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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어 | 사할린 한인 |
러시아어 | Сахалинские корейцы |
영어 | Sakhalin Koreans |
중국어 | 庫頁島韓人 |
과거 일본령 사할린 섬 남부에 일제에 의해 노무자로 징발당해 끌려간 한국인과 그 후손들을 말한다. 사할린 동포, 사할린 한인동포, 사할린 조선인, 사할린 한국인이라고도 한다.
2. 역사
2.1. 발단
19세기에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간 조선인 중 일부가 러시아 영토인 사할린 섬 북부로 넘어간 경우가 있었다. 또한 러일전쟁 이후 일본이 전리품으로 사할린 섬 남부 절반을 차지하고 여기에 가라후토청을 세우자 일본 거주 조선인 중 일부가 사할린으로 건너간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인원은 소수였고 더군다나 북사할린으로 이주한 이주민들은 고려인들과 함께 1930년대에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다. 이후 1930년대 말부터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일제의 군국주의가 본격적으로 한반도를 휩쓸기 시작하면서 얘기가 시작된다.일제는 당시 관동군에 자국민인 일본인은 물론이고 조선인까지 징집해 닥치는 대로 끌어넣자 노동력 부족이 극심해졌다. 사할린 지역의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일본 정부가 직접 한국인을 대거 사할린 섬으로 강제 징발하면서 본격적인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일본은 이들을 사할린의 탄광, 군수공장 등에서 혹사시켰다.
이러한 한인 노무자 강제 징발은 1939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전쟁이 격화되면서 물자와 인력이 부족해지자 징발 형태가 3단계 진화했다.
한편 사할린에서 물자 운반이 힘들자 조선인 노무자 1만명을 다시 일본 본토로 또 끌고 가서 혹사시키는 이중징용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이산가족이 생겼는데 특히 1944년 8월 ~ 9월에 걸쳐 이중징용된 한인 3200명의 생사는 아직도 확인되지 않았다. # 게다가 사할린으로 끌려갔던 피해자들과 후손들은 아직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
2.2. 소련의 사할린 탈환
1945년 8월 9일, 소련군이 8월 폭풍 작전을 실행하자, 일본군은 엄청난 기세로 남진하는 소련군에게 일방적으로 패퇴하면서 만주에서 물러났다. 관동군이 이런 꼴이니, 사할린의 미래는 불보듯 뻔한 것이었다. 곧이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일본 제국의 패전과 함께 일본 제국의 사할린 통치가 막을 내리고, 사할린 섬은 소비에트 연방의 새로운 영토가 되었다. 1945년 9월 2일의 시점에서 당시 사할린 남부의 인구는 39만 1천 명이었는데, 이들 가운데 일본인이 35만 8500명, 조선인이 2만 3500명, 사할린 아이누, 니브흐, 윌타 등 원주민이 대략 1천 명이었다.1946년, 소련과 미국이 이들 일본인들을 다시 일본으로 추방하기로 합의했다.[1] 이에 따라 사할린의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송환되었는데, 정작 조선인은 한반도가 분리독립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일본 국민이 아니라는 이유로 일본 정부가 이들을 방치했다. 게다가 남북한 양국은 사할린 섬에서 머무르고 있는 조선인들의 송환에 대하여 오랫동안 무관심했다. 더 나아가 대한민국 정부는 공산권 나라들과 교류가 없다는 핑계로 사할린 한인들의 귀국을 포기했다.
일본 제국이 통치하던 시절 살아오던 1~2세대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사할린 섬의 법정화폐가 소련 루블로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가 쓰는 돈의 액수를 거론할 때마다 일본 엔 단위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2.3. 소련 통치 하의 삶
냉전으로 인해 대한민국과 소련은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사할린 한인들은 주변국들의 무관심 속에서 무국적자로 어려운 삶을 살았다. 북한이 이들을 회유하기도 하였으나 한반도 남부에 연고가 있는 대부분의 사할린 한인들은 북한 송환을 거부하였다.[2] 고려인들과 달리 이들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등 남부 출신이다.[3] 일제는 한반도 남부는 지리적으로 자신들과 가깝고 물자와 인력이 풍부했기 때문에 각종 물적 / 인적 자원의 수탈기지로 활용하였기 때문이다. 사할린 한국인들 중에는 제주도 출신도 포함되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부는 소련 국적을 취득하기도 했지만 대한민국으로 귀환을 바라던 1세대 대부분은 계속 무국적자로 남아 어려운 생활을 이어갔다. 소련 치하 사할린 한인의 인구는 3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섬 인구의 5%에 해당했다.
더 자세한 정보는 사할린한인역사기념사업회 홈페이지를 참조하자.
