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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15 09:30:08

차범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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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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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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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대
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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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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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파일:수원 삼성 블루윙즈 로고.svg

2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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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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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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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K리그1 로고.svg
2004 · 2008
베스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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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 · 1973 · 1974 · 1975 · 1976 · 1977· 19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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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80 · 1985-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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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근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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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FA 센추리 클럽 가입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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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위 선수 및 현 소속 구단 출전 횟수 첫 경기 마지막 경기
1 홍명보 은퇴 <colbgcolor=#eeeeef,#191919> 136회 1990.02.04
(vs 노르웨이)
2002.11.20
(vs 브라질)
2 이운재 은퇴 132회 1994.06.11
(vs 온두라스)
2010.08.11
(vs 나이지리아)
3 차범근 은퇴 130회 1972.05.07
(vs 이라크)
1986.06.10
(vs 이탈리아)
4 이영표 은퇴 127회 1999.06.12
(vs 멕시코)
2011.01.28
(vs 우즈베키스탄)
5 손흥민 토트넘 홋스퍼 FC 125회 2010.12.30
(vs 시리아)
2024.03.26
(vs 태국)
6 유상철 은퇴 120회 1994.09.11
(vs 우크라이나)
2005.06.03
(vs 우즈베키스탄)
7 김호곤 은퇴 117회 1971.11.14
(vs 베트남)
1979.03.04
(vs 일본)
8 기성용 FC 서울 112회 2008.09.05
(vs 요르단)
2019.01.07
(vs 필리핀)
9 김영권 울산 HD FC 111회 2010.08.11
(vs 나이지리아)
2024.03.26
(vs 태국)
10 김태영 은퇴 104회 1992.10.21
(vs UAE)
2004.07.19
(vs 요르단)
이동국 은퇴 104회 1998.05.16
(vs 자메이카)
2017.09.05
(vs 우즈베키스탄)
12 조영증 은퇴 102회 1975.03.19
(vs 베트남)
1986.10.05
(vs 사우디아라비아)
황선홍 은퇴 102회 1988.12.06
(vs 일본)
2002.11.20
(vs 브라질)
14 박성화 은퇴 101회 1975.07.29
(vs 말레이시아)
1984.12.10
(vs 카타르)
15 박지성 은퇴 100회 2000.04.05
(vs 라오스)
2011.01.25
(vs 일본)
FIFA 센추리 클럽 명단 기준 (2024.03.14. 기준)
※ FIFA에서 공인한 기록과 대한축구협회에서 집계한 기록은 차이가 있다. 대한축구협회 선수별 A매치 기록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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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로고.svg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레전드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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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urm
베른트 횔첸바인
(1967~1981)
Sturm
안소니 예보아
(1990~1995)
Sturm
차범근
(1979~1983)
Mittelfeld
위르겐 그라보브스키
(1965~1980)
Mittelfeld
우베 바인
(1989~1994)
Mittelfeld
제이제이 오코차
(1992~1996)
Mittelfeld
알렉산더 슈어
(1995~2006)
Abwehr
카를하인츠 쾨르벨
(1972~1991)
Abwehr
우베 빈데발트
(1988~2004)
Abwehr
브루노 페차이
(1978~1983)
Tor
오카 니콜로프
(1995~2013)
감독
Trainer
외르크 베르거
(1988~1991) / (1998~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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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바이어 04 레버쿠젠 로고.svg
바이어 04 레버쿠젠 100주년 기념 세기의 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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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디 푈러
(1994-1996)
Attack
울프 키르스텐
(1990-2003)
Midfie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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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2002)
Midfield
미하엘 발락
(1999-2002) / (2010-2012)
Midfield
에메르송
(1997~2000)
Midfield
베른트 슈나이더
(1999~2009)
Def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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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007)
Defence
옌스 노보트니
(1996~2006)
Def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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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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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1992)
Goalkeeper
뤼디거 폴보른
(1982~1999)
서브
Attack
차범근
(1983~1989)
Midfield
베른트 슈스터
(1993~1996)
Midfield
파울루 세르지우
(1993~1997)
Midfield
카르스텐 라멜로프
(1996~2008)
Defence
토마스 회르스터
(1977~1991)
Defence
크리스티안 뵈른스
(1991~1998)
Goalkeeper
한스외르크 부트
(2001~2007)
}}} ||

파일:바이어 04 레버쿠젠 로고.svg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진출 40주년 기념 올스타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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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alkeepers 레네 아들러 (2003-2012), 한스외르크 부트 (2001-2007), 베른트 레노 (2011-2018), 뤼디거 폴보른 (1982-1999)
Defence 다니엘 카르바할 (2012-2013), 마누엘 프리드리히 (2007-2013), 위르겐 겔스도르프 (1976-1986)
토마스 회르스터 (1977~1991), 사미 휘피에 (2009~2011), 조르지뉴 (1989-1992), 주앙 (2002~2007), 루시우 (2001~2004)
옌스 노보트니 (1996~2006), 디에고 플라센테 (2001~2005), 요나탄 타 (2015~), 크리스티안 뵈른스 (1991~1998)
Midfield 미하엘 발락 (1999-2002)(2010-2012), 라르스 벤더(2009-2021), 곤살로 카스트로(2005-2015), 에메르송(1997-2000)
카이 하베르츠 (2016-2020), 토니 크로스 (2009-2010), 한스 피터 렌호프 (1994-2000), 카르스텐 라멜로프 (1996-2008)
헤나투 아우구스투 (2008-2012), 지몬 롤페스 (2005-2015), 베른트 슈나이더 (1999-2009), 베른트 슈스터 (1993-1996)
아르투로 비달 (2007-2011), 제 호베르투 (1998-2002)
Attack 베르바토프 (2001-2006), 율리안 브란트 (2014-2019), 차범근 (1983-1989), 슈테판 키슬링 (2006-2018)
울프 키르스텐 (1990-2003), 올리버 뇌빌 (1999-2004), 파울루 세르지우 (1993~1997), 안드레아스 톰 (1990-2003)
루디 푈러 (1994-1996), 허버트 바스 (1982-1989)
Coaches 크리스토프 다움, 페터 헤르만, 유프 하인케스, 에리히 리베크, 클라우스 토프묄러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진출 40주년 기념 베스트 11
Attack
슈테판 키슬링
(2006-2018)
Atta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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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2003)
Midfield
지몬 롤페스
(2005-2015)
Midfield
미하엘 발락
(1999-2002) , (2010-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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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트 슈나이더
(1999~2009)
Midfield
카르스텐 라멜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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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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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f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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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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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ac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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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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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한국갤럽이 창립 3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인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알아보는 한국인이 좋아하는 조사 시리즈를 기획해 2004년부터 5년 주기로 발표하고 있다.
2004년
※ 2004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이승엽 박찬호 안정환 박세리 홍명보
6위 7위 8위 9위 10위
허재 박지성 차범근 이종범 선동열
2009년
※ 2009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박지성 김연아 이승엽 박태환 박찬호
6위 공동 7위 10위
김태균 이용대, 이종범, 박세리 안정환
2014년
※ 2014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김연아 박지성 류현진 손연재 박태환
6위 7위 8위 9위 10위
손흥민 이승엽 추신수 박찬호 기성용
2019년
※ 2019년 한국갤럽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를 바탕으로 '한국인이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를 선정.
1위 2위 3위 4위 5위
손흥민 류현진 김연아 박지성 추신수
6위 7위 8위 9위 공동 10위
이대호 박찬호 기성용 차범근 이승엽, 이동국
같이 보기: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좋아하는 스포츠 선수, 좋아하는 소설가, 좋아하는 탤런트, 좋아하는 영화배우,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좋아하는 예능인
}}}}}}}}} ||
분데스리가 레전드 네트워크 앰버서더
Bundesliga Legends Network Ambassador
파일:차범근.jpg
<colbgcolor=#d3010d,#191919><colcolor=#ffffff,#e5e5e5> 이름 차범근
車範根|Cha Bum-kun
출생 1953년 5월 22일 ([age(1953-05-22)]세)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송산리
(現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1]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신체 179cm[2], 78kg[3], B형[4]
직업 축구 선수 ( 공격수[5] / 은퇴)
축구 감독
축구 해설가
축구 행정가
주발 오른발 (양발)
소속 <colbgcolor=#d3010d,#191919><colcolor=#ffffff,#e5e5e5> 선수 한국신탁은행 축구단 (1976)
공군 축구단 (1976~1979 / 군 복무)
SV 다름슈타트 (1978~1979)[6]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79~1983)
바이어 04 레버쿠젠 (1983~1989)
감독 현대 호랑이 (1991~1994)
대한민국 대표팀 (1997~1998)
선전 핑안 (1998~1999)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4~2010)
해설 MBC (2001~2003, 2006 / 해설 위원)
SBS (2010~2014 / 해설 위원)
기타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2016~2017 / 부위원장)
분데스리가 (2017~ / 앰버서더[7])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2018~ / 앰버서더[8])
국가대표 136경기 58골[9] ( 대한민국 / 1972~1986)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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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3010d,#191919><colcolor=#ffffff,#e5e5e5> 본관 연안 차씨 (延安 車氏)
학력 화산초등학교 (졸업)
경신중학교 (졸업)
경신고등학교 ( 졸업 / 65회)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 체육교육학 72 / 학사)
병역 공군 제8전투비행단 병장 제대[10] (병 270기)
종교 개신교 ( 예장통합)[11]
가족 배우자 오은미[12]
장녀 차하나[13]
사위 정병훈
장남 차두리
차남 차세찌
며느리 한채아
서명 파일:차범근서명.png
}}}}}}}}} ||

1. 개요2. 축구인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5.1.2. 개인 수상5.1.3. 개인 기록
5.1.3.1. 세계5.1.3.2. 아시아5.1.3.3. 국가대표5.1.3.4. 분데스리가5.1.3.5. 프랑크푸르트5.1.3.6. 레버쿠젠
5.1.4. 키커 랑리스테5.1.5. 출전 기록
5.1.5.1. 클럽5.1.5.2. 국가대표
5.2. 감독
5.2.1. 대회 기록5.2.2. 개인 수상
5.3. 서훈
6. 미디어 활동
6.1. 방송6.2. 광고6.3. 도서
7. 차범근에 대한 언사8. 논란 및 사건 사고9. 여담10. 등번호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축구인.

