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제국군의 프랑스 침공에 대한 내용은 슐리펜 계획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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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36349> 연표 | 사건 |
1936년 |
3월
라인란트 재무장 | 7월
스페인 내전 발발 | 12월
방공 협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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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
7월
중일전쟁 발발(
루거우차오 사건) ·
제2차 국공합작 | 8월
상하이 전투 | 12월
난징 전투(
난징 대학살) ·
파나이 호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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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
3월
오스트리아 병합 | 6월
1938년 황허 홍수 | 7월
하산 호 전투 | 9월
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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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
4월
스페인 내전 종결 | 5월
할힌골 전투 | 8월
독소 불가침조약 | 9월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
가짜 전쟁 | 11월
겨울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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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
4월
노르웨이 침공 | 5월
프랑스 침공 ·
됭케르크 철수작전 | 7월
영국 본토 항공전 | 9월
삼국 동맹 조약 | 10월
그리스 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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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
5월
비스마르크 추격전 | 6월
바르바로사 작전(
독소전쟁 발발) ·
계속전쟁 | 9월
레닌그라드 공방전 | 10월
모스크바 공방전 | 12월
진주만 공습(
태평양 전쟁 발발) ·
말레이 해전 ·
남방작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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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
4월
둘리틀 특공대 | 6월
청색 작전 ·
미드웨이 해전 | 7월
엘 알라메인 전투 | 8월
스탈린그라드 전투 ·
과달카날 전역 | 11월
과달카날 해전 ·
횃불 작전 ·
노르웨이 중수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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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년 |
1월
카사블랑카 회담 | 2월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 4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 7월
쿠르스크 전투 ·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 | 9월
이탈리아 왕국의 항복(
이탈리아 내전 발발) | 11월
카이로 회담 ·
테헤란 회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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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
4월
대륙타통작전 | 6월
바그라티온 작전 ·
노르망디 상륙 작전 ·
필리핀해 해전 ·
사이판 전투 | 7월
브레턴우즈 회의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 8월
바르샤바 봉기 | 9월
마켓 가든 작전 | 10월
레이테 만 해전 | 12월
벌지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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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
2월
얄타 회담 ·
드레스덴 폭격 ·
이오지마 전투 | 3월
연합군의 일본 본토 공습(
도쿄 대공습) ·
연합군의 독일 본토 침공 | 4월
베를린 공방전 ·
오키나와 전투 | 5월
나치 독일의 항복 | 7월
포츠담 회담 | 8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
만주 전략 공세 작전 ·
일본 제국의 항복(
옥음방송) | 9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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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전황·추세 등 상세한 내용은 연표 해당 연도 참고 | }}}}}}}}}}}} |
프랑스 전투 프랑스어: Bataille de France, Campagne de France 영어: Battle of France, Fall of France 독일어: Westfeldzug, Frankreichfeldzu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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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 대전 중 서부전선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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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군의 기동전에 포위당하는 연합군[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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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년 6월 23일 에펠탑을 배경으로 찍은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2] | ||
날짜 | ||
1940년 5월 10일 ~ 6월 25일 | ||
장소 | ||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 ||
교전국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이탈리아 왕국| ]][[틀:국기| ]][[틀:국기| ]](6.10 ~ )[3] |
프랑스 제3공화국 [[영국|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캐나다 자치령| ]] [[벨기에| ]][[틀:국기| ]][[틀:국기| ]] [[네덜란드| ]][[틀:국기| ]][[틀:국기| ]] [[틀:깃발| ]][[틀:깃발| ]][[폴란드 망명정부| ]] [[틀:깃발| ]][[틀:깃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 [[룩셈부르크|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틀:깃발|[4] [[틀:깃발| ]][[틀:깃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5] [[틀:깃발| ]][[틀:깃발|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6] [[틀:깃발| ]][[틀:깃발| ]][[하인츠 구데리안| ]][7] [[틀:깃발| ]][[틀:깃발| ]][[헤르만 호트| ]][8] [[틀:깃발| ]][[틀:깃발| ]][[페도어 폰 보크| ]][9] [[틀:깃발| ]][[틀:깃발| ]][[빌헬름 리터 폰 레프| ]][10] [[틀:깃발| ]][[틀:깃발| ]][[에리히 폰 만슈타인| ]][11] [[틀:깃발| ]][[틀:깃발| ]][[알베르트 케셀링| ]][12] [[틀:깃발| ]][[틀:깃발| ]][[게오르크 폰 퀴힐러| ]][13] [[틀:깃발| ]][[틀:깃발| ]][[에르빈 폰 비츨레벤| ]][14] [15] [[틀:깃발| ]][[틀:깃발| ]][[움베르토 2세| ]] |
]][[틀:깃발| ]][[발터 폰 브라우히치| ]]
모리스 가믈랭(~5.17) 막심 베이강(5.17~) 장 드라트르 드타시니 알퐁스 조르주(~5.17) 앙리 지로 조르주 카르투 프랑수아 다를랑 조제프 비유맹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6대 고트 자작 존 베레커[16] |
결과 | ||
프랑스의 항복 네덜란드의 항복 벨기에의 항복 룩셈부르크의 항복 영국 원정군의 무장 해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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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향 | ||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프랑스 제3공화국 멸망 프랑스 군정청.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 벨기에-북프랑스 군정청, 비시 프랑스 수립 알자스-로렌 및 오이펜-말메디, 룩셈부르크의 독일 본토 편입 영국 본토 항공전 발발 남방작전 및 그로 인한 태평양 전쟁의 시발점. |
||
병력 |
[[틀:깃발| - 141개 사단 - 대포 7,378문 - 전차 2,445대 - 항공기 5,638대 [[틀:깃발| ]][[틀:깃발| ]][[이탈리아 왕국군| ]] 30만 명 |
]][[틀:깃발| ]][[독일 국방군| ]] 335만 명
총 330만 명 - 144개 사단 - 대포 1만 3천문 - 전차 3,383대 - 항공기 2,935대 |
피해규모 |
[[틀:깃발| - 사상자 12만 7,621명 - 항공기 1,236 ~ 1,345대 파괴 - 항공기 323 ~ 488대 파손 - 전차 795대 파괴 [[틀:깃발| ]][[틀:깃발| ]][[이탈리아 왕국군| ]] - 사상자 6,029명 |
]][[틀:깃발| ]][[독일 국방군| ]]
사상자 36만 명 - 포로 190만 명 - 파손된 항공기 2,233대 |
1. 개요2. 배경3. 독일의 전략4. 연합국의 전략5. 황색 상황(Fall Gelb) - 1940년 5월
5.1. 아르덴 공세 전야5.2. A집단군의 아르덴 공세5.3. B집단군의 저지대 침공과 연합군의 대응5.4. A집단군의
스당 돌파 - 전세를 결정짓다
6. 적색 상황(Fall Rot) - 1940년 6월7. 결과8. 양측의 전력과 그 배치9. 패전 이후, 프랑스의 내부 상황10.
바르바로사 작전과 비교 분석11. 여담12. 프랑스를 위한 변명13. 그 외5.4.1. 결전장: 19기갑군단의
스당 돌파5.4.2. 승패가 갈리다: 프랑스 2군의 스당 역습 실패5.4.3. 41기갑군단과 15기갑군단의 마스 강 도하5.4.4. 또다시 실패한 프랑스군의 반격 시도
5.5. B집단군의 딜 방어선 공격5.6. 대서양을 향한 질주와 제동5.7. 연합군의 국지적 역습, 그리고 됭케르크[clearfix]
1. 개요
|
프랑스 침공의 전개[17] |
We shall fight in France, we shall fight on the seas and oceans, we shall fight with growing confidence and growing strength in the air, we shall defend our island, whatever the cost may be. We shall fight on the beaches, we shall fight on the landing grounds, we shall fight in the fields and in the streets, we shall fight in the hills; we shall never surrender!
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넘치는 자신감과 힘으로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비행장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랑스에서의 패배가 점쳐지던 6월 4일 당시 연설 중.
프랑스 침공은
1940년
5월 10일부터 프랑스가
나치 독일과 정전협정을 맺은
1940년
6월 25일까지 46일 간 진행된 전쟁이다.
1939년
9월 3일
영
프의 대독 선전포고,
가짜 전쟁, 그리고 프랑스 침공으로 이어지는 이 전역에서 230만의 육군[18]을 동원한 프랑스는 독일에 단 6주 만에 항복해버린다. 이는 독일의 과감한 작전 도입과 행운, 그리고 프랑스의 불안정한 내부 사정과 지휘부의 잘못된 판단, 불운이 합쳐진 결과였고, 당사국인 독일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전세계가 경악했다.[19]우리는 프랑스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바다와 대양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넘치는 자신감과 힘으로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비행장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프랑스에서의 패배가 점쳐지던 6월 4일 당시 연설 중.
프랑스 침공을 논하면, 일반적으로 독일의 전격전과 프랑스의 마지노선을 연상하나, 실제 양상은 이보다 복잡했다. 흔히 프랑스군이 마지노선을 지키는 동안 독일이 우회하는 바람에 프랑스가 망해버렸다는 인식이 많이 퍼져 있는데,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사실이다. 프랑스는 독일군의 마지노선 우회를 예상하여 대응했고, 독일도 마지노선을 우회한 건 맞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고 베네룩스 지역으로 강력한 조공을 보내는 방법으로 한번 더 우회하며 프랑스와 영국 연합국을 완전히 낚아버렸다. 이를 놓치지 않고 아르덴숲으로 우회한 주공이 스당 방면의 약한 프랑스 군을 섬멸하고 북프랑스와 베네룩스 사이를 완전히 단절시키며 물리적으로 연합군의 주력을 완전히 포위하며 승리에 점을 찍은 것이다.
2. 배경
1939년 3월, 체코 합병을 단행한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가 여태까지의 적대적 태도를 버리고 독일의 패권을 인정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이런 논리로 군부와 정 · 재계를 안심시켰고 독일의 회의론자들조차도 제발 그렇게 되길 간절하게 빌고 있었다. 만약 독일의 체코 합병에 영 · 프 양국이 굴복하거나, 체코 합병으로 독일의 확장욕이 진정되었다고 판단해 유화 정책을 계속 이어나가지 않고 강경책으로 전환한다면, 독일이 망할지도 모르는 위기였다. 특히 히틀러에 대한 반감이 상당하던 독일 국방군에게 양면전쟁은 절대 겪지 말아야 하는 사태였으며, 패전이 확실시되는 일이었다.영국과 프랑스는 1938년 초, 안슐루스, 그 해 가을에는 우리 시대의 평화, 1939년 초, 슬로바키아의 괴뢰화와 체코의 완전 합병 등 이미 독일에게 많은 양보를 해주었고, 내부적으로도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나오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영 · 프 양국은 대공황과 이로 인한 군축으로 인해 당장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특히나 영국의 경우, 1934년부터 재무장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1939년 초, 독일이 폴란드에게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의 영유권을 요구하자, 영 · 프 양국은 폴란드에게 안전 보장을 선언하고 독일이 침략을 벌이면 그때는 진짜로 전쟁이라며 공갈을 날리면서도 대독 전쟁의 발발 자체는 극력 회피했다.
2.1. 집단 안보 체제의 붕괴
유럽 전체의 긴장이 폭증하기 이전,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들이, 독일에서 나치당이 집권하고 주요 열강에서 극우 세력들이 준동하기 시작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념적으로 공존이 어려우며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적대 국가들이 탄생했다고 판단했으며 정반대편에 있던 소련은 독일이란 강대국이 극우 세력에게 넘어간 것에 위협을 느꼈다. 파시즘 덕분에 서로에 대한 악감정이 완화되고 이해가 일치하자, 영 · 프 · 소 3개국은 다시 옛 협상국 체제를 집단 안보 체제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다.소련이 폴란드, 발트 3국,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핀란드 등의 국가와 불가침 조약을 맺고 프랑스가 소련, 체코, 영국과 상호 안보 협정을 체결했으며 소련의 국제 연맹 가입도 주선했다. 그러나, 이 집단 안보 체제가 효과를 보려면, 붉은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나 독일 국경으로 접근이 가능해야 했다. 그러나, 소련과 역사적으로 악연이 있던 폴란드는 협력을 거부했으며, 루마니아는 부코비나 지방에 대한 군사 통행권만을 제공했다. [20]
그러나, 라인란트 재무장, 스페인 내전, 안슐루스, 뮌헨 협정과 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집단 안보 체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독일의 위협이 더욱 거세지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영국 · 프랑스와 협력을 재확인하려 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회담을 주선했으나, 영국 · 프랑스 협상단의 성의 부족에 격노했다.
소련 입장에서 이는 충분히 이유가 있는 분노였다. 소련의 협상단 대표는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국방부 장관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였다. 게다가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으며 이를 증명하는 위임장도 영 · 불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협상단에는 스타브카의 핵심 장성들이 포함되어 있을 정도로 소련은 이 협상에 정말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협상단 대표인 조제프 두망 장군이 협정에 서명할 권한을 위임받았고 개전시, 110개 사단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양측 대표의 격이 너무 차이났다는 점[21]을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내용으로 여겨질 수 있었으나, 공동의 적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협력을 원했던 소련에 비해 프랑스는 협정 국가들이 개별적으로 자국을 방위하고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에만, 공동의 적에 함께 맞서자고 답했다.
영국의 경우, 대표로 온 레지널드 드락스 경은 전권 위임은커녕 어떠한 사항에도 동의할 권한이 없었으며, 거기에 더해 소련 측이 '독일이 주변국을 침략할 경우, 소련은 120개 사단을 동원하여 막겠다. 영국은 몇개 사단을 내놓을 수 있는가?'는 질문을 하자, 파견할 수 있는 지상군이 불과 16개 사단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나서 보로실로프가 통역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진지하게 반문했을 정도로 당황한 소련 측이 재차 질문하자, 영국 협상단 측에서는 사실 그중에서 전투가 가능한 것은 단 4개 사단뿐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22]
스탈린은 회담 종료 후에 영국 대사와의 회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영국 대사의 대답은 "사실 즉각 파견이 가능한 사단은 2개 사단에 불과하며 나머지 2개 사단은 아직 완편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답이 나온 것은 영국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육군의 비중이 적었던 점, 대공황으로 인해 급격한 군축을 단행한 점, 과다할 정도로 많은 식민지 방위를 위해 대다수의 육군 사단들을 식민지에 분산 배치해야 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
영 · 프 양국이 회담에 불성실하게 임하고, 핵심적인 논의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채로 회담이 끝나자,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과 독일을 싸움 붙인 후에 어부지리를 기대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23]
레닌그라드 회담이 소득 없이 끝나자, 때를 노린 독일은 스탈린에게 발트해부터 흑해까지의 결산을 제안했고 스탈린은 이를 받아들인다. 1939년 8월 17일 독소 신용 협정이 체결되었고 해당 협정 회담에서 양국은 상호 불가침 조약 체결 의사를 교환하였다. 8월 20일과 21일 히틀러와 스탈린은 상호 불가침조약 협상을 협의했고 8월 23일 외상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보내 다음날인 24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24] 양면 전쟁을 무조건 피하려 했던 히틀러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독소불가침 조약 체결을 위해 히틀러는 동유럽의 발트 3국과 핀란드, 폴란드 동부를 넘겨주었고 당연히 스탈린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2.2. 폴란드 침공
그리고 1939년 9월 1일, 나치 독일은 지난 6개월 동안 단치히의 영유권 문제로 갈등한 끝에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당시 히틀러는 2차 대전의 시작이기도 한 이 침공을 제대로 된 전쟁보다는 앞선 체코 합병과 유사한 무력 시위, 퍼레이드 정도로 여겼다. 장성들에게 폴란드와의 전쟁 역시 세계 대전으로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시키며 전쟁에 돌입하였다, [25]" 현재 국제 정세상 영국은 매우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다. 따라서 어떠한 위험도 감수하려 들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도 병력이 부족한 상태며 군비도 빈약하다. 포병만 해도 매우 노후하다. 프랑스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을 것이다. (중략) 다시 말해, 영국은 사실상 폴란드를 지원할 수 없다. (중략) 적들의 군사적 개입은 불가능하다. 적들은 나의 위대한 결단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적들은 하찮은 벌레 새끼들에 불과하다. 나는 뮌헨에서 그 사실을 확인했다."
1939년 8월 22일 폴란드 침공 직전 히틀러가 장성들에게[26]
1939년 8월 22일 폴란드 침공 직전 히틀러가 장성들에게[26]
한편 폴란드 침공 소식을 들은 영국과 프랑스는 이쪽에서 한번 독일에 위협을 가한다면, 독일이 물러설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9월 3일 정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앞으로 5시간 내에 폴란드 침공을 중지하거나 침공을 중지하겠다는 확실한 보장을 하지 않으면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점에서 히틀러 및 제3제국 수뇌부의 반응은 이러했다.
내가 통역을 마치자 그곳은 침묵으로 휩싸였고...(중략)...히틀러는 돌처럼 굳은 채 가만히 전방을 바라보았다. 알려진 것처럼 흥분하거나 미쳐 날뛰지 않았다.[27] 그는 자신의 의자에 미동도 없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영원처럼 느껴진 잠깐 동안의 정적이 흐른 뒤, 갑자기 히틀러는 창백한 모습으로 창가에 서 있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를 울분에 찬 눈빛으로 노려보며 이렇게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마치 리벤트로프가 영국의 외교적 반응을 잘못 알렸다고 지적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리벤트로프는 목멘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프랑스도 머지않아 우리에게 동일한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낼 것 같습니다."
괴링은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또 다시 패배한다면 과연 신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
- 히틀러의 통역실장 파울 슈미트의 회고 -[28]
이 상황은 회의론자들에 의해 이미 독일에서 매우 가능성 높은 시나리오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폴란드 침공을 전후로 군부에서
반 히틀러 움직임이 재점화되기 시작했으며, 군부의 불만을 억누르기 위해 히틀러는 폴란드 침공과 관련해서 서방, 특히 영국을 자극하지 않을 것임을 반복적으로 다짐해 왔었다. 심지어 만일에 대비해 대영 - 대프랑스 방어전을 계획하던 참모 본부의 친히틀러파 참모 장교들에게 "영국이나 프랑스가 이걸 핑계로 쳐들어올지도 모르오! 그걸 당신들이 책임질 거요?"라며 면박을 줬을 정도."이제 어떻게 할 건가?"
마치 리벤트로프가 영국의 외교적 반응을 잘못 알렸다고 지적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리벤트로프는 목멘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아마 프랑스도 머지않아 우리에게 동일한 내용의 최후통첩을 보낼 것 같습니다."
괴링은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이번 전쟁에서 또 다시 패배한다면 과연 신은 우리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실까?"
- 히틀러의 통역실장 파울 슈미트의 회고 -[28]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1939년 9월 3일부로 독일은 양면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사실 히틀러도 양면전쟁의 말로를 잘 알고 있어서 소련과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지만 폴란드 공격을 위해 거의 모든 전력이 동부전선에 몰려있었고, 서부전선은 두 강대국에게 무방비로 방치되어 있던 것이 현실이었다. 이때는 반 히틀러 진영은 히틀러가 한시라도 빨리 제정신을 차리거나, 차라리 정말 그의 말이 현실이 되기를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개전이 확실시되자, 프랑스는 8월 26일에 선제적 동원령을 시작하고, 9월 1일에 총동원령을 선포했다. 9월 7일, 프랑스는 약 20개 사단을 투입해 자르 공세를 시작했다. 여기서 독일 제1군은 프랑스군의 공세에 맞서 대단히 선전했다. 프랑스군의 사상자가 2천 이상인데, 반해 독일군의 사상자는 500 이상으로 약 4:1의 교환비를 내었다. 공세가 지지부진하고 피해가 생각보다 큰 것을 파악한 프랑스군은 9월 17일에 마지노선으로 철수했다.
자르 공세 이후, 서부 전선은 한동안 이 기묘한 소강사태가 계속 유지된다. 영국이 프랑스로 해외 원정군을 파병했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 즉, 히틀러에게 폴란드와의 전쟁을 서둘러 끝낸 다음 프랑스를 격파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1939년 9월 27일 그동안 미뤄왔던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약 1달 만에 독일군이 폴란드 전선을 마무리하자 1939년 10월 9일을 기해 히틀러는 총통 지령 6호(Führer-Anweisung N°6)를 발령, 프랑스 침공 계획을 공식화했다.
<nopad> |
▲"Nous vaincrons parce que nous sommes les plus forts (우리가 이긴다, 우리가 최강이니까.)"[29] |
"내 손에 들려 있는 신문 제1면에는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었다. 그날은 1939년 9월 1일이었고 나는 페스의 빌 누벨에 있는 호텔의 발코니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있었다, 독일은 자살행위임이 분명한 멍청한 짓을 하고야 말았다. 영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해군을, 프랑스는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중략) 상황이 끝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아마 크리스마스 전에, 별 어려움 없이 독일이 패망할 것은 자명했다."
패트릭 턴불이 자신의 저서 뒹케르크에서
패트릭 턴불이 자신의 저서 뒹케르크에서
이렇듯 독일 입장에서 상황이 어떻게든 조금씩 풀리고 있었지만, 여전히 독일이 영국-프랑스 동맹과 정면으로 싸워서 승리할 것이라는 예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제아무리 독일이 발빠른 경제 성장과 공업력을 자랑하고 있다 한들, 상대는 세계의 헤게모니를 쥔 최강국인 영국과, 그 영국과 나란히 경쟁한 프랑스였다.
3. 독일의 전략
3.1. 독일군의 위기
1939년 10월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에게 분할 점령되고, 이후 영토를 인접하게 된 소련과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한 덕분에 독일은 당장 양면전쟁 상황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독일은 당시 총병력 450만 중에서 유의미한 병력이 170만 정도밖에 안 되는 상태였다. 그에 비해 프랑스는 해외 주둔군을 포함해 정규군은 200만, 그리고 단기간에 3~400만 이상을 추가 동원할 수 있다고 여겨졌는데, 독일은 이를 상대로 어떻게 싸워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폴란드 침공에 국방군 거의 모든 부대들을 영끌해서 투입한 만큼 서부전선 라인강 방어선에서 독일군은 전혀 전쟁을 할 의사가 없음을 표명하는 동시에 서부전선에 배치된 독일군을 많아 보이게 하려는 기만전을 펼쳤다. 불행 중 다행으로 프랑스군이 잠시 독일 국경을 넘어 진입했다가 마지노선으로 되돌아가 틀어박혀 버렸다."서부 전선에서 완벽한 기만을 달성했기에 폴란드 전역에서의 승리가 가능했다. 만일 프랑스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설상가상으로 국방군의 주력이 폴란드에 집중된 상황을 이용했다면 적이 라인 강을 넘어서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우리는 적을 저지할 수 있는 대책이 전혀 없었고 독일의 사활이 걸린 루르지대까지도 상실할 뻔했다."
1948년 8월 9일 뤼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당시 국방군 육군 총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의 증언[30]
1948년 8월 9일 뤼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당시 국방군 육군 총 참모총장 프란츠 할더의 증언[30]
심지어 히틀러는 "어차피 빠른 시간 내에 병력을 충분히 늘릴 수도 없는 지금이 아직 프랑스가 동원을 마치기 전에 서둘러서 먼저 치고 보는 게 낫다."라면서 1939년 10월 중, 늦어도 11월 말에 프랑스를 침공한다는 계획을 군부에 명령함으로써 독일 국방군 참모본부를 대 패닉에 빠트렸다. 게다가 앞선 독일의 폴란드 침공은 독일이 원했던 대로 깨끗한 승리는 아니었다. 비록 한달만에 폴란드를 쓰러뜨렸지만 독일군의 기갑전력과 보병의 제병합동은 그리 우수하지 못해 폴란드 군의 강력한 저항에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었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군에게는 앞선 폴란드 침공에서 입은 데미지를 회복하고 새롭게 도입한 기갑부대를 활용한 기동전에 대한 교리 확립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전략도 나름 근거는 있었다. 프랑스군의 동원체계는 상당히 굼뜬 편으로 예비군이 소집부터 전편되는데 수 개월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1939년 11월 시점에서 독일군과 프랑스군이 투입가능한 정규군 및 소집완료 예비군의 합계 자체는 대략 200만 대 200만으로 거의 대등했다. 특히 1차 대전 당시 프랑스군이 국경전투 패배 이후 빠르게 병력을 모집하고 파리 방면으로 보내면서 마른강에서 독일제국군을 저지 했던 전훈에 따라 히틀러는 프랑스가 군을 소집할 시간을 주지 않고 빠르게 격파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하지만 프랑스에게는 군 복무를 마친 예비군 400만 명과 해외주둔군 150만 명이 더 있었고, 독일에게는 훈련되지 않고 총도 없는 소집대상 민간인 500만 명이 전부였다.
그래서 군부는 필사적으로 히틀러를 설득하여 그나마 그해 겨울 동안은 침공하지 않을 수 있었다. 가짜 전쟁의 소강 상태는 바로 이런 독일 수뇌부의 판단에 따라 독일이 설설 기었으며, 아울러 프랑스 및 영국 역시 아직 병력 동원이 완전치 않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독일의 선공으로 전쟁이 시작되어 소모전을 유도, 독일이 지친 다음에야 공세로 나가는 1차 세계대전식 전략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독일은 아직도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던 군수 산업 가동율을 높여서 전쟁 준비를 속개한다. 당장 폴란드 전역이 종결된 시점에서 독일 국방군이 보유한 탄약은 전군에 필요한 기본 예비 탄약의 30~50% 미만이었다. 당시 기본 예비탄약은 전투 2~3회를 치르는 탄약이었으므로, 사실상 전군이 딱 한 번 싸우면 끝나는 탄약밖에 없었다. 여기에 더해서 폴란드 침공 당시 소모한 각종 기갑, 기계화 장비를 보충할 수 있는 귀중한 기간이 되었다. 또한 폴란드 침공에서의 독일군은 육군과 공군 모두 폴란드 군의 강력한 저항에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고 전술적 기동 역시 매우 어설펐기에 독일군 장교단은 1차 세계 대전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프랑스와 영국군의 전투력과 전투 준비도를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고 종전의 전술로는 서방 군사력을 상대로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비관적으로 전쟁을 바라보고 있었다.
