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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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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이족
回族 | Hui People | خُوِذُو
파일:후이족.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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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0A677281-C0FF-47D5-B6C9-4481A542A879.jpg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후이족 요리사들.
파일:1179DF81-7A68-4CE2-A670-357A28A60041.jpg
파일:E2B887D8-095E-494B-93DA-1095A8369DD4.jpg
동심청진사(同心清真寺)[1] [2] }}}}}}
<colbgcolor=#ee1c25><colcolor=#ffff00> 명칭 <colbgcolor=#fff,#2d2f34> [ruby(回, ruby= Huí)][ruby(族, ruby=zú)] ( 중국어)
خُوِذُو (샤오얼징)
Hui people ( 영어)
인구 10,586,087명
주거주지역 닝샤 후이족 자치구

1. 개요2. 어원3. 풍속4. 역사
4.1. 당, 송 시대의 해상 교역로를 통한 후이족 유입4.2. 송, 원, 명 시대의 육/해로를 통한 후이족 유입4.3. 청나라의 회민 반란
4.3.1. 자흐리야파 반란4.3.2. 회민 반란
4.4. 현대
4.4.1. 1980년대 이후
5. 정의
5.1. 한족 외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
6. 후이족의 이름7. 중국 당국의 이슬람교 규제8. 문화9. 둥간족10. 판사이11. 냉담자 / 비무슬림 후이족12. 우츨인 / 바바 뇨냐13. 인물
13.1. 원나라 & 명나라13.2. 청나라 & 중화민국13.3. 현대
14. 참고 문헌
14.1. 한국어 문헌14.2. 영어 문헌14.3. 아랍어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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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소수민족 중 하나. 한족화되어 중국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이다. 한국 한자음대로 회족이라고도 한다. 중국 내 인구는 약 1,058만 명. 중화권[3] 외에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지에 약 15만여 명 정도가 거주하는데 이들은 둥간족(東干族, Дунгане)이라고 불리며 그들의 언어는 둥간어라고 하는데 중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지만 한자가 아닌 키릴 문자로 표기하는 게 특징이다.

후이족이라는 개념에는 이슬람을 믿는 한족(한회, 漢回)과 중세 이후 중국 본토에 정착하여 한화된 무슬림들의 혈통적 후예라는 개념을 모두 포괄한다. 조상은 무슬림이었지만 후손들이 이슬람도 믿지 않고 완전히 한화된 경우나, 이슬람을 배교한 후이족 같은 경우에는 후이족으로 분류하는 게 맞는지 논란이 많다. 현재는 후이족인지를 알려면 후커우(戶口·호적)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전체 후이족 중 닝샤 후이족 자치구에 사는 인구 비율은 전체의 34%에 불과하며 의외로 중국 곳곳에서 살아가고 있다. 특히 간쑤성 섬서성, 허난성 일대에 많이 살고 있었으나 청말 회민반란 이후 후이족 상당수가 죽거나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이후 현재는 중국 각지에 골고루 흩어져 살고 있다. 이들은 도시에서 도축업이나 소매업 관련된 사업을 운영하거나 택시 기사 등으로 활동하는 경우가 많다. 정치적으로 가장 성공한 소수민족으로 고위직에도 상당히 많이 진출해있다. 한족 일색인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원에 소수민족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올라본 후이량위(回良玉)가 후이족이었다.

중국 역시 다른 이슬람 민족들과 다르게 이들에게는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를 시행할 수 있도록 자치권을 부여하며 다른 무슬림 민족들과 다르게 이들은 중국 사법 체계를 자율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일부 모스크에서는 설교자이자 지도자인 이맘과 법원이 같은 중재 사무실을 이용하며 이맘은 샤리아법을 근거로 분쟁을 조정한다. 그런 곳에서 중국 사법 체계는 샤리아법의 부족한 부분을 보충하거나 조정이 실패한 경우에 한해서 개입한다.[4] 비교하자면 서구 사회에서 일부 무슬림 이민자들이 자칭 샤리아 경찰을 조직하면서 말썽을 부리는 데에는 종교적인 목적보다는 같은 나라 출신 이민자들을 저임금으로 착취하고, 입국 브로커에게 지불하느라 빌린 돈을 잘 갚는지 확인하기 위한 목적이 크다. 반면 후이족의 경우 정교분리가 확실한 데다가 오랜기간 중국에서 정착해온 역사와 노하우가 있기 때문에 따로 샤리아를 시행해도 이웃한 비무슬림들과 마찰이 적은 편이다.

2. 어원

당나라 때부터 원나라 때까지 많은 유럽인들과 남아시아인, 중동인들이 회흘(回吃)[5] 지방을 건너와 정착하였다. 중국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이들은 추운 겨울이 되면 따뜻한 중동으로 돌아갔다가 날씨가 풀리면 중국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돌아올 회(回)’를 붙여 후이족으로 불리게 됐다는 가설도 있다. 이러한 색목인들 중에는 무슬림 뿐만 아니라 기독교, 유대교 등 다양한 종교를 가진 자가 많았다. 그 때문에 한때는 중국에 정착한 기독교인과 유대인도 회회인(回回人)이라 칭하였는데, 이를테면 기독교인은 십자회회(十字回回),[6] 유대인은 남모회회(藍帽回回)[7] 등등 회회 앞에 특징을 붙여 칭했다.

중세 원나라의 한족 민족주의자들의 기록에 따르면 “회회인”들은 코가 무척 길고 털이 덥수룩하고, 킵차크 칸국에서 온 사람들은 머리색이 노랗고 눈 색이 파랗기 때문에[8] 괴이한 외양으로 한족 여성들이 결혼을 기피했다라고 한다. 여기서 보듯 중세 기록에 나오는 회회인은 무슬림을 의미한다기보다는, 중동인들을 뭉뚱그려 지칭하는 어휘였다고 볼 수 있다.

명나라 시기에는 서역 출신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결혼하는 것을 금하고 한족하고만 혼인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어 이들을 한화시켰다. 시간이 지나면서 중국의 기독교인들과 유대교인들이 한족들과 완전 동화하며 원래의 종교를 버리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슬람 회회인 이외에는 그 수가 급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결국 회회라는 말 자체는 무슬림을 칭하는 어휘로 굳어지게 된다. 이렇게 이슬람은 회교라고 칭해지고 무슬림은 회민, 후이족, 한족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한회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3. 풍속

파일:BC0E587F-643A-450A-8CB9-227481B3B3CB.jpg
후이족 노인의 모습.
후이족의 복식은 히잡과 모자 외에는 한족과 별 차이가 없다.
교파를 따지자면 후이족은 수니파에 속한다. 또한 중국화가 되는 과정에서 일부 유교적인 요소도 흡수하여 일부 후이족은 조상숭배를 중시한다.[9] 후이족들은 하나피파를 따르는데 하나피파는 현지 관습법을 중시하는 법학파( 마드하브)이고 중국에 유입된 하나피파 역시 중국의 상황 및 다른 이슬람권의 영향으로 3가지 분파로 나뉘어 발전하게 되었다. 후이족 사회의 주요 교파로는 당나라에서 명나라 시기에 유입된 거디무(格迪目)파,[10] 청나라 치세 초 유입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수피 낙슈반디야 교단에서 갈라져나온 쿠피야(虎夫耶; خفيه)파와 여기에 다시 시아파 수피즘을 흡수한 자흐리야(哲赫林耶; جهرية)파가 있다. 쿠피야파와 자흐리야파는 수피 교단이고 거디무파(까딤파)는 수피즘 대신 유교 사상과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다.

후이족은 예배를 하루에 5번 드리는 경우는 드물지만 금요일마다 모스크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수피의 영향으로 성자묘를 숭배하는 경우도 있으며, 관혼상제의 풍속은 이슬람을 따른다. 중국에 있는 모스크는 '청진사'로 불리며 건축 양식과 이슬람식 건축양식이 융화된 양식이다. 언어는 중국어를 쓰지만, 일부 아랍어, 페르시아어 어휘가 도입되었다. 과거에는 샤오얼징이라고 해서 아랍 문자를 빌려서 관화를 표기하는 전통이 있었으나, 지금은 쓰이지 않는다. 티베트 라싸의 무슬림 집단 까체족, 파키스탄 길기트 발티스탄주의 티베트계·이란계 혼혈 발티인, 인도 라다크 지방의 푸릭파족 등과 함께 중국티베트어족의 무슬림에 속한다.

또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서 이슬람화된 민족의 특성 때문인지 남성의 할례 문화가 있어 후이족 남성은 다른 중국의 민족[11]과는 다르게 포경수술을 많이 받는다. 참고로 위구르족, 보안족, 둥샹족 등 중국의 다른 무슬림 소수민족들도 후이족과 마찬가지로 무슬림이라는 점에서 할례 문화가 있어 해당 민족들 또한 남성들이 포경수술을 많이 받는다.

그런데 후이족 중에는 완전히 세속화되어 아예 무종교인이거나 이슬람교를 버린 사람도 많다. 이런 사람은 언어나 생김새나 문화나 한족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사실 이슬람 국가가 아닌 이상 할랄푸드를 지키는게 어렵기 때문에 대도시에 나와 있는 후이족 중국인 중에서는 명백한 돼지고기만 피하는 후이족도 많다.[12]

청결을 중시하는 이슬람교 특성상 이들의 음식 문화는 위생적인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마치 미국에서 코셔 푸드가 안정성이 검증된 고급 식자재로 평가받는 것처럼 청진 요리도 안전한 중화요리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한족은 야생동물을 즐겨먹는 관습이 있고,[13] 이게 SARS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와 같은 질환의 원인이 되곤 하지만, 후이족은 이슬람 율법에 하람 푸드로 규정된 개와 돼지는 물론, 박쥐, 설치류, 천산갑, , 사향고양이류 따위는 입에 대지도 않는다. 다만 야생동물 고기 중에서도 사슴고기와 고기는 이슬람교에서 먹지 못하게 하지 않으므로 후이족도 개인적으로 싫어하지 않는다면 먹는 데 거부감이 없는 경우가 많으나, 대부분은 다비하 의식과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위생 검사를 거쳐야 할랄 푸드로 인정받는 음식의 특성상 야생으로 먹지 않는다. 그러므로 각각 사슴농장과 꿩농장에서 사육된 사슴과 꿩으로부터 다비하 등의 절차에 의해 생산된 사슴고기와 꿩고기를 먹는 데 거부감이 없다고 하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한족이 즐겨 먹는 돼지고기는 이슬람 율법상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후이족들은 쇠고기 양고기를 즐겨 먹으며, 이슬람교 계율대로 피를 완전히 빼서 먹는다. 명나라, 청나라 때 중국인들은 쇠고기 하면 후이족을 떠올릴 정도였다. 한편, 소나 양의 고기를 구하기 힘든 지역(특히 중국 남부 지역)에 거주하는 후이족들은 쇠고기와 양고기 대신 닭고기 오리고기 내지는 염소고기를 많이 먹는다. 해안이나 강가에 사는 후이족은 어패류를 즐겨 먹기도 한다.

중국은 주류문화가 발달되어 있지만, 후이족은 코란에 음주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14] 또한 중앙아시아나 동남아의 무슬림과는 달리 흡연도 금기시되어 있다. 물론 다른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아라크( 대추야자술)와 물담배는 금기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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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우루무치의 타란치[15]와 후이족 남성들. 청나라 시절 후이족들이 이와 비슷한 복식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후이족의 전통 의복문화는 한족과 대동소이하되, 남성은 회회모(回回帽)라고 불리는 무슬림용 모자,[16] 여성은 여기에 히잡[17]을 두르는 정도이다. 복식으로는 흔히 흰 옷을 선호한다. 물론 현대에 대도시에 나와 있는 후이족은 거의 세속화되어 있어 일상 복장은 일반 중국인과 별로 다르지 않다. 여성도 마찬가지. 다만 모스크에 기도를 드리러 갈 때는 모자나 히잡을 반드시 착용한다. 이맘 같은 성직자들이나 독실한 신자들은 턱수염을 기르는 풍습을 잘 지키는 경우도 있다.

또한 원래 물이 귀한 지방이 많은 중국은 씻는 문화가 그다지 발달되지 않았지만[18] 이슬람교는 하루 5번 있는 기도 전에 반드시 손발을 씻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후이족은 자주 씻는다. 중국 모스크의 앞에는 무슬림 전용 목욕탕(清真淋浴)이 영업중이거나 혹은 손발을 씻기 위한 수도가 설치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한족은 아무데나 침뱉기를 하지만 후이족은 이슬람교 관습상 금기시되어 거의 하지 않는다.[19]

후이족 문화에는 여성할례[20] 같은 극악한 여성억압 악습은 없다. 다만 과거 후이족은 한족과 마찬가지로 전족 및 일부다처제가 있었다. 중앙아시아의 둥간족들의 경우에도 1948년도까지 전족을 시행했으나 이후 소련 정부의 노력으로 근절되었다 한다. 민국시대의 무슬림 군벌인 마훙쿠이는 여러 명의 아내를 두기도 했지만,[21]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사회주의화 과정에서 일부일처제가 확립되고 남녀평등이 확립됨에 따라 모두 없어졌다. 대만의 후이족 및 홍콩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의 중국계 무슬림 공동체 역시 일부다처제가 사실상 절대 금지된 상태이다.

