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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4-20 00:22:18

토마스 투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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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ußball-Club Bayern München e.V.
파일:Thomas Tuchel(23-24).png
<colbgcolor=#dc042d><colcolor=#fff> 이름 토마스 투헬
Thomas Tuchel[1]
출생 1973년 8월 29일 ([age(1973-08-29)]세)
서독 바이에른주 슈바벤현 귄츠부르크군 크룸바흐
국적
[[독일|]][[틀:국기|]][[틀:국기|]]
신체[2] 192cm / 체중 72kg
직업 축구 선수 ( 센터백 / 은퇴)
축구 감독
소속 <colbgcolor=#dc052d><colcolor=white> 유스 TSV 크룸바흐 (1979~1988)
FC 아우크스부르크 (1988~1992)
선수 슈투트가르트 키커스 (1992~1994)
SSV 울름 1846 (1994~1998)
감독 VfB 슈투트가르트 유스 (2000~2005 / 코치)
FC 아우크스부르크 유스 (2005~2006 / 코치)
FC 아우크스부르크 유스 (2006)
FC 아우크스부르크 II (2007~2008)
1. FSV 마인츠 05 (2009~2014)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15~2017)
파리 생제르맹 FC (2018~2020)
첼시 FC (2021~2022)
FC 바이에른 뮌헨 (2023~2024)

1. 개요2. 선수 경력3. 지도자 경력4. 전술 스타일5. 문제점 및 비판
5.1. 선수, 보드진과의 불화5.2. 인격적인 결함과 기행, 돌출 행동
5.2.1. 하인츠 뮐러와의 사건5.2.2. 엠레 모르와의 사건5.2.3.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버스 폭탄 테러 사건5.2.4. 바샥셰히르 전 대기심 옹호 논란5.2.5. 도르트문트 전 이후 인터뷰 논란
6. 기록
6.1. 감독 성적6.2. 대회 기록6.3. 개인 수상
7. 투헬에 대한 언사8. 여담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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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축구 선수 출신 감독. 현재 FC 바이에른 뮌헨의 감독직을 맡고 있다.

훌륭한 전술적 역량과 유스 발굴 능력을 가졌지만 괴짜스럽고 불같은 성격으로 유명한 독특한 감독이다.

2. 선수 경력

어린 시절 TSV 크룸바흐의 유소년 팀에 입단하는 것으로 축구 인생을 시작한 투헬은 1988년 FC 아우크스부르크[3]의 유스팀으로 자리를 옮긴다. 1991년과 1992년 DFB 유소년 포칼을 2연패하는 데 기여한 후, 투헬은 19살의 나이로 바덴뷔르템베르크 주를 연고지로 한 2부 리그 슈투트가르트 키커스(Stuttgarter Kickers)로 이적을 감행하고 이 곳에서 같은 해 여름 성인무대 데뷔식을 치른다. 하지만 데뷔 시즌이었던 92-93 시즌에는 불과 8경기에 출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고 다음 시즌에는 더더욱 실망스러운 폼을 보여주면서 방출되고 만다. 오갈 곳이 없어진 투헬은 3부 리그였던 레기오날리가쥐트의 SSV 울름 1846으로 이적했고 네 시즌 동안 팀의 핵심 수비수로 활동하면서 1998년 2부 리그 승격에 힘을 보태며 커리어 하이를 기록해 승승장구하나 싶었지만 고질적인 무릎 연골 부상[4]으로 인해 이 해를 끝으로 25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선수 생활을 접어야만 했다.

3. 지도자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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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전술 스타일

투헬의 축구 철학

가는 팀 마다 전술 및 선수 활용이 유동적으로 바뀌고 그 팀이 가지고 있는 선수에 맞추는 스타일의 감독이며, 가지고 있는 선수들의 장점을 극대화하고 약점을 최소화하는 시스템을 구사하는 데에 엄청난 일가견이 있는 감독이다. 현대축구의 요구되는 트렌드를 잘 파악하며 세부 전술 구사에 능통하고 상대를 분석하고 맞춤 전술을 가져오는 데에도 천재적인 모습을 보여 다양한 전술을 활용할 수 있다.

투헬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은 수적 우위공간의 활용이라고 할 수 있다.

수비 시에는 기본적으로 볼을 소유하는 것을 선호하는 감독인지라 그가 다루는 선수들은 모두 펩 과르디올라, 위르겐 클롭처럼 강력하고 조직적인 프레싱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도르트문트 시절의 클롭처럼 주야장천 프레싱을 하지 않고 상대에 따라 내려앉거나 중원 블록을 활용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압박 강도 및 밀도를 조절한다. 일례로 수비적 팀 컬러가 전통적으로 자리잡아온 첼시에서는 전방압박 강도가 클롭이 떠난 직후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이끌던 시절보다 낮고 3명의 공격형 미드필더 및 공격수들이 전방 압박을 하며 상대의 빌드업을 방해하는 사이 백5와 2명의 미드필더로 수비 블록을 빠른 시간 내에 만드는 것에 초점을 둔다. 수비로 내려선 뒤에는 '필요하다면 좌우 공간은 내어 주되, 중앙 공간만큼은 철저히 지킨다'라는 전제 하에 컴팩트한 수비 대형을 선호한다. 한 마디로 투헬의 수비 전술은 사키이즘의 기본인 수적 우위와 공간을 컴팩트하게 짜는 것에 아주 충실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방식, 포메이션은 마인츠, 도르트문트, 파리, 첼시에서 가지고 있는 선수에 따라 다르다.