국내에서 고려대학교 축구부,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공군 축구단에서 활약한 뒤 26세의 나이에[14] 당시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10년을 뛰었다.

차범근은 불과 24세의 나이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100경기 출장을 기록했고[15], 국가대표팀 통산 최다 출장 공동 1위(136경기), 최다 득점 1위(58골)를 비롯한 여러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16]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바이어 04 레버쿠젠에서 전성기를 보냈고 두 구단에서 UEFA컵[17] 2회 우승 및 DFB 포칼 1회 우승을 이끌었다. 또한 키커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고 분데스리가 역대 외국인 선수 최다 골 기록(98골)을 10년간 보유했다.[18]

두팀에서 모두 UEFA컵 트로피를 들어올렸으며 키커 올해의 팀에 2회 선정되고[19] 분데스리가 통산 98골로 11년간 외국인 최다 득점 타이틀을 보유하였고[20] 컵 대회를 포함하면 121골을 넣었다. 또한 국가대표 통산 136경기 58골로 한국 남자 국가대표팀 역대 A매치 최다 득점 기록을 보유했다.[21]

2. 축구인 경력

국가대표 136경기 출장, 58골 기록[22], 한국인 선수 최초의 센추리 클럽에 가입, 한국인 남자 축구 선수 중 역대 최다 A매치 득점 기록[23],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24년 139일), 독일 분데스리가 1부 리그에서 11년간[24] 총 308경기 출장(당시 외국인 선수 중 역대 2위),[25] 98골(당시 외국인 선수 중 역대 1위)[26] 기록. 참고로 분데스리가 98골 중 페널티 킥 득점은 0골이다.[27] DFB-포칼이나 UEFA컵 기록까지 포함하면 372경기 121골. 차범근은 인터뷰에서 멀티골은 20번이나 해 봤지만, "해트트릭은 한 번도 못해봤다."고 말했다.[28]

1976년, 아시아에서 큰 국제대회이던 박스컵에서 말레이시아[29]를 상대로 7분 남기고 1:4로 뒤진 상황에 차범근이 혼자 세 골을 몰아치는 해트트릭을 기록하면서 무승부를 만드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방송국도 그 경기의 테이프가 없다고 했고 차범근도 두 골은 기억이 나지만, 나머지 한 골은 어떻게 넣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박스컵도 그렇지만, 1950년대~80년대 중반 이전의 국대 축구는 방송사에서 비디오 테이프와 필름을 비싸다고 재활용했던 것이 당연시되었기 때문에, 영상 자료로는 영영 볼수없는 경기가 대다수이고, 문헌 자료들은 영상 자료에 비하면 낫지만 자료 보존이 철저하지 못해서 차범근의 육체적 전성기인 20대 초반의 활약상은 직접 본 사람 외엔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현역 시절 자료가 부족하다 보니 자연스레 발생한 것이 포지션에 관한 논란이었다. 중앙 공격수였는지 아니면 윙어였는지 논란이 분분하였는데 차범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 윙어, 분데스리가에서는 최전방 투톱으로 뛰었다고 한다.

또한 현재 유럽에서도 지면 자료들의 인터넷 전산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기도 하였고 유튜브의 활성화로 차범근의 플레이 영상을 몇 개 나마 볼 수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구단에서 포지션 자체는 투톱 체제의 중앙 공격수로 뛰었지만 라인업 상 그렇게 표현되었을 뿐 현대에서 말하는 세컨드 스트라이커로서 활약한 것을 알 수 있다. 국가대표에서처럼 윙 포워드로 출전하기도 했으며 말년에는 미드필더로 뛰기도 하였다.
파일:external/img.focus.kr/2015082800203154955_2.jpg
파일:external/blogimg.hani.co.kr/60422_34842.jpg_M400.jpg
전설이 된 현역 시절의 모습[30] 독일의 축구 잡지, 키커(Kicker)의 표지 모델 위엄
파일:external/www.bluewings.kr/B0_1101968768.jpg
파일:external/img.ezmember.co.kr/ca7e80bc478188532ca014af020d72c9.jpg
수원 삼성 블루윙즈 감독 시절 인맥대장, 차붐(Tscha Bum)![31]

2.1. 선수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선수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2. 지도자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차범근/지도자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2.3. 해설자 경력

1998년의 실패 이후 K리그 감독으로 복귀하기까지 온갖 우여곡절을 겪었는데, 국가대표 감독 이후 국내의 심각한 비난 여론에 의해 도망치듯 중국 프로 축구 선전 핑안[32] 감독으로 부임했다.[33] 1년 6개월 만인 1999년 12월 재계약이 불발되었고 이후로 국내외를 오가며 눈에 띄지 않는 야인 생활을 거듭했다. 하지만 차범근 축구교실만큼은 직접 챙기면서 유소년 육성에 대한 의지만은 뜨거웠는데, 2001년 초에 한 어린이가 "우리들이 다치는 걸 걱정해 직접 얼음을 깨고 있는 저 분이 바로 전설적인 축구 선수 차범근 감독님이다."라는 글과 차범근의 뒷모습을 Daum의 차범근 팬 카페에 올린 사연도 있다.[34]

그러다 당시 대한축구협회장 정몽준이 1998년 차범근에게 내려진 자격 정지 5년에 대해 사면 조치를 취하면서 차범근의 국내 활동이 자유로워졌고 신문선, 송재익을 SBS에 빼앗긴 MBC가 2000년 12월부터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35] 2001년 2월 2일 2억 원에 MBC 해설 위원으로 계약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 해 5월에 개막한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부터 본격적으로 해설을 맡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축구 해설은 여러 분석을 내놓는 신문선과 이를 재치 있는 입담으로 포장하는 송재익 콤비를 내세운 SBS가 대세였고 차범근 본인이 딱히 말을 잘하는 타입이 아니다 보니 허정무를 해설 위원으로 내세운 KBS에 오히려 시청률이 뒤지는 상황까지 있었다.

하지만 차분한 목소리에 또박또박한 말투, 그리고 수십 년간 쌓은 선수 시절 내공 덕에 경기를 한 수 앞 먼저 읽는 해설로 차츰 호평이 많아졌고, 2002년 월드컵 본선 때는 오히려 SBS의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누르고 MBC가 1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 결정타가 된 것이 월드컵 개막 직전인 2002년 5월 26일 프랑스와의 평가전. 이 때도 SBS와 동시 중계로 해설을 했는데 당시 김남일의 태클로 지네딘 지단이 부상을 당한 뒤 허공으로 손을 돌리자 신문선은 판정 불만에 대한 항의하는 거라고 했지만 차범근은 표정을 보고 지단이 부상으로 뛸 수 없다고 해설했으며 벤치에서 얼음 찜질을 받고 알약 먹는 장면이 잡히자 신문선-송재익은 영양제를 먹으며 컨디션을 관리한다고 언급했지만 차범근은 "지금 진통제를 먹고 있네요."라는 언급을 했다. 실제로 지단이 이 날 부상으로 인해 본선에서 제대로 뛰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차범근의 해설은 저 멀리서 선수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는 매의 눈을 가진 예언자급 해설. 이후 신문선의 삽질이 거듭되면서 시청자들도 MBC로 눈길을 돌리고 월드컵 기간 내내 MBC가 일방적인 1위를 달렸고 신문선-송재익 콤비를 야심차게 영입한 SBS는 2위로 주저앉았다. 그리고 신문선은 2006년을 끝으로 다시는 주류로 돌아올 수 없었다.

