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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7:02:33

알렉스 퍼거슨

알렉스 퍼거슨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파일: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로고.svg

14대
클럽
파일:East_Stirlingshire_Logo.png
이스트 스털링셔

5대
파일:세인트 미렌 FC 로고.svg
세인트 미렌

19대
파일:애버딘 FC 로고.svg
애버딘

10대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21대
}}} ||
알렉스 퍼거슨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파일:World Soccer.png
1993 · 1999 · 2007 · 2008
파일:프리미어 리그 심볼.svg
1993-94 · 1995-96 · 1996-97 · 1998-99 · 1999-00 · 2002-03 · 2006-07 · 2007-08 · 2008-09 · 2010-11 · 2012-13
베스트팀
파일:유럽 축구 연맹 로고.svg
2007 · 2008

2011 FIFA 올해의 감독
수상
펩 과르디올라
2위
알렉스 퍼거슨
3위
주제 무리뉴
2013 FIFA 올해의 감독
수상
유프 하인케스
2위
위르겐 클롭
3위
알렉스 퍼거슨
}}} ||
알렉스 퍼거슨의 기타 정보
[ 펼치기 · 접기 ]
영국 기사 서임자 (남성)
British Knights
{{{#!wiki style="margin:0 -10px -5px"
{{{#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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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기사 서임자 (여성)
GBE 파일: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_.jpg
찰스
스콧 셰링턴

(1922)
에드워드
빅터 애플턴

(1946)
KBE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7b160a24b08857219efc111189b9773d.jpg
프레더릭 벤팅
(1934)
에드먼드 힐러리
(1953)
게오르그 솔티
(1971)
시드니 푸아티에이
(1974)
찰리 채플린
(1975)
앨프리드 히치콕
(1980)
밥 호프
(1998)
앤드루 와일스
(2000)
로저 무어
(2003)
팀 버너스리
(2004)
조너선 아이브
(2012)
Knight Bachelor 파일:knightbachelor.jpg
아이작 뉴턴
(1705)
찰스 라이엘
(1848)
찰스 휘트스톤
(1868)
조지프 리스터
(1883)
아서 코난 도일
(1902)
W. S. 길버트
(1907)
프랜시스 골턴
(1909)
프레더릭
G. 홉킨스

(1925)
무하마드
자파룰라 칸

(1935)
오언 리처드슨
(1939)
알렉산더 플레밍
(1944)
랠프 리처드슨
(1947)
로런스 올리비에
(1947)
존 길구드
(1953)
칼 포퍼
(1965)
알프 램지
(1967)
쉬리다스 람팔
(1970)
제임스 블랙
(1981)
마이클 아티야
(1983)
클라이브
싱클레어

(1983)
렉스 해리슨
(1989)
V. S. 나이폴
(1990)
더크 보가드
(1992)
로저 펜로즈
(1994)
팀 라이스
(1994)
캐머런 매킨토시
(1996)
폴 너스
(1999)
리처드 브랜슨
(2000)
숀 코너리
(2000)
톰 커트니
(2001)
믹 재거
(2002)
벤 킹슬리
(2002)
리들리 스콧
(2003)
조너선 색스
(2005)
케네스 브래너
(2012)
안드레 가임
(2012)
다니엘
데이 루이스

(2014)
패트릭 헤드
(2015)
마크 라일랜스
(2017)
제임스
래트클리프

(2018)
톰 무어
(2020)
마이클 호턴
(2021)
마틴 에이미스
(2023)
CBE + Knight Bachelor 파일:knightbachelor.jpg
데이비드 린
(1953)
마이클
레드그레이브

(1959)
알렉 기네스
(1959)
스탠리 매튜스
(1965)
맷 버스비
(1968)
알렉 이시고니스
(1969)
에른스트
곰브리치

(1972)
리처드 애튼버러
(1976)
존 밀스
(1976)
월터 윈터보텀
(1978)
데이비드
애튼버러

(1985)
윌리엄 골딩
(1988)
피터 유스티노프
(1990)
이안 맥켈런
(1991)
안소니 홉킨스
(1993)
데릭 제이코비
(1994)
바비 찰튼
(1994)
사이먼 래틀
(1994)
조지 마틴
(1996)
마이클 갬본
(1998)
아서 C. 클라크
(1998)
엘튼 존
(1998)
이안 홈
(1998)
존 엘리엇
가디너

(1998)
톰 피니
(1998)
나이젤 호손
(1999)
알렉스 퍼거슨
(1999)
프랭크 윌리엄스
(1999)
마이클 케인
(2000)
폴 스미스
(2000)
바비 롭슨
(2002)
앨런 파커
(2002)
앨런 베이츠
(2003)
그레고리 윈터
(2004)
트레버 브루킹
(2004)
제임스 다이슨
(2007)
크리스토퍼 리
(2009)
브래들리 위긴스
(2013)
존 허트
(2015)
칼 젠킨스
(2015)
로드 스튜어트
(2016)
레이 데이비스
(2017)
빌리 코놀리
(2017)
배리 깁
(2018)
마이클 페일린
(2019)
데이비드 수셰이
(2020)
샘 멘데스
(2020)
스티브 맥퀸
(2020)
로저 디킨스
(2021)
조너선 프라이스
(2021)
존 부어만
(2022)
브라이언 메이
(2023)
OBE + Knight Bachelor 파일:knightbachelor.jpg
어니스트 섀클턴
(1909)
윌리엄 브래그
(1941)
리처드 돌
(1971)
잭 브라밤
(1978)
지미 새빌
(1990)
클리프 리처드
(1995)
트레버 맥도날드
(1999)
스털링 모스
(2000)
재키 스튜어트
(2001)
톰 존스
(2006)
테리 프래쳇
(2009)
패트릭 스튜어트
(2010)
밴 모리슨
(2015)
앤디 머리
(2017)
가즈오 이시구로
(2018)
마이클 모퍼고
(2018)
MBE + Knight Bachelor 파일:knightbachelor.jpg
폴 매카트니
(1997)
제프 허스트
(1998)
니콜라스 윈턴
(2003)
닉 팔도
(2009)
링고 스타
(2018)
케니 달글리시
(2018)
루이스 해밀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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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언
클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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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크루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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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테
델보스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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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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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레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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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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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a08d6f> 순서 연도 이름 포지션 구단 비고
<colbgcolor=#fff,#191919> 1 <colbgcolor=#fff,#191919> 2021 <colbgcolor=#fff,#191919> 앨런 시어러
(Alan Shearer)
<colbgcolor=#fff,#191919> 공격수 <colbgcolor=#fff,#191919> 블랙번 로버스
뉴캐슬 유나이티드
<colbgcolor=#fff,#191919> PL 통산 최다 득점(260골)
2 티에리 앙리
(Thierry Henry)
공격수 아스날 PL 역대 최다 득점왕(4회)
3 에릭 칸토나
(Eric Cantona)
공격수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4 로이 킨
(Roy Keane)
미드필더 노팅엄 포레스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 프랭크 램파드
(Frank Lampard)
미드필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첼시
맨체스터 시티
PL 미드필더 통산 최다 득점(177골)
6 데니스 베르캄프
(Dennis Bergkamp)
공격수 아스날
7 스티븐 제라드
(Steven Gerrard)
미드필더 리버풀 PL 역대 최다 PFA 올해의 팀 선정(8회)
8 데이비드 베컴
(David Beckham)
미드필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9 2022 웨인 루니
(Wayne Rooney)
공격수 에버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0 파트리크 비에라
(Patrick Vieira)
미드필더 아스날
맨체스터 시티
11 세르히오 아구에로
(Sergio Agüero)
공격수 맨체스터 시티 PL 외국인 통산 최다 득점(183골), PL 통산 최다 해트트릭(12회), PL 이달의 선수 역대 최다 수상(7회)
12 디디에 드록바
(Didier Drogba)
공격수 첼시
13 뱅상 콩파니
(Vincent Kompany)
수비수 맨체스터 시티 수비수 최초 헌액
14 페테르 슈마이켈
(Peter Schmeichel)
골키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톤 빌라
맨체스터 시티
골키퍼 최초 헌액
15 폴 스콜스
(Paul Scholes)
미드필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6 이안 라이트
(Ian Wright)
공격수 아스날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17 2023 알렉스 퍼거슨
(Alex Ferguson)
감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최초 헌액
18 아르센 벵거
(Arsene Wenger)
감독 아스날
19 리오 퍼디난드
(Rio Ferdinand)
수비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퀸즈 파크 레인저스
20 페트르 체흐
(Petr Čech)
골키퍼 첼시
아스날
PL 통산 최다 클린시트(202경기)
21 토니 아담스
(Tony Adams)
수비수 아스날
22 2024 애슐리 콜
(Ashley Cole)
수비수 아스날
첼시
23 존 테리
(John Terry)
수비수 첼시
23 앤디 콜
(Andy Cole)
공격수 아스날
뉴캐슬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풀럼
맨체스터 시티
노팅엄 포레스트
}}}}}}}}}}}}}}} ||
<nopad>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스태프 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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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진
<rowcolor=#d00027>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비고
구단주 파일:미국 국기.svg & 파일:영국 국기.svg 글레이저 가문 & 이네오스[1] Glazer Family & INEOS
회장 파일:미국 국기.svg &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조엘 글레이저 & 에이브럼 글레이저[2] & 제임스 래트클리프 Joel & Avram Glazer & Jim Ratcliffe
명예 회장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틴 에드워즈 Martin Edwards
CEO 파일:프랑스 국기.svg 오마르 베라다 Omar Berrada
CFO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클리프 바티 Cliff Baty
COO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콜레트 로체 Collette Roche
이사 파일:프랑스 국기.svg 장클로드 블랑 Jean-Claude Blanc
이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데이브 브레일스포드 Sir Dave Brailsford
이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리스 John Reece
이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롭 네빈 Rob Nevin
이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데이비드 길 David Gill
이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이클 에델슨 Michael Edelson
이사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알렉스 퍼거슨 Sir Alex Ferguson
사외이사 파일:미국 국기.svg 브라이언 글레이저 Bryan Glazer
사외이사 파일:미국 국기.svg 케빈 글레이저 Kevin Glazer
사외이사 파일:미국 국기.svg 에드워드 글레이저 Edward Glazer
사외이사 파일:미국 국기.svg 다시 글레이저 Darcie Glazer
사외이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로버트 레이탕 Robert Leitão
사외이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훅스 John Hooks
사외이사 파일:인도 국기.svg 마누 사누이 Manu Sawhney
실무진
<rowcolor=#d00027>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비고
풋볼 디렉터 - - - -
부 풋볼 디렉터 파일:북아일랜드 국기.svg 앤디 오보일 Andy O’Boyle
테크니컬 디렉터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제이슨 윌콕스 Jason Wilcox
미정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대런 플레처 Darren Fletcher
아카데미 디렉터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닉 콕스 Nick Cox
축구 운영 책임자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데이비드 해리슨 David Harrison
협상 책임자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맷 하그리브스 Matt Hargreaves
코칭 스태프
<rowcolor=#d00027>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비고
감독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에릭 텐하흐 Erik ten Hag
수석 코치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미첼 판데르하흐 Mitchell van der Gaag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스티브 맥클라렌 Steve McClaren
1군 스트라이커 코치 파일:남아프리카 공화국 국기.svg 베니 매카시 Benni Mccarthy
골키퍼 코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리차드 하티스 Richard Harti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크레이그 모슨 Craig Mawson
피트니스 코치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파울로 가우디노 Paulo Gaudino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찰리 오언 Charlie Owen
파워 코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이클 클레그 Michael Clegg
운동 코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리차드 호킨스 Richard Hawkins
U-21 감독 파일:아일랜드 국기.svg 트래비스 비니온 Travis Binnion
U-21 코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톰 허들스톤 Tom Huddlestone [3]
U-21 골키퍼 코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토미 리 Tommy Lee
U-18 감독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아담 로렌스 Adam Lawrence
U-18 골키퍼 코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케빈 울프 Kevin Wolfe
시니어 아카데미 코치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마크 뎀프시 Mark Dempsey
스카우트
<rowcolor=#d00027>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비고
스카우트 운영 책임자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스티브 브라운 Steve Brown
스카우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믹 코트 Mick Court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마르코 데 시스티 Marco De Sisti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더글라스 조지 Douglas Georg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토니 쿨터 Tony Coulter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사이먼 웰스 Simon Wells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존 소번 John Thorburn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마틴 파레데스 Martín Paredes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아르망 베네커 Armand Benneker
파일:독일 국기.svg 토마스 보르만 Thomas Bormann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로이 뷰켄캄프 Roy Beukenkamp
파일:헝가리 국기.svg 피터 쇼케 Péter Szőke
파일:콜롬비아 국기.svg 후안 마우리시오 에체베리아 Juan Mauricio Echeverria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주세페 안토나치오 Giuseppe Antonaccio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파블로 부드나 Pablo Budna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벤 맥팔란 Ben McFarlan
파일:벨기에 국기.svg 롤랜드 얀센 Roland Janssen
파일:일본 국기.svg 케이 타무라 Kei Tamura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호세 마요르가 José Mayorga
파일:브라질 국기.svg 세르지우 데 소우자 Sergio De Souza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램버트 John Lambert
파일:독일 국기.svg 노베르트 뒤웰 Norbert Düwel
파일:폴란드 국기.svg 표트르 사도프스키 Piotr Sadowski
파일:이탈리아 국기.svg 크리스티안 에르콜라니 Cristian Ercolani
파일:미국 국기.svg 스캇 도넬리 Scott Donnelly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스티브 헤드 Steve Head
파일:프랑스 국기.svg 제롬 클라인 Jerome Klein
파일:브라질 국기.svg 가브리엘 코레아 Gabriel Correa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닐 휠턴 Neil Wheelton
파일:미국 국기.svg 아론 루잔 Arron Lujan
파일:아르헨티나 국기.svg 니콜라스 치날리 Nicolás Cinalli
유스 스카우트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데이비드 해리슨 David Harriso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샘 윌리엄스 Sam Williams
파일:스페인 국기.svg 게라도 구즈만 Gerardo Guzmán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레네 무넨 Rene Moone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제임스 하커 James Harker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글린 케니 Glynn Kenny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하비 버셀 Harvey Bussell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벤 클락크 Ben Clarke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핀 오리어리 Finn O’Leary
지원 스태프
<rowcolor=#d00027>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비고
수석 분석관 파일:스코틀랜드 국기.svg 폴 브랜드 Paul Brand
비디오 분석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스튜어트 헵인스톨 Stewart Heppinstall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앤서니 베이츠 Anthony Bate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알렉스 트레플턴 Alex Threapleton
경기 분석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톰 그린 Tom Gree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아담 워버튼 Adam Warburto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루크 라젠비 Luke Lazenby
파일:네덜란드 국기.svg 피터 모렐 Pieter Morel
U-21 퍼포먼스 분석관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커티스 퀸 Curtis Quinn
1군 수석 요리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오마르 메지안 Omar Meziane
의료진
<rowcolor=#d00027> 직책 국적 한글 성명 로마자 성명 비고
팀 닥터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게리 오드리스콜 Gary O’Driscoll
물리치료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존 데이빈 John Davi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게리 아르머 Garry Armer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리치 메론 Richie Merron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데이비드 비닝슬리 David Binningsley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애쉬 플레이시 Ash Pracy
파일:웨일스 국기.svg 앤디 월링 Andy Walling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홀리 핀니스 Holli Finnis
파일:호주 국기.svg 이브라힘 케렘 Ibrahim Kerem
스포츠 과학자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에드 랭 Ed Leng
U-21 물리치료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톰 휴즈 Tom Hughes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러스 헤이즈 Russ Hayes
U-18 물리치료사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닐 허프 Neil Hough
파일:잉글랜드 국기.svg 다니엘 토피 Daniel Torpey
틀 정보
출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공식 홈페이지
마지막 수정 일자: 2024년 4월 20일

