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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6 09:30:44

신문선

대한민국의 축구인
파일:신문선 교수.jpg
<colbgcolor=#eeeeee,#191919> 이름 신문선
辛文善 | Shin Moon-sun
출생 1958년[1] 3월 11일 ([age(1958-03-11)]세)
경기도 안성군 일죽면 고은리
(現 경기도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본관 영월 신씨 (寧越 辛氏)[2]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3cm
학력 서울청파국민학교 (졸업)
서울체육중학교 (졸업)
서울체육고등학교 ( 졸업)
연세대학교 상경대학 ( 경영학 / 학사)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 ( 체육교육학 / 석사[3])
세종대학교 대학원 ( 체육학[4] / 박사[5])
직업 축구 선수 ( 공격수 / 은퇴)
축구 해설가
축구 행정가
교수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대우 축구단 (1981~1982)
유공 코끼리 (1983~1985)
행정 성남 FC (2013~2014 / 대표이사)
경력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스포츠기록분석전공 교수 (2007~2023)
가족 아내 이우송, 슬하 3남[6]
종교 천주교 ( 세례명: 요한 보스코)

1. 개요2. 축구 선수 경력3. 해설 위원으로서의 면모4. 행정가로서의 면모5. 성남 FC 대표이사로서의 면모6.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 출마7. 최근 근황8.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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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축구인으로서 매우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는 운동선수는 운동밖에 못한다는 인식이 강했는데, 프로축구선수 출신으로서 국가대표선수에 발탁되고 K리그 1호 어시스트를 기록하는 등 두각을 나타났음에도 이른 나이에 공부를 한답시고 조기 은퇴 후 당시 대기업에 속했던 국제상사에 입사해서 최연소 부장을 달았다고 한다. 회사원으로 바쁜 와중에도 연세대에서 석사, 세종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 뒤 17년동안 명지대학원 정교수로 재직하며 월드컵 해설위원 등을 맡았었고, 서울 홍대앞에 개인 미술 갤러리( https://www.mk.co.kr/news/culture/10125808)까지 보유하고 있는 한국 축구계에서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캐릭터라 볼 수 있다.

신문선 "결과에만 목매는 부끄러운 우리 축구문화"[[ https://www.nocutnews.co.kr/news/4112506
]]

2. 축구 선수 경력

파일:IE002546371_STD.jpg

1958년 3월 11일, 경기도 안성군(現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에서 아버지 신재호(辛在浩, 1922. 11. 30 ~ 1991. 3. 27)[7]와 어머니 전주 이씨(1927. 12. 2 ~ 1995. 1. 13)[8][9] 사이에서 4남 2녀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서울청파국민학교와 서울체육중학교, 서울체육고등학교,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1986년 8월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에서 체육교육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2003년 6월 세종대학교 대학원에서 스포츠경영학 전공으로 체육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2007년 9월 1일부로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스포츠기록분석전공 교수에 임용되어 재직하다가 2023년 8월 31일자로 정년퇴임하였다.[10]

연세대학교 진학 후 국가대표로 뛰었다.[11] 1983년 유공 코끼리에 입단하여 프로 선수를 했고, K리그 1호 어시스트를 기록했다.[12]

이후 대학원에 진학하면서 공부를 하고자 이른 나이에 과감히 은퇴했고, 은퇴 직후인 1988년에는 프로스펙스에 입사하여 틈틈히 MBC 축구 해설 위원을 겸업했다.

당시에는 선수 출신 축구 해설 위원이 드물었기 때문에 신문선은 두각을 나타내었고, 이후 상승세를 타면서 프로스펙스를 퇴사하고 전업 해설 위원이 된다.

