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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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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축구 감독
파일:2024 이민성감독.png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이름 이민성
李敏成 | Lee Min-sung
출생 1973년 6월 23일 ([age(1973-06-23)]세)
경기도 시흥군 서면
(現 경기도 광명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82cm
직업 축구 선수 (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선수 부산 대우 로얄즈- 아이콘스 (1996~2002)
상무 축구단 (1999~2001 / 군 복무)
포항 스틸러스 (2003~2004)
FC 서울 (2005~2008)
용인시청 축구단 (2010)
감독 용인시청 축구단 (2010 / 플레잉 코치)
용인시청 축구단 (2011 / 코치)
광저우 헝다 (2012 / 코치·2군 감독)
강원 FC (2012 / 코치)
전남 드래곤즈 (2013~2014 / 코치)
울산 현대 (2015~2016 / 코치)
창춘 야타이 (2016~2017 / 코치)
대한민국 U-23 대표팀 (2018~2020 / 코치)
대전 하나 시티즌 (2021~2024)[1]
국가대표 11경기 ( 대한민국 U-23 / 1994~1995)
67경기 2골[2] ( 대한민국 / 1995~2004)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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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eee,#191919><colcolor=#000000,#e5e5e5> 학력 서울시흥초등학교 (졸업)
문일중학교 (졸업)
문일고등학교 (졸업)
아주대학교 인문대학 ( 인문학 92 / 학사)
서명
파일:이민성서명.svg
병역 대한민국 육군 병장 만기 전역 (상무 축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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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현역 선수 시절 주 포지션은 센터백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현역 선수 시절 포항 스틸러스 FC 서울에서 활약했고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 출전했다.

2021년부터 대전 하나 시티즌의 감독에 선임된 후 두 시즌 만에 구단을 8년 만에 K리그1 소속으로 승격시켰다.

골 넣는 수비수의 원조격으로 1997년 도쿄 대첩의 역전골을 기록한 것이 가장 유명하다.

2. 클럽 경력

2.1. 부산 대우 로얄즈 / 부산 아이콘스

문일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시 대우 재단의 관리를 받던 아주대로 진학했고, 대학 졸업 후 23세인 1996년 드래프트에서 3차 지명으로 부산 대우 로얄즈에 지명되었다. 대학 동기 명진영, 우성용, 하상수 등과 함께 프로 선수가 되었다.

신인 시절부터 주전으로 나섰고 차범근호에 자주 차출되면서도 부산의 1997년 리그, 아디다스컵, 라피도컵 등 트레블에 공헌했다.

1999년 상무에 입대했고 특이하게도 상무 시절에는 스트라이커로 기용되었다.[3]

2001년 전역 후 부산 아이콘스로 복귀했으나, 초반에는 연봉 협상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난항을 겪기도 했고, 허리 통증까지 겹쳐 초반에 경기 출전하지 못하자 윙백으로 기용되던 송종국이 센터백으로 대신 기용되기도 하였다.[4]

2001년 6월, 1억2천만원으로 부산과 재계약을 채결했다. #

히딩크호에 자주 차출되거나 잦은 부상으로 고전하며 모든 경기에 나서진 못했지만, 빠른 판단력으로 위치 선정을 토대로 뒷선에서 토킹플레이로 동료들의 움직임을 조율하는 역할을 성실히 수행했고, 이러한 활약 덕에 꾸준히 히딩크호에 개근하며 2002 한일 월드컵에 출전할 수 있었다.

2.2. 포항 스틸러스

파일:2004-04-03T182803Z_01_NOOTR_NISIDSP_2_120040403182102358.jpg

2003년 자유계약 신분이 되었는데, 미국으로 떠난 홍명보의 대체자를 찾던 최순호 감독의 포항 스틸러스에 연봉 1억 5천만원의 조건으로 이적하였다. # 아주대, 부산까지 계속 함께하던 우성용과 함께 이적했다.

