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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31 08:58:13

에릭 칸토나

에릭 칸토나의 역임 직책
{{{#!folding [ 펼치기 · 접기 ]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주장
장피에르 파팽
(1992~1993)
에릭 칸토나
(1993~1995)
디디에 데샹
(1995~2000)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주장
스티브 브루스
(1992~1996)
에릭 칸토나
(1996~1997)
로이 킨
(1997~2005)
}}} ||
에릭 칸토나의 수상 이력
{{{#!folding [ 펼치기 · 접기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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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93 · 1996-97
파일: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로고.svg
1993-94 · 1995-96
파일:PFA_UK_logo.png
파일:FWAlogo.png
파일:옹즈도르.png
베스트팀
파일:PFA_UK_logo.png
파일:European_Sports_Media_logo.png

1993 Ballond'or
수상
로베르토 바조
2위
데니스 베르캄프
3위
에릭 칸토나
}}} ||
에릭 칸토나의 기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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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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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a08d6f> 순서 연도 이름 포지션 구단 비고
<colbgcolor=#fff,#191919> 1 <colbgcolor=#fff,#191919> 2021 <colbgcolor=#fff,#191919> 앨런 시어러
(Alan Shearer)
<colbgcolor=#fff,#191919> 공격수 <colbgcolor=#fff,#191919> 블랙번 로버스
뉴캐슬 유나이티드
<colbgcolor=#fff,#191919> PL 통산 최다 득점(260골)
2 티에리 앙리
(Thierry Henry)
공격수 아스날 PL 역대 최다 득점왕(4회)
3 에릭 칸토나
(Eric Cantona)
공격수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4 로이 킨
(Roy Keane)
미드필더 노팅엄 포레스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5 프랭크 램파드
(Frank Lampard)
미드필더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첼시
맨체스터 시티
PL 미드필더 통산 최다 득점(177골)
6 데니스 베르캄프
(Dennis Bergkamp)
공격수 아스날
7 스티븐 제라드
(Steven Gerrard)
미드필더 리버풀 PL 역대 최다 PFA 올해의 팀 선정(8회)
8 데이비드 베컴
(David Beckham)
미드필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9 2022 웨인 루니
(Wayne Rooney)
공격수 에버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0 파트리크 비에라
(Patrick Vieira)
미드필더 아스날
맨체스터 시티
11 세르히오 아구에로
(Sergio Agüero)
공격수 맨체스터 시티 PL 외국인 통산 최다 득점(183골), PL 통산 최다 해트트릭(12회), PL 이달의 선수 역대 최다 수상(7회)
12 디디에 드록바
(Didier Drogba)
공격수 첼시
13 뱅상 콩파니
(Vincent Kompany)
수비수 맨체스터 시티 수비수 최초 헌액
14 페테르 슈마이켈
(Peter Schmeichel)
골키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아스톤 빌라
맨체스터 시티
골키퍼 최초 헌액
15 폴 스콜스
(Paul Scholes)
미드필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16 이안 라이트
(Ian Wright)
공격수 아스날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17 2023 알렉스 퍼거슨
(Alex Ferguson)
감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 최초 헌액
18 아르센 벵거
(Arsene Wenger)
감독 아스날
19 리오 퍼디난드
(Rio Ferdinand)
수비수 웨스트햄 유나이티드
리즈 유나이티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퀸즈 파크 레인저스
20 페트르 체흐
(Petr Čech)
골키퍼 첼시
아스날
PL 통산 최다 클린시트(202경기)
21 토니 아담스
(Tony Adams)
수비수 아스날
22 2024 애슐리 콜
(Ashley Cole)
수비수 아스날
첼시
}}}}}}}}}}}}}}} ||
프랑스의 배우
파일:에릭 칸토나 배우 프로필.jpg
에릭 칸토나
Éric Cantona
<colbgcolor=#eeeeee,#191919> 본명 에리크 다니엘 피에르 캉토나
Éric Daniel Pierre Cantona
출생 1966년 5월 24일 ([age(1966-05-24)]세)
프로방스알프코트다쥐르 부슈뒤론주 마르세유
국적
[[프랑스|]][[틀:국기|]][[틀:국기|]]
신체 188cm, 88kg
직업 축구 선수 ( 공격수[1] / 은퇴)
축구 경영인
배우
소속 <colbgcolor=#eeeeee,#191919> 선수 AJ 오세르 (1983~1988)
FC 마르티그 (1985~1986 / 임대)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88~1991)
FC 지롱댕 드 보르도 (1989 / 임대)
몽펠리에 HSC (1989~1990 / 임대)
님 올랭피크 (1991)
리즈 유나이티드 FC (199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1992~1997)
경영 뉴욕 코스모스 (2011~2012 / 단장)
국가대표 45경기 20골 ( 프랑스 / 1987~1995)
활동 축구 선수 (1983~1997)
배우 (1995~ )