3.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
고려인과는 다르다.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으로 이주하게 된 한반도 남부 출신 사할린 한인들과 달리 대륙의 한인들은 러시아 제국이 극동 지역을 식민화하기 전부터도 한반도에서 넘어가 그곳에 살았거나 1860년대 이후 아예 러시아 제국에 자발적으로 이주한데다가 출신도 주로 한반도 북부이기 때문이다.고려인들과 마찬가지로 사할린 한인의 2세 이후 후손들은 러시아어가 모어이고 한국어는 많이 서투르다.
3.1. 사할린 한인의 명칭
사할린 한인에 대해서는 ' 고려인'이나 '고려사람'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는다. 사할린 한인들의 모든 기관(예: 사할린주한인협회, 사할린한인문화센터, 사할린한인추모관 등) 및 대한민국 공공기관(예: 국회, 통일부,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 주러시아 대한민국 대사관, 주 블라디보스톡 대한민국 총영사관, 사할린한국한인회 등)에서 공식적으로 '사할린 한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고려인'이라는 명칭은 전 소련 고려인협회에서 만들어냈지만 이 협회 거의 모든 회원들이 연해주와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이었고 그 당시 남한과 북한의 구별을 하기 위해, 그리고 '정치적 중립'을 지키기 위해 '고려'이란 명칭을 택했다고 한다. 남한뿐 아니라 북한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던 당시 소련 정부의 입장상 제3의 명칭을 만들어내야 했던 배경과 '고려인협회'에서 김일성이 제시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을 지지한 부분도 있다. 북한에서도 '소련 고려인' 명칭을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과 연관을 맺고 있다. 독립국가연합(CIS)에서는 지금도 고려사람이라고 할 때 사할린 한인을 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고려인들이 한반도 북부지방[4] 출신이 대부분인 것과 달리 사할린 한인들은 대부분 한반도 남부지방 출신이고 러시아에 들어와 살게 된 원인도 고려인보다 더 비자발적이었기 때문에 모국으로 북한이 아니라 남한을 말하고 있다. 원래 스스로 사할린 조선인이라고 부르다가 남한과의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사할린 한인'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사할린에서 출판되는 '새고려신문'이 있긴 하지만 이 신문에서조차 '사할린한인'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참고로 소위 말하는 '사할린 고려인'은 1937년 당시 하바롭스크 시 기준 북쪽 지역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면한 조선인들과 또 강제이주 이후 다시 극동지역으로 돌아온 고려인들 중 사할린에 정착한 이들을 칭하고 있는 명칭이다. 즉 다시 말하면 사할린 한인은 일제 강제동원이나 다른 목적으로 1945년 해방 이전 남사할린으로 이주한 한인이고 사할린 고려인은 1945년 해방 이후 소련 다른 지역에서 사할린으로 이주한 한인인 것이다.
1945년 해방 이후 사할린 한인들에게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하여 소련이 북한과 소련의 조선인 정치부원들을 남사할린으로 보낸 일이 있었다. 특히 북한에서 들어온 정치부원 중에는 나중에 다시 북한으로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사할린 한인들의 도움으로 소련 국적을 취득하면서 사할린 한인들처럼 생활했다. 그들도 역시 사할린 한인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4. 귀향
대한뉴스 영상 |
1988년의 서울 올림픽을 유치하는 과정에서 대한민국과 소비에트 연방이 양국간의 친선우호와 화평을 도모하자, 사할린 한인의 모국 방문이 추진되었다. 소련 붕괴와 함께 러시아 연방과 대한민국과 일본이 시민단체들의 집요한 요구에 굴복하면서 사할린 한인들 가운데 1세대(1945년 이전에 태어난 한인들)를 남한으로 송환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1990년대부터 사할린 한인들을 대규모로 송환하기 시작했고, 2010년대까지 3500명이 귀국했는데, 사할린 한인은 비자발적으로 끌려갔고 남한 지역에 고향을 둔 경우가 많았기에 귀환을 원하는 사람들의 비율이 매우 높았다. 그러나 사할린 한인들을 남한으로 송환하는 사업은 대한적십자사와 일본적십자사의 합작으로 실행하고 있으며, 이렇게 귀국한 그들의 의식주는 한국인 청장년 저소득층 주민들과 비슷할 정도로 여전히 형편없는 수준이니, 보다 못한 몇몇 광역자치단체들의 몇몇 지방의회의원들이 발벗고 나서서 특별예산을 마련하여 재정착한 사할린 한인들의 의식주를 돌보는 현실이다.
