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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클린스만의 역임 직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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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 감독 | ||||
9대 |
38대 |
74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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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럽 감독 | ||||
50대 |
45대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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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타어 마테우스 (1988~19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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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클린스만 (1994~199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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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버 비어호프 (1998~2000) |
헤르타 BSC 역대 감독 | ||||
안테 초비치 Ante Čović |
위르겐 클린스만 Jürgen Klinsmann |
알렉산더 누리(감독 대행) Alexander Nour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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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 → | 2019년~2020년 | → | 2020년 |
위르겐 클린스만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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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수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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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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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 Ballond'or | ||
수상 조지 웨아 |
2위 위르겐 클린스만 |
3위 야리 리트마넨 |
1995 FIFA 올해의 선수 | ||
수상 조지 웨아 |
2위 파올로 말디니 |
3위 위르겐 클린스만 |
Player of the Year 1995 | ||
수상 잔루카 비알리 |
2위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 |
3위 위르겐 클린스만 |
1988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 ||||
우베 란 (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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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클린스만 ( VfB 슈투트가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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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헤슬러 ( 1. FC 쾰른) |
1994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 ||||
안드레아스 쾨프케 ( 1. FC 뉘른베르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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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르겐 클린스만 ( AS 모나코) |
→ |
마티아스 자머 (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
FIFA 월드컵 우승 멤버 |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 우승 멤버 |
1996 |
위르겐 클린스만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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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데스리가 앰버서더 | ||||
Bundesliga Ambassador | ||||
<nopad> | ||||
<colbgcolor=#d10214><colcolor=#ffffff> 이름 |
위르겐 클린스만 Jürgen Klinsman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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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964년 7월 30일 ([age(1964-07-30)]세) | |||
서독 바덴뷔르템베르크 슈투트가르트 괴핑겐 | ||||
국적 |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복수국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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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 | 키 181cm / 체중 73kg | |||
직업 |
축구 선수 (
스트라이커 / 은퇴) 축구 감독 자선 사업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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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 | <colbgcolor=#d10214><colcolor=#ffffff> 유스 |
TB 깅엔 (1972~1974) SC 가이슬링엔 (1974~1978)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78~19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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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81~1984) VfB 슈투트가르트 (1984~1989) 인테르나치오날레 (1989~1992) AS 모나코 FC (1992~1994) 토트넘 홋스퍼 FC (1994~1995) FC 바이에른 뮌헨 (1995~1997) UC 삼프도리아 (1997~1998) → 토트넘 홋스퍼 FC (1997~1998 / 임대) 오렌지 카운티 블루스타 (2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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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독일 대표팀 (2004~2006) FC 바이에른 뮌헨 (2008~2009) 미국 대표팀 (2011~2016) 헤르타 BSC (2019~2020) 대한민국 대표팀 (2023~20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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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 | 토론토 FC (2010 / 기술 고문) | |||
기타 |
아가페디아 어린이재단 (1995~ / 이사장)[2] ESPN (2010~ / 스튜디오 분석가) 분데스리가 (2015~ / 앰버서더) 유럽 축구 연맹 (2023~ / 자문 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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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 | 108경기 47골[3] ( 독일 / 1987~1998) | |||
링크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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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10214><colcolor=white> 등번호 |
독일 대표팀 - 18번, 9번, 16번, 11번 VfB 슈투트가르트 - 9번[4], 11번[5] 인테르나치오날레 - 9번[6] AS 모나코 FC - 7번[7] 토트넘 홋스퍼 FC - 18번[8], 33번[9] FC 바이에른 뮌헨 - 18번[10], 11번[11], 9번[12] UC 삼프도리아 - 18번[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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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 | 독일 연방군 스포츠진흥단 (1980~1981)[14] | |||
가족 |
아버지 지크프리트 클린스만[15] 어머니 마르타 클린스만[16] 배우자 데비 클린스만(舊 데비 친) 아들 조너선 클린스만 딸 라일라 클린스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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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불교[17]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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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축구 선수 출신 축구 감독. 선수 시절 포지션은 스트라이커.
1981년 고향팀 슈투트가르트 키커스에서 데뷔한 후 슈투트가르트에서 5년간 활약한 뒤 인테르로 이적, 게르만 삼총사[18]의 일원으로 UEFA컵 우승에 기여했다. 이후 AS 모나코와 토트넘을 거쳐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여 UEFA컵과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리고 삼프도리아를 거쳐 토트넘로 임대되어 PL 잔류에 기여한 뒤[19], 1998년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또한 국가대표로도 독일의 1990 월드컵과 유로 1996 우승을 이끄는 등 크게 활약했는데, 특히 FIFA 월드컵에서는 통산 11골[20]을 기록할 정도로 강한 면모를 보였다.
개인 커리어로는 발롱도르 2위, FIFA 올해의 선수 3위, 분데스리가 득점왕, UEFA컵 득점왕, FWA 올해의 선수 등이 있다.
현역 은퇴 후에는 독일 대표팀 감독에 부임해 2006 월드컵 3위[21]를 기록했고, 미국 대표팀 감독으로도 2013 골드컵 우승 및 2014 월드컵 16강 진출 등 호성적을 거뒀다.[22] 하지만 클럽팀에서는 바이에른 뮌헨[23]과 헤르타[24]에서 모두 실패했으며, 2023년부터 대한민국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았지만, 이번에도 근무태만 논란과 아시안컵 부진으로 인해 경질되었다.
2. 선수 경력
자세한 내용은 위르겐 클린스만/선수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2.1. 선수로서의 평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스트라이커 중 하나이자 저니맨으로, 클럽에서는 슈투트가르트에서 1987-88 시즌에 분데스리가 득점왕(19골)을 차지하며 서독 올해의 축구 선수에 선정되었고, 토트넘에서 1994-95 시즌 FWA 올해의 선수 수상 및 발롱도르 2위, FIFA 올해의 선수 3위에 오르며 커리어 하이를 달성했다.[25] UEFA컵에서도 1995-96 시즌 득점왕(15골)[26] 경력을 포함, 두 개의 클럽(인테르, 바이에른 뮌헨)에서 우승을 차지하였다.국가대표팀에서는 1990 이탈리아 월드컵[27]과 유로 1996[28]의 핵심 우승 멤버인 동시에 유로 1992에서도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통산 108경기 47골로 센추리 클럽에 등극하며 역대 최다 득점 4위, 최다 출전 6위에 올라 있으며, 출전한 세 번(1990, 1994, 1998)의 FIFA 월드컵에서 우승 1회와 8강 2회 및 17경기 11골[29]을 기록했고, 세 번(1988, 1992, 1996)의 UEFA 유로에서 우승 1회와 준우승 1회, 4강 1회 및 13경기 5골을 기록했다. 거기다 1988 서울 올림픽에서 6경기 4골[30]을 기록하며 동메달을 획득한 메달리스트이기도 하다. 또한 키커 랑리스테에서는 WK 7회, IK 9회, K 5회, IK 6회로 평가받았다.[31]
이와 같은 커리어와 수상 이력으로 인해 동시대에 활약한 마르코 반 바스텐, 로베르토 바조, 호마리우,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장피에르 파팽, 게리 리네커 등과 함께 1980년대 후반 ~ 1990년대 중반을 대표하는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로 손꼽히며 카를하인츠 루메니게와 루디 푈러의 뒤를 잇는 서독 - 독일 대표팀 주전 스트라이커 계보의 한 축으로 평가받는다. 또한 토트넘에서 뛴 기간이 불과 한 시즌 반 밖에 지나지 않음에도 불구, 최정점의 개인 활약으로 해리 케인, 테디 셰링엄과 함께 PL 출범 이후 토트넘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꼽힌다.[32]
다만, 1990년대를 장식한 스타 플레이어들 가운데서는 인지도가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이것은 꾸준한 활약으로 레전드 반열에 오른 국가대표 커리어와는 대조적으로, 클럽에선 저니맨 유형의 커리어로 인해 본인의 클럽 커리어에서 본인을 대표할 수 있는 상징적인 클럽팀이 없는 것이 주요 원인으로 여겨지고 있다.[33] 이 때문인지 1980년대 후반~1990년대의 정상급 스트라이커였음에도, 각종 축구 전문 매체들이 내놓는 올타임 랭킹에서는 제외되는 경우가 많다.[34] 물론 소속 클럽팀 중 가장 돋보였던 토트넘에선 지금도 레전드로 회자되며 발롱도르 2위, FIFA 올해의 선수 3위까지 기록했지만, 우승이나 득점왕을 차지하진 못했기에 커리어에 뚜렷한 족적이 없는데다 토트넘에서 딱 1년만 뛰고 바로 이적해 단기 임팩트가 강하다는 표현이 맞다. 또한 클린스만은 항상 리그에서 상위권에 드는 스트라이커였지만, 득점왕 경력은 1987-88 시즌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차지한 것이 유일하다.