[1] 2024년부터 공동 구단주 [2] 2005년부터 공동 회장을 역임 중이다. [3] 플레잉 코치.
}}}}}}}}} ||
Manchester United Football Club
파일:external/static1.businessinsider.com/sir-alex-ferguson-spent-850-million-buying-players-at-manchester-united.jpg
<colbgcolor=#da020e> 이름 <colbgcolor=white,#191919> 알렉스 퍼거슨 경
Sir Alex Ferguson
본명 알렉산더 채프먼 퍼거슨
Alexander Chapman Ferguson CBE[1]
출생 1941년 12월 31일 ([age(1941-12-31)]세)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국적
[[영국|]][[틀:국기|]][[틀:국기|]] (
[[스코틀랜드|]][[틀:국기|]][[틀:국기|]])
신체 180cm / 체중 102kg[2]
직업 축구 선수 ( 공격수[3] / 은퇴)
축구 감독 (은퇴)
소속 <colcolor=#000><colbgcolor=#da020e> 선수 퀸즈 파크 FC (1957~1960)
세인트 존스톤 FC (1960~1964)
던펌린 애슬레틱 FC (1964~1967)
레인저스 FC (1967~1969)
폴커크 FC (1969~1973)
에어 유나이티드 FC (1973~1974)
감독 이스트 스털링셔 FC (1974)
세인트 미렌 FC (1974~1978)
애버딘 FC (1978~1986)
스코틀랜드 대표팀 (1985~1986)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86~2013)
{{{#!wiki style="margin: 0 -10px -5px"
{{{#!folding [ 정보 더 보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a020e><colcolor=#000> 가족 아내 캐시 퍼거슨 (1938~2023 / 사별)[4]
장남 마크 퍼거슨 (1968년생)
차남 대런 퍼거슨 (1972년생)
삼남 제이슨 퍼거슨 (1972년생)
}}}}}}}}}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축구 선수 경력2.2. 감독 경력
3. 감독계에서의 위상4. 어록5. 에피소드
5.1. 올드 트래포드5.2. 장수 감독5.3. 자서전 발간5.4. 감독5.5. 진화하는 감독5.6. 상왕5.7. 퍼기타임5.8. 퍼5.9. 박지성과의 관계
6. 퍼거슨에 대한 언사7. 은퇴 후 행보
7.1. 영향력 행사 관련 비판 및 반론
8. 여담9. 기록
9.1. 선수
9.1.1. 대회 기록9.1.2. 개인 수상9.1.3. 클럽 기록
9.2. 감독
9.2.1. 대회 기록9.2.2. 개인 수상9.2.3. 통산 기록
9.3. 수훈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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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 스코틀랜드) 축구 선수 출신 감독. 1986년부터 2013년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감독을 맡아 침체기던 맨유에 전성기를 되찾아주고, 헤이젤 참사 이후로 하락세를 이어가던 잉글랜드 축구의 부활을 이끄는데 앞장섰던 감독이다. 맨유에서 약 28년간 감독직을 수행하며 얻은 우승컵만 무려 38개이고, 전체 감독 생활까지 따지면 총 49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린,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컵을 들어올린 감독이다.

1999년 트레블을 이룬 업적으로 기사작위(Knight Bachelor)를 받아 알렉스 퍼거슨 경이 되었다.[5][6]

2. 생애

2.1. 어린 시절과 축구 선수 경력

퍼거슨은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의 고반이라는 곳에서 알렉산더 비튼 퍼거슨(Alexander Beaton Ferguson)과 엘리자베스 하디(Elizabeth Hardie)의 아들로 태어났다. 둘은 퍼거슨의 고모, 알렉산더 비튼 퍼거슨의 동생의 소개로 만났다고 하는데 속도위반 결혼을 했기에 어린 퍼거슨에겐 어떻게 결혼하게 된건지 자세한 사정은 말해주지 않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항구 노동자로 집안은 부유하지 못했고 주변 환경이나 치안도 딱히 좋은건 아니었지만, 노동자촌 특유의 끈끈한 의리는 마음껏 만끽하며 지낼 수 있었고 그것이 자기 인생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그는 자서전에서 이야기했다. 실제 4살, 5살 때 사귄 친구들과 노년이 될 때까지도 친하게 지낼 정도로 그때의 인간관계가 그에 미친 영향이 컸으며 고집스런 성격도 그때부터 변함없었다고 한다.

퍼거슨은 그 나이 또래의 아이들이 보통 그러하듯 축구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고 친구들과 함께 유소년 축구 클럽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러 다니곤 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에 진학한 후에는 축구부로 활동했으며 그렇게 축구에 미친 결과 학업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아 교장선생에게 학업보다는 기술을 배우는게 좋겠다는 충고를 받기도 했다.

고교 졸업 후 그는 조선소의 연습공으로 취직했으며 동시에 파트타임으로 당시 유명한 아마추어 클럽이었던 퀸즈 파크, 세인트 존스턴 등에서 활약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그는 평생의 반려이자 세아들의 엄마가 되는 캐시 홀딩을 만나기도 하였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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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과 캐시 홀딩
이후 그는 덤펀린 애슬레틱으로 이적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그곳에서 좋은 성적을 내었다. 비록 감독과 마찰이 있어 컵대회 결승전에 나가지 못하는 등의 일이 있긴 했지만 그는 그때 열심히 뛰었고 1965-66 시즌엔 51경기 출장 45골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남기기도 했으며 스코틀랜드 리그 공동 득점왕도 차지했다. 초특급 선수는 아니었어도 충분히 일급 선수였다.

또한 던펌린에 있었던 1966년 5월 12일 캐시 홀딩(Cathy Holding)과 결혼식을 올렸다.

퍼거슨은 던펌린에서의 활약으로 당시, 그리고 지금도 셀틱과 더불어 스코틀랜드 최고의 클럽인 레인저스로 이적했으나 레인저스에서 그는 의외의 암초를 만나게 되는데 그건 다름아닌 종교 갈등이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가톨릭 개신교 간의 종교 갈등이 매우 극심했고 셀틱은 가톨릭을, 레인저스는 개신교를 대표하는 클럽이었다. 퍼거슨의 경우 본인도, 아버지도, 동생도 모두 개신교도였으나 퍼거슨의 아내인 캐시가 가톨릭교도였고, 레인저스의 몇몇 사람은 그것 때문에 노골적으로 퍼거슨을 적대했다.

1968년 9월 18일 퍼거슨은 첫 아이 마크[8]를 얻었는데 그 일마저 퍼거슨이 자기 아들에게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게 했느니 어쩌니 하는 중상모략의 대상이 되었다고 한다.

그 후 구단 보드진의 어이없는 감독 경질과 그로 인한 마찰 등으로 퍼거슨은 어린 시절 꿈의 클럽이었던 레인저스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폴커크로 떠나게 된다.[9]

폴커크에 머무를 때부터 퍼거슨은 본격적으로 감독에 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코치 자격증을 취득한 후 사실상의 플레잉 코치(선수 겸 코치)로 재직하기 시작했다. 던펌린 시절의 감독을 다시 만난 그는 던펌린에서 뛸 때처럼 서로 존중하고 때로는 싸우고 하면서 첫번째 코치직을 경험했고 이후 에어 유나이티드에서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보낸 후 선수로서 은퇴,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편 감독 일을 하면서 부업으로 술집도 했고 꽤 장사가 잘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술집 손님 등을 대상으로 사채놀이도 했으나 이러한 부업이 시간과 정신력 소모가 크다고 느끼게 되었고 또 술집 장사도 조금씩 기울자 모두 그만두고 감독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2.2. 감독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알렉스 퍼거슨/지도자 경력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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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감독계에서의 위상

퍼거슨은 전 세계 모든 감독들의 보스입니다.
주제 무리뉴,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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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어 리그를 대표하는 감독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으로 꼽힌다. 보통 역대 최고의 축구 감독을 꼽을 때 퍼거슨과 함께 거론되는 펩 과르디올라, 리누스 미헬스[10], 아리고 사키, 요한 크루이프, 엘레니오 에레라 등이 고평가를 받는 주된 이유는 이들이 후대 축구에 끼친 전술사적 영향력이 거대하기 때문이다. 반면 퍼거슨은 전술적 혁명을 일으키지 않고도 역대 감독 평가에서 1위를 두고 다투므로 사실상 축구감독으로서 팀의 성공을 이끄는 능력으로만 따지면 퍼거슨이 역사상 최강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퍼거슨의 감독 커리어에 있어 가장 위대하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경이로운 수준의 롱런을 하는 와중에도 실패가 없다는 점이다. 1974년 스코틀랜드 3부 리그 이스트 스털링셔의 임시 감독으로 감독 생활을 시작하여 2013년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은퇴하기까지, 퍼거슨은 축구계에서 무려 40년간 명장으로 군림했다.[11]

이스트 스털링셔에서는 골키퍼도 없던 팀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세인트 미렌에서는 3부 리그 중위권 내지 하위권을 멤돌던 팀을 고작 3년 만에 1부 리그로 승격시켰다.[12] 애버딘에서는 90년 간 이어지던 셀틱 레인저스라는 소위 올드 펌의 독주를 그들의 10분의 1 예산으로 붕괴시켰고[13], 유럽 클럽 랭킹 106위였던 애버딘이 바이에른 뮌헨 레알 마드리드를 꺾고 UEFA 컵위너스컵 UEFA 슈퍼컵을 우승했다.[14] 맨유에서는 25년 간 리그 우승이 없던 팀이 프리미어 리그 출범 후 20년 간 리그 우승 13회를 비롯해 총 38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도록 이끌었다. 맨유를 잉글랜드를 대표하는 구단이자 세계에서 손꼽히는 명문 축구 클럽 위치에 올려놓은 장본인이며, 헤이젤 참사 이후 추락했던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그를 다시 일으킨 최대 공헌자로 이 공로를 인정받아 기사작위를 수여받았다.

부임했던 클럽마다 모두 여건이 좋지 않거나, 다소 몰락한 팀이었다는 불리함을 지녔음에도[15] 퍼거슨은 40년의 커리어 동안 이를 극복하지 못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축구 감독으로서 전술사에 끼친 영향이 크지 않음에도 역사상 최고로 거론되는 건 이처럼 축구 감독의 존재 이유인 '팀의 성공'이라는 목표를 가장 완벽에 가깝게 이행해냈다고 평가받기 때문이다.[16] 상징성 측면에서도 퍼거슨은 전체 감독 커리어에서 총 49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려 축구 역사상 가장 많은 우승을 기록한 감독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으며, 단순히 맡았던 팀들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리그 지위를 두고 다투는 프리미어 리그를 현재 위치로 올려놓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는 점도 퍼거슨을 평가할 때 항상 언급되는 부분이다.
(2008년경) 잉글랜드 전체 92클럽 중에 12%의 감독 자리를 퍼거슨의 제자들이 지휘했었다.
Premiership: Birmingham - Steve Bruce / Reading - Steve Coppell / Sunderland - Roy Keane / Blackburn Rovers - Paul Ince
League One: Huddersfield Town - Andy Ritchie / Rotherham United - Mark Robins / Sheffield United - Bryan Robson
League Two: Bury - Chris Casper / Morecambe - Sammy McIlroy / Peterborough - Darren Ferguson / Wrexham - Brian Carey
"요즘 나의 예전 선수들은 나에 대항하기 위해(타 클럽 감독을 의미) 단체로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이 클럽에 있었던 것이 그들의 향후 커리어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전염과 같다. 그들은 경기장을 떠나기를 원하지 않을 것. 그들은 앞으로도 어떤 방식으로든 경기를 계속하기를 원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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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이 키운 제자들
(알렉스 퍼거슨 경이 감독이던 시절 함께 했던 맨유의 선수들 중 감독이 된 사람들 명단- 31명)
Viv Anderson, Michael Appleton, Henning Berg, Clayton Blackmore, Laurent Blanc, Steve Bruce, Chris Casper, Peter Davenport, Simon Davies, Darren Ferguson, Ryan Giggs[17], David Healy, Gabriel Heinze, Mark Hughes, Paul Ince, Andrei Kanchelskis, Roy Keane, Henrik Larsson, Pat McGibbon, Gary Neville, Paul Parker, Mike Phelan, Bryan Robson, Mark Robins, Teddy Sheringham, Ole Gunnar Solskjaer[18] , Jaap Stam, Frank Stapleton, Gordon Strachan, Chris Turner, Neil Webb. 본 명단은 퍼스트 팀의 감독들만 포함한 것이며 코치나 부감독은 제외되었다.

