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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폴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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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갈리폴리 전투
Gallipoli campaign
Çanakkale Savaşı
제1차 세계 대전의 일부
파일:갈리폴리.png
기간
1915년 4월 25일 ~ 1916년 1월 9일
장소
오스만 제국, 다르다넬스 해협 갈리폴리 반도
협상국 동맹국
교전국
[[영국|]][[틀:국기|]][[틀:국기|]]

[[호주|]][[틀:국기|]][[틀:국기|]][1]

[[뉴질랜드|]][[틀:국기|]][[틀:국기|]][2]

[[인도 제국|]][[틀:국기|]][[틀:국기|]][3]

[[뉴펀들랜드 자치령|]][[틀:국기|]][[틀:국기|]][4]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제3공화국
프랑스
]][[틀:국기|]][[틀:국기|
속령
프랑스
]]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령 알제리

[[프랑스령 튀니지|]][[틀:국기|]][[틀:국기|]]
파일:프랑스 국기(1794-1815, 1830-1958).svg 프랑스령 서아프리카

[[오스만 제국|]][[틀:국기|]][[틀:국기|]]

[[독일 제국|]][[틀:국기|]][[틀:국기|]]
지원국 [[틀:깃발|]][[틀:깃발|]][[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틀:국기|]][[틀:국기|]]
지휘관 [[틀:깃발|]][[틀:깃발|]][[윈스턴 처칠|]]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이안 해밀턴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허버트 키치너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존 디 벡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해리 쇼벨
[[틀:깃발|]][[틀:깃발|]][[앙리 구로|]]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오토 리만 폰 잔더스
[[틀:깃발|]][[틀:깃발|]][[엔베르 파샤|]]
[[틀:깃발|]][[틀:깃발|]][[무스타파 케말|]]
병력 560,000명 315,000명
사상자 252,000명
전함 6척 손실
251,000명
결과
오스만 제국의 승리
1. 개요2. 배경
2.1. 그레이트 게임2.2.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전함 강탈 사건2.3. 오스만 제국의 중립포기2.4. 영국의 전투 준비
3. 진행
3.1. 다르다넬스 해전3.2. 상륙작전의 시작
3.2.1. 57연대 총원 결사에 대한 반박
3.3. 협상국의 탈출 작전
4. 영향5. 이후6. 여담7. 미디어

[clearfix]

1. 개요

갈리폴리 전투의 7분 전개(57초부터 7분 44초까지)
튀르크군이 돌격할 때면 그들은 대개 알라를 외쳤다. 그럼 우리는 ' 새끼들아 덤벼봐라! 우리가 네놈들을 알라에게 데려다주마!'라고 맞받아쳤다. '새끼(Bastard)'[5]라는 단어를 얼마나 많이 외쳤는지 한 튀르크인[6]'새끼'가 우리가 믿는 신들 중 하나의 이름인지 궁금해했다.
(When the Turks charge they usually cry ‘Allah, Allah’, and our boys reply ‘Come on you bastards, we’ll give you Allah’. From the frequent use of this word ‘poor old Turk’ wants to know if ‘Bastard’ is one of our gods.)
ANZAC(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 통합군) 육군 병사 시릴 로렌스(Cyril Lawrence) 출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협상국 독일 제국 동맹국으로 참전한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기 위해서 갈리폴리 반도에 상륙해서 벌인 전투. 세계 전쟁사에 손꼽히는 최악의 삽질 작전 중 하나로 명성이 높다.

튀르키예어로는 가까이에 트로이 유적으로 유명한 차낙칼레라는 도시가 있기 때문에 차낙칼레 전투(Çanakkale savaşı)라고 칭한다. 이곳에서는 매년 기념행사를 벌이고, 참전용사들의 후손들이 함께 모여 행사를 갖는다. 고조 ~ 증조할아버지 시절엔 총부리를 겨눴던 사람들이 그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고... 오스만 제국어로는 Harb-i Umum-i Çanakkale(하르비 우무미 차낙칼레).

2. 배경

2.1. 그레이트 게임

영국은 인도양과 동남아시아, 남태평양 일대에 식민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영국 해군의 해군력으로 방어할 수 없는 곳들, 가령 인도가 큰 골칫거리였다. 특히 러시아는 유라시아 대륙 일대의 모든 식민지에 육로로 접근할 가능성이 있었기에, 최대의 주적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서 오스만 제국, 아프가니스탄, 동아시아에서 영국군과 외교관들이 활동하며 그레이트 게임을 벌였고, 그 결과가 영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영일동맹, 거문도 점령 사건 등이다. 오스만은 흑해를 통해 중동으로 러시아 세력이 남하하는 통로라, 영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당근을 내미게 된다.[7]

오스만은 이 시기에 자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활용해 문어발을 걸치게 되는데, 대외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하면서도 영국으로부터 전함을 계약하며 차관도 받고, 프랑스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고, 독일로부터 군사고문단을 파견받아 육군 근대화를 꾀하고 있었다. 언뜻 보면 현명한 외교 같지만, 조금만 생각해봐도 서로 으르렁대던 세 나라들이 현 상황을 이용하며 이득만 빼먹고 있는 오스만 제국을 매우 아니꼽게 여겼을 거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게다가 이 중립은 처음부터 꽤나 기울어져 있었다. 영국의 전함과 프랑스의 차관과는 달리, 독일의 군사고문단은 대접받을 거 다 받는 상황이라 다른 두 나라의 선물에 비하자면 보잘것 없는 지원이었지만, 실질적으로 독일 제국군의 총부리를 오스만 제국의 군주 파디샤의 코 앞에서 들이댔기 때문이다. 그 결과 다르다넬스 해협에 포병기지를 건설한 뒤 독일 제국군이 접수한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니 19~20세기 초엔 후세대의 핵무기와 같은 위상의 전략병기인 전함을 팔아주던 영국과, 적지 않은 돈을 빌려주던 프랑스처럼 실질적인 혜택을 제공하던 나라들은 자신들이 독일과 동급이라는 사실을 그닥 좋아할 수 없었다. 어쨌든, 영국이 러시아와 그레이트 게임을 벌이는 동안에는 파디샤가 최소한 러시아하고는 친하게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독일이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문제가 된다.