언제나 카멜레온 같은 전술과 포메이션을 짜오지만 후방 빌드업 시에는 비슷한 방식을 사용한다. 좌우 반대 전환이 아닐 시 롱패스를 최대한 지양하고 숏패스 빌드업을 선호하며, 펩, 클롭과는 달리 키퍼의 빌드업 관여는 거의 시키지 않는 편이고, 좌우 풀백 및 윙백들은 윙어처럼 높게 전진해 좌우 사이드 라인을 확보한다.[5] 최후방에서 라볼피아나 혹은 백3 포메이션으로 세 명을 확보한 뒤 미드필더 한 명 혹은 두 명을 추가로 내려 3-1 혹은 3-2 형태의 빌드업으로 공격을 시작하는 편.[6][7] 따라서 전반적인 볼 순환의 조타수 같은 역할을 해줄 후방 플레이메이커는 투헬의 전술에 있어서 필수이다. 도르트문트에서는 율리안 바이글, 파리에서는 레안드로 파레데스, 첼시에서는 조르지뉴가 그 역할을 담당했다. 차분한 템포의 빌드업으로 상대의 압박을 끌어당기고, 전방에서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을 맡는 선수가 하나 둘 수비를 달고 내려와 볼의 전진에 기여한다.[8] 이렇게 후방과 중원에서 수적 우위를 활용해 볼 점유의 독점을 추구한다.

이러한 수적 우위 빌드업으로 상대의 1차적 압박을 뚫고 들어오거나 상대를 후방으로 몰아낸 상황에서 투헬의 공격수들 및 풀백들은 이미 상대의 하프 스페이스와 측면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게 훈련되어 있다. 사이드 라인에 자리잡은 선수들을 통해 공격을 넓게 전개하고[9] 상대가 콤팩트하게 내려앉지 못하게끔 중원 및 사이드라인 & 하프 스페이스에서의 수적 우위를 만들어 상대의 수비 조직력을 무너뜨리는 것이 컨셉이다. 이것을 실행하기 위해 한쪽 측면을 오버로드하고 반대 측면으로 한번에 전환하는 '오버로드 투 아이솔레이션'이나 하프 스페이스에 적극적으로 볼을 투입시킨 뒤 볼을 받은 선수를 중심으로 삼각형 혹은 대각선을 만들어 상대의 수비에게 이지선다를 강요하는 방식을 즐겨한다. 이런 패턴 플레이도 강박적으로 도입하는 것이 아닌지라 도르트문트나 파리에서는 우스만 뎀벨레의 아이솔레이션, 네이마르의 플레이메이킹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크랙들에게 자유도를 부여하고 나머지 선수들이 그 동선에 맞게 움직이며 공간을 창출하는 데에 주력, 선수 개인의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모습도 보여줬다. 따라서 투헬의 전술에서는 흐트러진 수비진 사이에서 최소 두 명이 상대 뒷공간을 허무는 데에 능한 선수가 자리잡아야 한다.[10] 도르트문트에서는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 헨리크 미키타리안이, 파리에서는 킬리안 음바페, 후안 베르나트, 에딘손 카바니가, 첼시에서는 리스 제임스, 티모 베르너가 주로 이런 역할을 맡았다.

다만 플레이 상황에서 수적 우위를 가져오고 공간을 활용하기 위해서는 선수들이 끊임 없이 움직여야 하므로 선수들의 높은 활동량이 필연적으로 요구되어, 투헬의 전술은 이를 지속적으로 구현하는데 있어서 선수들에게 가해지는 체력적 부담은 다른 전술에 비해 커질 수 밖에 없다. 또한 이 때문에 선수들의 부상 또한 많아질 수 밖에 없다. 그 때문에 투헬이 그동안 거둔 장기적인 레이스를 펼쳐야 하는 리그에서의 성적은 그동안 투헬이 거둔 단기적인 레이스인 컵 대회의 성적에 비해 많이 초라했다. 리그에서 투헬의 선수들은 계속되는 경기로 인한 체력적 부담으로 인해 리그를 진행하며 결국 폼이 저하 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때문에 투헬의 감독 커리어에서 리그를 진행하며 투헬의 팀들은 전반적으로 전반기에 비해 후반기에는 많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준 면이 있다. 이 때문에 투헬은 주전 선수들의 혹사로 인한 체력의 고갈을 최대한 방지하기 위하여 로테이션을 활용하면서 스쿼드 내의 백업 선수들에게도 자신의 전술을 잘 따를 수 있도록 평소에 전술 훈련을 철저히 진행하며 이에 대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거의 매 경기 전술을 바꾼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여러 전술과 포메이션을 시도한다. 다양한 전술을 그릴 수 있는 능력이 되기에 한 팀 한 팀 맞춤 전술을 준비하는 듯. 다만 이렇기 때문에 전술 이해도가 높은 선수들을 많이 필요로 한다. 도르트문트 시절에도 이러한 경향이 있었고 파리 시절에는 투헬의 의중을 온전히 수행할 선수는 네이마르, 다니 아우베스, 마르코 베라티 정도가 다인 상황에서 너무 많은 것들을 요구한다고 비판을 받은 게 대표적이다.[11] 파리에서 챔피언스리그 결승까지 간 19-20 시즌에는 골이 필요한 시점에 공격수를 4-5명 넣고 경기를 뒤집기도 했고, 첼시 시절에는 20-21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펩 과르디올라 맨체스터 시티가 투헬의 빌드업을 틀어막기 위해 올코트 프레싱에 가까운 강도 높은 압박 전술을 들고 나오자 역으로 상대의 뒷공간을 겨냥한 롱패스를 적극 활용한 역습으로 시티를 무너뜨렸다. 21-22 시즌 레알 마드리드와의 8강 2차전에는 부족한 선수단에도 리스 제임스를 스토퍼로 내려 비니시우스 주니오르를 마킹하고 루벤 로프터스치크를 윙백에 배치하지만 실질적으로 측면과 중앙을 오가며 중원 수적 우위와 측면에서 치크를 전술적 마크맨으로 삼는 선수들에게 이지선다를 거는 역할을 맡겼고, 이것이 완벽 적중해 레알 마드리드의 안방인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1-3 스코어를 뒤집는 대역전극을 만들 뻔했다.