그러나 클린스만은 분데스리가, 세리에 A에서 부진했던 시기를 빼면 매년 15골 정도를 꾸준히 기록했고, 프리미어 리그 토트넘에서는 경기 수가 늘어났기 때문에 20골을 찍기도 했으며 세리에 A, 분데스리가, PL 어디를 가더라도 일정 수준 이상의 활약을 했고, 강팀에 있든 약팀에 있든 꾸준히 활약했다. 또 커리어 초창기를 제외하면 기복 없이 12시즌을 리그 두 자릿수 득점을 넣었고 그 중 8시즌을 리그 15골 이상 넣었다. 한두 시즌 반짝하여 빨리 사라진 스타 선수들도 많지만, 클린스만처럼 10년 동안 좋은 폼을 유지한 선수는 많지 않다. 축구 역사를 통틀어도 이렇게 여러 리그를 넘나들고, 강팀과 약팀에 국한되지 않고 어느 팀을 가던 높은 기량을 보이며 스스로의 능력을 증명한 선수는 클린스만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봐도 무방하다.
그럼에도 당대 레전드 스트라이커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하는 클럽팀이 있게 마련이다. AC 밀란의 전설인 마르코 반 바스텐은 말할 것도 없고, 호마리우는 PSV와 바르셀로나,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는 피오렌티나, 티에리 앙리는 아스날, 앨런 시어러는 블랙번 로버스와 뉴캐슬 유나이티드, 안드리 셰브첸코는 AC 밀란, 뤼트 판니스텔로이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자체적인 개별 상징들이 있다. 그리고 세컨드 스트라이커들도 대부분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구축한 클럽팀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로베르토 바조는 유벤투스와 브레시아 칼초, 에릭 칸토나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데니스 베르캄프는 아스날, 히바우두는 바르셀로나, 라울 곤살레스는 레알 마드리드,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는 유벤투스라는 자체적인 개별 상징 클럽이 있다. 하지만 클린스만은 이적하는 팀마다 두 자릿수 득점을 하며 수준급 활약을 했음에도 앞서 말한 토트넘에서도 한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과 더불어 UEFA컵에서 시즌 15골을 몰아치며 우승시킨 바이에른 뮌헨에서도 두 시즌 남짓 활약해 클럽 레벨 월드클래스라기보단 국가대표의 레전드라는 이미지가 더 강하기에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은 어쩔수 없는 사실이다.
FIFA 월드컵 우승과 UEFA 유로 우승을 모두 주전으로 달성해낸 데다 월드컵 본선에서만 통산 11골로 레전드 반열에 오른 국대와 달리, 클럽 커리어는 준수하지만 그래서 비교적 임팩트가 약하다. 클린스만의 커리어를 보면 슈투트가르트, AS 모나코, 토트넘, 삼프도리아 등 중소 클럽에서 활동한 경력이 바이에른 뮌헨과 인테르 등의 메이저 빅클럽 경력보다 월등히 많다. 초창기 슈투트가르트 때의 경우도 보통 선수들은 시작은 중위권 혹은 하위권 팀에서 해도 경력이 쌓이면 리그 강팀에서 쭉 활동을 이어가지만, 클린스만은 전성기 때 인테르를 떠나 AS 모나코로, 바이에른 뮌헨을 떠나 토트넘 홋스퍼로 이적하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줬다.[36] 물론 반대로 말하면 저런 기이한 행보로 일관했음에도 가는 팀마다 주전으로 뛰며 확실한 득점력을 보장해줬단 사실이 선수 시절 클린스만이 얼마나 무서운 스트라이커였는지 보여준다.
3. 지도자 경력
자세한 내용은 위르겐 클린스만/지도자 경력 문서 참고하십시오.3.1. 전술 스타일
전술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있기는 하나, 진짜 없다기보다는 독일식 4-4-2 전술을 구사한다. 월드클래스 포워드였던 선수 시절의 영향인지 팀 내에 클래스 높은 선수가 있으면 그 선수를 최대한 활용하는 전술에는 능하다. 대한민국 대표팀에서는 실제로 손흥민에게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나머지 선수들이 희생하는 아이솔레이션 전술이 주된 공격 전술이었다. 에이스 선수에게 일단 공을 때려박는 이러한 전술을 위해 미드필더를 거치지 않더라도 개의치 않는데 이게 현대축구에서는...클린스만 본인은 전술에 꽤나 자신이 있다고 생각하는지 잉글랜드 대표팀이 유로 2024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자신이 대한민국 대표팀에서 사용한 4-4-2 전술을 사용한다면 다를 것이라는 망언을 했다.
3.2. 지도자로서 평가
현역 시절의 업적과는 달리 체력 훈련에만 몰빵하고 전술은 수석코치에게 위임, 헤르타 베를린에서 페이스북 라이브로 뜬금없는 일방적인 사임 발표, 근무태만 논란 등 지도자로서의 평가와 이미지는 대단히 좋지 않다.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이나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같은 곳에서는 성과가 없지는 않았으나, 사건사고가 발생하며 욕을 많이 먹었고 화룡점정인 바이에른 뮌헨, 헤트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문자 그대로 역사상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받는다.[37] 종합적으로 클린스만은 디에고 마라도나와 함께 축구계에서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반드시 꼽힌다.
일단 국가대표팀 감독으론 유의미한 성과가 존재한다. 2004년 하반기에 독일 감독에 부임해 평가전에서 한국에게 1-3으로 충격패하기도 했으나, 결국 유로 2004에서 라트비아와 비기고 체코 2군에도 패하며 16강 조별리그에서 충격의 탈락(12위)을 한 자국 대표팀을 빠르게 재건해 자국에서 열린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보는 맛이 느껴지는 화끈한 공격축구로 녹슨 전차군단이라고 비아냥 받으며 개노잼 축구를 하던 독일 대표팀을 확 바꿔놓으며 승승장구했고, 준결승에서 숙적 이탈리아를 상대로 연장 혈투 끝에 비록 패하긴 했지만 결국 포르투갈을 잡고 3위를 기록하고 유종의 미를 거두며 탄탄한 경기력을 선보인 끝에 2006 독일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되었다.[38] 또한 미국 대표팀 감독으로는 2013 골드컵에서 미국을 우승시키며 2013 북중미 축구협회 올해의 감독으로 선정된데 이어,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미국 대표팀을 이끌고 독일 - 포르투갈 - 가나라는 죽음의 조에서 결국 포르투갈을 밀어내고 16강에 진출(15위)하는 성과를 올리며 유능한 감독으로 떠오르기도 했다.[39]
그러나 클럽 감독으로써는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이 없다. 과거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서는 바르셀로나에게 0-4 참패를 당하는 것을 시작으로 안 좋은 쪽으로 수많은 기록들을 세웠고, 결국 시즌도 다 못 채우고 시즌 종료 무렵에 해임되었다. 하여튼 안 좋은 쪽으로 역사를 쓴다 해서 국내 뮌헨팬들에겐 '역사스만'이란 오명으로 불리기도 한다. 2024년 현재까지도 토마스 투헬과 함께 이견이 없는 21세기 바이에른 최악의 감독으로 평가받는다.
전체적으로 단순 매니저형 감독에 가까운 스타일이며, 세세한 전술은 부족하다는 평가가 많다.
필립 람은 본인의 자서전 'Der Feine Unterschied'에서 바이에른 뮌헨 감독 시절의 클린스만에 대해 "우리는 사실상 클린스만 밑에서 체력 단련을 했을 뿐이다. 전술적인 것들은 무시되었다. 전술적인 지시는 거의 없었고' 선수들은 경기 전에 우리가 어떻게 경기를 하고 싶은지를 토론하기 위해 알아서 모여야 했다"라고 썼다. 또 람은 "클린스만이 하는 말이라곤 '넌 골을 넣어야 한다. 이길 수 있다' 따위의 사기 진작밖에 없었다"라고 밝혔을 정도이니 선수들 사이에서도 평판이 안 좋다는 걸 대변해 준다.
그러나 국대 감독으로써도 썩 잘 했다고 보기는 어려운데, 독일 대표팀 시절에도 그나마 요아힘 뢰프라는 유능한 참모가 있었기에 FIFA 월드컵 3위라는 성과라도 가능했지만, 이후 부임한 팀들에서는 뢰브와 같은 뛰어난 전술가가 없었기 때문에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40] 그리고 독일 대표팀 시절에 한국에게 3-1로 완패한 적이 있다. 더군다나 이 당시 클린스만은 선수들을 장악하는 능력이 전혀 없었으며, 이때 이미 선수단 불화 논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였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는 8강 아르헨티나전이 다 끝나고 나서 라커룸에서 독일의 토어스텐 프링스가 아무 이유 없이 아르헨티나의 훌리오 크루스를 구타하는 사건이 발생한 게 그것이다. # 만약 클린스만이 평소에 선수들만 제대로 통제했더라면 토어스텐 프링스가 저렇게 절대로 막 나가지 못했을 것이다. 토어스텐 프링스가 클린스만을 우습게 여긴 것이다. 그리고 프링스는 크루스 폭행 사태로 인하여 FIFA 징계 위원회에 회부되었는데[41] 이 때문에 4강 이탈리아전을 뛸 수 없게 되었고, 그게 원인이 되어 독일은 이탈리아한테 패해서 통산 4회차 우승, 나아가 통일 이후 최초의 우승을 8년 후로 미뤄야만 했다.
