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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6 00:13:48

조명하

파일:조명하 의사.jpg
출생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 #
(現 황해남도 과일군 세교리)
사망 1928년 10월 10일 (향년 23세)
일본령 대만 다이호쿠 다이호쿠 형무소
본관 함안(咸安) 조씨[1] #
가족관계 아버지 조용우(趙鏞禹)[2]
아들 조혁래[br)손자 조경환
별칭 일본 이름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
학력 황해도 송화 풍천보통학교 중퇴
일본 오사카 상·공업중학교[3] 상업학부 중퇴
이력 황해도 송화군청 판임관[4]
오사카전지제작소(大阪電池製作所) 사원
찻집 부귀원(富貴圓) 종업원
장지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
서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2. 생애3. 기타4.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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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독립운동가.

특이하게도 한반도 중국 대륙· 미국이 아닌 타이완 섬에서, 그리고 이나 폭탄이 아닌 도검을 이용하여 일본 제국의 국구(國舅)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 왕 암살을 시도했다.

2. 생애

1905년 4월 8일 황해도 송화군 하리면 장천리에서 태어났으며 # 젊었을 때는 황해도 신천군 군청서기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1926년 6.10 만세 운동 나석주 의사의 동양척식주식회사 폭탄 투척 의거를 보고 깨달은 바가 있어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범을 잡기 위해서는 범의 소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에 일단 일본으로 건너가 아키가와 도미오(明河豊雄)라는 가명을 쓰면서 오사카에서 전기제작소의 직공, 메리야스 공장 노동자, 상점원 등으로 일하고 밤에는 상공전문학교를 다녔지만 일본에서 뜻을 펼 마땅한 기회가 오지 않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려는 목적으로 일본을 떠났다. 1927년 11월 기착지인 타이완 섬에 도착했다가 바로 상하이로 가는 것이 여의치 않아 타이중에 가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찻집[5]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타이완 섬의 항일운동가들과 손을 잡고 좋은 기회가 오기를 기다렸다.

1928년 5월 일본의 국구( 쇼와 덴노의 장인이자 고준 황후의 아버지)인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이 육군 특별검열사로 대만에 파견된다는 보도를 접하고 그를 처단하기로 결심했는데 5월 14일 타이중에서 열린 환영식에서 구니노미야가 탄 차에 뛰어올라 독을 묻힌 칼[6]을 집어던졌고[7]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칼이 구니노미야의 목을 스치고 운전사 등을 찌르는 데 그치면서 구니노미야는 대만 일정을 예정대로 모두 소화하고 일본으로 귀국했다.
파일:AKR20200921144000089_02_i_P4_20200922050204774.jpg
체포 직후 촬영된 조명하의 머그샷. 왼쪽은 한국 연구진이 대만에서 새롭게 발견한 사진이다. 체포 후 일제의 고문 및 폭행 등에 의해 얼굴이 부은 것으로 보인다.

조명하의 암살 시도는 일본에서 ‘7월 불경 사건’으로 불리면서 대서특필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당시 대만 총독 가미야마 만노신(上山満之進)이 사임했으며 이후 당시 조선 총독이었던 야마나시 한조가 조선인 '관리' 및 후속 조치 미흡으로 사임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한편, 구니노미야는 사건 이후에도 공무를 계속 하다가 1929년 1월에 온천을 즐기기 위해 아타미로 이동하다가 맹장염이 발병했고 급히 도쿄로 후송되었으나 결국 1월 27일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8]

비록 미수에 가까웠던 의거였지만 일본 황실의 구성원을 타겟으로 삼았던 점과 의거로 하여금 일본 정치 및 여론을 뒤흔들었다는 의의가 있다는 점에서 이봉창, 김지섭 등과 유사함을 알 수 있다.

체포된 조명하 의사는 심한 고문을 받다가 1928년 7월 18일 타이완 고등법원 법정[9]에서 열린 특별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10일 타이베이 형무소[10]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당시 나이는 만 23세였다.

3. 기타

파일:external/c2.staticflickr.com/16798192503_d5ffd92890_h.jpg
서울대공원에 세워져 있는 동상[이미지출처]

4. 대중매체에서



[1] 29세손 '○제(濟)' 항렬. [2] 28세손 '용(鏞)○' 항렬. [3] 현재의 오사카부립 돈다바야시 중·고등학교 [4] 군청서기 [5] 해당 찻집은 부귀원(富貴圓)이라는 찻집으로, 지광제(繼光街) 66에 있었다. 찻집이 있던 곳의 구글 스트리트뷰 이 찻집 앞에 조명하로 추정되는 인물이 촬영된 것으로 보이는 사진이 2020년대에 발견되기도 했다. 위키리크스코리아 보도 [6] 독이 아니라 배설물을 가볍게 도포했다고도 한다. 상처에 감염증을 일으키기 쉽기 때문이다. [7] 조명하 의사는 임시정부 등 독립운동 조직과 직접적인 연결이 없었기 때문에 총이나 폭탄을 구할 수 없어서 타이완의 항일 운동가들에게 무술과 검술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일부 매체에선 조명하를 의열단과 연관짓기도 하는데 엄밀히는 나석주 의거라는 의열단 활동으로부터 영향받았을 뿐 조명하 본인은 의열단과는 커넥션이 없었고 독자적인 활동으로 보는 것이 맞다. [8] 한국에선 구니노미야가 조명하로 하여금 독에 감염되어 앓다가 사망했다는 말이 돌았지만 구니노미야는 사건 이후 6개월 가량 공무 집행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온전했던 점을 보아 사인과 조명하의 의거의 직접적인 연관점은 불명확하다. [9] 대만 사법원 건물로 쓰이지만 이 건물은 1934년에 준공된 건물이다. [10] 타오위안으로 이전했고 옛 건물은 철거되어 벽만 일부 남아 있다. [이미지출처] Sony DSC-RX10, 2015년, 사진 촬영자 최광모, 공용 도메인 기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