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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5 19:14:40

솔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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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

<colbgcolor=#7A7A7A><colcolor=#fff> 솔론
Sólōn | Σόλων | Solon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olon_bas-relief_in_the_U.S._House_of_Representatives_chamber.jpg
출생 기원전 638년경
아테나이
사망 기원전 558년경
키프로스 (추정)
직업 상인, 시인, 정치가

1. 개요2. 소개3. 솔론 당시의 시대적 배경4. 개혁 이전 솔론의 활동5. 솔론의 개혁6. 솔론의 여행과 귀국, 그리고 망명7. 크로이소스와의 일화8. 사망에 관련된 일화9. 평가

[clearfix]

1. 개요

솔론의 육신은 이국땅에서 퀴프로스의 불이 없애 버렸지만
그 뼈는 살라미스로 오게 되어 그 재에서 곡식이 생겨나게 되고,
그러나 〔법을 기록한〕회전판이 그의 영혼을 곧장 하늘로 끌어올리고,
그가 제정한 훌륭한 법은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짐이니까.
-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 지음, 김주일, 김인곤, 김재홍, 이정호 옮김, 『유명한 철학자들의 생애와 사상 1』, 파주, 나남, 2021, p.81.)
고전기 그리스 아테네의 시인이자 정치가.

세계사에 관심이 있거나 세계사를 선택과목으로 고른 사람들은 솔론의 개혁이나 금권정치로 인해 알고 있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초를 닦은 사람으로 평가된다. 물론 솔론 시대에는 민주주의란 용어가 없었지만,[1] 그 기초적인 개념 정도는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소개

솔론은 엑세케스티데스라는 인물의 아들로 추정되고 있는데, 그는 아테네의 마지막 왕 코드로스왕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솔론은 플라톤과 같은 집안 사람으로, 플라톤은 모계쪽으로 그 동생의 후손이라고 한다. 플라톤은 아틀란티스 전설에 대해서 솔론이 이집트 신관들과 대화한 내용이 집안에 전승되었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살라미스 출신이라는 설이 있으나, 대체로 신뢰되는 설은 아니다.

나중에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무력화시키고 참주에 등극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와 그는 이종사촌지간에 동성애 관계였다는 설도 있는데, 이건 의외로 그럴듯하게 여겨지고 있다. 특히 애인이었다는 쪽이.[2]

시인이기도 한데, 솔론의 시들을 접한 플루타르코스는 처음에는 솔론이 취미 차원에서 시작활동을 시작하였다가, 나중에는 윤리적 목적이나 정치적 의도를 갖고 시를 지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당시에는 웬만한 저술은 대체로 운문으로 전승되거나 운문으로 저술되었기 때문에,[3] 그가 시인이었다는 것은 단순히 예술가라는 의미가 아니라, 상당히 수준있는 지식인으로, 주요 저술들을 외우고 다닐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저술을 만들 수도 있는 능력자였다는 소리가 된다.

재산이 얼마나 있었는지 좀 논란이 있는데, 부자여서 사치 좀 부렸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입에 풀칠할 정도로 가난했다는 주장이 병존한다. 어쨌든 적어도 중산층 정도는 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나중에 그가 총액이 5~15탈란트에 해당하는 부채를 사적으로 탕감해주었다는 전승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버지 대까지는 부자였다가 아버지가 이 사람 저 사람 다 도와주는 바람에 망해버렸다는 것이 일반적인 학설이기에, 이 부채가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것일 수도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가 전쟁에 출전하거나 지휘한 적도 있는데다가,[4] 빈민파로 상정되는 산악파[5]의 일원으로 분류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어느 정도 재산이 있는 유산계급이었음을 반증한다.

그가 상인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의 상업활동이 단순히 생계를 위해서였는지, 아니면 다양한 경험을 쌓기 위해서였는지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당시 지식인이 연구 활동을 위해 여행길에 나서거나 상업활동에 종사하는 것은 드물지 않은 일이었고, 또한 생계를 갖는 것 자체도 수치스러운 일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어쨌든 상인이라는 직업은 이방의 다양한 풍습을 경험하고 외국의 지도층과 유대를 쌓고 경우에 따라서는 다양한 실무 경험들을 쌓는 계기였기에, 학자들은 나중에 그가 정치활동을 함에 있어서 상인 시절의 경력이 도움이 되었으리라고 추측하고 있다.

솔론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헤로도토스의 《역사》와 플루타르코스의 《 영웅전》인데, 그나마도 솔론이 죽은 뒤 100년 정도 뒤에 기록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냉철하고 비판적인 역사가였던 이들조차도 솔론에 대해서는 그 당시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지던 카더라 통신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 이후의 역사가들도 마찬가지였다.

생몰연대의 경우, 대체적으로 위의 추정치가 많이 사용되는데, 사실 저 수치는 솔론이 사망한 것으로 여겨지는 기원전 558년에 솔론이 80세 나이로 사망했다는 카더라 통신을 반영하여 산정된 것이다. 그나마 사망연도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에 등극한 때로부터 2년을 넘기지 못했더라는 카더라 통신에 기반한 수치이다. 역사학자들조차도 저기에 대해선 별 수 없기 때문에 대부분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있다.

솔론은 7현자의 멤버로, 그 중에서도 고정적으로 뽑히는 4사람[6] 중 한명이다.

솔론은 최소한 탈레스와도 교분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승되는 탈레스의 서신에는 탈레스가 솔론과 공동연구를 희망하고 있는 것으로 나온다. 입법가 시절 스키타이의 현자 아나카르시스와 교분이 있었다는 전승도 있다. 그 이외에도 말년에 솔론이 참주정을 피해 망명할 때 7현자의 다른 멤버들이 앞 다투어 솔론을 초대하는 편지가 남아있다.

3. 솔론 당시의 시대적 배경

솔론 당시 아테네는 총체적 난국에 시달리고 있었다.

애당초 아티카 일대는 농경지와 수자원의 만성적인 부족에 시달렸으며, 그나마 남은 농경지는 일부 지주에게 집중화되는 경향이 있었다. 따라서 아테네는 만성적인 식량부족과 심각한 경제양극화를 겪는다. 소작농들이 소출의 1/6만 갖고 나머지는 모두 지주에게 갖다 바치는 상황이었고,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어 토지를 갖지 못한 자들은 날품팔이[7]로 연명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은 많은 인구의 이동을 초래하였고, 아티카 일대는 외부인구의 유입으로 인해 인구가 급속도로 증가한다.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빈민층은 크게 증가하고, 그들의 상황은 나날이 악화되어 토지는 물론이고 심지어 가족이나 자신의 신체를 담보로 대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에게 채무를 갚을 경제력은 없었고, 결과적으로 노예가 되거나 도주한다. 그 결과 아테네는 항상 빈민들로 구성된 산악파와 귀족 지주들의 평야파, 해안파가 대립하게 된다.