장기 집권한 미국 대표팀의 경우도 사실상 마찬가지인데, 선수들의 가능성을 극대화해서 한때 멕시코와 비등한 수준으로 팀을 재건한 공은 인정받으나, 말기엔 미국의 에이스 랜던 도노반을 끝내 선발에서 외면하는 등 고집도 보이며 부진한 경기력과 성적 부진으로 결국 짤리게 되는 등 마무리가 좋지 않았다.[42][43]
하지만 단순히 전술적인 면이 떨어진다고 무능한 지도자라고 보기는 어려운데, 최강희 감독의 경우에도 매니지먼트 능력 등은 뛰어난 것에 반해 전술적인 부분은 부족해 이흥실 코치에 상당 부분 일임했고, 이흥실은 반대로 전술적인 부분은 뛰어날지언정 선수단 매니지먼트 능력의 부족함을 보이며 둘 다 여러므로 아쉬움을 보였다. 또 맨유의 명장이자 역사로 불리는 알렉스 퍼거슨 또한 여러 부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갖췄지만 아주 위대한 전술가는 아니었고[44] 세부 전술은 코치들에게 위임하는 스타일인 점을 감안한다면 클린스만은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성공 행보를 보았을 때 매니지먼트 및 선수단 장악, 시스템 개혁 등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전술 부분은 코치에게 일임하여 팀을 이끄는 스타일의 지도자로 볼 수 있다.[45]
즉, 해당 부분은 전술에 능한 코치로 충분히 커버칠 수 있는 부분이고 유능한 코치진과 좋은 시너지를 발휘한다면 좋은 성과를 낼 가능성 또한 높은 지도자이다. 또한 독일-미국 두 나라의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서 각각 월드컵 3위(독일), 골드컵 우승 - 월드컵 16강[46](미국)의 커리어를 가지고 있다는 거에서부터 감독으로서도 충분한 능력은 검증되었다고 볼 수 있다.
클린스만 재임 시절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독일 리그에서 활약하는 독일 - 미국 이중국적자 선수들이 대거 발탁되기도 했다. 독일계 미국인의 미국 국가대표팀 입성은 클린스만 부임 이전인 2009년에 저메인 존스가 독일에서 미국 대표팀으로 변경한 사례가 있었지만, 클린스만이 부임한 2011년부터 본격적으로 독일계 선수들의 미국 대표팀으로 이동이 본격화되었다. 대표적으로 파비안 존슨, 대니 윌리엄스, 줄리언 그린 등이 이 시기에 미국 대표팀에 승선한 독일 이중국적자 선수들이다. 공교롭게도 미국 이중국적자였던 클린스만의 아들 조너선도 후에 미국 대표팀을 선택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러한 부정적인 점들 때문에 많은 축빠들은 클린스만의 한국 대표팀 감독 선임 당시 대체적으로 부정적 의사들을 표하였으며, 심지어 클린스만의 조국 독일 언론조차 클린스만 선임 시도를 어리둥절해하였다.[47] 수석코치에게 전술의 모든 걸 위임한다는 점[48], 독일인이라는 점 때문에 울리 슈틸리케를 떠올리는 축구팬들도 꽤 있었다. 그나마 슈틸리케 감독의 경우에는 처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맡았을 당시에 전술적인 역량이 좋은 신태용이 수석코치로 있었고 그의 서포트를 활용해서 이후 2015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냈지만[49], 클린스만이 국가대표 감독에 부임할 경우 과연 전술적 역량을 보완해줄 사람이 올 수 있을지 의심하는 의견이 많았다. 클린스만은 감독으로서 어느 정도 성과를 냈기에 자신만의 사단이 있다고는 하지만, 헤르타 감독 사임 이후 3년간의 공백기가 있었기에 제대로 사단 소집을 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감독으로서의 가장 비판 받는 점이 실력 외적인 근무 태도인데, 지나치게 재택 근무를 선호하는 것은 물론 거액의 이적료를 지출해 선수를 수급해놓고도 성적이 안 나오니까 고작 76일 만에 감독에서 물러나버리는 무책임한 태도로 거센 비난을 받기도 했다.[50] 대한민국에서도 똑같은 재택근무 방식을 고수해서 근무 태만 논란이 일었고, 아시안컵의 졸전으로 여론이 나빠진 상황에서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듯 여전히 생글생글 웃기나 하며 '다음 대회 잘 대비하겠다'는 식의 무성의한 인터뷰를 하여 평가가 더욱 내려가게 되었다.[51]
한국에서 성공적이었던 파울루 벤투도 부임 전에 커리어가 하향세를 그리던 감독이라 이런저런 말이 많았지만 본인 사단의 자질 문제는 거의 없었으며[52], 중국 진출 전까지는 그럭저럭 괜찮은 성과를 내다가 중국에서 각종 악재와 본인의 의욕 저하가 겹쳐 평판이 떨어진 케이스다. 이후 벤투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며 충칭에서 주는 잔여 연봉을 거절하고 자신이 받던 연봉보다 적은 연봉을 받아가며 파주 NFC와 가까운 경기도 일산에 거처를 마련할 정도로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다. 클린스만이 그간의 의문을 해소하고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벤투 이상의 성과가 필요한데, 부임 전까지는 썩 긍정적이지 못한 분위기가 우세했다.
초반에는 대한민국 상주도 약속하고, 한국 대표팀 부임 후 검증된 인사 위주로 사단을 꾸리고 2023년 3월 평가전에서 공격적인 축구를 선보이며 의구심이 많았던 여론을 어느 정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에는 성공하는 듯 했지만 2023년 6월에 치렀던 두 차례의 A매치에서 1무 1패[53]라는 좋지 못한 결과를 보여주자 점점 여론이 호의적이지 않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평가전의 본래 목적이 여러 선수들을 테스트하고 다양한 전술을 실험하는 것이라고는 하나 결과가 썩 좋지 못했고, 과정에서도 아직 뚜렷한 방향성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 이전까지 거론되던 감독의 기본적인 전술적 역량과 커리어 단절 문제에 대한 지적이 다시 나타났으며, 클린스만 감독이 과거 슈틸리케 감독의 사례를 답습할 가능성이 높다고 걱정하는 기자들도 있었다. 특히 앞서 K리그를 열심히 보러 다닌다는 평가가 무색하게 중원이 없는 4-2-4 포메이션을 가져와 그 포메이션에 선수를 대충 끼워넣는 수준으로 2경기를 치렀고, 공격 축구는 고사하고 선수단 개개인의 대한 이해도조차 제대로 있는 건지 의심스러운 수준의 경기력을 보였다. 물론 전술적인 부분은 대부분 코치인 헤어초크가 담당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헤어초크를 코치로 선임한 것 또한 클린스만 본인이기에 부진한 경기 결과에 대한 책임을 피하기는 힘들다. 클린스만 "90분 뛸 수 있는 FW가 없다", 그럼 90분 뛸 수 있는 FW를 뽑으세요 엘살바도르와의 경기 후 인터뷰에서 "지속적으로 90분을 뛸 수 있는 공격진은 손흥민 뿐"이라며 본인의 문제를 언급하기보다는 오히려 공격수들의 부진을 원인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여주자 과거 슈틸리케 감독의 몰락 시절과 비슷하다는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로 인해 팬들의 불안감만 증폭되는 중이다. 거기다 인종차별을 한 박용우를 감싸며 A매치에 출전시키며 비판받을 거리가 더 늘어났다. #
결국 이례적으로 6월 22일 기자회견을 열어 대표팀에 대한 전체적 평가 및 향후 추구할 방향에 관한 설명, 그 외 각종 질문 등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략, 전술의 방향을 먼저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선수단을 먼저 갖춘 후 그에 맞게 전략을 구성하겠다고 밝혔으며[54][55], 인종차별 발언을 했던 선수들에 대해선 누구나 실수할 수 있으며 도움이 필요하면 감독으로서 나서겠다고 했다.[56]
기자회견 이후 여론이 어느 정도 잠잠해지나 싶었으나, 갈수록 길어지는 외국 체류 기간과 U-23 대표팀과의 선수 차출 문제로 인한 갈등 발생, 전임자 색채 지우기가 의심되는 코치진 개편[57] 등으로 인해 9월 A매치를 맞이하기도 전에 여론이 심각하게 안 좋아지며 헤르타 BSC에서의 악몽이 반복될 조짐이 보이고 있다. 그런데 정작 클린스만은 싹수 있어보이는 어린 선수들을 A대표팀으로 끌어들이며 2026년 월드컵에 어떻게든 나가겠다는 행보를 보이고 있어, 오히려 몇몇 팬들은 ' 차라리 SNS 사임이 더 고맙겠다'는 웃지 못할 의견까지 내비치고 있다.