2.2. 제1차 세계 대전 발발과 전함 강탈 사건

1914년 6월 28일에 사라예보 사건이 터지고, 대영제국, 프랑스 제3공화국, 러시아 제국 독일 제국 등에 대항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을 벌이고 있었다. 전쟁 발발 직후 덴마크는 중립을 선언하고 카테가트 해협에 기뢰를 쏟아부어서 배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아버렸다. 이 중립은 눈가리고 아웅에 가까웠는데, 독일 해군은 킬 군항에서 주력 함선들을 빼서 북해의 빌헬름스하펜에 옮겨둔 상태였고, 그 이후의 이동도 그닥 문제가 없었기 때문에, 유틀란트 해전을 치르는데 덴마크의 조치는 눈꼽만큼도 방해가 되지 않았던 것. 즉, 기뢰밭은 오로지 협상국에게만 불리했으며, 한마디로 얘기해서 덴마크는 중립을 핑계로 독일에 납작 엎드린 것이었다.[8]

이제 영불 본토와 러시아를 연결하는 바닷길은 레이더도 없던 시절의 위험천만한 북해항로와 지중해를 통한 흑해항로 밖에 없었다. 이 흑해항로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코스탄티니예를 지나야만 했기에 다르다넬스 해협과 오스만 제국의 선택이 전쟁의 향방을 정하게 되었다.

여기서 오스만은 중립을 선언한다. 나름대로는 자국의 국력이 유럽에 미치지 못하고 전쟁을 해봐야 이득 볼 거 없으므로 영리한 행동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모든 나라가 국력과 상관 없이 말과 글뿐인 약속만으로 코꿰이듯이 말려들어 대학살당한 전쟁이 제1차 세계 대전이고 21세기도 그닥 다를 바 없는게 외교의 현실인데, 거기서 이런 태도를 취했으니 오스만에 이것저것 퍼주던 관련 열강국들 전체가 발칵 뒤집힌다.

한편, 윈스턴 처칠 사라예보 사건 직후에 전쟁을 예감해, 오스만이 구입한 전함 에린과 애진코트 두 척을 주지 않고 오스만을 압박했다.[9][10] 이 불법압수조치는 8월 3일 영국의 선전포고 직전 실행됐으며, 오스만 대사의 본국 보고 조치는 바로 뒤따랐다.

독일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몰트케급 순양전함 '괴벤(SMS Göben)', 경순양함 '브레슬라우(SMS Breslau)' 함 두 척을 승조원과 함께 오스만에 양도하겠다고 하고, 이 두 척의 해군 함선이 코스탄티니예에 기항한다. 영국은 오스만에게 선택을 해 중립을 파기하라고 강하게 종용한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도 파디샤 메흐메트 5세는 중립을 표방했는데, 구체적으로는 독일군 전함의 주포가 내 궁전을 겨누고 있으니 양해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 발언은 진심이고 또한 사실이었으나 영국 입장에서는 변명이든 진담이든 간에 기가 찰 수밖에 없었다.[11]

2.3. 오스만 제국의 중립포기

앞서 말했듯이, 다르다넬스 해협 독일 제국 육군의 것이나 다름없던 상황이라, 오스만이 중립을 표방하던 말던 간에 흑해항로는 사실상 폐쇄되고 말았다. 그리고 독일 제국 해군은 1914년 10월 29일, 오스만의 함선들을 이끌고 흑해의 러시아 항구를 포격한다. 오스만 제국은 결국 독일의 편에 서게 되었고, 흑해는 완전히 봉쇄된다.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다르다넬스 해협을 지나는 물류량이 수에즈 운하를 능가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급증한 상태였는데, 이 길이 끊기면서 러시아는 외부에서 물자를 들여올 수 없어 순수 자력으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태가 되었다. 이 당시 러시아는 공업력이 상당히 낮아 19세기 후반부터 도입을 시작한 모신나강조차도 자국 생산물량이 부족해 외주를 맡기던 실정이였는데, 이러고도 제1차 세계 대전 때까지 소총이 부족하여 외국에서 무기원조를 많이 받았다.[12] 당연하지만 그 결과 졸전에 졸전을 거듭해 전선이 계속 밀리게 되었고, 영국과 프랑스도 러시아에서 식량을 들여올 수 없게 되어 미국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기 전까진 허리를 졸라매게 되었다.

2.4. 영국의 전투 준비

이제 영국에게는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해 코스탄티니예의 독일 함대를 전멸시키고, 대신 자신들의 전함이 파디샤의 궁전을 주포로 조준하는 것 말고는 답이 없게 되었다.

전시내각이 해야 할 일을 판단했으니, 이제 군에게 지시할 차례였다. 영국 해군장관(First Lord of Admiralty, Board of Admiralty[13]를 총괄하는 직책) 윈스턴 처칠은 십수 척의 전함과 수십 척의 수송선, 순양함 등으로 이뤄진 대함대를 몰고 적의 저항을 간단히 무시하며 그대로 오스만 해안으로 쳐들어가 단숨에 병력을 상륙시켜 최종적으로는 코스탄티니예까지 밀어버린다는 작전을 수립했다.

...여기까지는 좋았을 것 같지만 계획이 지나치게 원대했기에 반발 또한 엄청났다. 독일 육군의 지원으로 완전히 요새화된 다르다넬스 해협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해군이 막대한 함포 사격으로 해안포 진지들을 제압하고, 이를 이어 육군이 상륙해 잔존병력을 소탕하면서 코스탄티니예까지의 진로를 열어야 했다. 한마디로 육해군의 절대적 협력이 필요했는데, 육군의 주력을 구성할 프랑스군은 물론이고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 사령관 새크빌 카든 제독까지 싸우면 피해가 클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처칠은 해군만으로 그냥 밀어버리겠다는 단독작전을 수립해버렸고, 일은 이미 이 단계부터 꼬이기 시작했다.

다만 처칠의 갈리폴리 안건 이외의 작계가 해군경 피셔의 북해 안건이었는데, 세계 2위의 독일 해군 + 해안포 요새가 있는 독일 본토 상륙작전인지라 상대적으로 쉬워 보인 갈리폴리가 선택되었다.