포항의 상징 홍명보가 달던 등번호 20번을 달 정도로 구단의 기대가 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2시즌 동안 65경기 3골을 기록하며 포항의 리그 준우승에 기여했다.

30줄에 접어들고 부상을 겪은 포항의 이민성은 센터백 대신 떨어진 민첩성을 커버할 수 있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많이 나섰고, 탄탄한 대인마크에 노련한 조율 능력이 더해져 팀을 이끌었다. 포항은 우승에 실패했지만 K리그 최고의 수비형 미드필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활약을 펼쳤다.

2.3. FC 서울

파일:이민성 FC 서울.jpg

2005년 또 다시 FA가 되면서 FC 서울로 이적했다. 서울에 합류하자마자 이장수에 의해 주장에 선임됐다.

주전으로 활약하며 2006년 리그컵 우승에 기여했다. 시즌 종료 후 서울과 재계약했다. 신임 감독인 귀네슈 감독 아래 주장 완장을 이을용에게 넘겨주었다.

2007년 4월 4일 경남 원정에서 무릎 십자인대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어 그대로 시즌 아웃됐지만 다시 한 번 재계약을 채결했다. #

2008년 재기에 성공하며 팀의 선두권 경쟁에 힘을 보탰으나 후술할 음주 뺑소니 사건으로 인해 구단에서 방출되었다.

2.4. 용인시청 축구단

서울을 떠난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걸으며 대한축구협회 2급 지도자 과정을 이수했다.

2010년 부산 시절 동료였던 정광석 감독의 부름을 받고 내셔널리그 용인시청의 플레잉 코치로 부임하였다.

당시 1급 지도자 자격증이 없어 용인시청에서는 일단 선수로 등록했던 것이며, 1시즌을 더 뛴 후 선수생활을 마감하였다.

3. 국가대표 경력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 송재익

1995년 2월 19일 다이너스티컵 중국전에서 A매치에 데뷔하였다.



데뷔골은 1997년 9월 28일 있었던 98 프랑스월드컵 최종예선, 도쿄 대첩으로 잘 알려진 일본과의 경기로, 0:1로 뒤진 후반 38분 서정원의 헤딩슛으로 동점을 만든 상황에서 41분 왼발 중거리 슛을 날렸고, 바운드 된 볼은 득점으로 이어지며 2:1 역전골을 만들어냈다.[5]

이 순간은 현재까지도 대한민국 스포츠사에서 일본에서 열린 국제대회 도전 역사상 가장 유쾌상쾌통쾌한 순간으로 남아있을 정도이고, 대한민국 대표팀은 순조롭게 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을 통과하고 98월드컵 32개국 본선 티켓을 따낸다. 더불어 이를 발판으로 2002 한일월드컵 공동개최를 이끌어 낸다. -만일 일본이 승리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 수도...-

3.1.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이민성은 차범근호로서 아시아 예선에서의 활약을 앞세워 처음으로 32개국 본선으로 확대 된 98프랑스월드컵 최종 엔트리 이름 올리며 첫 월드컵 무대를 밟게 된다.

등번호 5번.

멕시코, 네덜란드, 벨기에 조별리그 3경기 모두 풀타임 출장했으나 세계의 벽에 부딪치고 좌절감을 맛보고, 특히 멕시코전에 콰우테모크 블랑코의 개구리 점프 개인기에 허둥지둥하는 등 수비불안을 보여주며 아쉬움을 남겼다.

그래도 마지막 3차전 벨기에를 무승부 탈락시키는데 성과를 냈다.

3.2. 2000 AFC 아시안컵 레바논

허정무호 소속으로 아시안컵에 참가했다. 등번호 13번.

그러나 홍명보 김태영을 비롯 강철, 심재원, 박재홍 등에 밀리며 2경기 출장에 그쳤다. 그래도 대한민국의 4강 진출에 기여했다.