그나마 몇몇 선수들은 클린스만 감독의 선수 관리 능력에 대해서는 나름 만족하는 듯한 발언을 보이고 있어 적어도 자기 장점이라고 언급되던 선수 관리 능력은 다행히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한국 국가대표라는 위치에 있는 이상 감독에게 대놓고 불만을 표할 수는 없는 것도 있고 관리 능력이 아무리 좋다 한들 전술적 능력이 막장 수준으로 좋지 않기에 딱히 여론은 변하지 않는 편이다.
2024년에 들어서 아시안컵 24강 조별리그에서는 바레인전은 전반전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여주고 후반 초반에 동점골을 허용하며 고전하다가 이강인의 원맨쇼 덕분에 3:1로 승리했고, 요르단전은 사실상 패하는 경기를 간신히 비겼고, 마지막 말레이시아전에서 FIFA 랭킹 130위 말레이시아를 상대로 주축 멤버를 모두 출전시켰으나 동점골을 얻어맞고 3:3 무승부로 승점 1점을 넘기고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있어서 카잔의 기적급의 대참사를 만들어버린 탓에 다시 태업 논란 시기 수준으로 여론이 악화되었다. 무엇보다도 조별리그 세 경기 내내 변하지 않는 라인업에 변하지 않는 전술을 쓰는데 전혀 나아지는게 없고 오히려 더 악화되고 있다. 비록 16강 사우디아라비아전과 8강 호주전에서 이겨서 좀비축구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애초에 좀비축구라는 것 자체가 90분 내내 패하고 있다가 추가시간 골로 동점을 만들고 연장전 혹은 승부차기 끝에 승리를 거두는 상황이었던지라 경기력에 대한 문제는 전혀 해결될 조짐이 안 보였다. 결국 4강전 요르단전에서 유효슈팅 0개를 기록하며 0-2 참패를 당하며, 그 정점을 콕 찍으면서 대표팀은 또다시 아시안컵 우승까지 3년 뒤를 기약해야하는 상황이 되었다. 거기에 대회 종료 직후 선수단 불화설까지 나오며 선수 관리마저도 못하는 무장점 감독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결과적으로 1년도 채 못 채우고 예상대로 경질되며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악의 감독이 되었다.[58]
경질 이후 2023-24 시즌 후반기에 손흥민, 이강인[59], 황희찬[60], 김민재[61] 등 해외파 선수들이 차출 이후에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고, 특히 정신적인 부분과 경기 내외적 잡음, 본인의 책임전가 등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네 선수 모두 부진하고 있는데 큰 지분을 차지한 원인제공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던 감독이다.
4. 기록
4.1. 선수
4.1.1. 득점 기록
4.1.1.1. 클럽
시즌 | 클럽 | 소속리그 | 리그 | FA컵 | 대륙대회 |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1981-82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 2. 분데스리가 | 6 | 1 | 0 | 0 | - | - |
1982-83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 2. 분데스리가 | 20 | 2 | 2 | 1 | - | - |
1983-84 |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 2. 분데스리가 | 35 | 19 | 2 | 2 | - | - |
1984-85 | VfB 슈투트가르트 | 분데스리가 | 32 | 15 | 4 | 2 | 2 | 0 |
1985-86 | VfB 슈투트가르트 | 분데스리가 | 33 | 16 | 6 | 4 | - | - |
1986-87 | VfB 슈투트가르트 | 분데스리가 | 32 | 16 | 1 | 2 | 4 | 1 |
1987-88 | VfB 슈투트가르트 | 분데스리가 | 34 | 19 | 1 | 0 | - | - |
1988-89 | VfB 슈투트가르트 | 분데스리가 | 25 | 13 | 4 | 2 | 8 | 4 |
1989-90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세리에 A | 31 | 13 | 4 | 2 | 2 | 0 |
1990-91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세리에 A | 33 | 14 | 4 | 0 | 12 | 3 |
1991-92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 세리에 A | 31 | 7 | 5 | 1 | 1 | 0 |
1992-93 | AS 모나코 | 디비지옹 1 | 35 | 19 | 0 | 0 | 4 | 0 |
1993-94 | AS 모나코 | 디비지옹 1 | 30 | 10 | 0 | 0 | 10 | 4 |
1994-95 | 토트넘 홋스퍼 | 프리미어리그 | 41 | 21 | 6 | 5 | - | - |
1995-96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32 | 16 | 1 | 0 | 12 | 15 |
1996-97 | FC 바이에른 뮌헨 | 분데스리가 | 33 | 15 | 4 | 2 | 2 | 0 |
1997-98 | 삼프도리아 | 세리에 A | 8 | 2 | 0 | 0 | 1 | 0 |
1997-98 | 토트넘 홋스퍼 | 프리미어리그 | 15 | 9 | 3 | 0 | - | - |
2003 | 오렌지 카운티 블루스타 | USL[62] | 8 | 5 | 0 | 0 | - | - |
4.1.1.2. 국가대표
연도 | 출장 | 골 |
1987 | 2 | 0 |
1988 | 8 | 2 |
1989 | 4 | 1 |
1990 | 15 | 6 |
1991 | 4 | 0 |
1992 | 13 | 2 |
1993 | 10 | 6 |
1994 | 14 | 11 |
1995 | 9 | 6 |
1996 | 14 | 7 |
1997 | 7 | 2 |
1998 | 8 | 4 |
합계 | 108 | 47 |
4.1.2. 대회 기록
- 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 (1989~1992)
- UEFA컵: 1990-91
- FC 바이에른 뮌헨 (1995~1997)
- 분데스리가: 1996-97
- UEFA컵: 1995-96
4.1.3. 개인 수상
- 발롱도르 2위: 1995
- 발롱도르 올스타팀: 1994
- FIFA 올해의 선수 3위: 1995
- UEFA컵 득점왕: 1995-96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88, 1994
- 분데스리가 득점왕: 1987-88
- 키커 올해의 공격수: 1986-87, 1987-88, 1995-96
- 키커 올해의 신인: 1988-89
- 키커 올해의 팀: 1987-88
- FWA 올해의 선수: 1994-95
- PFA 올해의 팀: 1994-95
- 프리미어 리그 이달의 선수: 1994년 8월
- FA컵 득점왕: 1994-95
- US컵 득점왕: 1993
- 독일 올해의 골: 1987
- 독일 이달의 골: 1986년 11월, 1987년 11월, 1991년 2월, 1994년 6월 · 7월, 1996년 3월, 1999년 5월
- IFFHS 세계 최고 득점자: 1995
- FIFA 100: 2004
- FIFA XI: 1996, 1999
- 토트넘 홋스퍼 올해의 선수: 1994
- ESM 올해의 팀: 1994-95
- 독일 축구 명예의 전당: 2019
4.2. 감독
4.2.1. 대회 기록
-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2004~2006)
- FIFA 월드컵 3위: 2006
-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 (2011~2016)
- CONCACAF 골드컵: 2013
4.2.2. 개인 수상
- 독일 올해의 축구 감독: 2006
- CONCACAF 올해의 감독: 2013
5. 논란 및 사건 사고
5.1. 일방적인 헤르타 BSC 감독직 사임 발표
2019-20 시즌 도중 안테 초비치의 후임으로 헤르타 감독직에 부임했는데 2020년 2월 11일 돌연 감독직 사임을 발표하였다. # 문제는 겨울 이적시장에서 80m에 달하는 거액의 이적료를 들여 선수들[64]을 영입해 놓고, 구단 수뇌부에게는 일말의 언질도 없이 개인 페이스북에 일방적으로 사임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거기다 구단과 선수들을 욕하는 내용의 개인 노트까지 추가로 발견되어 클린스만의 독일 내 평가는 바닥까지 추락했다. #이로 인해 클린스만은 유럽 축구계에서 블랙리스트에 올라 3년 동안 지도자 커리어가 단절되었으며, 헤르타 역시 그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2부 리그 강등을 당했다. 그야말로 헤르타 구단 역사상 최악의 감독 중 한 명.
5.2. 근무태만 논란
자세한 내용은 위르겐 클린스만 근무태만 논란 문서 참고하십시오.5.2.1.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 감독 경질 사태
자세한 내용은 클린스만호/감독 경질 사태 문서 참고하십시오.6. 별명
자세한 내용은 위르겐 클린스만/별명 문서 참고하십시오.7. 여담
-
현행
독일어 표기법을 따르면 위르겐 클린스만이라 적는데, 1990년대 현역 선수로 뛸 당시에는 한국에서는 유르겐 클린스만으로 통했다.[65] 그래서 지금도 유르겐 클린스만으로 기억하는 팬이 많다. 실제로 1996년 7월에 국내에 방영된 리복 광고를 보면, 유르겐 클린스만으로 표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광고 영상: 10분 10초부터 당시 리복은 농구에선
샤킬 오닐, 축구에선 클린스만과
바티스투타를 내세워 활발히 마케팅을 했다. 광고 영상에서 확인되듯 바티스투타보단 클린스만이 메인 모델이었다.
- 독일 현지에서의 애칭은 Klinsi(클린시).