1. 개요2. 선수 경력3. 플레이 스타일4. 평가5. 은퇴 후 행보
5.1. 비치사커5.2. 배우 경력
5.2.1. 필모그래피
5.3. 기타
6. 기록
6.1. 대회 기록6.2. 개인 수상6.3. 클럽 기록6.4. 국가대표 기록
7. 여담

[clearfix]

1. 개요

"미친 사람이 이성적인 사람보다 세상을 더 많이 변화시킨다."
프랑스 축구 선수 출신 경영인, 배우. 선수 시절 포지션은 공격수.

현역 시절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5년 동안 네번의 PL 우승을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발롱도르 3위, PFA 올해의 선수, PL 도움왕 2회를 차지한 선수이자 맨유 7번의 계승자였다.

당시까지 견원지간이었던 잉글랜드-프랑스 사이에서 '영국인이 사랑한 프랑스인'이라는 칭호까지 받았으며,[2] 맨유팬들은 그를 일컬어 '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라고 부른다.[3][4]

2. 선수 경력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에릭 칸토나/선수 경력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3. 플레이 스타일



처음 보는 사람들은, 척 보기에 둔중한 몸집과 떡대로 인해 타겟형 스트라이커가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많이 한다. 그러나 칸토나는 놀라울 정도로 훌륭한 테크니션이었고 그 플레이 스타일은 센터 포워드보다는 오히려 세컨드 스트라이커에 더 가까웠다. 웨인 루니와 비슷하다면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칸토나의 플레이 스타일은 쿵푸 킥 사건 이전과 이후로 구분이 되는데, 쿵푸 킥 사건 이전의 칸토나는 190cm에 가까운 신장과 매우 우수한 피지컬에 결코 느리지 않은 스피드에 당대 최고 수준의 볼 컨트롤과 테크닉을 무기로 전방에 위치해서 전방에 투입된 볼 키핑을 하면서 동료들의 전방 침투 타이밍을 벌고, 침투 시 적절하게 패스를 넣은 뒤 다시 상대 진영에 침투하여 득점 및 파이널 패스를 노리는, 플레이메이커형 포워드였다. 지금의 폴스 나인과 유사한 점이 있는 플레이를 했으며, 차이점이 있다면 전방에서 포스트플레이를 매우 잘했고, 헤더로 인한 득점도 상당수였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쿵푸 킥 사건 이후 복귀한 이후로는 전방에 앤디 콜, 올레 군나르 솔샤르같은 득점만을 주로 노리는 선수들과 호흡을 맞추면서 사실상의 공격형 미드필더에 가까운 롤을 맡았다. 실제로 상당히 내려와서 플레이했으며, 득점도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줄었다. 칸토나가 붉은 유니폼을 입고 찍은 스탯이 185경기 82골 62어시스트였음을 생각해보면 득점은 물론이고 어시스트까지 완벽한 선수였다. 이렇듯 전통적인 최전방 공격수와 플레이메이커 포지션에서의 플레이를 모두 소화할 수 있었던 선수였다. 물론 명성에 비해 동시대 비슷한 클래스의 스트라이커들에 골 수가 밀려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발롱도르 3위를 할 정도였던 이유는 그의 해결사 능력 덕분이다.

칸토나가 맨유에 입단한 이후 100경기에서 84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했는데, 이후 85경기에서 60개의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맨유에 머무는 동안 계속 꾸준히 활약한 것 역시 고평가 받는 부분이다.

리즈 유나이티드 첫 시즌에 리즈를 17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한 것[5]과 맨유에서의 리그 5시즌 중 4시즌을 우승시킨 것이 그 증거. 그 중 두번이 더블이고, 챔피언스리그 4강도 올려보냈다. 당시 칸토나는 3골을 넣으며 챔피언스리그 팀 내 최다 득점을 기록했고, 포르투와의 8강전 홈경기에서는 1골 포함 3골에 관여하며 4:0 승리를 이끌며 4강 진출에 1등공신으로 활약했다.[6] 당시 긱스를 제외한 퍼기의 아이들이 모두 불완전한 상태인 걸 감안하면 더욱 대단하다. 경기력에서도 해결사 기질이 빛을 발했다. 대표적인 것이 쿵푸 킥 사건 이후 복귀전인 리버풀전 동점골과 FA컵 리버풀전 결승골 등 더비나 빅매치에서의 중요한 골을 넣었다. 당시 맨유팬들은 결승골이나 역전골이 터지면 누군지 구태여 묻지도 않았다고 한다. "당연히 칸토나일 테니까"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PL 출범과 동시에 호흡을 맞춘 라이언 긱스와 완벽한 짝짜꿍을 선보였으며, 긱스가 왼쪽을 초토화시킨 후 칸토나에게 어떻게든 공을 넘겨주면 칸토나는 다시 최전방을 초토화시키고 골을 때려넣었다. 그 외의 능력으론 칩슛도 장난아니게 잘 찼다. 그의 인생골이자 PL 역대 최고의 골 중 하나로 사각지대로 빨려들어가는 유명한 칩슛골이 있다.