2002년 월드컵 해설을 맡을 당시 해설에 대한 조언을 얻고자 자신이 아는 해설자 선배에게 조언을 구한 적이 있는데 다름 아닌 베켄바워이다. 당시 베켄바워는 월드컵이나 주요 대회의 해설자로도 활동을 한 적이 있는데 차범근이 월드컵이라는 큰 대회의 해설을 맡게 되어 부담도 되고 어떻게 해야 잘 할 수 있을지 노하우를 묻자 "우리가 말하면 다 맞는 거야"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베켄바워고 너는 차붐인데 우리가 말하는 게 맞지 뭐가 걱정이냐'는 위엄 넘치는 답변인데 재밌는 건 2002년 월드컵이 유독 이변이 많았던 대회라서 결과 예측을 했다가 많이 틀렸는지 당시 한국에 체류 중이었던 베켄바워가 차범근을 만났을 때 "왜 우리가 말하면 다 틀리는 거냐?"는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36]

한편 2002년 월드컵 당시 독일 대표팀 감독 루디 푈러와 소소하게 티격태격한 적도 있다. 차범근이 독일과 파라과이의 16강전을 중계하던 중 '오늘 독일은 지금까지의 경기 중 가장 나쁘고 준비도 덜 된 경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시 중계 멘트를 그대로 옮겨 적자면 "이런 경기는 한강 고수부지 가면 볼 수 있죠?"라고 말했다. 그러자 루디 푈러는 '레버쿠젠에 있을 때 아스피린[37]을 너무 먹은 것 같다'고 맞디스를 했다. 말만 들으면 살벌한 독설 배틀 같지만, 차범근의 선수 경력에서 알 수 있듯이 사적으로도 매우 친한 사이다. 애당초 저 아스피린 드립은 푈러 자기 자신에게도 해당된다. 루디 푈러 역시 레버쿠젠에서 선수로 뛴 적이 있기 때문이다. 즉 그냥 친한 친구끼리 틱틱거린 수준. 당시 독일의 국내 여론은 차범근보다 푈러에 대한 비판이 더 강했는데, 그만큼 당시 독일 팀의 경기력이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푈러와 차범근이 따로 만나서 화해는 했다고. 독일과의 경기를 앞두고 서로 만나 얼싸안으면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모습이 중계 방송 시작 때 그대로 나왔다,

2003년까지도 계속해서 MBC 해설을 맡았으나 계약 기간이 만료된 데다 마침 수원 삼성 감독직 제의가 들어오면서 해설 위원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하지만 2006 독일 월드컵 기간에 한해 MBC 해설을 또 맡기로 이면 합의가 되어 있었고 여기에 엔트리에서 탈락한 차두리까지 가세하면서 '부자(父子) 해설 위원'이라는 진풍경으로 또다시 MBC가 시청률 1위를 기록. 다만 당시 감독을 맡은 수원의 성적이 안 좋을 때라 중요한 시기에 해설하러 자리를 비우는 것이 팬들에게 좋게 보일리 만무했기에 비난을 받아야 했고 차범근은 모 스포츠 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 '미안하다'고 답한 바 있다. 다만 후반기 앞두고 이관우와 백지훈을 영입해 반등에 성공했다.

2010년부터 2014년까지 SBS 해설 위원으로 배성재 캐스터와 함께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 공화국 경기와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경기를 해설했다. 남아공 월드컵에서의 그의 인기는 여전했으나 브라질 월드컵에선 나이가 들어서 순발력이 좀 느려지고 말을 버벅대는 부분이 많아지고[38] 다른 방송사의 해설 위원들이 선전하면서 그에 대한 호불호가 엇갈리는 분위기다.
다만, 전문 해설가가 아니라 방송인으로써도 달변가가 아니기 때문에 해설자로써 한계는 있다. 특히 순발력이 떨어져 머릿속에서 상황은 읽지만 말로 옮겨내지 못해 버퍼링이 걸리기도 한다. 이게 빠른 시간 내에 적당한 말로 옮겨지면 여지없이 명해설이 터지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도 많다. 또한, 특유의 사람 좋은 면 때문에 선수단에게 나쁜 말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하거나[39] 직접 해결책을 지시하지 않는 해설 스타일은[40]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해설까지 집중할 코어 시청자의 대부분은 공격적이며 직설적인 해설을 더 선호하나 한국에 말주변 좋고 직설적이면서 경기를 읽는 눈까지 갖춘 해설자는 없기 때문에[41] 호불호의 문제다.[42]

축구 중계 시 카메라에 잡힌 축구계 유명 인사들을 잘 소개하지 못하기도 한다. 장지현, 한준희 등이 축구계 인사는 물론 때로는 정재계 인사들마저 귀신 같이 소개하는 반면 차범근은 잘 소개하지 못한다. 요아힘 뢰프의 이름을 떠올리지 못해 버벅거리거나[43] 올리버 비어호프가 카메라에 몇 차례나 잡혔음에도 캐스터와 함께 침묵을 지킨 사례가 있다. 물론 축구 해설자의 본분은 잡학 자랑이나 선수 프로필 읊어주는 게 아니라 경기를 풀어주는 것인만큼 큰 단점은 아니나[44] 어쨌든 중계 카메라가 이들을 잡아주는 건 이들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스포츠 중계 특성상 멘트가 중간에 끊어지는 걸 시청자들은 매우 어색해하기 때문에 이 점이 축빠들에게 약점으로 지적된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4강전 미네이랑의 비극에서 전반에만 독일이 5:0으로 브라질을 상대로 압도적으로 앞서나가자 남의 일 같지 않다면서 셀프 디스를 시전했다.[45]

독일 대표팀의 중계를 맡으면 중립을 지키다가도 은연 중에 독일 쪽으로 편파 해설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46] 하지만 프로야구의 편파중계 정도의 완전하게 치우친 모습은 당연히 아니고 잘 들어봐야 알아차릴 그런 정도다.[47] 오히려 차범근 본인의 독일에 대한 애정에 비하면 꽤 중립을 잘 지키는 편이라고 봐야 한다. 단, 독일이 2014 브라질 월드컵 토너먼트에서 가장 고전한 16강전 알제리와의 경기에서는 외질이 두 번째 골을 넣자 기쁨을 감추진 못했다.[48]

2014 브라질 월드컵을 마친 후 SBS와 계약이 만료됐고, 재계약하지 않았다. 다만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결승전 때 SBS의 객원 해설로 마이크를 잡은 적은 있다. 계약이 끝난 현재까지도 SBS 직원들과의 친분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사실상 브라질 월드컵 이후로 해설자직에서 물러났으며 이후 대회부터는 박지성 배성재가 월드컵 해설을 담당하고 있다.

2.4. 행정가 경력

2016년 4월 2017년 FIFA U-20 월드컵 조직위원회 부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지금껏 축구인 생활을 하면서) 감투를 쓸 생각은 전혀 없었다."고 말하면서, "앞으로는 감독이나 해설자가 아닌 축구 행정가로서 한국 축구에 기여하겠다."는 꿈을 밝혔다. #

2.5. 축구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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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축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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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플레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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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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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기록

5.1. 선수

5.1.1. 대회 기록

5.1.2. 개인 수상

명확한 출처가 없거나 날조된 정보는 제외한다.[제외내용]

5.1.3. 개인 기록

5.1.3.1. 세계
5.1.3.2. 아시아
5.1.3.3. 국가대표
5.1.3.4. 분데스리가
5.1.3.5. 프랑크푸르트
5.1.3.6. 레버쿠젠

5.1.4. 키커 랑리스테

시즌(전) 클럽 포지션 WK IK K B 시즌(후) 클럽 포지션 WK IK K B
1978-79 다름슈타트 X 1978-79 다름슈타트 X
1979-80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WK-1 1979-80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IK-5
1980-81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K-4 1980-81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K-7
1981-82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K-7 1981-82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K-6
1982-83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IK-2 1982-83 프랑크푸르트 외국인 선수 K-2
1983-84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K-3 1983-84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K-5
1984-85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B 1984-85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B
1985-86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IK-2 1985-86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IK-5
1986-87 레버쿠젠 X 1986-87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B
1987-88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B 1987-88 레버쿠젠 외국인 선수 K-12
1988-89 레버쿠젠 X 1987-88 레버쿠젠 CDM[64] K-8
차범근의 키커 랑리스테에서 WK(월드 클래스) 1회, IK(인터내셔널 클래스) 4회, K(리그에서 경쟁력 있는 수준) 9회, B(주목할 만한 수준) 4회를 받았다.

5.1.5. 출전 기록

5.1.5.1. 클럽
시즌 클럽 소속 리그 리그 DFB-포칼 UEFA컵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1978-79 다름슈타트 98 분데스리가 1 0 1 - - - - - -
1979-80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분데스리가 31 12 11 2 0 5 11 3 3
1980-81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분데스리가 27 8 8 6 6 2 5 2 0
1981-82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분데스리가 31 11 6 1 0 0 6 1 1
1982-83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분데스리가 33 15 10 1 0 0 - - -
프랑크푸르트 합산 122 46 35 12 6 7 22 6 4
1983-84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34 12 8 1 0 0 - - -
1984-85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29 10 1 3 4 1 - - -
1985-86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34 17 6 4 2 1 - - -
1986-87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33 6 13 2 1 1 3 2 1
1987-88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25 4 9 0 0 0 10 2 3
1988-89 바이어 04 레버쿠젠 분데스리가 30 3 3 5 0 3 2 0 0
레버쿠젠 합산 185 52 40 15 7 6 15 4 4
합계 11시즌 308 98 76 27 13 13 37 10 8
프로 통산 리그 308경기 98골 76도움 / 총합 372경기 121골 97도움[65]
5.1.5.2. 국가대표
연도 출전
1972 23 6
1973 17 8
1974 13 2
1975 18 9
1976 20 13
1977 26 15
1978 16 5
1986 3 0
종합 136 58

5.2. 감독

5.2.1. 대회 기록

5.2.2. 개인 수상

5.3. 서훈

6. 미디어 활동

6.1. 방송


※ 신문이나 뉴스 매체 등에서 검색 혹은 확인 가능한 목록만 작성한 것으로 더 존재할 수 있으며, 선수 시절과 은퇴 후 차범근을 특집으로 다루거나 고정으로 출연한 방송 외에 예능에서 게스트로 출연한 것은 제외하였다.