- 현역 시절 아름답고 찰랑이는 긴 금발을 휘날리며 잘생긴 외모를 자랑했다. 게르트 뮐러가 소위 독일의 폭격기였기에 자연스럽게 '금발 폭격기'라는 별명으로 독일 최고 스트라이커 자리를 당대에 물려 받았었다. 현재도 비교적 미중년으로 외모가 준수한 편이다. 다만 탈모로 인해 이마가 조금씩 넓어지고 있고 정수리 쪽도 휑해져서, 선수 시절의 멋진 머릿결을 기억하는 팬들은 세월의 흐름을 안타까워하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잘생긴 얼굴에 잘 웃는 해맑은 인상이긴 하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에서는 국가대표팀의 끔찍한 경기력과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비호감으로 낙인 찍혀버렸다. 웃는 얼굴에 침 뱉고 싶다라는 말을 할 정도다.
- 1994 미국 월드컵 24강 조별리그 C조 3차전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 환상적인 터닝 발리 슛을 날려 전국민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장본인이며 그 날 2골을 기록해서 한국에서도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2004년 12월 19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열린 대한민국과 독일의 A매치에서 독일이 대한민국에게 최초로 졌을 때의 감독이 마찬가지로 클린스만이었다. 스코어는 3:1로 대한민국의 완벽했던 승리. 20년 뒤 아시안컵으로 재조명되었다. 대한민국의 득점은 김동진, 이동국, 조재진이 했다. 독일은 전반 24분에 미하엘 발락이 프리킥으로 동점골을 만들었다.
- 같은 시대 독일을 대표하는 또 다른 선수이자, 함께 힘을 합쳐 1990 이탈리아 월드컵 대회 우승을 일궈내고 인테르에서도 같이 한솥밥을 먹은 철인 로타어 마테우스와 심각한 불화로 유명하다. 유로 1996 즈음해서 둘의 불화는 대단히 심각해졌고[66] 결국 마테우스가 대표팀에서 하차, 클린스만은 주장으로 팀을 이끌어 결국 대회에서 우승한다. 이는 당시 스위퍼였던 마테우스의 포지션엔 마티아스 자머라는 당대 최고의 수비수[67]가 버티고 있던데 반해 공격진에는 후보였던 올리버 비어호프는 차치하고 노장 슈테판 쿤츠나 국대 경험이 일천했던 윙어 마르코 보데를 제외하면 공격일선의 선택지가 전무한 상황에 기인한다. 늘 주장이었던 마테우스에게 완장을 물려받은 클린스만은 1998년 월드컵도 주장으로 참가하며 이때 부상으로 잠머가 엔트리 아웃되며 대체 선수로 다름 아닌 마테우스가 들어와 어색한 상황이 연출된다.
- 1994-95 시즌 토트넘에서 활약한 클린스만은 한 시즌 만에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였는데, 이 과정에 대한 일화가 하나 남겨져 있다. 클린스만은 토트넘으로 이적하는 과정에서 한 시즌 만에 다른 팀으로 이적할 수 있는 옵션을 포함하여 계약을 맺었는데, 시즌 내내 훌륭한 활약을 펼치던 클린스만은 시즌 종료 한 달 전에 돌연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는 것을 공식 발표했다. 이로 인해 당시 토트넘 회장이었던 앨런 슈가 회장은 상당히 화가 난 상태였는데, 클린스만은 그런 앨런 슈가 회장과 만나 자신을 토트넘으로 데려와줬던 것에 대해 고맙다며 본인의 싸인이 새겨진 유니폼을 선물로 줬다고 한다. 하지만 앨런 슈가 회장은 이 싸인 유니폼을 들고 공식 인터뷰 자리에 나가서 클린스만이 선물로 준 유니폼은 자신의 차를 세차할 때 쓰기에도 아깝다는 발언을 하며 바닥에 내버렸고, 이로 인해 클린스만도 앨런 슈가에게 화가 나서 독설을 내뱉었다고 한다. 다행히도 이 둘은 나중에 화해하였고, 1997-98 시즌에 토트넘으로 임대 복귀할 수 있었다고 한다.
- 홍명보는 2012 런던 올림픽 동메달 이후 인터뷰에서, 현역에서 상대해 본 공격수 중 가장 어려웠던 선수로 위르겐 클린스만을 꼽았다. 브라질의 호나우두도 잘하긴 했지만, 클린스만만큼은 아니었다고 한다.
- 부친 지크프리트 클린스만(Siegfried Klinnsmann)이 제빵사라서, 지금까지도 언론에서 종종 ' 빵집 아들'로 수식된다. 클린스만의 가족들이 슈투트가르트의 보트낭(botnang)에 빵집을 운영하였으며, 본인도 선수 시절 초창기에 제빵사 자격증을 취득한 상태다. 구글 지도에서도 비교적 좋은 평가를 받았던 가게였지만, 시간이 흘러 현재는 폐업한 상태.
- 국제 경험이 많은 인물답게 여러 언어에 능숙하다. 모국어인 독일어는 물론이고, 영어도 원어민 수준으로 구사할 수 있다.[68] 또한 인테르와 모나코에서의 선수 경력 덕에 이탈리아어와 프랑스어에도 능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 대표팀 부임 이후에는 한국어 공부도 시작했다고 전해졌다. 10월 대표팀 소집때 대한축구협회 직원 말로는 긴급재난문자 내용까지 이해가능하다는 수준.
- 결혼한 시기부터 미국에 정착했고 이후 독일 대표팀 감독을 역임하면서도 미국 거주지를 그대로 유지했는데, 그래서인지 영어를 구사할 때 미국식에 가까운 억양이다. 원래 독일인이 영어를 구사할 때는 독일어 특유의 억양이 섞여서 쉽게 구분이 가능하고 영어권에서는 이를 유머 소재로 쓸 정도지만, 같은 독일 출신인 로타어 마테우스의 영어 인터뷰와 비교해보면 클린스만의 영어 발음은 확연하게 미국식에 가깝다. 다만 2023년 3월 대한민국 축구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한 뒤의 인터뷰를 보면 약간의 독일어 억양이 묻어나오는 중.
- 1990년대부터 미국에 정착했기 때문에 독일 대표팀 감독을 맡을 때도 자기 본위의 사고방식을 가진 클린스만이 미국에서 출퇴근 내지는 원격 재택 근무하는게 아니냐는 우려를 마테우스를 비롯한 일부 언론이 제기했고, 실제로 감독이 되고 났을 때 아주 틀린 예상은 아니게 되었다.
- 아내가 미국인이고, 자녀들 모두 미국 국적을 보유하고 있지만[69] 독일 국적법[70]에 따라 독일 국적까지 가졌을 것으로 보인다. 클린스만은 미국 영주권을 보유하고 있다가 미국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던 시절 미국 국적을 획득하여 현재 독일, 미국 이중국적자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아들 조너선 클린스만이 2017 U-20 월드컵에 미국 대표로 출전했다. 부친은 레전드급 스트라이커였는데, 아들의 포지션은 골키퍼이며, 모처럼 대한민국에 와서 아들의 경기를 보았고, 조너선은 대회 후 헤르타 BSC와 계약했다.
- 2014 브라질 월드컵 때 차범근과 만나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둘은 같은 팀에 있었던 적은 없지만 분데스리가 활동 기간이 겹친다.
-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자국팀이 카잔의 치욕을 당하고 조별리그 꼴찌로 광탈하자 쓴소리를 날렸다. #
- 클린스만은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지낸 외국인 감독들 중에서 적어도 현역 선수 시절 커리어만큼은 가장 좋다는 데에는 이견이 존재하지 않는다. 전임자 파울루 벤투도 포르투갈 1세대 황금세대의 일원으로서 유로 2000과 2002 한일 월드컵에 출전한 경력이 있지만, 월드클래스 수준의 선수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나마 같은 독일 출신 감독으로서 레알 마드리드 CF의 주전 멤버로 7시즌을 활약하며 UEFA 유로파 리그의 전신인 UEFA컵까지 우승해 본 울리 슈틸리케 정도가 클럽 커리어만큼은 그에 견주어 볼 만한데, 그마저도 A매치를 100경기 넘게 출전했고 무엇보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주전 멤버로 월드컵 우승을 견인했으며, FIFA 올해의 선수 3위, 발롱도르 2위까지 찍어본 클린스만에 비하면 아무래도 좀 뒤쳐진다.[71] 아울러 클린스만은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중 유일하게 FIFA 월드컵 트로피를 들어봤으며, 역대 감독들 중 FIFA 월드컵에서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72] 2026 FIFA 월드컵 시점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직을 수행한다면 FIFA 월드컵 트로피가 전 세계 순회를 할 때 안드레아스 쾨프케와 함께 대한민국에서 트로피를 들어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 종교는 불교로 추정된다. 일부 언론에서는 크리스천으로 보도했으나 바이에른 뮌헨 감독 시절에는 훈련장에 불상 10개를 들여놓고 명상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독일 기독교계와 정치권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 #
- 2006년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재임 시절 라커룸 연설 영상이 유튜브에 업로드 되었는데 110만 조회수를 넘기며 큰 인기를 얻었다. 영상에서도 특유의 카리스마와 독기가 보일 정도로 승부욕이 강하고 파이팅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
선수 시절 월드컵과 유로를 모두 제패한 클린스만이지만 특이하게도 월드컵이나 유로 공식 베스트팀에 선정된 적은 없다. 그렇다고 메이저 대회에 활약이 미비했냐라고 하면 절대로 아니다. 상술한 대로 월드컵에선 세 대회에서 11골을 기록하며 역대 순위권인데다 핵심 주전으로 우승을 이끈 1990년 월드컵에선 공식 베스트 11을 뽑지 않던 시절이기 때문에 원천적으로 뽑힐 수조차 없었기 때문. 대신 이 대회에선 사실상의 대회 공식 베스트팀인 미디어 선정 베스트 11에 선정되었다.