3. 해설 위원으로서의 면모

선수 출신으로서 은퇴 이후 체육학 박사 과정까지 마친 학구적인 인물로, 송재익 캐스터와의 콤비 중계로 인기를 얻었다. 1997년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아시아 예선에서는 스타 선수들 못지 않은 주목을 받게 된다.[13] 이때 함께 해설한 송재익 캐스터의 만담이 곁들여지면서 일명 신문선- 송재익 콤비가 떴다. 특히 한일전 1차전-흔히 말하는 도쿄 대첩에서 나온 후지산이 무너지고 있습니다는 지금도 이들 콤비를 대표하는 걸작 애드립이다.[14]

그렇게 한국이 출전한 1998 프랑스 월드컵 32강 본선에서도 한국 경기를 비롯한 여러 주요 경기를 전담했고, 수 많은 어록을 만들어 내며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한국 경기의 경우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도 다뤄졌는데, 이때 신문선이 이경규와 함께 포즈를 취하거나 인터뷰를 하는 등 본의 아니게 예능에도 강제 출연을 해버린다. 급기야 1999년에는 옥션 광고에 등장하면서 엽기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대전 격투 게임을 이상하게 섞은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만 원에 천 원 더! 낙찰~이라는 대사가 당대 사람들의 기억에 강하게 박혔을 정도. 이렇다 보니 아예 패러디 대상까지 되면서 '신문지'란 개그맨[15]이 등장하기도 했으며 그 밖에도 특유의 어투와 "골이에요~ 골~" 등의 멘션은 다른 사람들이 자주 하는 성대모사가 되었다. 심지어 연예인들도 많이 따라해서 배우 전지현이 데뷔 시절 개인기로 신문선 성대모사를 했을 정도다.

이 당시 신문선-송재익 캐스터가 신드롬을 일으킨 상황을 되짚어볼 필요가 있다. 첫 번째는 인터넷과 케이블 방송 등으로 해외축구에 대한 접근성이 대중화된 2000년대 이후와 달리 그 이전에는 해외 축구에 대한 정보가 극히 적었고 소수의 매니아[16]를 제외하면 해외 선수나 팀은 철저히 남일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축구의 인기가 국가대표 경기에 집중되었다는 점이다. 지금도 K리그 경기보다 국가대표 경기에 더 비중이 실리지만, 당시 대중적으로 축구는 곧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경기밖에 없었다.

이렇게 단절된 상황은 대한민국 국가대표는 우리 그 자체였고, 상대하는 해외팀은 무조건 적에 가까운 인식이었으며, 이에 부합한 것이 송재익-신문선 중계진이었다. 또한 신문선 해설 위원의 재치있는 입담, 오랜 중계경력의 송재익 보조자의 순발력까지 합쳐져 우리 팀이 이겼을 때의 카타르시스가 전투의 승리처럼 배가되었던 것. 여기에 해설의 편파성을 지적한 목소리도 있었지만, 세간의 비판과는 달리 해설의 객관성 측면은, 2002년 솔트레이크에서 오노의 반칙에 눈감던 미국 해설자들에 비하면 매우 양호한 편이다. 이들이 제일 크게 활약했던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 1, 2차 포함 패전은 단 한 번밖에 없었을 만큼 승승장구하던 국가대표팀의 활약까지 겹쳐, 신-송 중계진 또한 신드롬이라 할 만큼 화제가 되었고, 축구 게임 FIFA 시리즈의 해설까지 녹음할 만큼 유명해졌다. 그러나 당시에도 비판이 있었는데, 경기에 집중하지 않고 경기 상황과 관계없는 잡담이 많다는 것이었다. 특히 송재익 캐스터의 애드립까지 심해져서 전문성보다는 개그 만담 콤비 같은 느낌이 심해졌다. 그러나 이는 무려 신문선해설위원보다 무려 16살이나 많은 삼촌뻘의 송재익 캐스터가 주도하던 중계 스타일과 그 당시 스포츠중계방송의 수준에 기인한 것으로 봐진다. 그 때문에 골수 축구 팬들한테는 호불호가 갈리는 편이었다.

그 후 4년 후 국내에서 펼쳐질 월드컵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한 비장의 카드로 2001년 송재익과 함께 SBS로 이적하고, MBC에서 축구 영웅 차범근 전 감독을 영입해 맞불을 놓으면서 판도가 바뀌기 시작한다. 입담은 초보자인 차범근 해설 위원이 "네~ 좋아요!"를 남발하던 것에 비해 천양지차로 나았지만, 지나치게 축구 외적인 얘기가 많았던 송재익-신문선 콤비에 비해 오히려 간결해서 좋다는 축구팬들도 있었다.