"폴란드에서의 전투 방법은 서방을 상대할 때 적용할 만한 것이 못된다. 완벽하게 편성된 상대에게는 효과를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프란츠 할더 1939년 9월 29일
프란츠 할더 1939년 9월 29일
"이제 기습작전의 가능성은 제로이다. 소중한 병사들의 목숨만 끊임없이 희생될 뿐, 프랑스를 쓰러뜨리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프랑스와의 전쟁은 폴란드에서처럼 손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전쟁이 장기화되어 최악의 희생만 치르게 될 것이 분명하다"
C 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상급대장
C 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상급대장
" 폴란드 전역에서 확인한 전차의 가치를 총체적으로 평가할 때 반드시 규명해야 할 점이 있다. 강력한 방어체계를 구축한 서방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이러한 전술이 성공할 가능성은 대단히 희박하다. 아니 전혀 없다"
A 집단군 참모장 게오르그 조덴슈테른 중장
A 집단군 참모장 게오르그 조덴슈테른 중장
한편 참모본부는 1939년 10월 9일에 히틀러가 총통 지령으로 하달한 프랑스 침공을 현실화할 작전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개전 전까지만 해도 '지금 프랑스로 쳐들어가면 우리 독일은 망한다.' 같은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던 참모본부는 가능하면 협상을 통한 전면전 없는 종전을 원했고, 이 때문에 1940년 1월까지 제출된 작전들은 허술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어린애가 봐도 실패할 게 뻔해 보이는 작전을 내놓는다면 히틀러도 전쟁을 포기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섞인 일종의 태업이라는 견해도 있을 정도. 그런데도 히틀러는 정 안 되면 이대로라도 치고 나가겠다는 의견을 걸핏하면 밝혔고 이 때문에 참모본부, 특히 참모총장이었던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은 "히틀러를 내가 직접 쏴 죽여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까지 위기감을 느꼈었다.[31] 이러한 반발은 참모부 뿐만 아니라 군 사령관급에서도 맹렬히 반대했는데 C집단군 사령관인 레프 상급대장은 '무모한 전쟁'이라며 반발했고 독소 전쟁에서 학살명령을 내린 것으로 악명 높은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경우 1939년 11월 6일 시민 저항단체 칼 괴르델러를 만나 네덜란드에 독일군의 공세를 대비하라는 서한을 전달하는 반역행위를 벌이기 이르렀다. 심지어 예스맨 카이펠 역시 히틀러의 전쟁 명령에 완강히 반대하다 사직서를 제출하기에 이르렀으며 괴링은 공격시기에 반대하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이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점점 흘러갔고, 반 히틀러 진영에서도 결국 전쟁은 이제 피할 수 없고 우선 이기고 봐야된다는 쪽으로 여론이 수렴했다. 그러나 아직도 참모본부는 침공 작전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당장 프랑스 침공에 투입할 부대[32]는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나고 있었지만,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까에 대해서는 계속 우왕좌왕 중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할더가 그렇게 전전긍긍하고 있을 동안, 1939년 10월에 작성된 프랑스 침공작전 초기안에서 조공 부대로 결정된 A집단군(Heersgruppe A)의 참모장이었던 어떤 인물이 누구든지 보기만 해도 "이놈 미쳤군!" 이라고 외칠 만한 기상천외하고 무모해보이는 위험한 작전 계획을 수립, 제출했다.
그 참모장의 이름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이었다.
3.2. "낫질 계획"의 수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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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 1940년 5월 당시 만슈타인 계획(Manstein Plan)에 의한 독일군의 초기 공세와 연합군의 딜 기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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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의 슐리펜 계획과 프랑스의 17계획
그러나 문제는 프랑스군이 한 번 당한 걸 또 당할 리가 없다는 것 이었다. 아울러 당시 슐리펜 계획의 기본 전제는 프랑스군이 현재의 마지노 선 방면에서 독일 본토로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다는 전제 하에 발생하는 회전문 효과를 이용해서 프랑스군 주력을 포위한다는 것이었는데, 애초에 침략전을 서유럽 내에서 펼치는 국가는 독일뿐이었고 이미 1차 대전에서 엘랑 비탈 기조로 인해 수백만 병사를 잃어 본 1940년의 프랑스군이 견고하게 구축한 마지노선을 냅두고 그때처럼 적극적으로 공격할 동기가 없다는 것도 문제였다. 한마디로 회전문 효과는커녕 오히려 ‘어서옵쇼’하고 있는 강력한 적 주력 부대와 정면충돌하게 된다. 이에 당시까지 군재는 영 아니라고 독일군 내부에서 비웃음을 사고 있던 히틀러조차 "이래서야 이길 리가 없잖아! 다른 데에서 주공을 더 늘리지 않으면 안 돼!"라고 대번에 계획안을 반려시킬 정도였다.
1939년 11월, 원래의 주공 남쪽에 새로운 주공을 두는 안이 제출되었으나, 이는 단지 전력 분산일 뿐 기존안과는 별다를 게 없었다. 여기에 히틀러는 히틀러대로 더 남쪽으로 세 번째 주공을 만들면 어떨까?라는 의견을 제시[34], 안 그래도 부족한 병력이 셋으로 쪼개져 축차투입되는 대참사가 벌어질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세 번째 주공을 만들었을 때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결국 병력의 집중이 없어져서 '주'공이 없어진다는 것이고, 따라서 돌파가 더 어려워진다는 것도 있었다. 그리고 이 계획은 기존 작전보다는 승산이 더 있다는 이유로 하마터면 진짜로 채택될 뻔했다.
그런데 바로 이 세 번째 주공으로 거론되던 기존의 조공부대인 A집단군에는 바로 그 만슈타인이 있었다. 만슈타인은 세 번째 주공에 대한 논의가 치열할 때, 그가 A집단군 참모장으로서 현장에 도착했던 1939년 10월 이후 가능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던 한 가지 계획을 입안한다. 이는 임무형지휘에 근거, 일선 지휘관 및 참모부가 그 상급 사령부, 그를 넘어 최고 사령부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는 작전 행동을 입안, 실행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었던 독일군이었기에 가능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아무런 이름이 붙지 않았던 이 계획은 다음의 4단계 발상을 거쳐 기획되었다.
- 1) 현재의 작전 계획은 너무 뻔하므로 적도 당연히 대비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쉽게 실행 가능하고 합리적인 계획을 세운다면 -그 가능성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이것 외에는 대안이 없다. 정면으로 부딪혀 마지노선을 뚫고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차마 생각도 못할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적의 허를 찔러야 한다.[35]
- 2) 따라서 적이 주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에 실은 조공을 두고, 적이 조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에 주공을 둔다. 적이 주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은 원래 계획의 주공인 벨기에 북부 방면이고, 적이 조공이라고 생각할 부분은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 일대, 즉 아르덴 고원 일대이다.[36]
- 3) 이렇게 병력을 운용할 경우, 적절한 기만의 결과로 적이 아군의 조공을 주공으로 착각하여 벨기에로 기동하게 할 수 있다면 아르덴으로 기동한 진짜 주공은 적의 주력이 벨기에로 진입하는 틈을 타서 회전문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즉, 텅 빈 진공으로 빨려들어가듯 프랑스군의 배후로 진입, 벨기에로 들어간 프랑스군을 완전 포위섬멸할 절호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
- 4) 단 이 경우 시작부터 적의 주력과 교전할 벨기에 방면의 조공에 비해서 적의 후방으로 기동해야 하는 주공 부대는 그 기동 거리가 과격하게 늘어나고, 또한 현대전은 제1차 세계 대전 때와는 달리 피아 신속한 부대 전개 및 역습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높은 기동력과 강력한 전력을 가지고 적이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깊숙이 돌파 가능한, 연속적인 전투 기획 및 실행이 가능한 작전술 제대로서의 기갑부대가 주공이 되어야 한다[37].이들은 신속하게 아르덴을 돌파, 북프랑스까지 수백 킬로미터를 진격해서 거대한 포위망을 형성, 프랑스와 벨기에 및 영국 유럽 원정군 주력을 단기간에 포위-섬멸해야 한다. 시간이 너무 걸리면 적이 정신을 차리고 반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크고, 역습에 대응할 만한 예비 전력을 확보해서 이를 기동시키기엔 현재 독일군의 역량 부족이 적나라하게 노출될 것이다.[38]
만슈타인은 위의 작전안을 자신의 사령관이었던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에게 제출했다. 견실하고 신중한 지휘관이었던 룬트슈테트는 만슈타인의 기획안을 그렇게 지지하지 않았으나, 실현 가능성 자체는 동의하여 이를 국방군 총참모부에 보고했다. 여담으로 사실 만슈타인은 원래 그의 능력 및 독일 국방군 내부의 연공서열로 볼 때, 사실은 차기 육군참모총장이 돼야 할 인물이었다.[39] 그러나 1938년의 인사 파동으로 그 기회를 놓쳐 일선 집단군 참모장이 되었고, 이 때문에 당시 룬트슈테트를 포함한 주요 지휘관들은 만슈타인이 능력에 비해 보잘것없는 한직에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40] 이것이 당시 만슈타인이 세운 개념안 수준의 계획을 참모본부에 보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받아든 사람은 바로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이다.
하지만 할더 또한 매사 모두 합리적이고 안전빵이며 정교한 계획을 선호하는 인물. 작전이 안 풀리거나 뭔가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수학 문제집을 푸는 게 취미인 그의 눈에 도박적이고 일견 비합리적인 작전 계획이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특히 만슈타인의 계획에는 결정적인 결점이 두 개 있었다. 이는 기동전이 가지는 본질적인 약점이기도 하다.
- A집단군의 원래 임무는 마지노 선 방면에서 독일군의 측면을 찌르는 프랑스군의 역습을 저지하는 데 있다. 그런데 이 작전안의 주공은 자칫하면 측면 위협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기동부대의 기동이 빠르면 빠를수록 보호해야 할 측면이 점점 넓어지는데, 과연 이 넓어지는 측면을 제때 보호 가능하도록 병력을 전개할 기동력이 있는가? 아니, 아예 거기에 가져다 쓸 병력이 있기나 한가?
- 더구나 작전술적 차원, 즉 연속적인 군단급 전투를 기획할 수 있는 야전군 사령부급의 기갑부대 운용은 아직까지 경험이 없거니와 심지어 이론적 토대조차 다져져 있지 않은 말 그대로 미지의 영역이다. 그와 같은 완전 미지수의 작전술 제대를 별안간 편성하고, 더구나 그들에게 국가의 명운이 달린 주공을 맡긴다는 것은 지나친 도박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 만슈타인도 나름대로 고민하고 있었고, 특히 2번 문제에 있어서는 독일 기갑 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하인츠 구데리안과의 의견 교환을 통해 이론적 기반을 다져 나가는 중이었다. 또한 1번 문제에 대해서는 역시 만슈타인답게 정말 골 때리는 해결안을 내놓는다. 바로 얼마 안 되는 병력을 또 쪼개서 '남쪽에서 적이 반격을 하기 전에 그쪽을 주공이라고 착각하도록 제대로 한 방 치고, 적이 혼란스러워하다가 다시 반격으로 집중하려는 시점에 적의 북쪽 주력을 섬멸한 기동부대가 서둘러 남하해서 그놈들을 또 측면에서 포위하면 되지 않을까' 라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첫 번째 작전을 그대로 한 번 더 재현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이 나오기 전에 만슈타인은 38군단의 군단장으로 전출, 사실상 모가지당한다.[41] 사실 그럴 만도 했던 것이 참모본부의 계획에 반기를 든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런 비상식적인 계획을 일개 집단군 사령부의 사령관도 아니고 참모장이 제출했으며, 덤으로 원래 조공부대였던 집단군을 주공 부대로 둔갑시키는 것이 언뜻 보기에는 화려한 전공을 탐내는 기회주의자로 보일 수도 있었다. 여기에 만슈타인과 참모총장 할더는 군부 내의 파벌에서 서로 반대 파벌에 속했으므로, 파벌 단위의 경쟁심리 역시 동시에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만슈타인은 지난 폴란드 침공 당시의 공훈을 명분으로 전출된다.[42]
3.3. 불완전한 낫질 계획의 채택
1940년 1월 이후, 상술했듯 반히틀러파에서도 일단 전쟁에서 이기고 봐야 된다는 여론이 지배적으로 변한다. 여기에 더해 1940년 1월 10일 루프트바페 소속 참모장교였던 헬무트 라인베르거 소령이 기존 황색 작전 계획서를 휴대한 채 벨기에에 불시착해 버리는 불상사가 터진다.[43] 소령은 계획서를 파기하려 했지만 그 전에 벨기에군에게 체포되었고, 결과적으로 독일군의 프랑스 공격 전략은 연합군에게 고스란히 노출되고 만다.[44][45] 이렇게 기존 작전을 폐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발생하자 참모총장 할더의 눈에 다시 띈 것이 바로 만슈타인의 작전 초안이었다.[46]할더 역시 신중한 용병을 선호하는 타입이라고는 하나, 일단 이 기책 자체는 일단 하나의 가능성으로서 고려하고 있었다.[47] 결국 당시에는 반려했지만, 불시착 사건으로 상황이 단단히 꼬여버리자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다시 진지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게 된다. 여기에 만슈타인 개인의 인맥이 함께 작동하기 시작했다. 만슈타인의 계획안을 히틀러의 보좌관인 슈문트와 친했던 부하 트레슈코프 대령는 1940년 1월말 A집단군에 대한 순시 및 정보 수집 목적으로 방문한 슈문트에게 만슈타인의 작전안을 보여주었고 슈문트는 해당 계획안에 대한 설명을 듣자 '이것이 총통이 요구한 바로 그 작전이다'라며 기뻐하였고 이를 2월 13일 히틀러에게 보고했다.[48] 당연히 히틀러 역시 이 계획안에 뛸 뜻이 기뻐하며 주공을 스당 방면으로 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트레슈코프 대령으로부터 참모총장 할더가 만슈타인의 계획안을 불신한다는 불만을 전해들은 슈문트는 할더와 참모부의 주요 장교들의 눈을 피해 만슈타인과 히틀러가 만날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음모를 꾸몄다. 슈문트는 국방군 총통경호대 소속이었다가 제7 기갑사단장으로 부임하게 된 에르빈 롬멜 소장을 비롯한 6명의 신임 장성급 지휘관과의 조찬식 날짜를 2월 17일로 결정하고 해당 자리에 1월 27일 제38 군단장으로 임명된 만슈타인을 초청하였다. 조찬식이 끝난 이후 히틀러는 알프레드 요들과 슈문트 대령만 동석한 채 자신의 집무실에서 만슈타인으로 부터 작전 계획안에 대한 세부적인 내용을 보고받았다. 당시 히틀러는 엄청난 불안증에 시달리고 있어 휘하 장군들의 설명을 끝까지 듣지 않고 중간에 끼어들어 문제를 제기하거나 불안이 섞인 혼잣말을 하기 일 수 였는데 만슈타인의 계획안에 홀려 끝까지 경청했다고 한다. 특히 히틀러는 만슈타인의 강력한 전차 부대의 투입이라는 결론에 크게 감격하였고 동석한 요들에게 해당 작전안에 부합하는 전쟁 계획을 세울 것을 명령한다.
마침 할더 역시 만슈타인 계획을 진지하게 고찰하고 있었던 탓에, 결국 만슈타인의 작전은 프랑스 침공 계획으로 정식 채택되었다. 그러나 기획자인 만슈타인은 자리를 옮긴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작전 기획에 더 이상 참가하지 못했고, 작전의 세부 기획과 실행은 프란츠 할더 상급대장, 그리고 새로운 주공부대로 부상한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상급대장, 그 휘하에 새로 창설될 작전술 제대로서의 기갑부대 지휘관이 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생겼다.
- 주공을 맡을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은 대표적인 신중파다.[49] 이때 과감한 참모장을 달아주면 적극성을 보강할 수 있겠지만, 일단 A집단군이 조공이라는 기존 계획에 따라 인사 이동을 하는 바람에 신임 참모장으로 임명된 조텐슈테른도 신중파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즉 집단군 전체가 위에서 내린 주공에 걸맞은 적극적인 행동에 나서기를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 또 여전히 기갑부대의 작전술 제대 편성은 이론상으로 제대로 정립된 게 없고, 할더가 아무리 이 계획의 가치를 인지했다 해도 다른 지휘관들까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상태에서 웬 기갑이라는 병과가 전쟁을 혼자 다 치르도록 내버려 두기엔 타 작전술 제대 지휘관으로서의 자존심이 용서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임무형지휘에 따라 자율사고 및 행동에 익숙해진 독일군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 게다가 작전술 기갑 부대의 작전적 가치는 아직 입증되지 않았으나, 야전군 사령부 입장에서는 적어도 군단급 기갑부대는 야전군 작전 행동의 한 국면에서 강력한 전술 예비대로서 운용 가능한 세력임이 이미 입증된 바 있다. 원래대로라면 본인에게 주어졌을 강력한 기갑부대가 웬 듣보잡 작전술 제대를 만드느라 어디론가 끌려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게 된다면, 그 지휘관은 날개를 잘린 꼴이 된다. 안 그래도 병력이 부족한데 강력한 부대까지 뺏긴 지휘관들이 과연 어떻게 나올 것인가?
위와 같은 문제점들로 결국 할더는 만슈타인이 세운 최초의 계획에서 그다지 큰 진보를 이루지 못한 채,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퇴보한 기획안을 세울 수밖에 없었다. 첫 번째 가장 큰 퇴보는 바로 기갑 부대의 작전술 제대, 즉 기갑군(Panzerarmee)을 창설하지 못했다는 것이다.[50] 일단 기갑 부대를 작전술 차원에서 운용하는 새로운 지휘부의 창설까지는 했으나 다른 야전군 사령관들의 눈치를 보느라 정식 야전군이 아닌 일종의 편법, 즉 다수의 군단을 예하에 가지고 있으나 야전군은 아닌 특수 목적 집단인 기갑집단(Panzergruppe)을 만들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는 인선 문제로 기갑집단 사령관에 기갑 운용 경험이 거의 없는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 기병대장을 앉힌다. 할더는 만슈타인의 작전을 채택하긴 했으나 기본적으로 실패 가능성이 높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클라이스트 대장의 제1기갑집단[51]이 최초 주공에서 필요한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경우, 그냥 기갑집단을 해체하고 원래 계획대로 각 기갑군단을 야전군에 핵심 기동 예비대로 전환한다는 배수진을 친다. 요컨대 클라이스트에게 '사령관 타이틀을 계속 유지하고 싶으면 제대로 성공시켜라!'라는 강력한 엄포를 놓음과 동시에, 만슈타인의 작전이 실패할 경우에도 전통적인 프로이센식 기동전을 시도할 여지를 남겨두려 했던 것이다. 물론 이는 기동전의 저력을 알고 있는 현대인의 시점에서야 퇴보지, 당시 작전의 총 책임자로서는 도박수와 정론 사이에서 상식적인 수준의 절충안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문제로 현실적으로 작전의 가장 큰 위협인 주공 측면의 마지노 선 일대에서 프랑스군 역습에 대한 대책이 부실하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는 해결하기 위해선 적극적인 공세밖에는 답이 없었는데, 주력 기갑 부대는 전력으로 벨기에의 프랑스군을 포위섬멸해야 했으므로 이 방면으로 돌릴 충분한 기갑 부대가 없었다. 이 때문에 할더의 기갑 부대 종심기동은 소부대에 의한 특정 거점의 수비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불안한 구조가 되었고, 결국 작전동안 있었던 몇몇 지휘관의 임기응변과 더불어 어느 용감한 부대의 맹활약을 통해 제한적인 수준으로 타개하는데 그친다.
그러나 1940년 3월 이후, 이런 불안 요소에도 불구하고 만슈타인의 계획은 독일 국방군의 프랑스 침공 계획으로서 확실하게 다져졌고, 이런저런 작전상 마찰 때문에 많은 장애를 겪긴 했지만 결국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군이 승리를 거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프랑스에서 제대로 대박을 친 나머지, 이후 독일의 국가 대전략 자체가 꼬여 버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영국 대륙 원정군의 이탈을 허용하므로서 서유럽의 적을 남긴 한편 그 성과에 눈이 멀어 소비에트 연방을 침공하여 결국 양면전쟁이라는 국면으로 향하게 만들었으며, 이를 두고 PBS에서 방송된 다큐멘터리 Battlefield 시리즈의 The Battle of France에서는" 그의 가장 눈부신 승리는, 그의 궁극적인 패배의 씨앗을 뿌렸다."[52]고 평한다.
4. 연합국의 전략
4.1. 연합국의 오판
초기 연합군인 프랑스와 영국은 군사/외교적으로 결정적인 오판을 반복한다. 양국의 핵심적인 실수 2가지는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실제보다 과대평가했다는 것과 그로 인해 독일과의 전면전을 극단적으로 회피하고 수세적인 군사 전략으로 일관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는 영불 양국이 대공황으로 인한 정치경제적 위기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대중의 반전 여론이 극도로 높았기 때문이기도 하다.우선 프랑스는 구 프랑스 왕국 시절부터 전통적인 인구대국이자 육군 강국이었다.[53][54]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유럽의 열강 중에서 대규모 징병제를 유지하는 단 둘뿐인 강대국이기도 했다.[55] 독일도 허울뿐인 징병제는 유지했지만, 군비 제한선이 너무 엄격해서 실질적으로는 모병제나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프랑스는 방대한 상비군 외에도 즉시 소집 가능한 예비역까지 가공할 수준이었다. 이는 서유럽에서는 당연히 최대 규모였고 당시 이보다 규모가 큰 육군을 가진 나라는 인구가 억대를 넘어가는 중국[56]과 소련[57]뿐이었다.
실제로 프랑스는 1939년 9월 개전 직후 제1차 동원령으로 1940년 5월 시점에서는 프랑스 본토 및 전 식민지를 통틀어 총 600만에 달하는 대군을 소집했다. 그리고 이들은 기본 훈련까지 수료한 상태였다. 같은 시기 독일은 프랑스보다 인구가 훨씬 많았음에도 동원력은 훨씬 열세였다. 독일이 총력을 다해 긁어모은 병력도 겨우 500만이었고, 그나마 최소한의 훈련이라도 거친 병력은 300만도 채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중에는 40~50대에 가까운, 대개 후방 지원 입무에 배치된 중장년 예비군[58]도 수십만에 육박해서 독일군의 실질적인 전투 병력은 더욱 적었다.
그러나, 프랑스에게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으니... 바로 제1차 세계 대전이라는 잊고 싶은 악몽이었다.
위의 그래프는 프랑스에서 1914년 1월에 실시한 인구조사 결과와 1934년 1월에 실시한 인구조사 결과로, 1864년부터 시작된 고령화 때문인지 그럭저럭 완만한 곡선이 나타나는 1914년과 달리 1934년에는 청년층 부분이 남녀 불문 움푹 들어가 있다. 이는 1차 대전 당시 싸울 수 있는 남성이란 남성은 죄다 전쟁터에 끌려갔기 때문에 당연히 임신한 여성이 극히 적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당시 현역이었던 40대 부근(정확히는 50대 중반이던 1878년생부터 30대 중반이던 1898년생까지)의 남성들을 보면 계단같이 움푹 파여있는데, 1차 대전으로 그만큼 죽었다. 당연히 동 나잇대 여성들과 비교해 봐도 압도적인 차이가 나온다.
위의 그래프처럼 프랑스는 1차 대전기 서부전선의 연합국 주력으로 많은 피를 흘렸다. 당시 프랑스는 징집적령기에 있는 18~27세 남성의 27%, 500만 명의 사상자를 냈고 민간인 피해를 합치면 이보다 더 높았다.[59] 이로 인한 인구 손실은 사실상 복구 불가능한 규모였다. 설상가상으로 프랑스는 산업혁명 이후 타국에 비해 인구 증가율이 낮았다. 그래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에서 프랑스는 오히려 제1차 세계대전 때보다도 동원 가능한 인구가 더 줄었다. 이런 추세는 1920년대부터 1930년대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그에 비해 전간기 동안 독일은 다방면에서 프랑스를 추월했다. 경제 위기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군사력은 미약했으나, 독일의 경제력은 이미 1920년대 초반을 기점으로 프랑스의 거의 2배에 육박했고,[60] 인구도 프랑스를 명백히 압도했다. 1차대전 개전 즈음인 1910년에 이미 독일과 프랑스의 징집 가능 인구 비는 1.6:1이었고, 1939년에 3:1 이상으로 벌어졌다. 특히 1935년 재무장 선언 이후 독일군의 신속한 회복을 본 프랑스는 독일의 잠재력에 큰 공포감을 느꼈다. 사실 독일의 재무장 수준은 여전히 프랑스군에 비해 크게 열세였으나 프랑스는 그런 내실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프랑스는 단독 결전을 시도하기보다는 대독 포위망 구성에 전력을 다했다. 독일이 허튼 짓을 못하도록 주변국과 함께 독일을 포위하자는 전략이었다. 그것이 배경에서 상술한 프랑스와 영국이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를 비롯한 독일의 인접국들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었던 이유다. 결론적으로 독일이 한 나라를 침공하면 다른 연합국에 의해 양면전쟁 구도가 만들어지기 때문에, 이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독일의 군사적 행동을 아예 사전에 방지하겠다는 속셈이었다.[61]
그런데 이런 동맹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독일이 전쟁을 시작해버리면 남은 국가들도 강제로 독일과의 전쟁에 돌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62] 그러나 동맹을 주도했던 프랑스는 정작 공격을 주도하기를 꺼렸다. 프랑스가 바란 것은 양면전쟁이라는 위험성을 상기시키는 것만으로 독일이 알아서 물러나는 것이었지 독일이 폴란드나 체코를 공격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뒤통수를 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만약 독일이 그 위험성을 무릅쓰고 군사 행동을 강행했을 때, 그러한 억제 효과는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그래서 벌어진 것이 오스트리아 합병과 체코 합병이었고, 두 경우 모두 프랑스는 결과적으로 중립국과 동맹국들을 배신한 꼴이 되어 버린다. 더 이상 새로운 동맹국을 얻지 못한 프랑스는 폴란드까지 방조하기에는 국제적 평판이 부담되었고, 때문에 그나마 발생한 것이 1939년 9월의 자르 침공과 이후의 가짜 전쟁이었다.
