을 감안하면 그냥 심판이 못 본 것이다. [14] 무엇보다 첫 골이야 이기제가 워낙 잘 찼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두 번째 골은 아산 수비수들이 손만 안 들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공이었다. [15] 상대팀인 수원은 1부 시절부터 각종 오심에 시달린 것으로 유명했던 팀이다. 팬들도 엄청 예민한 편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