여기에 더하여 정치적으로는 킬론 사건으로 인해 킬론의 잔당과 메가클레스가 갈등을 빚고 있었다.

킬론 사건은 기원전 632년 올림피아 제전에서 우승한 킬론이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하고 참주에 등극하려다가 실패한 뒤 메가클레스 일파에게 척살당한 일이다. 이 과정에서 메가클레스 일파는 무리수를 두다가 중대한 신성모독죄를 범했는데, 그들은 아테나 신전에 피신해 있었던 킬론 일파에게 복수의 여신들 신전 앞에서 재판받으라고 설득해놓고는 킬론 일당이 아테나 신전에서 복수의 여신 신전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척살해버렸다. 이는 아테나 여신의 비호와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의 권한을 무시한 일로 여겨졌다.

그 결과 킬론의 잔당들은 메가클레스와 그의 일파를 "저주받은 자들"이라고 비난했으며, 이는 중대한 사회적 갈등의 요소로 남아있었다.

이처럼 아테네는 농업위기로 인한 경제기반의 붕괴와 사회분열로 인해 내적으로도 외적으로도 위기에 처해 있었다.

아테네도 나름대로 부족한 농경지를 확보해보고자 살라미스의 경작지를 노렸다. 하지만 경제양극화는 충분한 병력을 확보하기 어렵게 만들었고, 정치적 분열은 그나마 모자란 역량마저 외부세력과의 전쟁에서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살라미스 섬의 주요 항구인 니사이아 항이 함락되자, 아테네는 살라미스의 주도권을 상실하였다.

이처럼 메가라 같은 3류 도시와도 경쟁에서 패배하자, 아테네는 사회적으로 심각한 패배감과 무력감에 휩싸인다. 어느 정도였냐면, 살라미스에 대한 아테네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법안이 통과되었을 정도로.

4. 개혁 이전 솔론의 활동

솔론은 이 상황에서 정계 주요인사로 부각되었다. 그 계기는 살라미스를 둘러싼 메가라와의 항쟁으로, 이 전쟁에서 솔론은 주도적 역할을 한다.

멀쩡한 정신과 멀쩡한 방식으로 살라미스 분쟁의 재개를 주장하면 다짜고짜 사형당할 수도 있어서인지, 솔론은 정신병에 걸린 척 하고 그 길이가 100행에 달한다는 시를 낭송하여 대중들을 선동한 뒤, 대중의 지지를 힘입어 전쟁을 재개한다. 일설에 따르면 이 당시부터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을 지지하며 대중들의 지지를 결집한 뒤 솔론을 보좌했다고 한다.

솔론은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다. 방식 자체가 어떤 것이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아마도 별동대를 이용한 후방급습일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솔론이 거둔 승리로도 살라미스의 영유권은 확고하지 않아서, 영유권 분쟁은 스파르타의 중재를 받아 협상에 들어간다. 이 협상에서 아테네의 영유권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는 문헌학적 근거와 고고학적 근거를 동원한다.

먼저 문헌학적 근거로 그는 호메로스 일리아스를 인용한다. 그 내용은 일리아스의 사열식 장면 묘사에서 살라미스의 왕 아이아스[8]가 아테네 함선 옆에 진영을 구축했다는 것이었다.[9] 어쨌든 그는 호메로스 전문가로 통했기 때문에, 메가라에서는 딱히 반론을 제기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고고학적 근거로 솔론이 들고 나온 근거는 살라미스 섬 선주민들의 매장관습과 아티카 일대의 매장관습이 유사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메가라 일대의 관습이 시체의 얼굴을 서쪽을 향하여 매장하는 것인 반면, 살라미스와 아티카의 매장관습은 시체의 얼굴을 동쪽을 향하게 하여 매장한다고 주장했다. 메가라도 여기에는 반론을 제기하여, 아테네는 개인별로 따로 매장하지만 메가라와 살라미스는 일족끼리 같이 매장하는 관습이 있다고 반론한다.

어쨌든 솔론은 "살라미스는 이오네스 족의 땅"이라는 신탁의 지지도 얻어내는데 성공한다.[10] 이후 살라미스 영유권 분쟁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마무리 지을 때까지 질질 끌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아테네가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어쨌든 살라미스 영유권 분쟁에서 아테네의 승기를 잡아낸 일로 솔론은 아테네 주요 명사가 되었다.

시기상의 순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도 그 다음으로 킬론 사건의 사후처리를 중재한 것으로 보인다.[11] 킬론 사건으로 인한 분쟁은 기원전 600년 솔론의 중재로 인해 종식된다. 솔론은 공식 재판을 열 것을 제안하였으며, 그 결과 메가클레스 일파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이후 일련의 개혁과 동시에 진행되었는지도 모르나, 일단 이 이후 종교개혁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의 아테네 종교문화는 다소 폭력적이거나 폭주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솔론은 이를 파이스토스[12]의 에피니데스의 협조로 종교제도를 재정비했다.

이후 직접 군을 통솔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으나 솔론은 BC595년 델포이의 자주권을 침해하는 키르라의 행위를 비난하여, 이에 대항하여 폴리스들, 특히 암피크티오니아 동맹의 공동대응을 이끌어낸다. 폴리스들은 솔론의 요청에 따라 연합군을 구성하여 키르라를 정벌하고 델포이의 독립을 유지하였다.[13]

5. 솔론의 개혁

지금까지 솔론은 다 망해가는 전세를 뒤집어버린 전쟁영웅에, 30년을 질질 끌어온 국내 분쟁을 종식시키고, 외교적 영향력마저 과시하였다. 그런 솔론이 국내 모든 계층에게 지지를 받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이 원했든 원치 않았든 솔론은 이미 국내 가장 유능하고 영향력 있는 정치인이 되어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아테네의 모든 사람들이 솔론이라면 당시 사회적 문제의 배경이자 핵심이었던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정치제도를 혁신해줄 거라 기대하게 된 건 당연한 현상이었다. 이제 솔론은 가계부채 해소와 토지의 편중현상의 해결, 그리고 정치제도의 혁신을 요구받게 되었다.