3. 진행

3.1. 다르다넬스 해전

Battle of Dardanelles Narr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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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군의 포격

다르다넬스 해협에는 독일 제국 육군 대장 잔더스 장군이 바로 이 차낙칼레 주둔 오스만 육군의 사령관으로 있었다. 그러나 오스만 육군 장병들은 잔더스 장군을 그다지 따르지 않았고, 오스만 제국의 무스타파 케말 육군 대령(훗날의 아타튀르크)이 잔더스 장군의 지휘안을 잘 조율하면서 참모장 격으로 오스만 육군을 잘 다독였기에 그가 사실상 사령관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잔더스 장군도 이 30대 후반의 젊은 대령을 꽤 높이 평가했다.

상륙 당일인 2월 19일, 영국과 프랑스 연합함대가 요새를 공격했지만, 이미 이곳을 요새화한 잔더스 장군의 지휘 아래 오스만군의 요새 해안포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다. 일주일간 포격전 끝에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은 피해가 크진 않았으나 기뢰제거에 큰 진전을 보지 못한다. 이때 연합군 함대가 입은 피해의 다수는 포격이 아닌 기뢰에 의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오스만군의 포격이 무력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연합군 해군도 오스만군이 해협에 잔뜩 깔아둔 기뢰의 존재를 알고 있었으나, 당시 기뢰 제거를 담당한 함선들은 징발된 민간인 함선들에 민간인 선원들이 담당하고 있었고, 이들이 오스만군의 포격에 겁먹고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기뢰 제거는 영영 불가능해지고 만다. 결국 카든 제독이 작전 실패의 책임을 지고 교체되었으며, 다시 3월 18일 2차 공격을 시도했으나 이날은 16척 중 전함 세 척이 침몰하고 세 척이 대파되는 참패였다. 결국 이번에는 영국 함대 총사령관 피셔 제독이 처칠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사퇴해버렸고, 당연히 처칠도 그 책임을 물어 잘렸다.

물론 해군의 포격으로 오스만 육군 역시도 피해가 컸기에 그대로 밀어붙이면 싸움을 해볼 만했으나, 처음 처칠이 강행했을 때부터 해군 단독작전이었기 때문에 상륙할 육군 자체가 없었다. 뒤늦게 영국 육군 중동사령관 해밀턴 장군이 해군을 도와 진격한다는 육해군 연합작전으로 변경한 것이 이미 1차 공격이 실패한 3월 12일이었고, 준비 부족 때문에 2차 공세가 실패할 때에는 병력 자체가 준비가 안 된 상태였다. 결국 상륙작전은 4월 25일에나 펼쳐졌고, 오스만 제국군은 병력을 회복할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 이 전투를 다르다넬스 해전이라고 부른다.

3.2. 상륙작전의 시작

그 6주간의 시간 동안, 무스타파 케말 대령의 오스만 육군은 보충병들을 받아들여 다시 한 번 전투력을 회복한 뒤였다. 이때 추가로 충원된 오스만군 병력이 10만. 요새포와 해안포도 다시 재구축했기에 앞서 한 공격은 완전히 헛짓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이 와중에 케말 대령은 장병들을 모아두고 연설을 한다.
"우리가 무너지면 오스만 제국 본국이 무너지고, 우리가 이젠 노예가 되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제군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은 살아남기 위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하여 싸워야만 한다. 그러나 이는 개죽음이 아니다. 오늘 우리들의 죽음이 조국을 지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며 그대들 이름은 남을 것이다. 나 역시 여기에서 무너지면 제군과 같이 시체로 뒹굴고 있으리라."

그리고 상륙작전은 뒤늦게 다시 강행된다. 그런데 영국 육군 영국 해병대는 해안에 첫 발을 디딘 뒤에야 이 지역이 대규모 병력이 상륙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운 지형임을 깨닫게 된다. 해안의 폭이 워낙 좁아 상륙한 영국군은 그 자리에 못박힌 채 고지대에 위치한 오스만군의 대포와 기관총에 맞는 지경이었음에도 영국군은 당초 계획대로 병력을 차분히 그 속으로 밀어넣었다.

게다가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군을 너무나도 얕잡아봤는데, 특히 오스만군의 화기를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은 탓에 나중에 크게 후회하게 된다. 영국군은 오스만 제국 육군이 저격수를 보유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저격수 자체를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당시 오스만 제국 육군은 7.92mm 마우저 소총으로 무장한 저격수 부대를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이들은 시골에서 어릴 적부터 총으로 늑대나 온갖 동물을 사냥해 사격 솜씨가 출중했는데, 결국 이들 저격수 부대에게 영연방군은 생각보다 많은 피해를 당하고 나서야 부랴부랴 저격수 부대로 맞섰다. 하지만 적지 않은 피해를 당하고 적군에 대한 정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수세에 몰리던 와중 결국 수뇌부에서 내놓은 작전이 해군 함포들을 이용한 포격으로 화망을 형성해서 오스만군을 참호에서 교착시키고, 그때 그나마 좀 상태가 멀쩡한 오스트레일리아 보병 사단이 일제히 고지로 돌격해 참호를 뺏고 전진한다는 아주 지극히 간단해보이는 작전이었다. 의도는 좋았고 성공 가능성도 굉장히 높았다. 그런데… 막상 작전 개시 당일에 하필 함포를 지휘한 사령관과 보병대를 지휘하는 사령관의 시계가 일치하지 않았다. 해군의 함포 사격은 애저녁에 끝나버렸고, 함포의 화망을 바탕으로 돌격했어야 할 육군이 튀어나왔을 때에는 이미 해군의 엄호사격은 다 끝난 뒤였다. 만일 여기서 다시 포격을 하고 보병대가 돌격했으면 될 수도 있었으나 외부의 전황을 모르는 최고사령부는 그냥 씹고 돌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오스트레일리아 사단은 몇 m도 달리지 못하고 기관총의 화망 속으로 뛰어들어야 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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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군 방어선을 향해 돌격하는 '호주-뉴질랜드' 군단(ANZAC)