이러한 전술적 역량과 선수들의 장단점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선수들을 본래의 포지션이 아닌 다른 포지션으로 변경해서 사용해 성공한 경우가 꽤나 있다. 우선 도르트문트 시절 풀백 라파엘 게헤이루를 중앙 미드필더로 기용해 도르트문트 중원의 핵심으로 사용한 적이 있고, 파리 생제르망 시절 마르퀴뇨스를 센터백이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지션을 변경해 좋은 결과를 냈다. 또한 네이마르도 단순한 왼쪽 윙어가 아닌 중앙에서 프리롤을 주거나 폴스 나인으로도 기용해 활용폭을 넓혔다. 첼시에서도 캘럼 허드슨오도이를 3백의 윙백으로 변경하여 실험했고 리스 제임스를 중앙 수비수로, 루벤 로프터스치크를 윙백으로 기용하기도 했다. 여기에 메이슨 마운트와 더불어 티모 베르너는 중앙 원톱 롤로 고정하지 않고, 측면에서 상대 수비 공간을 벌리는 역할을 맡기거나 스위칭을 통해 중앙에 들어오면서 카이 하베르츠 하킴 지예흐 등과의 연계 플레이를 맡기는 유기적인 2선 자원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첼시에서 갑작스럽게 경질된 22-23 시즌부터 전술적으로 흔들리더니 바이에른 뮌헨 부임 이후에는 중도 부임 시즌은 물론이고 해리 케인, 김민재를 보강하며 스쿼드를 대폭 강화한 23-24 시즌에도 전술적으로 처참한 모습을 보이며 전술적 역량에 대한 의구심이 크게 늘어났다.

5. 문제점 및 비판

선수 보는 눈은 나쁜 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도르트문트, 파리 생제르맹, 첼시 시절을 거치며 투헬이 부임한 시기에 영입한 선수 중 좋은 평가를 받은 경우는 우스망 뎀벨레, 하파엘 게헤이루, 후안 베르나트 정도이고, 로멜루 루카쿠 같은 경우는 그냥 처참하게 망했다. 투헬 부임 이후로 첼시의 가장 중요한 이적시장인 22-23 여름 이적시장에서 라힘 스털링, 칼리두 쿨리발리, 마르크 쿠쿠렐라, 웨슬리 포파나를 영입하는 것 까지는 좋았으나,[12] 쥘 쿤데 맨체스터 시티의 4옵션 센터백인 네이선 아케와 파리의 홈그로운이라 이적 가능성이 낮은 프레스넬 킴펨베와 저울질하면서 끝끝내 영입을 거부해서 비판을 받았다. 그리고 바이에른 뮌헨에서는 기어코 에릭 다이어 영입을 성사시키면서 바이에른 뮌헨 팬들에게 온갖 욕을 먹는 중이다.

무엇보다 투헬은 인격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많은 감독이다. 투헬은 감독으로서의 뛰어난 역량은 물론 상황에 따라 재빠르고 유동적이면서도 전술적인 대처 능력을 갖춰서 세계적인 명장인 위르겐 클롭, 그리고 펩 과르디올라와 견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난 감독으로 꼽힌다. 하지만 그럼에도 투헬이 클롭이나 과르디올라에 비해 평가가 낮은 것은 장점들을 반감시킬 정도로 인격적인 부분에서 문제를 드러내거나, 잊을 만하면 대체 왜 저러나 싶은 수준의 기행과 돌출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클롭은 뛰어난 능력과 더불어 따뜻한 인간적인 면모와 선수들을 아우르는 특유의 포용력에 덕장으로 정평이 난 감독이고, 과르디올라는 감독으로서 유능하나 사람으로서는 차갑고 가까이 하기 어렵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크게 선을 넘은 적은 없었으며 많은 선수들이 믿고 따르는 감독이다.[13] 반면 투헬의 경우 마인츠, 도르트문트, 특히 PSG, 첼시 시절에 훌륭한 성적과 결과[14]를 이뤄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선수들과 경영진과의 심각한 마찰을 야기하며 끝내 경질되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심지어 뮌헨에서는 성적도 안나옴과 동시에 선수단 갈등도 심각해졌다.

이하 문단에서는 투헬이 벌였던 기행과 문제점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

5.1. 선수, 보드진과의 불화

투헬은 감독으로서 선수, 보드진과 친화적인 관계를 갖지 못하는 편이다. 도르트문트 시절에는 멘탈 상담이 필요한 마르코 로이스, 누리 샤힌, 마츠 후멜스 등을 잘 통제하지 못해 라커룸에 분란이 생기게 했다. 하필이면 전임 감독이 선수에게 친화적인 위르겐 클롭[15]이라 더 비교가 되었다. 주니어 선수들과는 좋은 관계를 맺었고 매우 걸출한 재능의 선수를 여럿 발굴해내는 역량을 보여줬으나, 1군 선수들과는 좋은 인간 관계를 맺었다고 볼 수 없었다.