이후 2006 FIFA 월드컵 독일 32강 본선 조별 리그 스위스전에서 발생한 프라이 선수의 골에 관한 오프사이드 논란에서 당시 신문선 해설 위원의 오프사이드에 대한 해석과 차범근- 차두리 부자 중계진의 해석은 달랐다.[17] 이때 신문선은 프라이의 골에 대한 오프사이드 논란에 대해 "저건 오프사이드가 아니므로 정당한 판정이다."라고 해설했다가 당시 여론에게 많은 비판을 받고 자진 사퇴, SBS 축구 해설 위원에서 물러났다고 하는데 말이 자진 사퇴지 SBS 측의 일방적인 통보였다고 한다. 해설에 대한 반국민적 정서가 강했다는 게 방송사 측이 해고한 이유였다고 한다. 당시 시청률 경쟁에 급급했던 방송사의 만행이었던 셈. 오프사이드가 맞다고 해설한 차범근조차 위 상황에 대해 강하게 비난했을 정도. 기사링크 관련 기사 신문선 중도 하차 건뿐만 아니라 시청률 경쟁에만 급급해 축구 중계의 질보단 애국심 위주의 자극적인 방송을 하게 하는 방송사들의 상업주의적인 행태에 대해 강도 높게 비난했다. 이때만큼은 신문선도 비뚤어진 애국심의 피해자인 셈. 후에 신문선을 매국노 취급하던 당시 국민들의 반응을 비판하는 이들도 생겨났다. 물론 그때도 축구 관련 사이트나 블로그를 보면 신문선을 중도에 하차시킨 것에 대해 비난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근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이때의 일 덕에 신문선은 적폐 세력에 늘 피해를 보는 참 축구인이라고 지지자들에게 꽤 쉴드를 많이 받는 편이니 새옹지마라고 봐야 된다.

다만 프라이의 골은 오프사이드가 아니었고, 문제는 골 이전의 상황이었다. 자세한 설명은 오라시오 엘리손도 항목 참조. 그 당시에 협회, 선수단, 코치진, 축구 팬 모두 마르가이라즈가 패스한 것이 이호의 발에 맞은 후 프라이로 연결되는 과정만 보고 오프사이드냐 아니냐를 따졌지만 후에 판독한 결과, 그 이전 카바나스가 바르네타에게 패스한 상황이 오프사이드였음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해설 위원의 의견이 국민들 정서와 반한다는 이유로 사실상의 경질을 내린것은 민주사회에서 온당치 못하고 성급한 결정이었다. 또 그 과정의 상황 자체가 너무나 긴박한 상황이었고, 이호의 발에 맞고 프라이에게 연결된 볼, 부심은 오프사이드를 들었지만 주심은 인정하지 않았던 점 등등 여러가지 상황이 혼재된 터라 단박에 정확한 판단을 하기에는 힘든 부분이 있었다.

한동안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스포츠기록분석전공 주임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가[18] 2011 AFC 아시안컵 카타르 기간 중에 MBC SPORTS+ 축구 해설 위원으로 복귀했다. MBC 축구 중계에 복귀하여 10년 만에 친정으로 돌아오는가 싶더니 결국 지상파 방송에는 나오지 않았다.

2012년 6월 9일, JTBC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예선 중계권을 따내면서 JTBC에서 신문선에게 해설을 맡겼다. 그리고 대한민국 對 카타르 경기 시작 전에 JTBC의 월드컵 예선 중계권 획득에 대해 '축구 컨텐츠의 다양화 측면'이라고 말하며 JTBC를 옹호하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2015년 11월에는 TV조선에서 중계한 (중국 우한에서 열린) 올림픽 국가대표팀 4개국 친선 대회의 해설을 맡았다.