이 때 프랑스군이 계속 진공했다면 나치 독일은 그대로 패망했겠지만 프랑스는 그 이상 진격할 수 없었다. 독일의 재무장이 완전하지 않은 만큼, 프랑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침공 수행이 불가능했다. 우선 대공황으로 인해 여전히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고, 1차대전의 참상으로 민간의 반전 여론이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의 경험으로 프랑스군 수뇌부는 화력만 충분하다면 방어자가 공격자를 쉽게 압도할 수 있다는 결론을 신봉했다. 프랑스가 1939년 자르 침공을 그만둔 것도 이 잘못된 전훈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상기한 이유들로 독일이 프랑스와 대등 혹은 그 이상의 군사력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섣부른 공세에 대한 반격의 공포에 사로잡혔다.[63] 따라서 프랑스군은 독일의 주공 방향을 먼저 틀어막고, 소모전으로 약체화된 독일군을 분쇄한다를 기본 전략으로 삼게 된다. 게다가 프랑스군은 해당 전략에 기가 막힌 수단을 하나를 가지고 있었다. 바로 마지노 선이었다. 마지노 선 덕분에 프랑스군은 주력을 프랑스-독일 국경이 아닌, 독일군의 우회 돌파 코스로 예상되던 벨기에 방면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만약 독일군이 마지노 선으로 정면 공격을 한다면 그거야말로 기대할 일이고, 우회 공격해온다 해도 적을 확실히 막아낼 수 있는 충분한 예비대가 존재했던 것이다.
더구나 프랑스는 독일과의 국경선 전체를 마지노 선으로 차단한 데 그치지 않고, 1차 마지노 선 공사가 끝난 뒤 1940년에 벨기에와 프랑스 국경선 일대에서도 비교적 낮은 밀도로 요새선을 또 구축했다. 벨기에와 프랑스 사이 국경선은 본래 방어 대상이 아니었으나, 이 선에 요새를 구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벨기에가 독일의 침공을 받는다 해도 보호하지 않겠다는 의미가 될 수 있음에도 이루어진 조치다. 설령 독일군이 아르덴 일대 중부전선을 돌파했다 치더라도, 비교적 낮은 밀도라고는 했으나 이 방어선도 포화를 뚫고, 마스 강을 도하하고, 강변에 즐비한 콘크리트 벙커들을 돌파해야 되는 만만찮은 방어력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 만약 독일이 우리를 공략하는 호의를 보인다면 프랑스는 독일에 10억 프랑을 주겠다!"
1940년 2월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
1940년 2월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
4.2. 딜(Dyle) 계획
"지휘부에서는 적을 찾아내 쳐부수라는 명령이 내려왔단다. 아무리 바보라도 그런 생각을 할 순 없었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명령이었어. 하지만 군대란 원래 그런 곳이지."
"그런데 아빠는 왜 명령에 따랐죠? 영웅이 되고 싶었나요? 아니면 친구들에게 자랑하려고?"
"닥쳐, 너도 해보면 알 거야."
"해보다뇨?"
" 군복무 말야!"
(르네 타르디, 프랑스 육군 기갑 중사, 호치키스 H39 전차장[64])
전쟁 전 프랑스는 독일의 주공이 어디일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그런데 아빠는 왜 명령에 따랐죠? 영웅이 되고 싶었나요? 아니면 친구들에게 자랑하려고?"
"닥쳐, 너도 해보면 알 거야."
"해보다뇨?"
" 군복무 말야!"
(르네 타르디, 프랑스 육군 기갑 중사, 호치키스 H39 전차장[64])
일단 상술했듯 독-프 국경선은 이미 마지노 선의 1차 구축이 완료되었으므로, 일정 규모의 병력만으로도 확실히 저지할 수 있으리라 예상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군이 프랑스 본토에 두고 있던 병력의 1/3에 해당하는 36개 사단을 배치했으니 마지노 선에 한해서 병력과 장비 부족 문제는 없었다. 따라서 독일이 이런 강력한 방어선에 정면 공격을 할리 없고, 오히려 이쪽으로 와주면 고맙겠다는 것이 프랑스의 생각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마지노 선 북쪽의 룩셈부르크 및 벨기에 남부 방면[65] 역시 방어도 문제 없을 것으로 여겼다. 독일군이 프랑스-벨기에 국경 일대에 흐르는 마스 강까지 도달하기 위해서는 병력들이 기동하기 어려운 험지를 돌파해야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곳의 아르덴 삼림지대는 공격 부대가 충분한 밀도로 전개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 분명하므로, 이곳을 주공으로 삼으면 이건 이거대로 방어하기 쉬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울러 앞서 말했듯 마스 강변에도 마지노 선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는 장갑벙커가 다수 설치되었다는 것도 감안되었다.[66]
문제는 벨기에 중북부 및 네덜란드 남부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는 거다. 이 지역은 마스 강처럼 방어선 삼을 하천이 없었고, 지형 역시 매우 평탄해서 대군을 일시에 투입할 만한 조건이 확보되는 곳이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군이 주공으로 삼았던 바로 그 방향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군의 주력이 벨기에 북부로 올 것이라 예상한 것은 합리적인 추측이었다.
결국 프랑스가 설정한 방위선은 됭케르크에서 마지노 선에 이르는 프랑스 국경선 전체를 감싸는 양상이었지만, 이는 제1차 세계 대전 때 벨기에군 단독으로 독일 주공의 저지를 맡겼다가 벨기에가 연합군 전열에서 탈락해버린 전훈을 무시하는 것이었다. 프랑스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불해협에서 알프스까지 끊기지 않는, 전체적으로 튼튼한 방어선의 구축이므로 최종적으로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모리스 가믈랭은 초기안, 즉 프랑스와 벨기에 간 국경선에서 방어하겠다는 지침을 개정한다. 그 내용인즉슨 프랑스군을 벨기에로 진입시키고, 마스 강과 연결된 벨기에의 하천들을 방어선으로 삼아 대략 22개 사단 규모의 벨기에군과 함께 독일군을 격퇴한다는 계획이었다.
프랑스군이 벨기에에 설정한 방어선은 크게 두 개였다. 그 첫 번째 에스코 계획(Plan E)은 투르네-에스코(Escaut) 강- 안트베르펜로 이어지는 것이었고, 두 번째 딜 계획(Plan D)은 나뮈르-딜(Dyle) 강-안트베르펜을 잇는 방어선으로 전자보다 더 동쪽에 위치했다. 개전 초기 프랑스군 총사령관 겸 연합군 총사령관이던 가믈랭은 본래 에스코 계획을 실행할 예정이었다.[67] 하지만 폴란드 전역 이후 독일군과의 군사적 긴장 상태가 길어지고 벨기에군이 성공적으로 방어진지를 확보하면서 가믈랭은 딜 계획을 통한 방어선의 연장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고, 최종적으로 연합군은 11월 9일 열린 회의를 통해 딜 계획을 확정지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군은 벨기에 중부에서 발원하여 안트베르펜으로 이어지는 하천인 딜 강을 따라 주력부대를 신속 전개, 이 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브뤼셀 전면, 벨기에 영토의 거의 중앙을 가르는 방어선을 형성하여 독일군을 막아내기로 계획했다. 벨기에 정부 또한 과거 중립국이었음에도 독일군에게 영토의 대부분을 점령당하는 치욕을 겪었기에 프랑스의 이런 작전 계획을 인정했으며, 벨기에군 역시 프랑스군의 전투 효율성을 위해 각종 방어시설 구축에 적극적으로 나섰다.[68][69]
이로써 프랑스군은 벨기에 한복판의 딜 방어선에서 독일군에 맞서 싸운다는 계획을 확정했다. 그리고 이 방어선을 확보함으로써 프랑스군은 중요한 이점을 세 가지 얻었다.
- 딜 강을 따라 전개하는 방어선은 에스코 계획에 따른 방어선/프랑스-벨기에 국경보다 훨씬 짧으므로,[70] 그만큼 많은 병력을 좁은 전면에 집중해서 방어력을 높일 수 있다.
- 벨기에가 완충지대가 되기 때문에 북프랑스의 주요 공업지대 공격 가능성이 극히 낮아졌다. 현대전은 물량전이므로 북프랑스의 보호는 프랑스군의 전쟁 물자를 확실히 지켜낼 수 있다.
- 만약 벨기에에서 독일의 공격을 받아내고 역습을 할 수 있다면, 반대로 네덜란드를 거쳐 바로 독일의 주요 공업지대인 루르를 공격할 수 있게 된다.
이어서 딜 계획의 당위성을 입증하는 사건이 하나 터졌다. 바로 상술한 1940년 1월 10일의 라인베르거 소령 사건으로, 이때 벨기에는 독일군이 벨기에 영내로 2개의 주공을 투입하는 작전 계획서 전문을 입수했다. 그리고 이 주공 중에서도 특히 무게가 실린 것이 바로 딜 방어선 방면의 두 개의 강력한 기갑부대 제파였다.[71] 이에 따라 딜 방어선의 사전 구축 계획은 매우 시의적절한 조치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해당 기갑부대 제파에 대응하기 위해서 프랑스군 역시 최대한 빨리 기갑부대를 배치해 독일군 딜 방어선 선착을 저지하고, 후속 부대를 투입하여 확실한 방어선을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 확정되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는 개전 시 르네 프리우(Rene Prioux) 장군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의 유일한 군단급 기계화부대인 기병군단(Corps de Cavalerie)을 동쪽으로 돌입시켜 지연전을 실시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또한 노출된 작전 계획서에서 벨기에와 네덜란드 전선이 동시에 개전된다는 것, 독일군 핵심전력 대부분이 벨기에 침공에 투입되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생각 이상으로 오래 지연전을 펼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모리스 가믈랭은 기존 딜 방어선의 좌익단을 연장시켜 네덜란드의 도시 '브레다(breda)'까지 연결하는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다는 브레다 변형(Breda variant)을 기한다. 이를 위해 프랑스군은 북동부 전선의 전략 예비대인 제7군을 벨기에 북부 방면에 배치하였고, 유사시 브레다까지 진격해 네덜란드 일부 지역의 방어를 겸하도록 하였다. 다소 무리해보이는 이 결정은 프랑스는 라인란트 재무장 당시의 침묵, 체코와 폴란드 합병을 방기한 건으로 벨기에로부터 그렇게 신뢰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이런 외교적 실패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으로 추진되었다.
그러나 딜 방어선은 원래 그다지 길지 않은 방어선이었고, 때문에 당초 프랑스는 벨기에군 22개 사단, 프랑스군 10개 사단과 영국군 5개 사단이면 방어에 충분하리라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방어선 확장을 커버하기 위해 20개 사단을 추가 투입하게 되는데, 문제는 해당 병력이 프랑스군이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예비 병력이라는 것이다. 애초에 해당 병력의 기동은 독일군의 주공이 확실히 벨기에로 향할 때에만 실시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프랑스와 벨기에군, 네덜란드군이 딜-브레다 선에 완전히 전개된다면 상황에 따라서는 벨기에 중앙을 돌파하는 독일군의 주공을 뿌리째 잘라버리는 결정적인 수단으로 써먹거나 심지어 전력 일부를 북부로 돌려서 독일의 루르를 공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기는 하였다. 그러나 만약 독일이 전혀 다른 작전으로 프랑스를 공격한다면 그때 프랑스군 최고 사령관은 말 그대로 대사건의 방관자로 전락하기 십상이라는 위험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략적 예비라는 것이 본디 후방에서 대기하며 유사시 적절한 지점에 투입되어 전략에 유연성을 부여하는 것인데 이를 전방에 배치하는 것은 그야말로 오만한 행동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다만 공교롭게도 당시의 프랑스군은 사전에 잘 계획된 공격 계획에 따라 공세를 했다가 자칫하면 쫄딱 망할 뻔했던 1차대전 이후 계획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의 하나일 뿐이며 실질적인 작계는 개전 뒤 적의 의도가 확실해지면 그때 가서 실시하는 것으로 교리를 재정립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런 교리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계획 누출과 외교적 압박 등 여러 요인으로 프랑스군은 이와 정반대로 행동하고 만다.[72]
더군다나 프랑스군이 지닌 약점은 사령부 체계에도 있었다. 전군총사령관 모리스 가믈랭과 북동부군 사령관/전군 부사령관인 알퐁스 조르주 간에 의사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당장 가믈랭이 조르주와 의견 조율을 하기 위해서는 본인이 약 75km를 차로 달려 조르주의 전용 지휘소로 가야만 했다. 조르주가 주재하는 북동부전선 사령부는 가믈랭 사령부에서 약 56km가 떨어진 곳에 위치하였고, 그걸로도 모자라서 가믈랭과 조르주 간의 의견조율을 담당할 북동부전선 참모들이 소재지는 총사령부와 북동부전선 사령부의 중간 지점이었다. 그리고 총사령부에 직속하는 참모 조직도 보유하지 못한 가믈랭은 급변하는 사태에 대처할 능력이 없었다.
또한 가믈랭의 사령부는 무선통신이나 텔레타이프 설비조차도 없어서 전선의 상황 전파는 오토바이를 이용한 전령을 이용하여 통상 48시간이나 소요되었다. 이에 전신기 1대 정도는 설치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으나, 이에 대한 답은 '군사 명령을 하달하는 것을 경마 경기 결과를 전달하는 것과 비교해서는 안 된다.' 하다 못해 고대부터 사용된 장거리 연락 수단인 문서 전달용 비둘기 한 마리조차도 없었다. 그나마 나중에 가믈랭이 해임되고 새로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막심 베이강이 선택한 지휘소에는 전화기가 단 1대 있었는데, 이것도 12시~14시 사이에는 사용금지였다. 왜냐하면 전화 교환수들이 점심시간을 꼭 지켜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73]
4.3. 영국의 입장
영국은 본래 1920년대에는 독일에 동정적인 입장으로, 프랑스 대독 정책을 지나친 것이라고 비난하곤 했다. 이는 프랑스의 대독 노선을 수세적, 즉 앞에서 언급된 타국의 희생을 전제[74]한 동맹 체결이 남발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같은 연합국인 만큼 영국은 당시 상대적으로 친독 성향임에도 불구하고 대독 포위망의 일종의 보증인같은 것이 되어 버린다. 영국은 이를 영 달갑지 않게 생각했고, 심지어 프랑스가 1939년 2월 동맹국인 체코가 합병 당하는 것을 보며 체코를 희생시키지 않았으면 더 큰 피해를 입을 뻔 했다며 안도하자 더더욱 그러했다.그러나 영국은 당시 세계 최강국을 자처하는 만큼 국민적인 자긍심도 강했다. 그 동안 불쌍하다고 여겼던 독일이 1938년 합의를 어기고 체코를 홀라당 먹어버리자, 프랑스와 달리 영국에서는 약속을 어겼다며 일단 국민적으로 격분했다. 이에 아무리 정부가 유화정책을 추구하고 싶어도 다음 총선에서 지기 싫으면 반독 노선으로 갈아탈 수밖에 없게 되었고, 폴란드 침공이 소식이 알려지자 영국은 프랑스에 강력한 외교적 압박을 넣어 선전포고를 선언하게 만든다. 영국 입장에서는 안 그래도 지금까지 프랑스의 고집에 질질 끌려간 경향도 없지 않았으므로 일을 여기까지 키운 빚을 받는다는 속셈도 있었고, 영국이 보기에 독일은 프랑스 없이 혼자 싸워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이유는 영국의 육군 수준이 빈약한 것에 있다. 영국군은 전통적으로 모병제에 기반한 소규모 군대이기 때문에 프랑스처럼 대규모 육군을 단기간에 확보할 수 없었다. 한편으로 영국은 독일이 프랑스에 준하는 육/공군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 예상하였고, 따라서 전쟁의 결정적 향배는 영국이 얼마나 더 많은 병력을 유럽에 보내느냐에 판가름나리라 생각했다. 이에 영국은 서둘러 본토에서만 200만, 영연방 국가에는 최종적으로 약 500만 이상 병력의 소집 준비를 한다. 이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언젠가 프랑스군에 버금가는 강군이 되어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것으로 보였다. 이 시기까지도 영국의 위상, 자원, (과학)기술, 경제력은 세계 최고수준이었고, 프랑스가 독일을 막는 동안 상대적으로 안전한 후방에서 군대를 육성, 지원한다는 계획은 현실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당장 전쟁이 시작되자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대해 확실한 우위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였고, 영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때처럼 영국 원정군(BEF)을 프랑스로 파견한다. 그러나 영국이 당장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은 한정되어 있었고, 1차대전 때와 별반 차이가 없는 10개 사단 규모의 BEF를 6대 고트 백작 존 베레커의 지휘 아래 유럽으로 보내 프랑스군의 좌익에 배치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 BEF는 당시 영국군이 가지고 있었던 정규군의 절반 이상이며, 제대로 훈련을 마치고 중장비까지도 갖춘 병력의 전부였다.[75] 만약 이들이 사라지면 영국은 육군을 다시 무에서부터 건설해야 했다. 과거 1차 대전에는 BEF는 소극적으로 행동하다가 동맹군에게 불신을 사는 경험을 했는데[76] 이로 인해 2차대전의 BEF는 더 적극적으로 주어진 임무를 이행하기로 결정, 영국은 그나마 지난 전쟁보다 더 선진적이고 잘 무장된 육군을 유럽에 투입하게 된다. 그러나 1개 전역을 담당할 정도로 독자적인 작전 수행 능력은 없었고, 어디까지나 프랑스군의 일원으로서 전선 방어를 맡은 1개 야전군에 그쳤다.
한편 영국 공군의 경우, 당시 독일을 제외하면 유럽에서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공군이며 또한 제대로 된 전략 폭격 교리를 가진 유일한 전략 공군이었다.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공군은 독일에 대한 전략 폭격 임무를 맡지만, 당시 영국 공군 폭격기 사령부는 유의미한 결과를 내기엔 충분한 전력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결국 몇 차례 산발적인 공습은 있었으나 전단지 살포 이상의 실질적인 활동은 거의 없었다.
이렇게 추축국과 연합국은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각자 나름대로 전쟁준비를 마친 끝에 운명의 1940년 5월 10일을 맞이했다.
5. 황색 상황(Fall Gelb) - 194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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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아르덴 공세 전야
에리히 폰 만슈타인의 낫질(Sichelschhitt) 계획의 혁신적 사상은 오직 혁신적 방법을 통해 실현될 수 있었다. 구데리안의 끈질긴 요구끝에 창설된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휘하에 5개의 기갑사단과 3개의 차량화보병 사단을 거느린 프랑스 전역에 있어 가장 강력한 기동 전투 부대였다.그러나 A집단군 사령부는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결코 좋게 보지 않고 있었는데 그들이 보기에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기존의 군사교리와 너무나 어긋난 이단아였으며, 허술하게 조직된 골칫덩어리 부대였다. 룬트슈테트 상급대장은 그들이 성공적으로 적 깊숙이 돌파해 들어가야지만 독립적인 작전권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는데 물론 돌파가 유야무야돼 후속 부대에 따라잡힌다면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바로 그 부대에 예속되어야 했다. 즉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가장 큰 장애물은 적이 아니라 아군 부대에 따라잡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시는 역으로 집단군의 엉덩이에 불을 붙이는 효과도 낳았다.
A집단군의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에 대한 차별은 기동로 배정에 있어서도 계속되었다. A집단의 사령관들과 참모진들은 끊임없이 기갑부대의 능력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였고, 결국 불안해진 룬트슈테트는 구데리안의 19군단은 스당 방면으로, 라인하르트의 41군단은 북쪽으로 25km 떨어진 몽테르메로 진격하는 원래 계획 대신 부대를 제대별로 나누어 일렬종대로 나란히 진격시키고자 했다. 거기다 보병 사령관들이 도로의 우선권을 주장한 결과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170km에 달하는 진격로를 단 4개의 도로에 4만여 대의 차량을 통과시켜야 하는 끔찍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원래 나란히 진격해야 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제41기갑군단, 제19기갑군단은 비엔나 소세지마냥 늘어서게 되었고 라인하르트 군단[77]은 마스 강 도하 직전에나 몽테르메 쪽으로 우선회할 수 있었다. 상술한 원인들로 이런 대규모 교통 혼잡은 필연적이었고, 오직 기동성만이 생명인 낫질 계획에서 이러한 교통 혼잡은 계획 자체를 망쳐버릴 위험이 있었다. 하지만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개선 요구는 이 부대를 눈엣가시로 여기는 A집단군 사령부에 의해 계속해서 묵살되었다.
방어측 영국과 프랑스군은 1940년 5월 직전까지 독일군 육군 통신을 감청하고 있었고 서부 방면 공세가 임박했음을 예측할 수 있는 무전 역시 포착하였다. 물론 독일 측에서는 베제 위붕 작전 개시와 동시에 한번 바꾼 암호체계를 5월 초 작전 직전에 확실한 안전을 위해 새로운 암호 체계를 도입하며 암호전에서 독일군이 다시 우위를 서게 된다. 한편 프랑스 정보국은 아르덴 일대에서 독일군의 첩보원들이 스당에서 아브빌 방향과 솜강 하구일 때까지 교통로와 마스강 일대 각 교량의 통과 하중 능력에 대해 정찰하고 있음을 3월 22일 보고하였고 5월 1일 스위스 베른의 주 프랑스 국방무관의 경우 독일군이 5월 8일에서 10일 사이 마지노선을 비롯한 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할 것이며 주공이 스당이라는 매우 정확한 보고를 올렸지만 가믈랭과 조르주는 이러한 정보와 작전은 독일군이 이미 벨기에에서 한번 노출된 자신들의 주공을 숨기기 위한 기만이라고 무시하고 여전히 독일군의 주공은 1차 세계대전 때와 동일한 벨기에 북부일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5월 10일 새벽 05:35분 공격 개시 암호 단치히가 하달되며 한 줄기의 호각소리와 함께 운명의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었다.
5.2. A집단군의 아르덴 공세
5월 10일 A집단군의 진격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당일 정오까지 선두의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은 벨기에군과 교전을 시작했지만 뒤따르던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은 막 라인 강을 도하하고 있었고, 그 2제대는 이미 작전 계획 시간에서 10시간이나 지체하고 있던 제1제대의 후미와 뒤섞이고 있었다.5월 11일 독일군은 여전히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교통 정체에 고통받고 있었다. 적습에 대한 오보와 연합군이 도로에 부설한 지뢰를 비롯한 숱한 장애물은 진격을 더욱 지체시켰다. 여기에 기갑사단에 뒤쳐지지 않으려는 보병사단들이 기갑사단의 예정된 진격로에 끼어들며 상황은 더욱 난장판이 되어 버렸다. 때문에 라인하르트 군단은 진격은커녕 이틀 동안이나 독일 국내에 갇혀 있게 된다.
5월 13일 마침내 국경은 넘었지만 양익대형으로 전환하려는 순간 6보병군단이 라인하르트 군단의 진격로에 차량들을 들이밀어 버리고 발끈한 라인하르트 군단이 무작정 부대를 밀어붙임으로써 끔찍한 혼란이 야기되었다. 공세를 취해야 할 사단 전체가 뿔뿔히 흩어지고 예하부대들의 위치도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제 독일군의 정체는 마스 강에서부터 라인 강변에 이르기까지 250km에 달하는 장대한 구간으로 확대되었다.[78]
전격전이란 단어가 만들어진 전쟁에 걸맞지 못한 이런 추태는 어떻게 프랑스 침공이 대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었는지 의아하게 만든다. 그 요인은 독일군 상부의 작전 착오에도 불구하고 임무형지휘에 충실한 일선의 중하급 지휘관들의 분투 덕분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기적'도 따라붙었다. 독일군이 스스로가 만든 재앙에 짓눌려 있던 동안 이들을 제압할 연합군의 공군기들이 단 1대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79]
이는 프랑스군이 독일 공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여 공군 자산을 대서양 방면의 후방기지에 집중 배치한 것이 원인이었다. 이러니 안 그래도 항속 거리가 짧은 프랑스 군용기들이 적기에 전선을 지원할 수 있을리 없었다. 물론 나름대로 이유는 있다. 상술했듯 프랑스는 장기전, 소모전이 기본 방침이었고, 항공기 생산과 조종사 교육에 많은 시간이 필요한 공군력은 최대한 온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한 프랑스는 독일 공군이 엄청난 공업력에 기반한 대규모 공군이라고 생각했다.[80] 이런 사정은 영국도 비슷했다. 그리고 프랑스군은 전술적 목표에 대한 공군 지원 요청을 금지하고 있었기에, 설령 전방에 공군력이 집중되어 있었다 해도 전황은 크게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5.3. B집단군의 저지대 침공과 연합군의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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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1940년 5월 15일 독일군의 베네룩스 침공 시작을 보도하는 독일 주간 뉴스 510호[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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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독일군의 네덜란드 침공 전개도[82] |
16기갑군단은 마스 강의 만곡부에 위치한 장불루 갭(Gembloux gap)을 향해 기동하기 시작했다. 이 장불루 갭은 딜 방어선이 건재함에도 방어전에 있어 큰 결함이 존재하는 지역이었다. 전면은 상당히 좁은 편이나 자연 장애물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연합군에서도 주시하고 있었는데, 프랑스군 사령관 가믈랭은 독일군의 기동을 보고 마침내 기획해 두었던 비장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딜 기동이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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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벨기에 방면으로의 공격을 상정한 연합군의 딜 계획 |
- 영국 대륙원정군은 브뤼셀을 지나 딜 방어선에 진출, 와브르와 루뱅(louvain) 일대를 확보한다.