고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근 반세기를 버텨 온 오늘의 사할린 동포들에게 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나마 실낱같았던 고국 귀환에의 꿈이 이제는 체념과 절망으로, 언젠가는 조국이 자신들을 데려가리라는 기대가 원망과 분노로 바뀌어가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버림받은 이민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차별과 멸시, 박해와 억압의 굴레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던 그들에게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한소수교가 가져다 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제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가 있는 길이 열렸다는 설레임이 잠시 일었을 뿐이고, 이내 더 큰 좌절과 탄식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것은 그들과 고국을 잇는 길이 열리고서야 비로소 깨닫기 시작한 냉혹한 현실, 즉 「조국은 자기들을 기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때문일 것이다. 사할린 동포들은 자신들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사할린에 버려져 있어야만 했는지 그 이유를 뒤늦게 깨닫고 있다. 1991년 취재 때에 만나봤던 그들은 평생을 기다려온 자신들의 고국 귀환을 막고 있던 것은
소련 정부도
일본 정부도 아닌 바로
고국 정부라고 말하는 데에 결코 주저하지 않았다. 적십자사를 앞세워 진행되고 있는 일시적인 모국방문 및 영주귀국정책의 허실과 한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처지를 분명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할린 동포들은 그토록 믿고 의지해 왔던 모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 문제 해결의 기본 방향이란 한마디로 「 당사자의 자연사를 통한 원인 자체의 소멸」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반세기의 기다림 끝에 열린 고국 귀환길은 좁다 못해 차라리 열리지 않는 것만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핍박과 설움으로 점철된 「더부살이 삶」을 유일하게 지탱해준 귀국에의 기다림마저 이제는 포기해야 할 때에 이르렀음을 확인해주었을 따름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들 동포들은 한국 정부가 영주귀국을 사전심사 및 승인하는 과정에서 징용 1세대와 직계가족 등으로 그 대상자를 한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영주귀국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더욱이 영주귀국 이후의 부양능력 등을 가릴 경우 사할린 동포들 가운데 귀국 여건이 되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하다며 정부의 처사를 원망하고 있다. 사할린에 변함없이 방치되어 온 이들에게 골수에 맺힌 망향의 설움이 바로 「어제의 한」이었다면, 고국 귀환의 길이 열렸음에도 갈 수가 없다는 또 다른 절망이 「오늘의 한」이 되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할린 동포들의 고국 방문길이 열린 1989년부터 이들의 가슴이 맺히기 시작한 한이 얼마나 깊은가는 영주귀국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징용 1세대의 비관자살이 잇따른 데서도 잘 알 수가 있다. 또한, 고국에 다녀온 「선택받은」 동포들일수록 이전보다 훨씬 더 심한 고국에의 향수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들의 얼굴에는 동요와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층 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들은 조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온 뒤에는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으며, 고국 귀환의 그 날을 기다리며 더더욱 억척스럽게 살아왔던 삶의 목표마저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김용수 기자( 연합뉴스 도쿄 특파원)가 저술한 취재체험록(《 한일 50년은 청산되었는가》) 44쪽~46쪽
대부분의 사할린 동포들은 그토록 믿고 의지해 왔던 모국 정부가 취하고 있는 사할린 동포 문제 해결의 기본 방향이란 한마디로 「 당사자의 자연사를 통한 원인 자체의 소멸」이라고 서슴없이 말했다. 반세기의 기다림 끝에 열린 고국 귀환길은 좁다 못해 차라리 열리지 않는 것만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핍박과 설움으로 점철된 「더부살이 삶」을 유일하게 지탱해준 귀국에의 기다림마저 이제는 포기해야 할 때에 이르렀음을 확인해주었을 따름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들 동포들은 한국 정부가 영주귀국을 사전심사 및 승인하는 과정에서 징용 1세대와 직계가족 등으로 그 대상자를 한정하고 있는 것은 사실상 영주귀국을 허가하지 않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더욱이 영주귀국 이후의 부양능력 등을 가릴 경우 사할린 동포들 가운데 귀국 여건이 되는 사람은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하다며 정부의 처사를 원망하고 있다. 사할린에 변함없이 방치되어 온 이들에게 골수에 맺힌 망향의 설움이 바로 「어제의 한」이었다면, 고국 귀환의 길이 열렸음에도 갈 수가 없다는 또 다른 절망이 「오늘의 한」이 되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할린 동포들의 고국 방문길이 열린 1989년부터 이들의 가슴이 맺히기 시작한 한이 얼마나 깊은가는 영주귀국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징용 1세대의 비관자살이 잇따른 데서도 잘 알 수가 있다. 또한, 고국에 다녀온 「선택받은」 동포들일수록 이전보다 훨씬 더 심한 고국에의 향수에 시달리고 있으며, 이들의 얼굴에는 동요와 절망의 어두운 그림자가 한층 더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들은 조국의 눈부신 경제발전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돌아온 뒤에는 도무지 마음의 갈피를 잡을 수가 없으며, 고국 귀환의 그 날을 기다리며 더더욱 억척스럽게 살아왔던 삶의 목표마저 사라져 버렸다고 말했다.