3.3.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1 이운재 · 2 현영민 · 3 최성용 · 4 최진철 · 5 김남일 · 6 유상철
VC
· 7 김태영 · 8 최태욱
9 설기현 · 10 이영표 · 11 최용수 · 12 김병지 · 13 이을용 · 14 이천수 · 15 이민성 · 16 차두리
17 윤정환 · 18 황선홍 · 19 안정환 · 20 홍명보
C
· 21 박지성 · 22 송종국 · 23 최은성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거스 히딩크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스태프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핌 베어벡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정해성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 파일:미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압신 고트비


2002 한일 월드컵에서도 23명 최종 엔트리에 포함됐다.

당시 네티즌들이 그렇게 주워섬기던 심재원은 축협이 지원해 키운 선수라 히딩크호에서 기회를 제법 많이 받았으나 부상에 시달리며 활약이 좋지 못해 낙마했고, 성남의 김영철은 수비 리딩에 강점을 보이는 대신 발이 느리고 대인방어가 떨어졌다. 전성기때도 이영진, 조병국처럼 힘좋고 제공권에 강점이 있는 선수들이 파트너로 붙었는데 홍명보 중심의 백3 전술 활용을 결정한 히딩크호에선 매력 없는 자원이었다. 따라서 자연스레 히딩크호 출범 초기부터 기용되었으며 대인 방어에 강점을 보이는 이민성이 뽑혔던 것이다.[6] 중앙에서 대체 불가의 플레이를 펼치는 홍명보 대신 좌우 스토퍼 최진철, 김태영의 백업 센터백 역할이었다.

8강전까진 출전하지 못했고 준결승전 독일과의 경기에서 최진철과 교체로 56분에 처음 투입되었지만 미하엘 발락의 실점 장면을 두고 아직까지 이민성의 실책이었다고 비판을 받았다.

하지만 실점 상황에서 이민성의 과실이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그 상황에서 이민성의 수비상대는 독일 대표팀에서 가장 빠른 선수인 올리버 뇌빌였는데 벗겨지지 않고 끝까지 따라붙어 주었고 결국 크로스 각이 좁아진 뇌빌이 자포자기식의 느릿느릿한 땅볼 크로스를 올릴 수밖에 없도록 유도했다.[7]

그러나 페널티박스 안에 있던 유상철 홍명보가 동시에 정줄을 놓으며 그 쉬운 크로스를 흘렸고 이걸 발락이 가볍게 마무리한 것. 유상철, 홍명보 둘의 실책이 명백한 상황이었지만 아무래도 4강까지 올라오는 과정에서 우승후보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상대하다가 지칠때로 지쳐 있다 보니 함부로 까기 좀 그래서 만만한 이민성이 욕받이가 된 느낌이 강하다.

튀르키예와의 3/4위전에는 센터백으로 선발 출전했으나 이 경기는 수비 리더 홍명보가 시작부터 불안감을 노출[8]하며 3실점했고 2:3으로 아쉽게 패하여 월드컵 4위로 마쳤다.

3.4. 2004 AFC 아시안컵 중국

2003년 출범한 코엘류호에선 초기 포백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신예 조병국을 비롯해 박재홍, 김영철 등에게 밀리며 코엘류호 1기 이외에는 선발되지 못했다.

그러나 2004 AFC 아시안컵 중국를 앞두고 출범하며 스리백으로 회귀한 본프레레호에선 곧바로 중용됐다.

특히 올림픽 참가로 아시안컵에 불참한 주장 유상철을 대신해 스리백 중앙 스위퍼 자리를 꿰차며 최진철, 김진규와 함께 주전 스리백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8강 이란과의 경기에서 알리 카리미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하며 4실점을 허용하며 탈락하고 말았다.

이후로는 김진규, 김영철, 박재홍 등에 밀리며 2004년 12월을 마지막으로 대표팀에 선발되지 못했다.

4.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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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논란 및 사건 사고

5.1. 음주운전 뺑소니

2008년 이민성이 술을 마신 상태에서 자신의 BMW 승용차를 몰다가 사고를 내고 도주한 것이 적발되어 불구속 입건되며 구설수에 올랐다.