- 프랑스 1군은 영국 대륙원정군의 우익과 연결, 와브르(wavre)와 마스 강 만곡부[85] 일대를 확보한다.
- 방어선 남부에는 프랑스 9군의 좌익을 파견, 벨기에 영토 내 마스 강 유역을 책임진다.
장불루 일대의 취약점을 방호하기 위해 상기한 제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특히 프랑스 1군이 갖춘 최강의 창, 프리우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군단이 딜 방어선 너머 지역까지 기동했다. 기병군단은 티를러몽-안뉘-위(tirlemont-hannut-huy)를 잇는 저지진지를 구축, 후방에서 기동중인 보병사단들이 방어선을 온전히 갖추는 시점까지의 시간을 버는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이 자신들이 예상했던 대로 즉 1914년의 슐리펜 계획 그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에 굉장히 만족해하며 딜 기동의 성공을 확신했다. 독일군의 전면 공세가 시작된 첫날 프랑스 국방부 수무총국장 피에르 자코메 장군은 주변 사람들에게 " 오늘 아침 가믈랭 장군이 내게 적의 공격 방향을 설명할 때 호쾌하게 웃는 모습을 보았다면 여러분은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입니다. 독일군은 가믈랭이 고대하던 대로 움직이고 있소"라고 말했다. 파리에서 프랑스군 수뇌부가 딜 기동의 성공을 확신하며 기뻐하고 있을 때 연합군의 주력이 B 집단군을 막기 위해 벨기에로 기동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뛸 듯이 기뻐했다. 연합군은 독일군이 던진 미끼를 물은 것이었다.
기쁨에 겨워 울 것 같다.
- 아돌프 히틀러, 연합군의 벨기에 진군 소식을 듣고
- 아돌프 히틀러, 연합군의 벨기에 진군 소식을 듣고
5.4. A집단군의 스당 돌파 - 전세를 결정짓다
5.4.1. 결전장: 19기갑군단의 스당 돌파
B 집단군과 연합군이 장불루 인근에서 격돌하는 한편, A 집단군 쪽으로 시선으로 돌리면 아르덴 일대의 프랑스, 벨기에 양군은 명확히 구역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의 벨기에군은 2개 사단에 불과했으며, 집단군의 공세에 대응할 수 있는 전력을 갖추지 못했다. 가믈랭은 아르덴 일대에서의 전력 공백에 대해 '그들(벨기에군)은 싸우지도 않고 증발해 버렸다.'라는 표현을 사용했지만 이는 프랑스와 벨기에 사이의 치명적 오해(grave malentendu franco-belge)에서 비롯된 것이다. 양국은 서로 상대방이 아르덴에서 각자의 책임 지역을 굳건히 방어해 줄 것이라고 확신하고는, 어떠한 협조체제도 없이 각각의 독립 작전을 수행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아르덴을 돌파하려는 A집단군에게는 최적의 상황이었다.A집단군 공세의 선봉이 된 것은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19기갑군단 소속 1기갑사단이었다. 이들은 주공 중의 주공으로, 계획된 시간에 정확히 스당에 도달하기 위해 가장 양호한 기동로를 부여받았다. 19기갑군단장 구데리안은 1기갑사단에게 '필요시 본인은 귀관들에게 최소한 3일 정도는 취침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명령을 남길 정도였다. 이에 1기갑사단 군수참모가 2만 정에 이르는 각성제를 직접 관리하고 있었을 정도로 1기갑사단의 임무는 중차대한 것이었다.
독일군은 제1 기갑사단과 1기갑사단의 우측방을 방호하는 제2 기갑사단의 기동로를 개방하기 위해 벨기에 후방 요새지대를 공략하기 위한 공중강습작전을 펼쳤는데 이 공중강습작전 부대를 펼친 부대는 제14 군단 소속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였다. 독일군의 주력 수송기였던 Ju 52의 경우 벨기에 북쪽과 네덜란드 암스트레담 방면으로 진행되는 B 집단군 배속 7항공사단과 22 공수사단에 대부분 할당되어 있었기 때문에 괴링은 3인용 소형 연락기인 Fi 156을 대규모 투입하여 병력을 강습시키는 기가막힌 방안을 제안하였다. 강습 목표지점인 벨기에의 니베와 비트리의 이니셜을 딴 니비 작전은 그로스도이칠란트 3대대의 2개 중대가 배정되었다. 공격 암호가 전달된 5시 35분 그로스도이칠란트 병사들을 태운 항공기들은 벨기에 국경을 넘었고 3대대 11중대 병력으로 구성된 북부 강습대는 2기갑사단 진격로에 위치한 니베로 3대대장이 직접 지휘하는 10중대로 구성된 남부 강습대는 1기갑사단의 기동로에 위치한 비프리에 강습하는 것이 그 목표였다.
두 강습부대는 작전 개시와 함께 난관을 맞이했는데 새벽 국경지대에는 안개가 끼어 있었고 설상 가상으로 북부 강습부대 수송기들을 향해 벨기에 국경 수비대에서 총격을 가하면서 양 강습부대의 수송기들은 뒤엉키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최초 강습작전을 수행한 남부강습대의 경우 9명의 병력으로 작전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남부강습대를 지휘하는 오이겐 가르스키 3대대장은 9명의 병력으로 보당주 후방지역의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비트리-뇌프사토 도로를 봉쇄하는 기염을 토해냈다. 이후 08시에 차질없이 진행된 2차 강습대와 합류하여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벨기에군의 공격을 좌절시켰고 1파 북부강습대와 북부강습대를 따라간 남부강습대 1파 병력이 합류하며 보당주 일대 벨기에 국경요새를 후방에서 공격하는 작전을 성공적으로 실시하였다. 이들은 오후 5시 30분 1기갑사단과 접촉에 성공하며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한편 북부강습대의 경우 남부공습대와 뒤섞여 목표지역보다 15km 남쪽에 위치한 레글리제에 착륙하였다. 신속히 목표지점으로 복귀해야 했던 북부 강습대는 현지인 차량들을 탈취하여 북상하였지만 벨기에 정찰대의 공격을 받고 도보로 이동하여 남부강습대와 합류하게 된다. 한편 08시 목표 지역에 성공적으로 강습한 북부 강습대 2파 병력은 1파 병력이 자신들보다 한참 남쪽에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북부 강습대 병력은 절반의 병력으로 뇌프사토-바스토뉴간 도로를 차단하였고 북쪽에서 내려온 벨기에 아르덴 방어 병력과 남부에서 지원 온 프랑스 제5 기병사단 수색부대의 공격을 격퇴하는데 성공하였다. 북부 강습대는 10일 오후 프랑스군 기갑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며 위기에 빠졌는데 프랑스군이 북부 강습대가 설치한 위장 장애물을 보고 날이 저물고 있다는 이유로 공격을 다음날로 미루고 철수해 버렸다! 이어 11일 오전 독일군 제2 기갑사단과 북부 강습대가 접촉에 성공하면서 프랑스군은 스당을 향해 돌진하는 제1 기갑사단의 측방을 위협할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리고 만다.
1기갑사단은 마르틀랑주(Martelange)를 신속하게 점령했으나, 보당주(Bodange)에서 8시간이나 발목을 잡힌다. 전술한 그로스도이칠란트 공중강습부대가 너무나 성공적으로 강습작전을 실시한 나머지 보당주 일대에서 잠시 지연전을 펼칠 예정이던 벨기에군 중대에게 철수 명령을 전달되지 못했고. 성공한 강습 작전이 오히려 기갑군단의 전진을 방해한 것이다. 여기에 벨기에 영내의 기동로가 체계적으로 파괴되면서 1기갑사단의 진격은 크게 늦춰졌다. 본래 목표대로라면 5월 10일 저녁 벨기에의 제2 요새선이 구축되어 있는 뇌프샤토(Neufchâteau)를 공격해야 했지만 그 다음날 아침까지 공세가 미뤄졌고, 결국 지연전 임무를 받은 프랑스군 5경기병사단이 리브라몽(Libramont)과 뇌프샤토를 축으로 진지 편성을 완료하고 만다.
이런 촉박한 상황에서 사단장 키르히너 중장은 뇌프샤토가 아닌 5경기병사단 간격 사이를 돌파, 프랑스군 후방 깊숙히 진출해 방어선을 붕괴시켰다. 이 신속한 돌파로 보당주에서 소요한 시간을 벌충하는 데 성공했고, 프랑스군은 세무아(semois) 강 차안으로 줄지어 퇴각한다. 이 틈을 타서 독일군은 스당에 도착하기 전 최후의 천연 장애물 지대로 꼽히던 부용(Bouillon)을 기습했다. 개전 이래 독일군에 계속 휘둘리던 프랑스군은 부용을 자발적으로 포기하고 말았다. 그것도 보병 하나 없는 1개 전차대대의 기습 공격에 말이다.
이러한 양상은 부용 서쪽의 무재브(mouzaive)에서도 이어졌다. 전투지경선을 넘은 독일군 1개 중대가 무재브에 기습공격을 가했는데, 무재브의 교량을 방어하던 3스파히여단이 5경기병사단보다 좀 늦게 철수하면서 생긴 틈을 독일군 중대가 파고든 것. 문제는 돌발상황에 당황한 3스파히여단장이 상부에 보고도 하지 않은 채 철수해 버렸다는 거다. 결국 좌측방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는 위기감을 느낀 5경기병사단 역시 철수하면서 세무아 강변의 프랑스 전선 전체가 연쇄적으로 붕괴되었다. 결국 스당(Sedan) 방어선은 독일군 앞에 고스란히 노출되게 되었다.
스당 일대는 프랑스 제2군의 좌익을 형성하고 있던 10군단이 방어를 책임지고 있었다. 10군단은 예하에 55보병사단과 3북아프리카보병사단의 두 사단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스당 방어의 핵심은 55보병사단이었다. 프랑스군은 뫼즈강과 마르페 고지라는 천연의 방어물이 있는 스당은 2선급인 55보병사단 하나로도 막아낼 수 있다고 판단하고, 상대적으로 스당의 동쪽인 무종(mouzon) 지역에 치중했다.
이때 스당 지구의 55보병사단은 공격에 대비하여 진지 구축 작업 중에 있었는데, 무리한 수준의 공사가 문제가 되었다. 55보병사단은 30세 이상 예비역을 중심으로 구성된 사단이었고, 그 점을 감안하면 훈련을 통해 사단의 전투력을 재고하는 것이 절실했건만 사단장 라퐁텐 장군은 부족한 훈련도를 더 많은 벙커로 커버해야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진지 공사는 공사대로 완성되지 못하고, 병사들은 병사들대로 방어선을 어떻게 지켜야 할 지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여기에 55보병사단 내부의 문제로 취약성은 더욱 증대되었다. 초기에 방어선을 축성하여 그나마 방어선 구조를 파악하고 있던 병력들이 교대 원칙에 따라 이동하면서 아무것도 모르는 교대 병력들이 해당 방어선을 지켜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 거기다가 부대 간의 지나친 교대로 인해 각 부대 결속력은 심각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거기다 기존의 예비대로 있던 71보병사단이 증원이랍시고 55보병사단의 방어 구역 내로 진입하면서 전투지경선 문제로 혼란만 더해졌다.
한편 독일군도 완전한 상태는 아니었다.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교통 문제로 여전히 마스(뫼즈) 강변에 19기갑군단의 전부대가 집결하는 게 불가능했던 것.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에게 도하의 연기를 요청했으나 클라이스트는 공격 일정의 준수를 명령했다. 결국 구데리안은 당장 손에 쥔 패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공군의 가용 전력 대부분을 투입할 수 있었다는 것 정도 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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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5월 13일 스당 전투 전개도 파란색 실선은 프랑스 55사단의 방어선이고 점선은 오후 도하에 성공한 독일군이 형성한 돌파구이다. [86] |
아군의 폭격을 마스 강변에서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독일군은 16시 마스강 도하 작전을 개시한다. 제1 기갑사단은 앞서 벨기에 종심에서 공중강습작전을 수행한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와 제43 강습공병대대를 지원받아 도하 작전에 돌입했다. 본래 제1 기갑사단은 스당 북부의 퐁네프 교량을 통해 도하하려 하였지만 무력화되지 않은 프랑스군 벙커의 강력한 저항으로 수시간 동안 실패하였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는 수시간의 탐색 끝에 프랑스군의 벙커 위치를 파악, 88mm 대공포로 파괴한 이후 본격적으로 마스강 도하에 착수하였다. 그로스도이칠란드 연대 2대대는 선두로 마스 강 도하 이후 신속하게 퐁뇌프, 심티에르 일대 프랑스군과 시가전을 벌여 제1 방어선을 무력화시키며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2대대는 돈 셰리- 스당간 도로에서 프랑스군의 포격에 잠시 저지당하지만 신속하게 프랑스 군 방어선의 측후방으로 접근하여 도하 개시 3시간이 지난 19시 어간 프랑스군의 2차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성공하였고 이후 프랑스군 중대 방어거점이 위치한 라 프라이엘을 백병전 끝에 20시 경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1기갑사단의 또다른 도하작전의 주축인 1보병연대는 군단장 구데리안이 직접 현장에서 도하작전을 통제하였다. 그로스 도이칠란트 연대와 달리 헤르만 발크 대령의 1보병연대는 공군의 공습으로 프랑스군 방어선이 무력화된 사이 손 쉽게 도하에 성공했다. 무난하게 도하에 성공한 1보병연대는 신속하게 남하하여 70년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당시 나폴레옹 3세가 항복을 선언한 벨뷔 요새를 향해 진격, 함락시키며 55사단 종심을 향해 진격하였고 일부 제대는 2 기갑사단에 강력한 저항을 펼치고 있는 돈 셰리의 프랑스군 측방을 공격하여 2기갑사단의 도하를 지원하였다. 5월 13일 도하 첫날 발크가 이끄는 1보병연대의 공격으로 프랑스군의 3개의 방어선을 돌파하며 8km에 달하는 길쭉한 돌파구를 형성되었다.
하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도하에 성공한 1기갑사단과 달리 2기갑사단, 10기갑사단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특히 2기갑사단은 마스 강변까지의 기동로에 은/엄폐물이 거의 없는 데다 프랑스 포병대의 위협에 사단의 좌익이 노출되어 있었다. 거기다 1기갑사단 방면으로 포병 전력을 집중시킨 터라 가용할 수 있는 경포뿐이었는데, 아르덴 숲 어딘가에서 탄약 운반 차량들이 헤매고 있는 통에 그나마도 애물단지인 상황이었다. 다행히 먼저 도하를 마친 1기갑사단 병력들이 마련한 교두보 덕분에 2기갑사단도 이어서 도하를 성공한다. 10기갑사단의 도하 작전 역시 파괴되지 않은 프랑스군 벙커들의 강력한 저항을 받아 큰 차질을 빚고 있었다. 여기서 독일군의 임무형지휘가 또 다시 큰 빛을 발휘하게 된다. 10기갑사단 예하 49공병대대 2중대의 일개 소대장이던 루바르트 중사가 이끄는 10여 명의 병력이 유일하게 도하에 성공하였고 7개의 벙커를 장악하며 10기갑사단의 돌파구를 개방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들의 활약으로 형성된 돌파구로 10기갑사단은 마스 강 도하를 시작하였고 21시경 먼저 도하한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와 조우하며 1기갑사단과 연결된 돌파구를 형성하는데 성공한다 이는 주공을 스당 서쪽의 개활지로 잡지 않는 선택이 옳았음을 입증하는 사례였고, 해당 방향으로 주공을 주장했던 클라이스트도 구데리안이 옳았음을 인정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서부전선을 통틀어 가장 기이한 사건으로 알려진 55보병사단의 와해가 발생한다. 사단 사령부가 위치하고 있던 뷜송(bulson) 일대에 독일 기갑부대가 출몰했다는 풍문이 돌면서 사단 전체가 사실상 붕괴되어 버린 것. 하지만 실제로는 뷜송 일대에는 기갑부대는커녕 독일군 보병 하나 없었다. 뷜송 북쪽의 고지에서 포탄이 발사되는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프랑스군 포병 장교가 '혹시 전차포탄일수도?'라는 뉘앙스의 보고를 했고, 이것이 순식간에 확산되면서 '뷜송으로 독일군 기갑부대가 몰려오고 있다!'로 와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단 몇 시간만에 55보병사단은 산산조각나며 상당한 숫자의 방어 거점들을 방기하고 말았다.[88]
이처럼 각성제를 포함한 오만가지 약물을 잔뜩 빨고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72시간 동안 미친 듯이 진격한 19기갑군단 예하 1기갑사단의 진격 속도는 상상을 초월했고, 결과적으로 그 시간 안에 전차의 최대 속도로 갈 수 있는 거리를 초과해서 진격해 버린다. 이 보고를 들은 히틀러가 '혹시 허위로 보고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을 정도였다.
5.4.2. 승패가 갈리다: 프랑스 2군의 스당 역습 실패
여태 시종일관 얻어터지던 프랑스군도 슬슬 A집단군이 단순히 벨기에 남부와 룩셈부르크를 노리는 조공이 아닌 주공이었다는 것, 스당 방어선이 위험에 빠졌다는 전황을 파악하고 역습을 시작했다. 독일군이 형성한 돌파구는 아직 좁았고, 1기갑사단이 도하하며 설치한 골리에의 교량을 제외하면 중장비/중화기가 수송될 만한 통로가 없었다. 따라서 이 교량에 연합군은 공군력을 집중시켰고, 제2군에서 2개 전차대대를 증원받은 10군단은 증강된 2개 보병연대로 반격을 지시했다. 더불어 2군 사령관 샤를 욍치제 장군은 제2군 지역으로 배속된 21군단에 야전군 예비대 일부를 충원해 야전군 차원의 대대적인 역습을 준비했다. 이것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했다면 지금까지 독일군이 이뤄낸 성과는 무로 돌아갔을 것이다. 제대로 들어가기만 했다면 말이다.우선 교량을 파괴하기 위한 연합군 공군이 개박살난다. 골리에 교량이 목표가 될 것을 예측한 독일군은 다리 인근에 조밀한 방공망을 구축했고, 가용한 공군력까지 총집결시켰다. 반면 연합군은 전력 집중은커녕 그나마도 축차 투입으로 참혹한 피해를 입는다.[89] 이 동안 구데리안은 19기갑군단의 주력을 마스 강 너머로 도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시점에서 10군단의 역습이라도 실행되었다면 어떻게든 도하를 저지할 수 있었겠지만...
역습의 지휘를 맡은 55보병사단장 라퐁텐 장군은 '문서화된 명령의 서식'을 수령하기 전까지는 따를 수 없다며 공식 명령을 받기 위해 사단 지휘소를 떠나버린다. 결국 명령을 수령한지 9시간이 지난 5월 13일 오후 8시 후에 라퐁텐은 역습을 지시했고, 실제로 시작된 것은 11시간 반이 지난 이후였다. 애초에 군단장 그랑샤르 장군이 최초로 명령을 발한 것은 16시였으나 라퐁텐은 4시간이 지나서야 수령하였다. 게다가 역습부대의 우익이 탈영 사태로 지체된 탓에 실질적인 병력은 본래 계획의 절반에 불과했다. 당시 55사단이 공황에 빠져 있긴 했지만 방어 거점의 상당수가 건재했고, 예비대가 아직 남아 있었다는 점, 그리고 역습 명령 하달 이후 프랑스군의 사기가 왕성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때의 역습이 즉각적으로 이뤄지지 못한 것이 프랑스 입장에서는 천추의 한이라 하겠다.[90]
한편 플라비니 장군이 지휘하는 21군단은 이번 야전군 차원의 반격 작전의 핵심이 되어 2개 군단급의 부대를 동원할 권한을 부여받았다. 21군단은 직할로만 3흉갑기병사단과 5경기병사단, 3차량화보병사단에 1기병여단 등을 보유했고, 여기에 2군 예하의 예비대와 10군단의 잔여 병력 등을 배속받았으나, 문제는 이들 역시 턱없이 느리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5월 14일 6시에 르 쉔느에 대기하고 있던 3흉갑기병사단은 13시가 돼서야 기동을 시작했고, 플라비니 장군이 진두지휘하는 역습부대는 무려 17시 30분이 되어서야 공격 준비를 완료했다.
이 시기의 구데리안은 측방 위협을 아예 무시하고[91] 돌격을 주도하고 있었기에 사실상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회였다. 하지만 프랑스군이 밍기적거리는 사이 구데리안은 프랑스군이 역습을 한다면 핵심적인 교두보가 될 수 있는 스톤(Stonne)에 10기갑사단으로 하여금 공세적 방어를 지시한다.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를 배속받은 10기갑사단은 5월 15일 새벽에 스톤 고지 일대를 점거한다. 선형 방어 사상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 있는 프랑스군은 스당 역습은 까맣게 잃어버리고 스톤 고지 탈환에 매몰되어 그 일대에서 고착된다. 그 사이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19기갑군단의 주력사단인 1,2기갑사단은 빠르게 서쪽으로 질주하였다. 같은 시각 41기갑군단의 6기갑사단 역시 프랑스군 방어선을 뚫고 양 측면의 19기갑군단과 15기갑군단을 추월하며 거대한 돌파구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여기서 프랑스군의 더 큰 실책이 터지고 말았으니... 겁에 질려 후퇴한 병력들과 역습에 실패한 10군단 예비대를 확인한 플라비니 장군이 역습 자체를 취소해 버린 것이다. 그리고 기갑부대를 해체해 분산 방어로 투입해버린다.
북동부전선을 총괄하는 조르주 장군은 2군 사령관 샤를 욍치제 장군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스당 일대에의 반격을 재촉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병력을 재배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5월 15일 14시에 예정되었던 스당 역습은 18시 30분까지 늦춰지다 결국 취소되어 스당이 아닌 스톤 고지에 대한 반격으로 변경된다. 더 웃기는 것은 취소 명령을 제때 하달받지 못한 2개 전차중대가 국지적인 역습에 나섰다가 독일군을 유린할 뻔 했다는 것.[92] 이 2개 중대는 자기들만 역습 중인 것을 알고 급히 후퇴했다. 결국 독일군을 스당 일대에서 저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는 이런 식으로 허무하게 사라졌다.[93]
프랑스 2군 예하 10군단, 21군단의 스당 방면 역습이 모두 무위로 돌아가자 프랑스는 9군과 신편된 6군으로 하여금 서쪽으로 뻗어나가는 19기갑군단의 진격을 차단하려 했지만, 채 방어선을 구축하기도 전에 19기갑군단은 가공할 속도로 기동하여15일 6군과 9군 사이의 간격을 공격, 돌파하였고 5월 16일 아르덴 운하의 서쪽 구릉지대까지 돌파하는 데까지 성공한다. 5월 17일 스톤 고지 전투가 최종적으로 독일의 승리로 끝난 시점 비스듬히 진격하던 19기갑집단은 서북쪽으로 반전하여 6기갑사단이 뚫어놓은 돌파구로 향한다. 뒤늦게 프랑스와 영국군은 독일군의 실제 주공이 바로 아르덴 산맥을 넘어온 A집단군이었으며 베네룩스 방면으로 강력한 공격을 가해온 B 집단군이 사실 조공이었음을 깨달았지만 여기서 또 다시 A집단군이 파리로 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파리 방면으로 병력을 배치했다. 하지만 A집단군의 목표는 파리가 아니라 대서양이었다. 18일 오후 독일군 1,2,6 기갑사단이 공격을 개시하였고 19일 이들 앞을 막던 프랑스군 방어선은 와해되었다. 이제 때는 늦었고 A집단군의 대서양을 향한 진력로를 막을 연합군은 없었다. 드디어 낫질이 대서양을 향해 뻗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5.4.3. 41기갑군단과 15기갑군단의 마스 강 도하
한편, 본래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과 병진하기로 되어 있었던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은 여전히 아르덴의 끔찍한 교통 정체 속에 갇혀 있었다. 5월 13일 16시, 계획대로 마스 강변에 도착한 것은 6기갑사단 예하의 1개 보병대대뿐이었고, 이들은 어찌어찌 몽테르메(Monthermé)를 확보하여 작은 교두보를 만들기는 했지만 이미 프랑스군의 방어 태세가 확고하여 위기를 겪고 있었다.[94] 이런 고착 상황을 돌파할 수 있던 원인은 아이러니하게도 기갑집단을 아니꼬워하던 보수적인 독일군 장군단이었다. 몽테르메에서의 정체를 핑계로 A집단군 사령부는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을 12군에 배속하려고 했고, 특히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을 12군 예비대로 돌리면서 6기갑사단만 전선에 남기겠다고 명령했다.온갖 눈치, 부조리에 불구하고 지금까지 충직하게 야전군의 지시를 따라 왔던 클라이스트는 결국 참지 못하고 A집단군의 명령을 완전히 무시, 예하 전 병력에게 공세를 지시한다. 6기갑사단은 고작 네시간 반만에 프랑스의 방어선을 분쇄하였고, 돌파에 성공한 6기갑사단장 베르너 켐프 장군은 도하를 완료한 가용 부대 전체를 묶어 프랑스군 후방 종심으로 돌파를 감행한다.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을 추월한 6기갑사단의 공격은 프랑스 군을 완벽하게 혼란에 빠뜨렸는데 6기갑사단은 선형전선 사상에 따라 보병사단과 함께 움직일 것이라는 프랑스군의 예상과 달리 좌우측면을 완전히 무시하고 16일까지 맹렬히 진격한다.결국 몽코르네(Montcornet)까지 진격한 6기갑사단은 남쪽에서 치고 올라온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과 합류했고 프랑스 6군이 구축한 방어선을 각개격파하였다. 위와 같은 기갑부대들의 헌신적인 돌파 끝에 마스 강 중부 일대의 프랑스군 방어선은 사실상 완전히 붕괴되었고,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역시 존속할 수 있었다.