4. 평가

은퇴한 후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도 칸토나는 맨유 역대 최고의 선수이자 최고의 주장 반열에 들고 있으며, 그 짧은 커리어 속에서도 빛을 발한 건 맨유에서의 5년 남짓한 시간이었음에도 그는 너무도 당연하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로 손꼽히고 있다. 2006년 당시 감독으로도, 코치로도 아닌 " 선수"로서 복귀를 바라는 클럽 역대 최고의 선수를 뽑는 투표(유나이티드 매거진 실시)에서 보란듯이 1위에 뽑히는 기염을 토하는 것을 보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이 에릭 칸토나라는 선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얼마나 그리워하는지 여실히 드러나는 모습이라 할 수 있겠다. 2011년 유나이티드 매거진에 게재된 역대 최고 선수 투표에서도 라이언 긱스에 이은 2위에 올랐다.[7]

게다가 단순히 실력과 성깔만 있는게 아니고 나름의 축구관이 확고한 선수였으며 그만의 카리스마가 있었다. 이 때문에 천하의 퍼거슨 감독도 칸토나가 자기 식으로 훈련하면서 행동하는 것을 어느 정도 묵인해주었고 둘이서 축구에 관해 토론을 할 정도였다. 어쨌든 둘은 서로를 아주 높이 평가해서 서로를 높이 띄워주는 인터뷰를 많이 한다. 칸토나 왈, "퍼거슨은 일종의 천재."[8]

5. 은퇴 후 행보

5.1. 비치사커

파일:eric cantona beach soccer.jpg
축구에서 은퇴한 1997년 이후에는 비치사커에 입문하여 프랑스 대표팀의 감독 겸 주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선수로는 2005년까지 플레이하여 FIFA 비치사커 월드컵 첫 대회에서 프랑스를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이후에도 2011년까지 감독으로 팀을 이끌었다.

5.2. 배우 경력

파일:000a711a.jpg
2014년작 서부 영화, 웨스턴 리벤지에서의 모습[9]
1995년 서포터 쿵푸킥 사건으로 인해 9개월 출장 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아 경기에 출전할 수 없게 된 칸토나는 Happiness Is in the Field(행복은 초원에)에서 라이오넬 역으로 출연하게 되면서 영화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1998년 축구 선수를 은퇴한 뒤 영화 배우로 완전히 전업하여 영화계에서 꾸준히 활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고, 30년동안 크고 작은 영화에 주, 조연으로 출연하면서 현시점에서는 어느덧 프랑스 영화계의 중견 배우가 되었다. 또한 배우로 활동하는 동안 거의 매년 영화를 찍는 다작 배우이기도 하다.

5.2.1. 필모그래피

<rowcolor=#fff,#191919> 공개 연도 타이틀 배역명 비고
1995 행복은 초원에 라이오넬
일레븐 맨 어겐스트 일레븐 축구 선수 [10]
1998 엘리자베스 무슈 드 프와
무키 안토인 카펠라
1999 와인이 흐르는 강 조 사디
2001 하이 라이프 페탕크 플레이어
2003 루트르망제 셀레나 교육감
마비 코메디언
2005 잇츠 아워 라이프 피에르
우네 벨 히스토리
2006 Lisa et le pilote d'avion 판도
2007 두번째 숨결 알반
2008 잭 세이즈 바 안의 남성
블랙 버터 플라이 [11]
프렌치 필름 티에리 그리망디
2009 룩킹 포 에릭 본인 [12]
라 리스트 마이클 롬바르디 [13]
2010 투게더 이즈 투 머치 제라드
2011 스위치 데미안 포르깃
위험한 공범 마누엘 마카로프
에트레인떼 에릭
2012 우리동네 포르노스타 축구 감독
힙 무브스 미셸
풋볼 레벨스 본인
2013 유 앤 더 나잇 르탈롱
클래스 오브 92 본인
2014 웨스턴 리벤지 코르시칸
2015 더 매드 킹스 자키 시시네
2016 마리 앤 더 미스핏츠 앙투안
2017 앙카 브라질리자낙
2018 율리시스 앤 모나 율리시스
2019 더 트레블러 토마스 바레스키
르 보야쥬 시즌 1 톰 바레스키
2020 신은 나에게 직장을 주어야 했다 알랭 들랑브르 [14]
2021 알렉스 퍼거슨: 좌절은 없다 본인
더 유나이티드 웨이 본인 [15]
2022 르 콜로세 오 피에 다르질 세바스티앙
2023 AKA 빅토르 파스토레
베컴 본인 [16]