1985년, 헤이젤 참사로 UEFA 주관 유럽 대항전 5년 출전 정지 징계를 받은 잉글랜드 프로축구는 참사 이전 1~3위을 유지하던 리그 랭킹이 27위까지 떨어지고 전성기가 지난 선수들이 향하는 리그 취급까지 받았다. 이는 리그가 PL로 재출범한 1990년대에 들어 회복되기 시작했고, 당시 리그를 이끈 건 PL 출범 후 첫 10년 간 리그를 7번 우승한 퍼거슨의 맨유였다.[19] 맨유에게 26년 만에 리그 우승 트로피를 안긴 퍼거슨은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일개 팀이 아니라 리그를 다시 정상에 올려놓겠다."라고 선언했고, 그의 말대로 잉글랜드 프로 축구는 1999년 맨유가 챔피언스 리그 우승 트로피를 가져오면서 마침내 리그 랭킹이 5위권으로 복귀했다.[20] 헤이젤 참사 이후 15년 간의 암흑기 탈출을 주도했고 직접 마침표를 찍었기 때문에 퍼거슨은 영국 왕실로부터 잉글랜드 프로축구의 위상을 되찾은 사람으로 공인되는 기사 작위을 수여받으면서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이후에도 퍼거슨은 15년을 더 맨유 감독으로 있으며 강자의 자리를 지켰고, 프리미어 리그는 세계 최고의 프로 축구 리그를 다투는 위치에 올랐다. 이처럼 감독으로서 굉장한 업적들을 연속해서 이뤄냈으며, 단순히 팀뿐만 아니라 리그를 일으켜 세워 기사 작위까지 수여받았기에 현역 시절 퍼거슨의 축구계 입지는 대단히 컸다.

상대팀 감독들도 퍼거슨이 감독 모임 자리에 가거나, 만찬장에 들어서면 모두가 하던 일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보고 인사한다고 한다. 주제 무리뉴는 전술했듯이 퍼거슨을 존경하며 실제로 자기도 그를 맨유의 구단원들이 하듯이 BOSS라는 표현으로 부른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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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EFA 앰버서더 및 엘리트 감독 포럼 회장을 맡게된 퍼거슨
맨유 감독 은퇴 후, 퍼거슨은 유럽 축구 연맹 엘리트 감독 포럼의 회장을 맡고 있다. UEFA에게 유럽의 각국 축구협회가 감독들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고 요청했기 때문. 매해 9월 개최되는 UEFA 엘리트 감독 포럼은 유럽 구단 감독 중 초청받은 감독들만 참석해 전략을 연구하는 모임이다. 이 포럼에서 퍼거슨은 젊은 감독들에게 노하우를 전수해주고 있으며, 축구 스포츠의 변화를 논하고 있다. 축구 발전에 있어 좋은 여러 아이디어가 감독들로부터 나오고 있다고. 아르센 벵거, 무리뉴, 카를로 안첼로티 등 여러 경험 많은 감독들과 젊은 새로운 감독들로 구성되어 있다. 출처1 출처2 출처3 출처4 출처5

4. 어록

영상
It's about responsibility.
이건 책임에 관한 문제입니다.
I think they(players) are responsible for their actions, responsible for what they said on Twitter.
전 그들(선수들)이 자신들의 행동에 대해, 트위터에 올린 내용에 대해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I don't understand it, to be honest with you. I don't know why anybody can be bothered with that kind of stuff.
솔직히 말해서, 이해가 안 됩니다. 사람들이 굳이 그런 일을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요.
How do you find the time to do that? There are a million things you can do in your life without that.
그런 것을 할 시간을 어떻게 내죠? 인생에서 그것 없이도 할 수 있는 것들이 백만 가지는 되는데요.
Get yourself down to the library and read a book.
차라리 도서관에 가서 책 한 권 읽으세요.
(기자들의 웃음소리)
Seriously. It is a waste of time.
진지하게, 그건 시간 낭비예요.
트위터의 한 유저가 웨인 루니를 자극한 적이 있는데, 이때 루니는 '10초 안에 널 때려 눕혀주마, 이 계집애 같은 놈아. 지킬 수 없는 말은 하는 거 아니다. 기다리고 있겠다.'라는 말을 남기고 FA에게 경고를 받았다. 이에 퍼거슨은 루니에게 트위터를 할 시간에 책을 읽으라고 인생 조언을 남겼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 발언은 그저 평범한 인터뷰에 불과했지만, 이후 SNS에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이들이 계속 나오자 꾸준히 인용되며 영향력을 발휘했다. 자세한 내용은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 문서 참조.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일개 클럽이 아니라 리그를 세계 정상에 다시 올려 놓는 것이다.[21]
1999년 맨유의 트레블은 맨유 우승만이 아니라 잉글랜드 리그를 침몰에서 다시 구해놓은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하다.[22]
나는 항상 클럽과 팬들 사이의 다리가 되려고 노력한다. 나는 팬들이 행복한 원인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즐기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팀보다 큰 선수는 필요가 없다.
상대 진영으로의 침투가 되지 않은 채 점유율만 높은 것은 시간 낭비다.
( 2002년 당시 한국 국대에 대해) 월드컵에서 한국의 경기는 정말 환상적이었습니다.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이 함께 훈련하면서 열정적이고 힘이 넘치는 경기를 펼쳤죠. 그러나 이것이 K리그를 희생하면서 얻은 결과라는 측면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루니에게) 난 감독이고 넌 선수야
2010년에 루니가 나한테 외질 사달라고 했는데 루니한테 '선수의 역할은 경기를 뛰는 것이고 감독의 역할은 적절하게 팀을 짜는 것이다. 넌 니 할일이나 해라'라고 했다. 출처
진정한 챔피언이란 패배했을 때 그 가치가 드러난다. 우리들 또한 그러고 싶다.
나는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났지만, 빈곤했던 것은 아니다. TV나 자동차, 전화는 없었을지 몰라도 나는 모든 것을 갖고 있다 생각했고, 실제로 나에게는 축구가 있었다.
리그 우승 없는 챔피언스리그, 아무런 의미 없다.
전술은 중요한 것이지만 전술이 시합에서 이기는 것은 아니다. 시합에서 이기는 것은 인간이다.
천번, 아니, 백만번을 다시 해보라고 해도 그대로 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나는 아직 현역이다. (걷어찬 운동화가 베컴의 얼굴을 직격한 일이 고의가 아니었음을 언급하며)
우리들은 언제나 이 클럽을 '버스'에 빗댄다. 버스를 놓쳐버린 사람이 나온다해도 '미안!'이라며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타지 못한 사람을 주우러 되돌아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5. 에피소드

5.1. 올드 트래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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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
재임 시절, 2011년 11월 5일, 알렉스 퍼거슨 감독의 맨유 부임 25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북쪽 스탠드의 이름을 올드 트래포드 맨체스터(Old Trafford Manchester)에서 알렉스 퍼거슨 경 스탠드(Sir Alex Ferguson Stand)로 개명했다. 기존의 명칭은 남쪽 스탠드로 옮겨놓았다가 보비 찰튼 경 스탠드로 개명 이후 철거했다.

퍼거슨 경 동상 오픈 행사. 영상

맨유에서의 이룬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올드 트래포드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고, 2012년 11월 23일 공개되었다. 이 행사에 그의 제자들인 에릭 칸토나, 피터 슈마이켈, 에드윈 반 데 사르, 올레 군나르 솔샤르. 뤼트 판니스텔로이, 드와이트 요크, 앤드루 콜, 라이언 긱스, 개리 네빌, 필 네빌이 참석했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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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우 자랑스러운 순간이야.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죽은 후에야 동상이 세워지잖아. 근데 난 살아있네!
● 와이프는 날 컨트롤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약속했어요, 매주 토요일마다 동상에 절을 한다고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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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엔 퍼거슨의 공헌을 기념하여, 그의 이름을 딴 길도 생겼다. 원래 이름은 워터스리치(Waters Reach Road)로 트래포드 자치구에서 의회의 승인을 얻어 길의 이름을 바꿨다. 알렉스 퍼거슨 경 길(Sir Alex Ferguson Way)은 맷 버스비 경 길(Sir Matt Busby Way)과 연결되어 있다. 맨유의 감독, 스탭들, 선수들은 OT에 출근할 때마다 이 두 길을 지나치게 되는 것이다.
1986년에 올드 트래포드에 도착했을 때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여정들을 생각하지 못했다. 트래포드 자치구로부터 영예를 받고 내 이름을 딴 도로가 생긴다고 하니 영광스러울 따름이다. 지난 27년 동안 위대한 클럽에서 역사를 만들었고 믿을 수 없는 시간들이었다.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드린다. 출처

5.2. 장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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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7월 존 홀린스 첼시의 감독으로 부임한 이래, 2013년 라파엘 베니테즈까지 총 18명의 감독이 다녀갔다. 반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알렉스 퍼거슨, 단 한 사람으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EPL에서 축구 감독의 목숨은 파리 목숨보다 짧다는 얘기가 있다. 2006년 영국 워릭 경영대학원(Warwick Business School)에서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1992년부터 2005년까지 잉글랜드 감독들의 평균 재임기간은 약 2년이었다. 허나 퍼거슨 감독(스코틀랜드 출신)은 무려 27년간 재임하고, 성공신화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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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거슨이 재임했던 27년 중 25년만 보더라도 레알 마드리드는 24명, 인테르는 19명, 첼시는 15명, 유벤투스, 바이에른 뮌헨, 맨시티는 14명, AC 밀란은 13명, 바르셀로나는 11명이 감독으로 거쳐갔다.

그리고 은퇴 후, 프론트와 후임 감독들의 삽질로 인해 그 존재감이 끊임없이 재평가되고 있는 명장이다.

5.3. 자서전 발간

에브라가 전화로 알려줬는데, 브라질 월드컵 준비과정의 일환으로, 프랑스 국가대표팀 데샹 감독이 선수단 전원한테 내 자서전을 읽도록 했다고 했다더라. 선수들이 책을 편 지 5분 만에 숙면을 취했다고 숙면에 효과가 좋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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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서전을 인증한 제자 제라르 피케[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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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아버지 따라서 퍼거슨과 사진찍었던 소년은 훗날 장성하여 자서전을 사러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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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자서전의 발간식에서 논란의 월드클래스 발언이 나오는데,
(기자) 질문하겠습니다. 당신이 여태 봐온 최고의 선수들은 누구죠?
(퍼거슨) 펠레, 디 스테파노, 마라도나, 크루이프.
(기자) 순서대로입니까?
(퍼거슨) 예, 그렇게 생각합니다.
요즘 언론을 보면 '월드클래스'라는 수식어가 너무 남발되고 있어. 내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지도 했던 선수들 중 '월드클래스' 선수는 4명 뿐이야. 폴 스콜스, 라이언 긱스, 에릭 칸토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지. 그들은 차이를 만들어 냈고 그것이 그 증거지. 칸토나는 프리미어리그 첫 우승의 기폭제가 되었지. 스콜스와 긱스는 어릴때부터 환상적인 선수였으며, 두 선수 모두 오랫동안 활약했지. 프리미어리그 전체를 통틀어 그들 만큼의 레벨에서 계속 활약한 선수가 있을까? 없다, 절대로 없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완벽한 천재 플레이어지. 가장 재능있었던 제자는 호날두야. 또한 현재 월드클래스라고 칭할 만한 선수는 오직 ' 리오넬 메시'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뿐이야.

이 발언에 대해 베컴"응. 나 월클 아닌거 맞아"라며 쿨하게 반응했지만 퍼디난드는 본인의 페이스북에 "월드클래스의 기준이 무엇인가? 그것은 상당히 애매모호하다. 선수의 평가 기준이 될 수있는 요소는 다양하다. 예를 들어 훌륭한 골잡이, 훌륭한 골키퍼, 훌륭한 태클러, 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정신적 지주 등이 있다. 누가 월드클래스 선수이며 월드클래스란 대체 무엇인가?"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참고로 해당 자서전에서 퍼거슨은 베컴에 대해 '베컴은 훌륭한 축구 선수보다도 패션계의 아이돌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때문에 맨유에서 나간 이후로는 톱 플레이어라 불리울 수 있는 영역에 단 한번도 다다르지 못했다'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정점을 기반으로 꾸준함을 +@로 치는데에 반해, 퍼거슨 같은 경우는 꾸준함을 중점에 두고 선수를 판단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감독 입장에서는 꾸준히 일정 수준을 유지해주는 믿을 수 있는 선수가 더 선호되기 마련이다.

● 은퇴 후에도 영감님의 판독기는 여전히 가동중이다. 프리미어리그는 이달의 감독상, 선수상, 그리고 이달의 골 수상자를 매달 발표하는데, 수상자 선정에 참여하는 전문가 패널 구성단에 알렉스 퍼거슨 경과 퍼디난드가 포함되어 있다. 참고로, 사상 처음으로 16/17 시즌에는 일반 팬들의 투표도 반영되고 있다. 팬 투표는 전체 결과에 10%로 반영. 또한 이달의 선수상에 한해서는 프리미어리그 20개 클럽의 주장들 역시 투표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본 책 이후에 Leading이라는 책을 하나 더 발간했다. 이 두 권의 책은 영국, 유럽 내에서 축구 서적 중 압도적인 인기를 자랑하는 도서이다.

