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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15:48:15

최강희(축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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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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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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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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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대

톈진 톈하이 역대 감독
박충균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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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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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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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2대 3대 4대 5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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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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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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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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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희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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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
FW
황선홍
FW
최순호
MF
김주성
MF
신태용
MF
유상철
MF
서정원
DF
최강희
DF
김태영
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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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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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간스포츠 선정 K리그 40주년 베스트 11
F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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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상철
MF
김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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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보
DF
최강희
DF
박경훈
GK
김병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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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000> 대한민국의 축구감독
파일:1000203528.jpg
이름 최강희
崔康熙|Choi Kang-hee
출생 1959년 4월 12일 ([age(1959-04-12)]세)[1]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성덕리[2]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6cm
직업 축구 선수 ( 풀백, 수비형 미드필더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color=#e84c24> 선수 한일은행 축구단 (1979~1980)
육군 축구단 (1980~1982 / 군 복무)
한일은행 축구단 (1982~1983)
포항제철 돌핀스 (1983)
현대 호랑이 (1984~1992)
감독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5~2001 / 코치)
대한민국 U-23 대표팀 (2002 / 코치)
대한민국 대표팀 (2003~2004 / 코치)
전북 현대 모터스 (2005~2011)
대한민국 대표팀 (2011~2013)
전북 현대 모터스 (2013~2018)
톈진 취안젠 (2018~2019)[3]
다롄 이팡 (2019)[4]
상하이 뤼디 선화-상하이 선화 (2019~2021)
산둥 타이산 (2023~2024)[5]
국가대표 33경기 ( 대한민국 / 1988~1992)
정보 더 보기{{{#!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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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colcolor=#e84c24> 등번호 3번
가족 아내 이명성, 외동딸 최혜린[6]
본관 삭녕 최씨 (朔寧 崔氏)[7]
학력 강하초등학교 (전학)
서울용두초등학교 (졸업)
대광중학교 (졸업)
우신고등학교 (졸업)
서명 파일:최강희서명.png
}}}}}}}}} ||

1. 개요2. 특징
2.1. 별명2.2. 특기
3. 선수 경력4. 지도자 경력5. 평가6. 수상
6.1. 선수
6.1.1. 대회 기록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6.2.2. 개인 수상
7. 사단8. 여담9.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1636475439516.jpg
대한민국 축구 선수 출신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풀백 수비형 미드필더. 現 산둥 타이산 감독.

1983년 프로 축구 선수로 데뷔하고 K리그 베스트 XI을 네 번 수상했다. 1988년에 국가대표로 처음 발탁 받아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조별 리그 3경기 모두 풀타임 출전했다. 2013년에는 K리그 30주년 레전드 베스트 XI으로도 선정됐다. 현역 시절 언론에서는 강인한 체력으로 필드를 누비는 그를 '스태미너의 화신'으로 불렀다.[8]

선수 은퇴 후에는 2005년 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으로 부임했다. ACL 2회 우승[9], K리그1 6회 우승[10], FA컵 1회 우승[11] 등 9개의 우승 컵을 들어올려 전북 현대를 K리그를 넘어 아시아에서도 손꼽을 만한 명문 구단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또한 레바논 쇼크로 경질된 조광래의 뒤를 이어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을 맡아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을 4승 2무 2패 조 2위로 통과하며 대한민국의 8회 연속 월드컵 진출을 이뤄내기도 했다.[12]

2. 특징

2.1. 별명

선수 시절 별명은 개구리.

감독 시절 별명은 2006년 AFC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서 중국 구단을 격파하고 올라가 우승하는 모습을 보고 중국 언론에서 붙여준 청나라의 황제인 강희제에서 따온 강희대제와 K리그에서 친근한 이미지로 다가온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13]에서 따온 봉동 이장(님), 이장(님)이 있다. '왕년의 스타'들을 재활시키는 데에 뛰어난 능력으로 재활공장장으로 불렸다. K리그 감독으로서 언론 매체를 즐겨 이용하는 편이다. 대체로 K리그를 담당하는 미디어와 기자들은 최강희 감독의 위트 있는 유머를 좋아하는 편이다.