당시 모든 계층은 솔론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결해줄 것을 기대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솔론의 출신과 직업, 언행은 당대 모든 세력이 "솔론만큼은 우리 편"이라고 생각할 만했기 때문이다. 지주 및 귀족계층에게 솔론은 아테네 최후의 왕 코드로스 왕가의 후예였고, 신흥 상인계층에게는 자신들과 같은 동업자였다. 그런가 하면 빈민층에게 그는 다른 귀족이나 지주, 상인들처럼 자신들을 착취하거나 사기 치지 않는 정직한 사업가에, 빈민층의 참상에 대한 공분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양심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다.

따라서 당연하다는 듯이 솔론은 기원전 594년 집정관(아르콘)에 선출되었다. 그가 집정관에 마지못해 취임했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든 그는 취임하면서 평등은 분쟁을 낳지 않는다는 취지의 말을 했고, 그 결과 부유층과 빈민층 모두가 그를 지지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부유층은 자질과 능력에 기반 한 평등을, 빈민층은 수와 양에 기반 한 평등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쨌든 솔론은 모든 계층으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아르콘에 취임했고, 그 결과 그의 아르콘 취임 시 참주에 등극할 것을 제의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명백한 거부의사를 표한다.

유명한 솔론의 개혁이 솔론의 아르콘 취임 이후의 일인지, 아니면 이미 취임 전부터 어느 정도 시동은 걸리고 있었는지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14] 어쨌든 그가 아르콘에 취임하면서 그가 본격적인 개혁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솔론이 추진한 개혁이 정확히 어떤 내용들로 구성되어있었는지는 확실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솔론 이후의 아테네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정책이 솔론이 세운 제도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믿었기에 별의 별 법안의 성과를 다 솔론의 업적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확실하게 솔론의 것이라고 볼 만한 정책을 뽑아보자면, '무거운 짐 덜어주기(세이사크테이아)'라는 이름으로 시행된 부채탕감정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15] 솔론은 당시 아테네에 현존하는 모든 부채를 탕감하고, 이후 인신을 담보로 한 대출을 금지시켰다. 부채의 대상에는 당시 담보로 압류당한 농경지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내외에 부채로 인해 노예 신분으로 추락한 시민들을 모조리 해방시켰다.

여기에는 이설이 있는데, 플루타르코스가 소개하는 가설에 따르면 솔론의 "무거운 짐 덜어주기"는 통화개혁을 통해 의도적으로 통화가치 하락을 유도하여 빈민층이 실물로 부채를 갚기 편하게 만든 것이라는 설이다. 그러나 솔론이 국내 모든 부채를 탕감한 것은 사실로 보이므로 "무거운 짐 덜어주기" 자체가 통화개혁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통설이지만, 어쩌면 이 정책 역시 병행되었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일단 솔론의 "무거운 짐 덜어주기"정책은 시행 되긴 했지만 모든 진영의 반발을 산다. 나중에 플루타르코스는 폭동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솔론의 유능함 덕택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일단 지주 및 귀족계층은 자신들의 채권이 사라져서 불만이었다. 게다가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솔론의 친구들이 이 정책을 이용해서 사기를 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솔론 본인이 개인적으로 총액만 최소 5탈란트에서 최대 15탈란트로 추정되는 막대한 양의 부채를 탕감해주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어느 정도의 반발은 수그러들었다.

다른 한 편으로 빈민층은 토지재분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솔론의 정책은 담보로 압류당한 토지를 돌려주었을 뿐, 스파르타처럼 전면적인 토지 재분배를 시행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빈민층은 아직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할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빈민층은 다시 갚을 수 없는 돈을 빌리기 시작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따라서 솔론은 토지를 재분배하던가, 아니면 다른 방책을 고안해야 했다.

이 문제에 대한 솔론의 해결책은 전반적인 산업구조 전체의 변혁이었다.

일단 솔론은 농업 생산성을 증진시키기 위한 법적 규제들을 제정한다.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당시 아티카 일대는 토양이 척박하여 농경보다는 목축이 어울릴 정도에, 만성적인 수자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솔론은 올리브를 비롯한 작물들의 재배거리에 대한 규제들을 시행하여 농경지의 피로도를 관리하고, 우물의 설치 및 활용에 대한 관련규정들을 만들어 부족한 수자원의 효율을 한계치까지 끌어올리려고 한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아티카에 유입된 다수의 인구를 먹여 살릴 식량을 생산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그러자 솔론은 부족한 식량은 전량 해외 수입에 의존하기로 한다. 그러나 무역상들은 영리업자이지 자선가가 아니기 때문에 구매력 없는 빈민층을 위해 식량을 수입할 리 없다는 것은 솔론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솔론은 올리브 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한다.

우선 솔론은 올리브 외의 농산품 수출 규제하여 부족한 식량의 해외유출을 방지한다. 결국 잉여농산물은 팔리든 안 팔리든 어떤 식으로든 국내에서 소비해야만 했기에, 지주들이 수익을 얻기 위해 주요 작물을 올리브로 전환해야만 했다. 그런데 당시 올리브는 보통 올리브유로 가공하여 판매되었다. 따라서 아티카의 주력 산업이 올리브 재배가 되자, 아테네에는 올리브에서 기름을 짜는 인부를 비롯하여, 거기에 쓰이는 기계를 만드는 기술공, 올리브유를 담는 도기를 만드는 도공 등의 수요가 급증한다. 솔론은 모든 시민은 자신의 자식들에게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가르치도록 하여 빈민층이 이러한 산업에 종사하여 얻은 수입으로 생계를 유지하게끔 한다. 그 결과 지중해 세계에서 상당히 후진적이었던 아테네 도자기 수준은 비약적 올라갔다. 일설에 의하면 아티카 인구의 1/4가량이 도자기 산업에 종사하였다고 하며, 아테네의 도자기 또한 아테네의 주력 수출상품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솔론은 이민에 관련한 규정을 정해서, 자국에서 영구추방된 자나 가족과 함께 생업을 하러 오는 경우에만 한정하여 이주를 허용한다.

아테네의 산업구조를 뜯어고친 솔론은 출신이 아닌 경제적 수준에 따라 정부기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의 차등을 부여한다. 이러한 솔론의 정치제도 개혁은 후세에 금권정치라고 불린다. 각각의 계층의 이름과 기준은 다음과 같다.

펜타코시오메딤노이 - 500메딤노스 이상
힙파다텔루테스(기병 복무 가능자) - 300메딤노스 이상
제우기타이(중장보병 복무 가능자) - 200메딤노스 이상
테테스(날품팔이) - 200메딤노스 이하

이 중에서도 최하위계층인 테테스도 민회에는 참여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정책을 입안하거나 제안할 자격은 없고, 배심원으로 활동할 수 있는 것이 한계였다.