4. 역사

당, 송 시대에는 무슬림들이 주로 해상 무역을 하러 왔다가 광둥성, 푸젠성에 정착했다면, 원, 명 시대에는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들이 회흘 지방을 통해 주로 간쑤성, 섬서성에 정착했다. 이렇게 해로로 중국에 정착한 남방 후이족(아랍, 페르시아계통)과 육로로 정착한 북방 후이족(투르크, 중앙아시아 계통)은 기원이 다르다. 다만 이들은 모두 중국화되었으며, 특히 남방 후이족은 명청대 이후 해상교통로에서 이슬람세력이 약화되어 이슬람권과 접촉이 끊긴 뒤 대부분 상당수가 신앙이 희미해져서 일반 한족과 다를 바 없이 되었다.

재밌는 점은 이슬람 세계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대에는 중국 내 무슬림들이 무역업을 통해 많은 부를 축적하고 시기, 존경의 대상이 되었으나...[22] 이슬람 세계가 쇠퇴기에 접어든 시점인 청나라 시절에는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라고 대놓고 무시당했다는 점. 일례로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원나라에서 투항한 무슬림 관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주마 예배(이슬람의 금요일 합동 예배) 때마다 연설을 했는데, 이를 두고 청나라 시절 역사가들은 주원장이 사실 한족이 아니라 근본도 없고 무식한 후이족이라고 날조를 시도했었다. #[폐쇄] 청나라 때 후이족의 평판과 사회적 입지가 얼마나 낮아졌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이들은 청의 통치에 맞서 1862~1877년 회민 반란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했는데 이 와중에 중앙아시아 일대로 피난간 이들은 둥간족이라고 불리고 있다.

4.1. 당, 송 시대의 해상 교역로를 통한 후이족 유입

대식(大食)은 본래 페르시아의 땅으로 남자는 ‘심목고비(深目高鼻, 눈이 깊고 코가 높다)’로 검은 수염을 갖고 있으며, 여자는 얼굴이 희고 외출 시에는 얼굴을 가린다. 이들은 하루에 천신(天神)에게 5배(拜)하고, 은대(銀帶)에 은도(銀刀)를 차며 술을 마시거나 음악을 하지도 않는다. 예배당은 수백 명을 수용하는데 7일에 한번 왕은 높은 곳에 앉아 아래 사람을 향하여 말하기를 “적에게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하늘에서 태어나고 적을 죽이는 사람도 복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은 전투에 용맹하다. 번역출처
-『 신당서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무역 상인들이 6~8세기 무렵 중국의 행정력이 당시 잘 미치지 못하던 광저우에 무역 기지를 건설하였다. 광저우를 통한 중국과의 해상 교역 루트는 곧 아랍인들에게도 알려졌다. 후이족들의 전승에 의하면 중국에 이슬람에 전파된 것은 수나라 때부터라고 하지만 수나라는 서기 622년 무렵 헤지라[24] 이전 618년에 멸망했기 때문에 신빙성이 없고[25] 중국에 이슬람이 전파된 것은 당나라 시대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 당나라 때 광저우의 유력자들은 대부분 아랍인 무슬림 혹은 페르시아인 조로아스터교도 상인 출신이었지만, 이들은 자기 고향의 부녀자들을 데려오는 경우는 드물었고[26] 대개 중국인이나 동남아시아인 현지처를 두는 경우가 많았다.

광저우 루트는 이미 꽤 유명해서 탈라스 전투 때 아랍군의 포로가 되었던 중국인이 12년만에 이라크에서 광저우로 가는 뱃길을 이용해서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758년 10월에는 아랍인들과 페르시아인들이 이끄는 동남아 출신 해적들이 광저우를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한편 안사의 난 당시에 당의 요청으로 압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만수르는 4천의 무장 상인들을 파견해 반란 진압을 돕게 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중국 여인과 결혼해 화북에 정착했다고 한다. 이들이 초창기 후이족 공동체를 형성했을 가능성이 있다.

878년 황소의 난 때는 황소의 반란군이 광저우에 체류하던 페르시아인과 아랍인 12만을 죽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아마도 이 수치는 광저우에 체류하며 아랍-페르시아 상인들의 통제를 받던 동남아인들까지 포함한 수치로 추산된다. 광저우가 파괴된 이후에는 푸젠성 취안저우가 해상 무역 중심지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취안저우의 파르시 무슬림 상인들이 당나라 남부의 해안 지대의 교역을 장악한 가운데, 신라인들은 황해의 해상 무역을 장악했었다. 당나라 신라방에 정착한 신라인들과 페르시아인 상인들은 권위 있는 아랍, 페르시아 지리서에 신라가 여러 차례 언급된 것을 보면 상당한 수준이었던 듯 하다. 이들과 교류가 활발했던 신라인들과 발해인들이 빈공과에 자주 급제했듯이 아랍-페르시아인 중에 능력이 유별나게 좋은 경우에는 빈공과에 지원해 급제하는 경우도 있었다.[27]
왕이 거둬들이는 가장 중요한 수입원은 향기 나는 풀이었다. 뜨거운 물에 타서 마시곤 했는데 마을마다 아주 높은 가격에 팔렸다. 이를 '차(al-sakh)'[28]라고 부른다. 세 잎 식물보다 잎이 많고 향도 약간 더 강하며 시큼한 맛이 난다. 중국인들은 물을 끓인 다음 잎을 뿌려 넣었으며 모든 병을 다스리는 데 썼다.
-『중국과 인도 여행기』[29]

후이족들이 처음 중국에 정착하던 시기는 중국에서 차가 대중적으로 유행하게 되는 시기와 겹친다. 광저우의 페르시아인, 아랍인 상인들을 통해 차 문화가 중국에서 중동으로 직접 전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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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시대 당시 잡아온 기린을 그린 그림
신종 희녕(熙寧) 연간(1068~1077)에 대식에서 온 자가 번장사(蕃長司)의 업무를 통할하게 해달라고 요청하여, 광저우에서 일하도록 하였다. ... 도번수보순랑장(都蕃首保順郞將) 포타파리자(蒲陀婆離慈)가 아들인 마물(麻勿)로 하여금 공물을 바치며 자신의 아들로 하여금 자신의 직위를 대신하게 해 달라고 하고 또 장군으로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에 마물을 낭장으로 삼았다. ... 대식의 각 부족은 각각 이름이 달라서, 물순(勿巡),[30] 타브리즈(阤婆離), 유로화지(俞盧和地),[31] 말라바르(麻囉跋) 등의 나라가 있지만, 모두 대식이란 이름으로 대표되었다.
- 『 송사 번역출처

송나라 때에는 광저우와 취안저우의 페르시아인, 아랍인 후손 대부분이 한화되었다 하며[32] 명목상으로만 무슬림인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송나라의 시박사에서 일하는 등 해상 무역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동남아시아와 인도에 있는 다른 페르시아-아랍 무역 거점들과 해상 교역을 지속하였다. 오대십국 송나라의 황제들은 광저우와 양저우 출신 서역인 후손들 중에 미인이 많다고 후궁으로 선호하였다 한다. 당시 중국인들의 이슬람과 아랍에 대한 이해도는 매우 피상적이었는데, 심지어 메카를 붓다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하거나, 메카가 불교도들이 1년에 한 번 순례를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등 잘못된 정보가 널리 퍼져있었다.

중국 해안 도시의 후이족들은 명나라 때 정화의 해상 원정에 대거 참여하며 활약한 이후, 명나라 정부에서 해금령을 내리고 인도양 해상 무역의 실세가 무슬림에서 서양인으로 교체되며 고유의 정체성을 잃고 한족과 동화되었다. 오늘날 기준으로 광저우와 취안저우를 중심으로 한 해상 도시의 후이족 후손들은 족보를 통해 자신의 후이족 조상들에게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는 등 대부분 완전히 한화한 상태이다.[33]

4.2. 송, 원, 명 시대의 육/해로를 통한 후이족 유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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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둥성 칭저우에 남아있는 모스크인 진교사. 원나라 대인 1302년에 세워졌다

오호십육국 시대에 중국에 유입되던 서역인들이 대부분 불자였고, 당나라 때는 대부분 마니교 신자였다면 중세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가 가속화되면서 송나라 때부터 중국에 유입되는 서역인 중에 무슬림 비중이 증가하기 시작한다.

1070년대 요나라 기병에게 시달리던 북송에서는 당나라에서 중앙아시아 출신 사타족을 이용해 토번 기병을 제압한 사례를 기억해내고, 부하라 출신 무슬림 용병 5,300명을 고용했으며, 1080년에는 만여명을 추가로 고용하였다 한다. 당나라 때는 이슬람이 대식파[34]라고 칭해졌으나 요나라가 카라한 칸국을 아융란회골(阿蕯蘭回鶻)[35]이라 부르고 북송에 부하라 출신 무슬림 용병기병이 도착한 시점을 계기로 이슬람을 회회(回回)교라고 칭하게 되었다 한다.

원나라 때는 중동과 중앙아시아, 유럽에서 수십만 명의 색목인들이 중국에 정착했는데, 이는 원나라를 지배층이었던 몽골인들이 중국인들을 불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들 색목인들은 불교처럼 이미 중국인들에게 익숙한 종교를 믿는 경우도 흔했지만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유대교, 마니교, 이슬람을 아우르는 다양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사람들이었다.

원나라가 송나라를 공략할 때 회회포를 제작, 운용한 알라웃딘(阿老瓦丁; Al ad din)과 이스마일(亦思馬因; Ishmail),[36] 원나라 천문학계에 알마게스트을 본격적으로 소개, 도입하고 천문대 설계를 감독한 부하라 출신 천문학자 자말앗딘(扎馬剌丁; Jamal ad-din), 아랍식 외과를 운영한 기독교도 의사 이사 타르야만(Isa Tarjaman 1227-1308), 원나라 황궁 건설을 지휘 감독한 부하라 출신 건축가 아미룻딘(亦黑迭儿丁; Amir ad din) 등이 유명하다.
묵덕나(默德那)는 회회의 조국(祖國)인데, 위치는 천방과 가까웠다. 선덕 연간(1426~1435)에 그 추장이 사신을 보내 천방의 사신과 함께 내조하여 공물을 바쳤지만, 후에는 다시 이르지 않았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그 처음에 국왕 모한맥덕(謨罕驀德)이 태어나면서 신령(神靈)스러워, 서역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복(臣服)하였고, 여러 나라에서 별암발이(別諳拔爾)[37]로 존칭하였는데, 천사(天使)라는 말이었다. 나라 안에 경서(經書) 30책이 있었으니, 모두 3,600여 단(段)이었다. 그 책은 옆으로 글씨가 쓰여 있는데, 서양의 여러 나라에서 모두 이를 사용하였다. 그 종교는 하늘을 받들어 섬기는 것을 주로 했지만, 신상(神像)은 두지 않았다. 매일 서쪽을 향하여 경건하게 예배하였다. 해마다 1개월은 재계(齋戒)하며, 목욕(沐浴)하고 옷을 바꾸었으며, 거처는 반드시 상주(常住)하는 곳을 바꾸었다. 원나라 때에 이르러 그 나라 사람이 사방으로 두루 퍼졌는데, 모두 그 가르침을 지키어 바꾸지 않았다.
명사(역사책) 서역열전 발췌 번역출처

원나라가 망한 이후 무슬림들을 제외한 색목인들은 대부분 중국인과 동화하거나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후이족이 되었으며, 중국에 마지막까지 남은 네스토리우스 파 공동체는 대항해시대 이후 유럽인 선교사들에 의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되면서 사멸했다. 일단 원나라 때 무슬림 의사, 천문학자, 역관, 관료 중 상당수가 원나라가 멸망한 이후에도 관직을 보존했는데, 이들을 한꺼번에 다 죽이면 대체 가능한 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명나라 조정에서는 홍무제의 칙령으로 재색목인 출신 외국인들은 남녀 가릴 것 없이 무조건 한족과 통혼해야 한다는 법을 제정하여 한족과 동화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들과 다르게 몽골인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던 티베트 불교 승려들은 아예 적폐로 찍혀서 가혹한 박해를 받아 거의 전멸하였다.[38][39]

원명교체기에는 마드라사가 소멸하는 듯 했으나, 명나라 만력제 시절에는 호등주(胡登洲)라는 회민이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섬서성 셴양에 다시 마드라사를 세우고 이를 계기로 간쑤성과 섬서성에 여러 마드라사들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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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7년 사망한 술루 술탄국 군주의 무덤인 더저우 쑤루왕묘 (덕주소록왕묘 德州苏禄王墓). 술루 술탄 파두카 파할라가 영락제에게 조공하기 위해 중국을 방문했다가 대운하를 따라 귀국하던 도중 덕주에서 병사하자, 영락제는 왕의 예에 걸맞은 무덤을 조성하게 하였고, 현지 후이족 무슬림들에게 파두카 파할라와 그 유가족을 돌보게 하였다. 각각 안씨와 문씨를 하사받은 두 왕자들은 일대에 정착하였고, 지금도 그 후손들이 더저우에 거주하며 능을 지키고 있다.
가정(嘉靖) 12년(1533)에 천방(天方)· 토로번과 함께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는데, 왕(王)을 칭하는 자가 100여 명에 이르렀다. 장부경(張孚敬) 등이 아뢰기를, "서역의 여러 왕은, 아마도 자기 나라에서 봉(封)을 받은 것이거나 부락이 서로 붙인 존칭인 것 같습니다." ... (중략)... 이에 하언(夏言) 및 추신(樞臣) 왕헌(王憲) 등이 아뢰기를, "지금 토로번은 15명의 왕, 천방은 27명의 왕, 살마아한53명의 왕이니, 실로 이 이전에는 없던 수치입니다. ... 감숙 순무(巡撫) 조재(趙載)가 상주하기를, “각국에서 왕을 칭하는 자가 150여 명에 이르는데, 모두 본조(本朝)의 봉작(封爵)이 아니니, 마땅히 개정(改正)토록 하고, 또한 조공사절의 인수(人數)를 확정해야 할 것입니다. 대개 번인(番人)은 장사를 잘 하여 중화(中華)와의 교역을 탐하였는데, 입경(入境)한 후에는 일체의 음식과 교통비용을 모두 담당 관원에게 받아가니, 비록 5년 1공(貢)으로 정했지만, 당시에 이르기까지 기꺼이 준수하려 하지 않았고, 천조(天朝)도 또한 꾸짖을 수가 없었다.
명사(역사책) 서역열전 발췌 #