결국 단 하루 만에 오스트레일리아 사단 중 8천 명이 무인지대의 백골이 되었고 1만 8천 명은 부상당하는 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15][16]

그리하여 연합군은 상륙지점에서 단 1마일도 전진하지 못하고 해안에 발이 묶이게 되었다. 거기다 보급을 두 세계대전 동안 다 책임진 미국이 참전하기 2년 전이라 보급이 정상일 리 만무했고, 물조차도 현지에서 구하지 못해 멀리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실어오는 물탱크에 의지해야 했는데다, 위의 다르다넬스 해전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기뢰밭이기도 해서, 제때 보급되는 물자가 없다시피 하였다. 즉 정상적인 보급도 안되는 마당에 그 보급 중 상당량을 식수에 할당해야 했다는 거다. 당연히 그 자리만큼 탄약 보급량은 줄었고.[17] 그런 상황에서도 영국군은 병력을 끊임없이 축차투입, 박살이 나는 수순을 무한 반복했다. 전투가 중반을 넘어서자, 오히려 오스만군이 요새와 참호에서 튀어나와 연합군을 해안으로 밀어내기 시작했는데 하마터면 해안가에 상륙시킨 협상국 병력이 몰살당할 뻔한 상황까지 있었다.

게다가 해군의 피해도 없지 않았다. 1915년 5월 13일 새벽 1시, 함포로 지상 지원을 하던 카노푸스급 전함 HMS 골리앗(Goliath)이 연합군 구축함들의 경계를 뚫고 잠입한 오스만 제국 해군의 구축함 무아비네티 밀리예(Muavenet-i Milliye)[18]에게 어뢰 공격을 당해 굉침하면서 570명의 전사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오스만 제국 육군 57연대는 총알도 포탄도 모두 바닥이 났지만 그들 모두는 "오늘 우린 죽기 위하여 싸운다!"를 외치며 착검 돌격을 가한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들은 착검 돌격 전 정말로 돌을 내던지면서 싸웠다고 한다. 이때 북마케도니아 출신 연대장 휘세인 아브니 베이(Hüseyin Avni Bey, 1874 ~ 1915) 대령이 장검을 쳐들고 맨 먼저 달려나갔고, 연합군의 총격에 그가 쓰러지자 뒤따르던 부연대장이 연대장의 장검을 쳐들고 진격했다. 대장부터 이렇게 솔선수범을 보이니 사기가 오른 연대원들도 착검 돌격해 결국 전원이 장렬히 전사했다. 이 집념 어린 착검 돌격에 연합군의 피해도 장난이 아니었던지라 육상 돌격을 머뭇거리게 된다. 사실 연합군이 병력 피해를 감안하고 묻지마 돌격을 했더라면 승산이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오스만군은 당시 총알 부족 및 여러 문제에 빠졌지만 연합군들이 신중을 기하느라(물론 이들도 위에 열거한 여러 사정과 문제도 있었지만) 오스만군은 병기와 탄약을 추가 보급받을 시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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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 육군 57연대장 휘세인 아브니 베이 대령.

그 덕분에 나중에 아타튀르크는 이 57연대 전원의 용기 어린 활약으로 승리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기리면서 연대장의 이름을 딴 훈장을 제정하고 이 연대를 명예 부대로 헌사했다. 하지만 부대를 재건하지 않고 영원한 명예 부대로만 남겨뒀다.[19]

그렇게 몇 달에 걸친 결국 지지부진한 소모전 끝에 연합군 사령관 이언 스탠디시 몬테이스 해밀턴(Ian Standish Monteith Hamilton, 1853 ~ 1947)이 해임되었고, 후임 찰스 카마이클 먼로(Charles Carmichael Monro, 1860 ~ 1929) 장군은 이듬해인 1916년 1월 작전 실패를 인정하고 퇴각을 결정해야 했다. 8개월 넘게 끈 이 전투로 연합군은 총병력 57만 가운데 25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오스만군 또한 32만 명의 병력 중 25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3.2.1. 57연대 총원 결사에 대한 반박

반면 영어 위키백과에는 57연대 연대장 아브니 베이가 1915년 8월 13일 지휘부로 날아온 포격에 사망했다고 나온다. 또한 터키어 위키백과에서도 동일한 서술이 나온다. 그리고 여기서 나온 57연대는 1880~1913년, 1915년~1918년까지라고 나온다. 만약 이 문서의 서술대로 연대가 전멸했다면 1918년까지 존속할수 있었을까? 란 의문이다.[20] 또한 위키백과의 서술에 따르면 57연대는 이후 팔레스타인에 투입되어 영국군과의 메기도 전투에서 포위 공격을 당해 대부분 전멸했다는 서술도 나온다. 이에 이 얘기는 튀르키예 민족주의자들의 미화일 가능성도 있다는 반론이 있다. 57연대 공훈비도 갈리폴리 전역 종료 후 철십자 훈장을 받고, 메기도에서 전멸한 이후에야 튀르키예에 공훈비가 세워졌다고 한다.

3.3. 협상국의 탈출 작전

일단 퇴각이 결정되긴 했지만, 무려 10만이 넘는 연합군 병사들이 갈리폴리 반도에 고립된 상황이었다. 이정도로 대규모의 병력이 갑자기 철수작전을 진행했다간 고지대에 진을 치고 있던 오스만군이 그 낌새를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고, 철수하느라 정신이 없는 연합군 진영에 오스만군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기라도 한다면 사기도 낮고 부상병도 많은 연합군 병사들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몰살될 것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퇴각을 결심한 찰스 먼로 역시 이 작전을 진행하면서 30~40% 가량의 손실이 발생할 것이라고 내다볼 정도로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결국 연합군은 윌리엄 리델 버드우드(William Riddell Birdwood, 1865 ~ 1951)의 지휘 아래 필사적인 기만작전을 펼치게 된다.