민회에 제출되는 안건은 아티카 일대에 거주하는 4개 부족에서 100명씩 선발된 위원회에서 검토한 뒤 상정하도록 되어있었고, 전 현직 아르콘들이 참여하는 아레오 파고스 회의는 아테네의 최고법정으로 기능하였다.

이러한 제도의 정비는 언뜻 보기에 부유층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정책으로 보였기 때문에 귀족층은 별 다른 불만 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솔론은 일부러 법조문에 해석의 여지를 만들어 두어, 대부분의 분쟁이 어떤 식으로든 민회에 상정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만들어 놓았다. 따라서 이후 민회는 아테네 정치에서 매우 중요한 기관으로 부상한다. 게다가 솔론은 부당한 피해를 시민이라면 누구나 민회에서 가해자를 고발할 수 있게 하였다. 따라서 최고법정은 아레오 파고스가 되었지만, 최종법정은 민회가 되어버린다. 결국 민회는 상위 회의기관들의 통제를 받기는 하지만, 막강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솔론 본인도 자신이 만들어놓은 상호견제구조가 마음에 들었는지, 자신은 양 파벌의 가운데에 서서 방패를 들고 양측 모두를 지켜주었다는 시를 읊기도 했다.

이 이외에도 솔론은 다양한 법과 규제들을 제정하거나 수정하였다. 예를 들어 대부분의 처벌이 사형으로 고정되어있는 드라콘의 법을 폐지하여 각각의 범죄에 대한 형량을 정하였다. 예를 들어 불륜을 저지른 남자는 현장에서 발견 즉시 즉결처분이 가능하지만, 여자를 납치한 자는 100드라크마, 유혹한 자는 20드라크마 벌금을 부과하였다.[16]

또한 공공식사에 관련된 법률을 제정하여, 시민들에게 일정한 양만큼 공공식사에 출석할 의무를 부과하였다. 솔론은 일정량 이상 출석하지 않는 자는 공익 무시한다는 명목으로, 일정량 이상 출석하는 자는 탐욕스럽다는 명목으로 처벌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이외에도 천문학 연구 결과를 달력에 반영하여 각 달을 30일로 산정하는가 하면, 결혼이나 상속, 여성에 대한 규제들을 만들었으며, 올림피아 제전 우승자보다도 전사자에 대한 보훈제도를 강화한다. 그 이외에도 다양한 제도들을 제정하였다.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와 달리, 솔론은 대부분의 법률을 성문법으로 공표한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법안 자체를 일부러 애매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법안의 의미에 대한 질문요청과 개정요구가 빗발친다. 그런데 솔론에게 있어서 본인 스스로가 질문에 하나하나 모두 답변하거나 개정요구에 모두 응답하는 것은 법률을 제정한 의미가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솔론은 자신의 법률에 대해 10년간 시범시행기간을 설정한 뒤, 향후 10년 간 솔론의 법률을 고치지 않을 것을 약속받고 그 기간 동안의 해외여행을 요청하여 승인받아 해외로 나간다.[17]

6. 솔론의 여행과 귀국, 그리고 망명

10년간의 해외여행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이 있으나, 솔론이 먼저 이집트를 방문하여 연구 활동을 한 뒤, 키프로스에 머물며 솔로이 건설을 제안하고 감독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다만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이집트에서 리디아에 이르는 모든 일정이 망명 이후의 일로 판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솔론은 먼저 이집트를 방문하여 그곳의 성직자들의 학문을 공부하며 연구 활동에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그 유명한 아틀란티스에 대한 이야기도 이 시기를 배경으로 삼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 당시 그는 이집트 파라오 아마시스(아흐모세) 2세를 접견하기도 했다고도 한다.

이후 솔론은 키프로스로 건너가서 그곳의 지역 토착 군주 중 한 사람인 필로키프로스의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환대에 대한 답례인지, 솔론은 필로키프로스의 수도가 방어하기에는 유리한 지형이나 교통이 불편하고 협소한 지형에 있어 발전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평야지역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을 건의하였다고 한다. 솔론은 해당 도시의 건설을 직접 감독한 뒤 도시를 정비하였다. 그 결과 그 도시는 번영하고 주변에서 많은 인구가 이주하여, 필로키프로스는 다른 군주들의 부러움을 받았다고 한다.[18] 그래서 필로키프로스와 그 도시의 사람들은 솔론에게 감사하는 의미에서 도시의 이름을 "솔로이"라고 개명하였다고 한다.

솔론이 리디아의 크로이소스를 방문했다는 일화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19] 왜냐하면 연대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솔론의 집권은 기원전 594년이므로 솔론의 여행은 기원전 580년대의 일일 텐데, 크로이소스의 재위기간은 기원전 560~546년이다. 플루타르코스 역시 연대가 안 맞는 점을 이상하게 여기지만, 다양한 출처들에서 이 일화에 대해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역시 솔론의 크로이소스 방문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러나 솔론과 크로이소스의 회담이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전제한다면, 솔론의 리디아 방문은 그의 10년간의 여행시기가 아니라, 아테네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이 성립한 이후의 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왜냐하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 등극과 크로이소스의 리디아 왕 즉위는 둘 다 기원전 560년의 일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솔론은 10년의 여행을 마친 뒤 아테네에 귀국한다. 그러나 오랜만에 고국에 돌아온 솔론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또 다시 산악파와 해안파, 평야파로 나뉘어 계속되는 정치적 갈등이었다. 전통 귀족의 대표 격인 부타드 가문의 수장 리쿠르고스는 지주와 귀족들로 구성된 평야파를 이끌었고, 알크마이온 가문의 메가클레스가 해안파를 이끌었으며, 솔론 자신의 동료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테테스들이 주축이 된 산악파를 이끌고 있었다. 솔론은 각 파벌의 수장들을 만나 중재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겉으로 솔론의 중재를 따르는 척 하면서도 내심 참주가 되려는 야망을 키우기 시작한다. 솔론 역시 그의 야망을 간파하였기 때문에 경고와 견제에 들어간다.