명나라 정부의 적극적인 쇄국 정책[40]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수의 무슬림 상인들이 자신들을 왕이라고 사칭하며 조공을 바치고 대신 더 많은 양의 답례품을 받아 이익을 챙긴다거나 혹은 간쑤, 섬서 지방에 눌러앉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오늘날 후이족의 유전자 조사 결과 이들은 서아시아인과는 별로 공통점이 없고 간쑤성 변경에서 둔전을 일구던 몽골계 무슬림 둥샹족, 튀르크계 살라르족과 많은 부분을 공유하는 것으로 나왔다. 이자성의 난을 일으킨 이자성이 한 번은 명나라 관군에게 크게 패해 같이 싸우던 반란군 대부분이 전사하자 그는 병력을 보충하고자 후이족들에게 찾아가 반란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고, 이 때문에 이자성 반란군의 상당수는 후이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자성 군의 상당수는 기병이었으며 보병들도 대부분 이동 시에 말을 타고 이동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한족 농민반란군 만으로 이렇게 기동성 있는 병력구성을 갖추기는 힘들었을 것이다.[출처]

4.3. 청나라의 회민 반란

후이족들이 주로 정착한 간쑤, 섬서 지역은 강남 지방이 경제적으로 계속 성장하는 것과 반대로 가뭄이 계속되며 극빈 지역으로 전락하였고, 이로 인해 간쑤, 섬서, 닝샤의 후이족들은 청나라 사회에서 사회, 경제적 영향력을 사실상 상실하며 극심한 소외감에 빠지게 되었다. 베이징, 난징 지역의 부유한 색목인 관료의 후손이었던 후이족들 역시 절대다수가 도축업자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후이족들은 청나라의 지배 계급 만주족에 대한 불만을 직접 표출하기 힘들자, 만주족들이 특히 열심히 믿던 불교에 대해 증오감을 대리 표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날에도 전해지는 후이족 전승 중에 불교를 비하하는 내용이 많은 것도 이 때문. 원나라 시절 아잘 샴숫딘[42]이나 명나라 시절 정화를 비롯한 후이족 상당수가 불교에 우호적이던 것과는 사정이 달라졌다.

4.3.1. 자흐리야파 반란

청나라 치세 초 간쑤성 섬서성의 후이족들은 마내지(馬來遲; 1681년~ 1766년)의 영향으로 당시 위구르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으로 개종하였다.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은 티베트 불교 겔룩파의 영향을 받은 수피 교단으로 교단주의 권위를 절대화[43]하였는데, 이로 인해서 수피 성직자들이 지나치게 재산을 탐해도 평신도들이 견제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명나라의 기존 후이족 사회에서는 무슬림이라 하더라도 유교 교양을 쌓는 것이 권장되었다면, 당시 새로 들어온 낙슈반디야 교단은 논리학이나 철학, 과학 수학을 비롯한 합리주의를 배격하였다.[44]

메카에서 유학한 후 1761년 간쑤성에 돌아온 후이족 마명심은 급진적인 수피 자흐리야 신앙을 전파하면서 다른 후이족 공동체와 싸움이 붙었다. 자흐리야 수피 교단 역시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의 일파였지만 예배 방식이 상당히 달랐고,[45] 기존 낙슈반디야 교단과 다르게 율법학자들에게 청빈한 생활을 강조하였다. 간쑤성의 후이족 상당수가 율법학자들의 청빈을 강조하는 점을 반기며 자흐리야 수피 교단을 따르자, 기존 낙슈반디야 교단(쿠피야 교단)[46]에서는 자흐리야 수피 교단의 예배법이 이단이라고 공격하며 잦은 패싸움이 벌어졌다. 마명심을 따르던 후이족 공동체는 쿠피야 교단과 계속되는 싸움으로 사상자가 발생하자 청나라 관리들에게 요청하여 법정 소송을 벌였으나, 청나라 관리들은 쿠피야 교단 편을 들어주었다. 낙슈반디야 수피 교단에 속하지 않은 베이징의 무슬림들이 자흐리야 파가 완전 이단이라고 주장했던 것이 컸다. 1781년 마명심이 투옥당하자 살라르족들이 마명심의 석방을 요청하며 폭동을 일으켰는데, 이를 보고 당황한 청나라 관리들이 마명심을 성벽에서 밀어떨어트려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교단주가 죽자 충격을 받은 살라르족들은 대놓고 청나라 조정에 반란을 일으켰다.

반란을 진압한 청나라 조정은 간쑤성 내 후이족 사회가 불온해졌다고 파악하고 마명심과 사이가 나빴던 다른 후이족들까지 같이 엮여서 탄압하기 시작하는데 이는 장기적으로 후이족 사회 전반에서 반청 감정을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자흐리야 교단을 믿는 후이족 상당수는 간쑤성 내에서 다른 후이족들과 계속 분쟁을 일으킬 우려가 있다는 판단 하에 상당수가 천산북로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물론 청나라 관리들은 누가 자흐리야 교단 소속이고 누가 쿠피야 교단 소속인지 구분을 잘 못하는 상태에서 일을 대충 처리했고, 상당수의 쿠피야 교단 소속 후이족들도 자흐리야 교단 소속으로 오인받아 신장으로 강제 이주를 당했다. 교파를 가리지 않는 박해와 강제 이주를 계기로 자흐리야 교단과 쿠피야 교단 사이에는 화해가 이루어지고 자흐리야 교단은 신장과 내몽골, 베이징을 잇는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다시 교세를 키워나가게 되었다.

18세기 중반 청 제국이 준가르 칸국을 정복하고서 준가리아 평원의 목초지를 농경지로 개간하는 식민 사업을 시행할 때 이렇게 추방되거나 빈곤 상태에 처했던 후이족들을 동원했다. 주로 우루무치 근방에 정착한 후이족 농민들이 경작한 농산물은 청나라 팔기군이 돈을 주고 구입하여 군량으로 활용하였다. 원래는 해당 지역의 군사기지들은 팔기군이 직접 둔전을 경작하여 자급자족하기로 계획되어 있었으나, 여름에는 미친듯이 덥고 겨울에는 미친듯이 추운 이 지역에서 군인들이 열심히 농사짓기를 기대하기는 힘들었고, 실질적으로 이들에게 보급품을 공급하는 일은 후이족들이 맡게 되었다.

당시 신장은 전통적으로 천산남로(회부)[47]와 천산북로(준가르부)[48]로 나뉘어져 있었다. 후이족 상인들은 천산북로와 간쑤성 일대를 연결하는 무역에 주로 참여하였다. 이들은 현지 위구르인들과 서로 기초적인 수준의 아랍어 문어로 소통하였으며, 대부분 영세 상인이었고 강남 지역과 비교해서 볼 때 부유한 대상인은 별로 없었다 한다. 천산 남로 내 위구르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서는 장사하러 이민 온 한족이 거래나 결혼 등의 목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후이족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4.3.2. 회민 반란

태평천국 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지방 토호들이 한족 농민들을 무장시키는 과정에서 갼쑤, 섬서 지방에서 후이족 농민들과 한족 농민들간의 유혈 충돌이 점점 심해지다가 결국 1862년 후이족 반란[49]이 일어났다. 그에 앞서 윈난성에서는 판사이[50]들이 농민 출신 생원 두문수의 지휘 하에 이미 1856년 봉기하여 대리를 비롯한 50여개의 도시들을 함락시키고 이른바 평남국을 건국한 상황.

섬서성의 회민 반란은 마명심의 후계자 중 한 명이었던 마화룡을 정신적 지도자로 삼았으며 신장의 팔기군 기지들로 향하는 보급로를 차단, 파괴했으며 동시에 시안이 백언호가 이끄는 회민 반군에 의해 포위되었다.[51] 2년 후인 1864년에는 신장의 후이족들이 1850년대 윈난성의 후이족들처럼 수천명 단위로 각지에서 집단 학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우루무치를 중심으로 후이족들이 대거 봉기하고 신장의 팔기군 요새들을 포위하였다. 후이족들이 몽둥이와 식칼을 들고 팔기군 요새를 기어오르자 보급이 끊어진 상태에서 희망을 잃은 만주족 팔기군들은 대개 요새와 함께 자폭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1862년 일어난 간쑤성과 섬서성의 후이족 봉기는 오늘날 서구권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리즘과 유사한 부분이 조금 있다. 박탈감을 느끼던 무슬림 소수자들이 극단주의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는 종교지도자를 중심으로 뭉쳐 비무슬림 국가 정권을 대상으로 지하드 무장저항을 준비하는 지하조직을 운영하고, 사상적으로 극단화하며 자금을 모아 무기를 구입했다는 점이 그것이다.[52] 내몽골과 베이징을 중심으로 무역하던 부유한 상인이었던 마화룡은 무슬림은 비무슬림들과 융화[53]를 추구하던 전통적인 후이족 문화를 이단적인 것으로 규정했고, 비밀리에 구입한 화기를 이용하여 병력을 운용하였다. 마화룡은 부유한 상인이었으나 후이족 봉기에 참여한 지역인 간쑤성, 섬서성은 청나라에서 가장 빈곤하고 낙후된 지역 중 한 곳이었다.

후이족 자흐리야 교파 반란은 빈곤하고 박탈감을 느끼던 소수자들이 지하조직을 운영하며 현대 무기를 구입하여 사병을 운영하는 형태의 극단주의 운동의 전형적인 사례 중 하나였으나, 후술할 이유로 후대 이슬람 근본주의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일단 회민 반란은 이른바 청나라 최후의 명장 좌종당에 의해 진압되었고 마화룡은 처형되었으며 백언호는 마화룡을 구하려다 실패하고 시닝으로 달아났다. 좌종당은 자신이 훈련시킨 한족 사병들을 데리고 먼저 간쑤, 섬서성의 후이족 반란군들을 차례로 진압했다. 섬서성 내 후이족 인구 중 한족 민병대의 후이족 학살로 사망한 경우는 70~80만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후이족들을 마구 학살하던 섬서성 내 한족 향병들과 다르게 보다 이성적인 입장이었던 좌종당은 후이족 반란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마화룡과 그의 친지들에게는 자비를 베풀지 않고 잔혹한 방법으로 처형하였으나, 그 외에의 후이족 지도자들은 사면하고 받아주었다. 당시 베이징에 살던 후이족들은 교리 문제로 마화룡의 자흐리야파와 서로 대치하는 사이였기 때문에 회민반란에 가담하지 않았고, 청나라 조정에서는 후이족들이 교파에 따라 반란 참여 정도가 다른 것을 보고, 태평천국 운동 지지자들을 박멸할 때와 따르게 투항하는 사람들에게 비교적 관대한 조건을 내걸었다. 좌종당의 경우 마화룡이 속한 자흐리야 파에 속한 후이족들은 항복한 경우에도 처형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자흐리야파 외에는 비교적 관대한 조건으로 사면해주는 경우가 많았으며, 오히려 이들 중 군사적으로 능력이 있는 자들을 적극 육성하여 이들이 칭하이성을 지배하는 군벌로 성장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후이족 반란 진압 이후 1876년부터 1878년까지 섬서성을 중심으로 가뭄과 이에 따른 기근으로 중국인 2천만여 명이 사망하였다. 400만여 명에 달했던 섬서성 내 후이족 인구는 반란과 뒤이은 기근으로 2만여 명 수준으로 격감하였다. 후이족 상당수는 반란 진압과 뒤이은 대기근을 피해 간쑤성, 섬서성을 떠나 칭하이성 같은 인구 밀도가 낮은 변경 지역으로 이주하였다. 인구가 낮은 지역으로 이주한 후이족들이 새로 땅을 개간하면서 빈곤 문제가 상당부분 해결되었다.