일단, 위에서 말했듯 대규모 철수는 발각될 위험이 컸기 때문에 연합군은 군함으로 꾸준히 물자를 운송하는 척하며 조금씩 병력을 탈출시키기 시작했다. 영국 군함들은 모래로 가득 찬 보급품 상자를 평소와 다름 없이 실어 날랐고, 연합군 병사들도 오스만군이 수상한 낌새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평소와 완전히 똑같은 군율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방식엔 치명적인 문제점이 하나 있었는데, 눈으로 비추어지는 모습은 그런대로 위장할 수 있어도, 10만명이 넘는 군인들이 자연스럽게 만들어내는 소음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점점 고요해지는 연합군 진영을 오스만군이 의아하게 여겨 소규모 정찰분대를 보내기라도 한다면 병력이 빠져 듬성듬성한 참호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연합군의 상황은 곧장 들통나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윌리엄 버드우드는 오히려 이것을 역으로 이용해 오스만군을 완벽하게 속일 아이디어를 떠올렸는데, 철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며칠전부터 전방 군인들에게 그 어떤 소음도 내지 말고 자리를 유지하라고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만약 오스만군이 공격을 감행한다면, 그 수가 많던 적던 상관 없이 남은 탄약량 따위는 신경도 쓰지 말고 미친 듯이 총알을 발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러한 명령 덕분에, 연합군 진지가 고요한 것은 사람이 적어져서가 아니라 오스만군의 공격을 유도하려는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오스만군에게 심어주는데 성공했고, 실제로 병사가 상당수 퇴각해 대부분의 참호는 텅 빈 상태가 된 순간에도 오스만군은 연합군의 반격을 우려해 대규모 공격을 시도하지 않았다.

연합군은 마지막 순간까지 오스만군을 철저하게 속였는데, 오스만군 진영에 최대한 가깝게 온갖 부비트랩, 지뢰, 화약 등을 매설한 다음 마지막 병사를 태운 배가 해안을 떠나기 직전 점화 스위치를 눌렀다. 일반적인 참호전에서 상대방의 포격은 곧 상대방의 보병들이 파상적인 공격을 펼칠 전조였기 때문에, 이런 거대한 폭발을 적의 엄청난 포격이라고 오해한 오스만군은 한참 방어 태세를 갖추느라 연합군의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필사적인 기만작전 덕분에 철수는 대단히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연합군은 찰스 먼로의 예상과 달리 단 한명의 사망자도 내지 않은 채 갈리폴리 반도를 빠져나오는데 성공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사에 손꼽히는 최악의 삽질 작전 이후 전쟁사에서 손꼽힐 정도로 성공적인 철수 작전이 진행된 것.

4. 영향

오스만 제국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구국의 전투.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시리아, 이라크, 팔레스타인, 트란스요르단 등의 해외 영토를 모두 잃어버렸지만 갈리폴리에서 승리함으로써 본토까지 점령되는 것은 막을 수 있었다. 결국 오스만 국내는 별다른 피해 없이 온존될 수 있었고, 전후에 벌어진 그리스 왕국과의 전쟁에서 배후지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21] 디스커버리 채널 다큐멘터리에서는 이 전투의 결과를 튀르키예의 승리라고 분명하게 정의했다.

이 전투로 전쟁 영웅이 된 케말은 장군으로 진급했으며, 이후로 군에서 그를 따르는 장교들과 세력이 많아지면서 서서히 권력을 가지게 된다. 그 뒤 패전으로 몰락한 오스만 제국의 혁명을 이끌어 왕조를 엎어버리고 귀족 정치와 부패를 척결하였다. 그후 새로 탄생한 튀르키예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면서 튀르키예의 국부로 지금까지도 칭송받는다. 물론 오스만 제국 황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을 몰아내는 반역자를 키운 승리였으므로 사실상 피로스의 승리였지만 말이다.

반대로 윈스턴 처칠에게는 이 전투에서 보여준 꼴사나운 짓으로 인해 쿠르드족에게 최루가스를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것과 같이 정치 인생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암흑기이자 흑역사로 영원히 남게 되었다. 처칠의 정적들은 "처칠의 오만함이 보기 싫다면 '갈리폴리 전투에서 넌 뭐했냐'고 말해라. 그러면 대꾸도 못한다."며 비웃었다고 한다. 실제로 처칠은 이 말만 들으면 크게 화를 냈고, 그래서 친구들도 그의 앞에서 이 전투에 관한 얘기를 일절 거론하지 않았다. 처칠은 이에 대한 책임을 해군참모총장 존 피셔[22] 제독에게 떠넘기고 해임했으나[23][24] 결국 해군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고 예비역 육군 중령 신분에 따라 소집되어 참호전에 투입되었다가 생환했다. 됭케르크 철수작전 전후의 처칠을 다룬 영화 다키스트 아워에서도 표현되는데, 정적 핼리팩스 백작이 갈리폴리를 언급하며 처칠을 밀어붙이자 처칠이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그건 나쁘지 않은 작전이었다며 항변하는 모습이 나온다.

갈리폴리 전투에서는 고전적인 상륙작전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났고,[25] 이후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 지역에서의 소규모 상륙전 경험과 이 전투의 교훈을 토대로 신개념 상륙함을 건조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작 개삽질의 주범인 영국은 여기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여 27년 후 다시 한 번 크게 디에프 상륙 작전에 패배했다고 알려졌으나 사실 영국도 나름대로의 교훈을 얻기는 얻었고, 전간기 시절 미 해군 및 미 해병대와의 공동훈련과 독자적인 연구를 통해 상륙전에 상당한 노하우를 쌓게 된다. 약화되어 가는 경제력과 상륙할 곳이 적은 유럽의 지형적 상황 때문에 미국에 비하면 소규모 상륙병단이었지만 그래도 해병대를 계속 유지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는 해병대의 보병부대를 코만도화해 특수부대적인 성격을 어느 정도 겸비한 유럽식 소수정예 상륙부대로 개편, 대규모의 미국식 해병대와는 차별화된 성격의 해병대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해병대 내에 코만도 여단 외에도 별도의 소규모 특수부대인 SBS까지 보유했다. 그리고 미국이 퇴짜를 놓은 LCVP 차량병력상륙정의 전신인 히긴스 보트를 낼름 계약해 나름 잘 운용하는 걸 본 미 해군이 다시 사와 LCVP라는 이름을 붙혔다.[26] 그리고 조선소가 모자란 영국 해군의 주문으로 인해 미 해군이 영향을 받은 상륙함은 상륙선거함 전차상륙함( #), 전차상륙정, 대형보병상륙정이 있다.[27]

이 갈리폴리의 악명(?)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다시 나오는데, 도데카니사 전투에서 독일 국방군에게 큰 피해를 입으며 영국군이 패주하자 처칠은 또 어게인 갈리폴리냐며 비난을 받았다. 하필 위치도 갈리폴리에 가깝다

결과적으로 갈리폴리는 처칠을 까는 단어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그만큼 실패한 작전. 가타부타 말을 더 안 붙이고 '갈리폴리' 한마디 남기는 식이다. 워낙에 말아먹은 작전이라서 영미권에서는 최악의 작전이나 언급조차 하기싫을 정도의 실책들을 지칭하는 은어로 자리잡았을 정도다.