파리에서는 네이마르 주니오르 등의 주축 선수들과는 물론 선수단 전체와 사이가 좋았다. 하지만 2020-21 시즌 들어 새로 영입된 수비형 미드필더 다닐루 페레이라를 센터백에, 센터백 마르퀴뇨스를 수비형 미드필더에 기용하는 특이한 전술을 사용했는데, 당사자들과 선수들이 의문을 표했음에도 계속 시도하면서 선수단 내부에 약간의 불만을 야기했다. 도르트문트 시절에도 그랬지만 이 사건 또한 투헬의 특이한 전술 성향이 불러온 일이다.

구단과도 자주 마찰을 일으키는 편이다. 마인츠를 떠나 도르트문트의 사령탑으로 부임하는 과정에서 마인츠 보드진과 심각한 마찰이 있었다고 하며, 마인츠의 CEO가 도르트문트 CEO에게 투헬을 까는 말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16] 그리고 도르트문트에서도 보드진과의 마찰로 인해 경질당했다. 도르트문트 재건의 결정적 역할을 맡은 것으로 알려진 수석 스카우트 스벤 미슬린타트는 투헬과의 불화 끝에 아스날로 떠나기도 했다.[17] 선수들과도 큰 불화를 겪었고, 경질 이후 바이에른 뮌헨 차기 감독 후보군으로 율리안 나겔스만과 함께 꼽혔지만 이러한 전력 때문에 바이에른 뮌헨 감독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는 부정적 평가가 많았다.

이는 파리 생제르맹에서도 이어져 2019-20 시즌 코로나-19에 의한 리그 중단으로 리그 1 우승을 일찍이 확정짓고 쿠프 드 프랑스 쿠프 드 라 리그까지 제패하는 도메스틱 트레블까지 달성했으며 무려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까지 이루었으나, 보드진과의 안 좋은 관계 때문에 결국 2020-21 시즌 중간에 경질당했다. 특히 파리의 단장인 레오나르두와 사이가 좋지 않았고, 파리가 스트라스부르전에서 대승을 거둔 직후 단장이 경질을 통보해 버리자 투헬은 이에 분노해 고함까지 질렀다고 한다.[18]

그나마 첼시에 부임한 이후로는 그간 선수들 또는 보드진과의 마찰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깨달은 바가 있었는지 선수들, 구단 관계자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첼시의 시스템이 의사 결정을 원활하게 할 수 있을 거라 자신하고 있고, 본인이 이전보다 더 발전하고 안정적인 사람이 되었으며 자신의 믿음에 대해 너무 고집을 가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첫 시즌 말미에 이적 시장 관련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도 구단 수뇌부와 마찰을 빚지 않는게 가장 큰 목표라고 밝히며 장족의 발전을 이뤄낸 투헬의 철학을 엿볼 수 있다. 첼시에서 어느 정도 고치는 모습을 보이게 된 또 다른 이유로는 그 동안 선수들 또는 보드진과 싸우던 모습을 보면서 그의 아내가 굉장히 힘들어하는 걸 보고 본인부터 고치기로 마음먹게 된 것이라고 한다.[19] 노력의 성과인지 로멜루 루카쿠가 팀 분위기를 망치는 기행을 벌일 때 면담을 통해서 해결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2022-23 시즌 초반에 첼시가 리그에서 부진에 빠지고, 챔스 조별리그 1차전 GNK 디나모 자그레브 원정에서 충격패를 당한 이후 전격 경질되었다. 그리고 경질의 원인이 성적 부진이 아닌 다른 요인이었다는 맷 로발 보도 이후 팬들 사이에서는 이전에 거쳐갔던 팀들과 마찬가지로 또 다시 보드진과 마찰이 생겨서 경질되었다는 것이 중론으로 굳혀졌다.

현지 보도에 따르면 “투헬 감독이 GNK 디나모 자그레브전 분석을 위해 다음 날 아침 훈련장에 출석했다. 하지만 선수들이 아무도 없었다. 첼시 수뇌부가 투헬 감독에게 전화 통화를 요청했고, 10분 간의 대화에서 경질을 통보했다.[20] 투헬은 큰 충격에 빠졌다”고 전했다. 첼시 팬들 사이에서는 설령 보드진과의 불화가 있었더라도 짧은 시간 동안 성과를 낸 투헬에게 전화로 경질을 통보한 것은 적절치 않았다는 여론이 다수이다.[21]

하지만 이적 시장에서의 행보로 인한 불화 또한 한몫을 했었다고 한다. 구단 수뇌부는 쥘 쿤데의 영입을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투헬이 쿤데를 원하지 않아서 계속 퇴짜를 놓다가 결국 여기에서도 문제가 생겨버렸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당시 투헬은 토드 볼리가 이적 시장에서 전권을 준다는 제안도 시큰둥하게 받아들이고, 이적 시장 작업에 굉장히 비협조적이었으며 통화나 문자 메시지조차도 제대로 주고받지 않는 태도를 보이며 볼리와 그 밑의 이사회 사람들의 골머리를 썩혔다고 한다. 쿤데를 놓치게 된 것 또한 투헬이 이적 시장에서 비협조적으로 나선 것이 원흉이 되었고, 즉 이 시점에서 경질은 이미 어쩌면 고려가 되었던 셈이다. 보드진과의 미팅에도 불참하고 에이전트를 대신 보냈다든가 하는 기사도 있는데, 사실이라면 전화 경질 통보의 원인을 애초에 문자 답장이 없고 미팅에도 불출석한 투헬이 제공한 셈이다.