2016년 3월에는 뜬금없이 바둑 해설자로 나섰다. 알파고 이세돌의 대결로 큰 관심을 모았던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MBN에서 해설했다. 바둑을 아마 5단쯤 둔다고 한다.[19]

신태용호가 2017 일본 동아시안컵 도쿄에서 알제리 쇼크 할릴호지치 감독 일본을 4:1로 격파할 당시 중계하면서 일본은 3군이라는 평가를 한적이 있다. 그런데 본인은 "기존의 선수 이름값에 연연하지 말고, 국내파 해외파 구분 없이 실력 있는 이들을 대표팀에 불러 건강한 경쟁을 불러 일으켜야 한다"고 강조했으며, "명성이 중요한 게 아니라 잘하는 선수가 곧 대표"라고 했던 바 있다. 여담으로 이때 중계를 맡은 TV조선에서는 그에게 흑판에 분필로 전술을 적게 하였다.

4. 행정가로서의 면모

1990년대에는 축구 행정가로서도 활동하여 대한축구협회 이사를 한 적이 있으나, 그 뒤는 전혀 협회에 입성하지 못한 것을 보면 입바른말을 하다가 그들의 눈밖에 난것이 아닌가 싶다. 대한체육회이사 국민생활체육회 이사 등 축구외 종목의 이사를 지낼정도로 체육계에서는 손꼽히는 체육행정가로 평가받고 있다.대한민국 체육 양대단체 이사 시절에도 쓴소리꾼으로 유명하다. 운동선수치고는 특히 예산과 규정에 대해 해박한 편이라 이를 근거로 한 비판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듣는다.체육계에서 유일하게 대차대조표를 제대로 볼줄 아는 인물이라는 말도 있다.

금번, 홍명보 사퇴를 한준기자의 유튜버에 출연해 축구협회 정관에 기초한 비판이 현 축구협회 비판의 불쏘시게가 됐다

5. 성남 FC 대표이사로서의 면모

2013년 12월 26일 성남 시민 프로 축구단 초대 대표이사로 선임됐다. 계약 기간은 1년이고, 성과에 따라 연장하기로 했다.
스포츠서울 - 2014/01/14 '데스크가 만난 사람' 신문선 성남시민구단 초대 대표이사 "박종환 감독과 힘겨루기 없다. 시스템으로 분업화할 것"

취임 이후 다양한 언론사와의 인터뷰를 통하여 시민 구단의 구태를 밟아가지 않을 것이며 시민 구단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고 언론사에 인터뷰를 하더니 -시민 구단의 새 모델 되겠다”… 신문선 성남 대표, 취임 일성 - <프로축구> 신문선 교수 "성적보단 구단가치 높이는 데 주력" [[http://m.sports.naver.com/general/news/read.nhn?oid=410&aid=0000122203|- 성남FC 신문선 대표 “시민구단 흑역사를 지우자

성남FC가 창단되기 직전 2013년, 성남시 이재명은 통일교 기반이던 성남일화의 인수에 대해 기독교인들의 반대가 극심한 것을 고려해 인수하지 않기로 해서 경기도 안산으로 연고이전이 추진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13년 말 갑자기 이재명시장이 인수를 최종 결정하여 급박하게 대표이사, 감독 등이 선임되었고, 이 과정에서 대표이사와 신규직원의 대규모 공채면접이 같은날 이루어지면서 정작 대표이사가 본인이 활용해야할 직원들을 자기 손으로 직접 뽑지 못한 상태로 취임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자리인 프로팀 감독과 단장 자리도 신문선이 대표이사로 취임하기 전에 이미 내정되었다고 한다. 이미 일화그룹 차원에서 정리가 확정되어 우수 유소년 선수들이 다 이탈해버리고, 자엘, 요반치치 등 FIFA에 이미 제소되어 있 잠재적 부채를 안은 상황에다, 메인스폰서 미확보, 자금 운영 계획 등이 제대로 세워지지 않은 그야말로 신규창단보다 어쩌면 더 어려운 상황에서 대표이사로 채용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또한, 신문선은 정식 공채를 통해 면접을 실시하여 합격한 케이스라서 기존의 내정된 사람들처럼 구단 내 사정을 미리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신문선은 기존 일화시절 프런트와 성남시 인수위에서 뽑은 프런트를 데리고 2014년 성남시민프로축구단의 원년을 맞이하게 된다. 막상 들어와보니 실상은 처참했다. 레알 성남으로 불리던 시절의 고액 연봉선수들은 시민구단으로서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제파로프 1명의 연봉만 15억원이 넘었다고)이었고, 매년 3~4백억 씩 쓰쓰며던 돈걱정 없던 일화 시절과는 판이하게 다른 재정 상황에서 정상적 운영이 어려운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도시민구단의 메인스폰서는 지자체에서 적극적으로 나서도 섭외되기 쉽지 않다. 이는 타도시민구단을 봐도 알 수 있다. 자금난을 해소하기 위해 우선 주식회사로 전환하여 공모주 청약으로 약 30억 가량의 재원을 마련했으나 이는 선수단 인건비의 3분의 1에도 못미치는 금액이었다. 시에서 추경 등을 통해 보조금을 늘려주긴 했으나 1년 내내 자금난에 시달리며 일화 시절에 비해 배고픈 시절을 보냈다고 봐야한다.