그러나 10년간의 정치적 공백기가 있었던 솔론과 달리, 페이시스트라토스는 테테스가 주축이 된 민중파의 지지를 받고 있었고, 그의 야심을 도울 동료들도 있었으며, 페이시스트라토스 본인마저 자신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여론을 선동하는데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20] 반면 솔론의 친구들은 현명하고 유능하기는 했으나, 대부분 외국인들이었고,[21] 국내에는 그가 이끄는 세력이 없었다. 따라서 솔론의 경고나 견제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BC560년대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살라미스의 영유권을 둘러싼 메가라와의 분쟁의 종지부를 찍으면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다져버린다.
그러던 어느 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스스로의 몸에 상처를 입힌 뒤 반대파벌에게 습격당했다고 주장한다. 솔론은 그 내용이 사기극이라고 비난하였으나, 민중들은 솔론의 경고보다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선동을 따라, 그에게 호위대의 구성할 권한을 부여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호위대 명목으로 400명 되는 친위대를 부렸다고 하며, 그의 친위대는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거침없이 폭력을 휘두른 것으로 보인다.결국 메가클레스 및 알크마이온가가 도주하여 해안파는 몰락하였고, 평야파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폭력이 두려워 침묵한다. 결과적으로 기원전 560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크로폴리스를 점거하고 참주가 되었다.
당시 솔론은 군장을 싼 채로 회의[22]에 출두하여 참주정의 도래에 맞서 싸울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테네의 그 어떤 세력도 솔론에게 동조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일부는 솔론이 미쳤다며 조롱했다고 한다. 결국 솔론은 자신의 무구들을 내던지며 정계에서 은퇴한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어떤 이들보다는 지혜롭고 다른 이들보다는 용감하다고 비아냥거렸는데, 아마도 전자는 산악파를, 후자는 평야파를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 등극에 대해 유일하게 반대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일단 정권을 장악하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을 자기편으로 회유하려 한 듯하다.
당시 대중에게 그가 솔론과 대립한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그에게 그다지 이롭지 못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외견상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의 정치적 노선을 계승하는 것처럼 행동했기 때문이다. 우선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정계에서 자신의 입지를 확고하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는 살라미스 영유권 분쟁으로, 이는 솔론이 아테네의 승기를 잡았던 것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종지부를 찍은 것이었다. 또한 솔론이 빈민층의 참상에 공분을 표했던 것처럼 그는 자신이 빈민층의 대변자인 것처럼 행동해왔다. 심지어 그가 자신의 호위대 창설을 요청한 과정은 솔론의 법률을 교묘하게 이용한 것이었다. 따라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을 회유하기 위한 공작에 들어갔다.

우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그 자신뿐만 아니라 그의 측근들 또한 자신들이 솔론의 법률을 존중하고 따른다는 제스처를 취한다. 또한 그는 자신이 코드로스 왕가의 후예라는 점을 이용하여, 자신이 휘두르는 권력이 그다지 부당한 것이 아니라, 고대 왕가의 후예인 자신에게는 주어질 법한 수준의 특권인 것처럼 포장한다. 그러면서도 그 특권을 사리사욕을 위해 남용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아테네의 공공복리를 위해 사용하고 있을 뿐이며, 그나마 활용을 최소한으로 절제하고 있다고 선전하기도 하였다. 일례로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누군가에게 살인죄로 고소당했기에 솔론의 법률을 따라 법정에 출두한다. 그러나 원고가 결석(?)하여 재판은 무산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일련의 공작들로 인해 솔론이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화해했으며, 참주제에 대한 솔론의 증오는 거북함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참주제에 대한 솔론의 태도는 단순한 거북함을 넘어서 증오나 경멸 수준이었다. 단편 형태로 전승되는 그의 시에서 그는 참주의 자리에 올라가면 내려올 방도가 없으며, 참주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폭력에 의존한다고 비난하고 있다. 또한 그는 참주들은 자신들의 동료시민들을 인격적 대상으로 여기기보다는 마치 서로 크기가 다른 돌멩이들처럼 도구적 대상으로 본다고 비난하기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그 이외에도 그는 다양한 이유로 참주정을 비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동료 7현자의 한 명으로 알려진 코린토스의 2대 참주 페리안드로스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솔론은 당장에 참주의 지위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그 외에도 다른 7현자들이 솔론에게 보낸 서신들에서 솔론은 참주정을 기피할 뿐만 아니라 증오하는 수준이라서, 참주정 국가에는 발도 잘 안 들이는 것처럼 묘사되고 있다.[23]

무엇보다도 폭력적 수단이나 정치공작과 선동을 사용하지 않고도 만인의 추대를 받아 간단하게 참주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회를 서슴없이 거절했던 솔론 본인이 참주정 하의 아테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그의 명성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따라서 솔론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이 성립한 이후 해외로 망명한 것으로 보인다.

솔론이 해외망명을 결심하고 아테네를 떠나자, 세계 각지에서 그를 초청하였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는 그가 탈레스, 비아스, 클레오불로스, 에피메니데스 등에게 슐로스, 밀레투스나 프리에네, 린도스, 크레타 등을 망명지로 추천받았다고 전한다.

7. 크로이소스와의 일화

크로이소스의 초청을 받은 것은 이때의 일로 보인다.
에게해 서쪽 변방의 폴리스에서 참주가 등극한 BC560년, 바다 반대편의 부유한 사르디스에서는 젊고 혈기 넘치는 군주가 왕위에 오른다. 왕위에 오른 25세의 젊은 군주는 아버지로부터 강력한 군대와 막대한 부, 그리고 앞으로 훌륭하게 통치해야 할 거대한 왕국을 물려받았다. 왕국은 동쪽으로 메디아 왕국으로부터 지속적인 도전과 위협을 받고 있었고, 서쪽으로는 툭하면 자신들끼리 분열하여 싸우지만 만만하지는 않은 미개인들의 도시들이 늘어서 있었다.

선왕의 업적으로 인해 이오니아의 폴리스들은 리디아에게 복속되어 있었으나, 완전히 제압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와중에 왕국을 동쪽으로 확장시킬 꿈에 젖어있는 젊은 군주는 통치 초기 서쪽의 미개인들에게 호의적 태도를 취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 점에서 이오니아 일대에도 명성이 자자한, 이오네스 족의 아성 아테네의 명사 솔론을 초청하는 것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탁월한 선택으로 보였을 것이다.[24]

그러나 역사가들은 젊고 혈기 넘치는 군주와 세월에 닳을 대로 닳은 노정치인의 회견은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크로이소스는 솔론 앞에서 자신의 부와 권세를 자랑한 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이겠느냐고 물었고, 솔론은 자신의 동료시민들 중 건실하게 살다가 죽어간 이들을 제시했다.[25] 크로이소스는 유명인사도 아닌 그런 일개 일반인이 자신보다 높게 평가되는 것에 대해 노골적인 불쾌감을 표현하였고, 솔론은 아직 살날이 창창한 젊은 군주에게 인생은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것이니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라고 설교한다.