그리고 리암 투메이의 보도에 의하면 아르만도 브로야, 카니 추쿠에메카, 빌리 길모어 등과도 사이가 껄끄러웠다고 하는데, 이를 통해 밝혀진 것에 의하면 첼시에서 다시 한 번 부각된 문제점으로는 이미 완성되어서 자신의 전술을 제대로 이행이 가능한 유형으로 쓰던 선수만 쓰는 것도 새롭게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다. 첼시 이사회는 부임 직후 50경기와 그 이후 50경기에서 경기력의 차이가 확실히 심했던 문제점을 발견했고, 이후 길모어의 이적 과정과 브로야의 거취 여부에서 볼리와 투헬의 의견 차가 상당히 갈렸던 문제가 있었다고 한다. 당시 투헬은 노골적으로 브로야를 쓰지 않겠다고 말하며 매각을 원했고, 길모어도 이를 보고 이적 요청을 하면서 첼시를 떠나기로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실제로 FA컵과 EFL컵을 제외하고 리그만 놓고 보면 투헬은 홈그로운 U-21 이하의 첼시 유스를 리그에서 기용한 시간이 0분인 첼시 구단 역사상 단 두 명의 감독이라는 새로운 기록이 확인되었다.[22] 어찌 보면 도르트문트 시절과 마찬가지로 유스 혹은 이적생 유망주 기용에서의 의견 차이도 경질의 원인 제공을 한 셈이다.

토드 볼리는 투헬의 경질 이유를 직접 밝혔다. “투헬은 분명이 재능이 있다. 첼시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고 그동안의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첼시의 비전은 협력하고 싶어하는 감독을 찾는 것이었다. 허물어야 할 벽이 많다. 옳고 그름은 없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 GNK 디나모 자그레브와의 경기 패배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한 공통된 비전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앞으로 첼시가 어떤 모습이길 바라는지에 대한 생각이 같지 않았다”고 말했다. 즉 보드진과의 불화는 사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체적으로 모든 구단에서의 공통적인 경질 사유가 바로 구단들의 이적위원회를 선호하지 않았던 것인데, 그러다 보니 도르트문트와 첼시, 파리 등에서도 영입과 본인의 전술이 따로 노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발생했기 때문에 구단들의 입장에서도 함께 가기가 어려웠을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

바이에른 뮌헨에 와서도, 이 불같은 성격과 고집은 여전했다. 1시즌도 안 돼서 팀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팀은 아예 투헬 지지파와 반 투헬파로 갈리면서, 선수단 장악을 또 못하면서, 선수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본인만의 고집과 철학을 꿋꿋이 고집을 하며, 팀에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하지도 못하고, 결국 1시즌만에 팀을 떠나기로 결정을 하며, 독일 최강팀을 순식간에 몰락시키는데 일조를 하고 말았다. 특히 분데스리가 우승은 빠짐없이 해온 뮌헨을 무관에 그치게 한 것은 21세기 들어서 트리플 러너업으로 고배를 마신 2011-12 시즌 이후 처음이다.[23] 리그 우승은 커녕 이번 23-24 시즌 뮌헨은 아예 무관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5.2. 인격적인 결함과 기행, 돌출 행동

서구는 무조건 가족, 개인을 일보다 존중해줄거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정확히 반대되는 상사 유형이다. 폭탄 테러에 대한 대응이나 바샥셰히르 전 대기심 옹호 사건 모두 선수보다 축구를 우선시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도르트문트, PSG, 첼시 등에서 보여줬듯 감독으로서 전술적 역량은 뛰어난 편이고, 선수단과의 소통 능력도 생각만큼 나쁜 편은 아니다. 하지만 본인이 "정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항상 일을 할 때는 미쳐있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다니는 만큼 결코 성격이 무난하고 정상적인 사람은 아니라는 것이 세간의 평가다. 실제로 여러 팀에서 감독직을 내려놓게 된 것에는 모두 인격적인 결함이 주요 원인으로 꼽히고 있다.

투헬은 틈만 나면 터져나오는 다혈질 성격과 할 말만큼은 반드시 다 하고 살아야 직성이 풀리는 면모 때문에 항상 보드진과의 관계가 나빴다. 또, 논란 상황에서의 대처 능력이 떨어져 선수단 장악을 잘 하다가도 예상 밖의 사건이 터지면, 대처를 전혀 하지 못하다가 삽시간에 지지를 잃는 사례가 잦다. 무엇보다 선수 개개인의 사정보다도 축구를 더욱 우선순위에 두는데, 이 때문에 젊은 세대의 선수들과 충돌하기도 쉽다.

5.2.1. 하인츠 뮐러와의 사건

"그는 독재자다. 나를 엄청나게 괴롭혔다. (중략) 내 캐비넷은 다 치워져 있었고, 아이들 사진은 뜯겨서 화장실 옆에 놓인 상자에 던져져 있었다."
"Er ist ein Diktator. Was er mit mir gemacht hat, war Mobbing hoch zehn" "Der Spind war ausgeräumt, sogar die Bilder meiner Kinder waren rausgerissen und in eine Kiste geworfen, die neben der Toilette stand." #

독일의 언론 슈투트가르트-차이퉁에 따르면, 하인츠 뮐러가 키커와의 인터뷰에서 "투헬은 독재자와 같다."고 말하며 그를 비난했다고 한다. 하인츠 뮐러가 마인츠에 있던 2013-14 시즌, 계약에 일정 경기 이상 출전하면 계약기간이 1년 연장되는 조항이 있었다. 그러자 투헬은 이 조항을 발동시키지 않기 위해 뮐러를 리저브 팀으로 내려버렸다. 이에 화가 난 뮐러가 투헬에게 따졌지만, 투헬은 오히려 다른 선수가 보는 앞에서 뮐러를 모욕했다. 이후 겨울 휴식 시간이 끝난 후 뮐러가 팀에 복귀했는데, 이미 뮐러의 라커는 깔끔하게 치워져 있었고, 아이들의 사진도 구겨진 채 쓰레기통 속에 있었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투헬이 직접 아이 사진을 박박 찢어서 버렸다는 식으로 와전되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투헬이 사진은 찢고 버렸다는 잘못된 내용이 인터넷 등지에서 널리 퍼졌는데, 이게 괴팍한 투헬의 이미지와 맞물려 첼시 선수들이 부진하면 바로 가족 사진이 갈가리 찢긴다는 밈이 흥하고 있다. 당시 오역으로 인해 널리 퍼진 잘못된 정보가 밈이 되어버린 경우다.