마스 강 북부에서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의 우측방 엄호를 담당하게 된 헤르만 호트의 15기갑군단은 프랑스 9군의 좌익 부대가 투입될 지역을 돌파하게 되었다. 15기갑군단은 벨기에군이 구축한 장애물과 아르덴 지역에서 지연전을 펼치는 프랑스군 1경기병사단과 4경기병사단을 극복해야 했다. 독일 15기갑군단 산하에 있는 2개 기갑사단 중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7기갑사단은 5기갑사단보다 앞서 나가고 있었는데, 5기갑사단 예하 31전차연대를 증원받아 마스 강 도하를 시도했다.
5월 12일, 기존의 도하 지점이던 디낭의 교량은 프랑스군에 의해 폭파되었고, 이브와(Yvoir)의 교량도 다소 늦었지만 독일군이 장악하기 직전 폭파에 성공했다. 하지만 이브와로부터 3km 남쪽에 위치한 우(Houx) 지역을 흐르는 마스 강에는 하중도가 있었고, 이 하중도와 강의 양안을 잇는 제방은 수위 조절 문제로 인해 폭파하지 못한 상태였다. 5기갑사단은 해당 지점으로 도하를 시도하게 되었다. 7기갑사단은 우 남부와 디낭(Dinant) 북쪽에서 교두보를 형성하였고,[95] 프랑스군의 격렬한 저항을 받으면서도 결국 우 남쪽의 교두보를 통해 마스 강을 도하했다.
5월 14일, 7기갑사단은 도하 뒤 옹에(Onhaye)를 목표로 한 공세에서 롬멜이 전사할 뻔한 위기를 겪었다. 선봉 부대를 이끌던 비스마르크 대령에게서 옹에에서 포위되었다(eingeschlossen)라는 비보를 듣고 사단장 롬멜이 직접 최전선으로 달려나간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4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 상급대장도 2군단 예하 부대 투입을 고려하고 있엇는데, 알고 보니 포위되었다는 게 아니라 옹에에 도착했다(eingetroffen)을 무선상의 발음 문제로 잘못 알아들은 것이었다. 결국 간신히 옹에(Onhaye)를 함락시키며 마스 강 서쪽 12km에 위치한 모르빌(Morville)까지 진출한다. 5기갑사단도 하중도를 통한 도하에 성공한 뒤 오르바스티아(Haut-le-Wastia)를 함락시키는 등 맹활약을 펼친다.[96]
5.4.4. 또다시 실패한 프랑스군의 반격 시도
상술한 기갑군단들의 기동에 대해서도 프랑스군은 반격을 시도했으나 그 수준은 스당의 프랑스군보다 더 한심한 것이었다.본래대로라면 프랑스 4경기병사단의 일부를 배속받은 5차량화보병사단, 1경기병사단의 일부를 배속받은 18보병사단, 그리고 6전차대대를 바탕으로 역습을 감행해야 했지만... 우선 제일 먼저 독일군과 접촉한 18보병사단은 몇 차례의 지엽적인 반격을 제외하면 상층부가 지시한 대대적인 역습을 전혀 시도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18보병사단은 11군단장 마르탱 장군이 정오에 사단 지휘소를 방문할 때까지 총 7시간 반동안 교두보가 2개나 형성되고 있던 것을 방치하고 있었다. 마르탱의 불호령을 맞고서야 8시간이나 지난 20시에 역습이 예정되었으나, 이것은 21시로 늦춰졌다가 보병들이 지체되어 끝내 역습 자체가 중단된다.
5월 13일 오전 2시, 5차량화보병사단은 독일군 보병들의 침투를 확인했으나, 5시간 반이 지난 이후에야 대응을 결심한다. 최종적으로는 오후 2시에 역습을 결정했으나 이것도 또 1시간이 연기되었다. 거기다 루프트바페의 공습으로 역습에 나선 보병대대가 격퇴당한다. 재역습은 오후 8시 15분으로 잡혔지만, 보병대 이동의 지연으로 9시, 10시 하염없이 미뤄진다. 이러더니 포병대가 야간을 핑계로 작전 불가를 주장하며 익일 아침까지 역습은 연기되었다. 다음날인 5월 14일, 2군단이 역습에 나서 오르바스티아 일대를 잠시 탈환하긴 했지만, 이미 독일군은 옹에 남부까지 진출한 뒤였다.
군단급 대응에 실패한 프랑스군은 야전군 예비대를 동원한 반격을 기도했다. 본래 1군 휘하 겜블루(Gembloux) 방면 예비대로 대기하고 있던 1흉갑기병사단이 디낭 방면으로 역습 명령을 하달받은 것이다. 하지만 5월 14일 오후 2시에 이르러서야 해당 명령이 전달되었고, 2시간이 지난 뒤에 사단 선두 부대가 기동에 나섰다. 그리고 주둔지 35km 북쪽의 플라비용(Flavion) 북부까지 5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97]
1흉갑기병사단의 굼뜬 기동의 원인으로는 우선 샤르 전차의 조루 수준인 항속 거리가 있다. 그리고 연료 수송 부대가 하필 부대 후미에 처져 있다가 헤메는 통에 보급을 받지 못한 1흉갑기병사단은 절호의 호기를 놓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루프트바페의 공습으로 상당수의 연료 차량이 망실되면서 사단의 이동은 더욱 늦어졌고, 어떻게든 연료를 보충하는 와중에 독일군 기갑부대에 기습을 받는다. 그 선두에 선 것은 롬멜이 이끄는 7기갑사단이었다.
롬멜은 5기갑사단 예하 31전차연대가 전장에 도착하자 이들에게 구역을 인계하고 이동한 것이라 프랑스군 1흉갑기병사단이 실제로 상대한 것은 2개 전차연대에 불과했다. 그러나 양자간 규모 차이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참패한다. 프랑스 기갑부대는 무전기의 부재로 전황파악을 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으며, 독일 기갑부대의 협공 앞에 각개격파당했다. 전차의 개별 성능은 안드로메다급 차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연료 부족과 지휘통제 혼란이 1흉갑기병사단에게 파멸을 부른 것이다. 결국 플라비용 전차전으로 독일군은 프랑스군 종심 깊숙이 침투할 여유를 얻게 되었고 프랑스 9군의 방어선은 조각조각나고 말았다.
5.5. B집단군의 딜 방어선 공격
A집단군이 아르덴 일대와 마스 강을 돌파하는 동안 B집단군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에 대해 다룰 필요가 있다. 시간을 살짝 거슬러 올라간 5월 12일[98], B집단군은 주공 방향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 A집단군의 우측면에서 강력한 조공을 펼치고 있었다. 독일군은 딜 방어선의 약점인 장블루 갭을 향해 진격했고, 한편 연합군은 이에 대응하기 위해 딜 계획을 발동한다. B집단군은 이 부대를 최대한 오래 붙들어 놓을 필요가 있었는데, 그 선두에 선 것이 회프너가 지휘하는 16기갑군단이었다. 이에 맞서 프랑스에서는 1군 예하 프리우 장군이 지휘하는 기병군단이 나섰다. 연합군과 독일군의 가장 날카로운 창 끝인 기병군단과 16기갑군단은 장블루 갭의 동쪽에 위치한 안뉘(Hannut) 일대에서 대대적인 정면 충돌을 펼치게 되었다.5월 12일 오전, 안뉘에서 양군이 격돌했고 독일 기갑부대는 전차전에서 큰 피해를 입는다. 안뉘 전투에서 격돌한 전차의 숫자는 프랑스 415대와 독일 623대로 독일군이 우세한 것으로 보이나, 16기갑군단 예하의 전차 623대 중 실질적으로 프랑스 전차와 교전이 가능한 3호/4호 전차는 각기 73대/52대에 불과했다. 1호/2호 전차가 대전차전에서 전력외나 다름없고, 거기다 기병군단이 보유하고 있는 장갑차들은 1호/2호 전차에 필적할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99] 하지만 프랑스 기갑부대 또한 기갑전 교리의 미확립/무전기의 부족으로 인해 제병협동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독일 공군의 맹폭을 받은 프랑스군 기갑부대는 전차전으로 얻은 이점을 다 까먹었다. 한편 구식 선형 전술을 기갑부대에 적용하느라 기병군단은 상대적으로 분산되어 있었는데, 회프너는 이 약점을 결코 놓치지 않았다.
5월 13일, 16기갑군단은 선형으로 늘어선 기병군단 예하 부대 중 3경기계화사단의 책임 구역에 전체 전력을 집중시켜 돌파에 성공했다. 다만 이때도 전차 교환비는 프랑스군이 훨씬 더 뛰어났다. 프랑스군이 전차 105대를 잃는 동안 독일군은 160여 대의 전차를 잃었던 것이다. 이렇게 안뉘 전투 자체는 독일군의 돌파를 저지하려는 프랑스군의 명백한 전술적 승리로 끝났지만, 3경기계화사단이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전선에서 탈락하자 2경기계화사단 역시 후퇴해야 했고, 곧 프랑스 기병군단 전체가 전장에서 물러나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 기병군단은 후퇴하며 제대로 된 지연전조차 수행하지 못했는데, 그저 일렬 종대로 신속한 철수에만 급급했다. 독일군 지휘관들은 이를 노려 프랑스군의 전열에 끼어들었고, 프랑스 포병은 피아식별 문제로 기병군단을 지원할 수 없었다. 이런 혼란 속에서 회프너는 딜 방어선 일대까지 빠르게 육박하여 공세를 감행했다. 초기에는 4기갑사단이 큰 피해를 입고 회프너 역시 공세의 중단을 지시했지만, 해당 명령을 수령하지 못한 3기갑사단이 방어선 일부를 돌파하는데 성공하며 최종적으로 16기갑군단 전체가 5월 15일 겜블루 일대의 방어선을 돌파하는 기염을 토한다. 이 기간 프랑스의 방어는 독일군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히는데 성공하였지만 스당 방면에서 A 집단군이 프랑스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면서 우측방이 위협받자 철수를 결정해린다. 여기에서도 프랑스군은 후퇴한 기병군단을 대대급으로 분할하여 각 보병사단에 배속하는 실책을 저지른다. 이는 프랑스군이 작전술적 차원의 반격 가능성을 스스로 포기해버린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로 인해 A집단군의 측면을 위협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세력인 기병군단은 큰 피해를 입고 그 지위를 상실했으며, 프랑스군은 이제 A집단군의 쾌속진격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다만 전술적으로는 16기갑군단은 큰 손실을 입었다. 343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던 4기갑사단은 5월 16일 오전 기준으로 137대의 전차만이 가용한 상태였고, 이 중 유의미한 대전차능력을 가진 4호 전차는 4대에 불과했다. 독일군은 조공이었던 B 집단군의 이러한 전과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같은 시각 주공이었던 A집단군의 마스강과 스당 돌파 소식을 누락하거나 지연 보도하며 철저히 기만하였다. 그 기만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연합군은 물론이요 심지어 이러한 작전의도를 알지 못하던 A집단군 말단 사병들까지 속였다. 이렇듯 B 집단군은 강력한 연합군 주력부대의 저항에 적지않은 피해를 받았지만 목표한 주공 속이기와 강력한 조공으로 연합군의 주력부대를 밀어내기를 완벽하게 달성하며 전황은 독일군이 예상한 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5.6. 대서양을 향한 질주와 제동
하지만 이런 전과에 대해 독일군 장군단 내부는 심각한 노선 대립으로 곪아들어가고 있었다. 이는 전통주의자와 혁신주의자간 갈등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 것이다. 관건은 과거의 선형 전술을 어떻게 인식하느냐였다. 전통주의자들에게 기갑부대가 고속으로 적 후방을 향해 진격하는 것은 측방을 그대로 노출하는 위험천만한 행위였다. 그들의 시각으로는 기갑부대가 보병부대에 의해 연결된 선형 전선 없이 종심지역까지 깊숙한 돌파구를 만들어놓은 상태는 측방에 위치한적의 역습으로 오히려 돌파 제대가 역포위당하기 너무나 좋은 최악의 형태였던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기갑부대의 진격은 보병부대의 보조에 맞추어 연결된 선형전선을 구축할 수 있는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구데리안을 위시한 기갑부대 지휘관들은 '기갑부대에게 측방 노출은 가장 유리한 상황을 의미한다. 그것이 길면 길수록 더 유리하다'[100]를 견지했다. 5월 17일, 결국 이 갈등이 폭발한 것이 구데리안이 일시적으로 19기갑군단장 자리에서 해임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을 보기 이전에,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가 어떤 위치에 있는 인물인지에 대해 먼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클라이스트는 이번 전역동안 구데리안같은 혁신주의자와 보수적인 독일 장교단 사이의 중재자였다. 클라이스트는 귀족 태생의 기병장교 출신 인물으로, 기병은 전통적인 프로이센 귀족 군인 계급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병과였다. 그리고 구 프로이센 귀족 장교들은 이 기병병과를 중심으로 형성된 독일군의 중추 파벌 중 하나로 전통주의자를 대표하는 집단이었다. 실제로 1930년대 후반 즈음 기갑사단 대신 경사단(Leichte Division)이라고 하는 차량화된 기병사단 비슷한 것이 창설된 것 역시 보수적인 프로이센 귀족 장교들과의 정치적 타협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클라이스트가 사령관으로 있었기에 그나마 기갑집단이라도 창설될 수 있던 것이다.
그와는 별개로, 동시에 클라이스트는 새로운 교리인 기동/기갑전에 대해 상당한 수준의 이해도를 가진 인물로 보인다. 구데리안은 클라이스트의 역량에 대해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만,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독소전쟁에서 보인 클라이스트의 전과는 그의 군재가 결코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정치적, 군사적으로도 클라이스트는 보수적인 귀족 장교층과 새로이 등장한 소장파 기갑 장교들 사이를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인물이었다.
문제는 구데리안이 지나칠 정도로 혁신적이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상은 클라이스트가 조율할 수 있는 한계 너머까지 치닫고 있었다. 심지어 클라이스트가 하달한 전진 가능 범위 너머까지 구데리안이 이미 진격해 있는 경우가 발생하기까지 하면서 결국 클라이스트와 구데리안 사이에서도 갈등이 팽배하게 되었고, 클라이스트가 일시적으로 구데리안를 직위해제시키는 결과에 이르렀다. 이는 12군 사령관 리스트가 직접 둘 사이를 중재하여 일단락된다.
5월 17일~18일, 이틀간 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사실상 진격을 중단한다. 이 제동의 원인은 보수적 독일 장교단에 의한 것이 아닌,[101] 아돌프 히틀러에게 있었다. 한창 작전이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 히틀러는 극도의 스트레스와 긴장으로 기갑집단에 정지를 명령한다. 이는 A집단군의 엄청난 고속 진격, 측방 차장을 신경쓰지 않는 기갑부대와 본인이 전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안감에 기인한 것으로 할더는 추측했다. 5월 18일 히틀러가 베니토 무솔리니에게 보낸 편지의 '1914년의 마른 기적이 더 이상 반복되지는 않을 것이오!'라는 문구에서 이런 위기감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 [102]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답답해진 것은 할더였다. 할더는 기존의 소극적 태도를 벗어던진 채 만슈타인보다 더 만슈타인다운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103] 그 내용은 대서양 지역에 대한 포위망은 정지한 B집단군과 일부 기갑부대만으로 형성하고, A집단군의 정예부대가 엔 강과 솜 강을 따라 방어선을 형성하려 하는 연합군을 포위, 대서양과 남측방 일대에서 동시에 포위망을 펼쳐 일거에 연합군을 격멸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히틀러는 거의 신경쇠약 상태로 이 계획마저 강력하게 거부했다. 결국 남측방 일대를 공세적으로 방호한다는 만슈타인의 구상은 구데리안 기갑군단에게서 잠깐 꽃을 피우려 하다가 히틀러에 의해 채 피기도 전에 꺾였다.
히틀러는 더 나아가 총참모부의 전권을 박탈하고는 남측방 일대에 2군, 4군, 12군을 투입하여 방어선 형성을 지시했다. 하지만 이미 공황 상태에 빠진 연합군이 해당 방면으로 역습을 걸어올 가능성은 제로에 가까웠다. 이는 당시 연합국 주요 인물들의 반응을 보면 명확해진다. 북동부전선 사령관 조르주는 5월 14일 스당 돌파 소식을 듣고 울음을 터뜨렸으며, 그 날 저녁 프랑스 수상 레노는 윈스턴 처칠에게 스당이 돌파되었으며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라는 내용의 전문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처칠과의 통화에서 레노는 '우리가 당했습니다. 우리가 이 전쟁에서 패하고 말았습니다!'라고 선언했을 정도. 그리고 15일 저녁 프랑스군 총사령관 가믈랭은 공식적으로 프랑스의 패전과 더 이상의 희망이 없음을 선언했다. 유일한 전략 예비대였던 7군이 딜 방어선에 투입되면서 A집단군을 막을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와중에 그 유명한 샤를 드골의 역습이 일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4흉갑기병사단이 받은 최초 임무는 엔 강 유역에서의 방어선 구축이었지만, 드골은 과감한 역습으로 독일군의 후위인 몽코르네 지점을 정확히 찌를 수 있었다. 4흉갑기병사단은 기존의 프랑스군이 보여 온 운용 방식과 대치되는 고속/집중된 공격을 감행했다. 이 공격으로 4흉갑기병사단은 무려 구데리안 사령부로부터 2km 떨어진 지점까지 돌파해들어왔다. 하지만 독일군의 대처는 신속했다. 드골의 역습을 보고받은 제 19기갑군단 군수참모였던 그라프 폰 킬만스에크는 신속하게 후퇴 중인 병력들을 재정비하고 공병 중대로 하여금 지뢰를 매설하고 가용가능한 대전차 전력을 동원해 방어선을 구축한 이후 공군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 결국 드골의 4 흉갑기갑사단은 완편되지 못한 전력과 독일군의 기민한 대처로 인해 이 역습은 전술적인 차원에 그쳤다. 프랑스 입장에서는 아쉽게 되었지만 독일 입장에서는 한숨을 돌린 드골의 역습을 일게 군단작전 참모인 대위가 군단 병력들을 지휘해 격퇴시킨 것은 독일군의 유연한 명령체계를 돋보이게 한다. 이는 프로이센 시절 대 몰트케로부터 이어진 타 군에 비해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은 독일군 참모부의 전통이있기 때문에 가능했다.독일 육군 특성상 대위 계급이라 해도 군단 참모라는 직책 그것도 장군참모 교육 수료자면 급할 경우 군단장 명의로 명령문을 선발송하고 사후 승인받는 것도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고 이 덕에 일게 대위가 군단의 병력을 신속하게 지휘하여 드골을 격퇴시킬 수 있었다. 훗날 NATO 중부유럽군(AFCENT) 총사령관에 오르는 그라프 폰 킬만스에크는 드골이 이끄는 4흉갑기병사단의 역습에 대해 프랑스군의 유일한 '시간적, 공간적, 방향 면에서 완벽한 역습'이었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렇다고 드골의 작전이 한계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드골의 기동 작전은 공군과의 쌍방 협조없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드골은 자신의 공격 계획을 프랑스 공군에게 통보하지 않았고 이러한 이유로 2일 후 그가 다시 벌인 기동작전이 독일공군의 신속한 대응으로 인해 이전과 같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초장에 저지되고 만다. 이는 그의 상대였던 독일군이 공군연락장교를 통해 육군과 공군간의 기민한 협조를 이끌어냈던 것과 비교된다.
한편 이런 상황에서 명령을 무시하고 미친듯이 진격하던 독일군 부대가 있었으니 바로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제7기갑사단이었다. 애시당초 보병병과 출신이었던 에르빈 롬멜은 기갑부대에 대한 경험이 그리 많지 않았다. 본래 폴란드 침공 당시 에르빈 롬멜은 히틀러의 국방군 경호부대 소속이었지만 구데리안의 '전차를 주목하라!'에 크게 감명을 받고 히틀러에게 청원을 해서 제7 기갑사단장으로 부임했다. 당연히 낙하산 인사인만큼 초기 제7 기갑사단 참모들은 보병 병과 교관출신이 기갑부대에 적절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롬멜은 자신의 상대방의 허를 찌르는 신속한 기동 전술[104]에 구데리안의 기갑교리를 접목한다. 히틀러 정지 명령이 떨어진 상태에서 전면적인 진격은 금지되어 있었으나, 4군 사령관 클루게 상급대장은 역습 징후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서쪽으로의 제한된 진격을 시도하기로 했다. 호트는 이 명령을 받고 7기갑사단에게 아벤 방면으로의 공세 명령[105]을 내렸다. 하지만 군단의 명령서가 도착했을 때 이미 롬멜은 휘하 전차부대만 대동한 채 아벤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여기서 롬멜은 한바탕 대대적인 활극을 펼친다. 101요새사단의 방어선을 돌파한 7기갑사단은 2차 방어선까지 강력한 공세를 가해 돌파, 형성된 돌파구를 따라 종심 깊이 진격을 감행했다. 그리고 우연히 롬멜의 진격로 일대에 프랑스군 5차량화보병사단의 주력과 18보병사단/1흉갑기병사단의 잔존 병력 일부가 숙영지를 잡고 있었다. 7기갑사단은 프랑스군 숙영지를 완벽하게 유린하고 5월 17일 자정에 아벤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 시점에 1흉갑기병사단 최후의 전차 16대가 독일군 기갑부대와 혈전을 펼쳐 큰 피해를 입혔지만, 결국 13대의 전차를 상실하고 급히 퇴각했다.
롬멜은 서쪽으로 더욱 깊숙히 진격, 랑드르시(Landrecies)까지 진출해 상브르 강을 건널 수 있는 교량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 5월 17일 새벽 6시 30분, 롬멜은 단 2개 대대만 동반한 채 상브르 강을 도하한 뒤 르카토 일대까지 진출한 상태에서 진격을 멈췄다. 롬멜이 상브르 강을 도하했을 무렵 후방에 남겨진 사단지휘소는 서식명령을 수령해 사단장에게 전달하려 했지만, 기이하게도 롬멜이 멈춰야 할 타이밍에 무선 교신이 연이어 끊기면서 이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
결국 르카토(Le Cateau)에서 롬멜은 진격이 늦어지는 본대를 데려오기 위해 3호 전차 1대와 지휘장갑차만 동원해서 프랑스군 패잔병이 우글거리고 있을 동쪽을 통과하는 모험을 떠났다.[106] 이 와중에 롬멜은 퇴각하던 프랑스군들까지 포로로 잡고, 아벤(Avesnes)으로 진격하고 있던 사단 본대와 합류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장대한 활극은 연장된 마지노 선으로 불리던 프랑스군 방어선 돌파구를 형성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어졌다.