선수 생활 당시에는 한국의 경우 보통 차범근의 경기 실황을 가끔씩 특집 형식으로 녹화 방송해주거나 독일 생활을 다룬 다큐를 방송했다. 놀라운 건 독일에서의 방송인데 당시 차범근의 부상을 특집으로 다룬 프로그램을 시작으로 차범근이라는 선수를 단독으로 다룬 특집 방송이 상당히 많이 방송되었다. 작게는 지역 TV 방송부터 시작해서 크게는 독일 메이저 TV 방송국에서도 방영을 하였고 심지어 다른 나라의 방송국에서도 방영을 하였다. 현재도 매우 드문 일이지만 동양인 선수가 거의 없던 시절의 1980년대를 생각한다면 놀라운 일이다.

은퇴 후에는 워낙 이룬 업적들이 대단하다보니 월드컵 같은 국제 대회를 맞아 제작되는 특집 다큐가 주를 이룬다.

6.2. 광고


※ 신문이나 뉴스 매체 등에서 검색 혹은 확인 가능한 목록만 작성한 것으로 더 존재할 수 있다.

차범근의 광고 출연은 선수 시절부터 이어져 온다. 1980년대 당시 세계 유수의 기업에서 한창 스타 플레이어들을 광고에 내세우던 시절인 만큼 서독에서도 많은 축구 선수들이 광고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74] 차범근 역시 시즌이 끝난 후 한국에서 광고를 찍었는데 분데스리가 진출 전 1,000만 원이었던 광고료가[75] 1980년에 4,800만 원까지 치솟았다.[76] 당시 국내 최정상급 배우 최불암의 광고료가 800만 원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엄청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특히 1986년의 한국 베링거인겔하임[77]의 차범근의 광고료는 6,000만 원에 이르는데 당시 국내에서 최정상의 인기를 구가하던 이만기의 광고료가 3,500만 원이었다.[78] 이때의 광고가 연이 되었는지 한국 베링거인겔하임은 2015년부터 차범근 축구 교실에 3년간 3억 6,000만 원을 후원하기도 하였다.

선수 시절 이후에도 꾸준히 광고 출연을 이어갔는데, 진중하고 카리스마 있는 모델로 출연하던 선수 시절과는 달리 의외로 코믹한 광고가 굉장히 많다. 은퇴 이후에는 아들인 차두리와 함께 출연하는 광고가 많았는데 2010년대 후반부터 단독으로 출연하는 빈도가 많고 한국 축구 레전드의 느낌을 살려 진중한 느낌의 광고가 주를 이룬다.

애초에 서독에 진출한 것도 개인의 축구에 대한 욕심도 있지만 대한민국의 축구 발전을 위한 것이 컸던 것처럼 광고조차 애국자적인 출연 결정이 많았다. 물론 당시 사회적인 통념 자체가 요즘과는 달리 다소 국수주의 적이기도 했지만 국내 기업의 신제품이나 세계 시장을 노리는 도전적인 시도의 상품 광고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하였고 특히 1998년 기아자동차 광고의 경우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법정 관리에 들어간 기아자동차의 정상화를 위해 무상으로 광고에 출연하였다. 여담으로 기아자동차는 회생 후 감사의 의미로 기아 엔터프라이즈를 기증했다.

이외에도 상업 광고가 아닌 공익 광고(지면)에 출연한 적도 있다. 가족계획으로 산아 제한 정책을 추진하던 1980년 당시 첫째인 차하나(당시는 3살 아기였다), 부인 오은미와 함께 찍은 사진이 있고 그 하단에 "하나만 더 낳고 그만 두겠어요"란 문구가 적혀있는 캠페인 신문 광고다. #보기 하지만 정작 이 이후 차범근의 가족은 한 명이 아니라 둘이 더 태어나 총 세 자녀가 되었다. 여담으로 차범근은 공익 광고이기 때문에 무료로 출연했다고 한다. 당시 신문 기사

6.3. 도서

7. 차범근에 대한 언사

파일:201812280390370317_72.jpg
“여기가 차붐의 나라입니까? 꼭 와 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나의 우상입니다.”
미하엘 발락, 2002년 한일 월드컵 독일 대표팀 입국 당시 인터뷰에서.[79]
“우리가 풀지 못한 주요 문제는 차붐이었다. 차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해결할 수 없는 존재였다.”
알렉스 퍼거슨, 1979년 애버딘 감독 당시 프랑크푸르트와 UEFA컵 1라운드 경기 패배 후
“당신에게서 사인을 받고 싶었습니다. 이 자리는 제게 정말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올리버 칸, 2004년 월드컵 예선 대비 친선 경기 차 방한 후 차범근을 만나서 한 말
”나는 차붐을 존경한다. 어릴 적 차붐을 보고 자랐고, 나도 그 선수처럼 되고 싶었다.”
마이클 오언
“방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양국의 발전과 우호 증진이어야 한다. 하지만 난 차붐부터 만나고 싶다.”
2002년 정상 회담을 위해 방한한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
“나도 어느 정도 성공한 공격수로 평가받지만 차붐 만큼은 아니다.”
위르겐 클린스만
“퍼펙트라는 말이 어울리는 공격수였다. 슛이 좋은 데다 스피드가 폭발적이었다. 첫 대결 이후로도 나를 상대로 많은 골을 넣었다. 내가 멕시코 월드컵에서 마라도나를 상대로도 골을 안 먹었는데, 차붐은 도저히 못 당하겠더라. 만약 차범근이 지금도 현역이었다면 1억 유로를 이적료로 줘도 아깝지 않을 것이다. 지금 우리 팀에 차붐 같은 선수가 있다면...”
토니 슈마허
“결승전 당시 차붐은 최고의 선수였다.”
“차범근이 세계 최고의 공격수인 건 분명하다. 그는 나의 자만을 깨우쳐 줬다.”
로타어 마테우스
“내가 프랑크푸르트에 뛰던 시절 한국인 선수가 한 명 있었는데 그 선수가 바로 당시 최고의 선수였던 붐근차였다.”
요아힘 뢰프[80]
“난 차붐을 낳은 어머니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리고 그가 독일인이라면 어김없이 독일 대표팀에 넣고 싶다.”
에크하르트 헨샤인트(eckhard henscheid)[81]
“차범근은 매우 위대하고 훌륭한 선수다. 아직도 독일에는 그의 뛰어난 기량을 기억하는 팬이 많다.”
프란츠 베켄바워, 1995년 방한 당시 MBC NEWS 인터뷰
“차붐은 진정으로 축구를 할 줄 알고 즐길 줄 안다.”
펠레
“차붐은 나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큰 영웅이다.”
루이스 피구[82]
승부차기까지 가서 이겨 더욱 기뻤죠. 차붐은 매우 중요한 선수였어요.”
“차붐이 50%만 해내도 나는 다른 어떤 선수보다 먼저 차붐을 기용할 수밖에 없다”
에리히 리베크
“차붐은 분데스리가에서 활약한 엄청난 스타입니다. 그는 리그를 주름잡았죠”
아르센 벵거
“차붐은 당시 독일에서 정말로 특출한 존재였다.”
카를하인츠 루메니게
“차붐의 영입으로 UEFA컵을 우승할 수 있었다. 레버쿠젠 구단 역사에서 첫 우승이었다.”
루디 푈러
“차붐은 케빈 키건과 더불어 당대 최고의 외국인 선수이다. 세계 어느 클럽의 최전방에 배치해 놔도 주전을 꿰찰 수 있을 것이다.”
귄터 네처
“현재 서독 대표팀의 왼쪽 윙 포워드가 시원찮다. 차(Cha)가 서독 선수라면 당장 그 자리에 넣고 싶다.”
유프 데어발, 1980년 유니세프 세계 올스타전 경기 후 언론사 인터뷰
"루메니게와 동급의 선수이지만, 그가 헤더를 훨씬 더 잘한다."
"루메니게를 제외하면 나를 그만큼 묶어놓을 수 있는 선수는 없다. 그를 눈에서 놓치면 안 된다. 그가 나를 따라오지 않으니, 그를 마크해야 하는 동안에는 내가 공격에 가담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국제적인 위상을 가진 센터 포워드가 부족하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그런 공격수를) 찾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차범근이 있으면 우리는 확실히 빅 2(※ 바이에른 뮌헨, 함부르크)와 대등해질 수 있다!"
한스페터 브리겔, 차범근의 라이벌로 불리던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의 수비수
“전설을 마주하게 돼 큰 영광입니다. 차붐이 다름슈타트에서 뛰었다는 사실을 구단은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뤼디거 프리치 SV 다름슈타트 98 회장, 2017/18 시즌 출정식에 초대된 차범근을 만나며 건넨 인사말
“차범근은 나의 롤 모델이자 우상이다.”
디미타르 베르바토프
“직접 대결해 본 적은 없으나 유럽 컵 등의 대회에서 그의 활기찬 플레이에 여러 번 감탄했다. 차범근을 묶지 못하면 한국에 당할 가능성이 크다. 그는 현역 최고의 스타플레이어 중 한 명이다.”
파올로 로시,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당시 대한민국과의 조별 예선을 앞두고 인터뷰[83]
“왜 그런지 여러분은 몰라요. 여러분이 태어나기 전에 그는 유럽의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죠. 독일에서, 아마 프랑크푸르트 선수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는 최고의 유럽 선수 중 한 명이었죠.”
거스 히딩크, 손차박 중 최고의 선수가 누구인지에 대한 질문에 차범근을 뽑으며.
“타고난 기량에 노력을 더한 불세출의 스트라이커. 비교 거부.”
최순호, 역대 한국 스트라이커를 평가하던 중 차범근에 대한 평가.[84]
“차범근을 존경한다. 그의 출장 기록을 넘어섰다고 해서 내가 그를 뛰어넘은 건 절대로 아니다.”[85]
하세베 마코토