투헬이 사진을 직접 찢은 것은 아니지만 투헬이 하인츠 뮐러를 리저브 팀으로 내리고, 이에 대해 따지자 화를 낸 것으로 비판을 받았다.

5.2.2. 엠레 모르와의 사건

토마스 투헬은 당시 도르트문트 소속 선수 엠레 모르가 훈련에 불성실하게 참여하자 피트니스 코치에게 엠레 모르를 피치에서 네발로 기어다니도록 지시했다고 한다.

강압적인 요구에 엠레 모르가 불만을 터뜨리자, 투헬은 그에게 연신 "입 닥쳐!"라며 고함을 쳤다고 한다. 당시 엠레 모르는 아직까지 유망주 꼬리표를 달고 있던 나이의 선수였는데, 지나치게 강압적인 처사를 한 것이다. 다만 엠레 모르는 이후로도 불성실한 행적을 보이다 성장이 지체되며 미완의 유망주로 전락했다.

5.2.3.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버스 폭탄 테러 사건

2017년 4월, 도르트문트 선수단은 2016-17 시즌 챔피언스 리그 8강 AS 모나코와의 경기를 하기 위해 지그날 이두나 파크로 떠났는데 선수단이 탑승한 버스가 호텔에서 나오자마자 근처에서 IED 3개가 폭발하는 테러가 발생했다.[24] 이로 인해 마르크 바르트라와 경찰관 1명이 부상을 입는 등 선수단은 충격을 받았고 마르코 로이스가 CEO인 한스요아힘 바츠케에게 경기를 연기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바츠케는 감독과 선수들이 경기하는 것에 동의했다고 발표하는 모순되는 일이 발생한다. # 축구 저널리스트 Pit Gottschalk의 책에 따르면, 투헬은 그 경기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고, 테러 사건으로 인해 팀에 더 큰 에너지를 불어넣을 수 있을거라고 기대했다고 한다. 테러 다음날, 마르코 로이스 곤살로 카스트로가 코치의 사무실에서 눈물을 흘렸고 그들이 나가자 투헬은 같이 있던 직원에게 ''대체 이런 겁쟁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바이언을 이기란 말이야?'라고 했다고 한다. #

투헬도 그 버스에 있다가 테러를 당한 피해자 중 한 명이었다. 자기 기준으로는 이 일을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이나 다른 선수들은 그렇지 않았고, 폭탄테러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정신상의 위기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바탕으로 선수들의 정신적 유약함을 비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선수들의 타당한 고통을 헤아리지 못하고 지나치게 몰아붙였다는 점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다.

경기는 연기되지 않았고, 도르트문트는 1차전 홈에서 2-3으로 패했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사건 이후 경기를 연기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점에 대해 기자들이 묻자 UEFA가 경기 일정을 확정한데다 바로 다음 날이어서 어쩔 수 없었다고 답변하면서 자신의 선수들에게 시간을 더 줘야 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UEFA는 바츠케를 비롯한 도르트문트 수뇌부들의 결정이었다고 공개하면서 감독과 구단 수뇌부 간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고 결국 투헬이 경질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이 때문에 도르트문트 팬들도 성적과 별개로 투헬을 상당히 싫어하는 사람이 일부 있다.

5.2.4. 바샥셰히르 전 대기심 옹호 논란

2020년 12월 8일, 2020-21 시즌 바샥셰히르와의 챔피언스 리그 조별 리그 6차전 경기 중 대기심의 인종차별 발언으로 인해 바샥셰히르 측에서 경기 도중 보이콧을 해버리고, PSG 선수들이 이에 동조해 따라서 보이콧을 하자 선수들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뎀바 바의 인터뷰에 따르면 투헬이 ''별 일 아니다. 너가 직접 그 단어를 말하는 걸 들었는가? 들은 게 아니면 진정해라."는 냉정한 발언을 했다. 이 발언은 코로나로 인한 무관중 경기였던 탓에 투헬의 육성이 피치 위의 마이크에 녹음되었고 결국 사실로 밝혀졌다. 출처 링크

바샥셰히르 소속의 뎀바 바는 이러한 투헬의 발언을 비판하였고 또한 감독의 명령까지 거부하면서 몰수승을 버리고 같이 보이콧을 한 파리 선수들에게 감사하다고 전했다. 출처

다만 이는 투헬의 일 중심적 성격 때문이지 투헬이 특별히 인종차별 발언을 옹호했다고 보긴 어려우며, 투헬은 인종차별 항의를 위한 보이콧 때문에 몰수승을 포기하는 걸 막으려는 의도였다.