2.2. 특기

만화에 소질이 있다고 한다. 축구를 안했으면 만화가가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14] 그리고 이 그림 실력으로 선수 시절 차범근 감독을 디스하는 그림을 라커룸에 그려 구설에 올랐다.

3. 선수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최강희(축구인)/선수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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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최강희(축구인)/지도자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5. 평가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최강희(축구인)/평가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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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수상

6.1. 선수

6.1.1. 대회 기록

6.1.2. 개인 수상

6.2. 감독

6.2.1. 대회 기록

6.2.2. 개인 수상

7. 사단

최소 두 곳 이상 동행한 적이 있는 지도자 한정.

8. 여담

파일:external/www.kfootball.org/da4fb9ae2b8d86f09da23688fb533e73.jpg
파일:external/img.asiatoday.co.kr/573190(0)-343500_37546.jpg
파일:external/static.news.zumst.com/7379180502a048e1b4e0f933a8bc254a.jpg

8.1. 아 이 식빵 무지 달다 팬케이크 아니야?

파일:external/upload2.inven.co.kr/i11162202080.gif
2016년 K리그 클래식 최종전에서 전북 현대 모터스 FC 서울을 상대로 경기하던 중, 모래반지 빵야빵야, 야 우규민 나오냐, 야 계란빵 진짜 달다급의 짤방이 나왔다. 이 움짤이 처음 게시된 것은 국내야구 갤러리로 보이며 # 처음에는 심판 판정에 대해 찰진 식빵을 곁들여 항의하는 것으로 보였지만 곧이어 '보이는 대로 들리는 짤' #이라는 제목으로 여기저기에 퍼져나가며 다양한 배리에이션이 속출하게 된다.

해당 장면은 전체 영상 1시간 17분 16초에서 볼 수 있다.
이 중에서 식빵 무지 달다 팬케이크 아니야?가 험악한 표정과 어울리지 않는 대사 내용 및 입모양과의 싱크로율로 인해 가장 큰 파급력을 이끌어 냈고 그 결과 위 움짤은 '최강희 팬케이크 짤'로 통칭되며 최강희는 졸지에 팬케이크 성애자가 됐다.

상당수가 저 발언을 심판에 대한 욕설과 항의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 최강희 감독이 현장에서 한 말은 "아, 증말(정말) 미치겠네(미치겠다)! 왜 그걸 안 차?"라는 말이었다고 한다.[23] KBS의 중계 사운드에도 마침 이 말소리가 잡혔기 때문에 해당 장면을 자세히 들어 보면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전 상황에서 김신욱이 상대편 골문 앞에서 머뭇거리다가 절호의 득점 기회를 놓친 직후에 나온 장면이기 때문에 이쪽이 전후 맥락에도 더 맞고 설득력도 있다. 게다가 전북이 반칙을 당한 상황도 아니었다.[24]

9. 둘러보기

1 이운재 [[와일드카드(스포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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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
· 13 김동진 · 14 박규선
15 조성환 · 16 김용대 · 17 최성국 · 18 김은중 · 19 박동혁 · 20 이동국
C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박항서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최강희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최진한 · 파일:대한민국 국기 (검은색 테두리).svg 김현태