5.4.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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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스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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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말만 몇 년째. 현실은 우승. 그것도 2위와 승점 11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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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는 감독놀음. 감독이 퍼거슨이야.[24]
재정적인 악조건 속에서도 감독빨로 팀을 우승시킨 퍼거슨 덕분에 맨유는 PIK 부채를 모두 정리할 수 있었다. 물론 퍼거슨이 마냥 망한 팀에서 오로지 감독빨로만 우승했냐 하면 그건 아니고 위상 대비 상대적 지원 측면에서 그렇다는 소리이다. 글레이저가 맨유를 인수하는데 사용한 대부분의 자본은 맨유 구단의 자산을 담보로 잡고 빌린 차입금으로부터 나왔고, 이것은 연간 6천만 파운드의 이자를 발생시켰다. 나머지 금액은 PIK 대출로부터 나왔는데, PIK에 대해서는 맨유 구단은 이에 대해서는 갚을 책임이 없고 이 대출은 모기업 Red Football이 가진 맨유 구단의 지분을 담보로 잡고 빌린 것이다. 이 PIK 대출의 이자율은 연간 14.25%이다. 글레이저 가문은 PIK 대출을 맨유를 인수한 첫 5년 동안 원금을 상환하지 않았다. 그리고 2010년 1월 맨유는 5억 파운드(7,500억원)에 달하는 채권 발행에 성공하였으며, 2010년 4월까지 PIK 대출은 2억 파운드(3,400억원) 가량 남았고 이것은 2010년에 알려지지 않은 방법으로 모두 상환되었다.

퍼거슨이 은퇴한 이후 오히려 더 돈을 많이 쓰는 맨유가 여전히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하고 있는걸 보면 참 아이러니하다.[25][26] 퍼거슨이 유스에서 선수를 기용하고 발굴해내고 같은 리그 하위권 팀에서 영입을 주로 하던 것과 대조되게, 퍼거슨 이후의 맨유는 레알의 챔스 우승 주역인 앙헬 디 마리아, 네덜란드 리그에서 득점왕을 차지했던 유망주 멤피스 데파이, 도르트문트에서 좋은 활약을 하던 헨리크 미키타리안 등 이름값 있는 선수들을 꽤나 많이 영입했으나 모조리 실패했다.

심지어 미키타리안과 스왑딜로 데려온 알렉시스 산체스마저 실패함과 동시에 감독들마저 우승권은 커녕 챔스권도 간당간당한 성적을 유지하면서 암흑기에 빠져들 기색을 보였고, 주제 무리뉴는 유로파 리그 우승을 일구어 냈으나 팀 성적이 추락하며 경질당했다. 이후 퍼거슨 밑에서 선수 생활을 하고 누구보다 맨유를 잘 아는 올레 군나르 솔샤르가 감독으로 부임하며 이름값이 아닌 맨유에 필요한, 맨유에서 진심을 다해 뛸 선수를 영입하는 정책으로 바꾸면서 다시 재건의 기미를 보이고 있기는 하다만, 당시 톰 클레벌리, 조니 에반스 등을 데리고도 우승을 일구어내던 퍼거슨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물론 당시에도 최전방 스트라이커는 최고 수준으로 항상 준비해왔던 퍼거슨이였으나, 미드필더진은 은퇴를 준비하던 라이언 긱스 폴 스콜스를 억지로 붙잡아둘 정도로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당시 EPL이 최고의 선수들이 즐비할 뿐만 아니라 승격팀마저 타 리그 수준급 에이스급을 영입할 만큼 부유한 리그 상황을 생각하면 더욱 더 대단하기 이를데 없다.

그래서인지 퍼거슨의 은퇴 이후 큰 영입 없이 팀을 이끌다가 성적 부진으로 경질당한 데이비드 모예스가 사실 명장이 아니냐 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퍼거슨이니까 그 스쿼드로 우승했지 그 스쿼드로 그만큼 한 것도 기적이라는 얘기다.

다만 공격수만큼은 월드클래스에 가까운 선수를 보유하려는 노력을 보여줬는데, 특히 그 중에서도 오프 더 볼이 뛰어난 타고난 골잡이 유형의 선수를 최소 1명 이상 보유하려고 했다.[27] 마크 휴즈, 에릭 칸토나, 앤디 콜, 솔샤르, 뤼트 판니스텔로이, 웨인 루니,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카를로스 테베스, 로빈 반 페르시 모두 공간 활용을 이해하고 마무리 능력은 최고라고 평가받았던 공격수들이다.[28] 이러한 머리가 좋고 마무리가 뛰어난 공격진들이 있었기 때문에 퍼거슨은 패널티 박스까지 공을 가지고 가는 빌드업에 집중하였고, 맨유 특유의 중앙 수비수가 중앙 미드필더에게 공을 주고 그 공을 반대편 측면의 윙어에게 넘겨서 압박이 덜한 측면 공간으로 안전한 사이드체인지를 이룬 뒤 패널티박스로 크로스를 해서 그걸 귀신같이 최고의 공격진들이 넣어버리는 플레이로 승리를 챙겨오는 전술을 짤 수 있었다. 또한 중앙 수비수들이 공을 잡는 상황에서도 언제든지 수비진이 복귀할 수 있게 하프라인 아래에 풀백들을 배치해서 상대의 역습을 저지하는 빌드업 전술은 맨유의 수비력에 큰 도움이 되었다. 흔히 맨유 팬들도 잘하고 있지 않은 거 같은데 왠지 경기는 이기고 있다고 평가하는 경기가 많았던 것도, 빌드업이 매우 효율적이라 화려한 플레이가 없이 공을 패널티 박스로 가져가고 그걸 귀신같이 넣어버리는 뛰어난 공격수들과 철저한 역습 방지까지 조화가 이뤄져서 계속 상대의 공격을 가드하다가 몇 번 묵직한 공격을 날려서 상대를 쓰러트리는 식의 경기가 많았기 때문이다.

5.5. 진화하는 감독

알렉스 퍼거슨이 갱신해왔던 신화는 진화에 진화를 거듭했으며, 그는 유럽 축구에서 나타난 전술적 흐름을 놓치지 않고 잘 취합하여 완성된 형태로 선보이는 감독이다. 그 예로 들 수 있는 것이 마지막 시즌의 전술 변화, 이전까지 주 포메이션으로 사용하던 442에서 4-2-3-1 내지는 4-5-1로 포메이션을 변경하고 테크닉있는 공미를 위주로 한 점유율을 중시하는 전술을 도입하면서 세계적인 트렌드를 수용하는 모습을 보였고 또다시 딱히 강해보이지 않는 스쿼드로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거뒀다.

아마 계속 현역이었다면 전방압박과 라 볼피아나와 센터백들을 통한 후방 빌드업도 흡수했을 가능성이 크다. 또 스리백도 성공적으로 사용했을 것이다.

위의 서술들을 읽다보면 슬슬 눈치챘겠지만 딱히 본인만의 전술적인 철학이 있는 감독은 아니었다. 많은 축구팬들이 '퍼거슨하면 생각나는 전술, 경기 스타일이 있느냐?'라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이유기도 하다. 하지만 누구보다 인심 장악, 동기 부여에 뛰어난 감독이었고 전술가로서는 본인의 스타일을 고집하지 않고 늘 새로운 전술 트렌드를 제대로 이해하고 본인의 전술에 더하는, 마치 마인 부우같은 감독이었다. 퍼거슨의 팀이 늘 우승 경쟁을 해왔던 것은 이런 변화를 수용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29]
셀틱의 10분의 1도 안되는 금액으로 수십 년간 이어진 셀틱과 레인저스 양강 체제를 무너뜨렸다.
UEFA 클럽 랭킹 106위였던 에버딘을 6위로 올렸다.
● 13살에 데이비드 베컴을 스카우팅. 이후 베컴은 맨유를 넘어 잉글랜드를 상징하는 세계적인 아이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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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런던 올림픽 홍보대사, 베컴
헤이젤 참사 UEFA 리그 랭킹 3위였던 영국 리그가 한 순간에 29위까지 밀려나며 추락. 헤이젤 참사로 잉글랜드 전체 클럽들이 5년간 유럽 무대를 금지당했고 우수한 용병도 떠났다. 캄프 누의 기적을 일으키며 트레블을 달성, 박살나버린 영국 리그를 캐리했다. 팀의 핵심으로는 7명이나 되는 유스 출신이 뛰고 있었다.
캄프 누의 기적으로 가장 극적인 트레블을 달성했다. 경기 종료 직전 3분 안에 그것도 교체선수들이 들어와서 2골이나 넣으며 역전하는 드라마틱한 경기 스토리를 만들었다.
● 슈퍼스타 베컴의 탄생으로 클럽의 가치가 상승하면서 거부들이 영국 리그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글레이저가[30] 맨유를 2005년에 인수했다.[31] 그러나 대부분 인수자금은 구단자산을 담보로 빌린 것으로 부채가 없었던 맨유의 재정이 단기적으로 악화되었다. 이러한 재정적인 상황 속에도 '로테이션' 신공과 감독빨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리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덕분에 지금 맨유의 재정은 안정된 상태로 최근 폴 포그바로 월드레코드, 리그레코드, 클럽레코드를 동시에 갱신해 화제를 모았다.

퍼거슨이 26년간 만들어낸 브랜드 이미지는 오늘날 메가 클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있게 했다. 맨유는 미국 자동차 회사 GM의 쉐보레와 유럽축구 스폰서십 역사상 최대 금액의 스폰서십 계약을 체결했는데 2014-15 시즌부터 7년간 무려 5억 5,900만 달러(한화 약 9,000억 원)에 달하는 대형 딜이다.

5.6. 상왕

파일:퍼거슨경의 눈치우는 방법.jpg
●저는 모든 경기장 스텝, 연습생, 어린이들, 그리고 저를 포함한 모든 코칭 스텝, 심지어 구단주까지도 아침 6시에 불러내 경기장 눈을 치웠습니다.
● I am comfortable with the Glazers. They have been great. They have always backed me whenever I have asked them. I have never faced any opposition. 난 글레이저 가문과 함께 하는 게 편했어. 그들은 아주 잘 해줬지. 그들은 내가 언제 무엇을 요구하든 지지해줬어. 반대에 부딪힌 적은 한번도 없었지.
● 2010년 글레이저와 데이비드 길(전 맨유단장)이 루니의 급여를 엄청 올리기로 결정하면서, 내 기분이 어떤지 알고 싶어했어. 난 솔직히 루니가 내가 받는 돈의 2배를 거머쥐는 게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지. 암튼 그걸 그대로 말하니까 조엘 글레이저가 바로 말하더군. '나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쩔수 있나요' 간단했어. 나보다 더 많은 선수가 있으면 안될거라고 합의를 봤지. 참고1 참고2
퍼거슨 감독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영향력은 가히 절대적이다. 현재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운영하는 주체는 글레이저 가문이지만 퍼거슨 감독은 재임 시절 글레이저 가문을 뛰어넘는 대단한 영향력을 맨유에 행사하였다. (2011년경) 맨유는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인식되는 브랜드에 Google, Apple, BBC, Dyson, Facebook에 이어 6위를 차지한 바 있다. 이 조사를 한 Brand Finance의 스포츠 브랜드 평가팀장인 David Chattaway는 글레이저의 이 같은 성공 비결의 핵심요인 중 하나는 클럽의 궁극적인 브랜드 매니저(the club's ultimate brand manager)인 퍼거슨 감독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EPL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선정되기도 한 퍼거슨 감독이 은퇴한 뒤 미국 뉴욕 증시에 상장된 맨유의 주가가 꾸준히 하락세이자, 영국 경영컨설팅 회사 A.T.커니의 이매뉴얼 험버트 스포츠 담당 전문가는 "애플이 스티브 잡스를 잃었던 것과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평했다.

은퇴 후의 행보를 통해 상왕의 위엄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다. 은퇴 후 데이비드 모예스, 루이 판 할 그리고 조제 무리뉴의 경기를 볼 때마다 불안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무리뉴가 맨유 감독 초중반에는 유로파리그를 우승하게 만들어 챔피언스리그에 복귀할때는 기쁜 감정을 내비췄으나 퍼거슨의 못마땅한 표정 및 불안함은 후임감독의 선수 운영 및 전략, 전술에 불안함을 암시한다. 후임 감독에 대한 그의 불신으로 이어지며 결국 경질될 확률이 높아진다.

5.7. 퍼기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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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기 타임 (Fergie Time)
이기고 있는 경기 혹은 지고 있는 경기에서 추가 시간에 심판에게 자신의 시계를 가리키는데, 이는 주심 및 심판진들에게 쉽사리 경기 종료를 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와 추격하는 상대팀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라고 한다.

실제로 퍼거슨의 맨유는 후반 추가시간에 역전골 혹은 동점골이 유독 많이 나오기도 했으며 과거 2009-10 시즌 OT에서 열린 맨체스터 더비에서 마이클 오언의 역전골로 4-3으로 승리한 경기 또한 후반 추가 시간의 추가에서 나온 골이다. 이 경기는 퍼기타임이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캐릭의 교체투입과 벨라미의 골세레머니로 시간이 좀 흘러서 합당한 비공식 추가시간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행동은 이른바 "퍼기 타임"이라고 불린다.

훗날 은퇴 후 인터뷰에서 실제로는 시간이 어느 정도 남았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며, 심판과 상대팀에게 압박을 가하는 심리적인 트릭이었다고 하며 일부러 시계를 보면서 심판이 과감하게 경기를 끝내지 못하게 한다고 한다. 실제로 시간적 이득을 많이 보았고 12-13 시즌 한정 BBC는 맨유가 지고있을 때 평균 79초라는 비공식 추가시간이 주어졌다고 보도했다. 이것은 영국 언론들의 구설수에도 자주 오르는데 심판을 압박해 판정에 이득을 받는다는 것이 논란이 되는 대목이다.

5.8.

파일:퍼거슨 마지막껌.jpg
퍼거슨이 마지막으로 씹은 .
이 껌은 39만 파운드(한화 약 5억 8,000만원)에 낙찰되었다.