5.2.5. 도르트문트 전 이후 인터뷰 논란

2024년 3월 31일, 도르트문트와의 데어 클라시커에서 2:0으로 참패하여 1위 레버쿠젠과의 승점이 13점이나 벌어지게 되며 리그 우승이 사실상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투헬은 "레버쿠젠의 우승을 미리 축하한다." 라는 팀의 수장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무책임한 인터뷰를 했다. 아직 리그가 끝난 것도 아닌데 저런 헛소리를 한다는 건 팀의 사기에 극심한 악영향을 주며, 프로의식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다. 하다못해 선수들도 경기에서 크게 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경기가 끝나기 전에 이미 끝났다 생각하고 집에 멋대로 가는 짓은 절대 하지 않으며 교체아웃되어도 경기를 팀원들과 끝까지 같이 한다. 더군다나 선수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할 팀의 수장이라는 자가 그런 소리를 했다는 것이 더욱 심각하다. 가뜩이나 인내심이 바닥난 상태의 팬들의 속은 뒤집어진 수준.

6. 기록

6.1. 감독 성적

임기 시작 임기 종료 승률
FC 아우크스부르크 2군 2007년 7월 1일 2008년 6월 30일 17 8 9 50%
1. FSV 마인츠 05 2009년 8월 3일 2014년 5월 10일 72 45 66 39.34%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15년 6월 29일 2017년 5월 30일 69 20 18 64.49%
파리 생제르맹 FC 2018년 5월 15일 2020년 12월 29일 96 11 20 75.59%
첼시 FC 2021년 1월 26일 2022년 9월 7일 62 19 18 62.62%
FC 바이에른 뮌헨 2023년 3월 24일 2024년 6월 30일
통산[25] 316 103 131 57.46%

6.2. 대회 기록

6.3. 개인 수상

7. 투헬에 대한 언사

"정상은 아니다"라고 직접 자신있게 얘기를 하는 감독이예요.
구자철이 토마스 투헬 감독에 대해 한 말 #
투헬은 나를 잘 이해해 주었다고 생각되는 사람이다. 그는 나의 생활 방식이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약간 광기가 있는 사람이었다.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무언가를 생각해냈고, 경기 중간 실현시켰기 때문이다.
피에르에메릭 오바메양
정말 창의적인 감독이다. 스스로 더 나은 감독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배우는 몇 안 되는 사령탑 중 한 명이다.
펩 과르디올라