[1] 공식 프로필에서는 1959년생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호적상의 생년이며 그와 절친한 사이인 최덕주의 말에 따르면 실제로는 1957년생이라고 주장한다. [2] 강하아주길 [3] 시즌 전 계약 해지 [4] 시즌 도중 사임 [5] 성적 부진 및 감독과 프런트간의 불화로 인한 계약 해지 [6] 세미프로 골퍼로 2016년 10월 8일에 결혼했다. [7] 기사 최진한 감독에게 집안 형님뻘 정도라고 한다. [8] 700경기 출전의 대기록을 세운 김병지가 선정한 소속 구단 베스트 XI에서는 우측 풀백으로 선정됐고 김병지는 최강희의 선수 시절을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화신' 영리한 경기 운영이 돋보인다."고 설명했다. [9] 2006년, 2016년 [10] 2009년, 2011년, 2014년, 2015년, 2017년, 2018년 [11] 2005년 [12] 8회 연속 월드컵 진출을 달성했음에도 기성용을 위시한 해외파와의 갈등, 최종 예선 3차전부터 시작된 대표팀의 졸전, 이란과의 홈·원정 2연패 및 카를로스 케이로스 주먹감자 수모 등을 이유로 축구팬들에게 최강희호의 평가는 좋지 못하다. 그러나 이것도 따지고 보면 안 하겠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감독직을 떠맡긴 대한축구협회의 근시안적 행정이 가장 큰 문제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쨌든 최강희는 레바논 쇼크로 휘청이던 대표팀을 맡아 쿠웨이트와의 3차 예선 최종전을 깔끔하게 승리하고 결국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 했기 때문이다. 또한 최종 예선에서도 이란과의 최종전 전까지 줄곧 조 1위를 지키다가 이란에게 일격을 맞고 2위로 내려앉은 것이지 이란과의 최종전에서 무승부 이상만 거뒀어도 한국이 1위로 올라가고 이란은 탈락하는 상황이었다. [13] 전북 현대 모터스의 전용 연습 구장과 클럽 하우스가 있는 지역. 인근 완주산업단지에 현대자동차 전주공장이 있다. [14] 1991.7.18. 경향신문. 2011년 우승 이후 방송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만화들을 공개했는데 재미있게도 현재의 닥공과는 달리 어린 시절에는 공격보다는 수비를 강조했다. [15] 특히 단순한 윙이었던 이주용은 아예 레프트 백으로 크게 내려갔는데 공격형 풀백으로서 주전으로 자리잡았다. [16] 2014 시즌에 영입했으나 그 당시에는 로테이션급에 불과했다. [17] 최강희 감독의 연령대를 고려하면 당연한 현상이다. 거스 히딩크가 등장하기 전 대한민국 축구는 독일식 축구를 롤 모델로 삼았다. 다만 당시 여러 여건상 독일 축구를 직접 전수받지는 못했기 때문에 본류와는 다른 자기류로 발전했다. 최강희나 조광래 세대 감독들이 이런 자기류 독일 축구의 마지막 계승자인 셈이다. 조 본프레레 감독 시절 독일을 대파한 것은 이 자기류 독일 축구로 종가 독일 축구를 꺾어버린 일대 사건이었다. [18] 본문 중 'LG야구가 현재 꼴지인데, 리그 36게임 남은거 다 이기면 플레이오프 갈 수 있다는 팬들이 있는데 내가 이런 걸 바란다면 나의 사치겠죠?'가 그 구절이다. [19] 전반기 3승 2무 8패, 후반기 9승 1무 3패. 글 초반부의 LG 트윈스 디스처럼 DTD를 시원하게 비웃었다. [20] 전주시 서울특별시 수원시 같은 K리그 빅 마켓 지역이 아님에도 축구 열기가 상당하다. 이들 도시를 물리치고 홈경기 평균 관중 수 1위도 찍었을 정도. 그러나 주 연고지인 전주시 도심에서 외곽 지역인 월드컵경기장으로 오는 대중교통편이 극악 수준으로 열악한 터라 웬만해서는 만원 관중 채우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실제로 A매치 경기에서는 만원 사례를 이룬 적이 있지만 K리그 경기에서는 단 한 번도 만원 관중을 기록한 적이 없다. 전북 현대의 홈경기로는 2011년 AFC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2차전 당시 찾아온 4만 1805명의 관중이 전북 현대의 전주성 단일 홈경기 최다 관중 동원 기록. 다만 워낙에 전주를 비롯한 전북지역의 축구 열기가 뜨거운 만큼 교통 문제만 해결된다면 만원 관중도 어렵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21] 봉동유두 [22] 혹은 무식한 X끼야 [23] 사실 최강희 감독은 심판이 불리한 판정을 내리는 경우에도 현장에서 잘 항의하지 않는 감독으로 유명하다. [24] 애초에 저 당시 심판은 파울 선언은커녕 휘슬 자체를 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