슨이란 별명이 있는데, 경기 중에 보면 항상 껌을 씹고 있기 때문이다. 껌 씹는 속도는 그 날 경기력에 따라 다르다. '껌영감' 대신 '퍼껌슨'이라고 더 많이 불린다. '껌거슨'이라고도 불린다.

참고로 경기당 씹는 껌의 개수는 1개라고 한다.

5.9. 박지성과의 관계

파일:퍼거슨경과박지성.jpg
박지성은 2~3년 내로 맨유맨이 될 것이다. 그를 믿기에 데리고 왔고 또 그만큼의 활약을 할 수 있는 선수이다.
다른 사람들은 나의 생각에 의아해했지만, 2~3년 내로 분명히 사람들은 나의 결정에 동의할 것이다.
(박지성 QPR 이적시, 퍼거슨 경이 쓴 편지) 지성이에게. 나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대한 네 충성심에 감사하고 새로운 구단에서의 행운을 빌어주며, 널 보내야 했던 이유를 설명하는 편지를 일찌감치 네게 보내지 못했던 걸 부디 용서해라.[32] 네가 원했고, 필요했던 출전 수를 제공하지 못했던 게 안타깝다. 내가 널 무시하는 것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전혀 사실이 아니야. 프로 정신, 충성심, 그리고 결단력 같은 면에서 너만큼 신뢰를 할 수 있었던 선수는 없었단다. 난 네 무릎 수술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너의 건강한 모습을 항상 유지하고 싶었다. 물론 이런 말도 네게는 부당했을 테고, 아마 그 결정이 달갑지 않았을 게다. 특히 내 손자는 가장 좋아했던 선수인 널 다른 팀으로 보낸 이후로 아직도 나에게 말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아직도 마음에 걸리고 있지만, 너를 보낸 결정이 얼마나 어려웠던 건지 네가 이해해주길 바란다. 유나이티드 소속이던 시절 네 돋보이는 능력을 신뢰했고, 내 코치진들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개인적으로 넌 내가 보유한 선수들 중 가장 충성심있고 정직한 선수 중 하나였고, 우리 팀에 너처럼 예의가 바른 선수가 있어 자랑스러웠다. 의심의 여지 없이, 넌 축구계의 환상적인 대표 인사이며, 영어에 그렇게 빨리 적응하며 안착하는 걸 보면, 네 결의력과 열정이 축구 뿐 아니라 삶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구단의 모든 이들을 대표해 새로운 구단에서의 성공을 빈다. 지성아, 난 언제까지나 너를 내 선수 중 하나로 여길 것이고, 언제고 내 도움이 필요하다면 날 찾아와라. 마지막으로 너와 네 가족이 언제나 행복하고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
{{{#!folding [영어 원문]
Dear Ji Sung,

Please forgive me for not having written to you before now to thank you for your loyalty to me and Manchester United and to wish you good luck in your new club, but also the explain my reasons in letting you go.

My disappointment was that I didn't give you the football that you wanted, and needed. It must have felt to you that I was ignoring you but that is far from the truth, there was no player I could trust as much as you in terms of your professionalism, loyalty and determination. I was always conscious of your knee injury and therefore always liked to keep you fresh and of course this wasn't fair to you and understandably didn't enjoy the decision. It is something that still plays on my mind especially as I now have a grandson who still won't speak to me for letting his favourite player move to another club, but I hope you understand the reasons fully now and how difficult a decision it was.

In the time you played was a credit to your outstanding ability and I know it is shared by all my staff as you were in my opinion one of the most loyal and honest players I have had the pleasure to work with and I was proud to have had such a well mannered man in my team.

You are without doubt a wonderful ambassador for football, and the way you settled in and got an excellent command of the English language so quickly was a credit to your determination and enthusiasm not only for football but for life, and on behalf of everyone at the club I wish you success with your new club.

Ji Sung I will always look upon you as one of my players and if you ever need my help you know where I am. Finally I wish you and your family every happiness and Good luck.

Your sincerely,
Alex Ferguson}}}
박지성이 QPR으로 이적할때 박지성은 아주 소중한 선수고 그가 그리울 것이라며 좋은 매너를 보여주어 박지성이 맨유를 나올때 훈훈한 장면을 연출했다. 거기다 QPR과의 경기에서 손수 벤치까지 행차하여 박지성을 찾아가 악수[33]하여 그의 위신을 세워줌으로서 국내 네티즌들에게 역시 멋진 영감님이라고 칭찬을 받았다.

이후 시간이 지나 박지성이 은퇴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앰버서더에 위촉되자 위촉식에 퍼거슨이 함께 했다. 은퇴 이후 퍼거슨이 관중석에는 참여했지만, 올드 트래포드 그라운드에 공식 행사로 입장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에 이 당시 구단 관계자들과 팬들이 많이 흥분했다고 한다.

팀 내 상당히 높은 주급 순위나 박지성이 출전한 경기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퍼거슨은 박지성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대 AC밀란 전에서 피를로를 괴롭혔던 경기가 있는데[34] 주로 상대팀의 주요 선수를 묶어놓는 역할이나 공수를 연결하는 교두보 역할을 맡겼다. 대부분 기용되는 경기가 보통 리그 내 강팀과의 경기거나 챔피언스리그에서 중요한 경기였다. 퍼거슨 입장에서 박지성은 강팀과의 경기에서 믿고 쓸 수 있는 카드였다고 보는 것이 옳다.

2021년 5월 제자 개리 네빌과 진행한 LAD Bible과의 인터뷰에서 "감독했던 선수들 중 가장 과소평가된 선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브라이언 맥클레어, 박지성, 로니 욘센이라 대답하였다. 네빌이 박지성의 유명한 피를로 전담마크 일화를 꺼내자 퍼거슨은 10-11시즌 바르셀로나와의 챔피언스리그를 회상하며 박지성을 메시에게 전담마크 시켰어야 했고 그러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실수라 고백했다.[35] 동시에 경기 중에 전술변화를 주어야하는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하프타임까지 맨유는 꽤나 선전하고 있다고 생각했기에 그러지 못했다며, 메시는 엄청난 선수였지만 그런 선수를 묶을 수 있을 선수는 박지성뿐이라고 대답했다. 여담으로 국내축구 선수들 중 역대 레전드가 차범근이냐 박지성이냐 손흥민이냐 등에 대해선 의견차가 다양하겠지만, 적어도 박지성이 맨유의 일원으로서 퍼거슨에게는 립서비스의 대상이 아닌 정말 중요한 선수였다는게 해당 인터뷰를 통해서 드러났다. 특히 한국과 전혀 관계가 없는 순수한 그들만의 인터뷰에서 박지성의 이름이 나왔다는 점은 이게 립서비스가 아니라 진짜 퍼거슨이 평소 생각해오던 진심이라는걸 알 수 있다. 또 그동안 박지성의 피를로 봉쇄는 퍼디난드, 스콜스, 네빌, 루니같은 과거 팀원들에 의해 꾸준히 회자되었지만, 퍼거슨이 말한 챔피언스리그 파이널에 대한 일화는 거의 처음으로 나온 얘기다.


후에 맨인유럽에서 박지성이 말하길 맨유 입단 당시 영어도 잘 못하고 외로워 할 박지성을 위해 퍼거슨 감독이 직원들에게 매일 핫초코를 챙겨주며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하는 등 뒤에서도 세심하게 챙겨주었었다고 한다. 덤으로 핫초코를 좋아하게 되었다고...