또 다른 문제로는 곧 80살을 앞둔 고령의 박종환 감독을 시에서 먼저 3년 계약을 해놓은 것이었다. 아무리 천안일화 시절의 명장이었다고는 하나 2006년 대구FC 감독을 끝으로 프로팀을 떠난지 10년이 다되가는 고령의 감독을 영입한 것에 대해 팬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니다를까, 팀성적은 바닥을 치며 강등권에서 맴돌았고 중도에 선수 구타 사건이 발생하며 신문선대표는 결국 계약서 상의 해지조항을 근거로 위약금 없이 경질을 시켜버렸다. 무려 2년 반의 계약기간이 남아있었음에도 위약금 없이 처리한 것은 신문선대표의 업적이라 볼 수 있다.

그 뒤 본인이 직접 김학범 감독을 3번이나 찾아가며 설득하여 영입에 성공하였고, 토너먼트에 강하다는 이미지에 걸맞게 무려 준결승 전북현대, 결승에서 FC서울을 연달아 잡아내면서 시민구단 최초의 FA컵 우승을 차지하며, 역시 시민구단으로는 최초로 ACL에 출전하게 되는 쾌거를 이뤄냈다. 당시 전북과 서울은 리그 최강이었던데가 두 경기 모두 원정경기였음을 감안하면 실로 대단한 성과라 할 수 있다.

먹튀 중 하나였던 브라질 자엘의 FIFA 소송건을 잘 마무리하고, 2015년 전력구성도 다 마쳐놓은 상태에서 구단도 안정화에 접어드는가 싶었으나, 돌연 2014년 12월 29일 계약 연장을 하지 않고, 성남 FC 대표이사직을 사임하였다. 본인에 의하면 당시 3년 연장의 제의가 있었지만 이쯤에서 물러나는 것이 맞다고 심사숙고 끝에 거절한 것이라 한다.

이듬해 2015년 성남FC가 축구팬들의 예상과 달리 ACL 죽음의 조(J리그 4관왕 감바오사카, 태국 부리람, 광저우 푸리)에서 살아남아 16강(광저우 헝다와 1승1패 기록했으나 원정 다득점에서 밀림)까지 진출하였고, K리그에서도 상위스플릿 5위라는 성적을 거두었으나, 2016년 말도 안되는 기적(?)의 강등('우승 7회' 명문구단 성남, 충격의 챌린지 강등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6/11/20/2016112000859.html)으로 나락으로 떨어진 것을 보면, 2014년 신문선이 대표이사로서 나름의 토대는 잘 닦았다는 평가를 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1년 만에 끝난 성남의 신문선 시대, 공과는? https://www.footballi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13695

이 후 이재명 성남 FC 후원금 논란이 수면위로 떠오르면서 성과금 지급심사회에 성남 FC 내부 인사 2명, 외부인사 세 명[20]이 있어야 했고 그 중 내부 인사의 서명으로 자신의 서명이 있었음이 드러나자 '결재가 올라와 서명을 했지만 성과금 관련 규정을 만들 때 자신은 관여한 적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

신문선, “정몽규 축구協 회장의 公約은 空約” https://www.sisaon.co.kr/news/articleView.html?idxno=25143