출처 1, 출처 2
- 월드컵 대회 공식 베스트 11은 1994년부터 2006년까지 마스터카드 스폰서 네이밍으로 선정했고, 2010년 월드컵부터는 월드컵 스폰서가 마스터카드에서 비자카드로 바뀌면서 "Statistical Team of the Tournament"라는 이름으로 네이밍을 바꾸어 선정했는데, 피파는 이를 비공식적이라 칭하고 있다. 또한 2010년부터 팬들이 뽑은 베스트 11도 선정되었지만, 이 역시도 피파는 공식적이라 인정하지는 않는다고 공언하였다. 즉, 피파에서 공식적으로 선정한 월드컵 베스트 11은 1994~2006년까지의 월드컵이 전부인 셈이다. 해당 문서에서 'All-Star Team' 항목 참고.
참고로 1990년 월드컵엔 골든볼 선정시 최종 6명의 후보를 뽑아 결선투표로 점수를 매겨 선정하였는데, 이때 스킬라치, 마테우스, 마라도나, 로저 밀러, 그리고 로베르토 바조와 함께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바조, 밀러와 함께 한표도 받지 못하고 골든볼 선정은 무산되었고, 골든볼은 1629점의 스킬라치, 실버볼은 1036점의 마테우스, 그리고 브론즈볼은 802점의 디에고 마라도나에게 돌아갔다.
출처 또한 비록 우승은 못하고 8강 탈락했지만 개인 활약은 가장 좋았던 1994년 월드컵에서는 각각 우승과 준우승을 캐리한 호마리우와 바조, 그리고 불가리아 돌풍의 주역이던 스토이치코프에 밀려 베스트 11엔 들지 못했고, 유로 1996 때는 토너먼트의 팀을 18명이나 선정했음에도 역시 뽑히지 못했다. 이는 주장으로 우승을 이끌었음에도 가장 이목이 쏠린 홈팀 잉글랜드와의 준결승 맞대결에 부상으로 결장한데다 5골로 득점왕에 오른 앨런 시어러와 이 경기에서 동점골을 기록하며 대회내내 활약한 슈테판 쿤츠, 그리고 후보로 인생 대회를 펼친 올리버 비어호프 등의 임팩트가 워낙 강렬했기 때문.
- 독일 사회민주당 골수 지지자다. 아이러니한 건 고향 슈투트가르트는 보수당 우세 지역이다.
- 헬리콥터 조종 면허를 보유하고 있다. 한 기사에 따르면, 미국 대표팀 감독 시절 LA에서의 교통 체증을 피하고 출퇴근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헬기 면허를 취득했다고 한다. #
- 클린스만은 18세 시절에, 국방의 의무로 독일군에 입대하여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친 군필자다. 실제로 1980년대의 독일은 동독과 서독으로 분단되어 있었던 시대였고, 징병제를 시행했다. #
- 독일의 레전드 출신이긴 하지만 현재 클린스만의 정체성은 오히려 미국과 더 가까워 보인다. 실제로 클린스만을 포함한 가족들 모두 미국에서 거주 중이고 미국 축구대표팀 감독 시절 미국 국가를 따라 부르기도 했다.
-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 부임 이후 미국으로 잦은 출장과 각종 축구 매체에 인터뷰를 하면서 유럽 리그 분석이나 다른 나라 분석을 계속하면서 현재 대한민국 축구 팬들에게 비판 여론이 커지고 있다.
- 인터넷상에서 여러 감독에게 붙는 감동님이나 아버지 별명이 클린스만에게는 붙지 않는다. 대신 주로 '클형', '스만이형' 등이 많이 퍼졌다. 헤르타에서 도망친 뒤로는 주로 런동님이나 클재앙, 클린승만, BJ 클린스만으로 불리고 있다. 최근에는 아시안컵에서의 졸전이 이어지며 클리토리스만(...)이라는 멸칭도 획득했다.
-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 선임 당시 KFA와의 합의에 따라 연봉이 공개되지 않았으나 이후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약 20억 원에 달하는 연봉을 받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클린스만의 국내 체류일이 183일을 넘기지 못하는 관계로 소득세법상의 '비거주자'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종합소득세를 한국에 납부하지 않는다. #
- 잦은 출국 등 평상시의 근무 태도와는 별개로 A매치 경기에서 반칙 상황, 득점이 터질 때마다 굉장히 열정적인 리액션을 보여준다.
-
멘탈갑이자 철면피로 아무리 언론과 팬들이 비난을 퍼부어도 환하게 웃으면서 자신의 말빨
혹은 뻔뻔함으로상황을 애매모호하게 잘 넘긴다. 그래서인지 인터뷰 실력이 상당히 좋다.
- 스타 출신에 만사가 긍정적인 사람이다 보니 팬 서비스가 대단히 좋은 편이다. 팬들이 싸인이나 기념 사진을 등을 요청하면 장소를 가리지 않고 밝은 표정으로 응해주며 클린스만 감독에게 팬 서비스를 받은 후기를 유튜브나 블로그 등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2023 아시안컵 16강 사우디아라비아전에서 승부차기 끝에 간신히 8강에 진출했는데, 클린스만의 '오늘의 운세'가 상황과 들어맞아 잠깐 이슈가 되었다. # 참고로 운세 풀이에서는 "극적인 반전이 이뤄집니다. 순간적인 변화가 당신을 유리한 위치에 세워줍니다. 아무런 변화 없이 안정감만 추구한다면 이는 곧 발전과 연결될 수 없습니다. 자신감 있게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라고 나왔다. 그러나 4강 요르단전에서 기어코 역대급 대참사를 당하며 그냥 선수빨, 운빨이라는 사실만 명백하게 드러났다. #
- 역대급 황금 세대를 가지고도 표면상 아시안컵 4강이라는 성적을 거두었으며, 조별 예선을 포함한 모든 경기에서 단 한 경기도 전술이라는 것은 없고 보여준 건 시종일관 웃는 모습과 인터뷰 뿐이었다. 결국 2024년 2월 16일 경질당했다.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의 '경질' 통보 직전에 자신의 SNS를 통해 작별 인사를 남겼다. #
- 이렇듯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으로서 무능력하고 위선적인 모습만 보였지만, 손준호의 무사 귀환 소식을 빠르게 SNS로 전하며 환영하며 사람은 착하다는 평을 듣고 있다. 물론 비아냥이 섞인 말이지만 감독 부임 시절 중국에 억류되어있던 손준호를 친선경기 명단에 발탁하며 간접적으로 선수 지지 의사를 보이는 행보를 보였기에, 다 거짓이었어도 손준호를 걱정하는 마음 하나는 진짜였다는 평을 듣고 있다.
- 위르겐 클롭과 이름이 '위르겐' 으로 같고[74], 성씨도 비슷하다. 거기다가 같은 독일 출신인데다가 나이도 클린스만이 64년생, 클롭은 67년생으로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다. 동시기 위르겐 클롭의 리버풀 감독 사임으로 클린스만과 연관되고 있다. 두 사람의 이름은 비슷하지만, 클린스만은 감독일때보다는 선수 시절때 전성기, 클롭은 선수시절일때보다는 감독 시절때 전성기로 감독계와 선수계로써의 위상은 정반대이다.
- 감독으로써 역대급으로 막장 모습만 보여준 덕에 경질 이후 클린스만 이름 네 글자 자체가 무능한 감독의 대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조별리그에서 졸전을 벌인 잉글랜드의 사우스게이트나 한 술 더 떠서 16강에서 스위스에게 0:2로 참패한 이탈리아의 스팔레티가 각각 잉글랜드의 클린스만과 이탈리아의 클린스만으로 불리는 것이 대표적. 아예 타 종목에서도 X린스만이라는 이름으로 '감독으로서의 소임을 저버리고는 태업을 일삼는 무능한 감독'을 뜻하는 식으로 따와서 쓰기도 한다.(예: 댄린스만, 목린스만 등)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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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빵사 부모의 자녀로 태어났고 때문에 제빵사 자격증을 보유하고 있으며 젊은 시절에 축구 외의 시간에는 가족의 빵집 일을 자주 도왔다. 그러나 현재는 2020년 어머니의 은퇴로 인해 폐업한 상태이다.