6. 퍼거슨에 대한 언사

파일:맨유.jpg
알렉스 퍼거슨의 은퇴에 대한 축구계 인사와 유명인들의 코멘트 출처
제2의 칸토나, 스콜스, 긱스, 호날두는 나올 수 있지만, 제2의 퍼거슨은 나올 수 없습니다.
에릭 칸토나
알렉스 퍼거슨 경, 당신은 감독계에서 나의 우상이었습니다. 또 앞으로의 모든 세대들에게 귀감이고요. 알렉스 경, 그대는 전설이며 그 위업은 절대 넘어설 수 없을 것 같네요.
펠레
축구계 최고의 우상.
우사인 볼트
팀을 위해 싸운 위대한 커리어! 위대한 퍼거슨 경. 당신의 새로운 길에 행운을.
라파엘 나달
퍼거슨이 이룬 성취만 봐도 그는 의심할 여지 없는 위대한 감독.
제프 블래터
그는 축구계에 엄청난 헌신을 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유럽, 그이상으로 퍼거슨 감독의 영향력은 컸다. 그의 헌신, 세세한 부분까지의 관심, 재능있는 선수들을 향한 안목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에버딘의 감독으로서 30년이 넘는 시간동안 대단한 업적을 달성하게 만든 힘이었죠. 결과만으로도 놓고 봐도 그의 이력서는 독보적이다. 통상적으로 관심갖는 단기적인 해결책으로 봤을 때만 우수한 것이 아니고 장기적인 비전의 측면에서도 퍼거슨 감독의 업적은 대단합니다.
미셸 플라티니
프리미어 리그는 많은 위대한 선수들과, 감독들 그리고 팀들을 보는 특권을 가졌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알렉스 퍼거슨 경보다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진 못했어요. 알렉스 퍼거슨 경을 빼놓고는 프리미어리그에 대해 말할 수 없습니다. 그가 있었기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프리미어리그가 진화하여, EPL은 환상적인 무대가 되었습니다.
리차드 스쿠다모어 프리미어 리그 협회장
그는 완벽하다. 그의 은퇴로 인해 나의 팀( 아스톤 빌라)이 조금은 편해지길 바란다.
데이비드 캐머런
거의 4번의, 전혀 다른 스쿼드들로 개편해가며, 성공을 이뤄낸 것이 믿을 수가 없다. 아마 역대 최고의 클럽 감독일 것이다.
브라이언 롭슨
축구계 가장 위대한 감독의 지도를 받은 일이 진심으로 영광스러웠습니다.
데이비드 베컴
구성과 꾸준함을 볼 때 그의 위업은 기본적으로 오점 하나 없죠. 당연히, 독보적일 정도고요. 알렉스 없는 잉글랜드 축구계를 상상하기가 힘들군요. 하지만 이제 현실이고, 사실이겠죠. 물론 그 자리를 맡는 후임은 그만한 역량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합니다. 새로 부임하는 인물에게는 큰 도전이 될 거예요. 아직도 할 수 있는 말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상업적, 재정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탄탄한 두세 클럽 중 하나라는 겁니다. 또 새로 부임하는 인물이 좋은 시작을 끊을 수 있는 준수한 기반도 있고요. 선수들, 팀, 잠재성은 그대로일 테니까요. 유나이티드는 아주 잘 성장했고,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말로 강력한 위치에 올랐죠. 하지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어쩔 수 없이 큰 공허감을 느낄 겁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클럽을 지배했던 카리스마와 인물이 갑자기 사라지는 거니까요. 그런 사람을 대체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에요.
아르센 벵거
내 남은 감독 생활에서 큰 후회는 알렉스 경 반대편 덕 아웃에 설 수가 없게 됐다는 겁니다. 축구의 신(football god) 옆에 서 있는 건 대단한 일이었을 텐데. 알렉스 경에 대한 다큐멘터리는 싹 다 봤고, 하나는 왜 모든 걸 차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영상이었습니다. 1983년 5월 11일, 컵위너스컵 우승을 달성하고 10일 뒤에는 스코티시컵을 들었는데, 마지막엔 굉장히 씩씩거리면서 '쓰레기 같은 경기력이었다(rubbish performance)'고 하더라고요. 모든 걸 이룬 이유가 바로 그겁니다. 10일 만에 2개 대회에서 우승했지만, 선수들한테 화를 냈어요.
파올로 디 카니오
퍼거슨은 맨유의 상징이자 전설, 영웅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겸손하고 아이와 같은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죠.
카를로 안첼로티
영국 축구의 슬픈 날이다.
로이 호지슨
퍼거슨은 위대한 감독이기 이전에 위대한 인간이었다.
해리 레드냅
우리 모두 그를 그리워할 겁니다. 그리고 제겐 올드 트래포드에 가는 게 힘든 일이 되겠죠. 특히 그런 인물 없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처음 상대하러 가게 된다면요, (왜 퍼거슨이 그렇게 그리울 것 같냐는 질문에 대해) 독보적이고, 아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도 독보적인 클럽일 테니까요. 감독에게 퍼거슨이 가졌던 그런 조건을 부여하는 클럽입니다. 모두들 퍼거슨도 처음엔 쉽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겠죠. 첫 우승을 맛볼 때까지 3~4년이 걸렸고, 맨 유나이티드는 퍼거슨이 믿기지 않는 업적을 달성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줬어요. 그 이후론 독보적인, 유일무이한 인물이 됐죠. 잉글랜드 축구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이끌고 쌓은 트로피 수는 정말 놀라울 따름이고 20년 이상 감독직을 유지한 것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퍼거슨과의 만남 중 가장 좋아하는 기억은 뭐냐는 질문에 대해) 하나 골라야 한다면, 첫 만남으로 하겠습니다. 2004년이었죠. 사실 감독으로 잉글랜드 땅을 밟는 건 처음이었거든요. 그게 챔피언스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대 포르투 경기였고요. 우리가 막판에 골을 넣고 진출했습니다. 근데 그런 상황에서 경기 끝나고 상대방 감독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서는, 축하한다며 자기 사무실에서 와인이나 한잔 하자고 초대한다는 건 나와, 내가 알던 문화에서는 평범한 일이 아니었어요. 분명 엄청, 굉장히 실망하고 있을 순간이었을 테니까요. 거기서 우리의 관계는 꽃을 피운 겁니다. 그 이후 우린 서로 여러 차례 경기에서 만났고, 그 다음 해 전 잉글랜드의 첼시로 가게 됐죠. 그 다음부터 우리 관계는 그런 식이었습니다. 누가 승장이고 패장인지는 무관했어요. 언제나 서로를 존중했죠.
"퍼거슨은 전 세계 모든 감독들의 보스입니다."
주제 무리뉴, 영상.
그는 맨유에서 참으로 오랜 시간을 보냈고, 우린 그의 뒤를 이을 감독이 누구인지 모른다. 우승을 한 다음이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이상적인 순간이라고 생각했던것 같다. 그는 분명 맨체스터시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대표하는 인물이 될 것이다.
오트마어 히츠펠트
전설이라는 단어가 요즘에는 지나치게 자주 사용된다는 게 불행이다. 그러나 퍼거슨 감독에게는 진정 축구계의 전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스완지의 감독으로서) 올드 트레포드에서 퍼거슨 감독이 지휘하는 마지막 홈경기에서 상대편 감독으로 나서게 된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
미카엘 라우드럽
퍼거슨 감독을 아는것은 특권이다. 감독으로서 내게 준 모든 조언에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퍼거슨 감독보다 더 좋은 도움과 조언의 원천은 없다. 그는 감독으로서 수십년간의 경험을 갖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승리하는 방법을 안다는 것이다. 그는 맨유팬들에게 영광의 시대를 선사하며 올드 트레포드로 거듭 트로피를 갖고 왔고, 팀을 세계에서 가장 큰 클럽 중 하나로 만들었다. 감독 재임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저력과 헌신은 과소평가 될수 없다. 어려운 시기도 있었지만, 강한 성품과 열정, 단호한 정신자세로 그토록 위대한 성과를 이룩했다.
닐 레논
이번 결정을 예상하지 못했다. 퍼거슨 감독과 최근까지도 여러번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는 보스, 즉 부인에게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말을 계속했다. 그런 교양과 지능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 무엇이든 그걸 할 수 있다. 이제는 그가 맨유뿐 아니라 축구계 전체의 사절이 되었다고 말하는게 타당하다. 난 영어를 하지 못하는데 사람들은 내게 그의 영어가 이상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는 불어로 의사소통하기 시작해서 좋은 친구가 되었다. 또한 우리는 술을 교환하는 것도 시작했다. 그는 내게 위스키를 보내곤 했고 난 그에게 이탈리아 와인을 보내곤 했다. 우린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그의 가장 위대한 성취는 계속해서 팀을 변화 시킨 것과 승리를 이어가는 와중에서도 팀을 현대화시킨 것이라 생각한다.
마르첼로 리피
본인의 결정이니까요, 제게 있어, 3년 동안 알렉스 경과 맞서 싸운 건 엄청난 영광이자 기쁨이었습니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그를 꺾은 것도 무한한 영광이었고, 그 앞날에 행운을 비는 바입니다. (은퇴)이유는 모르겠지만요. 지금도 최고의 감독이지만, 이 결정은 직접 내린 거고 우린 그걸 존중해야 합니다. (누가 최고의 감독인지 말하는 건)어려운 일이에요. 모두가 각자의 의견이 있는 법이지만 27년간 같은 클럽에서 트로피를 휩쓴 감독이 있다면, 그건 믿을 수 없는 업적입니다. 그와 같은 감독이 다시 나오지 않을 거라 봅니다.
로베르토 만치니
실망스럽다. 충격적이다. 슬프다. 오늘이 그날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을 20년 넘게 알았지만 그가 항상 말했던 것처럼, 그가 지금 은퇴한다는 사실은 전혀 납득 할 수 없다.
피터 슈마이켈
언젠가 올 일이었지만 여전히 충격적이고 가라앉질 않는다! 위대한 감독이며 훌륭한 사람!
에드윈 반 데 사르
모든 것에 감사드립니다, 보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퍼거슨 감독이 없는 맨유는 맞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정말 위대한 인물이 그의 경력을 마감한다. 단연코 세계가 목격한 최고의 감독 밑에서 플레이 했던 것은 대단한 특권이었다. 그의 기록은 좀처럼 넘어설수 없는 경지에 이를 것이다. 그가 감독으로서 이룬 업적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것이다.
마이클 오언
일어서서, 손을 들고, 다함께 그에게 큰 박수를 보내자! 알렉스 퍼거슨 경이 은퇴한다. 놀라운 커리어에 축하를!
라다멜 팔카오
내가 은퇴할때 퍼거슨의 아이들 중 한명이었다는 사실에 만족할겁니다. 이건 나에게 더 특별한 일이에요. 이건 대단한 업적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상 최고 감독의 선수 중 하나였다는 사실이 자부심을 갖게 합니다. 감독님은 모든사람들을 동등하게 취급하세요. 언제나 다른 이들을 도우시죠. 감독님은 모든 승리에도 불구하고 항상 계속해서 굶주려 하셨고 언제나 경쟁심을 잃으신 적이 없는데 이건 저에게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감독님은 진정한 '위너'이세요.
치차리토
와우 알렉스 퍼거슨 경이 떠난다. 건강이 괜찮길 빌어. 그는 내 아버지 이후 내 인생에서 가장 파워풀한 사람이었어. 축구의 신에게 거대한 경의를!
루이 사하
엄청난 커리어! 알렉스 퍼거슨 경에게 코치받았다는 것이 자랑스럽고 명예로웠죠.
주세페 로시
처음 부임하면서 리버풀을 제치고 정점에 오르고 싶다고 했고, 그걸 실천했습니다. 먼저 하고 나서 '아, 사실 속으로 다짐하긴 했었지'라고 말한 게 아니죠. 약속을 하고, 그걸 달성한 거예요. 걸출한 경력을 쌓으셨죠. 모두가 퍼기를 잃어 슬퍼하고 있겠죠. 위대한 보스고, 위대한 전설입니다.
티에리 앙리
퍼거슨 감독에 대해서는 감탄사밖에 나오질 않네요. 그 오랜 집권기를 생각하면, 제 기준에서는 역대 최고셨던 것 같습니다, 많은 감독들 – 무리뉴 같은 감독들이죠 – 이 그 (역대 최고의) 자리를 위해 노력하지만, 퍼기(Fergie)만큼 오랫동안 해야겠죠. 믿기 힘든 분이십니다. 클럽을 지휘하는 사람이, 그처럼 선수들을 최고로 만들고 계속해서 팀을 진화시킬 열망이 있었다는 걸 보면, 완전히 유일무이한 분이죠.
프랭크 램파드
축구계의 전설이 떠났다. 의미있는 일이다, Gracias Sr ALEX FERGUSON.
다니 알베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의 놀라운 커리어에 감사를. 축구의 전설, 놀라운 퍼거슨 경.
세르히오 라모스
알렉스 경. 가장 위대한 감독 중 한 명. 당신의 은퇴에 행운을 빕니다.
마이클 에시엔
위대한 남자의 은퇴. 축구에 있어서 슬픈 날이야. 그는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이자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어.
팀 케이힐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명입니다. 26년 동안 성공적인 게임을 마친 그에게 우리 모두 존경을 표합니다.
뱅상 콤파니
역대 최고의 감독 중 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 큰 충격이었고, 우리한테도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나이티드가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 중 하나로 계속 남을 거라고 보기 때문에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진 않네요.
브라니슬라프 이바노비치
우리가 그에 대해서 말할 때 항상 나오는 말은 그는 승리자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가 그의 선수단을 잘 파악하고 그들로부터 최고의 것을 얻어낸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이렇게 오랜 기간 정상에 있다는 것이 이를 입증합니다. 맨유의 선수들로부터 들은 바로는, 그는 그 누구보다도 승리에 배고파하며, 늙은 나이에 그렇게 많은 것들을 성취한 후에도 여전히 승리를 갈망한다고 합니다. 그것이 그의 선수단으로부터 최고의 성과를 얻어내는 비결입니다. 맨유 선수들은 퍼거슨경은 감독으로서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당신은 그것으로부터 그는 영감을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모든 사람들이 퍼거슨 감독의 축구 감독으로서의 업적을 알기 때문에, 그의 은퇴는 아쉽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가 휴식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그의 시간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알렉스 옥슬레이드체임벌린
그는 맨유의 통산 20번째 리그 우승을 막 이끌었다. 그래서 아마 지금을 적당한 시기로 본듯 하다. 그와 함께 했던 것이 굉장히 자랑스럽다. 그는 내 선수시절과 지도력의 관점에서 모두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존재다. 향후에도 그가 상당히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확신한다. 다음에 맨유를 맡을 인물은 엄청난 공백을 채워야 한다.
알렉스 매클리시
"그가 맨유의 감독이라는 것만 아니었다면 선수로서 같이 해보고 싶었던 감독이었다. 나한테 있어서도 정말 존경스러운 인물 중 하나지만 딱 한가지의 흠이 있다면 그가 맨유의 감독이었다는 사실 하나 뿐이다."
스티븐 제라드
Only one BOSS.
로니 욘센
그의 기록은 경이 그 자체다. 그가 모은 우승컵의 수는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의심할 것 없이 그는 역사상 최고의 감독이다. 언제나 말해왔듯 그가 은퇴를 선언하면 커다란 충격이 빚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언제나 때가 있기 마련이고, 지금이 그때다. 그는 무척 정직한 태도로 임한다." "그는 내가 함께 한 감독 중 가장 솔직하다. 그에게는 이도저도 아닌 면이 없다. 언제나 그라운드 안팎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 알 수 있다. 그는 이해심도 아주 많았다. 최근에는 심리학자들이 모두 가세하지만 그는 그들 중에서도 최고였다. 그는 축구가 남다른 인격을 요구하는 거친 스포츠라는 걸 이해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스포츠에는 인간 관리자로서 접근해야 한다. 그보다 더 나은 접근은 보지 못했다. 그의 밑에서 뛰는 건 정말이지 즐거웠다.".
데니스 어윈
Phenomenal(경이적인)
에릭 텐하흐, 퍼거슨의 프리미어리그 명예의 전당 감독 헌액 영상에서 인터뷰어에게 "알렉스 경을 표현할 수 있는 한 단어가 있다면 무엇인가요?(One word to sum up Sir Alex?)"라는 질문을 받고

7. 은퇴 후 행보

파일:인자퍼거슨.gif
이상: 은퇴 후, 경기를 즐기고 싶었던 퍼거슨.
파일:은퇴후경기4.gif
파일:은퇴후경기3.gif
현실: 은퇴 후 경기를 즐기지 못하고 있다.[36]
파일:퍼거슨전화.gif
파일:퍼거슨전화2.jpg
BBC 한 맨유팬, 후임 감독이 선덜랜드에 패한뒤 긴급전화에 전화해 퍼거슨 바꿔달라 요청. 물론 허락될리 없었다.
그러나 13-14 시즌에서 맨유의 상태가 영 메롱이라 선수단 정리를 암시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예스의 경우에는 자신의 맨유 감독 초창기를 언급하며 감독 자리를 계속 맡길 것이라고 한다. ##[38]

하지만 모예스는 결국 부진한 기록을 남기고 짤렸고, 후임으로 반 할 감독이 맨유를 이끌게 되었다.[39] 하지만 수천억을 들이고도 4위로 끝내는 아쉬움과, 무언가 확립되지 않은 전술 등 아쉬움이 많아 진터라 맨유팬들은 이 돈 영감님께 드렸으면 트레블이라며 아쉬워 하는 중. 사실 이건 비단 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맨유의 전설적인 수비수인 리오 퍼디난드 네마냐 비디치도 둘이서 우리가 있을 때 저 돈을 썼으면 얼마나 많은 트로피를 더 들었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사실 돈은 많이 썼지만 제대로 된 스쿼드 구축은 실패했다. 그나마 건져낸 선수가 안토니 마샬 정도지만 과거 맨유 공격진에 비하면 턱없이 부족하다.

무리뉴의 맨유 커리어에서 FA 커뮤니티 실드, EFL 컵 그리고 UEFA 유로파 리그[40]에서 우승을 하게 되자 퍼거슨이 3년만에 함박웃음을 보여주며 박수를 치고 있다. 주제 무리뉴에 대해 과거의 영광을 되찾아 줄 것이라는 그와 맨유의 기대감이 더욱 커졌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UCL 복귀에 기뻐했고 주제 무리뉴 체제의 맨유가 바젤과 경합하여 3-0 대승을 거두자 경기 종료 직전에 알렉스 퍼거슨이 모예스가 말아먹어 경직한 표정을 지은 지 3년만에 온화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파일:퍼거슨NBA관람.jpg

7.1. 영향력 행사 관련 비판 및 반론

퍼거슨이 원체 맨유에 상징적인 인물이다 보니, 은퇴 후에도 그에게 쏟아지는 관심이나 영향력은 상당한 편이다. 그래서 상기된 행보 등 은퇴 후에도 퍼거슨이 맨유에 간접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불만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그럴만한 자격이 있는 사람이고 구단 입장에서도 동상까지 세워줄 정도니 그의 눈치를 안보기는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일부 맨유팬 중에선 현역도 아닌 사람의 의견이 이렇게까지 반영되는게 과연 옳은 것이냐 노욕이다는 식의 말도 나온다.[45] 아스날을 떠나고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커녕 직관조차 오지 않으며 침묵을 지키고 있는 아르센 벵거 전 감독과 꽤나 대조되는 부분이라는 것.[46][47]

허나 이에 대해선 반론도 있는데,
"내가 맨유의 의사결정에 참여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어떻게 추진되고 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슈퍼 리그는 유럽 70년 축구 역사를 저버리는 일이다."
슈퍼 리그 창설 논란 관련 퍼거슨의 인터뷰
먼저 '퍼거슨이 현직도 아닌데 노욕 운운될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해 비판 받는다.'라는 주장은 냉정히 말해서 축구단의 가쉽에 훨씬 민감한 현지를 포함해 다수 팬들 사이에서 전혀 공감대를 얻지 못하는 비판으로 개인의 사견 이상의 평가는 받지 못하고 있다.