5. 이후

이 전투는 영국뿐 아니라 호주 뉴질랜드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도 기록되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ANZAC(호주-뉴질랜드 군단) 병력이 약 1만명 정도인데, 당시 호주와 뉴질랜드의 총 인구수가 다 합쳐도 5~6백만 명 정도밖에 안 된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피해라고 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동안 총 사상자 22만명, 그 중 사망자만 10만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인적 피해를 본 호주와 뉴질랜드는 다른 영국 식민지와 함께 본국 영국에 대해 더 많은 권한을 줄 것을 요구했고, 결국 훗날 외교권과 군사권까지 획득하면서 독립국이 되었다. 즉, 이 전투는 아이러니하게도 호주와 뉴질랜드 국민국가의 관념이 형성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존 키건의 저서『1차세계대전사』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 젊은이들이 갈리폴리 반도로 종종 여행을 온다고 한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발생한 안작 전몰장병을 추모하는 의미로 호주와 뉴질랜드에서 전투가 시작된 4월 25일을 함께 기리기 시작한 것이 지금의 안작 데이(ANZAC Day)로,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현충일과 같은 추모일이다. 처음에는 이 갈리폴리 전투만을 기렸으나 이후 그 대상이 확대되어 6.25 전쟁을 비롯한 안작군이 파병된 모든 전쟁에서 희생된 장병들을 추모하는 공휴일이 되었다.

아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1934년 안작 데이 당시 갈리폴리에 처음으로 찾아온 영연방 국민들에게 한 말이다. 당연하지만 아타튀르크는 튀르키예어로 말했으므로 튀르키예어 원문을 다음과 같이 싣는다. 이 연설문은 훗날 갈리폴리의 묘지와 호주 캔버라의 안작 대로(ANZAC Parade)에 있는 케말 아타튀르크 기념관, 뉴질랜드 웰링턴의 아타튀르크 기념관 등에 세워진 추모비에 새겨졌다.

하지만 현재의 연구에 의하면, 아타튀르크가 정말 이 연설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가 생전에 달리 영연방 병사들에 대해 언급한 것도 없고, 신문 기사들에서도 이런 연설이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1953년 이 연설문을 쓴 이브라힘 카야의 인터뷰에서 아래의 문장들이 처음 언급된 것이다.
Uzak memleketin toprakları üstünde
kanlarını döken kahramanlar;
burada dost bir vatanın toprağındasınız.
Huzur ve sükun içinde uyuyunuz.
Sizler Mehmetçiklerle yan yana,
koyun koyunasınız.
Uzak diyarlardan evlatlarını harbe gönderen
analar;
göz yaşlarınızı dindiriniz,
evlatlarınız bağrımızdadır.
Huzur içindedirler ve huzur içinde rahat rahat uyuyacaklardır.
Bu toprakta canlarını verdikten sonra
artık bizim evlatlarımız olmuşlardır."
Those heroes that shed their blood
피를 흘린 영웅들이여,
And lost their lives.
목숨을 바친 영웅들이여.
You are now lying in the soil of a friendly country.
그대들은 이제 친구의 국토에 묻혀 있다.
Therefore rest in peace.
그러니 고이 잠들라.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the Johnnies
여기 우리의 땅에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잠든
And the Mehmets to us where they lie side by side
조니들과 메흐메트들은[28]
Here in this country of ours.
우리의 눈에 다름이 없다.
You, the mothers,
머나먼 나라에서 아들을 떠나보낸
Who sent their sons from far away countries,
어머니들이여,
Wipe away your tears.
눈물을 닦아라.
Your sons are now lying in our bosom
그대의 아들들은 우리의 가슴에 안겨
And are in peace.
평온히 안식을 취하였도다.
After having lost their lives on this land they have
이 땅에서 목숨을 잃은 그들은
Become our sons as well.
우리 모두의 아들이 되었나니.

영국의 과학자 헨리 귄 제프리스 모즐리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29] 영국 입장에선 정말 여러 방면으로 잃은 것들밖에 없는 비극의 전투이다.

2022년 이 전투가 치러진 지역을 가로지르는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가 건설되었다. 이름은 차나칼레 1915 대교. 이름에 1915년이 들어가는 것을 보면 이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6. 여담

세이트 차부크(Seyit Çavuk)라는 한 오스만군 해안포 사수는 다르다넬스 해전 중 포탄을 옮기던 기중기와 다른 사수들이 피격당해 포탄을 옮길 수 없게된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무려 276kg나 되는 포탄을, 그것도 세 번씩이나 본인의 완력만으로 옮기는 괴력을 보였고, 그 덕분에 오스만군의 해안포는 사격을 계속하면서 영국 해군의 전함 HMS 오션을 격침시킬 수 있었다. 처음 두 발은 오션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지만, 마지막 한 발이 수면에 착탄하면서 함체를 주변 기뢰 근처로 밀어버리는 바람에 HMS 오션은 기뢰에 피격당해 침몰했다.

전투 이후 그는 영웅이 되었고, 포탄을 들고 사진을 찍게 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재시도를 했지만 이때는 도저히 들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무로 만들어진 포탄 모조품을 들고 사진을 찍었다. 이후 그는 "만약 전쟁이 또다시 일어난다면, 나는 다시 포탄을 들겠다" 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이후 세이트는 광부 등의 일을 하다가 1939년에 폐렴으로 49~50세의 나이로[30] 세상을 떠났고, 1992년에 그의 동상이 격전지 근처에 세워졌다.