4.4.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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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도스 (어얼둬쓰) 시의 모스크

신해혁명 후 마씨일족은 군벌로 성장하여 마가군을 이끌었고, 이들은 다른 군벌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영지를 독립왕국처럼 다스렸다. 비교하자면 신장성의 경우 한족 군벌( 진수런 등등)이나 관료들이 위구르인에 대한 몰이해나 혐오로 위구르인들의 봉기를 조장했던 것과 다르게 서북 지역의 후이족들은 같은 후이족 군벌들의 통치를 받는 상황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은 이슬람권에서 이슬람 모더니즘이 유행하던 시기였는데 이슬람 모더니즘의 영향이 같은 시기 신장에서는 이슬람 모더니즘이 위구르 민족주의 발전으로 이어졌다면, 후이족 사회 내에서는 그동안 지하드를 주장하던 자흐리야 수피 교단 등의 약화로 이어졌다.[54]

후이족 군벌들은 국민정부에 복속했고, 국민당 정부의 편에 서서 이 근처로 대장정을 해온 홍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 장궈타오가 지휘한 홍 제4방면군은 이들과의 전투에서 궤멸적으로 참패하고, 거의 전멸한 끝에 지휘부만 옌안에 겨우 도착한다. 공산당은 마씨일족에 반대하는 회민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고, 이들을 자군에 편입시키는 한편, 한족 병사들이 후이족 마을에서 이슬람 관습에 어긋난 행동을 하지 않도록 여러 주의를 주었다. 1946년 이후 국공내전이 재개되자 후이족 군벌 마훙쿠이가 지휘하는 마가군은 후쭝난군에 편입되어 공산당 본부가 있던 옌안을 점령하지만, 이후 전세는 역전되었고, 후이족 군벌은 공산당에 투항하거나( 마훙빈, 마둔징) 대만으로 망명해서( 마부팡, 마훙쿠이, 마부칭) 거의 100여년간 이곳을 지배하던 마씨일족의 왕국은 해체되었다. 이후 마씨일족의 영지는 닝샤 후이족 자치구로 개편되어 오늘까지 이르고 있다.

국공내전 종료 이후 국민당 군에 소속된 후이족과 위구르인 약 2만여 명이 대만으로 피난하였는데, 이들은 오늘날 대만 무슬림 인구의 직계 기원이 된다. 이들이 대만에 유입되기 전 일제강점기 당시 대만에서도 소수의 후이족 인구가 있었으나, 일제가 이슬람을 강경 탄압하면서 사멸된 상태였다고 한다. 대만으로 유입된 외성인 무슬림들은 중국회교협회나 중국회교청년회 등의 단체를 조직해 활동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에는 “사회주의 국가는 약소민족을 억압하는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명분으로 소수민족의 자치를 강조하는 레닌주의 교리 때문에 그다지 탄압이 심하지 않았으나, 문화대혁명 당시에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규정하는 공산당의 정책 + 중국 내 반종교 정서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교 또한 심각한 수준의 박해를 받았었다. 이 당시 이맘들은 홍위병에게 폭행당하고, 당연히 모스크에 모여 기도를 드리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이에 반발한 윈난성 거주시의 샤덴마을의 후이족은 1975년 반란을 일으켰고 군부대를 습격해서 무기고를 털어 무기를 탈취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베이징 정부는 이를 반란으로 규정, 진압군을 보내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모스크를 파괴하여 1,600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4인방이 몰락한 이후 집권한 덩샤오핑 정부는 1979년 이에 대해 사과하고 모스크를 재건했다.

4.4.1. 1980년대 이후

1979년 이란 이슬람혁명 이전까지 무슬림 회족들은 중국의 한족들 틈에서 정체성에 대한 특별한 고민이나 문제없이 중국인의 일원으로서 중국 한족 문화에 동화하면서 비교적 평온하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하지만 1979년 이란의 이슬람혁명 성공 이후 전통보수주의 이슬람과 급진적 성향의 이슬람이 중앙아시아로부터 중국의 무슬림들에게 전달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회족들에게 무슬림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그동안 한족과 회족이 한 마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며 협력관계를 유지했던 사회적 분위기는 1979년 이후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1979년 이후 무슬림 회족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고 있던 지역에서는 이슬람의 전통적 보수주의 성향이 점차 강화되었다. 이들의 변화는 식생활에서 이슬람의 깨끗함과 청결을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목격되었다. 이슬람의 할랄(halal: 허용)에 해당하는 이슬람식 생활방식 ‘qing zhen'(pure and true: 청진)을 유지하기 위해 초대를 받아 중국 한족의 가정을 방문하는 회족들은 거의 대부분 해바라기 씨나 과일만을 요구하였다. 이슬람 음식문화의 청결 유지에 대한 보수적 입장과 점증되는 이슬람식 식습관의 유지 노력은 회족과 한족 사이의 상호 교류와 의사소통을 제약하고 접촉을 제한하는 요인이 되었다. 1979년 이후 무슬림 회족들의 종교적 활동 강화와 보수주의적 생활방식 유지는 1958년 중국 공산당의 종교제도 개혁조치 이후 폐쇄되었던 모스크에 활기를 불어넣었으며, 제한된 종교 활동에도 활력을 제공하였다. 이후 무슬림 회족 사회에는 다양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예배에 참석하는 무슬림 숫자의 증가, 이슬람 종교의식의 철저한 준수, 그리고 이슬람 교육의 강화였다. 1979년 이후 모스크 합동예배에 참석하는 무슬림의 숫자는 점차 증가하였으며, 라마단 단식 기간 동안 각 무슬림 가정에서는 적어도 1명 이상이 단식을 하였다. 교육적 측면의 변화는 이슬람 교육기관인 마드라사 교육의 활성화였다. 1979년 이후 공립학교 입학생 수는 감소한 반면, 모스크에 딸려 있는 코란을 가르치는 사립 마드라사에 입학하는 학생 수는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무슬림 회족의 아이들은 학교 공부보다 집이나 모스크에서 코란을 공부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중국 공산당 간부들에게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사안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무슬림 회족 아이들이 공립학교보다는 모스크 부설 코란학교를 선택하는 현상은 더욱 두드러졌다. 1982년에 중국 이슬람의 작은 메카로 알려진 간쑤성 헤조우(Hezhou)에서는 공립학교 학생 수의 비율이 78%에서 50% 이하로 떨어졌다. 무슬림 회족들이 자식들을 공립학교에 보내길 주저한 이유는 중국어나 영어 등 주요과목을 공부해 봤자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미래의 희망도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교육을 마친 무슬림 회족들은 한족들에 비해 직업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현저히 낮았다. 회족들에게는 공교육보다 농업, 수공업 등 가업에 종사하거나 코란과 아랍어를 공부하여 이슬람 관련 직업이나 이맘이 되는 것이 훨씬 유리했다.

중국 문화혁명 기간 동안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담배와 음주는 1979년 이후 회족 사회에서 금지되었으며, 회족 여인들은 히잡을 쓰도록 요구받았고, 젊은 남녀의 만남은 엄격하게 제한되었다. 한편 한족들과의 결혼은 엄격하게 제한되었으며, 일단 회족과 결혼한 한족 여성은 무슬림으로 개종해야 했다. 중국 사회 내에서 무슬림의 숫자가 증가한 원인은 한족의 개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니라 무슬림의 이주와 상호결혼관습에서 기인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무슬림 회족 사회의 보수주의화에 대한 중국 당국의 반응은 신중했다. 회족들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중국 당국은 과거와 같은 강압적 조치를 취하기보다는 회족 사회의 장점을 인정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중국 당국은 여전히 회족 사회의 종교적 원리주의 현상을 걱정하였으며, 덩샤오핑 이후 중국 공산당의 30년 작업이 불과 수년 만에 물거품으로 변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중국 당국은 회족들에게 이슬람 전통에 근거한 회족의 인종적 관습 유지를 허용하였고, 종교와 민족성을 별개의 문제라고 주장하였지만, 회족들은 두 개념을 결코 별개의 개념으로 간주하지 않았으며, 이슬람은 회족들의 정체성 확립에서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KCI 등재 논문 : 위구르족, 회족 무슬림의 정체성과 문화접변 양상 연구

이란 이슬람 혁명 이후 걸프 아랍 왕정 국가들은 자국 내 이슬람 율법학자들이 이란에서처럼 반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하여, 이슬람 율법학자들의 발언권을 늘려주기 시작하는데, 이는 중국 이슬람 사회를 비롯한 세계 이슬람권이 보수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 역시 이란 호메이니 정권 수립 이후 자국 무슬림들의 봉기를 우려해서인지[55] 이슬람 관련한 제약을 상당 부분 완화하였다. 원래 중국에서는 종교의 전도 행위가 불법이지만 후이족들이 이를 무시하더라도 그렇게 크게 제재하지는 않는다. 개인적인 종교 행위에는 정부도 그다지 간섭하지 않는다.

지금도 닝샤나 간쑤에 가보면 가보면 모스크가 곳곳에 있고, 나름 기도시간마다 많은 무슬림들이 와서 기도를 올린다. 이런 곳은 이슬람 우세지역이기 때문에 라마단도 엄격히 지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른 이슬람 국가와 마찬가지로 단식 후 모스크에서 공동식사를 하기도 한다. 또한 중국은 공산화 이후 장례에서 화장을 법제화했지만, 후이족은 이슬람교 전통상 화장이 금기시되기 때문에 후이족에게 이 법률은 해당되지 않고, 매장을 주로 한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중국 내 무슬림들이 해외와 교류하는 것을 상당부분 제한하고 있다.[56]

오늘날의 쿠란 중국보통화 번역판이나 중국 내 이슬람 교리는 이슬람과 중국 애국주의가 절충된 형태의 번역으로 되어 있다.[57] 학문적 입장에서는 논란일 수도 있겠지만, 반종교 정서가 있는 중국에서 이슬람이 별문제 일으키지 않고 공존하려면 어쩔 수 없는 타협이기도 하다.[58] 일단 후이족은 이슬람으로 개종한 중국인 및 외국에서 온 무슬림과 통혼한 한족으로 구성된 민족이기 때문에 일반 중국인 비무슬림들과 무조건 척을 질 수도 없는 노릇이다.

명장 바이충시가 중일전쟁에서 맹활약한 역사가 있기 때문인지, 오늘날 후이족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은 편이다. 중국과 대만의 후이족은 각각 청나라나 일제강점기 때보다는 후이족에 대한 종교 차별과 억압이 줄었다며 비교적 만족하는 분위기이다.[59][60] 또한 후이족들은 이슬람 국가와 중국 사이에 외교에서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칭하이성과 윈난성을 개발하고, 소수민족들과 한족 사이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에 나름 우대를 받을 수밖에 없다.

여담으로 중국의 유명 축구선수 우레이, 장린펑, 전 중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인 가오훙보도 후이족이고, 연예계에서는 유명 배우인 진건빈 위허웨이가 후이족이다. 또 엽문4에 나왔던 태극권의 고수 오월(吴樾) 역시 회족이다. 오늘날 후이족들은 한족에 비해 중국 내에서 학업 성취도가 비교적 떨어지는 대신에 주로 예체능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고위 정치인 중에서 후이족은 찾기 힘들지만 지린성 출신의 후이량위 (回良玉)가 2003 ~ 2013년간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하며 농업, 민족, 종교 분야에서 활약한 바 있다.[61]

5. 정의

일단 후이족이란 이슬람화된 한족으로, 한족과 섞여 살며 한족과 언어, 문화 면에서 공통되어 있지만 무슬림이 절대다수인, 이슬람의 영향을 크게 받은 문화와 풍속을 가지고 있어 별도의 소수민족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현재 후이족의 후예 가운데는 비무슬림들도 더러 있으며, 다른 소수민족 가운데 무슬림 부족을 '너네도 후이족'이라고 한데 묶어놓기도 한다.

후이족과 위구르인은 양쪽 다 무슬림이지만 이 두 민족 사이에는 몇 가지 주요한 차이점이 있다.

첫째, 후이족은 한족과 혼혈의 역사가 오래되었다. 당나라 때부터라고 한다.[62] 중세 무슬림들과 기독교인들은 중국에 가족들과 함께 이민온 것이 아니었다. 중국에 이민온 무슬림 남성들이 한족 여성과 결혼하면서 후이족의 기원을 이루었으며, 이런 가정에서는 대부분 성으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름으로부터 취한 "마(馬)"씨 성을 택했다. 심지어 십회구마라는 말도 있다. 후이족 열에서 아홉은 마씨라는 뜻. 후이족이 당나라 때부터 중국 역사 속에 존재했다면 이슬람화한 위구르인이 중국의 지배를 받은 시기는 이보다 훨씬 늦은 청나라 때부터이다. 위구르인들은 한족과 혼혈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한화된 문화도 적다.[63]

둘째, 모국어의 차이. 명나라 때부터 후이족들의 모국어는 아랍어도 아니고 튀르크어 페르시아어 계통의 언어도 아닌 중국어이다. 장기간의 혼혈과 통혼으로 중국 문화에 많이 동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최근까지 중국어를 아랍 문자로 표기하는 체계인 위구르어 표기보다 더 복잡한 아랍식 병음인 샤오얼징(小兒經)이 비공식적으로 쓰이기도 했다. 아랍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줄 아는 후이족은 극히 드물며, 후이족 절대 다수의 아랍어 구사 능력은 예배용으로 필수적인 기도문을 암기하는 수준에 머문다.

반면 위구르인들의 모어는 튀르크어 계통의 위구르어로, 중국-티베트어족에 속하는 중국어와는 유사성이 없고, 같이 차가타이어족에 속하는 우즈베크어와 많이 비슷하다. 자세한 내용은 튀르크어족 문서 참조. 그리고 어족 단위에서 별개의 언어로 분류되는 언어동조대 중에서는 아랍어 페르시아어와 더 비슷한 편이다.