5.3. 기타

에릭 칸토나는 축구 선수에서 은퇴한 후 비치사커 선수와 지도자로 이후에는 전업 배우로 활동하면서 더 이상 축구계에서 일을 하지 않고 있다가 미국 NASL 뉴욕 코스모스의 단장직에 취임해 2012년까지 축구 행정가로 활동했고 지금은 다시 축구계에서 손을 뗐다.

한국 시간 기준, 2021년 11월 25일 오후 10시 쯤에 갑자기 자신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새로운 감독이 될 것이고 새로운 코치진을 조만간 소개할 것이라고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발표했으나 일종의 장난이었고 실제로는 에릭 텐하흐가 선임되었다.

6. 기록

6.1. 대회 기록

6.2. 개인 수상

6.3. 클럽 기록

<rowcolor=#ffe500> 시즌 클럽 리그 국내 컵[18] 대륙 대회 기타 대회 총계
<rowcolor=#fff>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경기 득점 도움
1983-84 오세르 디비지옹 1 2 0 0 - - - - - - - - - 2 0 0
1984-85 5 2 0 0 0 0 0 0 0 - - - 5 2 0
1985-86 마르티그 디비지옹 2 15 4 0 0 0 0 - - - - - - 15 4 0
오세르 디비지옹 1 7 0 0 0 0 0 1 0 - - - - 8 0 0
1986-87 36 13 0 4 4 0 - - - - - - 40 17 0
1987-88 32 8 0 5 1 0 2 1 - - - - 39 10 0
1988-89 마르세유 22 5 1 0 0 0 - - - - - - 22 5 1
보르도 11 6 0 1 0 0 0 0 0 - - - 12 6 0
1989-90 몽펠리에 33 10 0 6 4 0 - - - - - - 39 14 0
1990-91 마르세유 18 8 2 0 0 0 3 1 0 - - - 21 9 2
1991-92 16 2 0 0 0 0 - - - - - - 12 6 0
리즈 디비전 1 15 3 1 0 0 0 - - - - - - 15 3 1
1992-93 프리미어 리그 13 6 4 0 0 0 5 2 0 1 3 0 20 11 4
맨유 22 9 11 1 0 0 0 0 0 - - - 23 9 11
1993-94 34 18 12 5 6 0 4 2 0 1 0 1 49 25 13
1994-95 21 12 5 1 1 0 2 0 2 1 1 1 25 14 8
1995-96 30 14 11 8 5 3 0 0 0 - - - 38 19 14
1996-97 36 11 12 3 0 1 10 3 2 1 1 1 50 15 16
14시즌 통산 - - - - - - - - - - - - - - -

6.4. 국가대표 기록

<rowcolor=#1D439B> 소속 대표팀 연도 경기 득점
프랑스 1987 3 1
1988 2 0
1989 4 3
1990 7 6
1991 4 2
1992 9 2
1993 7 5
1994 8 1
1995 1 0
<rowcolor=#000> 통산 45 20

7. 여담


파일:골닷컴 선정 시대별 공격수 5인.jpg
* 골닷컴에서 시대별 최고의 공격수 5인을 선정했는데, 1990년대 공격수들 중 5위에 이름을 올렸다.