최후의 앤잭군 갈리폴리 베테랑은 알렉 캠벨(Alec Campbell, 1899-2002)이다. 갈리폴리 전투에서 얼굴에 심한 부상을 당해 신경에 손상을 입어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호주로 돌아가 9명의 자식과 32명의 손자를 낳고 여러 업적을 이뤄냈으며, 2001년 6월, 로이 롱모어(Roy Longmore)가 106세로 사망한 이후 최후의 베테랑이 되었다. 이후 2002년 5월 17일에 알렉 캠벨도 사망하였으며 국장이 거행됐다.

최후의 영국군 갈리폴리 베테랑은 영국군 공병으로 참전했던 퍼시 고링(Percy Goring, 1894-2001)이며, 2차 세계 대전 중에는 홈가드로 복무했다. 1948년에 호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살다가 2001년 7월에 10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7.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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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먼 쇼, 죽은 시인의 사회로 유명한 피터 위어가 1981년 조국 호주에서 만든 영화 갈리폴리가 잘 알려져 있다.

280만 호주 달러를 들여 제작해 1174만 호주 달러를 벌어들였으며 파라마운트 글로벌을를 통해 미국에도 배급했다. 멜 깁슨이 주연 중 하나로 당시 27살의 젊은 시절을 볼 수 있는 작품. 작품적으로도 수작으로 평가받으며 후반부 호주군들이 닥돌하다 오스만군의 기관총 공격에 거의 전멸당하는 장면이 이 전투의 참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31] 국내 미개봉작으로 1990년에 CIC 비디오를 통해 갈리폴리라는 제목으로 비디오로만 나왔고 MBC에서 1992년 10월 4일 일요일 오후 3시에 <갤리폴리>라는 제목으로 더빙 방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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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튀르키예 다큐멘터리 영화 갈리폴리도 이 전투를 꽤 중립적으로 잘 다룬 작품이라 평가받는다. 제레미 아이언스 샘 닐, 자페르 에르긴(튀르키예 배우)이 내레이션을 맡았으며 감독은 톨가 외르넥(Tolga Örnek). (유튜브에 전체가 올라와있다. 영어자막 https://youtu.be/hoMPbyW30PM?si=VdTONHdFSj3WA9Bf )

2013년 튀르키예 영화 Çanakkale Yolun Sonu('차낙칼레, 길의 종점' / 국내개봉명 '지상최대전투 갈리폴리')는 튀르키예인의 눈으로 본 이 전쟁을 다룬 영화로 튀르키예에서 흥행에 성공했다. 단역이지만 아타튀르크(엔긴 외즈튀르크 분)도 나온다. 이야기는 발칸 전쟁 참전용사 무흐신(귀르칸 우이군 분)이 동생 하산(우무트 쿠르트 분)이 갈리폴리 전선에 징병되자 동생을 지키기 위해 자청해 한군두하고 저격수로 이름을 날리던 도중, 저격에 한 번 혼쭐이 난 영국군 대장이 특등 저격수 이글(벤 워윅 분)을 영입하여 그와 라이벌이 되는 구도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전체적으로 튀르크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게 묻어나오는 영화지만, 전쟁의 참혹함 속에서도 꽃피는 인간미와 전우애, 마지막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한 희생을 감동있게 그려냈다.

2015년 영화 워터 디바이너는 호주 육군에 입대해 이 전투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세 아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적대적 시선으로 가득한 튀르키예로 여행을 떠난 아버지( 러셀 크로우)의 이야기를 다뤘으며, 참호전을 위주로 한 갈리폴리 전투 장면이 묘사된다.

튀르키예 영화 갈리폴리 상륙작전[32] 갈리폴리 전투를 튀르키예인 비행기 조종사 살리에크렘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간호사 니할과의 연예가 중심인 애국주의 영화다. 다르다넬스 해전도 나온다.

2015년 197분에 달하는 TV 드라마 Deadline Gallipoli가 호주에서 만들어졌다.

뉴질랜드에서 <4월 25일, 갈리폴리>라는 애니메이션이 만들어졌다. 갈리폴리 전투에 참전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렸는데, 인터뷰 형식으로 다큐멘터리 성격이 강하다.[33]

스웨덴 파워 메탈 밴드 사바톤은 그들의 곡 "Cliffs of Gallipoli"로 이 전투의 전사자들을 추모했다.

게임 배틀필드 1의 캠페인 중 한 챕터에서 ANZAC 노병의 이야기를 담았다. 퇴각하는 영국군과 자신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홀로 오스만 제국군 요새로 돌격하는 내용이 인상적이다. 엔딩 크레딧에서 이 전투에서 두각을 드러낸 장군들이 튀르키예 공화국을 세우는데 주역이 되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2017년 말에 출시한 Turning Tides DLC에서는 갈리폴리 전투를 배경으로 한 멀티플레이용 맵 두 개가 새로 추가되었다.


Old Gallipoli's a Wonderful Place(이 갈리폴리는 멋진 곳이죠)라는 노래도 상당히 유명하다. 이 노래는 원래 해당전투에 참전한 연합군의 병사들이 아일랜드의 전통민요인 Mountains of Mourne(모언의 산)이라는 곡조에 맞추어서 가사를 만들어 부르던 노래였다. 그 당시 병사들의 애환을 알 수 있는 곡으로 전쟁의 참상속에서도 부족한 음식에 대한 인간적인 욕구를 익살스럽고 서정적으로 표현하였다. 제일 유명한 것은 1964년에 이탈리아의 모르몬 태즈내클 합창단이 부른 버전과 1978년에 폴 미쉘 해리스가 노래하고 알렉산더 암스트롱이 피아노로 연주한 버전이다.