6. 한국프로축구연맹 총재 출마

한동안 조용하더니 권오갑 총재 임기가 만료될 시점 새로 총재 후보에 지원했다. [대한축구협회]]에 지원금을 요구하겠다는 것과 K리그 ''' 샐러리캡 도입 등의 공약을 내걸었다. 결국 권오갑 총재가 다시 총재 재선에 나서고 말았다. 어차피 신문선이 낙선하면 다시 권오갑 체제를 이어가게 된다. 신문선은 총 선거인단 23명 중 5표의 지지만 받아 낙선했다. 반대는 17표, 무효는 1표였다.
'낙선' 신문선 "총재 선거, 미등록 선수와 싸운 격" [[https://m.nocutnews.co.kr/news/4719721
]]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만만치 않다. 신문선의 출마는 기존의 사실상 범현대가의 내정된 추대 형식이던 한국프로축구연맹의 관행을 실질적인 선거 형식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고, 샐러리캡과 분배금 문제는 시민 구단의 육성과 그로 인한 대기업 위주에서 벗어난 축구 저변의 확대라는 축구계의 포기할 수 없는 과제를 상기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이는 프로 리그의 이념적 방향성에 관한 본질적인 가치 논쟁에서 비롯하는 것이기도 하는데, 기업의 홍보 수단으로서의 프로 리그와 자생적 축구 리그의 대립 및 과연연봉상한제(샐러리캡) 없는 우수 선수 편중과 고액 외국인 선수 도입에 따른 질적 향상을 둘러싼 대립 등의 여타 종목의 프로 리그에서도 오래된 가치 논쟁과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이는 명확한 정답이 있는 문제라기보다는 예컨대 프로 야구의 성공 사례와 프로 농구의 실패 사례가 겹치는 불확실한 정책 대결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한 정파에다 손을 들어주는 것이 어려운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범현대가가 한국 축구계에 남긴 긍정적인 유산에도 카운터 파티로서 신문선의 출마와 낙선은 보기에 따라 충분히 상반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사안이며 앞선 본문에서처럼 일방적으로 폄하를 할 수만은 없는 사정이 있는 것이다. 일단은 범현대가에서 남긴 부정적인 유산도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비록 신문선의 행정가로서 수완이 그의 이상에 부합하지 못해 비판을 받는 일이 있더라도, 그가 제시한 방향성 및 카운터 파티의 의의 자체는 폄하될 수만은 없다는 얘기이다.



* 총재 선거일 미스테리’ 신문선 방해 공작인가 절차대로인가 https://sports.hankooki.com/news/articleView.html?idxno=6122414
* 프로축구연맹-신문선 총재 후보, 선거 규정 '공방' https://m.yna.co.kr/view/AKR20170112110000007

*김현정의 뉴스쇼
신문선 "그저 돈돈돈…축구 수장 뽑는데 돈 얘기만" https://m.nocutnews.co.kr/news/4719664

7. 최근 근황


최근에 언론 인터뷰를 통해 범현대가가 한국축구를 장악하는 마피아 세력이나 다름 없다는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기도 했다. )위기 몰린 정몽규, 이제는 FIFA까지 '소환'…신문선 "마피아의 졸개" 쓴소리 https://m.ajunews.com/view/20241031074535097)

2002 멤버 이천수의 유튜브 채널 "리춘수"에 출연하여 묘한 케미를 보여주기도 했다.(한국 축구 역사의 산증인 신문선 위원을 만나다 | 근황월드컵 EP1_신문선 https://youtu.be/m34-mst0uUI?si=WO67CWluEgWtqlk1)

한준TV에도 출연하여 정몽규 및 현 협회 집행부의 즉각적인 사퇴를 강하게 주장하였다.
(신문선 인터뷰] 문체부 감사 감독 선임 절차 위반 확정, 정몽규 회장 즉각 사퇴 비대위 체제 출범해야 한다 https://youtu.be/43B0sF9hKWU?si=0Fs9AbwSWnG3nym3)

이 밖에도 JTBC, TV조선 등 방송에 틈틈히 출연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목소리와 말투는 여전한 듯 하다.