8. 논란 및 사건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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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담

파일:차범근 대화의희열.jpg

10. 등번호

차범근의 등번호 11으로 이는 차범근이래로 에이스의 상징 11번으로 여겨지는데 영어알파벳으로 따져보면 k이다. [121]

11. 둘러보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스태프 팀 국적
감독 디노 토프묄러 (Dino Toppmöller) 파일:독일 국기.svg
수석 코치 넬송 모르가두 (Nélson Morgado) 파일:포르투갈 국기.svg
에르빈 브라다슈 (Erwin Bradasch) 파일:독일 국기.svg
슈테판 부크 (Stephan Buck) 파일:독일 국기.svg
골키퍼 코치 얀 치머만 (Jan Zimmermann) 파일:독일 국기.svg
헤드 코치 샤리아르 비그델리 (Schahriar Bigdeli) 파일:독일 국기.svg
코치 마르쿠스 무러 (Markus Murrer)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마르틴 슈포러 (Martin Spohrer) 파일:독일 국기.svg
토마스 피츠케 (Thomas Pitzke) 파일:독일 국기.svg
안드레아스 베크 (Andreas Beck) 파일:독일 국기.svg
잠재 개발 코치 마르틴 닥슬 (Martin Daxl) 파일:독일 국기.svg
아카데미 전환 코치 랄프 구네슈 (Ralph Gunesch) 파일:독일 국기.svg
기능 팀
팀 매니저 크리스토프 프로이스 (Christoph Preuß) 파일:독일 국기.svg
경기 분석 책임자 마르코 슈스터 (Marco Schuster) 파일:독일 국기.svg
경기 분석가 세바스티안 살림베니 (Sebastian Saglimbeni) 파일:독일 국기.svg
니클라스 란버 (Niklas Lanwehr) 파일:독일 국기.svg
마르코 루스 (Marco Russ) 파일:독일 국기.svg
경기 분석가 (골키퍼) 요나스 가비 (Jonas Gabi) 파일:독일 국기.svg
장비 관리책임자 프랑코 리온티 (Franco Liont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장비 관리자 카이 슐마이어 (Kay Schulmeyer) 파일:독일 국기.svg
이고르 시모노프 (Igor Simonov) 파일:우크라이나 국기.svg
릴랴나 스브르코타 (Ljiljana Svrkota) 파일:세르비아 국기.svg
통역사 슈테파네 괴데 (Stéphane Gödde) 파일:독일 국기.svg
이사회
이사장 페터 피셔 (Peter Fischer) 파일:독일 국기.svg
의장 필리프 홀처 (Philip Holzer) 파일:독일 국기.svg
부의장 악셀 헬만 (Axel Hellmann) 파일:독일 국기.svg
단장 마르쿠스 크뢰셰 (Markus Krösche) 파일:독일 국기.svg
행정 지원 올레 지겔 (Ole Siegel) 파일:독일 국기.svg
라이너 팔켄하인 (Rainer Falkenhain) 파일:독일 국기.svg
CFO 올리버 프랑켄바흐 (Oliver Frankenbach) 파일:독일 국기.svg
경기장 상무이사 율린 참베르크 (Julien Zamberk) 파일:독일 국기.svg
메디컬 팀
메디컬 디렉터 크리스티안 하저 (Christian Haser) 파일:독일 국기.svg
팀 닥터 플로리안 파프 (Dr. Florian Pfab) 파일:독일 국기.svg
파비안 플라헬 (Fabian Plachel)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물리치료사 파트리크 쿡스 (Patrick Kux) 파일:독일 국기.svg
니클라스 마체크체크 (Niklas Mazeczek) 파일:독일 국기.svg
루카스 트리텔 (Lucas Trittel) 파일:독일 국기.svg
다니엘 크라프트 (Daniel Kraft) 파일:독일 국기.svg
의료진 쿠로카와 코이치 (Koichi Kurokawa) 파일:일본 국기.svg
간호사 아나 판데르펠던 (Anna van der Felden) 파일:독일 국기.svg
재활 코치 벤야민 조머 (Benjamin Sommer) 파일:독일 국기.svg
과학 부서장 빈프리트 반처 (Winfried Banzer) 파일:독일 국기.svg
영양사 안나 레나 판데르펠던 (Anna Lena van der Felden) 파일:독일 국기.svg
스카우트 팀
스포츠 디렉터 티모 하르둥 (Timmo Hardung) 파일:독일 국기.svg
헤드 스카우트 니콜라이 아담 (Nicolai Adam) 파일:독일 국기.svg
스카우트 칼리트 다오우 (Khalid Ddaou) 파일:모로코 국기.svg
리차르드 (Richard) 파일:스페인 국기.svg
뵈른 안데르존 (Björn Andersohn) 파일:독일 국기.svg
루돌프 고레스 (Rudolf Gores) 파일:독일 국기.svg
데니스 호프만 (Dennis Hofmann) 파일:독일 국기.svg
스카웃 코디네이터 제바스티안 프랑크 (Sebasitan Frank) 파일:독일 국기.svg
마케팅 팀
언론 담당자 바르토시 니에즈비에츠키 (Bartosz Niedzwiedzki) 파일:오스트리아 국기.svg
서포터 연락 담당자 마르크 프란치스 (Marc Francis) 파일:독일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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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네셔널
브랜드 엠버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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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화성군의 시 승격은 2001년, 태안읍의 동 전환은 2006년에 이뤄졌다. [2] 공식적으로는 179cm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조금 작다고 한다. 인터뷰 기사 [3] 대한축구협회 기록. 링크 [4] https://m.cafe.daum.net/ppyd/IKDb/7317 [5] 클럽팀에서는 대부분 투톱의 중앙 공격수로 현대의 세컨드 스트라이커(공격형 미드필더와 유사)처럼 뛰었으며 4-3-3을 쓸 때는 원톱으로 뛰기도 했고 30대에 들어서는 윙어로도 뛰었다. 말년, 은퇴 직전에는 미드필더로도 뛰었다. 국가대표팀에서는 주로 오른쪽 윙어로 뛰었고 1977년부터는 김재한과 투톱, 김재한과 뛰지 않을 때는 원톱으로도 뛰었다. [6] 리그 한 경기만 치르고 병역 문제로 계약 파기. [7] 레전드 네트워크 앰버서더 [8] 인터내셔널 브랜드 앰버서더 [9]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출장 홍명보와 공동 1위 ( FIFA 공인 기록 기준 3위), 역대 최다 득점 1위. 한동안 공식 기록은 121경기 55골로 알려져 있었으나 2014년 11월 4일 축구협회가 데이터베이스 조사를 통해 누락된 기록을 포함하면서 '136경기 58골'로 수정했다. 그러나 이 기록은 FIFA에서 A매치로 인정하지 않는 올림픽 축구 지역 예선 경기 6경기(2골)를 포함한 것이어서 FIFA는 일부만 인정하여 결론적으로 130경기 56골이 FIFA 공식 기록이다. 다만 대한축구협회 자체적으로는 '136경기 58골'로 기록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선수별 A매치 기록 참고. 차범근은 1972년에 데뷔해 1979년 서독 진출 전까지 국가대표를 뛰었고, 이후 1986년 대한민국이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이 확정되면서 국가대표에 복귀하기 전까지는 차출이 어려워 A매치에 뛸 수 없었다. [10] 공군 축구단 성무 [11] 서울특별시 용산구 이촌동 소재의 충신교회에서 안수집사를 맡고 있다. [12] 차범근보다 3살 연하라고 알려져 있으므로 1956년생이다. [13] 차두리가 본인보다 2살 많다고 했으므로 1978년생이다. [14] 정확한 분데스리가 데뷔 나이는 만 25세이나 당시 소속 구단이었던 다름슈타트에서 그 데뷔 경기밖에 못 뛰고 바로 한국으로 복귀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선수 경력 문서에 서술. [15] 24세 139일,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 가입. [16] 서독으로 진출한 이후 국가대표팀에서는 한동안 뛰지 못했고 1986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자 복귀해 본선 3경기를 뛰었고 대표팀을 은퇴했다. [17] 현재 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 단 유로파 리그보다는 위상이 높은 대회였다. [18] 1987년부터 윌리 립펜스의 92골을 넘어서며 98골로 최다 득점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이는 차범근 은퇴 당시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고 이 기록은 스테판 샤퓌자가 1998년에 99호 득점을 넣을 때까지 11년간 깨지지 않았다. [19] 독일의 대표적인 축구 매체 kicker 선정. 