당시 솔론은 자신의 이상을 구현하기 위한 시도가 말년에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의 동료의 손에 산산조각 난 뒤, 스스로가 그 스스로를 조국에서 추방하여 방랑하는 중이었다. 노정치인이 보기에 젊은 군주는 젊음 특유의 혈기와 교만이 지나쳤고, 그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로 보였을 것이다.

같이 초청받은 우화작가 아이소포스[26]는 젊은 군주의 비위를 맞춰줄 것을 제안하였으나, 말년에 조국마저 잃은 솔론, 그것도 거짓과 아부와 선동에 의해 잃은 솔론에게 그것은 가당찮은 이야기였다. 결국 크로이소스와 솔론은 그다지 좋지 못하게 헤어졌다고 전해진다.

14년 뒤, 나이 쉰을 앞두고 키루스 2세에게 패해 왕국을 잃은 크로이소스에게 이 경험이 도움이 되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바빌로니아의 역사 기록은 전쟁의 패배 직후 망국의 왕이 즉시 처형되었다고 기록하기 때문이다.다만 여기서 망국이 리디아인지는 확실한건 아니다.[27] 어쩌면 솔론과 크로이소스의 회견에 관련된 에피소드 역시 허구일지도 모르지만, 후대에는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었다.

8. 사망에 관련된 일화

어쨌든 솔론은 리디아의 사르디스를 떠나 키프로스에 간 것으로 보인다. 키프로스에는 그 자신이 건설한 솔로이가 있었으니, 말년을 보낼 망명지로는 최적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정확한 사망 시기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대체로 기원전 558년 즈음에 키프로스에서 향년 80세로 사망한 듯하다. 플루타르코스는 의심쩍어 했지만, 대부분의 저술들은 솔론은 자신의 유언대로 화장되어 그 재와 뼈가 살라미스에 뿌려졌다고 전한다.[28]

9. 평가

단기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솔론의 개혁은 실패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솔론의 개혁은 모든 계층의 반발을 샀다. 특히 빈민층이 주도하는 산악파의 반발이 가장 심했다. 산악파는 귀족들에게 집중된 토지를 재분배해주기를 원했으나, 솔론은 담보로 압류당한 토지만을 돌려주었을 뿐이기 때문다.

이는 한 세기 전 스파르타에서 벌어진 리쿠로고스의 개혁과는 대조적인 것이었다. 리쿠르고스는 전국의 농경지를 국가에서 장악한 뒤 인구수에 따라 시민들에게 필요한 만큼 할당하였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 플루타르코스는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와 솔론을 대조하며 솔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스파르타는 전 시민을 부양하고도 남을 만큼의 농경지를 확보하고 있었으나[29], 아티카 일대는 농경지가 부족할 뿐만 아니라 척박하기까지 했다. 게다가 스파르타와 달리 아티카 지역은 외부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었다.[30] 따라서 애당초 아테네는 스파르타처럼 모든 농경지를 인구수에 따라 균등하게 배분할 수 없었다. 그러고 싶어도 그럴 만큼의 농경지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또한 리쿠르고스는 헤라클레스 직계 11세손으로, 왕정사회인 스파르타 내에서 왕족의 주요 인사였을 뿐만 아니라, 사실상 실질적으로 상당기간동안 스파르타를 통치해온 통치자였으므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31] 반면에 솔론은 아무리 코드로스 왕가의 후예라고는 하나 근본적으로는 한 사람의 아테네 중산층 시민에 불과했으므로 아테네 시민 각계각층의 신뢰와 타협으로 주어진 제한적 권력만을 갖고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솔론은 리쿠르고스가 했던 것처럼 폴리스 전체에 사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토지를 내놓으라고 강요할 수 없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이유들 때문에 리쿠르고스가 상황을 법에 맞추어 개편할 수 있었던 반면, 솔론은 상황에 맞추어 법을 개편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평가하였다. 리쿠르고스가 처음부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관철하기 좋은 환경에 있었던 것과 달리, 솔론의 권력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현실에 맞추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리쿠르고스가 이상을 밀어붙이는 혁명가였다면, 솔론은 주어진 현실을 고려하는 개혁가였다고 할 수 있겠다. 그는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되, 이상적인 목표치를 내세운 뒤 이를 동료 시민들에게 강요하기보다는 그들이 감당할 만한 한도 내에서 정책을 추진하였다.[32]

솔론은 국내 내란 중 그 어떤 정파로도 분류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 분열 속에서 권력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주어진 권력으로 자신의 개혁활동을 추진하였다. 따라서 솔론의 개혁은 전형적인 중도파 또는 중재자 스타일의 개혁의 형태를 띌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참주제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는 민주정에 대한 특정한 정치적 이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그 자신의 말과 같이 자신이 생각하는 중용을 지킴에 있어서 고분고분하지 않고 단호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이러한 특징 때문에 말년의 솔론은 모든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한 채 아테네가 참주정의 길에 들어서는 모습을 보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모든 계층의 권익을 중재하다보니 모든 계층이 자신들의 권익이 보장받아야 할 최고치가 침해당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솔론의 개혁으로 인해 정치적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된 빈민층이 가장 반발이 심했고, 그들이 솔론의 법률을 활용하여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로 등극하는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은 역사의 아이러니라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망명 직전에 에피메니데스에게 보낸 것으로 알려진 편지에서 그는 자신의 개혁에 대한 회의감을 표출하고 있다.

그러나 솔론의 재가 살라미스에 뿌려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실각하여 망명길에 오른다. 물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망명과 복귀를 반복한 끝에 외국 군대의 지원을 받아 참주로서의 위치를 확고하게 다지고, 이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자리는 그 아들들이 물려받는다. 그러나 "최상의 법률 속에서 자유인으로 자라난 사람들에게 참주의 노예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에피메니데스의 예상이 들어맞은 것인지, 결국 아테네는 민주정을 회복한다. 결과적으로 솔론의 개혁은 아테네 민주정의 초석을 다져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33]

다소 시간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솔론의 개혁 이후 아테네는 메가라에게도 밀리는 그리스의 병자에서 지중해세계의 강자로 거듭난다. 물론 솔론의 법률에 기초한 아테네의 민주정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고, 문제점 이상의 실수를 많이 저지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정 하에서의 아테네는 알렉산드로스 3세에게 박살나기까지 200년간 지중해 세계의 강자로서 번영한다. 이런 이유에서 아테네의 정치인들은 솔론 이후의 정책적 성과들마저 솔론의 업적으로 평가하였다.[34]

한편 솔론의 개혁은 아테네를 번영하게 한 요인인 동시에, 아테네가 국제적 분쟁에 휘말릴 수밖에 없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다.