8. 여담

9.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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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C 바이에른 뮌헨 2023-24 시즌 코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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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국적 로마자 성명 한글 성명
헤드 코치 파일:독일 국기.svg Thomas Tuchel 토마스 투헬
수석 코치 파일:독일 국기.svg Arno Michels 아르노 미헬스
파일:헝가리 국기.svg Lőw Zsolt 졸트 뢰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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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키퍼 코치 파일:독일 국기.svg Michael Rechner 미하엘 레흐너
피트니스 코치 파일:독일 국기.svg Holger Broich 홀거 브로이히
재활코치 파일:독일 국기.svg Peter Schlösser 페터 슐뢰저
파일:독일 국기.svg Thomas Wilhelmi 토마스 빌헬미
팀 매니저 파일:독일 국기.svg Kathleen Krüger 캐슬린 크뤼거
파일:독일 국기.svg Bastian Wernscheid 바스티안 베른세이드
리저브 코치 파일:독일 국기.svg Holger Seitz 홀거 자이츠
아카데미 매니저 파일:독일 국기.svg Jochen Sauer 요헨 자우어
파일:튀르키예 국기.svg Halil Altıntop 하릴 알틴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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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ˈtoːmas ˈtʊxl̩/ [2] 분데스리가 공식 웹사이트 프로필 [3] 당시 FC 아우크스부르크는 4부리그 팀이었다. [4] 팀의 핵심수비수였음에도 그가 4 시즌 동안 뛴 경기가 68경기임을 생각하면 얼마나 심각한 부상이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5] 다만 도르트문트의 우카시 피슈첵, 파리의 틸로 케러 같은 수비적인 풀백은 백3의 일원으로 내려쓰고 사이드 라인을 우스망 뎀벨레, 앙헬 디 마리아 같은 우측 윙어가 담당하기도 했다. [6] 마인츠 시절 및 도르트문트 첫 시즌에는 4-4-2 다이아몬드 및 4-1-4-1 포메이션으로 빌드업 시 두 명의 센터백과 한 명 내지는 두 명의 수비형 미드필더에게 빌드업을 주문했으나 (2-1, 2-2) 도르트문트 두번째 시즌에는 라이트백인 피슈첵 혹은 긴터를 후방배치해 백3로 만들거나 아예 센터백 3명을 활용해 백3를 만들었다. 이 시점부터 백3가 더 효과적이라고 여겼는지 결국 파리와 첼시에서도 투헬의 백3 사랑은 이어졌다. [7] 애초에 2-1이나 2-2 전형의 빌드업 체계보다 후방에 3명을 두는 것이 삼각형을 만드는 데에도 더 편하고 투헬이 중시하는 후방 플레이메이커에 대한 압박 분산도 더 잘 된다. 펩이 빌드업 시에 백3 형성을 선호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도르트문트에서의 두번째 시즌인 16-17 시즌 전반기에 후방 플레이메이커인 율리안 바이글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자 고심을 많이 한 것으로 보인다. [8] 이 때 투헬의 입장에서 일시적으로 보여야하는 포메이션이 '3-3-4' 혹은 '3-4-3'이라고 한다. [9] 마인츠 시절을 제외하면 투헬 체제에서 사이드 라인은 언제나 최소한 한 명의 윙백이 점유한다. [10] 한 명은 볼이 전개되는 사이드에서 침투, 다른 한 명은 반대편에서 침투하는 방식이다. [11] 물론 파리는 어차피 우나이 에메리 급 막장 감독과 역대급 라이벌의 등장이 맞물리는 사태가 아니면 리그앙 트로피는 거의 먹고 간다고 볼 때, 챔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리그에서의 실험을 통해 안정적인 양학보다 선수들의 전술 적응력을 상승시키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반론도 있다. 투헬의 판단이 맞았는지, 그동안 8강을 못 넘던 팀이 19-20 시즌 챔피언스리그 토너먼트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아탈란타 BC 상대로 경기를 뒤집으면서 준우승까지 하였다. [12] 다만 이 네 명중에서 투헬이 유일하게 직접 관여까지 한 것은 라힘 스털링 단 한 명뿐이고, 나머지 세 명은 문자 메시지까지도 읽고 대답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으로 영입에 비협조적으로 나오면서 구단 수뇌부와 갈등을 빚는 바람에 실질적으로는 구단의 사장으로 새로 부임했던 톰 글릭이 주도했었다고 한다. [13] 과르디올라 역시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사무엘 에투처럼 그에게 반발감을 품은 선수 개개인은 존재하는 편이지만 커리어 내내 선수단 전체에 대한 통제권이나 장악력을 잃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가장 유명한 일화인 즐라탄과의 불화가 있었던 바르셀로나 시절에도 즐라탄을 제외한 나머지 선수들은 철저히 과르디올라의 지시를 따랐으며 지금까지도 그를 존경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반면 투헬은 개개인과의 불화도 문제지만 선수단 전체의 신임을 잃어버린 경우도 있었다는 점에서 과르디올라보다 문제가 심각하다. [14] 도르트문트에겐 5년 만에 처음으로 메이저 대회 우승 트로피를 선물했고, PSG에선 2년 만에 자국 대회 도합 6관왕은 물론 클럽 최초로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진출했으며 첼시에선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달성했다. [15] 물론 클롭도 공과 사는 확실히 구별하며, 특히 감독의 권위를 무시하는 선수는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16] 도르트문트 CEO 바츠케가 투헬 경질 과정에서 인터뷰를 통해 언급하였다. [17]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 카가와 신지, 우스만 뎀벨레 등의 유망한 선수를 데려왔다. [18] 여담으로 투헬은 대승을 거둔 후 인터뷰에서 2021년에 1위로 끝낼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는데, 보드진이 경질을 통보했고 이 목표는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19] 하지만 아내와는 2022년 4월부터 이혼 절차를 밟고 있다(...). [20] 실제 대화는 화상통화 형식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21] 다만 미국인들에게는 이게 일상인 것이, 미국인들의 경우 심한 경우에는 문자 메시지나 등으로 해고 통보를 하는 경우가 일상다반사이기 때문에 문화의 차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물론 그럼에도 적어도 경질 정도는 대면으로 직접 만나서 통보를 하는 식으로 예의를 갖췄어야 했다는 반응이 다수이다. 운동선수 중에서는 트레버 호프먼이 이러한 케이스로, 항목에 언급된 대로 호프먼은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와의 재계약 협상 도중 문자 메시지로 방출 통보를 받았던 적이 있다. 이후 이 문제를 피드백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사전에 언론에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려는 목적으로 후임자였던 그레이엄 포터와 결별할 때에는 훈련장에서 직접 대면으로 비밀리에 만나서 통보하고 즉각적으로 구단 성명서를 작성하는 형태로 소식의 유출을 사전 차단했다. [22] 도르트문트 시절에는 2016-17 시즌 겨울 이적 시장에 온 알렉산데르 이사크의 기용 문제를 두고 자신도 모르던 영입이라는 이유로 미하엘 초르크 단장과 마찰을 빚었고, 이것도 경질의 한 원인이 된 적이 있다. [23] 그래도 이 당시의 감독이던 유프 하인케스 감독은 이 다음 시즌에 진짜로 트레블을 달성해버렸기 때문에 비교를 할 급조차도 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오히려 각종 불명예 기록을 달성하고 우승컵을 1개도 들지 못한 채 1시즌도 못 채워서 경질된 위르겐 클린스만과 비교되는 것이 적절할 정도. [24] IS가 한창 날뛰던 시기라서 이슬람 극단주의자의 소행인 줄 알았으나 독일과 러시아 이중국적을 가진 28세 남성의 소행으로 밝혀졌다. 도르트문트의 주가가 하락하면 돈을 버는 풋옵션을 대량 매입한 뒤에 주가 하락을 노리고 테러를 저질렀다. [25] 2022년 9월 7일자 기준. [26] 또 다른 한 명은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의 형 토비아스 슈바인슈타이거다. [27] 2023년 3월에 바이에른 뮌헨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과르디올라가 이끄는 맨시티와 챔스 8강에서 맞붙게 되었다. 그러나 8강 1차전에서 과르디올라와의 전술 싸움에서 완벽하게 패배하면서 0-3으로 대패하였다. [28] 현실적으로 너무 불가능한 대상이었다. 당시 투헬은 이미 분데스에서 마인츠로 명성을 쌓기 시작하던 시절이었고 레버쿠젠과 BVB의 감독직 물망에 올랐다. [29] 헤어만 바트슈투버는 2009년 5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30] 실제로 기자들과의 컨퍼런스에서 우크라이나 침공과 구단주 로만 아브라모비치, 러시아 재벌 등이 얽힌 문제에 대해 질문을 받을 적이 있는데 중간에 딱 자르고 자신은 정치인이 아니며, 전쟁을 겪어보지 못했고 평화라는 특권을 누리고 있으니 아무 코멘트도 해 줄 수 없다. 다만 전쟁이 참혹하다는 건 이견의 여지가 없다라는 선에서 마무리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