하지만 언어적, 혈통적으로 비슷해 보인다 할지라도 이슬람 민족이라는 정체성은 확고해서 위구르처럼 분리 독립운동을 일으키지 않을 뿐[64], 주류민족과의 갈등은 갈등은 여전히 무시 못할 수준. 현대 칭하이성과 같은 곳에서는 한족, 티베트족[65]과도 갈등이 있다.

중국에 정착한 유대인들 후이족이 되었다고 한다. #

참고로 후이족의 몽골족 버전, 티베트족 버전도 있다. 앞서 말했듯이 후이족은 한족에서 나온 무슬림 종교, 민족집단이다. 이와 비슷하게 몽골계 민족 중에는 보안족 동향족이라는 무슬림 민족이 있으며, 티베트에는 까체라는 무슬림 티베트인 집단이 존재하며 이들 역시 무슬림 상인의 후예다. 더 자세한것은 이쪽 참조

이러한 융화정책과 인종적 유사성으로 인해 중국 내에서 후이족은 대부분 무슬림임에도 불구하고 그냥 중국의 한 민족이 되었다.[66] 이슬람교가 주도한 둥간 혁명 등, 많은 억압과 학살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결점을 찾아내 공존에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상업적으로도 타 소수민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민족이다. 이 때문에 중국 내의 할랄 푸드( 무슬림들의 식문화) 생산은 대부분 후이족이 담당하고 있다.[67]

한마디로 말해서 후이족은 미국에서 유대인 비슷한 처지로서 특별한 종교를 믿는 중국인 정도로 보면 된다.

5.1. 한족 외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

같은 종교를 믿는 위구르족과도 사이가 애매하다. 그리고 만주족과 역사적으로 상당히 좋지 않은 관계이다. 신장 지역을 정복한 직후 청나라는 이슬람을 믿는 위구르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 준가르족이 전멸하고 무주공산이 된 중가리아 등지에 후이족들을 정착시켰으나, 이들은 1862년 간쑤성, 산시성 회민 반란에 자극을 받아 위구르인들보다 앞서 청나라에 항거하여 봉기하였다. 위구르인 입장에서는 청나라 만주족의 통치가 준가르 칸국에 비하면 천국이었지만, 후이족들 입장에서 만주족 청나라는 역사 항목에서 상술한 이유로 원나라, 명나라와 다르게 후이족들을 탄압하는 왕조로 여겨져 증오를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1864년 봉기가 성공한 이후에는 신장에 독립왕국을 세운 야쿱 벡은 같은 무슬림인 후이족들과 권력 투쟁을 벌이며 많은 후이족을 죽였다. 심지어 청나라 좌종당군이 쳐들어오려 준비하는 와중에도 신장 북부의 후이족들과 싸우는데 정신이 없었을 정도니... 20세기 초반 신장 지역을 통치한 군벌 양쩡신 역시 청나라 만주족들과 마찬가지로 후이족들을 데려오면 현지 위구르인들과 안 싸울 줄 알고 자신의 고향 윈난성에서 후이족 사병 2천여 명을 데려왔으나, 이들 중 일부가 위구르인들을 대상으로 폭정을 시행하기도 했다. 후이족 군벌 마부팡이나 마중잉이 위구르족들을 탄압한 역사도 있었다. 마중잉의 경우 위구르인들의 요청으로 신장 지역으로 와서 진수런 정권의 폭정으로부터 위구르인들을 해방시켰으나 모종의 이유로 배신을 당하고 동튀르키스탄 제1공화국과 전쟁을 벌였었다. 11년 후 동튀르키스탄 제2공화국 중가리아 카슈가리아 등 신장 서부 전역을 장악하고 우루무치를 공격하자 중국국민당 마부팡의 후이족 기병 10만여 명을 파병하여 우루무치를 방어하였다. 이는 같은 무슬림끼리 대치하는 상황이 되면서 동튀르키스탄 군대의 전투 의욕이 꺾일 것을 노린 전략이기도 했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이슬람 문화는 단일 민족의 문화가 아니라 두 민족의 혼합문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로 인해 신장의 위구르족 이슬람 문화는 모스크 건축, 종교의식, 언어 그리고 교육 등에서 회족 이슬람 문화와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신장 지역의 이슬람 문화가 종교 분파뿐만 아니라 인종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을 띠고 있다는 의미이다. 위구르족 무슬림과 회족 무슬림 사이의 차이점은 모스크 형태 등 건축예술과 언어교육 문제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목격되고 있다.

신장위구르 지역의 모스크 형태는 종교적 분파나 수피 종단에 따라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인종과 민족에 따라 차이를 보이고 있다. 중국의 모스크 형태를 살펴보면 크게 위구르족의 모스크와 회족의 모스크로 구분된다. 위구르족의 모스크는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지역의 모스크 형태를 따르고 있지만, 회족의 모스크는 청나라 시기부터 중국 불교사원의 스타일을 따르고 있다. 중앙아시아 오아시스 지역의 모스크 형태를 따르고 있는 위구르족의 모스크는 햇볕에 말려 만든 어도비 벽돌 외벽, 타일, 그리고 작지만 두드러진 첨탑 등 전통적인 이슬람 모스크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회족은 위구르족의 모스크를 방문하지 않고, 위구르족은 회족의 모스크를 방문하지 않는다. 위구르족은 회족을 무슬림이라기보다는 중국인들이라고 간주하고 있으며, 회족은 위구르족을 후진적이고 봉건적인 사람들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

(회족들은) 한족과 위구르족 사이에서 중간적․중재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위구르족은 회족을 타우즈(tawuz: 수박)라는 경멸적 용어로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회족은 어떤 문제에서는 한족의 편을 들고, 어떤 문제에서는 위구르족의 편을 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위구르족은 회족이 겉으로는 무슬림(상징적으로 녹색)인 척하지만 속으로는 공산당원(상징적으로 홍색)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 실상을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일부 한족들은 회족이 무슬림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한족을 배신하고 위구르족의 편을 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위구르족은 회족과 같은 무슬림이지만, 회족이 언젠가는 위구르족을 배신하고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고 동일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한족의 편을 들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다. 위구르족과 회족 사이의 상호 불신과 경계심은 중국 정부가 원하는 회족의 중개자적 역할과 위구르족의 중국 문화로의 접변 또는 동화에 결코 긍정적으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 회족이 중국 한족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고 문화접변을 이루는 데는 약 700 내지 800년이 걸렸다.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감안할 때 위구르족의 한족 문화로의 접변과 동화는 더 오랜 기간이 걸리거나 아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KCI 등재 논문 : 위구르족, 회족 무슬림의 정체성과 문화접변 양상 연구

위구르인과 후이족 간의 민족 감정은 종교 교파의 차이는 아니다. 두 민족 모두 이슬람 수니파 중에서도 하나피파 마드하브를 따른다. 후이족들이 결국은 유교 경전을 배우거나 군대에서 활약하는 등 중국과 타협을 선택한 반면, 위구르인들은 중앙아시아의 튀르크족들과 연대하면서 생겨난 차이다. 그러니까 종교만 같을 뿐, 혈통과 문화도 다르고 동질감도 적다.[68] 하플로그룹 연구 조사 결과 후이족은 유전적으로 위구르인보다는 살라르족, 동향족과 더 가까운 것으로 나왔다.

민족감정을 배제한 종교적 측면에서는 오히려 두 민족이 서로 교류하기도 한다. 일단 후이족과 위구르인은 서로 원수지간으로 알려졌으나 일방적인 원수지간이라고 보기는 힘들고 서로 어렵고 힘들 때 도와준 역사도 많다. 예를 들어 1915년 신장 카슈가르시에서 터키인/타타르인 교사들이 가르치는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정부의 압력으로 폐교당할 위기에 처하자, 카슈가르의 후이족들이 위구르인들과 한족 군벌 사이를 중재하여 교과 과정에 중국어를 추가한다는 조건 하에 폐교를 막았던 적이 있었다. 이는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어 서구 교과 과정에 중국어 수업 과정이 추가된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위구르인들에게 널리 보급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 기준으로는 중국 이슬람 협회는 후이족과 위구르족, 그리고 그밖의 중앙아시아계 이슬람계 민족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현재 중국 내에서는 위구르인의 성지 순례를 사실상 금지하다시피 하는데, 후이족들이 여기에 대해 항의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무슬림인 판사이(Panthay)들은 같은 무슬림인 로힝야족과 원수 지간이다.[69]

중국으로부터 독립성향이 가장 강한 티베트인들과도 사이가 좋지 않다. 두 민족이 함께 분포하는 칭하이성에서는 폭력사태가 자주 벌어질 정도이며, 2008년 티베트 봉기 당시 후이족들도 한족과 마찬가지로 티베트인들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 칭하이성에서 후이족 군벌 마부팡을 재평가하고 기념하는 움직임이 나오자 티베트인들이 대거 반발하고 나서기도 했다. # 물론 명과 암이 있다고, 많은 후이족들이 티베트와 칭하이성에서 티베트 불교 교리 때문에 도축업을 꺼리는 티베트인들을 대신해 도축업에 종사하고 있는데, 덕분에 티베트 요리에는 청진 요리의 영향이 강한 편이다.

칭하이성에는 티베트계 무슬림 마을이 있어서 중국 정부에서는 해당 지역 주민들을 후이족으로 분류되지만 반대로 티베트 자치구 라싸에 거주하는 티베트계 무슬림 까체족들은 후이족이 아니라 그냥 티베트인으로 분류된다.[70] 라싸 내 까체족 무슬림들은 티베트 불교 교리와 수피즘이 복합된 이중신앙을 유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는데, 한국 내 체류 혹은 방문했던 후이족들의 증언에 따르면 까체족들은 과거 달라이 라마에게 합장을 하면서 인사를 하는 정도였다고 한다.[71] 현재 라싸에도 상당수의 후이족들이 이민 정착하였는데 까체족과 라싸 내 후이족들과의 관계 역시 상술한 티베트인과 후이족 사이의 갈등에 끼인 이유로 복잡미묘하리라 생각해 볼 수 있다.

중국의 몽골계 소수민족 중 하나인 보안족은 후이족의 영향으로 19세기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홍콩의 경우 영국 식민 시절의 영향으로 인도/파키스탄계 무슬림들이 많은 편인데, 이들은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후이족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6. 후이족의 이름

후이족은 거의 중국화가 되었기 때문에 한족과 똑같은 방식으로 작명을 한다.

성(姓)이 오고 그다음 이름이 오며, 겉보기로 봐서는 한족의 이름과 똑같다. 이는 같은 무슬림계 민족인 위구르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계와 다른 점이다. 위구르족은 페르시아권의 영향을 받아 주로 성이 뒤에 온다. 원래 무슬림들은 예언자 무함마드가 혈연에 따른 연고주의를 제한한 영향으로 가문명 대신 아버지 이름을 성처럼 사용했는데, 중국에 정착함에 따라 조상의 이름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앞자를 주로 자기들의 성씨로 삼았다.

후이족에게서 빈도수가 높은 성씨는 무함마드라는 이름에서 유래된 마(馬)씨인데, 십회구마(十回九馬)라는 말이 돌 정도이다.[72] 무함마드라는 이름 관련해서는 마(馬)씨 외에 무(Mu, 木(나무목), 穆(온화할 목)) 씨를 쓰기도 한다. 아니면 아랍어 din(정의)에서 온 딩(ding, 丁(정))씨와 아랍어 Sadiq(진리)에서 온 사(沙)씨도 주로 쓰는 성이다. 중일전쟁 당시 명장 바이충시의 경우 성 백(바이)씨는 “바하두룻딘”이라는 무슬림 이름의 앞부분을 음차한 것이다. ‘바하두르’는 힘 센 용사란 뜻의 튀르크어 이름이고, ‘앗 딘’은 라카브이다. 이렇듯 후이족은 성씨에는 아랍어 외에도 튀르크어와 페르시아어 영향도 있다.

그리고 메카 순례를 다녀온 사람은 다른 나라의 무슬림과 마찬가지로 이름 앞에 자기 이름 앞에 하지(哈吉, جالحجّي‎)를 붙인다.

독실한 신자들은 아랍식 이름을 따로 갖는 경우가 많다.

중국통계에 따르면 해(海)씨중 한족은 31.2%, 회족은 46.4%에 달한다. 보(保)씨중 한족은 37.9%, 회족은 41.4%이다. 사(沙)씨중 한족은 60.7%, 회족은 32.2%이다. 합(哈)씨중 한족은 30.3%, 회족은 30.3% 몽고족은 21.2%이다. 만(满)씨중 한족은 52.2%, 회족은 23.9%이다. 선(鲜)씨중 한족은 78.9%, 회족은 21.1%이다. 법(法)씨중 한족은 80%, 회족은 20%이다. 미(米)씨중 한족은 71.6%, 회족은 19.4%이다. 중국 목(穆)씨중 한족은 69.9%, 회족은 19%이다. 중국 마(馬)씨중 한족은 75.7%, 회족은 18.6%이다.

7. 중국 당국의 이슬람교 규제

이렇게 중국화된 후이족이지만, 시진핑 집권 이후 중국 당국은 이슬람 근본주의가 후이족에게도 전파될 것을 우려한다는 명목으로, 종교 통제를 더욱 강화한다고 한다. 사실 중국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이래 이슬람교가 기독교나 불교보다 딱히 더 큰 탄압을 받은 것은 아니다. 다만 2010년대 들어 다에쉬 등이 주동이 된 이슬람 극단주의로 인해 이슬람에 대한 이미지가 세계적으로 악화되자, 인도나 미얀마 같은 국가들 비서구권 국가들은 인권 문제 비판을 피하면서 무슬림 소수자들을 동화시키거나 제거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보고 무슬림들에게 더 억압적인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중국의 경우도 미얀마처럼 극단적인 수준은 아닐 뿐이지, 통제가 강화된 계기 자체(다에쉬의 준동으로 인한 이슬람 이미지 악화를 소수민족 동화 정책의 기회로 활용)는 다르지 않다.