8. 여담



[1] 다만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원래는 1957년생인데, 동사무소에 화재가 나 호적을 재정리하는 과정에서 1958년생으로 오적됐다고 한다. [2] 부원군파(府院君派) 31세 선(善) 항렬. [3] 석사 학위 논문: 優秀 大學 蹴球選手의 心肺機能 硏究(우수 대학 축구선수의 심폐기능 연구, 1986. 8). [4] 스포츠경영학 전공 [5] 박사 학위 논문: 한국 프로축구 선수의 연봉산정 모델 개발(2003. 6). [6] 차남과 삼남은 쌍둥이이다. [7] # [8] # [9] 이종복(李鍾馥)의 딸이다. [10] # [11] OBS 나는 전설이다에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본인과 대학 동기동창인 최동원, 박철순이 이 프로그램 첫 회 게스트로 출연할 예정이었지만 최동원의 건강 사정 때문에 좌절됐다. [12] K리그 1호 골 득점자는 박윤기다. [13] 당시 중계권은 MBC가 독점으로 가지고 있어서 더 주목받는 계기가 되었다. 지역예선 3경기를 남기고서야 타 방송사의 중계도 시작되었지만, 이미 송재익-신문선 콤비로 주도권이 넘어간 뒤었다. [14] 정작 송재익과의 관계는 영 좋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한창 메인 중계진으로 활약하던 당시부터 이미 불화설이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는데, 2000년대 후반 모 대학 강의에 참여한 신문선에게 한 학생이 불화설의 진위 여부를 묻자 좋은 관계는 아니라고 시인했다고. 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두 사람의 나이 차가 16세에 달하다 보니 아무래도 세대 차이로 인한 갈등이 컸을 듯. 물론 공과 사는 구별했는지, 1998년 월드컵 네덜란드전 중계 당시에는 송재익이 신문선의 옆구리를 툭 치면서 "지금 0:4 야? 0:5 야?"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15] 본명은 차승환으로 MBC 출신 개그맨으로 MBC 표준FM '즐거운 오후 2시 이택림 김나운입니다'에서 개그맨 김학도와 콤비를 이루어 송재익-신문선 콤비를 패러디한 김학도-신문지 콤비로 만담 개그를 했다. 2002 한일 월드컵 이후로는 뮤지컬 배우를 하다가 현재는 벤처기업을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 2013년 3월 배우 김예분과 결혼. [16] 스타 TV 등을 통해 프리메라 리가 경기를 중계하기도 했다. 그러나 중계가 우리말로 진행되지도 않았고 지금처럼 선수/팀/경기 등에 대해 토론하고 정보를 공유할 환경이 제공되는 것도 아니었기에 분명 벽이 있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은 그 선수나 팀에 대해 더 순수한 마음으로 접근하여 더 충실한 팬이 될 수 있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7] 당시 신문선과 차범근-차두리 부자 중계진의 오프사이드에 대한 해석이 달랐던 것은 2006 독일 월드컵 32강 본선부터 적용된 당시 오프사이드 규정인 "공격수가 상대팀 최종 두 번째 수비수보다 앞서 있을 때 해당 공격수가 공을 받을 경우만 오프사이드에 해당한다."에서 비롯되었다. 실제로 2006년 이후 해당 규정은 현재까지도 거의 바뀌지 않았다. [18] "교양축구"라는 교양 수업도 진행했는데, 수많은 축빠 덕분에 수강을 신청하기가 매우 어려운 교양 수업 중 하나였다. 수업도 이론 위주이지만 특유의 입담과, 지루해질 때쯤 한 번씩 욕설로 분위기를 전환하는 등 학생들에게 평가는 좋았다. 학기마다 기말 고사를 마치고 수강생들과 술자리를 하며 학생들에게 덕담을 하는 등 인간미도 보여, 수업을 듣고 그의 팬이 되었다는 학생이 많았다. [19] 아마 5단이면 상당한 고수 축에 속한다. 아마추어 바둑 단수는 7단이 끝이다. [20] 정작 이들은 시청 국장급 공무원, 측근 가족, 자신이 속했던 법무법인의 변호사라 사실상 이재명의 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