[1] 1901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 [2] 1907년에 영국으로부터 독립 [3] 영국의 식민지 [4] 영국의 자치령이자 일부 주권국 [5] 영어에서 bastard는 '사생아'라는 사전적인 의미 외에도 그 뜻 때문에 그 자체가 욕설이기도 하다. 우리말로 하자면 개자슥, 후레자식 (호로새끼) 정도가 되며, 어감은 새끼 정도로 쓰인다. [6] 포로로 추정. [7] 의외지만, 식민제국 시대 영국은 외교관을 파견해 당근을 내미는 것으로 시작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이, 식민지는 땅따먹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국과 독점적으로 교역을 하는 나라들의 목록이고, 독점적인 외교나 합병은 그 수단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협상으로 모든게 해결되면 제일 최상의 상황이었다. 그럴 리가 거의 없다는 게 문제지만. [8] 이 조치는 나중에 덴마크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다. 나치 독일 노르웨이 침공을 하면서 선제 작업으로 덴마크를 먼저 침공했는데, 빈약한 덴마크군으로 독일군에 맞선다는 건 말그대로 자살행위고 그렇다고 국왕 크리스티안 10세 휘하 정부 각료들이 영국이나 프랑스로 망명해서 망명정부를 꾸리는 것도 이전 전쟁에서의 업보로 불가능했기 때문에 결국 덴마크는 개전 6시간만에 독일에 항복한다. 또한 영국은 이때의 경험으로 유럽의 중립국도 말만 중립국일 뿐이라고 느끼고, 주요 중립국에 대한 전시전략계획을 수립한 뒤 노르웨이 침공 당시 실제로 시행한다. [9] 자세한 내용은 애진코트 오스만의 1차대전 참전과정 글을 읽어볼 것. [10] 오스만이 자체적으로 중립 혹은 참전을 결의할 수 있는 주체성이 있었냐 없었냐를 떠나 처칠의 애진코트 강탈은 불법적인 외교행위였다. [11] 이때의 경험으로 튀르키예 공화국 성립 이후의 수도는 앙카라로 옮겨진다. [12] 다만, 일본령 조선과는 완전히 육로로 연결돼 그쪽으로 물자가 내입해왔으니 100% 자력으로 전쟁을 치른 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당대 표도로프 자동소총은 일본에서 들여온 6.5x50mmSR 아리사카 탄을 이용한 물건이며 이외에도 많은 종류의 물자지원을 받았다. 물론 일본 제국이 다른 열강보단 경제력은 약했으나 적어도 일본령 내에는 총탄 한발도 들어오지 않은 상태라 보급 기지로썬 그럭저럭 쓸만했다. 문제는 당시엔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완전 개통되기 전이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동부전역까지 운송이 굉장히 어려웠단 점과 불과 9년전 일어난 러일전쟁으로 두 국가 모두 상당히 분위기가 좋지 않았기에 뒷이야기가 많았다고 한다. [13] 영국 해군의 직책. 1400년 경 창설되었으며, 1964년 전쟁부(국방부)로 통합되어 없어졌다. 1941년 당시의 직책은 제1해군경 = 해군참모총장, 제2해군경 = 해군인사부장인 식으로 제5해군경까지와 그외의 직책으로 이루어진, 해군 군정(軍政) 부서와 군령(軍令) 부서가 통합된 형태였다. [14] 이 장면은 1981년작 영화 갈리폴리에 그대로 묘사됐다. [15] 이게 밑에 서술한 호주 영화 갈리폴리의 배경이 된다. [16] 그나마 보병대 쪽 시계가 좀 늦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보병대 쪽 시계가 더 빨랐으면 포병대의 포탄에 팀킬당할 수도 있었다. [17] 제2차 세계대전 때 태평양 전쟁에서 미군이 괜히 섬을 점령하면 새 우물을 팠던 게 아니다. [18] 무아비네티 밀리예의 배수량은 겨우 765톤. 골리앗의 배수량이 14,500톤이었으니 성경에 나온 골리앗의 최후를 완벽하게 재현해버렸다. [19] 현재 튀르키예 겔리볼루에 가면 57연대를 기리는 기념비와 그들의 무덤이 있다. 아타튀르크는 진정한 조국의 영웅이라면서 살아생전 자주 왔다고 한다. [20] 다만 연대가 재편되었다고 하면 설명이 아예 안 되지는 않는다. 또한 전멸의 뜻은 다 죽은게 아니라 약70%정도가 전투불가상태가 되어 재기능을 못한다는 뜻이니 약간의 생존자가 있었고 서류상으로 존재했으나 18년에 생존자들을 다른 연대로 보내고 해체했을수도 있다. [21] 사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오스만 제국도 1차 세계 대전 초반에는 그럭저럭 선방한 편이었다. 비단 갈리폴리 전투뿐 아니라, 러시아와 싸운 캅카스 전선에서는 조금 밀리면서 승패를 주고 받았지만 1916년 중반의 비틀리스 전투에서 무스타파 케말의 승리로 러시아 제국군의 본토 진격이 저지되었고, 중동 전선에서도 찾아보면 1916년까지는 오스만이 승리한 전투도 꽤 많다. [22] John Arbuthnot Fisher (1841.1.25~1920.7,10). 최종 계급은 해군 원수. [23] 혹은 항의의 표시로 사임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24] 참고로 피셔 제독은 해당 작전을 이 악물고 반대했다. [25] 꼴랑 노젓는 나무배에 수십명이 탑승하는 열악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었다. [26] http://blog.naver.com/imkcs0425/60166932207 [27] http://blog.naver.com/imkcs0425/60167805017 [28] 각각 영연방군과 오스만군을 지칭한다. [29] 살아만 있었다면 노벨 물리학상이나 화학상이 유력했을 것이다. 간단하게만 설명하면 모즐리는 무려 19세기 초 원자설을 처음 제기한 존 돌턴 이후로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원소를 특정하는 방법을 발견해냈다. 결정적으로 이 사람의 공로로 지금의 주기율표가 거의 완성되었다. [30] 출생년도가 명확하지 않다. [31] 엔딩에서는 함께 돌격하던 전우들은 모두 전사한 채로 주인공이 총도 잃고 목적지도 없이 그저 앞으로만 달리다가 그 역시 총에 맞아 쓰러지면서 그냥 영화가 끝나버린다. 전쟁의 비참함을 건조하지만 매우 잘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32] 원제목은 '마지막 편지'다. [33] 극 후반에 인터뷰한 몇몇 사람들이 사라지는데, 이들은 갈리폴리 전투에서 전사한 사람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