일단 닝샤의 여러 곳에서 아라비아풍 모스크를 철거하고, 이를 중국 전통 양식으로 다시 짓게 했으며,[73] 아동에 대한 이슬람교 종교 교육을 금지한다고 한다. # 후이족이 위구르족이나 다른 중앙아시아 이슬람계 민족보다 중국화가 되어 있고 정부와 갈등도 적은 것은 사실이지만, 청 말기에 반란이 있기도 했고 최근 뜨거운 감자인 위구르족과 같은 종교를 믿는 점도 있고 해서 그런지 중국 지배층의 전폭적인 신뢰는 얻지 못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애초에 후이족 뿐 아니라 최근 중국 정부가 최근 소수민족들에 대한 동화(한화)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관측이 있다.

시진핑 집권 이래 닝샤에서는 "불법적으로 증축된" 20여개의 모스크가 철거되었다고 하지만 웨이저우에 세워진 대모스크는 후이족의 항의 및 서방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로 법에 어긋난 부분만 철거하는 쪽으로 행정조치가 내려졌다고 한다. # 물론 위에도 말했듯이 중국정부는 이슬람교 건물만 콕 집어 탄압하는 것은 아니고, 기독교나 불교 건축물들도 정부 지침에 어긋나면 가차없이 철거하는 등 종교가 당보다 우선시될까봐 매우 경계하는 모습을 보인다. #

위와 같이 후이족은 청말에야 중국에 온전히 편입되어 신장지역에 편재되어 있는 위구르족과는 달리 한족화된 중국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전혀 부정하지 않으며, 전 중국에 골고루 퍼져있기 때문에 분리운동을 벌이거나 혹은 종교 분쟁을 일으킬 여지가 거의 없기 때문에 후이족에 대한 종교 규제도 기독교나 다른 종교와 비슷한 수준이다.

위구르인에 대한 중국에 직접적인 종교 탄압에 비하면 후이족에 대한 종교 규제는 약한 편이다. 위구르인은 성지 순례 허가를 받기 대단히 힘들지만, 후이족에게는 성지 순례를 갈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된다. 일부 신앙심 강한 후이족들은 중국 정부에 위구르인들의 성지 순례 권리를 보장 및 확충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한다.

8.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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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저우 후이족 구역에 남아있는 후이족 가정의 명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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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어 문장을 한자 서법으로 쓴 후이족의 서예작품이다. 문장은 뜻은 "신께서 지식과 코란을 저에게 주심을 감사한다". 오른쪽 옆에 중국어로 뜻을 적어놓았다. 이 글씨를 쓴 마이핑(馬益平)은 이맘으로 시안시에서 유명한 이슬람 인사이자 서예가이다. 알자지라 방송[74]

자기 지역의 요리 할랄에 맞게 변형한 칭전 요리(清真菜) 문화를 발달시켰다. 중국 각지에 가면 후이족식당에서 그 지방의 요리를 할랄 푸드로 만든 요리를 맛볼 수 있고 한족이나 다른 소수민족들도 후이족의 요리를 맛보러 식당을 찾는 일이 많다고 한다. 대표적인 매뉴로는 우육면(牛肉面)으로 알려진 란저우 라몐(蘭州拉麺)이 있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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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LA 차이나타운의 중국식 할랄 요리 전문점. 상술한 십회구마(후이족 열명 중 아홉명은 마씨 성) 스테레오 타입을 이용해서 간판에 한문으로 마씨네 할랄 식당이라고 붙여놨다.

화교 중에도 물론 후이족 인구가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생각보다는 후이족 인구 수가 적은 편이긴 하지만 이슬람 국가인 이유로 나름 영향력이 있으며,[76] 미국의 LA와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 타운에도 후이족 화교들이 다른 화교들과 같이 어울려 산다.

9. 둥간족

후이족 중에서 옛 소련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중국어로 '둥간쭈(東干族·东干族 / Dōnggānzú)', 한국 한자음으로 '동간족'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는 '둥간족'으로 알려져 있으며 자칭 표현은 둥간어로 '훼이쭈(Хуэйзў)'인데 이는 '후이족'을 의미하는 중국어 '후이쭈(回族 / Huízú)'에 해당한다. 이들은 청나라를 침공한 중앙아시아의 코칸트 칸국에 의해 중국 서부지역에서 잡혀와 노예로 팔려온 한족들의 후예이다.[77] 원래는 인구가 수천여 명에 불과했으나 1862년 현재의 중국 간쑤성, 산시성에서 회민 반란이 일어났을 때, 청군의 진압을 피해서 중앙아시아로 도피한 후이족 난민들이 합류하면서 수가 크게 늘었다. 러시아 제국 통계에 의하면 1877/1878년 당시 좌종당 군을 피해 간쑤성, 산시성에서 러시아 영토로 넘어온 후이족 난민 인구는 5,500여 명에 달했다. 현재도 이들의 후손들 사이에서는 섬서성에서 키르기스스탄 일대로 도보로 피난하던 고초가 담긴 민요가 구전되고 있다고 한다. 1881년 상트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일리 강 서부 유역이 러시아 제국의 영토로 병합되는 과정에서 쿨자 근교에 거주하던 후이족 4,682명이 러시아 영내로 편입되어 카자흐스탄 내 둥간족에 편입되기도 했다.

이후 소련에서는 둥간족 공산주의자 상당수를 1930년대 신장을 통치하던 성스차이 군벌 정권에 파견하였으나, 이들을 껄끄럽게 여긴 성스차이에게 대부분 트로츠키주의자라는 누명을 쓰고 숙청당하고 나머지도 신강성 공산당원 숙청 사건 때 쓸려나갔다.

둥간족은 현재 키르기스스탄에 73,977명,2020년 통계 카자흐스탄에 72,361명2019년 통계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왔으며 일부는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우크라이나에도 거주하고 있다. 현재 인구는 약 15만여 명 정도이다. 유명인물로는 시인인 '야시르 시바자(Ясыр Джумазович Шиваза, 둥간어로 야쓰르 스와쯔·Ясыр Шывазы)'가 있고 군인으로는 '만주스 바나훈(Манзус Ванахун, 둥간어로 만쑤쯔 와나훈디·Мансузы Ванахунди)'이 있다. 언어는 관화 계통의 둥간어를 사용하는데 문자는 키릴 문자를 쓰고 있다.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튀르크계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후이족들도 하나피파에 속하기 때문에 종교적으로 이들은 이웃 민족들과 동질적인 편이지만, 현재는 경제적인 이권 문제로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내에서 주변 민족들과 종종 갈등을 빚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친중 성향은 아닌게, 90년대 중국이 국경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둥간족과 접촉했으나 이들은 "우린 중국어도 모른다."-Вәму бухуэй е Җунгуй йүян-며 선을 그어버렸다고 한다.[78]

둥간족 생활상 화보 및 설명 보기(러시아어)

한족의 중앙아시아 거주는 여러 사료에 단편적으로 남아있는데, 고창국 노수호의 경우처럼 지배층인 경우도 있었고, 현장이 대당서역기에 기록한 탈라스의 한족들처럼 외부와 고립된 농촌을 이루고 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79] 원나라 때는 쿠빌라이 칸이 카이두를 견제하기 위해서 타림 분지에 한족들을 정착시켜 둔전을 일구어 몽골 기병들을 먹이게 하였는데, 당시 이 지역을 여행한 도사 이지상은 이 지역에서 한족 도사나 유생들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기록했다. 청나라 이전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한족들은 오이라트족들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노예가 된 후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포로들과 함께 농노가 되어 준가리아 일대의 오아시스 농장 경영에 투입된 후, 위구르인과 동화되었다.

둥간의 어원은 한자어 '툰컨(屯墾·屯垦 / Túnkěn)'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해당 가설에 따르면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하는 지역에 청나라에 정복되었을 당시 청나라에서 둔전을 개간할 목적으로 많은 후이족들을 이주시켰는데, 중앙아시아 사람들이 후이족들을 둔전을 개간한다는 뜻의 중국어 둥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상술한대로 오늘날에는 '둥간(東干·东干 / Dōnggān)'이라는 한자어로 이들을 칭하는 편이다.

10. 판사이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무슬림을 판사이(Panthay)라고 부른다. 이들은 윈난성의 후이족들와 연결되어 있으며, 한 때는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중 가장 규모가 컸다고 한다. 19세기 버마로 세력을 확장하던 영국은 버마인들로부터 중국계 무슬림들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윈난성의 후이족들도 판사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원나라 시절 윈난성을 다스리던 부하라 출신 사이드 아잘 샴숫딘 우마르(赛典赤·贍思丁)가 같이 온 식솔들을 포함한 무슬림 이민자들과 함께 오늘날의 쿤밍에 해당하는 지역에 모스크를 세우고 이슬람을 포교하였다. 아잘의 사후 동생 후세인(忽辛), 아들 나스룻딘(納速剌丁; Nasr ad din) 역시 윈난성을 다스렸으며, 중국과 미얀마, 인도를 연결하는 무역로를 확대, 개척하였다. 판사이는 미얀마어로 “ 페르시아인”을 의미한다.

쓰촨성과 버마를 육로로 직접 연결하는 무역로는 전한 시절에도 존재하긴 했으나 원주민들의 무관심으로 규모와 수익이 적어 주목받지 못했다. 원나라 때 페르시아계, 튀르크계 무슬림들이 도래하고 나서야 유의미한 규모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미얀마에 거주하는 중국계 무슬림 판사이(Panthays)는 버마와 중국 쓰촨성을 잇는 무역로를 개척한 원나라 무슬림들의 후손이다. 이들 중 일부는 태국 북부 치앙라이로도 이주했는데, 오늘날 치앙라이의 중국계 인구 중 3분의 1이 윈난성 후이족 출신 무슬림이라고 한다.

원명 교체기 명나라가 윈난성에서 원나라 군대를 무찌르고 이 과정에서 윈난성의 후이족들은 명나라에 포로로 잡히거나 투항하였는데, 이렇게 포로가 된 대표적인 인물로 정화가 있다. 명나라는 바이족과 나시족의 갈등을 이용하여 윈난성의 대리국 복원 시도를 무력화하였고, 이 과정에서 원나라 때 무슬림들과 통혼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한 일부 바이족들도 바이어 대신 중국어를 사용하며 다른 후이족들과 동화되었다.

1853년 윈난성에서는 한족 광부들과 후이족 광부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고 후이족 수천여 명이 학살당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에 분개한 후이족들이 1855년 두문수를 중심으로 봉기하였다. 한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할아버지 대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후이족 출신 두문수는 소수민족 바이족 나시족의 갈등을 이용하여 바이족을 봉기에 끌어들인 뒤 봉기 참여자를 늘렸다. 후이족 봉기군들은 1856년 대리를 점령하고 평남국을 건국하였으며 두문수는 술레이만 술탄으로 즉위했다. 평남국 군대는 윈난성의 성도 쿤밍을 두고 청군과 공방전을 벌였다. 두문수는 버마를 통해서 영국 측에 평남국을 국가로 인정할 것과 평남국을 원조할 것을 요청하지만 평남국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고 파악한 영국 측에서는 지원을 거절하였다. 1872년 대리가 함락되자 두문수는 음독자살하고 74년부로 반란은 완전히 진압되었다. 버마를 통해 두문수의 난 관련 소식을 듣던 영국은 이 사건을 Panthay Rebellion(판제이 반란)이라고 칭했다.

미얀마와 태국에 거주하는 후이족들의 후손들 중 현재도 이슬람을 믿는 인구는 양국에 각각 7~8천여 명 정도로 추산된다. 미얀마의 판사이들의 경우 미얀마의 독립 이후 군부 독재 정권의 소수 민족 탄압을 피해 상당수가 중국 윈난성으로 돌아간 것으로 추정되며, 오늘날에는 가급적 대만으로 이주하는 상황이라 한다.

11. 냉담자 / 비무슬림 후이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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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안저우의 마스지드 유적. 현재는 관광지화 되어 있다.

청나라 때 후이족이 상당한 탄압을 받았던데다가, 현대 중국은 강력한 세속국가이기 때문에 이슬람교를 떠난 후이족도 많다. 남부 해안지방(특히 푸젠성 취안저우, 광둥성 광저우 등)의 후이족들은 아랍계, 페르시아계 무슬림을 선조로 하는 족보도 가지고 있지만, 이슬람권인 중앙아시아와 접하고 있는 서북지역의 후이족들과는 달리 명대 이래로 서양세력이 해상교통로에서 우세해지면서 이슬람권과는 단절된 연유로 이 지역 후이족들은 현재는 냉담자 성향이거나 이슬람교를 버린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서북의 후이족들이 이들에게 다시 이슬람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이맘을 여러명 파견했지만 이들을 재이슬람화하는데 실패하고 돌아갔다고.

후이족의 기원과 관련한 후이족과 한족 양측의 구전 전승은 역사적으로는 상당히 부정확하지만, 후이족 일부가 이슬람을 버리고 완전히 한화한 배경에 대해서는 설명해준다.