5.7. 연합군의 국지적 역습, 그리고 됭케르크
5월 19일, 마침내 할더는 끈질긴 설득 끝에 히틀러에게서 대서양 연안까지의 자유로운 진격을 마침내 승인받았다. 할더는 벨기에 방면의 16기갑군단과 39군단의 지휘권을 헤르만 호트에게 넘겨 기갑군 규모의 기동부대를 편성했고, B집단군이 격렬한 공세를 통해 연합군을 붙들어 둔 사이 기동부대는 대서양 해안까지 진격하기 시작했다. 할더는 이 진격 당시를 회상하며 "당시 우리는, 혈통 좋은 명마가 기수에게 고삐를 잡혔다가 갑자기 입에 물린 재갈이 풀려 결승선으로 질주해 승리한 듯한 느낌이었다."라고까지 할 정도였다.클라이스트 기갑집단은 됭케르크로, 호트 기갑집단은 아라스로 격렬히 질주하며 연합군의 후방에 쐐기를 박아넣고 있었다. 다만 이 과감한 진격으로 인해 기갑집단의 선두와 후위 사이에 상당한 간격이 발생했는데, 특히 아라스 일대에서는 폭 40km 정도의 회랑이 형성된 상태였다. 연합군이 이 일대를 친다면 독일군의 진격을 저지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나, 문제는 이 순간에서조차 연합군은 그 찬스를 제대로 살려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같은 5월 19일, 가믈랭 장군은 작전명령 12호를 발령해 북동부 전선 사령관 조르주 장군에게 독일군 제대의 간격으로 기동성을 갖춘 특수 임무 부대의 진격을 명령했다. 그렇다고 이것이 구체적인 계획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명령문에 적힌 요구 사항은 "모든 것은 1분 1초에 달려 있다."라는 추상적인 문장 뿐이었다. 문제는 이 날 가믈랭이 보직에서 해임되고 74세의 노장 막심 베이강이 그 자리에 올랐다는 것. 베이강 역시 1차대전식 전쟁관의 소유자였고, 직접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가믈랭의 즉각적인 역습 지시를 취소해 버렸다. 5월 20일, 독일군이 이미 솜 강 하구의 아브빌(Abbeville)에 이르렀다는 걸 고려하면 이는 사실상 항복 선언이나 다름 없었다.[107]
한편, 우왕좌왕하는 프랑스군에게 인내심의 한계에 이른 영국 육군 총참모장 에드워드 아이언사이드 장군은 독자적으로 작전권을 행사해 아라스 일대에서의 역습을 감행하기로 했다. 아이언사이드는 영국 대륙원정군 사령관 고트 장군과 함께 1집단군 사령관 비요트 장군[108][109]을 방문해 역습 계획에 합의했다. 이는 최종적으로 1개 기갑여단이 증강된 영국군 2개 사단과 프랑스군 2개 사단, 거기에 1경기계화사단을 다시 배속받은 기병군단이 포함된 대대적인 반격이었다. 앞선 안뉘 전차전에서 양군의 교환비를 생각하면, 이 작전은 당시 독일군에게 있어 가장 큰 위협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소한 부분에서 시작되었다. 비요트와 1군 사령관 블랑샤르가 작전의 전권을 5군단장 알트메어 장군에게 위임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언사이드와 알트메어가 생각한 역습의 시점이 들어맞지 않았다. 아이언사이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5월 21일에 공세를 시작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블랑샤르는 알트메어에게 5월 21일부터 공세를 시작한다고 기재한 명령문을 보냈고, 알트메어는 5월 22일에나 준비가 완료된다고 보고한 것이다. 결국 5월 21일의 아라스 역습은 사실상 영국군 단독 작전이 되어버렸고 제7 기갑사단의 1차 방어선을 돌파하고 7기갑사단의 측방에 위치한 SS 무장친위대 토텐코프 사단을 패퇴시키며 항상 전선에서 전차를 타고 돌아다니던 롬멜과 7기갑사단의 지원부대를 몰살시키는가 했지만 88mm 대공포를 동원해 방어선을 급조한 7기갑사단과 슈튜카의 폭격에 처참히 패배한다.[110][111]
5월 22일, 허망하게 3일이라는 시간을 허비한 베이강은 역습 작전이 기재된 베이강 계획을 발표하나... 처칠의 표현을 빌리자면 베이강의 새로운 명령은 폐기된 가믈랭의 제12호 명령과 비교했을 때 그만의 열정적인 어투 외에는 딱히 다른 점이 없었다. 그마저도 솜 강 남변의 3집단군이 제대로 된 역습을 실시하지 않으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5월 23일, 프랑스군은 당일 예정된 역습을 계속 미루다가 결국 취소하기까지 했다.[112] 한편 아라스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BEF의 고트 장군은 프랑스군에 대한 신뢰를 접고 전 부대를 대서양 해안으로 퇴각시킬 것을 명령했다.
5월 24일, 독일군은 북프랑스 일대의 항구 대부분을 장악한다. 이 때 연합군이 통제하는 항구라곤 오로지 됭케르크 뿐이었다. 연합군 주력이 됭케르크 동쪽에서 독일군 B집단군과 격전을 치르느라 묶여 있었기에 됭게르크로 패주한 연합군들은 꼼짝없이 남쪽에서 다가오는 독일 기동부대에 의해 포위섬멸 당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 바로 기적이 벌어진다. 됭케르크로 진격하고 있던 독일군이 갑자기 정지해 버린 것.
바로 히틀러가 또다시 진격 중지 명령을 하달한 것이다. 아라스 전투에서의 영국군 기갑사단의 역습은 히틀러와 룬트슈테트의 걱정에 휘발유를 들이부었고 23일 룬트슈테트와 클루게의 간격 조정명령과 다음날 오전 히틀러가 직접 정지명령이 연이어 하달되었다. 자세한 정황은 됭케르크 철수작전 항목 참조.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명령에 당연히 A집단군은 뒤집어 졌다. A집단군 예하 부대들은 룬트슈테트와 히틀러의 정지 명령을 맹렬히 비난했고 야전 사단들은 시시때때로 잡은 찬스를 방해하는 집단군 사령부에 대해 강한 환멸감을 전투일지에 기록할 정도로 드러냈다. 할더, 브라우히치 등 독일군 참모부의 핵심 인사들도 매우 강력하게 반발했다. 할더는 A집단군의 지휘부와 참모부에 대해 자신의 5월 23일자 일기에 능력이 충분한지 적극적으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지 대단히 의문스럽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강한 불신을 드러내었고 그 동안 할더에게 작전 실시 권한을 위임했던 브라우히치는 23일 기갑사단들이 편제되어 있는 제 4야전군을 B집단군으로 배속시킨다는 명령을 하달해 룬트슈테트의 작전통제권을 박탈하여 B집단군 사령관 보크 상급대장에게 넘겨줘버렸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펄쩍 뛰었다. 히틀러는 룬트슈테트의 시선에 동의한다며 정지명령을 하달했고 간신히 엎질러지기 직전의 물을 주어담고 있던 할더와 브라우히치는 히틀러를 설득하여 명령을 취하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지만 히틀러는 요지부동이었다.[113] 결국 연합군이 됭게르크 일대에 방어선을 어느 정도 구축하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주력 병력을 철수시키기 시작한 5월 26일에야 정지 명령은 비로소 취소되었다. 3일 8시간 가량의 정지 명령이 연합군을 완벽한 몰락으로부터 구원한 것이었다. 독일군이 본격적으로 3일 후 공세를 시작하였을 때는 외곽 방어를 맡은 프랑스군이 튼튼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하였고 정지 기간 동안 됭케르크 일대에 비가 내리면서 기동로 역시 상태가 엉망진창이 되어버렸다.독일 해군은 한달 전 북해에서 벌어진 나르비크 해전에서 제해권을 확보하는 대신 상당수의 구축함을 잃으며 만신창이가 되었고 그런 상태의 해군을 철수하는 영국군 수송선을 공격하기 위해 보낸다면 영국 해군에게 그나마 남아 있던 해군 전력을 그대로 가져다 줘버리는 셈이었다.결국 공격의 주축은 공군으로 정리하겠다며 호언장담한 괴링의 뜻대로 독일 공군이 되었지만 영국 왕립공군이 결사항전을 벌이며 괴링의 뜻대로 공군 만으로 해상에서 철수하는 영국군을 전멸시키는데에 실패하였다.
이 사건에 대한 독일군의 입장은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것이 가능하다. 하늘이 주신 기회를 놓쳐버렸다. 이 말은 육군 총참모부 서방육군분석과장으로 재직하던 울리히 리스 소장[114]이 남긴 말이다.[115]
6. 적색 상황(Fall Rot) - 1940년 6월
독일군의 황색 상황으로 연합군이 북동부 전역에서 상실한 제대는 61개 사단에 달했다. 그리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영국군도 탈출하자 연합군의 가용제대는 65개 사단으로 쪼그라든다. 적색 상황 시점에서 연합군의 방위 전선은 965km에 달했기에, 변변찮은 예비대도 없는 프랑스군에게는 돌파된 전선을 메울 병력마저 사치였다. 여기에 프랑스의 민간인들도 대거 피난에 나서면서 연합군은 제대로 된 기동로도 상실한다. 한편 독일군은 142개 사단을 운용하고 있었고, 영국 해협 일대의 제공권까지 틀어쥐고 있었다. 전역은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무너지고 있었다.
비록 한참 늦었지만 덩게르크를 접수한 B집단군은 해안을 따라 남서쪽으로 공세를 속개했다. 하지만 이 시기 독일군의 공세는 예상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프랑스군이 내선의 강점을 갖추고 있었고,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철수했던 10만 명에 이르는 프랑스 병력이 방어선으로 복귀하여 사기가 크게 올랐기 때문이다. 비록 패전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1달간의 실전 경험을 쌓은 장교단이 지휘하는 프랑스군은 강력히 저항했다. 5월 23일~28일 간 프랑스군은 7군과 10군을 신편하였고, 베이강이 지휘한 고슴도치 전술을 통해 단단한 종심을 갖춘 프랑스군 방어선은 독일군에게 극심한 소모를 강요했다.
독일 B집단군이 파리를 공격하며 입은 손실은 이 시기 프랑스군이 얼마나 선전을 펼쳤음을 보여준다. 에리히 회프너가 지휘하는 16기갑군단은 재편된 이후 감행한 공세에서 거의 20%에 이르는 장갑차량을 손실했다. 1차대전에서 경험을 쌓은 베이강이 솜 강 일대에 펼친 단단한 방어선에 의해 큰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공세는 난항에 빠지나, 독일 공군의 집약적인 운용으로 프랑스의 반격을 상당 부분 봉쇄하였다.
독일은 여전히 전략적 국면에서 승기를 잡고 있었다. 프랑스 10군은 결국 손실을 버티지 못하고 후퇴하였고, 그만큼 독일군의 진격 속도는 빨라졌다. 6월 10일, 프랑스 정부는 파리를 무저항도시로 선언했고, 독일 18군은 프랑스군의 파리 방어선을 곳곳에서 돌파했다. 6월 13일, 처칠은 영불 최고작전회의에 참석해 영불연방의 창설을 제안했지만 이 제안은 거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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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파리 에투알 개선문에 입성하는 독일 육군 제30사단 군악대[1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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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독일군의 파리 입성을 보도하는 1940년 6월 20일자 독일 주간 뉴스 511호 |
한편 독-프 접경지대의 독일 C집단군은 A집단군을 도와 마지노선 포위를 시작했다. 메츠(Metz) 일대의 요새망을 둘러싸 알자스 일대에서의 반격을 차단하는 게 작전의 목표였다. 구데리안도 시기를 맞추어 베르됭(Verdun) 일대에 편성된 마지노 선을 공격하기로 한다. 6월 15일, 호랑이 작전(Unnternehmen Tiger)이 발동되었고, C집단군은 라인 강을 건너 마지노 선에 대한 정면 공세를 감행했다. 그러나 마지노 선의 방어력은 역시 무적이나 다름없었고 작전은 실패로 돌아간다.[117]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방어선을 방기하고 물러나야 했는데, 마지노 선에 주둔한 병력이 프랑스군이 보유한 마지막 정예 부대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를 잘 알고 있는 C집단군은 깨질걸 알고 있으면서도 마지노 선에 공세를 펼쳐 프랑스군을 잡아 놓았고, 그 사이 구데리안이 지휘하는 기갑집단[118]은 마지노선의 후방을 가로질러 프랑스 남부로 쾌속진격했다.
6월 17일, 구데리안은 프랑스-스위스 국경지대에 위치한 퐁타를리에(Pontarlier)에 도착했는데, 이 진격 속도가 어찌나 빨랐던지 독일군 사령부조차도 구데리안의 진격 속도를 믿지 못할 정도였다. 한편 이에 호응해 마지노 선을 돌파한 C집단군 예하의 7군이 기갑집단과 연결되며 포위망이 완성되었고, 프랑스 2집단군은 50만 명에 육박하는 포로로 전락했다.
독일군 병사들은 한껏 흥분하여 사진을 찍고 승리를 자축했다. 프랑스 주요 도시를 장악한 독일군 병사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프랑스 정부 기관에서 중요한 정보지들과 문서를 빼간 것이다. 이는 프랑스의 스파이, 프랑스 안의 유대인들 소재를 파악하고 1919년 독일에게 치욕을 안겨 준 베르사유 조약의 원본을 즉시 히틀러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본토에 잔류한 영국군은 6월 14일~25일 동안 펼쳐진 아리엘 작전(Operation Ariel)으로 상기한 셰르부르 항 외에도 남은 프랑스 항구를 통해 자유 폴란드 군대나 프랑스 군대 및 수만 명의 민간인들과 함께 무사히 탈출하는데 성공하였다.
7. 결과
7.1. 프랑스의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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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에펠탑에 내걸린 독일 국방군의 선전 문구[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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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1940년 6월 26일 프랑스 침공 승전을 보도하는 독일 주간 뉴스 512호.[120][1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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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1940년 6월 14일, 항복 직전 프랑스 국영방송이 마지막으로 송출한 라 마르세예즈.[122] |
“저는 모든 적대 행위를 중단하라고 적에게 요청했습니다. 군인으로서 이런 가슴 아픈 결정을 내린 것은 군의 상황이 어쩔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필리프 페탱, 항복할 당시 연설에서
프랑스는 항복했다.
독일 방송은 항복 연설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라디오로 내보냈고 이 항복 연설을 들은 전 독일인들과 독일 병사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히틀러는 모스크바로부터
스탈린이 보낸 축하 전보를 받았고 독일의 승리로 부터 콩고물을 얻어먹으려는 심산으로 앞선 10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날린 무솔리니는 18일 뮌헨으로 달려와 히틀러의 승리를 축하하였다. 이를 보도한 독일 주간뉴스 512호에서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화기애애한 모습을 보여주며 두 국가의 우정을 과시하였지만 실상은 준비가 아무것도 되지 않은 상태라 전쟁이 지금 끝나면 얻을 것이 없던 무솔리니가 히틀러에게 자신들의 공격일정에 맞추어 항복일자를 미루어줄 것과 항복 후 프랑스 함대를 이탈리아 함대에 귀속시켜줄 것을 부탁했지만[123] 히틀러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무솔리니는 독일선전 뉴스에 승리를 축하해주는 들러리 역할로 히틀러의 승리를 돋보이게만 해주고 얻은 것은 없었다.― 필리프 페탱, 항복할 당시 연설에서
6월 17일, 신임 프랑스 수상 필리프 페탱은 독일에게 휴전을 제의했고, 6월 22일 콩피에뉴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다. 정전 협정 체결 직전인 21일 앞서 히틀러에게 정전 협정 연기제안이 까여 마음이 급해진 무솔리니의 재촉으로 뒤늦게 이탈리아 왕국군이 참전하긴 했지만[124], 역시나 신나게 얻어맞고 르네 앙리 올리 대장이 이끄는 프랑스 알프스군에게 패하며 극히 작은 영토 확장을 달성하는 데 성공했을 뿐이었다. 6월 24일 로마에서 이탈리아-프랑스 사이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6월 25일 새벽 1시 35분을 기해 최종적으로 정전이 이루어지며, 비시 프랑스 정부가 수립되었다.
6월 20일 시점에서 이미 독일군은 프랑스 해안가까지 질주하고 있었고, 히틀러는 프랑스의 항복을 준비하면서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던,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장군들이 항복문서에 서명했던 포슈 원수의 객실 열차를 가져와 항복이 조인되었던 콩피에뉴 숲에 조성된 휴전의 숲(Clairière de l'Armistice)에 갖다놓으라고 명령했다. 휴전의 숲에는 1차 대전에서 승리를 이끈 포슈 원수의 동상과 독일 국가수리를 칼로 찌른 알자스 로렌 기념물이 세워져 있었다. 6월 20일 앞서 파리를 입성하는 공을 세웠던 30사단은 파리에서 대규모 군사 퍼레이드를 개최하였다. 퍼레이드를 실시하기 이전 여러 프랑스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30사단장 쿠르트 폰 브리젠 소장과 참모장들은 에투알 개선문 아래에 있는 무명용사 묘를 참배하였다. 이후 브리젠 소장과 18군 고위 장교단이 사열하는 가운데 샹제리제 거리에서 에투알 개선문을 둘러 포슈 거리를 따라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벌이며 승리를 만끽하였다.[125] 6월 21일 오후 3시 25분, 히틀러는 괴링, 에리히 레더 제독, 브라우히치 장군, 빌헬름 카이텔,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루돌프 헤스를 거느리고 콩피에뉴 숲에 도착하여 패전의 상징인 열차를 관람하였다. 히틀러는 프랑스에 역사적인 수치를 안겨줄 장면을 연출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승리를 기념하는 국가수리를 칼로 찌른 알자스-로렌 기념물은 국방군 병사들이 경비하는 가운데 하켄크로이츠기로 덮어 버렸다. 객차 안에서 히틀러는 프랑스 대표단을 기다렸고, 한마디도 하지 않고 프랑스 대표단을 맞이했다. 프랑스에서는 제4집단군 대장인 샤를 욍치제 장군이 대표로 왔다. 프랑스 대표단 앞에서 히틀러는 10분간 단 한마디도 말하지 않고 카이텔에게 모든 것을 대신 말하게 했는데 이는 히틀러가 1918년의 패전에 대한 분노로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이텔이 정전협정의 조건을 프랑스 측에 전달하자 히틀러는 즉시 자리를 떠나 자신의 사령부로 돌아갔다. 그날 밤 히틀러는 괴벨스와 통화하면서 마침내 수치를 씻어냈다고 기쁨에 넘쳐 말했다.
히틀러가 떠난 후 독일 통역관은 프랑스가 이유 없이 독일에게 전쟁을 선포했다는 내용의 비판 내용을 이야기했고,[126] 이 비판이 끝난 직후 히틀러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열차에서 내렸다. 프랑스 대표단에게는 휴전 조건이 제시되었는데 그중 한 가지 조건은 프랑스로 도피해온 반나치 독일인들을 모두 넘겨준다는 것이었다. 욍치제가 협상을 해보려 시도했지만 독일은 거절했고 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협상은 끝나버렸다. 조인식이 끝난 후 히틀러는 이 열차를 베를린으로 가져갔는데, 이 열차는 독일이 점점 패망해가기 시작하자 히틀러가 게슈타포에게 명령하여 이 열차를 다이너마이트로 폭파해 버렸고 콩피에뉴 휴전의 숲은 포슈 원수의 동상을 제외하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6월 24일, 프랑스는 별개의 정전협정을 이탈리아와도 체결하였고 6월 25일 오전 1시 35분에 기해서 모든 싸움이 멈췄다. 히틀러는 이를 두고 역사상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라고 선언했다. 한편 드골 장군은 항복을 거부하고 휘하의 병력을 인솔하여 마르세유를 통해서 북아프리카로 철수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의 승리를 상징했던 기념물들은 모두 조롱거리가 되어버렸다. 앞서 언급한대로 콩피에뉴 숲에 전시되어 있던 알자스 로렌 승전기념물은 독일군기로 덮혀졌으며 1차 대전의 승리를 이끈 포슈 원수와 그를 기념하는 동판은 승자로 돌아온 독일군의 승리를 더욱 빛나게 하기 위한 선전물로 전락해버렸다. 1차 대전 프랑스군의 대표적인 승전지인 베르됭 역시 독일군의 조롱을 피할 수 없었다. 독일 제16 군은 베르됭의 프랑스 승전 기념물을 군기로 덮어버리고 그 앞에서 16군 사령관 에른스트 부슈가 지켜보는 가운데 퍼레이드를 벌였고 독일 주간 뉴스는 베르됭의 파괴된 방어시설물과 독일군기로 덮힌 승전탑을 보며 지난 전쟁에서는 승리가 프랑스군을 빛내주었지만 이제는 승리의 여신이 독일군을 빛나게 해주고 있다며 조롱했다. 또한 히틀러와 병사들 또한 막 점령한 마지노 선을 보며 강력한 방어시설도 독일군의 공격을 막지 못했다며 프랑스를 비웃었다. 프랑스 침공에서 전리품으로 탱크 2,000대, 대포 5,000문, 소총 30만 정과 400만 발에 달하는 총알을 얻게 되었고 또한 프랑스군에게 제공되려고 했던 셔츠 등 피복류들도 상당수 독일군이 가져가 버렸다. 크릭스마리네가 접수한 프랑스 해군 보급창에서 프랑스 해군 수병용 줄무늬 셔츠를 U보트 승조원들의 출동 중 입고 버리는 소모성 피복으로 써 버린 게 대표적인 사례이다. 프랑스군의 총기들은 압류당하여 모두 독일군의 손에 쥐어졌으며 얼마 전까지 조국 프랑스를 지키던 르노 B1, 소뮤아 S35 등의 기갑차량들과 열차, 대포들은 모두 독일에게 양도되어 귀중한 무기로 쓰여졌다.[127] 프랑스의 모든 공장과 항구, 그리고 모든 프랑스의 재산 역시 독일이 당연히 얻어야 할 전리품이 되었고, 전쟁을 선포한 것 또한 프랑스였으니 하루에 무려 1억 달러에 해당하는 독일의 점령비용을 프랑스가 부담할 몫이 되어버렸다.
한편 프랑스와 함께 독일군에게 점령된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벨기에의 운명 역시 가혹하였다. 룩셈부르크는 독일 본토로 편입되었고 벨기에의 경우 알자스로렌 지역과 묶여서 벨기에-북프랑스 군정청의 지배를 받다가 1944년 플란데른과 발로니엔을 독일 본토로 편입당하게 된다. 네덜란드에는 국가판무관부가 들어서게 된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각각 설치된 국가판무관부들은 굉장히 가혹한 정책을 펼쳤는데 우리가 잘 아는 안네 프랑크의 도피 생활은 바로 이 네덜란드 국가판무관부의 억압을 피해 이루어진 것이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국가판무관부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는데 독일인들과 같은 대접을 해주겠다는 약속과 달리 독일은 네덜란드인과 벨기에인들을 2등 시민 취급하였다. 특히 네덜란드 국가판무관으로 재직한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는 독일에 저항한 네덜란드 시민 20만명을 처형하였다. 1944년 9월부터 연합군이 네덜란드와 벨기에 방면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이들 국가판무관부들은 더더욱 가혹하게 이들을 수탈하였다. 본국으로 부터 물자공급이 원활하지 않았던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인들을 수탈해갔고 이로 인해 많은 베네룩스 민간인들은 식량부족과 장작부족으로 힘겨운 세월을 보내야 했다. 오드리 헵번이 자신의 자선활동이 이 시기 굶주림의 경험때문이라고 말할 정도.
각설하고 1940년 6월로 돌아오면 킬 군항의 반란으로 촉발된 독일 11월 혁명으로 네덜란드에 망명을 가있던 빌헬름 2세는 독일군 B집단군 병력이 네덜란드를 성공적으로 점령하고 고위 장교단이 저택에 찾아와 그를 예방하자 매우 기뻐했고 프랑스의 항복 소식과 영국이 패퇴하여 위기에 빠지자 그 기쁨은 절정에 달했다. 앞서 1934년 정권을 잡은 히틀러가 왕정복고 주의자들을 해산시키는 것을 보며 호엔촐레른 왕가에 대한 선전포고라며 날뛰었던 빌헬름 2세는 히틀러를 'Mein Führer' 즉 총통각하라고 부르며 앞선 1차 세계 대전의 복수를 성공적으로 한 것에 대해 축하의 뜻과 함께 승리한 독일국의 황제로 다시 복고하고 싶다는 뜻을 담은 축전을 보낸다. 하지만 시종일관 왕정과 프로이센의 귀족들에 대해 감정이 좋지 않았던 히틀러는 매우 정중하게 거부하는 뜻을 전하며 대신 승리한 조국 독일로 돌아와서 살 것을 권유하였다.[128] 이러한 히틀러의 제안에 빌헬름 2세는 기뻐했지만 자신의 복고의사가 거부당한 것에 실망하였는지 이를 거부하고 1941년 네덜란드에서 사망한다.
싸움이 완전히 멈춘 후, 히틀러는 나치당 출판부장 막스 아만, 에른스트 슈미트,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당시의 두 전우를 불러서 승리를 만끽하기 위한 프랑스 능욕 관광에 나섰다. 히틀러는 먼저 자신이 복무하였던 플랑드르의 1차 세계 대전 당시의 전투 장소들을 돌아본 후 6월 28일 새벽 5시 30분에 파리를 찾았다. 미국 선전영화 'Divide and Conquer'에서는 이 '지배민족의 주인'이 파리에 강림했을 때 파리 시민 그 누구도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고 조롱하고 있지만, 히틀러의 계획 자체가 파리 시민들이 대부분 자고 있을 새벽 시간에 방문하는 것이었음으로 딱히 파리 시민들의 기개와는 별 관계 없는 일이었다. 히틀러는 그날 딱 3시간 동안 파리를 방문하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는데, 이는 나름 미학도였던 히틀러가 자신의 미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였다. 알베르트 슈페어, 건축가 헤르만 기즐러,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 등 히틀러가 총애하는 예술가들이 히틀러를 수행하였고, 히틀러는 르 부르제 공항에 착륙했다. 히틀러는 처음으로 유명한 파리 오페라 극장을 방문하였는데, 히틀러를 위해 새벽부터 불려나온 늙은 프랑스 가이드가 히틀러를 안내했다. 히틀러는 오페라 극장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고, 수행자들에게 자신의 오페라 극장에 대한 지식을 뽐냈다. 관람을 끝낸 히틀러는 부관을 시켜 가이드에게 50마르크의 팁을 주었으나 가이드는 거절했다. 다음으로 히틀러는 마들렌 사원(La Madeleine)을 찾았으며 고대 그리스적인 건축양식을 보고 히틀러는 또 흥분했다. 히틀러는 샹젤리제 거리와 에투알 개선문을 거쳐 잠시 무명용사묘지를 방문한 후 에펠탑 인근에 가서 기념사진을 촬영하였다. 그 이후 앵발리드에 가서 나폴레옹 1세의 무덤을 참배하였다.
이때 히틀러는 앵발리드를 들러 말없이 나폴레옹의 관을 지켜보았다고 하는데,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히틀러는 앵발리드에서 보낸 시간이 길었다고 한다. 이후 같은 해 12월 15일에는 나폴레옹 2세의 시신을 앵발리드로 이장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12월 18일에는 소련 침공 계획을 작성하라는 총통 명령 21호를 군부에 하달한다. 비록 히틀러의 지시로 이장된 것이긴 하지만 프랑스인들도 아들을 아버지 곁에 두는 것이 맞다고 여겼기 때문에 나치 독일이 패망한 뒤에도 나폴레옹 2세는 여전히 파리 앵발리드 한 켠에 잠들어 있다.