K리그를 대표하던 스포츠 스타였던 이민성의 이러한 음주운전 뺑소니 사건은 큰 파장을 낳았고 심지어 사고 당시 이민성의 혈중 알코올 농도는 0.169%로 약주 몇 잔 한 수준이 아니라 만취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지며 큰 충격을 줬다.

결국 해당 사건으로 이민성은 소속 구단 FC 서울로부터 방출 당하며 불명예스럽게 프로 선수로서의 커리어가 종료됐다. 이후 이민성은 은퇴했다가 2010년에 내셔널리그 용인시청 축구단과 플레잉 코치 신분으로 계약해 다시 필드를 밟았다가 한 시즌 후 다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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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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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coach_민성01.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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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4 시즌 도중 자진 사임. [2] 이 중 한 골이 그 유명한 1998년 도쿄 대첩에서의 결승골이다. [3] 당시 상무는 선수층이 열악해서 얼마 안 되는 포지션의 선수들을 본 포지션이 아닌곳에 배치해 써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민성은 대학에서 수비수로 포지션을 변경했으며 고교시절까진 공격수였다. [4] 이민성이 요구한 1억 5,000만원선과 구단측 제시액인 1억원 미만의 차이가 너무 컸다. [5] 야구로 비유하자면 도쿄돔에서 열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한일전 9회말 투아웃에서 대한민국 9번 타자가 역전 끝내기 홈런을 때린 것과 같은 위상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국가대표 팀의 특성상 9번 타자라 할 지라도 소속팀에선 1번에서 5번 타자 사이를 맡고 있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 [6] 2002년 월드컵 대표팀 센터백 자원은 홍명보, 김태영, 최진철, 이민성 총 4명이 선발되었다. 당연하게도 백업 센터백까지 포함해 엔트리 내 4명으로 여유 있는 경기 운영이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백3 전술이 아닌 백4 전술이다. 물론 유상철, 송종국 등의 멀티 플레이어들이 센터백을 겸할 수 있었고 유상철은 본선에서 무려 세 경기를 센터백으로 뛰었다. 그러나 25인 엔트리에 있던 센터백 박요셉 대신 3-4-3 포메이션에서 설 자리가 없던 공격형 미드필더 윤정환이 최종 엔트리에 남은 것을 보면, 센터백을 4명만 최종 엔트리에 포함시킨 이유로는 유상철, 송종국이 대신 뛰어야 할 정도로 히딩크 감독의 기준에 부합하는 전문 스토퍼 자원이 없었던 탓이 가장 크다. 중앙 미드필더도 마찬가지인데, 유상철과 김남일, 이을용을 제외하면 2002년 월드컵 전후로 소속팀과 대표팀에서 3선 미드필더를 전문적으로 소화한 선수가 없었다. 상당한 체력 소모가 요구되는 중앙 미드필더 자리에 1998년 월드컵 출전 경험이 있는 김도근 등 전문 자원들 대신, 차라리 왕성한 활동량과 영리한 축구 지능, 적극적인 플레이 성향 등을 모두 갖춰 자신의 전술을 잘 이해하는 박지성과 이영표의 포지션 변경을 더욱 신뢰한 것이다. [7] 수비 상황에서 공을 뺏어내지 못한다면 슈팅이나 크로스할 각을 좁혀서 기회를 막아내는 방법으로라도 막아야 한다. 98 월드컵 때 네덜란드전에서 베르캄프의 슈팅 각도를 좁혀 실점을 막은 김병지를 생각하면 된다. [8] 전반전 킥오프를 하자마자 동료의 패스를 제대로 컨트롤하지 못하며 하칸 쉬퀴르에게 공을 내줘 11초 만에 실점했다. 2022년 현재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한동안 깨지기 힘들 월드컵 본선 최단시간 실점 신기록이다. [9] 특히 광주에게는 K리그2에서도 이긴 적이 전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