후이족 측 전승에 의하면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악한 정령들을 몰아내달라는 당나라 황제의 부탁을 받아 360명의 교우를 파견했으며, 중국에 도착한 무슬림들은 환영을 받으며 장안 근교에서 살게 되었다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의 자손이 점점 늘어나자 중국 황실은 불편함을 느끼고 이들을 변경 지대로 추방했다는 것이다. 정작 쿠란과 하디스에서는 중국에 대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으므로 해당 구전 전승은 이슬람계에서 가짜로 분류하고 있다. 즉, 해당 구전 전승은 중국에 정착한 후이족 상당수가 자신들의 정확한 기원을 잊어버렸으며, 이슬람권에서 심각한 중죄에 해당하는 하디스 날조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 상당수가 이를 인지조차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족 측 전승에 의하면 수천여 명의 무슬림 군인들이 중국 황제의 요청으로 중국에 와서 반란군을 진압하였다 한다. 반란을 진압하고 임무를 완수한 이후 무슬림 군인들은 중국에서 돼지고기를 먹고 술을 마신 일이 알려져서 고향에 돌아가면 해코지를 당할까봐 두려워졌고, 결국 중국에 남기로 결정했다는 것이다. 해당 구전 전승은 한족 입장에서 다소 희화화되어 왜곡된 묘사이긴 하지만 비무슬림 후이족들의 기원과 관련하여 정곡을 찌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80]

일단 이들은 민족상 후이족으로 등록되어 있지만, 다수민족인 한족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이들은 민족 등록을 바꾸지 않고 있는데, 이는 소수민족이면 소수자 우대정책으로 여러 혜택(특히 대학입학 및 계획생육정책 면제)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1982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족이 이슬람교로 개종을 하면 후이족으로 민족을 바꿀 수 있었지만 이후 이런 혜택을 노린 개종이 늘어나자 법률이 개정되어 불가능해졌다.

중동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승도 있다. 한 무슬림 철학자가 공개적으로 무신론을 선언하면서 십자가형에 처할 위기에 처하자, 멀리 중국으로 달아나 그곳에서 벼슬을 받았다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사대부들은 천국과 지옥 등을 불신하던 입장이었던 반면, 중세 유럽과 중동에서는 공개적으로 무신론자임을 천명했다가는 목숨이 위험했다.[81] 송나라 역사를 기록한 송사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된 것을 보면 당시 중동에서 송나라로 온 사람들 중 독실한 무슬림과는 반대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점을 추정할 수 있다.
대식국(大食國)은 본디 페르시아(波斯)의 별종이다. 수나라 양제 시절 페르시아에 걸힐(傑黠)한 자가 나타나 동굴에서 글자가 써 있는 돌을 찾아낸 다음 이를 길조라 여기고 사람들을 규합하였다. 재물의 약탈을 일삼다가 무리의 숫자가 점차 많아지자, 마침내 자립하여 왕이라 하고 페르시아의 서쪽 지역을 점거하였다. 번역출처

전근대 무슬림 사회 출신 무신론자, 이신론자, 불가지론자들 입장에서는 중국으로 이민, 정착하는 게 매력적인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같은 맥락에서 중국에 정착한 독실한 무슬림, 기독교인, 유대인 후손들 중에서도 냉담자 성향인 사람들은 하나둘씩 기존 종교를 버리고 그냥 이웃해 사는 여타 중국인처럼 살더라도 별다른 불이익이 없었다.

현재 무신론자뿐만 아니라 기독교도, 불교로 개종한 후이족도 종종 보인다. 가장 유명한 사람이 중화민국 시절 장군이었던 백숭희의 아들인 백선용(바이셴융)[82]은 나름 독실한 무슬림이었던 아버지와는 달리 불교를 믿는다.[83] 후이족 내부에서도 이런 사람들은 후이족에서 제외해야 하는거 아니냐는 문제를 제기한 바 있고, 중국 정부에서도 이슬람교를 떠난 자의 민족 분류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한듯 하다. 하지만 "민족"을 종교가 아니라 혈통에 근거해 분류한 헌법문제가 얽혀있어서 일단 선대에 후이족이었으면 그 자손도 후이족이라고 분류하는 듯.

대만의 경우 국공내전 이후 피난 온 후이족과 위구르인 등의 후손 약 6만여 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들 중 대다수가 완전히 세속화하고 상술한 것처럼 아예 다른 종교로 개종한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러한 연유로 대만의 후이족들은 오늘날 대만 내 인도네시아인 무슬림 이주노동자들[84]과 가깝고도 먼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

12. 우츨인 / 바바 뇨냐

중국 하이난성에도 후이족으로 분류되는 민족이 있다. 바로 우츨(utsul)인이다. 이들은 이슬람을 믿던 참족 난민의 후손이라 대만 원주민과도 같은 계열이다. 다른 후이족은 중국티베트어족 중국어를 쓰는데 반해 이들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에 속한 찻(tsat)어를 쓴다. 무슬림인 것 말고는 겹치는 점이 없음에도 후이족으로 분류되어 있어서 오리지널(?) 후이족과의 대립이 좀 있다. 후이족의 경우 중앙아시아의 영향으로 수니 하나피파에 속하지만 이들은 베트남의 참족 무슬림들과 마찬가지로 동남아 샤머니즘과 결합된 형태의 이슬람을 믿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차이가 있다.

2020년에 들어서면서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 탄압이 심해지면서 우츨인들도 타깃이 되었다. 하이난 섬의 우츨인 공동체가 중국 정부의 타깃이 되면서 종교 탄압을 받고 있다. #

말레이시아에서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지기 전에는 주석 광산에 일하러 온 중국인 노동자 남성과 말레이인 여성이 결혼하면서 중국인들이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는데, 이들을 바바 뇨냐[85]라고 불렀다.[86] 그러나 20세기 들어 중국인과 말레이인 사이의 상호 갈등이 증가하면서, 중국인이 말레이인과 통혼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경우는 예외적인 일이 되기 이른다.

말레이시아는 독립 후 말레이인의 정의를 “말레이 인종에 속하며 말레이어를 사용하고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라고 못을 박아버리기 이른다. 말레이계 유명 인물 중 후이족 조상을 둔 사람들이 꽤 있음에도 불구, 오늘날 말레이시아 내 후이족들은 일단 불교, 기독교를 믿는 다른 중국계와 구분없이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으로 분류된다.[87] 즉, 부미푸트라 정책에 따른 차별이 이들에게도 적용된다.

물론 종교가 같은 수니 이슬람이라서 위화감이나 차별은 적은 편이긴 하지만, 말레이시아 무슬림들 사이에서는 후이족들이 종교 원리원칙보다는 경제적 실리를 더 중시하는 상당히 세속적인 무슬림들이라는 이미지가 퍼져 있다고 한다.[88] 이는 중국 남부 해안 지방의 후이족들 상당수가 더 이상 이슬람을 믿지 않고 사실상 한족과 완전 동화된 상태인 이유도 있다.

말레이시아 무슬림들은 거의 대부분 수니 샤피이파로 같은 수니파이지만 하나피파에 속하는 후이족들과 율법과 관습 상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말레이시아 내 후이족들은 편의상 샤피이파 모스크에서 예배를 보며 샤피이파 율법을 따른다. 현재 말레이시아 내 중국계 무슬림 인구는 4~5만여 명에 달하는데 이들 중 조상이 후이족인 경우는 2천여 명에 불과하다. #

13. 인물

혼혈인의 후손들이라 피지컬이 좋은지, 후이족 중에 축구인들이 많다. 연예계에도 후이족이 상당히 많다.