일단 '퍼거슨이 영향력을 행사한다.'라는 주장의 '영향력'라는 범주부터가 너무 두루뭉술하며, 구단 전반의 의사결정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상술한 슈퍼 리그 관련 인터뷰, 라커룸 출입을 하지 않거나 선수단과 따로 움직였다는 일화들이나 모예스의 부진 이후 나오던 감독 복귀설을 딱잘라 부인하거나, 다큐멘터리인 ALL OR NOTHING에서 주제 무리뉴의 "감독 임기 2년 반 동안 ' 델리 알리 영입해라'라는 조언 하나만 하였다."라는 회고 등 오히려 본인의 영향력이 감독 권한을 침범하거나, 구단 운영이 좌지우지 되는 것을 경계했다는 평가를 받을지언정, 영향력을 휘둘렀다고 비판 받을 상황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만한 사례가 기껏해야 호날두의 맨유 리턴 정도인데, 이 때는 구단의 마지막 발롱도르 수상자이자 최전성기의 상징이 지역 라이벌팀에 스스로 역제안해서 입단한다는 초대형 사태로 현재 맨유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파트리스 에브라, 리오 퍼디난드, 폴 스콜스, 개리 네빌, 웨인 루니 등 맨유 레전드들이 달라 붙어 호날두를 설득한 초대형 사태였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오히려 이런 초대형 사태가 아닌 이상 영향력을 절제한다는 평가를 받았으면 받았지 본인의 영향력을 오용한다고 비판 받을 상황이 아니며 오히려 호날두가 맨시티로 이적했다면 방관으로 비난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상술된 벵거와의 비교도 어려운 상황인게 구단 내 업적과 위상, 상징성과는 별개로 감독 은퇴 후 13-14 시즌부터 앰버서더에 취임하면서 현장에서 물러났지만 구단에 여전히 소속되어 있으며 감독 은퇴조차 우승 감독이 가족사로 은퇴를 결정하면서 팬덤의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은퇴한 퍼거슨과 말년에는 Stay, Out으로 팬덤의 평가가 갈리면서 고별하였고 아스날 구단에 소속되지 않은 벵거는 상황이 다르다.

그리고 간과되는 것이 퍼거슨이 영향력을 행사할 의사가 있었다면 굳이 명예직 성격이 강한 앰버서더나 컨설턴트가 아니라 모예스 경질 후 거론되던 감독 복귀, 감독 복귀가 어렵다면 풋볼디렉터나 사장같은 실권이 충만한 직책으로 부임해 비교도 안 되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까놓고 구단과 팬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는 역대 최고의 명장이 성적 부진이라는 명분이 있는 상황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의사가 있었다면 명예직으로 부임하겠는가? 삼성 라이온즈 김응용- 선동열, 마이애미 히트 팻 라일리- 에릭 스폴스트라 체제처럼 자신의 제자나 사단을 감독으로 현장에 보내고 본인이 상왕처럼 군림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런 주장이 나오는 것은 퍼거슨이 맨유에서 압도적인 위상을 가진 인물이기 때문이다. 상술하였듯이 퍼거슨 본인은 오히려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지양하는 행보를 보였으나 경기장 관람 한 번, 인터뷰 한 번이 너무 큰 파급력을 가졌기에 나오는 해프닝인 것이다.

8. 여담

파일:퍼거슨경.png }}} ||
위쪽 사진은 대영제국 훈장 3등급(CBE)을 받을 당시 사진이고, 아래쪽 사진은 기사작위를 받는 장면이다. 참고로 비슷한 빨간 끈 목걸이라 얼핏 보면 구분이 안가는데, CBE 목걸이는 보라색에 가까운 빨간 끈 양측에 하얀색 줄이 있고 기사작위(Knight Bachelor) 목걸이는 진한 빨강색 끈 양측에 노랑색 줄이 있다.
파일:알렉스 퍼거슨.07.jpg
알렉스 퍼거슨 감독과 제이크 퍼거슨
파일:Alex Ferguson Statue_Aberdeen FC.jpg }}} ||
2022년 2월 26일, 에버딘 피토드리 스타디움에 퍼거슨의 동상이 세워졌다. 1970~80년대 애버딘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공로로 세워졌다.

9. 기록

9.1. 선수

9.1.1. 대회 기록

9.1.2. 개인 수상

9.1.3. 클럽 기록

<rowcolor=#fff> 연도 클럽 출장수 (골)
1957~1960 퀸즈 파크 FC[57] 32 (15)
1960~1964 세인트 존스턴 FC 37 (19)
1964~1967 던펌린 애슬레틱 FC 89 (66)
1967~1969 레인저스 FC 41 (25)
1969~1973 폴커크 FC 95 (37)
1973~1974 에어 유나이티드 FC 24 (9)
17시즌 통산 317 (171)

9.2. 감독

9.2.1. 대회 기록

9.2.2. 개인 수상

9.2.3. 통산 기록

<rowcolor=#fff> 구단 기간 경기 승률
이스트 스털링셔 FC 1974.06 ~ 1974.10 17 9 2 6 52.9%
세인트 미렌 FC 1974.10 ~ 1978.05 169 74 41 54 43.8%
애버딘 FC 1978.06 ~ 1986.11.06 459 272 105 82 59.3%
스코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 1985.10.01 ~ 1986.06.30 10 3 4 3 30.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86.11.06 ~ 2013.05.19 1,500 895 338 267 59.7%
통산 2,155 1,253 490 412 58.1%