솔론은 아테네의 경쟁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올리브 산업을 비롯한 수공업 전반의 발전을 도모했을 뿐만 아니라, 부족한 식량자원은 거의 전량을 해외에서 수입하도록 했다. 올리브 및 수공업제품을 수출하고 식량자원을 수입하는 것은 아테네가 자연환경의 척박함에도 불구하고 경제적으로 번영하게 한 주요 요소였다. 그러나 이는 아테네가 교역국의 정치적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만들었다.

일설에 따르면 솔론은 살라미스뿐만 아니라 트라키아의 케르소네소스(오늘날의 갈리폴리 반도)를 공략할 것을 제안했다고 한다. 실제로 후일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참주이던 시절의 아테네는 케르소네소스를 공격하여 원주민뿐만 아니라 인근의 다른 그리스인들도 쫓아내고 그 일대를 점령하기도 한다. 케르소네소스 반도는 흑해연안으로 이어지는 주요항로로, 아테네는 해당 지역들에 올리브를 수출하고 그 지역들로부터 식량을 수입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5][36]

솔론이 해외여행을 다녔던 지역들도 이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다. 솔론이 여행을 다닌 것으로 확실시되는 지역은 이집트와 키프로스, 리디아인데, 말할 것도 없이 이집트는 지중해 최강의 식량생산국이었고, 키프로스는 그런 이집트와 정치적 긴장관계에 있었다.[37] 또한 리디아는 아테네가 장악해야 한다고 솔론이 주장했던 케르소네소스 반도 바로 건너편에 있었다. 이후 캄비세스 2세의 침공에 맞서 아흐모세 2세가 그리스 지역에서 용병을 모집했다는 점이나, 페르시아가 이오니아를 장악할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다리우스 1세가 케르소네소스와 트라키아 일대로 영향력을 확대하자 아테네가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다는 점은 이러한 의혹을 가중시킨다.