나폴레옹 2세의 관을 옮기는 독일 국방군.
각설하고 히틀러는 이어 판테온을 방문했다. 히틀러는 판테온이 외양은 멋있으나 내부 인테리어는 매우 형편없다고 혹평했다.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성당을 방문해서도 중세적이라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사크레쾨르 대성당(Sacré-Coeur) 방문을 마지막으로 히틀러는 파리를 떠났다.
한편 이 과정에서 수도를 비시로 하는 괴뢰 정부 비시 프랑스가 태어났는데 수도가 비시로 정해진 이유에는 단순히 비시에 호텔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여튼 그렇게 7월 초에 필리프 페탱 총리는 남은 정부인사들을 싹싹 끌어모아서 그들을 이끌고 함께 비시의 호텔로 들어갔다.
여담으로 히틀러가 프랑스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에펠탑 앞을 바라보는 모습이 담긴 당시 영상이 있는데 프랑스와 프랑스인들에게는 프랑스 건국 이래 사상 최악의 치욕스러운 순간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와 함께 6월 14일 나치 독일의 군기가 독일군들에 의해 에펠탑에 게양되는 모습 또한 프랑스에서는 최악의 치욕 중 하나로 평가하고 있다.
이는 소위 '흐느끼는 프랑스인(Weeping Frenchman)'이라고 하여, 마르세유에서 북아프리카로 철수하는 프랑스 군대를 보면서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다. 영상 버전을 찾아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프랑스 군대를 향해서 박수를 치고 모자를 흔들면서 환호하고 있다. AP통신 아카이브 뉴스릴에서 이 사람의 모습을 프랑스 함락 뉴스 사이에 끼워넣는 바람에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독일군이 입성하는 것을 보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는 파리 시민의 모습으로 착각했지만, 전혀 사실이 아니다. 이미 1943년에 나온 미국의 선전영화 'Divide and Conquer'에서는 이 영상이 드골의 철수 당시 마르세유에서 찍힌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 사진의 주인공은 코르시카계 마르세유 시민 제롬 바르제티(Jerôme Barzetti)로 1940년 9월에 사진작가 마르셀 드 렌지스(Marcel de Renzis)가 촬영한 사진이며, 1941년 3월호 라이프지에 실리면서 세상에 공개됐다. 당시 라이프지는 이 사진을, 어느 프랑스인이 그의 조국의 마지막 연대가 아프리카로 망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애국적인 통한을 담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a Frenchman sheds tears of patriotic grief as the flags of his country’s last regiments are exiled to Africa”)라고 설명했다. # 바르제티의 옆에서 박수를 치고 있는 여인은 다름아닌 바르제티의 아내인 샤를로테 바르제티다.
그의 정체는 종전 후인 1949년에야 밝혀졌는데, 바르제티가 전후 해외여행을 갈 때면 그를 알아본 외국인들이 악수를 청할 정도였다고 한다. 바르제티는 이 사진이 자신이 알지도 모르는 사이에 찍혔으며, 자신은 그저 모든 마르세유 시민들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었을 뿐이라고 겸손한 반응을 보이면서 자신에게 비춰지는 세계적인 주목을 사양했다. 바르제티는 1976년 11월 27일에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
7.2. 독일의 반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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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white> 파리를 점령하고 돌아온 히틀러 |
하지만 히틀러가 유리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을 넘어 아예 통째로 프랑스를 점령하자 군부 장성들도 비로소 히틀러를 신용하게 되었고, 몇몇은 그의 전략적 판단력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130] 수준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독일 국민들도 마찬가지였다. 1939년 9월 시작된 2차 대전은 히틀러조차 의도하지 않은 전쟁이었듯 독일 국민들에게 인기가 없는 전쟁이었다. 1914년 1차 대전 발발때처럼 많은 독일 청년들이 자원입대를 하지도 않았고 독일 국민들은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는데 히틀러는 깔끔하게 이를 해냈고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를 프리드리히 대왕의 재림으로 바라보며 열광하였다. 1940년 7월 9일 히틀러와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독일로 돌아왔을 때 독일 국민들은 히틀러와 독일군에게 꽃비를 만들어 뿌렸고, 독일 전역에서 엄청난 환호성이 쏟아졌다. 프랑스에서 독일로 돌아온 당시의 히틀러와 그를 맞이하는 독일 국민들의 모습 이러한 독일 국민들의 열광, 그리고 믿음에 발 맞추어 괴벨스의 선전부 역시 프랑스 침공의 모든 공을 히틀러에게 집중시켰다. 국방군 역시 히틀러 신격화에 발을 맞추었다.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프랑스 침공 승리를 다룬 여러 선전 영화가 개봉되었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41년 1월 개봉한 폴란드-프랑스 침공에서의 승리를 다룬 선전 영화 '서부에서의 승리'이다. 흥리롭게도 이 영화는 괴벨스의 선전부 작품이 아니라 육군 최고 사령부에서 제작한 영화였다.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에서의 승리를 자축하는 이 영화에서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의 승리를 번뜩이는 혜안을 가지신 총통께서 이끄시고 국가사회주의로 무장한 국방군 병사들이 만들어 낸 승리로 규정하며 전쟁의 공을 철저히 히틀러에게 돌렸다.[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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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1월 개봉된 독일 선전 영화 '서부에서의 승리'[132][133] |
이러한 맹신은 독일 국민은 물론이고 군부와 히틀러 본인조차 망치게 되는데 이는 국방군 전력을 과대평가하는 치명적인 오판을 야기했고 그 산물이 바로 독소전쟁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이 7년 전쟁에서 남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으로는 러시아, 북으로는 스웨덴, 서로는 프랑스와 동시에 전쟁을 벌여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렸던 전례가 있던 독일은 서부와 동부에서 강대국과 동시에 충돌하는 것을 극도로 조심했다. 이를 고려해서 서쪽 프랑스를 고립시키고 러시아와 협력관계를 만들었던 것이 바로 비스마르크였고 그 비스마르크는 서쪽에 적이 있는 이상 러시아와 절대 전쟁을 벌이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었다. 이를 무시한 결과는 1차 대전 당시 독일이 오스트리아군의 땜빵을 위해 동부전선에 병력을 분산시키면서 무리하게 전쟁을 수행하다가 패배하는 원인으로 작동하였다. 히틀러도 이 때 교훈을 얻어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해 양면전쟁을 막고자 했지만 1차 대전에서 러시아에 대해 승리를 거두었던 기억과[135] 프랑스 침공에서의 눈부신 성과, 소련의 겨울 전쟁 삽질을 지켜보며 히틀러는 물론 군부 전체도 국방군 전력 정도면 러시아를 10월까진 밀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안 되는 자신감을 가지게 만들었고 이는 1941년 12월 바르바로사 작전 실패로 비싼 값을 치르게 되었다.
7.3. 세계의 반응
프랑스의 처참한 패배는 타국들에게도 매우 크나큰 충격을 줬다. 연합군은 구시대적 전략전술로 참패하고 그 일부의 군대만이 됭케르크 철수작전을 통해 영국으로 간신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136] 영국은 프랑스가 무너지자 홀로 유럽에서 독일과 싸우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이에 독일은 영국에 여러 외교 및 선전 노선으로 평화 협정 사실상 항복을 요구하지만 영국은 윈스턴 처칠의 저 유명한 '우리는 싸울 것이다'라는 연설 아래 위로는 조지 6세부터 말단 시민들까지 모두 거국의 대의 아래 일치단결하여 독일에 대항할 준비를 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영국 본토 항공전에 돌입하게 된다. 영국의 항전 이유는 분명했다. 6월 15일, 처칠은 루스벨트에게 보낸 친전에서 만약 영국이 독일에 맞서지 않으면 유럽대륙을 석권한 히틀러 제국의 속국, 다시는 독일에 저항할 수 없게 철저히 수탈당하는 친독일 괴뢰국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137]“프랑스 패배의 뉴스를 듣고 스탈린의 신경은 거의 마비지경이었다. 소련은 이제 역사상 가장 막강하고 위험한 세력과 당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오직 우리 스스로 이 엄청난 위협에 대처해야 하리라고 느꼈다.”
― 니키타 흐루쇼프
― 니키타 흐루쇼프
비단 영국 뿐만 아니라 소련도 혼란에 빠졌다. 이제 독일은 훨씬 강성해졌고 더 이상 양면전선을 걱정할 필요 없이 소련에 선전포고할 가능성이 내부적으로 심각하게 고려된다.[138] 애초에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은 것도 제1차 세계 대전처럼 영국, 프랑스와 독일이 오랫동안 전쟁을 지속하며 서로 국력을 소모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지 이렇게 프랑스가 금방 무참히 무너져버릴 것이라는 건 스탈린의 계산 밖이었다. 이후 소련은 독일이 루마니아와 발칸 반도 방면으로 접근하기 시작하자 소련은 서쪽에 큰 위협이 없어진 독일을 크게 경계하기 시작한다.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는 3국 동맹에 소련까지 얹어 반영국 동맹을 창설하려 했지만 공산주의자에 대한 혐오로 불타는 히틀러는 미지근했다. 1940년 11월 12일부터 14일 개최된 몰로토프와의 회의에서 리벤트로프의 중동에 대한 소련의 이익을 되찾아야 되지 않냐는 질문에 몰로토프는 응답하지 않았고 오히려 독일의 루마니아 진주, 3국 동맹의 체결, 독일군의 핀란드 진주에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소련의 관심사는 대영제국의 중동과 인도양 방면 이권이 아닌 발칸반도와 발트에 있다고 전했다. 11월 26일 몰로토프는 리벤트로프가 요청한 4국 동맹의 조건으로 독일의 핀란드 철수, 불가리아를 소련의 영향권으로 인정, 터키에 소련군 진주 허용, 발트해를 컨트롤 하는데 남은 유일한 관문인 스웨덴에 대한 독일의 입장정리, 소련의 페르시아만 진출 수용, 일본이 러일 전쟁에서 받아간 남사할린을 양도하라는 것이었다. 이미 히틀러와 국방군은 영국 본토 항공전이 한창이던 7월 말 소련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 방면으로 남하하려는 움직임을 경계하여 소련과의 전쟁을 고려하고 있었다. 결국 이 회담이 결렬되며 히틀러는 소련과의 전쟁을 결심하고 12월 18일 총통 명령 21호를 하달한다.
이탈리아는 본격적으로 추축국으로 변절한다. 이는 이탈리아가 과거 1차대전 승전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보상은 고작 이스트리아 반도와 1920년 획득한 자다르[139], 1936년 점령한 에티오피아의 식민지화에 그쳤고, 특히 2차 에티오피아 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가 자신들에게 퍼부은 비난에 대해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축적된 국가적 차원의 불만이 프랑스 침공에 이르러 폭발한 것이었다. 프랑스 일각에서는 이를 '배신 변절 충격'이라고 평하였으나, 상기한 사건들로 이탈리아 내에서의 분노가 결국 히틀러의 지원군 베니토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을 탄생하게 만들었기에 업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이탈리아는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을 심산으로 말기에 프랑스를 침공했지만 ' 무솔리니의 공격은 프랑스 산악사단에 막혀' 오히려 프랑스군의 반격에 이탈리아군이 큰 피해를 입으면서 독일군이 제때 프랑스를 항복시키지 않았으면 독일은 프랑스 남부 전선까지 달려와야 할 뻔했다.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베니토 무솔리니는 창끝을 동쪽의 그리스와 남쪽의 이집트 쪽으로 겨눌 생각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와 별개로 히틀러는 이탈리아가 프랑스 침공에서 지지리도 도움이 되지 않은 것 때문에 옛날의 우상으로 우러러 보던 무솔리니에 점차 실망하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무솔리니는 이제 추축국에서 기껏해야 독일 본인들의 조수 역할만 맡아야 하며 감히 프랑스-독일 정전협상에 참여할 자격도 없다고 보고 이탈리아측 대표 참가를 거부했다.
스페인은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스페인 내전을 통해서 이미 히틀러와 나치 독일 그리고 베니토 무솔리니와 파시즘 이탈리아 왕국과 은밀히 동맹을 맺으며 겉으로는 중립국임을 표방하면서 나치 독일을 지지하였고 포르투갈도 독재자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의 무솔리니 파시즘 노선을 계승한 영향으로 마찬가지로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하였다.
폴란드도 프랑스의 항복에 큰 충격을 받았다. 본래 폴란드 망명정부의 계획은 프랑스에 망명한 폴란드 서부군을 육성하여 연합군의 동진에 참여하고 그 동안 국내 저항군으로 독일의 점령군을 최대한 붙들어놓아 독일군의 전력을 분산시키며, 연합국이 독일을 점령했을 때 저항군이 발맞추어 일제히 봉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프랑스가 몰락하면서 연합국의 승리 가능성은 사실상 사라지고 이미 육성한 폴란드 서부군도 반갈죽을 당하니 기존 저항군도 세력 확장은 고사하고 절망한 이탈자만 속출하여 오히려 급격히 세력이 위축되었다.
일본은 독일군의 눈부신 승리에 발맞추어 앞서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로부터 칭다오를 탈취해왔던 것처럼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반도 식민지를 노리고 육군 제5 사단을 투입한다. 또한 네덜란드에 인도네시아 식민지 자원의 80% 독점권을 요구하였고 이어 1940년 9월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하며 이탈리아 - 독일 - 일본 간의 삼국 동맹을 맺는다. 당연히 영국은 자꾸 자신들의 인도와 말레이 반도 식민지 쪽으로 남하하는 일본에 불안감을 느꼈고, 이는 영국에 망명했던 네덜란드 정부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미국은 이러한 일본의 남하 정책과 중일전쟁 지속에 경계하고 있었고, 일본이 아예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에 눌러앉고 군대를 주둔시키자 1941년 석유 금수 조치를 내리게 된다. 이에 일본은 유럽에서 독일이 영국을 괴롭히고 있으니 미국의 태평양 함대를 처부수면 미국이 협상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프랑스는 둘로 나뉘어 북부는 독일의 괴뢰정부인 프랑스 군정청이 수립되었고, 남부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했던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프랑스라는 독일의 괴뢰 정부의 지배를 받았다. 프랑스 식민지 대부분이 비시 프랑스에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영국은 식민지 주둔군이 해군이 빈약한 독일의 명령에 따라 본토를 위협할 가능성을 경계하여 식민지의 프랑스 군함들을 기습해 모두 철저하게 침몰시켰다.[140] 하지만 캐터펄트 작전 시행 당시 독일은 정말로 비시프랑스 해군을 동원하는 방안에 관심이 없었고 오히려 비시 프랑스는 영국이 아쉬울 땐 손 벌리더니 이젠 공격하냐는 배신감을 느끼고 단교를 선언한다.[141] 1942년 독일은 2차 콩피에뉴 협정을 위반하고 비시 프랑스를 점령하였지만 영국에 대한 배신감으로 불타던 비시 프랑스군은 훗날 미국이 튀니지에 횃불 작전을 펼칠 때 오히려 연합군에게 강력하게 저항하는 결과를 야기했다.[142] 독일군은 점령된 프랑스를 철저하게 억눌러 국가의 외형을 유지하기 힘들 정도로 분열 억압 통치를 일삼았기 때문에 프랑스가 해방되고 십년이 지나도 독일 점령 이전의 국력의 절반도 회복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6주 만에 독일군에게 항복했지만 사실 프랑스와 영국은 40만에 달하는 전상자를 내고 10만여명의 독일군을 살상하며 독일군에게 격렬히 저항했다. 스당 전투 초반에도 독일군 중소대급 전투에 일부 방어선이 돌파당한 것을 제외하고 독일군의 도하를 저지하고 있었고 저지대로 침공해온 B집단군의 거친 공격도 잘 버텼다. 문제는 낫질 작전으로 마지노선과 딜계획에 투입되지 않고 남은 프랑스 정규군 대부분과 예비군이 전멸하며 프랑스를 반갈죽 내버렸기 때문에 시기의 문제일 뿐 독일의 승리는 기정사실이었다는 거다. 하여튼 이처럼 체면과 스타일도 구기고 국가 자체도 만신창이가 된 프랑스에 있어서 제2차 세계 대전은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최악의 흑역사가 되었고 드골을 중심으로 한 자유 프랑스가 설립되고 처칠이 독일의 휴전 제의를 거부하고 항전 의사를 밝히면서 영국 본토와 해협에서 독일 공군과 영국 공군은 대규모 항공전을 벌이게 된다. 한편 추축국으로 변질한 이탈리아가 지중해 지역은 추축국에 호의적인 중립국 정도로 유지하겠다는 독일의 뜻과 다르게 그리스와 이집트 왕국을 침공했다가 탈탈 털리면서 전쟁은 북아프리카 지역과 지중해 지역으로 번졌다.
8. 양측의 전력과 그 배치
8.1. 독일군 편제
프랑스 침공/독일군 편제 문서 참조.8.2. 연합군 편제
프랑스 침공/연합군 편제 문서 참조.9. 패전 이후, 프랑스의 내부 상황
나치 독일에게 점령당한 직후, 프랑스 국내에서는 반응이 엇갈렸다. 일반 대중들은 건물이나 버스에 나치를 조롱하는 낙서를 쓰거나 극장에서 나치 선전 영화를 볼 때 비웃는 등 소극적으로나마 저항하는 태도를 보였던 반면, 우익들은 페탱이 중심이 되어 나치 독일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이는 프랑스 우익들이 나치에 대해 가진 인식이 "함께 좌익-공산주의자들을 때려잡을 동지"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치 독일은 강력한 반공주의 성향을 띄었고, 그런 이유로 공산주의에 두려움을 느낀 미국과 영국의 자본가들은 나치 독일에 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더 자세한 내용은 옆에 링크를 건 유튜브 동영상을 참조 바람 독일의 반유대주의는 인종주의와 반공주의의 결합이다(32분 33초부터).
또한 나치 독일에 협조하던 프랑스 우익 인사들은 1941년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자크 도리오의 주도하에 나치 독일을 돕기 위해 ' 반볼셰비키 프랑스 의용군단'을 창설하였다. 이 부대에 자원한 자들은 서로를 경멸하면서도 공산주의자들을 더 혐오한다는 점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아울러 페탱은 "프랑스와 서구 문명을 구원하기 위해서 위대한 반볼셰비키 십자군"에 참여하라고 연설했다.
그리고 비시 정권의 내각 수반을 맡은 정치인 피에르 라발은 "나는 독일의 승리를 원한다. 왜냐하면 독일의 승리 없이는 바로 내일 볼셰비즘이 도처에서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여, 프랑스 우익들이 가진 공산주의(볼셰비즘)에 대한 혐오가 나치에 적극적으로 부역하게 만든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런 이유로 샤를 드골의 일파와 일부 비 페탱파 우익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프랑스 우익들은 2차 대전 내내 나치 독일에 충실히 협조하였다. 심지어 나치 독일의 마지막 전투였던 베를린 공방전에서도 약 7천여 명의 프랑스인 나치 부역자들로 구성된 샤를마뉴 사단이 나치독일군 병사들과 함께 소련군에 맞서 최후까지 싸웠다.
그리고 프랑스 공산당을 제외한 SFIO나 급진당 같은 중도-중도좌익들은 소극적인 저항을 펼치거나, 지방에서 소규모 파르티잔 레지스탕스들을 조직해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프랑스 공산당과 우익에 밀려 그렇게 유의미한 결과를 창출해내지 못했다.
반면에 프랑스 공산당은 나치 독일에 방조하거나 되려 협조하는 태도를 취했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프랑스 침공 직전에 전 세계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탓에 나치 독일을 물리쳐야 할 적으로 규정해야 할지를 놓고 당의 내부 인사들 사이에서 확신이 서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러다가 나치 독일이 1941년 소련과 맺은 불가침 조약을 깨뜨리고 소련을 공격했다가 소련군에게 패배한 1942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소식이 알려지고, 코민테른의 태도가 적극적인 항전으로 바뀌자 비로소 프랑스 공산당도 나치 독일을 적으로 규정하고 무력을 사용해 그들을 타도하려는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했고 반-페탱파 우익들도 그 움직임에 참가하게 된다.
이러한 엇갈린 행보 때문에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 우익 진영은 드골주의자들을 제외하면 프랑스 정국의 주도권을 잃어버렸고, 공산당 역시 비토당하게 되면서[143] 중도-중도좌익 진영이 그 주도권을 쥐고 제4공화국 말까지 집권하게 되었다.
10. 바르바로사 작전과 비교 분석
독소전쟁의 시작인 바르바로사 작전은 낫질 작전과 매우 닮아서 규모와 몇몇 세세한 차이점만 빼면 본질은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소련은 프랑스보다 훨씬 큰 영토를 지니고 있었고, 국력도 프랑스보다 체급이 컸으며 무엇보다 초전에의 숱한 패배에 후퇴를 계속 거듭하면서도 프랑스와는 달리 전의를 상실하지 않고 끝까지 맞서 싸웠다.[144]프랑스가 전의를 상실한 큰 이유 중 하나는 수도가 조기에 적의 수중에 넘어가 버린 탓이 컸다. 사실 프랑스도 오늘날에도 유럽에서 본토가 3번째로 넓은 국가로 지구전을 치르기에 충분히 큰 공간을 지녔다. 이는 1차대전 때도 증명된바 있었고 실제로 항복할 당시에도 점령당한 영토는 고작 5퍼센트밖에 되지 않았으나,[145] 국경부터 파리까지의 거리, 즉 군사학 용어로서의 '종심'이 소련에 비해 훨씬 짧았던 터라 발전한 기동전에 1차대전 때와는 달리 차단조차 하지 못하고 빠르게 주력부대가 포위되어 버린다.
또한 파리 및 근교에 거주하던 시민들이 매우 많았으며, 국군의 붕괴를 실시간으로 목격한 프랑스 정부와 국민으로 하여금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영국도 자국 방어에 급급했기에 그 외 나라의 지원을 받기가 요원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소련은 프랑스와는 달랐다.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는 독일에서 매우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고[146] 스탈린도 모스크바에서 떠나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도 않았다.[147]
또한 독일군이 정치장교 사살명령과 아인자츠그루펜을 동원한 이른바 유럽 문명을 보호하기 위한 유대-볼셰비키즘의 본산 소련을 멸족시키는 것을 목표로 잔혹한 학살을 펼치며 소련의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주민들 뿐만 아니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을 비롯한 각 지역에서 생존을 걸고 싸울 명분을 만들어 버렸다. 독일군의 잔혹한 행보로 처음에는 독일군을 해방자로 환영해 주던 벨라루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내부 반 소련 세력이 독일에게 등을 돌리는 최악의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프랑스 전선은 그렇지 않았다. 막심 베이강과 필피프 페탱이 받아들인 것처럼 독일의 전쟁 행보는 생존의 여부가 달린 전쟁이 아닌 전형적인 유럽 군국주의 국가의 정복 전쟁이었다. 독일군은 프랑스 침공기간동안 베네룩스 3국과 프랑스에 무차별 폭격을 날리긴 했지만 전반적인 군기를 유지하며 1차 세계대전 독일 제국군의 벨기에 강간같은 헛짓거리를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1차 세계대전 때와 같은 독일에 대한 증오심보다는 전쟁에 대한 공포가 더 각인 되어 있던 프랑스인들은 믿고 있던 우방과 주력군이 전멸한 상태에서 최대한 피해를 줄일 수 있는 항복을 결정하는 것이 치욕스럽지만 차악의 선택지였던 것이다. 결국 프랑스 때와 달리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은 실패했으니, 이는 결국 두 나라의 여러 요건이 싸울 의지를 가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독일군 쪽으로 시선을 옮겨본다면 프랑스 침공때와 바르바로사 작전때의 작전준비와 독일군의 마음가짐이 너무나 큰 차이가 났다. 문서를 위에서 부터 쭉 읽어보았다면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머리를 짜내고 심지어 가망이 없다며 히틀러를 죽이려고 들 정도로 신중에 신중을 기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때 독일군은 병사들부터 가장 냉정해야 할 OKH 작전 참모부까지 하나같이 망상에 빠져있었다. 독일군은 1차 세계 대전때 압살하던 러시아 제국군을 생각하며 4개월이면 소련을 항복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작전 준비를 마쳤다.
덕분에 독일군은 러시아의 악명높은 라스푸티차와 겨울을 극복할 장비는 물론이요 일부러 유럽 철도 규격과 다르게 설계를 해두었던 소련의 철도규격을 맞추느라 열차를 통한 군수 보급에도 차질을 빚었다. 열차를 통한 군수 보급이 힘들어지니 독일군은 차량과 말을 활용한 보급을 활용하였는데 라스푸티차가 이들을 완전히 틀어막았으니 전선의 독일군 조직력은 전투를 치르면 치를수록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전선의 집중도 역시 크게 차이가 났는데 프랑스 침공을 위해 독일군은 전투가 한창이던 노르웨이에서 공수사단을 비롯한 정예사단을 차출하는 등[148] 자신들의 주 전선이 어디인가를 명확히 구분하고 보조 전선의 경우 전선을 지탱할 수 있을 정도의 최소한의 전력만 유지했다.
하지만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군은 서쪽으로 영국 해협에서는 항공전을, 대서양에서는 U보트를 활용한 통상 파괴작전을 벌이고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삽질 덕분에 딸려들어갔지만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에서 8만에 가까운 병력을 운영하고 있었다. 즉 독일은 자신들 체급 이상의 소련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사실상 3면 전선을 벌이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독일군 측면에서 바라보면 독일이 프랑스 때와 달리 소련을 지나치게 쉽게 보고 준비를 허술하게 했다가 자멸했다고 볼 수 있다.