9.3. 수훈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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롭슨
역대 대회의 참가 감독
1930 1934 1938 1950 1954 1958
1962 1966 1970 1974 1978 1982
1986 1990 1994 1998 2002 2006
2010 2014 2018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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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영제국 훈장 3등급 "Commander of the Order of the British Empire" 수훈. [2] 선수 시절에는 80kg [3] 스트라이커 [4] 현지 시간 2023년 10월 6일 별세. 향년 84세. # [5] 물론 영국에서 불러주는 호칭으로, 굳이 외국인이 '경'이나 'Sir' 할 필요는 없다. 또 엄밀히 따지면 세습작위가 아니기 때문에 이름없이 성에만 경칭을 붙인 퍼거슨 경(Sir Ferguson)은 잘못된 표현이다. '알렉스 퍼거슨 경' 또는 '알렉스 경'이 맞는 표현이다. [6] 참고로 Knight Bachelor는 '최하위 훈작사'로 번역되고는 하지만, 3등급 CBE나 4등급 OBE 등 기사작위급보다 아래인 훈장'만' 받은 사람을 '훈작사'로 칭하는 경우도 또 많기 때문에 이는 혼란을 부르는 번역이다. OBE가 훈작사인데 Knight Bachelor가 최하위 훈작사라는 그 말대로라면 CBE > OBE >>> Knight Bachelor 라는 말도 안 되는 꼴이 만들어 진다. '훈작사'로 구글링을 해서 조금만 살펴보면 그때그때 다른 개족보를 확인할 수 있다. 훈작사라는 단어 자체도 영국 정부로부터 공인된 것인지 출처가 불분명한 단어이고, 훈장의 훈(勳)과 작위의 작(爵), 기사의 사(士) 세 단어를 짬뽕시켜 만들어진 한자어다. 제도에 대한 기본지식이 없이 훈장과 작위를 아예 뭉뚱-그려서 하나로 퉁쳐버리게 하는 단어라 할 수 있다. 기사작위는 아무나 받는 게 아니냐는 잘못된 인식에 이런 혼란스런 번역이 상당한 공헌을 했다. 따라서 여기서는 원어 'Knight Bachelor'를 그대로 밝혀 적는다. [7] 부부간의 사이는 대단히 좋은 듯. 천하의 퍼거슨 감독도 집안에서는 아내에게 수그린다고. 한번은 먼 거리로 친선경기를 가야했는데 아내가 집안청소하고 가라는 한 마디에 대청소를 거드느라 정작 감독인 본인이 그 경기에 가지 못했다고. 2000년대 초반에 은퇴를 고려할 때도 낮잠 자다가 아내 캐시에게 발로 걷어차이고 '남편 은퇴는 내가 결정하는거임.' 말을 듣고 은퇴를 포기했다. [8] 당시 퍼기경은 "퍼거슨 집안의 장남은 모두 알렉스(Alex)란 이름이라며 첫아이 이름을 알렉스로 하자"고 주장했으나 퍼기경의 할아버지의 이름이 존이라는 걸 아내에게 들키는 바람에 거짓말이 들통나 마크가 되었다고 한다. [9] 이때의 안좋은 기억 때문인지 퍼거슨은 감독이 되어서도 레인저스에게 굉장한 적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10] 토탈 풋볼의 창시자이자 현대 축구의 설계자로, 과르디올라가 등장하기 전에는 매체들이 역대 감독 순위를 정할 때 축구에 끼친 전술사적 영향력에 중심을 둔다면 미헬스가, 감독으로서의 팀의 성공을 이끈 실력에 중심을 둔다면 퍼거슨이 1위로 주로 뽑혀왔다. [11] 감독 데뷔가 32세, 애버딘 부임이 36세, 맨유 부임 당시 45세였다. 은퇴 당시 72세로, 한 마디로 남들이 선수로 뛸 때 감독 생활을 시작했고 남들이 다 은퇴하고도 남았을 나이가 넘도록 저물지 않아 마지막 시즌조차 승점 11점차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은퇴했다. [12] 심지어 첫 시즌은 10월에 중도 부임했다. 중도 부임 시즌 곧장 승격 -> 2부 리그 6위 -> 2부 리그 우승으로 3년 만에 1부 리그까지 승격했다. [13]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은 유럽 전체에서 독주가 가장 심한 리그 중 하나로 꼽히며, 이 리그에서 퍼거슨은 8년 간 세 번의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참고로 퍼거슨의 애버딘이 1984-85 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한 이후 현재까지 셀틱과 레인저스 이외의 팀이 스코티시 프리미어십을 우승한 사례는 없다. [14] 퍼거슨이 부임한 1978년에 애버딘은 UEFA 클럽 랭킹 106위, 1979년 116위였으나 퍼거슨이 떠나던 1986년에는 6위에 랭크되어 있었다. 2023년 기준 UEFA 클럽 랭킹 106위는 세리에 A의 토리노, 116위는 헝가리의 페헤르바르이며 6위는 파리 생제르맹이다. 당시 애버딘의 강세가 얼마나 충격적이었는지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참고로 애버딘은 퍼거슨 체제 이후 지금까지 리그 우승도, 유럽 대항전 우승도 하지 못했다. [15] 이스트 스털링셔는 팀에 골키퍼조차 없었고, 세인트 미렌은 3부 리그에서도 중하위권에 머물던 팀이었다. 애버딘은 퍼거슨 시절 이전까지 리그 우승 1회(1955), 유럽 대항전 우승 0회의 팀이었고 리그 전체에는 셀틱과 레인저스의 독주 체제가 매우 공고했다. 맨유는 맷 버스비 시절의 영광을 뒤로하고 침체되어 있었고 재정적으로도 어려웠으며, 아예 맨유가 속한 잉글랜드 리그 자체는 헤이젤 참사로 몰락해 있었다. [16] 감독은 팀이 성공하기 위해 존재하고, 팀이 성공하기 위해선 이겨야 하며, 경기를 이기기 위해 전술이 존재한다. 퍼거슨은 축구 전술에 혁명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축구 전술의 변화들을 적절히 조화해내 경기에서 이겼고 팀을 성공시켰다. 무려 40년 간의 축구판의 변화와 전술 발전을 모조리 쫓아가 매번 불리한 환경의 팀에 부임하면서도 도태되기는 커녕 맡은 팀을 모두 성공시켰다는 점에서 퍼거슨의 축구 감독으로서의 위치는 독보적이다. 아직 커리어가 종결되지 않은 현역 감독들과 비교해도 퍼거슨만큼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시간이 흘러도 쇠퇴하지 않으면서, 맡았던 팀마다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감독은 찾기 어렵다. [17] 13-14 시즌 데이비드 모예스 경질 이후 선수 겸 감독 대행으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경험하였다 [18] 18-19 시즌 감독 대행 부임 이후 19년 정식 감독으로 전환되어 21년 10월까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을 역임했다. [19] 퍼거슨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1992년 프리미어 리그 출범과 동시에 1차 전성기를 맞이하며 소위 퇴물 리그로 전락했던 잉글랜드 리그를 바꾸기 시작했다. 이후 1996년 아르센 벵거의 아스날이 가세하며 경쟁 체제가 구축, 잉글랜드 프로축구는 부흥기를 맞이한다. [20] 단순히 유럽 대항전 출장 정지가 풀려서 그런 거 아닌가 생각할 수 있는데, 참사 이전까지 1-2위를 다투던 잉글랜드 프로축구 리그는 참사 5년 후 유럽 대항전 출전이 허락되고도 27위까지 추락했던 리그 랭킹을 간신히 10위 안으로 끌어올렸을 뿐이었다. 사실 그것도 퍼거슨의 맨유가 유럽 대항전 출장 정지가 끝난 해에 바로 UEFA 컵위너스컵을 들어올린 덕이 컸다. 그렇게 유럽 대항전에 나가고도 10년 간 5위와 10위 사이에서 헤매던 잉글랜드 리그가 완전히 5위권으로 들어온 건 참사가 15년이 지난 2000년대에 와서였고, 헤이젤 참사 당시 위치였던 1위 탈환은 2008년으로 20년이 넘게 걸렸다. [21] 퍼거슨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의 축구 위상 자체를 세계 최고로 끌어올렸다. 더 나아가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프리미어 리그를 상징하는 인물이라고도 할 수가 있다. 퍼거슨이 끌어올린 프리미어 리그의 전 세계적인 인기와 그로 인해 얻게 된 엄청난 TV 중계권료는 결론적으로 리그의 중위권 팀에게도 기회를 주게 되었다. 중계권료(재정적 윤택)를 바탕으로 리그 중위권 클럽들이 더욱 두터워진 것. 실제로 프리미어 리그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리그이며, 세리에 A가 몰락한 것도 돈 때문이었다. 선수 영입에 천문학적인 금액을 쏟아부었지만 세리에 A의 재정 상태는 이를 따라가지 못했으며 파르마 칼초 1913, ACF 피오렌티나는 파산하기까지 했다. 라리가도 마찬가지인데,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거듭되며 전체적인 수준이 하락했다. 일각에서는 이런 추세라면 프리미어 리그의 20위 팀이 라리가의 양대 산맥인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의 중계권료를 넘기는 건 시간 문제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2] 이 트레블로 인해 프리미어 리그는 그 해에 다시 UEFA 리그 랭킹 3위에 올라섰다. 그리고 33년 만에 잉글랜드 리그는 퍼거슨이 말한 대로 UEFA 리그 포인트 1위를 차지하게 된다. [23] 사라고사에서 잘해서 퍼거슨이 리턴 시켰는데, 볼튼전에 이후로도 폼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이후, 바르사로 컴백했다. [24]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프리미어 리그가 출범한 1992-93 시즌부터 퍼거슨이 은퇴한 2012-13 시즌까지 맨유는 리그 우승을 13번이나 했으며, 3위 아래로 떨어진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25] 물론 이는 퍼거슨의 은퇴 이후 돈이라도 팍팍 써야지 네임드급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맨유의 위상이 상당히 추락했기 때문도 있다. 허나 돈 때문에 온 애들이 많아서 그런지 거품이 많다. [26] 퍼거슨 시절 우승은 못해도 3등 안에 들어서 챔스권에는 무조건 드는 맨유였으나 지금은 챔스권은 커녕 유로파 경쟁도 힘겹게 이어나가고 있다. PL 하위권 팀들의 수준이 상승한 것도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위권은 맨시티 같은 팀들이 꾸준히 유지하는 걸 보면 결국엔 질이 하락한 선수단 및 감독의 능력 부족, 보드진의 삽질이 겹치며 구단이 무능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27] 퍼거슨의 스쿼드 운영 논리는 매우 확고했는데, 그 중 핵심적인 것은 축구는 골을 넣지 못하면 이길 수 없다는 점이다. 감독의 전술로 골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은 만들어낼 수 있지만 그 상황에서 기회를 골로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공격수의 개인 역량이라는 게 퍼거슨의 신념이었고 그렇기에 공격수만큼은 결정력이 검증된 선수를 데려오는데 돈을 아끼지 않았다. 그 외에 중요시했던 포지션은 개인 능력을 발휘해서 드리블로 공을 빠르게 운반하거나 정확한 크로스나 슛을 날려야하는 윙어 정도였으며, 나머지 포지션은 선수의 개인 능력을 초과하지 않는 선에서 역할을 부여해서 안정적인 빌드업을 했다. [28] 치차리토는 개인기나 드리블은 맨유 수준이 아니었지만 오프 더 볼, 결정력, 집중력만큼은 PL 탑급이었기 때문에 슈퍼 서브로 활용되었다. [29] 재밌는 것은 전술과는 다르게 대인 관계나 매니징 스타일을 보면 굉장히 고집이 강했다는걸 알 수 있다. 주전 경쟁에 밀려서 퍼거슨에게 총을 들고 협박했다는 카더라까지 나왔던 폴 인스가 방출되었던 경우만 봐도 선수가 얼마나 대들던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감독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 고집을 밀고 나갈 때와 아닌 때를 잘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30] 자수성가해 부호가 된 글레이저는 1995년 미국프로풋볼(NFL) 팀인 탬파베이 버커니어스(Tampa Bay Buccaneers)를 인수해 스포츠 사업을 시작했다. 글레이저는 인수전에 뛰어들기 전만 해도 버커니어스는 만년 꼴찌 팀이어서 비용이 적게 들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착수한 것이다. 하지만 인수전 막판에 경쟁자가 갑자기 등장하는 바람에 2억 달러 가까운 자금이 들어갔다. 당시만 해도 이 거래는 풋볼팀 인수 사상 최고 금액이었다. 글레이저는 인수 후 꾸준히 좋은 선수와 코치를 영입해 팀의 성적을 호전시켰다. 마침내 2003년 슈퍼볼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뤘고 이후 버커니어스의 가치는 8억 달러로 치솟았다. 1억 9,200만 달러에 인수한 팀이 10년도 되기 전에 7배 가까이 몸값이 뛴 것이다. 그는 꼴찌였던 팀을 2003년 슈퍼볼 우승팀으로 키우는 능력을 보여줬다. 글레이저는 검소했지만 돈을 쓸 때는 화끈하게 쓰는 사람이었다. 전용기를 구입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출장은 이코노미석을 이용했고 대부분 저가항공사만 찾았다. 그는 아들 브라이언을 가리키며 "저 아이가 입고 있는 바지가 보이죠? 저게 200달러(20만원)짜리 휴고 보스 바지야. 난 겨우 20달러(2만원)짜리 바지를 입는데 말이야"라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31] 맨유 인수에 관심있던 거부들 리스트
루퍼드 머독 (전 LA다저스 구단주)
● 로만 아브라모비치 (첼시 구단주)
●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맨시티 구단주)
하마드 알 타니 카타르 국왕 (PSG 구단주)
● 드미트리 리볼로프레프(AS 모나코 구단주)
맨유가 지속적으로 흑자를 기록하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다 보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인수하기 위해 눈독을 들이는 거부들이 적지 않았다. 2000년대 초 LA다저스 등 다른 프로 스포츠팀을 사들이려고 했던 글레이저는 영국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눈을 돌렸다. 글레이저가 맨유를 인수하려고 했을 때 맨유팬들이 조용히 넘어갈 리가 없었다. 1990년대 후반에도 언론 재벌인 루퍼트 머독이 맨유를 인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루퍼트 머독은 맨유의 지분을 매입해 인수하려다 소액주주와 서포터 연합의 엄청난 반대에 부딪혀 좌절된 적이 있다. 그러나 지난 50여 년간 숱한 비난과 공격에도 개의치 않고 난관을 뚫고 나와 한번 목표를 삼으면 결코 그냥 물러서지 않는 스타일의 글레이저가 여론이 악화됐다고 포기할 리가 없었다. 맨유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포츠팀인 데다 입장권은 거의 대부분 매진이었고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브랜드 가치를 지닌 구단이었다. 그래서 2003년부터 조금씩 맨유의 주식을 사 들이기 시작해 28.1%의 지분을 확보한 뒤 2, 3대 주주에게 공식적으로 매수를 신청, 이를 성사시켰다. 결국, 2005년 글레이저는 맨유의 주식 75%를 인수해 구단주가 되었다. 인수금액은 7억 9,000만 파운드(약 1조 3,900억 원). 하지만 이 중 2억 7,500만 파운드(약 4,850억 원)만이 글레이저 가문의 돈이었고 나머지 인수금액 중 2억 7,500만 파운드는 IB(투자은행)에서 나머지 2억 4,000만 파운드는 이자율이 높은 헤지펀드를 통한 현물출자대출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JP모건 투자은행과 리파이낸싱 과정을 거치며 5억 파운드의 우선순위부채를 가져왔다.
[32] 박지성이 QPR 이적 전 팀 내 연봉 순위 3위였다. (루니, 퍼디난드 바로 다음이었으며, 연봉 81억.) 루니가 그때 당시 154억. 박지성이 새로운 팀을 알아보던 와중에 맨유가 인상된 연봉으로 재계약을 제시했으나 박지성이 거절할 정도로 퍼거슨과 맨유는 박지성을 잡고 싶어했었다. [33] 그 당시 영상을 보면 퍼거슨이 상당한 용기를 냈다고 할 수 있다. 박지성이 QPR로 이적한 첫 시즌에 맨유와의 QPR 홈 경기에서의 일이다. 경기 시작 전, 퍼거슨이 QPR쪽 벤치에 직접 걸어가서 벤치 앞을 소심하게(...) 서성였는데 이적하게 만든 상황이 미안했는지, 퍼거슨답지 않게 박지성에게 먼저 말을 못 걸고 쭈뼛쭈뼛 서성였다. 벤치에서 서브 멤버로 대기하던 박지성 선수는 이를 퍼거슨 감독이 자신에게 간단한 인사를 하기 위해 다가왔다는 제스처라고 간파하고 벤치에서 일어나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퍼거슨 감독에게 악수를 청했다. 퍼거슨도 흡족한 미소를 띠며 박지성과 악수 및 간단한 안부 인사를 하고 바로 맨유 쪽 벤치로 돌아갔으며, 상당히 훈훈한 장면이기도 하다. [34] 당시 밀란의 중심이자 핵이던 피를로를 박지성에게 전담마크시켰고, 박지성은 피를로를 지워버렸다. [35] 이후에 잠시 자신의 결정에 아직도 큰 후회가 남는 듯이 말을 멈췄다. [36] 모예스 시절 13시즌 맨유가 홈에서 리버풀한테 지는 상황에서의 퍼거슨의 표정이다. 17시즌 이후로 맨유는 리그에서 리버풀을 이기질 못하였고, 18시즌 리버풀 원정 부터 21시즌 까지 4년을 리버풀에게 맨유는 리그에서 항상 지거나 비길뿐 승리를 따지 못했다. 그때마다 퍼거슨의 표정이 압권. 22시즌 텐하흐 체재에서 홈에서 드디어 리그에서 리버풀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37] 하지만 이후 퍼거슨의 자서전에서 모예스 감독에 대해 갑자기 큰 클럽을 맡다 보니 어떻게 팀을 꾸려나가야 하는건지 제대로 깨닫지 못했던 것 같다며, 특히 맨유 선수들은 빠른 템포에 능숙한데 의도적으로 경기 템포를 늦췄다고 했다. [38] 일부 축구팬 사이에서도 알렉스 퍼거슨이 마지막 임기까지 선수단의 세대 교체를 실패한 것을 부진의 원인 중 하나로 꼽고 있기는 하다. [39] 모예스가 경질될 시점에는 시즌 도중이어서 공백을 메꾸고자 라이언 긱스가 임시로 맡았다. [40] 우승하면 UEFA 챔피언스리그 본선 진출권을 준다. [41] 사실 운이 되게 좋았다. 그날 병원엔 다섯 건의 뇌수술이 있었는데 그 중 세 명이 죽었고 둘이 살아남았는데 그 중 한 명이 퍼거슨이다. [42] 공교롭게도 무리뉴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첼시에서 그리고 맨유에서 경질되기 그 직전의 상대가 하필 위르겐 클롭이었다. [43] 축구 관련 뉴스에서의 공신력을 다루는 웹페이지가 있다. [44] 이후 해외축구 갤러리를 비롯한 많은 축구 커뮤니티에서 맨유가 판정이득을 볼때마다 롤렉스 드립이 나오고있다. [45] 여담으로 맨유의 또 한명의 전설적인 감독 맷 버스비도 은퇴 후 맨유 이사진에 합류해 활동했는데, 선수들이 뭔가 맘에 안드는게 있으면 후임 감독 대신 버스비에게 달려가서 감독들이 엄청 난감해했다고 한다. [46] 다만 벵거는 아스날 보드진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않다는 얘기도 있어서 이것을 감안하긴 해야 한다. 말년엔 2시즌 연속 챔스 진출 실패로 팬들의 지지도 거의 다 잃어서 마무리도 좋지 않았다. 게다가 벵거는 어찌됐든 프랑스 사람이라 기반도 좀 다르다. [47] 참고로 벵거는 2022-23 시즌에 드디어 아스날 에미레이츠 스타디움 직관을 왔다. [48] 원래 스코틀랜드 사투리가 알아먹기 괴악한 것으로 유명하다. 영국인들 사이에서도. 그래도 비 스코틀랜드 영국인들과는 같은 언어라 그런지 자주 듣다보면 이해하는데 문제는 없다고 한다. [49] 현대 축구에선 공격수의 전방 압박 및 수비 가담이 굉장히 중요시 되지만, 퍼거슨이 선수로 뛰던 때인 1960~70년대에는 공격수의 수비가담이 전술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요구되지 않았다. 그 당시로 따지면 희귀한 케이스. [50] 무리뉴 감독은 자신이 첼시에 부임한 초기에 올드 트래포드에서 맨유를 이긴 후, 퍼거슨 감독이 포도주를 같이 마시자며 상대팀 감독인 자신을 감독실로 초청해서 환대해 준 것에 감명받았다고 한다. 2007년에도 비슷한 사례로 같이 식사도 했었는데, 무리뉴 본인이 회상하길 혹시 이것이 자신을 후계자로 데려가려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잠시 들었다고 한다. 실제로 퍼거슨 은퇴 후 그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이냐는 의문에 무리뉴 감독의 이름이 많이 올라왔지만, 결국 데이비드 모예스로 결정났다. 그리고 모예스는 경질되고, 후임은 루이 반 할이 되었다. 반 할은 2년간 맨유 감독을 하다 경질되고 2016-17 시즌부터 맨유 감독은 무리뉴가 맡게 되었다! [51] 알렉스 퍼거슨 경이 뇌출혈로 쓰러졌다가 다시 회복한 후, 자신의 기억을 어떻게든 남기고자 하는 아버지의 요청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다. 영화는 2021년 개봉한 《알렉스 퍼거슨: 좌절은 없다 (Sir Alx Ferguson: Never Give In)》 [52] 트레블 시즌 [53] 승점 동률 득실차 준우승 [54] 은퇴 시즌 [55] 헤어진 이후에도 종종 연락을 했는지 아놀드 리버풀 유스에 들어갔을때 왜 맨유 유스로 안 보냈냐고 물었다고 한다. [56] 퍼거슨의 경우, 1986년 맨유 부임 이후 각각 1992-93 시즌 프리미어 리그 우승, 1989-90 시즌 FA컵 우승, 1991-92 시즌 리그컵 우승, 1998-99시즌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약 13년 만에 처음으로 모두 달성했었다. [57] 퀸즈 파크 레인저스와는 전혀 다른 스코틀랜드 팀이다. [58] 5회, 초대 및 최다 수상 [59] 11회, 초대 및 최다 수상 [60] 27회, 초대 및 최대 수상 [61] 알프 램지 어워드 [62] 4회로 최다 수상 [63]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64] 1996~2020 [65] 1992-93~2001-02 [66] 1992-93~20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