키커 선정 베스트 11이 분데스리가 마니아 사이에서는 그 선정 방식에 논란이 되기는 하나 전통적으로 분데스리가의 베스트 11을 선정한 매체는 키커와 Bild였다. 키커는 또한 랑리스테에서 1979/80 시즌 전반기에 차범근을 월드 클래스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20] 1987년부터 윌리 립펜스의 92골을 넘어서며 98골로 최다 득점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이는 차범근 은퇴 당시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이었고 이 기록은 스테판 샤퓌자가 1998년에 99호 득점을 넣을 때까지 11년간 깨지지 않았다. [21] 대한축구협회의 공식 기록이며 FIFA의 공식 기록은 130경기 56골이다. 본래 대한민국 남녀 통합 축구 국가대표 A매치 최다 득점자였으나 2021년 9월 17일 2022 아시아축구연맹(AFC) 여자 아시안컵 예선 몽골과 E조 1차전에서 지소연이 경신했다. 무엇보다 공군 축구단에서 군 복무(27개월+5개월)를 하고 병장으로 만기 전역한 후 만 26세의 나이로 분데스리가에서 뛰기 시작했기에 더욱 대단하다고 볼 수 있다. 만약 군 복무가 아니었다면 더 일찍 유럽 축구 무대로 진출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고, 그렇게 됐다면 유럽에서 더 뛰어난 활약과 기록을 남겼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실제로 27개월 단축 군 복무 후 분데스리가의 다름슈타트에서 데뷔 전까지 성공적으로 치렀으나, 군 복무 단축에 대한 논란이 생겨 남은 5개월 군 복무 기간을 끝내야 했기 때문에, 다름슈타트와의 계약을 해지하고 한국으로 돌아갔다. [22] 대한축구협회 기록 기준. FIFA 공인 기록은 130경기 56골이다. [23] 남녀 축구 선수 통합 최다 득점 기록이었으나 2021년 여자 축구 선수 지소연이 경신했다. [24] 1978년 다름슈타트 시절은 12월 30일에 첫 경기를 가진 후 군 문제로 계약 취소 및 국내로 돌아갔기 때문에 사실상 본격적인 분데스리가 경력이 시작되는 건 프랑크푸르트 시절인 1979년부터로 햇수로 11년이라 보는 경우가 많다. [25] 2021년 7월 기준 외국인 선수 역대 18위 [26] 2021년 8월 기준 외국인 선수 역대 8위. 당시 기준 분데스리가 역대 통산 득점 28위였다. 2021년 8월 기준으로 55위 [27] 페널티 킥을 모두 실축했다는 것이 아니라, 페널티 킥을 아예 차지 않았다는 의미다. 고교 시절 페널티 킥을 실축한 이후 트라우마가 생겨 프로 선수가 된 이후론 한 번도 페널티 킥 키커로 나서지 않았다고 한다. 국가대표 선수 시절에는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고 경기가 끝나고 중계 아나운서와 현장 인터뷰를 한 기록이 있다. 1977년 4월 3일에 벌어진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조 예선 최종전인 일본과의 2차전이다. 경기 종료 6분을 남기고 차범근이 페널티 킥을 성공시켜 1:0으로 이겼다. 기사 [28] 한동안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했다는 정보가 돌아다녔는데 실제로 레버쿠젠 시절 85/86 시즌 분데스리가 13 라운드 브레멘 전에서 5:1 승리 당시 해트트릭을 했다는 국내 기사가 존재한다. 다만 아쉽게도 실제 해트트릭을 기록하진 않았는데, 당시 전반전에 멀티골을 기록하고 후반전에 추가로 넣은 한 골이 자책골로 처리되었기 때문이다. 중계하던 독일 캐스터조차 차범근이 골을 넣었다고 멘트를 할 정도로 굉장히 애매한 판결이었다. 참고로 자책골로 기록된 선수는 역대 분데스리가 통산 출전 순위 5위(546경기)에 빛나는 독일 레전드 미로슬라프 보타바(Miroslav Votava)이다. [29] 과거 농구의 필리핀이 그러했듯이 이때의 말레이시아는 아시아의 축구 강호였다. 모든 과거의 강호가 그러하듯, 높으신 분들이 망쳐놔서 지금은 아시아에서도 하위권이다. [30] 사진은 바이어 04 레버쿠젠 시절이다. 눈여겨봐야 할 곳은 대퇴 사두(오른쪽 전방)가 아니라 대퇴 이두(왼쪽 뒷부분) 부분이다. 보통은 운동선수라도 저렇게 튀어나올 정도로 단련하기 힘든 부분이다. [31] 맨 위 사진은 1998 프랑스 월드컵을 생각하면서 보면 분위기가 좀 묘하다. 현역 시절 뢰브는 차범근의 백업 선수였다. 하지만 차범근은 그에게 잘 대해줬고 때문에 뢰브는 지금까지 차범근을 좋게 생각하고 있다. [32] 훗날 핑안은 보험 회사에서 외연을 확장해 중국 최상위급 금융 회사가 되며, 김판곤 아랫동네 대표팀을 감독으로 이끌게 되었다. [33] 본인 스스로 중국으로 귀양갔다고 표현을 한 바 있다. 대표팀 실패의 책임을 전부 뒤집어 쓴 상처가 깊었던 듯... 칼럼 [34] 허정무가 이끌던 대표팀이 2000 시드니 올림픽 2000년 AFC 아시안컵에서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하면서 차범근에 대한 동정 여론이 많아지던 시기였다. [35] 여담으로 이때 고려대 동기(72학번. 나이는 허구연이 두 살 형이다.)인 허구연이 차범근을 적극 추천했다고 한다. 해설가는 선수 출신이 잘하는 거라고. 훗날 경남 지역에 있던 강연에서, 허구연은 대학 시절 차범근이 고려대 운동장에서 연습하는 모습을 회고하며 역사상 최고의 프로 선수를 차범근이라고 언급하였다. 당시 강연 내용 [36] 2014년 풋볼리스트에 차범근이 연재한 칼럼 '차범근의 따뜻한 축구'에서 발췌 # [37] 레버쿠젠의 모기업 바이엘이 바로 아스피린의 제조사다. [38] 거기에 추가로 중간중간 존댓말이 아닌 반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잦은 편이었다. [39] 옳던 그르건 자기 맘에 안 들면 히딩크부터 시작해 죄다 깠던 조광래와는 성격이 정반대다. 아스날에서의 부진과 군문제로 인해 여론의 질타를 받던 박주영조차 최대한 감싸고 기운을 북돋아주려 했고, 월드컵 전부터 졸전을 거듭하던 대표팀에 대해서도 해설이나 칼럼에서 비판하는 것은 자제했다. [40] 본인이 지도자로 오래 재임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의 게리 네빌이 해설자하며 벵거를 비롯한 감독들을 강도 높게 비판하니 무리뉴가 현장의 축구는 화면으로 보는 것과 다르다는 요지로 한 소리 했는데 같은 이치다. [41] 비선수 출신들은 잡다한 상식이 많고 말을 잘하나 경기 보는 눈이 떨어져서 해설이 안 되는 경우가 많고 선수 출신들은 아는 건 많은데 말로 표현을 못하는 경우가 많다. [42] 또한 더 나아가서 매니아들은 직설적인 걸 좋아한다고 하지만 그 매니아들 가운데에서도 진짜 끝까지 가서 객관적으로 잘하고 못하고가 보여서 레전드 선수의 해설에 확실하게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매니아들이 아니고서는 그냥 자기들 비위에 맞는 소리나 직설적으로 해 달라는 얘기에 가깝다. 직설적이고 공격적으로 해설하면 그 매니아들로부터도 비난이 쇄도해 해고된다. 까고 말해서 코어 팬들의 경기 읽는 수준이 야구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43] 이 경우는 얼굴은 아나 순간적으로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다. [44] 이런류의 최악의 해설이 이상윤. 선수 프로필 읽고 잡스러운 얘기는 많이 하지만 제일 중요한 경기 해설을 못한다. [45] 그러나 차범근보다는 브라질이 훨씬 더 참혹한 상황이었다. 차범근이 겪은 대패는 그래도 전반 40분 가까이 무실점이었다가 2골을 허용한 것이었다. 또한 브라질과 독일보다 대한민국과 네덜란드의 실력차가 훨씬 더 컸다. 차범근이 잘한 건 아니었지만 당시 여론이 현실을 인정할 줄 몰랐다. [46] 2006년 독일 월드컵 8강전 독일vs아르헨티나 경기 해설 중 연장전에 접어들자, 우스갯소리로 본인 스스로가 해설자로서 그러면 안 되는데 마음이 자꾸 독일 쪽으로 기운다고 인증한 적도 있다. 당시 옆에 있던 캐스터는 김성주. [47] 독일이 골을 넣으면 목소리 톤이 미묘하게 다르다거나 상대방이 완벽한 찬스를 맞이했을 때 '위험해요!'라고 외친다던가. [48] 공교롭게도 독일은 차범근이 해설을 그만둔 이후 치러진 두 번의 월드컵에서 두 번 모두 조별리그에서 광탈하는 망신을 당했으며, 심지어 2018년은 차범근의 고국팀에 0:2로 져서 조 꼴찌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하기까지 했다. [49] 이때는 A매치로 인정되는 성인 대회였다. [제외내용] 당시의 기사 출처가 없으나 소문만으로 퍼진 수상 내역으로는 프랑스 풋볼 세계 4대 축구인 (연도 불명), Kicker 80년대 분데스리가 외국인 선수 1위 (1989), UEFA컵 결승 2차전 맨 오브 더 매치 (1980)가 있다. 