결국 솔론의 개혁으로 인해 아테네는 해외교역에 목을 매는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아테네가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치러야만 했던 것은 역사적 필연이이었다. 아테네가 번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폴리스들보다도 더 넓은 영향력을 지켜 내거나 영향력을 더 확장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아테네의 흥망성쇠를 논함에 있어서 솔론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어쨌든 솔론은 아테네라는 도시의 초안을 구축하였고, 그의 초안 위에 세워진 아테네는 다양한 문화적 유산을 남겼다. 그리고 아테네가 구축한 여러 문화적 유산들은 이후 세계사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민주정을 이상으로 여기는 후대의 정치가들에게 귀감과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그는 아테네 정치인들뿐만 아니라 고대 로마의 정치인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는데, 일례로 플루타르코스는 로마 공화정 초기의 정치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Publius Valerius Publicola; ?~BC503)가 솔론을 모방하여 로마 공화정의 초석을 다졌다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1] 민주주의의 어원인 "민중에 의한 지배(δημοκρατία; demokratia)"라는 용어는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들이 참주에서 쫓겨난 다음에 생겨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2] 그리스 사회의 동성애 관계는 단순히 애정행각이나 벌이는 관계가 아니라, 에라스테스(공)에 해당하는 성인 남성이 에라메노스(수)에 해당하는 소년과 애인관계가 되어, 나중에 그 소년이 사회데뷔를 할 때 후원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을 따라 정계에 데뷔했으며, 솔론의 영향력을 지우기 보다는 그의 법제도를 수호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참주가 되었다고 선전했다. 따라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솔론의 소년 애인이었다는 점은 상당히 설득력있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페이시스트라토스가 자신을 코드로스 왕가의 후계자로 선전하였다는 기록도 있기에, 그가 솔론과 친척이었다는 가설도 그럴듯하게 여겨지고 있다. [3] 서양고대철학사를 공부해본 적 있는 사람들이라면 파르메니데스 엠페도클레스의 저술들이 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4] 이는 간단하게 말해서 자기 군장을 갖고 있었다는 얘기이다. 당시는 자기 군장을 사올 수 없는 사람은 군복무를 할 수 없는 시대였다. [5] 이는 플루타르코스의 구분이다. 플루타르코스는 당시 아테네 정계를 빈민파가 주도하는 산악파와 지주 및 귀족이 주도하는 평야파, 알크마이온 가문이 주도하는 해안파로 나뉘어져 있었다고 보았다. [6] 나머지 셋은 탈레스, 비아스, 피타코스이다. [7] 이들을 테테스라고 부른다 [8] 보통 대(大) 아이아스라고 불리는 텔라몬의 아들 아이아스이다. [9] 이 과정에서 그가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한 구절을 삽입했다는 설도 있지만, 당연히 아테네에서는 헛소리로 취급했다. [10] 이오네스 족의 땅이라는 게 왜 아테네의 영유권에 대한 지지냐면, 당시 이오네스족은 죄다 이오니아 지역으로 도망가고 그리스반도 내의 이오네스 족은 아테네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는 본인들이 이오네스 족이라는 정체성을 상당히 강하게 갖고 있었다. 여담으로 이오니아라는 이름은 이오네스족이 정착해서 생긴 명칭으로, 아테네와 이오니아 일대 폴리스들의 동족관계는 나중에 이오니아 반란이 일어났을 때 스파르타가 지원요청을 거절한 것(스파르타는 도리에이스족이다.)과는 대조적으로 아테네가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11] 왜 시기상 순서가 이렇게 되느냐면, 킬론 사건은 30년째 질질 끌어온 분쟁이었기 때문이다. 듣보잡 중산층 시민의 발언 때문에 30년째 갈등을 빚어온 사건에 대한 재판에 양 측이 동의했을 리가 없다. [12] 크레테의 한 폴리스이다. [13] 어쩌면 살라미스 영유권에 대한 신탁의 지지는 이에 대한 아폴론 신 이라고 쓰고 아폴론 신관들이라고 읽는다의 보답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역으로 솔론이 델포이의 호의를 바라고 이 일을 주도했을 수도 있다. [14] 통상적으로 아르콘의 임기는 1년이지만, 많은 학자들은 아무리 후진사회라고 한들 한 폴리스의 기반을 전부 들어거 뒤집어 엎는 그런 대대적인 개혁이 단 1년만에 마무리되었다고 믿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솔론의 개혁은 그의 아르콘 취임 전부터 이미 추진되고 있었거나, 아르콘 퇴임 후에도 솔론 개인의 영향력으로 인해 어떻게든 진행되었다고 믿는 것이 통설이다. [15] 역사가들은 정책 이름을 "부채탕감"이 아니라 "무거운 짐 덜어주기"라고 명명한 솔론의 작명센스에 혀를 내둘렀다. 왜냐하면 "무거운 짐 덜어주기"라고 함으로서 물론 대부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지주 및 귀족들이 채권자들이 자신들의 채권을 포기당한 것이 아니라, 마치 자선행위를 한 것마냥 선전했기 때문이다. [16] 여담으로 플루타르코스는 벌금이 너무 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에 따라 자신의 시대에 비해 벌금이 무지막지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기는 했다. 그는 처음에는 아마도 "저걸 내느니 그냥 죽지;;;"라는 수준이의 막대한 벌금이었을 것이나, 시간이 지나 인플레이션에 따라 벌금이 상대적으로 낮아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17] 솔론이 아테네에 있으면, 자꾸 법률을 폐지하자거나 고치자고 하는 이들 탓에 그 법률이 안정적으로 시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헤로도토스나 플루타르코스는 솔론이 귀찮아서 도망간 것 같은 인상을 준다. [18] 이는 솔론 한 사람의 조언으로 인해 필로키프로스가 키프로스의 토착군주들 사이의 패권경쟁에서 선두주자로 앞서나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9] 크로이소스자신이 행복함을 인정받으려고 누가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냐고 묻자 아테네의 텔리우스로 그는 오랫동안 자식을 훌륭히 키웠으며 평생을 정직하게 살고 나라를 위해 용감히 싸웠다고 얘기했다. 그러자 크로이소스가 그런 고생만 한놈이 뭐가 행복하냐고 하자 솔론은 "폐하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이라 할 수가 없습니다. 미래란 장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폐하께 불행이 생기면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자 화가 난 크로이소스가 그를 쫓아냈는데 몇년 뒤 페르시아와의 싸움에서 져 나라를 멸망당했는데 그때 키루스 2세는 크로이소스를 죽이려 했는데 그때 크로이소스가 솔론 이름만 부르며 엉엉 울자 솔론이 누구기에 그렇게 우냐고 하자 그때 그 얘기를 해 줬는데 그러자 키루스 2세가 죽이는 대신 자기의 대신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20] 아이러니하게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솔론이 살라미스 공격의 재개를 요청할 당시 이 능력을 활용하여 솔론을 서포트하였다. [21] 특히 아테네의 종교제도를 정비하였던 에피메니데스가 대표적이다. 에피메니데스는 크레타인이었다. [22] 아마도 아레오 파고스 회의로 추정된다. 솔론은 전직 아르콘 자격으로 아레오 파고스 회의 참석 자격이 있었다. [23] 물론 이런 문헌들이 후대에 조작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고대의 문서관리체계는 아주 엉망이어서, 유명인사의 이름을 빌린 가짜 서신들이 버젓이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쯤으로 유명하면 아예 그냥 저술 하나가 통째로 위작인 경우도 있다. 고대세계에서는 솔론도 제법 유명인 축에 들어가기 때문에 그의 이름을 빌린 가짜 서신이 유통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24] 이 외에도 키루스 2세와 전쟁을 한 것에 관해서는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에서 신탁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일화도 있다. [25] 그런데, 당대의 그리스인들의 가치관 자체가 그러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솔론이 실제로 든 예는 오늘날 우리가 보기에는 매우 이상하다. 하필 제명에 죽지 못한 사람들만 '가장 행복한 사람'의 예로 들었기 때문. 하나는 전사한 모범시민이고, 다른 하나는 하필 탈것이 없는 상황에서 모친을 신전에 제때 모셔다 드리느라고 직접 수레를 몰고 사력을 다해 달려가서 기진맥진해 죽은 형제이다. 특히 후자의 예는 아주 나쁘게 생각하면 다윈상 수상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솔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인간사는 긴데 그 와중에 어떤일이든 일어날 수 있으므로 당장의 모습이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지적한다. 아울러 솔론이 거론한 두 사례는 살아서는 행복했고 죽어서는 사람들에게 칭송받을 명예와 함께 하기에 적절한 사례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한 예를 꼽자면, '만일 제임스 딘이 요절하지 않고 천수를 누렸더라면, 그렇게 사람들 가슴에 길이 남는 배우가 되지는 못했을지도 모른다'라는 이야기를 들 수 있다. [26] 우리에게 이솝우화의 저자로 알려진 그 이솝이다. [27] 하지만 그리스의 기록에는 키루스 2세가 관용을 베풀어 크로이소스를 살려주고 자신의 자문관으로 삼았다고 되어있다.[38][39] 참고로 이렇게 살려주었다는 기록에서는 키루스 2세가 크로이소스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꽤나 신임했다고 한다. [28] 왜 미심쩍어 했냐면, 아테네인들의 장례절차가 아니기 때문이다. [29] 후대에 이 지역에 세워진 모레아 전제군주국이 동로마 최후의 번영을 누린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때문에 스파르타가 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스파르타 외에도 코린토스 등 부유한 폴리스들도 있었다. [30] 왜 스파르타에는 외부인이 오지 않았을까 싶지만 스파르타는 폐쇄적이기로 악명이 높았다. [31] 허나 그런 그조차 개혁 반대파에게 폭행당하기도 했다. [32] 솔론의 법률이 사람들이 수용할 만한 한도 내에서 추진되었다는 점은 플루타르코스도 동의하는 바로, 이는 고대인들이 솔론에 대해 내린 일반적인 평가이다. [33] 흥미롭게도 반대로 리쿠르고스는 개혁이 성공하여 사회혼란이 지속되던 스파르타를 안정시키고 강하게 만드는데 성공했지만 리쿠르고스의 개혁은 마냥 좋은 점만 있지는 않고 단점 역시도 많았으며 그 단점이 결국 스파르타를 몰락으로 이끌었다. [34] 그리고 이 점이 오늘날 우리가 솔론의 정확한 정책내용을 파악하기 힘들게 만드는 요인이기도 하다. [35] 이는 흑해연안은 기후가 춥기 때문에 올리브를 재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지역들은 역으로 곡식을 수출하고 올리브를 수입하는 형태를 취하며, 이는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36] 케르소네소스 반도를 확보해야만 한다는 문제는 후일 아테네가 페르시아와 갈등을 빚어 이오니아 반란을 후원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다리우스 1세가 트라키아를 침공하면서 케르소네소스 반도에 대한 아테네의 영향력이 위협받았기 때문이다. [37] 당시 이집트의 아흐모세 2세는 그리스 세력의 도움을 받아 키프로스로 진출하려고 시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