김영삼 정부 시절에 김용수 기자( 연합뉴스 도쿄 특파원)가 저술한 취재체험록(《 한일 50년은 청산되었는가》) 44쪽~46쪽
2019년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사할린 섬으로 끌려갔던 한인 희생자 14명의 유해가 대한민국으로 돌아왔다. #
17대 국회부터 표류 중이던 사할린동포 특별법이 2020년에 외교통상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의결되자 본회의 통과가 어느 때보다 희망적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 4월 30일에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 이 후, 박순옥 러시아 사할린한인협회장은 국회에서 통과된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 시행령에 역사기념관과 양로원 건립은 물론 사할린 잔류 1세와 차세대를 위한 실질적인 지원과 혜택을 주는 사업이 진행되는 것이 담겼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
2020년 공개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소련과 수교 이전에 비밀리에 귀향 추진이 있었다. # 또 러시아가 실종된 25명의 사할린 한인들을 찾는 중이라고 한다. #
9월 26일에 지구촌 동포연대는 사할린 동포에게 보낼 '세상에 하나뿐인 달력 2021' 제작을 위한 모금을 시작한다고 밝혔다. #
11월 11일에 박순옥 사할린한인협회 회장이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서 동포의 정의를 확대 해석해 달라고 호소했다. #
2021년 1월 1일부터 사할린 동포 지원에 관한 특별법이 시행됐다. #
한국 국적의 유가족으로 한정한 신청자 자격을 현지 국적 후손까지로 확대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
2021년에 한국으로 돌아오는 사할린 한국인의 수가 총 350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 2022년 대한민국으로 영주 귀국할 사할린 동포가 350명으로 확정됐다. #
2022년 12월 26일, 사할린 한인협회 회장에 오진하 고문이 선출됐다. #
그러나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인해 비행편이 끊겨져 귀향길이 막혔다. #
5. 거주 지역
러시아 사할린 주에 3만여 명이 살고 있으며 이 중 50%는 유즈노사할린스크에 산다. 러시아 외에 대한민국에 3500여 명이 귀환했다. 주로 경기도 안양시에 많이 정착했으며, 안양시에서 가끔 러시아어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이들 때문이다. 안양시뿐만 아니라 안산시에도 많이 정착했다. 주로 한대앞역 앞 고향마을에서 거주한다. 이 외 부산광역시의 정관신도시에도 정착했다. 그외에 러시아 본토에도 사할인 한인들이 살고 있다.한편 과거 냉전 시대에 남한으로 갈 수 없던 시절에 북한행을 택한 사람도 있어서 북한에도 1천여 명이 산다고 한다.
6. 사할린 한인 학살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일본의 학살은 미즈호 마을에서 일본인들이 한인 27명을 학살한 사건 외에는 그동안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는데 2008년에 러시아 연방보안국 간부가 조선인 학살을 바탕으로 쓴 소설을 출간하면서 일본의 사할린 한인 학살이 추가로 알려졌다. # 2012년에는 일본이 사할린 한인들을 대량학살했을 것이라는 소련 정부 보고서 초안이 공개되었다. # 심지어 6개월 갓난아이까지 학살된 것으로 밝혀졌다 #.7. 관련 문서
[1]
당시 일본은 무조건 항복 이후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까지 독자적으로 국제무대에서 사실상 국방과 외교를 운용할 수 없고 오로지 승전국들의 처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2]
지금도 느낄 수 있는 한반도 남부 방언과 북부 방언의 큰 차이에서부터 알 수 있듯, 남한 지역과 북한지역의 기후와 음식과 문화가 전반적으로 달랐으므로, 사할린 한인 실향민들 입장에서는 단순히 같은 한반도라는 이유만으로 북한을 고향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해방 초기만 해도 같은 민족이라는 정서는 있었지만 지방들끼리 강한 사투리, 다른 음식,기후 등으로 거리감은 지금보다 더 컸다.
[3]
일본의 재일교포와 마찬가지로 사할린 한인도 연고지가 제주도,경상도,전라도 순으로 많다.
[4]
그것도 거의 대부분이
함북
[5]
반면에 이스라엘 정부와 서독 연방정부는
1948년부터
1993년까지 필사적으로 협상하면서
소비에트 연방과
폴란드 인민공화국 및
루마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에서 고생하는
동유럽계 유대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을 수십년간의 누적합계로 각각 100만 명만큼 집요하게 출국시켜
이스라엘과
서독으로 모셔왔다. 서독은 194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동유럽 나라들과
단교했고, 이스라엘은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공산권 나라들과
단교했다. 이렇게 돌아간 형편에서 양국은 동유럽 공산권 나라들과 끈질기게 협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