프랑스 풋볼 4대 축구인은 아래 수상 목록에 나와 있는 슈테른지 4대 상승 인물과 프랑스 메이어지에서 선정한 80년대 외국인 선수 1위가 와전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UEFA컵 결승 2차전 맨 오브 더 매치는 위키피디아에 처음으로 서술되었고, IFFHS가 위키피디아 내용을 인용하면서 소문이 퍼졌으나, 위키피디아가 이 내용의 출처를 첨부하지 않았으며, 당대에 UEFA가 UEFA컵 결승전의 최우수 선수를 선정했는지도 불분명하다. [5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52] 팬 투표로 진행되었으며 출처는 링크된 문서 구단과 팬들의 평가 참조 [53] 차범근이 독일 올해의 선수(분데스리가 MVP)로 선정되었다는 정보는 날조다. 분데스리가 공식 MVP가 아니라 지금은 폐간된 서독 지역 언론사 선정 MVP였으며 실제 1986년 독일 올해의 선수는 토니 슈마허이다. [54] 서독과 동독으로 나눠져 있던 독일이 통일한 뒤 처음으로 동서독 출신의 선수들이 한 팀으로 뛴 경기로 세계 2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동독 지역의 드레스덴시의 재건을 위해 개최된 자선 경기다. 차범근은 이 경기에서 바비 무어 자이르지뉴, 마리오 켐페스, 요니 렙 등이 포진된 세계 올스타팀에 뽑혀 동서독 연합 대표팀과 경기를 펼쳤고 2골을 넣는 활약과 함께 팀의 3-1 승리를 이끌었다. [55] 베스트 11에는 들지 못했으며 서브에 포함되었다. [56] K리그 감독 15명, 축구 해설 위원 5명, 기자 5명이 선정에 참여했다. [57] 공식적으로 확인 가능한 어시스트 5개 포함 [58] 2020년 하세베 마코토에 의해 경신 [59] 공식적으로 확인 가능한 어시스트 5개 포함 [60] FIFA 공인 기록은 130경기 [61] FIFA 공인 기록은 56골. 남자 축구 선수 최다 득점 기록으로 본래 남녀 통합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으나 2021년 지소연이 경신했다. [62] 11년 후 스테판 샤퓌자에 의해 경신. 2021년 8월 기준 8위 [63] 92/93 시즌 울프 키르스텐에 의해 경신. 현재 역대 6위 [64] 88/89 시즌부터 외국인 선수 부문이 폐지되었다. [65] 한국인이 유럽 클럽에서 300경기 넘게 출전해 100골 이상을 넣었다는 유일무이한 기록은 30년이 흐르고 나서야 후배에 의해 깨지게 된다. # [66] 1979년 분데스리가 진출 후 국가대표 잠정 은퇴,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본선 진출로 국가대표 복귀. 대한축구협회 기준 경기/골 기록 [67] 대한민국 매체들은 훈장의 등급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았으나 훈장의 형태를 볼 때 5등급인 공로십자장(Verdienstkreuz am Bande)으로 추정된다. [68] 차범근의 이야기를 엮은 장편 라디오 드라마 [69] 다름슈타트에서 첫 경기 후 지역 방송에 편성된 차범근의 이적 및 경기 활약상을 다룬 15분짜리 특집 방송이다. [70] 차범근이 부당하게 차징 당하는 장면을 모아 차범근의 보호의 필요성과 와일드차징의 부당함을 다룬 특집 방송이다. [71] 갤스도르프에 의해 큰 부상을 당한 차범근을 다루고, 분데스리가 파울 완화 캠페인을 목적으로 제작된 토크쇼이다. 차범근이 직접 출연했다. [72]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활약상을 소개한 30분짜리 특집 방송이다. [73] 차범근의 레버쿠젠 이적 과정과 활약상을 담은 특집 방송 [74] 대표적으로 1978년, 1979년 발롱도르 수상자 케빈 키건이 있는데 말보로 광고 계약을 비롯해 1981년 한 해 동안 광고로만 3억 원이 넘는 수익을 내어 당시 영국 운동선수 중 최고 수익을 내었다. [75] 남양유업 광고료다. [76] 해태제과 광고료 [77] 당시 차범근은 바이어 04 레버쿠젠 소속으로 뛰고 있었고, 모기업인 바이어가 저 당시에 이미 한국바이엘약품으로 진출했기에 한국바이엘약품 쪽의 광고를 찍을 법했겠지만 이 기업의 광고가 없었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78] 다만 광고 수입이 최상위에 해당하지는 않았다. 광고 한 편의 단가는 가장 높았지만 스케줄 상 한국에서 많은 광고를 찍을 수는 없었어서 광고를 업으로 삼는 연예인이나 찍을 기회가 많은 국내 스포츠 스타들에 비해 총 광고 수익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79] 이 말에 대한 오해가 있는데 한국 기자가 먼저 발락에게 "여기가 차붐의 나라인 걸 아십니까?"라는 질문에 발락이 답한 것이다. 사실 대화의 앞뒤 문맥을 생각해 보면 저절로 답이 나오기는 한다. 입국하자마자 한 말도 아니고 인터뷰 중에 뜬금없이 여기가 차붐의 나라냐며 운을 뗄 리는 없기 때문이다. [80] 선수 시절 당시 차범근의 백업 선수였다. 이후 독일 대표팀 감독을 역임한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 사실 차범근도 해설자 시절 뢰프가 자신의 교체선수였다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81] 차범근의 찬양 시를 쓴 독일의 작가. 이에 관한 정보는 선수 경력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란에 나와 있다. 원래 프란츠 베켄바워가 한 말로 알지만, 슛포러브에서 차범근이 베켄바워가 한 말이 아니라고 언급했다. [82] 다만 피구는 2019년 리오 퍼디난드가 진행한 인터뷰에서 본인이 본 최고의 선수 세 명으로 펠레, 에우제비우,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꼽았다. [83] 이 인터뷰에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대해 여느 아시아권의 팀과 달리 특이한 축구를 하는 팀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했다. [84] 여기서 최순호는 황선홍, 이동국, 안정환, 박주영부터 심지어 또 다른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인 이회택에 이르기까지 근성, 의욕면에서의 단점, 약한 체력, 자기 관리 부족 등 각각 선수 대부분의 크고 작은 단점을 언급했다. 그러나 차범근만큼은 단점을 언급하기는커녕 불세출의 스트라이커라며 극찬을 남긴 것이었다. 최순호 역시 대한민국 월드컵 최다 공격 포인트 기록의 소유자이자 당시 유벤투스, 인테르 등에서도 노릴 정도의 재능과 능력을 가진 공격수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히 차범근의 위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85] 이에 차범근도 "이 기록이 30년 넘게 이어졌고, 하세베가 발자취를 이어간다는 사실이 정말 자랑스럽다"라고 격려를 해줬고, "하세베는 수년간 아시아에서 명성을 떨친 선수였고 젊은 선수들의 본보기와 귀감이 되는 선수다"라며 찬사를 보냈다. [86] 다만 마라도나의 경우에는 차범근의 협상이 결렬되자 대체자로 데려온 것이기 때문에 말디니의 데뷔만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87] 베를린 장벽 붕괴의 시발점이자 동독 SED의 당 서기인 귄터 샤보프스키가 기자 회견을 가진 게 1989년 11월 9일 오후 6시였으니, 이때는 한국 시각으로 이미 11월 10일로 넘어갔던 상황이다. [88] 보통 운동선수의 신체 능력은 20대 초중반이 전성기인데, 당시 현역 운동선수인 20대의 차두리가 40대인 아버지에게 뒤졌다는 충격적인 말이다. 게다가 차두리가 한국 국가대표 선수를 통틀어 독보적인 체격과 체력을 자랑하는 선수라는 것까지 고려하면 정말 엄청난 신체 스펙이다. [89] 팀의 주장이자 원클럽맨 위르겐 그라보브스키를 비롯한 노장 선수들을 방출하고 새롭게 재편하겠다는 라우쉬 감독에 따른 갈등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선수 경력 참조 [90] 연세대학교 종교음악과 출신으로, 차범근과는 미팅으로 처음 만나 결혼했다. 1970년대에 여성이 대학을 다녔다는 건 상당히 좋은 집안이 아니었다면 매우 힘든 일이었다. 실제로 차범근 또한 곱게 자란 아내가 이 시기에 너무 고생을 많이 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91] 이와 관련해서 유명한 이야기로는 차범근은 자동차를 상당히 좋아해 만약 오은미가 돈 관리 안 했으면 자긴 진작에 집안에다가 각종 차를 종류별로 모아 놨을 거라고 한 이야기. 