13.1. 원나라 & 명나라

13.2. 청나라 & 중화민국

13.3. 현대

14. 참고 문헌

14.1. 한국어 문헌

14.2. 영어 문헌

14.3. 아랍어 문헌



[1] 명나라때 지어진 모스크이다. 중국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모스크로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퉁신현에 위치해 있다. [2]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는 후이족의 일파 둥간족. [3] 대만에도 후이족 5만 3천여 명 정도가 산다. [4] 다만 중국의 종교 관련 법규에는 정부 승인을 받아 설립된 종교 교육기관 외에 각급 학교는 종교 행사를 열어서도, 종교과목을 개설해서도, 학생들에게 선교나 전도를 해서도, 신앙을 강요해서도 안 되는데 이들은 그런 법을 무시하고 그냥 하기 때문에 갈등이 좀 있다. [5]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해당. [6] 절대다수가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 신자였다. [7] 중국 유대인들의 절대다수는 송나라의 옛 수도인 카이펑시에 정착했으므로, 뒷날에 카이펑 유대인이라고 이름이 붙혀졌다. [8] 킵차크 칸국은 몽골족이 동슬라브족을 복속하고 세운 나라라서 몽골계, 튀르크계 지배층이 동슬라브족과의 혼혈로 백인화되었다. [9] 중동, 남아시아, 동남아시아의 보수적인 근본주의 수니파 무슬림들은 후이족들의 조상숭배를 시아파 무슬림들의 성인숭배 및 성화숭배와 더불어 우상숭배라고 까는 경향이 강하다. 사실 객관적으로 따지자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니긴 하나, (세속적인 관점에서는 우상숭배와 비슷하게 여겨질 수 있을 정도로 메카 방향으로 기도하는) 주류 이슬람의 주관적 관점에서는 신성을 부여하지 않는 정도의 일반적인 숭상으로 간주하는 듯 하다. [10] 아랍어로는 까딤(قديم)파로 오래된 분파라는 뜻이다. [11]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족과 그외의 소수민족. [12] 한 한국인이 후이족 친구와 같이 피자를 시켜 먹었는데 소시지만 따로 떼어내고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한다. 원리원칙대로라면 돼지고기가 닿은 음식은 버리거나 아예 사먹지 말아야 하지만, 비무슬림 친구와 같이 밥 먹을 때 이런 걸 너무 따지면 친구가 불편해할까봐 그런 것. 다만 만약에 같은 후이족들이 이렇게 먹은 걸 알면 핀잔을 좀 들을 수 있다. [13] 음식 자체보다는 포획, 도축, 정육과정에서 인간에게 전파된다고 보는 게 합리적이다. 중국 요리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중국 요리에서는 날것은 먹지 않고 고열에서 조리된 것을 먹기 때문에 음식으로부터 바이러스를 섭취할 가능성은 의외로 낮다. 다만 일부 남방 지방에서는 드물지만 민물고기나 뱀 따위를 회로 먹는 경우도 있기에 먹으면서 감염될 가능성도 드물게나마 존재한다. 실제로 중국발 전염병들을 살펴보면 중국 남부 지방에서 발생한 게 적지 않다. [14] 다만 후술할 둥간족은 무슬림이면서도 어느 정도 술에 관대한 튀르크 제민족(특히 카자흐족과 키르기스족)과 국가 무신론을 추구했던 소련의 영향으로 그냥 술을 마시기도 한다. [15] 위구르인에 동화된 카자흐, 키르기스인들로 청나라 시절 우루무치 시 인구의 상당수를 구성했다. [16] 예배모라고도 불리며, 딱히 색깔 제한은 없지만 후이족은 주로 흰색 회회모를 선호한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위구르족은 다양한 색깔과 문양이 있는 모자를 착용하며 짙은색이 많다. [17] 중국에서는 바오터우진(包头巾:포두건)이라고 한다. 역시 후이족은 흰색을 선호. [18] 대만의 경우 일본의 영향으로 씻는 문화가 발달했다. [19] 다만 같은 한족이라도 싱가포르는 후이족처럼 이슬람교가 주류인 말레이인의 영향으로 청결함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20] 이것은 무슬림의 관습이 아니라 원래 이집트 상형문자에도 기록될 정도로 이슬람 이전부터 유행하고 있었고, 아프리카-중동으로 퍼져나간 악습이었다. 아프리카 일부지역에서는 기독교-이슬람교를 불문하고 시행되고 있다. [21] 에드거 스노우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을 보면, 마훙쿠이는 중국 전역을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직접 맞선을 보고 결혼했다고 한다. [22] 이븐 바투타의 기록을 보면 중국에 정착한 무슬림 상인들이 대체적으로 부유하고 사회적 평판도 좋다고 기록되어 있다. [폐쇄] [24] 박해를 받던 무함마드 그리고 무슬림들의 메디나 이주. [25] 같은 맥락에서 후이족들 사이에서 중국에 최초로 이슬람을 전파한 사람이 사드 이븐 아비 와카스라는 전승도 있으나, 수나라 치세와 연대가 맞지 않는다. [26] 이들과 연관이 깊은 인도의 파르시들의 유전자를 조사해본 결과 부계 Y-DNA는 대부분 이란에서 기원한 것으로 나왔으나 모계 mtDNA는 6% 정도만 이란에서 기원한 것으로 밝혀졌다. 페르시아인 입장에서 인도보다도 중국이 훨씬 더 이동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중국에 정착한 페르시아인과 아랍인의 성비불균형은 인도에서보다 훨씬 더 심했을 것이다. [27] 다만 신라인들과 발해인들이 빈공과를 거의 휩쓸다시피 한 것과 다르게 아랍-페르시아계 빈공과 합격자는 한두 명 정도였다. [28] 오늘날 아랍어에서는 Shay라고 발음함. [29] 9세기 무렵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무역 상인들의 구술을 편집, 기록한 책. [30] 오만 동북부에 위치한 알 핫드 서안의 수르 항 인근을 가리킨다. [31] 오늘날 사우디아라비아 서안의 알 카티프 [32] 당나라 항구 도시에 정착했던 신라인 공동체도 한화되었다. 이로 인해 중국의 해상 무역 패권은 다시 중국인들이 장악했다. [33] 하단의 비무슬림 후이족 항목 참조. [34] 아랍-타지크인의 율법 [35] 카라한 칸국의 유명한 칸 중 하나인 아르슬란 칸(사자(동물) 칸이라는 뜻) 이름을 음차하고 여기에 중세 위구르 칸국의 한자어 이름에 더함. [36] 이 두 사람은 라시드 앗 딘에 저술에도 기록되어 있다. [37] 페르시아어 "파이감바르"의 음차. 예언자라는 뜻이다. [38] 명군에게 사로잡힌 몽골인들은 어떻게 되었냐면...몽골인들이 열대우림의 질병에 취약하다는 걸 노리고 남방 소수민족 반란을 진압하러 보낸다는 핑계로 상당수의 몽골인 포로들을 열대우림 지대로 파병 보내서 태반이 질병으로 죽어나가게 만들었다. 이들 중 그나마 살아남은 이들이 오늘날 윈난성에 거주하는 몽골족의 조상이다. [39] 중국에서 티베트 불교 부흥이 일어난 건 훗날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면서부터였다. [40] 영락제의 해상 원정을 성공적으로 지휘한 후이족 정화(명나라)도 쇄국 정책에 의해 기록의 상당수가 말소되었다. [출처] : Late Imperial Chinese Army, Men at Arms. Osprey [42] 원나라 때 쿤밍을 건설하면서 절 한 채와 모스크 두 채를 건설했다. [43] 수피 스승이 죽은 이후에도 이른바 "황금 사슬"을 이용해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가르침을 전달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티베트 불교의 비장(秘藏)문헌 개념을 차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다른 수피들이 속세와 거리를 두고 고행을 하는 것과 다르게 낙슈반디야 교단은 수피 교단주가 정치에 적극 개입하여 샤리아를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지상낙원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티베트 불교 겔룩파와 유사하다. 다른 불교 종파에서는 승려들이 속세와 거리를 두고 고행을 하는 것과 다르게 겔룩파에서는 달라이 라마가 정치적으로도 최고지도자 자리를 겸하였다. [44] 해당 교단의 대표적인 유명 수피 중 하나였던 호자 아흐라르는 전승에 의하면 의사들이 불신자 그리스인들의 사악한 기술을 쓴다는 이유만으로 의사들의 치료를 거부하고 하디스에 나온 민간요법만 사용했던 것으로 유명했다. [45] 사원에서 발을 구르고 뛰면서 예배를 보았으며 다른 무슬림들과 다르게 지크르(하나님의 성함을 외우는 기도 행위)를 톱을 연주하는 듯한 특유의 고음으로 크게 소리를 내는 방식으로 행했다. 전승에 따르면 마명심의 예멘인 스승은 시아파 키질바시 수피 교단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46] 조용히 지크르를 암송하는 교단이라는 뜻이다. 크게 소리내어 지크르를 하는 교단이라는 뜻의 자흐리야 교단과 구별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름이다. [47] 오아시스 도시의 황백혼혈 주민들이 거주하던 타림 분지 일대 [48] 준가르족을 몰아낸 후 팔기군 가족과 후이족, 위구르인 농부들이 식민 사업을 하던 북부 초원지대 [49] 영어권에서는 간쑤, 섬서의 후이족 반란과 신장의 야쿱 벡 정권 성립을 묶어서 Dungan Revolt라고 칭한다. [50] 원나라 때 윈난성으로 이주하여 윈난성과 미얀마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무슬림들. [51] 백언호의 군대는 당시 흠차대신이었던 수완구왈기야 싱포의 군대에 승리하기도 했다. [52] 물론 전란으로 과하게 세금이 부과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 현대와 완전히 동치시키는 것은 주의해야 한다. [53] 다른 지역 무슬림들이 원칙적으로는 정교일치를 추구한 것과 다르게, 후이족 사회에서는 아예 기독교에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마따나 세속 정권에 충성하면서 정교를 철저히 분리하는 문화가 있다. 중국어를 사용하면서 한문으로 된 책을 읽고 살았으니 종교가 이슬람이더라도 실질적으로는 사고방식이 한족과 유사할 수 밖에 없었다. [54] 이슬람 모더니즘은 반수피 개혁 운동을 띠고 있었다. [55] 이란의 호메이니는 위구르 무슬림들에게 중국의 식민지배에 맞서 봉기할 것을 요구하였던 바 있다. [56] 중국 내에서 해외교류가 제한되는 것은 이슬람 뿐만 아니라 정교회를 제외한 기독교 종파들도 마찬가지다. 가톨릭의 경우 교황청의 임명권을 배제한 채, 중국 내에서 독자적으로 국가가 주교를 임명하고 있다. 다만 2000년대 들어와서는 물밑에서 서로 의견을 교환한 후에 임명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현재 정부가 임명한 중국의 가톨릭 주교들이 아예 교황청의 눈밖에 난 사람들은 아니라는 이야기. [57] 참고로 이 번역본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인증하고 보급하는 중국어판 번역본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보급하는 한국어판 번역본은 지나치게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다. 비무슬림 전부를 불신자라는 살벌한 단어로 표현하고, 오해의 소지가 있는 불필요한 의역이 많다. 다른 한 편에서 보면 부인이 말을 안 들으면 “살짝” 때리라던지, 적의 목을 “때리라”같은 어설픈 번역으로 한국 이슬람계 내외에서 엄청난 비판의 대상이 되어 사실상 보급이 중단되었다. [58] 중국은 종교 계열이 주도한 민란으로 나라가 혼란해졌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중국 내 종교들을 다소 빡빡하게 감시하는 편이다. 여호와의 증인 파룬궁은 중국에서 아예 해체되었다. [59] 청나라 때는 만주족을 제외하고 한족 뿐 아니라 후이족도 변발을 강요당하거나, 현재 신장 위구르 지역에서 팔기군들이 위구르족과 후이족을 학살하기도 했다. 모스크 입구에 “황제만세 만만세”라는 간판을 강제로 걸도록 하는 모욕적 조치 때문에 후이족들의 불만이 하늘을 찔렀었다. [60] 일제강점기 때 대만은 이슬람이 완전 사멸한 적이 있으며, 중일전쟁 당시 일본군은 점령지의 청진사들을 부수고 후이족들을 학대하여 중국 내 무슬림들의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61] 다만 2006년 유엔 안보리의 북한 제재에 찬성하였기에 방북 시에 냉대당하였다. 그외에 후베이성, 안후이성, 장쑤성 등에서 성장이나 당위원회 서기 등을 맡는 등 여러 요직을 거쳤다 [62] 단, 원래는 무슬림들끼리만 결혼하기도 했으나 명나라 때는 강제로 결혼을 시켰다. [63] 다만 같은 위구르인이라도 어느 나라 국적인지에 따라서 세세한 차이는 있다. 흔히 알려진 중화권의 위구르인들은 후이족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한족 문화의 영향을 받은 편이지만, 러시아 카자흐스탄 같이 아예 한족 문화권이 아닌 나라에 사는 위구르인들은 한족 문화의 영향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64] 혈통적 동질성도 있고, 오랜 시간 동안 중국에 정착해서 살았기 때문에 이쪽에 관련해서는 그나마 온건한 편이다. 유럽으로 치면 불가리아의 포마크족과 러시아의 볼가 타타르족의 중간 포지션인 셈이다. [65] 후이족 입장에서 티베트족도 다른 종교를 믿는 이교도일 뿐이라 딱히 한족보다 더 우호적이지 않다. 티베트족과 종교가 같은 북방 한족들조차도 티베트족과 격렬하게 갈등하는 상황이니... [66] 오히려 줄서기나 인재 배출을 잘해서 다른 무슬림들과 다르게 정부의 지원을 받는 면도 있다. [67] 물론 중국에서 위구르족 인구가 매우 많은 만큼 위구르족도 후이족만큼은 아니지만 중국 내의 할랄 푸드 생산을 담당하는 일이 있다. [68] 러시아로 치면 볼가 타타르인과 체르케스인의 차이와도 비슷하다. 전자가 토착 러시아인들과의 타협을 선택한 반면, 후자는 러시아인들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터키인들과 연대하려 하고 있다. [69] 로힝야들이 판사이들의 역사를 도용했다고 생각해서 싫어하는 편이다. 그러나 미얀마 측에서 중국계 무슬림 소수민족에 해당하는 이들도 상당히 싫어하는 이유로 판사이들의 의견 역시 무시당하면서(...) 대외적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70] 여담으로 인도 라다크와 파키스탄의 길기트 발티스탄에 거주하는 티베트계 무슬림( 발티인 등등)들은 시아파 계열 수피가 많은데 비해 중국령 티베트에 거주하는 무슬림들은 수니파이다. 칭하이성의 티베트 무슬림 마을은 살라르족의 영향으로 수니파 하나피파로 개종하였고, 라싸의 무슬림들은 근세 아팍 호자를 따라 라싸로 이주한 위구르인 후손으로 마찬가지로 수니파이다. 티베트인들은 무슬림들을 수니파 시아파 혹은 출신 가리지 않고 다 “까체”( 카슈미르인)라고 부른다. [71] 대조적으로 근현대 후이족들은 반불교 성향이 강했다. [72] 실제 통계를 보면 회족 중 마씨는 대략 30% 정도이다. 십회삼마 [73] 대만, 홍콩, 마카오의 경우 당연한 일이지만 종교의 자유 때문에 정권을 막론하고 아라비아풍 모스크가 건재하다. 말레이어가 국어이고 말레이계, 인도계, 후이족계 주민들의 이슬람교 신앙이 잘 보장되는 싱가포르는 말할 것도 없고... 그러나 이들 국가에서도 이슬람 근본주의가 싹 트기 시작하면 정부가 무슨 정책을 취할 지는 모른다. [74] 문화대혁명 시절에는 집에서 몰래 코란공부를 하다가 덩샤오핑이 집권 한 이후부터 공개적으로 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메디나로 유학해서 이슬람과 이슬람 서예를 공부했고, 메카를 세번이나 갔다온 독실한 신자이다. [75] 이 라몐을 일본의 라멘의 원형으로 보기도 한다. [76] 하단의 바바 뇨냐 항목 참조 [77] 코칸트 칸국 군인들이 후이족 무슬림을 한족으로 오인해서 납치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다. 그 외에도 청나라의 3대 주류 민족이 만주족, 몽골족, 한족이었으므로 만주족 포로나 몽골족 포로 또한 일부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78] 둥간어가 관화의 일종이기는 하지만, 관화 자체가 북경어와 방언연속체 관계에 있는 여러 방언의 집합에 가깝기 때문에 북경어와는 차이가 커서 의사소통이 어렵다. 대신 섬서, 간쑤 지역의 중원관화와는 차이가 적어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79] 자치통감에 따르면 수나라 때 돌궐에서 한족 8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이렇게 노예로 끌려간 사람들 중 일부가 키르기스스탄 산악 삼림지대로 피신한 것으로 추정된다. [80] 단, 일본 열도나 한반도까지는 아니지만 중국 대륙의 존재 자체는 (저 멀리 시니야나 세리카라는 비단 잘 만드는 동네가 있다고 하더라~ 수준이지만) 실크 로드 교역로를 통해서 이미 무함마드 시대 아라비아에도 희미하게 왜곡된 상태로나마 알려져는 있었다. [81] 서구 사회에서 무신론자들이 따로 제재받지 않기 시작한 시점은 근세 이후 서서히 종교의 자유 개념이 퍼지고 나서이다. [82] 중화민국, 즉 대만 국적이다. [83] 바이충시는 술과 돼지고기를 대놓고 먹기는 했으나, 애국주의 성향의 후이족 이슬람 학자 후쑹산의 영향으로 중일전쟁을 일종의 지하드로 여기고 적극 헌신하던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바이충시는 작전 지역에서 도교 사원과 절을 여러차례 파괴하고 다녔는데, 아들 바이셴융이 불교를 믿게 되었다. [84] 인도네시아계 대만인 문서 참조 [85] 마인어로 각각 baba는 남자, nyonya는 여자를 의미한다. [86] 만약 “한족 무슬림 = 후이족”이라는 공식을 그대로 따른다면 말레이시아인 상당수는 후이족 조상을 둔 셈이 된다. [87] 이점에서는 말레이시아 내 무슬림 타밀족들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이들의 경우도 힌두교를 믿는 대부분의 다른 타밀인들과 같이 인도계 말레이시아인으로 분류된다. [88] 그래도 불교 기독교 신자 중국인 보단 무슬림 중국인들의 취급이 낫다고 한다. [89] 굳이 출신을 따진다면 카라 키타이 출신으로 고향은 시르다리야 강 유역 파나카트(오늘날 타지키스탄에 해당)라 한다. [90] 당시에는 칭하이성과 닝샤까지 포함 [91] 탑시르는 쿠란 주해본을 일컫는 어휘이다. [92] 수니파 6대 하디스 편집본의 축약 발췌 해석본 [93] 마드하브 구분 입문서 [94] 출처가 의심되고 신빙성 약한 하디스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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