[2]
#
[3]
독일 대표팀 역대 출장 6위, 역대 득점 4위.
[4]
1985-86 시즌, 1986-87 시즌, 1988-89 시즌
[5]
1987-88 시즌
[6]
1989-90 시즌, 1990-91 시즌
[7]
1993-94 시즌
[8]
1994-95 시즌
[9]
1997-98 시즌(임대)
[10]
1995-96 시즌
[11]
1995-96 시즌
[12]
1996-97 시즌
[13]
1997-98 시즌
[14]
독일어 명칭으로는 'Sportfördergruppe der Bundeswehr.'
독일은 당시
징병제를 택한 국가로
1973년부터는 15개월 동안 복무를 해야 했다.
클린스만의 군 복무 시절 사진
기사(베스트일레븐)
독일어 자료
[15]
2005년 사망
[16]
2021년 사망
[17]
여담 항목 참조.
[18]
클린스만,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
[19]
잔류 여부를 결정짓는 윔블던과의 경기에서 4골 2어시스트로 크게 활약하여 사실상 강등을 홀로 막아세웠다고 해도 무방하다.
[20]
독일 국적으론
미로슬라프 클로제(24경기 16골),
게르트 뮐러(13경기 14골)에 이은 3위. 전체 순위로는
산도르 코츠시스와 같이 공동 8위에 해당.
[21]
당시 수석코치가 후임 독일 감독이 되는
요아힘 뢰프였다.
[22]
다만 미국 대표팀 감독 시절 2014 월드컵 이후로 2015 골드컵 4위, 2018 월드컵 북중미 예선 최하위 추락 등 부진을 면치 못하다가 경질되었고, 미국 역시 끝내 반등하지 못하고 예선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23]
챔스와 포칼은 각각 바르셀로나와 레버쿠젠에 패하며 탈락했고, 리그에서도 4위까지 추락하여 결국 29라운드 종료 후 경질된다. 이후
바이에른 뮌헨은
유프 하인케스를
감독 대행으로 땜빵하여 남은 리그 5경기에서 4승 1무를 거두고 2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시즌이 완전히 종료된 이후에는
루이 판할이 부임했다.
[24]
부임 77일 만에 구단 수뇌부와 상의도 없이 개인 SNS에 일방적으로 사임을 발표하면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게다가 클린스만의 사임이 직접적인 원인 까지는 아니어도, 헤르타가
2.분데스리가로 강등되는데 어느 정도 간접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헤르타 BSC 팬들 사이에서도 좋지 않았던 평가가 점점 더 안좋아지고 있다.
[25]
트랜스퍼마크트 기준 50경기 29골 14도움. 1995년의 클린스만은 무관이었음에도
발롱도르,
FIFA 올해의 선수,
월드 사커 올해의 선수에서 모두 포디움에 들었다.
[26]
1995-96 시즌 클린스만이 UEFA컵에서 기록한 15골은
UEFA 유로파 리그로 개편된 뒤
라다멜 팔카오가 17골로 기록을 깰때까지 UEFA컵 단일 시즌 최다 골 기록이었다.
[27]
독일 통일 직전으로 이때까지는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이었다. 이 대회에서 3골을 기록, 사실상의 대회 공식 베스트팀인 미디어 선정 베스트 11에도 꼽히며 우승에 공헌했다.(공식 베스트 11은 1994년부터 피파가 협력사와 주관해 선정했지만, 1990년엔 미디어가 선정한 베스트 11을 비공식적으로 골든볼 수상자 발표와 함께 밝히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출처 1,
출처 2.
전체 명단 및 설명 참고. 1938년 첫 월드컵 이후 공식 베스트 11 선정이 1994년에서야 이루어진 이유는 끊임없이 소요되어 온 형평성 및 정당성 논란 때문이라고 알려져 있다.)
[28]
국대 경력 첫 주장으로 참가해 3골을 넣으며 우승에 기여했다. 이전 부동의 국대 주장이던
로타어 마테우스와 큰 불화를 겪던 시기였는데 당시 포크츠 감독이 클린스만만 승선시키며 주장직까지 넘겨주었다.
[29]
특히 1994 미국 월드컵에서는 5골을 기록하며 브라질의
호마리우, 이탈리아의
로베르토 바조, 스웨덴의
케네트 안데르손과 함께 득점 공동 3위에 올랐다.
[30]
이 중 3골을 8강 잠비아전에서 해트트릭으로 득점했다.
[31]
최고 등급인 WK를 받은 횟수는
파울 브라이트너,
호어스트 시마니악과 함께 역대 공동 12위에 해당한다.
[32]
유명 축구 시뮬레이션 게임인 풋볼 매니저에서는 토트넘 구단 정보에 'Favoured Personal'로 등재되어있고 토트넘 구단에서도 공식적으로 아이콘으로 대우해주고 있다. 토트넘에서 풀타임으로 뛴 것은 1994-95 단 한 시즌이며, 이외엔 1997-98 시즌 도중 임대이적하여 반 시즌만 더 뛴게 토트넘 커리어의 전부인 것을 감안해 본다면 그 임팩트를 간접적으로나마 짐작해 볼 수 있다.
[33]
이렇게 클린스만이 훌륭한 실력에도 불구하고 저니맨이 된 까닭은 기본적으로 극단적으로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책임감이 떨어지는 성격 때문이라는 분석이 대부분이다. 즉 여러 곳에서 도전하고 얽매여있기 싫어하는 성격으로 보이는데, 이것이 감독 시절에도 부정적으로 작용하며 헤르타 시절에는 감독 자리에서 튀어버리고 한국 국대 시절에는 부업을 맡으며 본업을 태업하는 등 안 좋은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
[34]
2017년 부트발 인터내셔널 및 2017년, 2023년
포포투가 선정한 올타임 TOP 100, 2018년
골닷컴이 선정한 시대별(10년) 포지션 TOP 5, 2020년 프랑스 풋볼이 주관한
발롱도르 드림팀의 후보군, 2021년 90min이 선정한 올타임 스트라이커 TOP 30에서 모두 제외되었다.
[35]
이는 자국 국대 동료라서 띄워준 것이 없잖아 있겠지만 정작 마테우스와 클린스만은 철천지 원수 사이이다.
[36]
어쩌면 이렇게 역마살이 끼어 본인 내키는 대로 유유자적 흘러다니며 업적에 그다지 연연해하지 않는 모습을 보면, 그가 팀에 정착해 붙박이로 일해야 하는 감독으로 성공하기 어려우리란 사실은 예견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37]
비슷한 시기
토마스 투헬이 뮌헨에 등장하였을 때 여러 언론에서 '투헬스만'이라고 부를 정도로 클린스만은 뮌헨 내에서는 이미 졸장의 대명사가 되었다. 더불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입장에서는 단순히 국대 역사상 최악의 감독일 뿐만 아니라,
롯데 시절 백인천에 비견되는 한국 프로스포츠 사상 최악의 감독 중 하나로 여겨지는 경우도 잦다.
[38]
이것도 사실 후술 하겠지만,
요하임 뢰프의 지분이 매우 컸다는 것이 밝혀졌다.
[39]
공교롭게도 이 당시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이 바로
파울루 벤투로, 클린스만 본인 입장에서는 한국 대표팀의 전임자이다.
[40]
이 때문에 "현지에서는 클린스만은 하는 것 없이 요아힘 뢰프가 모든 걸 다 한다"라는 루머가 국내에서 나돌기도 했으나, 독일 생활을 한 적이 있는 차상엽 해설위원이 이 이야기를 언론에서 들어본 적이 없으며 사실무근이라고 말했다.
[41]
이로 인해
토어스텐 프링스는 2007년 1월 1일까지 모든 종류의 축구활동 금지 처분을 받았다.
2014 브라질 월드컵 당시의
루이스 수아레스의 이빨 사건과는 결이 다른 게 그는 너무 이기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조르조 키엘리니를 물어뜯은 것이지만,
토르스텐 프링스는 경기가 다 끝나고 아르헨티나 국대가 귀국하려고 짐을 챙기고 있는데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다. 때문에
루이스 수아레스는
마이크 타이슨까지 나서서 옹호해준 반면
토어스텐 프링스는 그 누구도 옹호해주지 않으며 독일 축구 역사상 가장 비참하게 은퇴했다.
[42]
이는 클린스만의 평소 해외파 선호 성향이 매우 강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였다. 현역 해외파 혹은 해외리그에서 뛰다 온 선수들을 폼에 상관없이 우선적으로 기용하고, 이후에 공백은 국내 리그에서 찾아 채우는 방식이였다. 대한민국 국가대표팀 기준으로는 현재
황의조,
황희찬,
손흥민,
황인범,
홍현석,
이강인,
이재성,
정우영,
김민재,
박지수,
김진수,
홍정호 정도가 국가대표급 기량을 가지면서 해외파거나 해외리그에서 뛰다 온 경력이 있는 케이스들이다.