[1] 중앙 공격수, 세컨드 스트라이커 [2] 이는 후에 다비드 지놀라, 티에리 앙리가 계승한다. 감독도 있다. [3] 이후 올드 트래포드의 왕이라는 칭호를 얻은 선수는 뤼트 판니스텔로이 웨인 루니로 이어진다. [4] 칸토나는 은퇴한 후로도 현재까지도 맨유 잉글랜드 축구 국가대표팀를 응원하고 있다. [5] PL까지 통틀어 마지막 리그 우승이다. 다만 맨유 시절에 비해 기여도는 많이 떨어지는 편이다. [6] 2010~20년대 축구를 본 세대들은 챔스 우승도 아니고 챔스 4강에 간걸 왜 이렇게 찬양하는가 생각할수도 있다. 이때 챔스 4강 진출이 왜 중요한 것이냐면, 90년대 중반 PL은 헤이젤 참사로 받은 징계의 여파가 사라지지 않은 상태로 출범해서 모든 PL 팀들의 유럽대항전 성적이 낮았다. 그런 상황에서 맨유가, 나아가 PL이 챔스에서 재기하는데의 큰 역할을 한 것. 헤이젤 참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1985년 사건 이후 PL은 말그대로 유럽 내에서 나락까지 추락했었다. 사건의 중심인 리버풀은 7년, 그 외 PL 클럽들도 5년간 UEFA 대회 출전권을 박탈당했기에 91-92 시즌에 겨우 복귀하였고, 맨유가 4강에 진출한건 그로부터 5년 뒤인 96-97 시즌이다. 그 사이 출전한 아스날, 리즈 등은 현대로 치면 16강에서 탈락했고 맨유 역시도 2년 연속 16강에 그치며 잉글랜드 리그들의 경쟁력에 대한 말이 많이 나왔다. 그럼에도 맨유는 칸토나를 위시로하며 결국 자신들의 부진을 스스로 극복해내 PL의 위상을 회복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이후에도 4강, 8강에 진출하며 위상을 유지했고 결국 98-99 트레블로 완벽하게 복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기에 칸토나와 맨유가 챔피언스 리그 4강에 진출한 것이 이후 PL의 위상을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받는 것이다. [7] 일반적으로 맨유의 역사를 대표하는 선수로 인식되는 바비 찰튼(동 투표에서 4위)이나 라이언 긱스가 맨유에 평생을 바친 플레이어임을 고려하면 그와 함께 거론되는 칸토나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짧지만 얼마나 강한 임팩트를 남겼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맨유 역대 최고의 주장은 최장기간 재임한 브라이언 롭슨 쪽을 좀 더 쳐준다. [8] 퍼거슨이 아팠던 당시 인터뷰에서는 "지금은 퍼기 타임, 언젠가 꼭 일어나실 거라 믿는다."라며 쾌유를 빌기도 하였다. [9] 오른쪽은 존 역의 매즈 미켈슨. [10] TV 영화 [11] TV 영화 [12] 제작도 맡았다. [13] TV 영화 [14] 넷플릭스 드라마 [15] 각본도 맡았다. [16]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인터뷰로 참여. [17] 둘 다 선수 겸 감독으로 우승했다. [18] FA컵, 리그컵 [19] 1992년 8월 25일, 리즈 유나이티드 vs 토트넘 홋스퍼. 최종 점수 5-0 [20] 세 번째 항목에 기술된 두번째 동영상 마지막 장면 참조. 매번 그랬던 건 아니고 FA컵 결승골을 리버풀 상대로 성공시켰을 때나 중요한 경기에서 극적인 골을 성공시켰을 때는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그냥 기뻐날뛰는 세레모니를 했다. [21] 다만, 로이 킨의 자서전에 쓰인 스티브 브루스의 15,000 파운드짜리 수표와 관련 된 일화에서는 어떠한 결과가 나올 지 모른 채 내기에 참여한 스콜스와 니키 버트의 용기를 칭찬했다. 그리고 본인이 내기에서 승리해 받은 12,000파운드 짜리 수표를 집에서 두 장으로 나눠 스콜스와 버트의 이름을 적고 그 둘에게 준 것으로 보아 강한 성격만큼이나 선수들에게 감동을 주는 법 또한 잘 알고 있던 선수였던 걸로 보인다. 한 팬이 기억하기로는 칸토나와 로이 킨 모두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유명하지만 로이 킨은 단순하게 다혈질스러운 성격이었다면 칸토나는 다혈질 적이지만 사람의 심리 상태또한 잘 파악하고 잘 이용할 줄 아는 영리한 사람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22] 참고로 이 팀의 명예 회장은 구 코스모스의 스타 플레이어였던 펠레. 구단 관계자들을 축구계의 전설들로 하나하나 채워가며 팀 리빌딩을 시도했으나, 칸토나에게도 실질적인 권한은 주어지지 않아 코스모스가 첫 경기를 치르기도 전에 클럽을 떠났다. [23] 데이비드 베컴도 자신이 칸토나에게 자주 맞았었다고 밝혔다. [24] 맨유 맨시티 서로가 지역 라이벌이다. [25] 이게 어떤 거냐 하면 화려한 클럽 경력 대비 월드컵 경력이 1회에 불과한 차범근보다도 훨씬 심한 것이다. 물론 차범근 역시 월드컵 무대에 나설때는 이미 노장이었기에 팀의 탈락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지만, 그래도 본선에 진출이나마 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