차범근이 오은미와 차를 사러갔다가 축구장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에 포기했다고 하며 그렇게 만든 게 경기도 연천의 축구장이다. [92] 참고로 아래 사진은 저출산 광고를 찍기 위해 따로 찍은 사진이 아니라 당시 서독의 스포츠 전문 잡지 중 하나인 푸스발 보헤에서 차범근을 1979년 스타플레이어로 선정하며 성탄절 특집 기사에 차범근의 자필 편지와 함께 기재하기 위해 찍은 사진이다. 한마디로 차범근의 의사와 상관없이 가족 사진을 정부 마음대로 저출산 공익 광고에 가져다 쓴 것이다. 당연히 셋째는 낳지 않겠다는 말도 차범근 본인이 한 말이 아니다. [93] 태어났을 때, 뉴스 제목이 '차붐 할아버지 되다'인데 당시 차범근의 자녀로서는 차두리의 인지도가 워낙 압도적이었던 탓에 딸이 있는 줄 알 리 없었던 네티즌의 상당수는 제목만 보고 '차두리(당시 미혼)가 사고친 줄 알았다.'고 댓글을 남겼다. [94] 여아인 첫째의 이름은 '아인'이다. 독일어(Ein)로 1. [95]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직전에 수원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지네딘 지단이 교체되는 것을 보고 그가 부상 당했다고 해설했는데, 그 말이 정확했다. 또한 독일과의 준결승전에서 미하엘 발락이 결승골을 넣기 불과 몇 분 전에 "지금 상황은 절대로 조심해야 합니다. 단 한 방으로 경기가 끝날 수도 있거든요."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96] 물론 차범근 개인의 인성이 좋은 일화로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차범근의 아들 차두리를 히딩크가 대표팀에 발탁한 것도 있다. 즉 히딩크와의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다. [97] 원래 차두리는 축구 전문 언론인을 꿈꾸었다. [98] 무리뉴를 아는 사람은 알테지만, 축구계에서 자존심과 고집만큼은 세계 최고라고 해도 될 정도로 강단 있는 감독이다. 그런 그가 먼저 다가와 차범근에게 악수를 청했으며, 허리를 숙여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99] 당시 차범근은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경기력을 비판했는데, 당시 독일 국가대표 감독이던 루디 푈러는 차범근의 선수 시절 소속 구단 레버쿠젠의 모기업이 제약사인 점을 이용해 "아스피린을 너무 많이 먹은 거 아님?"이라는 농담을 했다가 자국인들에게 대차게 욕을 얻어먹고 찾아가서 사과했다고 한다. "감히 차붐을!"이라는 느낌보다 농담이라도 너무 심한 말 아니냐는 비난과 경기력에 대한 비난을 함께 받았다. 이후 차범근도 훈련장을 가서 사과하고 시시덕거렸다고 한다. [100] 월드컵을 비롯해 해설가로서 활동한 적이 있다. [101] 이촌동 충신교회 안수집사이다. 차범근의 신앙 생활은 국내 개신교계 내에서는 워낙 유명한 사실이다. 현역 시절 다른 동료 선수들이 성인 잡지를 볼 때 차범근은 성경을 읽었다는 전 동료의 증언도 있다. 출처는 2013년, '안정환의 사커 앤더 시티 2화 차붐의 도시에서 손흥민을 만나다!' [102] 실제로는 반대로 김도훈이 불교, 최용수가 개신교이며, 만약 진짜로 종교 때문에 최용수를 기피했다면 최종 예선에서 줄곧 최용수를 기용했을 턱이 없다. 실제 최용수의 컨디션이 떨어져 있던 것은 이후 경기에서 출전한 최용수의 폼으로 쉽게 알 수 있다. 고정운 또한 잘 내보내다가 일본전에서 선제골을 허용한 치명적인 실수 때문에 낙마한 것이지 그 전에는 아무런 문제 없이 기용했다. 참고로 고정운도 김도훈처럼 불교. [103] 아이러니하게도 동대문구에서 성남시에 이르기까지 일화 축구단에는 통일교 신자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으며, 오히려 태반이 개신교 신자다. 드래프트 때문에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입단하는 것도 있지만, 구단 측에서도 선수들을 종교 가지고 흔들지 않았다. [104]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배성재는 사내 선발을 거쳐 중계를 처음 맡은 상황이었다. [105] 그리고 SBS는 축구뿐만 아니라 야구에서도 이순철- 정우영 콤비로 스포츠 중계의 세대교체에 성공했다. [106] 참고로 통역 없이 독일어로 대화했다. 히딩크는 네덜란드인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다국어 구사가 가능한데 그 중 하나가 독일어고(독일어와 네덜란드어는 친연 관계에 있는 언어라 네덜란드인과 독일인은 어느 정도의 학습만 하면 서로의 언어를 쉽게 구사할 수 있다.), 차범근이야 분데스리가 시절에 독일어를 섭렵해 놓았다. [107] 이때 히딩크는 방송 스탭에게 이 부분을 편집해 달라고 요청했다. [108] 첫 출전이 1954년이었으니 선수단엔 월드컵을 경험한 이가 아무도 없었다. [109] 60억 야프 스탐의 뒤를 잇는 50억대의 가격대로 2위를 유지 중이다. 월드 레전드 선수를 포함하더라도 엄청난 상위권. 참고로 다른 유럽 리그 전설 선수들은 스탐을 제외하고 20~30억대, 심하면 10억 이하로 폭락했다. [110] 차범근이 1997~1998년 중 날짜 미상의 '전경'지에 기고한 글 중에서 [111] 이 건에 대해선 선수 시절 자기 관리 개판으로 유명한 최강희 잘못이라는 게 축구계 중론. [112] 루메니게와 브라이트너라는 이름만 듣고 감이 안 오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는데, 둘 모두 뮌헨 명예의 전당에 오른 레전드다. 루메니게는 발롱도르 2회에 빛나는 80년대 최고의 공격수였고 브라이트너는 수비수의 위치로 발롱도르 2위까지 오른 당대 최고의 사이드백. 현 시대의 선수로 따지면 각각 레반도프스키와 람 정도가 비견될 만하다. 참고로 이 중 루메니게는 현 뮌헨 CEO를 맡고 있기도 하다. 쉽게 말해서 한국인이 '좀만 더 노력했으면 레반도프스키급도 될 수 있었는데 아쉽게 그 바로 아래 급에서 멈춰버렸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무서운 건 이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차범근은 군 문제로 3년을 낭비하고 독일 진출이 한 차례 무산되기도 하면서 독일에 진출하는 게 많이 늦어졌다. 26살에 진출했는데 만약 차범근이 20대 초반에 빠르게 독일에 진출해 선진 축구를 경험했다면 더 엄청난 경력을 쌓았을 수도 있다. [113] 대표적으로 마인츠에서 뛸 당시의 박주호. 2014 브라질 월드컵 특집 다큐에서 차범근이 마인츠에서 뛰는 구자철과 박주호를 찾아갔는데 박주호가 발가락 부상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자 들고 간 것이 하리보였으며 병실에서 나가기 전 "꼭 먹어"하며 챙겨주는 부분에서 하리보 사랑을 엿볼 수 있다. [114] 당시 승부차기 제도가 국제 축구 대회에 적용된 게 2년밖에 안 된 상태고, 당시에 UEFA 유로, FIFA 월드컵을 제외하고는 국제 축구에서 시행하지 않았다. 그리고 36년 뒤 2014 인천 아시안 게임 결승 당시 남북전이 다시 성사되었는데, 이번에는 대한민국이 120분간의 혈전 끝에 임창우의 극적인 결승골로 1:0으로 승리해서 28년 만에 금메달을 얻었다. [115] 1973년 제정되어 1995년까지 쓰인 번호판으로, 이런 번호판이 달린 차는 못해도 20년이 넘은 차이다. [116] 5년 뒤 진행된 30주년 행사에는 개인 사정으로 불참을 했다. [117] 2014년 브라질 월드컵 특집 다큐에서는 배성재가 대놓고 "어엿한 이 집의 주워 온 아들"이라는 언급을 했고, 2016년에는 배성재의 TEN 방송 시작 때 전화 출연을 하기도 했다. [118] 사진을 보면 장지현, 차두리도 보인다. 또한 SBS 스포츠국, 타 부서 구성원들과도 사이도 돈독해 PD와 잘 지내고 다른 사진에는 장예원, 박현석도 보인다. [119] 얼마나 격하게 반응했냐면, 칼럼이나 발언을 통해 축구 팬들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는데, 차범근이 누군가를 그것도 축구 팬에 대해 이 정도로 격하게 반응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국 한국 대표팀이 독일을 꺾는 기적을 이뤄내자, 경기 후 라커룸으로 달려가 선수들과 펑펑 울었다고 한다. 경기 후 슛포러브 팀의 영상 #에 출연했는데, 너무 울어서 눈이 퉁퉁 부어 있었고, 차범근 본인도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평소 점잖은 이미지와는 완전히 대비되는 모습을 보였다. [120] 실제로 차범근과 신태용 둘은 사적으로도 교류하는 사이다. [121] 중앙일보 > 스포츠 > 축구 > 황희찬, 살라-차범근의 등번호 단다...에이스의 상징 11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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