[43]
다만 미국 국가대표 선수들 혹은 유스들이 해외로 나가는 다리 역할도 충실히 잘 했다. 이와 같은 정책으로 미국에서
분데스리가로 간 케이스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지오반니 레이나,
첼시 FC의
크리스천 풀리식,
리즈 유나이티드의
웨스턴 맥케니,
타일러 아담스가 있다. 전부 미국에서 독일 분데스리가로 가 프로 데뷔를 하면서 유럽에 정착한 케이스다.
NASL나 대학리그 소속 선수까지 선발하며 대놓고 MLS와 대립각을 세운 장본인이 클린스만이지만, 유럽파를 고집한 것 자체는 어느 정도 옳았다는 의견도 존재했다.
[44]
'위대한 전술가'라는 단어로 인해 퍼거슨의 전술가로서의 역량을 함부로 폄하해서는 안 된다. 전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냐는 점에서 퍼거슨이 위대한 전술가는 아니겠지만 상황에 따른 융통성 발휘로 트로피를 들어올렸느냐는 점에서 퍼거슨은 축구사에 남을 위대한 전술가가 맞다. 실제로 2010년 이후 은퇴까지 퍼거슨의 맨유 스쿼드를 보면 주전들의 줄부상으로 인한 스쿼드 공백을 남은 선수들의 멀티성을 극대화 시켜 라이벌들을 제압하고 끝내 리그 우승을 차지한 역사를 써내려갔다. 도대체 그 선수단으로 어떻게 스쿼드를 짜서 경기를 3:0, 4:0으로 이길 수 있는지 미스테리한 수준.
[45]
어떻게 보면 미국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전술적인 부분도 향상되었다는 말도 나오는 이유가
요아힘 뢰프가 없었음에도 2013 골드컵 우승,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 가나, 포르투갈과 죽음의 조에 편성되었음에도 조 2위로 16강 진출에 성공한 만큼 독일 감독 시절 성과에 비해 존재했던 저평가를 많이 해소시킨 부분도 분명한 사실이다.
[46]
15위
[47]
종합해보면 한국 대표팀 부임 당시 독일에서도 클린스만의 지도자로서의
평판은 안 좋았다는 걸 알 수가 있다. 특히 제대로 데인 경험이 있는
헤르타 팬들은 클린스만을 마치 원수 보듯 하였다. 당장
이런 디스 기사도 독일 매체에서 나온 기사를 번역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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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독일 국대 감독 당시 수석코치였던 요아힘 뢰프에게 전술을 모두 위임했다는 소문이 있으나 독일에서 기자생활을 한 차상엽 해설위원은 사실무근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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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 아시안컵 이후 27년 만에 아시안컵 결승에 진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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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일 만에 성적 부진으로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경우는 실제로 심심치 않게 있고 더 짧은 기간에 경질되거나 사임한 경우도 여기저기저 찾아보면 있긴 하나, 타 감독들보다 더욱 거센 비판을 받았던 것은 공식적인 기자회견이나 보드진과의 협의 없이 SNS로 갑작스레 사임을 선언하곤 그대로 출근을 하지 않아서이다. 이 사례로 인해서 클린스만은 독일 축구계에 블랙리스트로 등재되었으며, 독일인들 사이에선 조롱거리가 됐고, 감독으로선 발을 붙일 수 없는 주된 원인이 되어 커리어 단절의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이 세간의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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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욕을 먹지 않기 위해 대부분 유임을 생각하고 있더라도 말을 아끼거나 죄송하다는 발언을 하는 것이 정상이나, 클린스만은 독특하게도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기자의 질문에 따른 답변이나 축구 팬덤의 요청을 적극 반영하는 식의 운영 등을 보면 대한민국의 여론을 철저히 분석하는 것으로 보이기에 본인이 비판받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확실히 인지하고는 있으나 여전히 이런 태도인 것을 보면 한때 월드클래스 스트라이커였던 인물답게
멘탈만큼은 축구 감독들 중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대단히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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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으로
벤투 사단의 수석코치
세르지우 코스타는
벤투에게 대략적인 지시만 받고 대한민국 대표팀을 이끌어 포르투갈 대표팀을 이긴 인물이다. 그 외 벤투 사단의 다른 코치들에 대해서도 체계적인 역할 분담과 팀 관리 능력으로 선수단의 호평이 많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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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6월 16일 A매치 대한민국 0:1 페루, 2023년 6월 20일 A매치 대한민국 1:1 엘살바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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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호 때는 팀의 방향 설정을 우선시했기에 선수들을 전술에 끼워맞춘다거나 전술에 안 맞는 선수들은 쳐다보지도 않는다며 불평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클린스만은 이와는 반대로 선수 구성부터 신경쓰겠다는 이야기인데, 이번에는
팀에 방향성이 없다거나 선수들에게 휘둘리고 있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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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선수단 구성에 따라 팀의 전술적 방향성을 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며 그러한 융통성과 임기응변을 발휘하는 것도 명장의 조건이다. 다만 그러한 것들도 결국 임기응변이며 그나마도 국가대표팀보단 클럽팀에서나 하기 용이하며, 클럽팀이든 국가대표팀이든 결국엔 초기의 임기응변을 넘어서서 명확한 전술철학을 선수단에게 이식시켜야 한다. 선수들 역시도 감독들의 전술 철학에 따라 성장을 이루어낸다. 지도자가 된 선수들의 회고 인터뷰를 보라. 자신들이 감명받은 지도자의 전술철학에 대한 존경심을 담은 언급이 차고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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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선수도 사람이기 때문에 실수를 할 수 있으며, 그런 사람에게 다시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선수들의 잘못에 대한 지적은 따로 하지 않았기에, 최소한 선수단에 대한 교육 및 재발 방지 약속 정도는 했어야 했다며 아쉬워하는 의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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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투호와 동행했던
마이클 김이 2023년 8월 31일 물러나고,
차두리가 그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정작 차두리도 FC 서울 유스 디렉터를 맡던 상황이라 차두리 본인의 의사와는 별개로 인선이 집행된 듯한 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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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리 슈틸리케 경질 이후 6년 8개월 만의 감독 경질이며, 둘다 독일 감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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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출 이후 선발보다 교체로 출전하는 경기가 많았으며 아예 결장하는 경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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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햄스트링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활약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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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기에서는 나쁘지 않았지만 아시안컵 차출 이후에는 폼이 엄청나게 무너졌다. 대표적으로 28라운드 하이덴하임전과 챔피언스 리그 4강 1차전인 레알 마드리드와의 뮌헨 홈 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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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메이저리그 사커의 하위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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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매치로 인정된 마지막
올림픽 축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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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시슈토프 피옹테크,
뤼카 투자르,
마테우스 쿠냐,
산티아고 아스카시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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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ü'\[jʏ\]가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이기 때문이다. 발음법은 'ㅣ'와 단모음 'ㅟ'를 동시에 발음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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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난무하나 가장 유명한 것은 클린스만의 득점 여부를 놓고 마테우스가 베팅까지 하며 조롱했다는 걸 클린스만이 뒤늦게 알아차렸다는 이야기이다.
클린스만 본인이 확인했다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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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1996 당시 엄청난 활약을 펼치며 결국 베켄바워에 이어 두 번째로 수비수로서 발롱도르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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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독일인 대부분은 영어 구사능력이 매우 뛰어난 편에 속하며, 클린스만이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발탁된 것에는 그의 뛰어난 영어 실력도 한 몫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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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인 조나선은 독일에서 출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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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부모가 독일 국적을 가지고 있으면 자녀에게도 독일 국적이 주어지도록 되어 있는 독일 국적법은 주로 독일이 1,2차 세계대전으로 상실한 영토에 계속 거주하던 독일인들의 자녀들 문제 때문에 생긴 법이다. 그래서 옛 독일 영토에 계속살던 독일인들의 자녀였던
미로슬라프 클로제나
루카스 포돌스키도 태어나면서 자동으로 독일 국적과 폴란드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현행 국적법 기준으로 한국도 이런 방식을 택하고 있으며 결코 특이한 케이스는 아니다.
복수 국적을 기본적으로는 허용하고 있지 않다는 점도 한국과 동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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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UEFA 유러피언 챔피언십은 두 사람 모두 우승해 본 바 있다. 슈틸리케는
유로 1980에서, 클린스만은
UEFA 유로 1996에서 각각 우승했다. 또한 두 사람 모두
UEFA컵에서도 각기 다른 팀 소속으로 우승해 본 바 있다. 슈틸리케는 1975년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1985년
레알 마드리드에서, 클린스만은 1991년
인테르와 1996년
바이에른에서 각각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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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독일 월드컵,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3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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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상대로는
1998 프랑스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상대로는
1994 미국 월드컵에서 득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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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르겐은
게르만어권에서
영미권의
조지 급으로 흔히 쓰이는 이름이다. 실제로 유래도
게오르기우스로 같다. 다만 조지는 현재 청년층 이하에선 거의 쓰이지 않는 촌스러운 이름이지만 위르겐은 나이를 불문하지 않고 많으며, 클린스만과 클롭을 포함한 많은 축구인들이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