11. 여담
11.1. 밈이 된 6주의 패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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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프랑스군은 유럽의 대표적인 전통 강대국의 군대답게 프랑스를 유럽 역사상 가장 군사적으로 성공적인 국가[149]의 위치로 올려놓았으며, 세계사에서 가장 많은 승리를 얻은 군대 중 하나였다. 특히 대육군 시절의 활약은 그야말로 전설이었다. 물론 그 이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의 패전으로 한 번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활약으로 간신히 만회한 바 있었는데, 그것이 무색해지게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보다 더한 굴욕을 당하면서 또 다시 이미지가 처참히 망가져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유럽 전역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이 프랑스 침공과 항복 파트가 다뤄질 수밖에 없는데 이 때문에 프랑스는 전 세계 해외 네티즌들에게 '밈'이 되며 상당한 까임과 놀림의 대상이 된다. 전통 라이벌인 영국과 승리한 당사자인 독일이야 말할 것도 없고, 미국을 비롯한 서방 국가 네티즌들에게 마지노선이나 6주 등의 주제로 정말 자주 놀림받고 있다. #[150]
국내에서는 프랑스의 극한의 공격 정신을 강조하는 전술 교리인 엘랑 비탈에 빗댄 별명인 엘랑스라고 불리고 있다.[151] 어떤 면에선 졸전의 대명사인 이탈리아보다도 더더욱 놀림받고 있는데, 사실 이탈리아는 워낙 내부적으로 문제가 많은 나라인 데다가 세계의 주요 강대국도 아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이해를 할 수 있지만 프랑스는 세계의 주요 강대국이자, 서유럽 전통의 육군 강국이기 때문에 더더욱 충격적인 사건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비록 프랑스 제국 시절 때처럼 최전성기는 아니지만 여전히 유럽의 주요 강대국이며, 중세 때부터 프랑스가 유럽의 강대국이 아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거기에 이 졸전이 나온 전쟁이 하필이면 인류 역사상 최대규모의 전쟁인데다 이 패전으로 인해 2차대전이 1차대전보다 훨씬 판이 커져버려 인류의 역사가 바뀌는 극적인 결과가 나왔으니[152] 그만큼 놀림 받을 수밖에 없다.[153]
물론, 프랑스는 2차 대전 초반 독일이 상대한 나라중 가장 오래 버틴 국가였다. 하지만 프랑스보다 훨씬 더 짧은 기간에 항복한 덴마크,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노르웨이 등의 국가들은 프랑스와는 체급으론 비교도 되지 못하는 약소국들이라 독일에게 패배하는 게 당연했다. 애초에 세계 1,2위를 다투던 제국주의 강대국을 약소국들이랑 동일 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에 가깝다.
4시간 전쟁한 덴마크의 인구는 약 380만명, GDP는 약 290만 달러로 둘 다 프랑스의 1/10도 되지 않았고, 병력은 약 14500명으로 프랑스의 1/100도 되지 않았다. 12시간 걸린 룩셈부르크의 인구는 약 29만명으로 프랑스의 1/100도 되지 않았고, 유의미한 병력이 없었다. 7일 걸린 네덜란드의 인구는 약 880만 명으로 프랑스의 약 1/5 정도였고, GDP는 약 800만 달러로 프랑스의 약 1/5 정도였다. 병력은 약 28만 명으로 프랑스의 1/10도 되지 않았다. 11일 버틴 유고슬라비아는 졸전을 하기는 했다. 고작 10명의 오토바이 부대가 후속 전력의 도움도 없이 베오그라드에 무혈입성하여 점령했으니까. 그러나 유고의 인구는 약 1300만명으로 프랑스의 약 1/3 정도였고, GDP는 520만 달러로 프랑스의 1/7 정도였으며, 병력은 약 70만명으로 프랑스의 약 1/10 정도였다. 또 유고의 경우 사방이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등의 추축국들에 포위되어 있었으며, 내부에서도 크로아티아가 반기를 들었다. 3주 버틴 노르웨이의 인구는 약 290만명, GDP는 약 380만 달러로 둘 다 프랑스의 1/10도 되지 않았고, 병력은 약 52500명으로 프랑스의 1/100도 되지 않았다. 4주 걸린 폴란드의 인구는 약 3400만명, GDP는 약 1300만 달러로 프랑스의 1/3 정도였다. 병력은 약 95만 정도로 프랑스의 1/5 정도였다.
이들 전부를 합쳐도 1940년 프랑스 인구보다 적으며 독일 인구의 3/4 정도 밖에 못미쳤다. 프랑스는 영국 다음으로 식민지를 많이 가진 유럽 4대 강대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력과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게 심지어 영국, 벨기에군까지 끼어두고 마지노 선까지 만들어대며 난리를 쳤음에도 6주컷으로 독일에게 쓰러지는 바람에 악의 축이나 다름없는 추축국들에게 유리하게 판이 돌아가게 되어 초반 연합국 전세에 단단히 민폐를 끼쳤다. 물론 됭케르크 철수작전에서 프랑스군은 분전했지만, 따지고 보면 철수작전 자체가 프랑스군의 졸전에서 비롯된 것이니 프랑스가 그렇게 쉽게 밀리지 않았다면 당연히 급하게 철수해야 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6주 패전의 과정에서 프랑스군 병사들의 분전과 별개로 상당수의 프랑스군 장성들은 1차 세계대전에 머무른 고지식함을, 통신과 같은 분야에서는 거의 기본을 갖추지 못한 모습을 보였다. 일례로 위에서 볼 수 있듯이 프랑스군 사령부에는 전서구 한마리조차 없었고, 명색이 프랑스군 사령관이었던 가믈랭은 명령을 알아들을 수 없는 시적문구로 보내는 행태를 보였다. 거디다 스당방면의 프랑스군이 무너진 이후 에르빈 롬멜이 이끄는 소수의 전차에 수백병이 항복을 하는 등 너무나 어처구니 없게 예비 부대들이 무너진 덕에 프랑스의 패전은 더욱 강렬한 인상을 남겨 오늘날까지 회자되며 두고두고 까이는 것이다.[154]
여담이지만 이러한 프랑스군을 조롱하는 밈은 실질적으로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조지 W. 부시 시절 벌어진 이라크 전쟁 당시 서방국가들 사이에서 유일하다시피 대놓고 미국을 비판하며 미국의 참전 요구를 단칼에 거부하고 이라크에 끝까지 병력 한명 안 보냈던 나라가 바로 프랑스였기 때문이다. 9.11 테러를 명분삼아 특정한 국가를 묵사발로 만들고 싶은 참에 대놓고 반기를 드니 당연히 전 미국은 프랑스를 비난하기 바빴고 주류 언론들까지 나서서 프랑스군이 1870년 이후 배운 기술이라고는 '후퇴와 항복'밖에 없다 라는 식으로 프레임을 씌워 줄기차게 조롱했다. 자세한 사항은 이라크 전쟁 참조. 이때 미국의 반프랑스 감정이 얼마나 심했는지 미국 하원 의원까지 나서서 프렌치프라이를 프리덤 프라이로 바꿔 부르자는 캠페인까지 벌였다. 물론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얼마 안 가 은근슬쩍 때려치웠고 프리덤 프라이 운동을 주도한 당사자도 흑역사라고 인정했지만. 물론 2024년 시점에서 보면 이라크 전쟁은 이라크 내전 등 중동 정세 파탄과 그에 따른 유럽 난민 사태와 최악의 테러단체 ISIL 탄생을 불러온, 미국 역사상 손에 꼽는 최악의 삽질이었고 결국 당시 프랑스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밈이 퍼지기 시작한 게 한창 인터넷이 민간에게도 보급되기 시작한 21세기 초였다는 점과, 영미권 특유의 막강한 밈 전파력이 합쳐져 당시 미국에서 시작된 프랑스군 항복 밈은 2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영미권 커뮤니티를 넘어 전세계적으로 심심하면 놀림받는다.
12. 프랑스를 위한 변명
12.1. 내부적인 문제
그럼에도 위의 단락처럼 GDP와 인구를 바탕으로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프랑스의 패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랑스의 내부 상황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군 수뇌부가 독일군의 라인란트 진주에 움직이지 않은 것은 영국의 지지가 없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다. 물론 영국 역시 1차 대전의 후유증으로 프랑스를 도울 여유가 되지 않았고, 독일군이 옛 독일의 땅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155][156]이러한 영국과 프랑스의 무관심 속에 고무된 히틀러는 재무장을 서둘렀다. 이것은 프랑스 하나의 문제가 아닌 영국, 프랑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소련 등 집단 안보 체제를 맺은 유럽 각국이 나치 독일의 팽창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것 때문이었다.
프랑스가 소극적인 대처를 했던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 프랑스는 좌파 정권인 인민 전선이 집권 중이었음에도 정치적인 혼란 때문에 스페인 내전이 발발한 뒤에도 중립을 취했고, 영국 역시 프랑스가 움직이지 않자, 중립으로 전환했다. 이는 안슐루스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도 프랑스는 영국이 호응한다면, 군사 행동에 나서려 했지만, 영국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자 움직이지 않았다.
독일이 주데덴란트를 합병하려 할 때, 국방상 레노, 내무상 망델, 총사령관 가믈랭 등은 강경하게 대응할 것을 주장했다. 허나. 공군 사령관 비유맹은 공군의 준비가 미흡하다며 양보할 것을 주장했고, 비유맹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프랑스는 독일의 주데텐란트 합병을 묵인했다.
1930년대 후반에도 프랑스의 내부 상황은 매우 혼란스러웠다. 라발을 비롯한 친독일 인사들은 독일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했고, 24번이나 정권이 교체된 상황이었다. 프랑스가 내홍이 시달리자, 영국도 그 영향을 받아 프랑스에 대한 지원에 난색을 표했다. 이에 프랑스의 총리는[157] 주 프랑스 미국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영국은 프랑스에서 전쟁이 발발하면, 프랑스 혼자 싸우게 놔둘 것이 분명하다. 영국은 프랑스의 사상자 목록이 가득차게 내버려 둘 것이다.' [158]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때는 프랑스도 즉시 참전하려 했다. 허나, 모레스 토레즈를 위시한 프랑스 공산당은 9월 2일에 독일에 맞서는 전쟁 수행에 동의했다가 막상 프랑스와 영국이 폴란드에 선전포고를 하자 입장을 바꿔 반전을 주장했다.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은 소련이 지령을 내린 탓이었다.
군부의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가믈랭과 조르주는 계속하여 충돌했고, 패탱은 독일과 싸우기보단 강화를 주장하였다. 이런 문제 때문에 프랑스는 폴란드를 돕고자 해도 돕지 못했다.[159]
또한 폴란드가 너무 빨리 무너진 것도 프랑스에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독일의 서부전선에서의 성공적인 기만작전과 함께 한달만에 폴란드가 무너진 것은 영국과 프랑스 모두 상상치도 못한 일이었다. 명색에 폴란드는 앞선 소비에트 폴란드 전쟁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고 체코슬로바키아보다 양적으로는 더 뛰어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폴란드는 독일군에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브주라 전투에서 주력군이 전멸하며 사실상 전쟁 개전 2주만에 전쟁의 승패는 결정이 나버렸다. 여기에 독소불가침조약에 따라 폴란드의 동쪽 영토를 약속받은 소련이 참전하며 영국과 프랑스의 희망과 달리 폴란드는 이들이 급한 대로 독일과 제대로 붙을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을 벌어주지 못했다.
두 번째, 1차 대전의 엄청난 피해가 크게 작용했다. 1차 대전기 동안 프랑스군은 841만명을 동원했고, 이 중에서 132만 5천명이 전사, 280만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피해는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중심으로 하는 방어 전략으로 전환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프랑스가 마지노선에만 집착했다는 비판은 부적절하다. 프랑스는 마지노선 건설에 50억 프랑(약 1억 9500만 달러)의 자본을 투입했지만, 독일 역시 10억 라이히스 마르크(약 4억 달러)를 들여 지크프리트 선을 구축했다. 또한 마지노선에 투입한 것 때문에 일어난 군 예산의 불균형 역시 1934년에 프랑스가 기갑 부대를 확장하기 위한 사업을 시작하면서 순식간에 변화했다. 이러한 상황은 1936년 이후까지 지속되었다. 마지노선이 무용지물이었다는 비판 역시 옳지 못하다. 애초에 낫질 작전을 입안한 이유가 마지노선을 정면으로 뚫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160] [161]
세 번째, 대공황도 악영향을 미쳤다. 1920년대 프랑스군은 기동전을 발전시키는 등 1차 대전 시기의 교리를 발전시키코자 했으나, 대공황의 여파로 재무장이 어려워졌고 1930년대에 와서야 기동전에 본격적인 투자를 하게 된다. 이는 기동전으로 승리를 거둔 독일도 동일한 사항인데 성공적인 기동전이었던 프랑스 침공 당시 전통적인 선형 전술을 선호한 고위 장교단과 급진적인 기동 전술을 선호한 젊은 장교단간의 의견 충돌은 프랑스 침공 기간 내내 발생했다. 차이가 있다면 프랑스는 이러한 갈등을 현장에서 절충할 클라이스트와 같은 장군이 없었고 너무나 빠른 프랑스군의 전선 붕괴로 이 갈등을 해결할 시간조차 얻지 못했다. 또한 독일군 내부에서 급진적인 기동 전술에 대해 충돌이 있었다고 하나 그 본질은 어디까지나 기갑부대의 급속 기동에 대한 것이었지 기동전자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 프리드리히 대제 이래 독일군의 장기는 고속 기동을 통한 방어와 공격, 포위 섬멸이었고 이를 궁극적인 전술 목표로 삼은 건 보수파 장교단과 혁신파 장교단 모두 동일했기에 충격전술과 고도의 화력을 중시해왔던 프랑스와는 출발점 자체부터 달랐다.
12.2. 가믈랭을 위한 변명
1940년 3월, 30개에 달하는 연합군 사단들을 벨기에 영내로 진격시킨다는 딜-브레다 계획을 채택한 가믈랭의 결정은 적의 기습에 대응할 예비대 전력을 크게 감소시켜 이후 독일군의 계획에 큰 도움이 되었다. 또한 가믈랭의 독일군의 주공에 대한 확증편향이 프랑스의 패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에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이러한 가믈랭의 실수는 총사령관으로서 지내는 동안 저지른 여러가지 삽질과 더불어 중대하기 짝이 없었고, 진주만의 허즈번드 킴멜 제독과 같이 재평가를 넘어서 명예회복을 시켜줄 것은 결코 아니지만, 일단은 어느 정도의 옹호의 여지가 있기는 하다.[162][163][164]그럼에도 가믈랭은 전선 중앙에 지나치게 부주의했고 아르덴 숲을 통과하는 독일군의 기동이 제때 대응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느릴거라 예측했다. 가믈랭의 이 판단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이러한 결정이 1934년 국방장관으로써 유사시에 벨기에로 진격해야 한다 주장하며 아르덴 지역의 위험성을 일축한 필리프 페탱의 오판에 근거한 것이었다고는 하나, 최종 결정권자로서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165]
다만 빠른 패전이 프랑스가 전쟁에 적응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제 2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세계대전 이상으로 신병기와 신전술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특히 항공기의 발전은 아주 빨라서, 2차세계대전사에 그 이름을 몇번이고 수놓았던 bf 109,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a6m, f4f 와일드캣 같은 전투기의 개발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들 기종의 개량과 발전은 전쟁중에도 거듭되었으며, 같은 기간 중 일부 새로운 기종이 탄생해 활약까지 한 사례도 있을 정도로 그 발전은 매우 빠른 편이었다.
이는 전술적인 차원에서도 다르지 않았다. 전차의 등장과 그들을 중심으로한 기동전은 말할 것도 없기에 다른 예를 들어보자면, 항공모함의 등장은 1917년의 일이었고 이들을 이용한 육상기지 공격 또한 1918년 퓨리어스가 해낸 바 있었다. 그러나 항공어뢰의 발전은 그 아이디어를 바다로까지 확장시키는 결과로 이어진다. 뇌격기의 희생양으로 대표되는 것은 타란토의 이탈리아 왕립해군, 신예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 그리고 진주만의 태평양함대 등이 있다. 요컨대 그 미국 또한 신병기와 신전술의 희생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가 이들과 달랐던 것은, 그 패전이 너무 빨라서 함대를 재건하고 신기종을 채택함과 동시에 적의 신병기로부터의 충격을 극복하고 그들의 특징을 분석해 아군기종이 유리한 부분을 십분 활용하여 상대해내는 전술을 개발할 시간이 모자랐다는 것이다. 미해군 또한 프랑스 전차의 무전기 문제에 비견할 만한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는 어뢰, 그중에서도 특히 잠수함용 Mark.14와 항공어뢰인 Mark.13에서 두드러졌는데, 미해군이 항모기동대의 가장 강력한 창이었어야 했던 항공어뢰를 겨우 사용이 가능할 만한 수준으로 끌어올린 것이 개전 후로 1년이 넘는 시간이 지난 시점의 일임을 고려해보면 일목요연하다. D.520과 같은 단엽기는 bf 109를 일부 상대할 수 있는 것이었고, 여기에 영국으로부터 우수한 항공기용 엔진을 받는 등 개량을 거듭했다면 그 잠재력은 가늠해보기 어렵다.
이러한 사정은 비단 병기와 전술에 국한되지 않았고, 전쟁을 이끌어 나가는 인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누구나 실수를 할 수 있고, 모르면 맞아야 한다. 그러나 실수를 복기하고 패배를 분석하여 그것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사람은 최소한 이전보다는 나은 대응을 할 수 있을 것이다.[166] 사령부라는 집단 전체를 본다면, 개개인의 능력과 특기에 맞추어 인사를 개편시킬 수 있고 병력 전체를 보면 편제를 수정하여 보다 효율적인 집단으로 개선시킬 수 있다. 다만 그것들은 야전군 한 개가 그야말로 갈려나간 상황에서 6주 동안의 벼락치기로 해결될 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당시의 프랑스는 사령부, 군단, 사단 차원에서 프랑스의 지휘 수준은 드골, 드 라트르 드 타시니, 터치온, 델레스탱과 같은 유능한 장교들에서부터 그랑드, 코라프, 레퀸과 같은 평범하거나 무능한 장교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평시에서 전시로 전환하는 다른 모든 군사 조직과 마찬가지로, 프랑스군에는 서류 작업과 평시 업무에는 탁월하지만, 전장 지휘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여러 장교들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나마 실수를 배우고 독일군에게 피해를 주기 시작한 적색 상황 당시 이미 동맹군인 영국군은 영국 해협을 넘어 철수해버린 상태였고 이들을 엄호하던 4만명에 달하는 프랑스 병사들이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힌 상황이었다.[167]
또한 프랑스 군의 붕괴 사례만을 가지고 프랑스 군의 전투력을 평가해서는 안된다. 물론 프랑스군의 붕괴 사례는 독일군 측에서도 당황해할 정도로 많았다. 많은 프랑스군 병사들은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전차를 몰고 들어온 독일군 기갑부대들에 순식간에 전의를 상실했지만 전투가 벌어지게 된다면 사력을 다해 싸웠다. 스당 전투에서 벌어졌던 희대의 55사단 붕괴사건과 에르빈 롬멜의 대활극 등에 묻혀서 그렇지 그 과정에서조차 프랑스군은 잘 싸웠다. 스당 전투 당일 프랑스군은 슈튜카의 폭격으로 인한 심리적 붕괴를 겪었음에도 금세 정신을 차린 프랑스 군은 독일군 2기갑사단과 10기갑사단의 도하작전을 거의 방어하는데 성공했다. 또한 독일군의 공세적 방어전술에 말려들었다고 평가받는 스톤 고지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5일부터 17일까지 총 17차례에 걸친 전투에서[168] 방어를 맡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연대에 500명이 넘는 사상자를 안겨주며 일시적으로 전열에서 이탈하게 만들었고 에르빈 롬멜 역시 대활극을 펼치던 동안 프랑스군과 여러 차례 전차전을 벌여야했다. 드골의 몽코르네 역습은 일시적으로나마 19기갑군단 후속 제대를 붕괴시키기도 했으며 결국 장블루 갭 일대의 방어선이 돌파당하며 독일의 작전술적 승리로 끝났던 안뉘 전투는 공자인 독일군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 명백한 프랑스 군의 전술적 승리였다.
12.2.1. 가믈랭의 전쟁 준비
독일과의 전쟁을 대비해 프랑스군을 준비시키고자 한 가믈랭의 10년간의 노력은 그가 적군의 역량에 대한 이해를 갖춘 계획가였음을 드러낸다. 프랑스 산업은 가믈랭과 다른 프랑스 최고위 장군들의 추천에 기초해 소뮤아 S35 중형전차와 APX 47mm 대전차포와 같은 당시의 독일군 전차를 상대하는 데에 충분한 무기를 생산해냈다.[169] 가믈랭은 당시 프랑스군에 무엇이 필요한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새로운 기술의 가치에 대한 이해 또한 있었다. 따라서 가믈랭과 다른 고위 프랑스 지휘관들이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했고 1918년의 전술에 집착했다는 평가는 조금이나마 과한 부분도 있다.[170]독일군조차도 가믈랭의 군사 관리자로써의 능력에 대해 꽤나 높은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주목받지 못했다. 가믈랭은 마지노선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고 1935년부터 프랑스군 최초의 기갑 사단 창설을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171] 드골이 기갑 사단을 살리기 위해 분투했다는 통설과는 달리, 가믈랭이 전차에 기울인 노력은 결코 무시당할 것이 아니었다.
12.2.2.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쓴 가믈랭
패전 책임을 뒤집어 씌우기 위해 비시 정부가 개정한 리옴의 쇼 재판을 시작으로 가믈랭의 명성은 더럽혀지기 시작했다. 1940년의 패전 뿐만 아니라 3공화국의 위험한 정치적 격랑을 헤쳐 나가야 했던 전문 군사 관료로써의 성향이 가믈랭의 발목을 낚아챘다. 프랑스군 내부는 물론 정치인들 사이에도 가믈랭에게 혹독한 비난을 가한 이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패전에 대한 모든 책임을 오롯이 가믈랭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해 분투했다.여기에 더해서 1939~1941년의 독일군의 전술은, 예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도박적이기까지 한 위험한 것들이었음도 간과해선 안된다. 다만 가믈랭에게 스당 방면의 취약성과 독일군의 침공 가능성에 대해 경고하는 보고서들이 분명 전달되었고 가믈랭 본인이 직접 가능성과 설사 독일군이 공격을 실시해 온다 해도 막을수 있다고 확언한 것은 부인할 수 없다.
12.2.3. 가믈랭의 역량
가믈랭은 미국 남북 전쟁 시기, 연방군 장성으로 활약한 조지 B. 매클렐런과 마찬가지로 군대를 조직하고 구축하는 데 있어서는 상당히 유능했지만, 실전에서 군대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는 미숙했다. 가믈랭은 어떻게 보더라도 전투를 좌우하는 전장 지휘관으로써의 재능은 없었다. 이 때문에 그는 작전을 부하들에게 위임하는 것을 선호했으며 이러한 성향은 역사가들에게 가믈랭의 “나약하고 무능한” 행동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소련 연방 원수 게오르기 주코프 정도를 제외하면, 2차 세계대전에서 최고 사령관이 모든 작전을 직접 지휘하는 사례는 극히 드문 일이었다.따라서 전장 지휘권을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한 가믈랭의 행동은 당대 고위 사령관들에게 허용된 표준적이고 상식적인 규범 내의 행위였다. 또한 1940년에 이뤄진 가믈랭의 지휘는 동맹과 협력하지도 않고 적을 이해하지도 못했던 영국의 육군 사령관 고트보다는 훨씬 뛰어났다. 그러나 가믈랭과 프랑스 최고사령부가 1940년 연합군의 재난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게 되면서 재앙에 대한 영국의 책임분은 역사의 그늘 저편에 묻히고 말았다.[172]
12.3. 동맹 세력의 비협조
프랑스의 졸전과 패배의 책임은 비단 프랑스만의 것은 아니었다. 동맹 세력의 비협조가 차지하는 파이도 상당했는데, 이것이 프랑스의 자업자득인 부분도 있었으나 또 온전히 그들의 잘못인 것도 아니었다. 자업자득인 부분으로는 대표적으로 뮌헨 협정이 있고, 또 스탈린이 독일의 확장 야욕을 경계하며 프영소의 협력을 강조했으나 이에 대해 미온적으로 나온 바 있었다. 말하자면 동맹국이 협조적으로 나오지 않았다고 말하기 이전에, 기껏 있던 동맹국을 팔아넘기고 이들의 신뢰를 깎아먹은 것은 분명 프랑스의 책임이었다.그럼에도 동맹국의 태도가 문제가 된 것도 있기야 했는데, 그것 중 하나가 바로 벨기에의 중립이었다. 벨기에의 확고한 중립은 연합군의 대독일 전략 수립에 큰 골칫거리로 작용했다. 독일이 1차 대전 때 벨기에를 통해 프랑스를 침공해왔었음은 프랑스 국민이면 거의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었고, 한 술 더 떠서 프랑스-독일 국경에 마지노선이라는 요새를 쌓아놨으니 물어볼 것도 없이 벨기에 방면이 독일군의 주공이 될 터였다. 그러나 벨기에는 빈약한 군사력과, 1차 대전의 일종의 후유증이었는지 중립을 지킴으로서 침략에 대한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믿음 등으로 확고한 중립을 선언한다. 그렇다고 벨기에의 중립이 스위스 마냥 요지부동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 벨기에는 대독일 안보체계에 동참했고, 이로써 유사시 프랑스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이 벨기에로 이동하여 독일군과의 전투에 임한다는 딜 계획이 입안된다.
비록 위에서는 후드려 까이다 못해 비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쥐어 터지는 계획이기는 하나 사실 브레다 변형 이전까지의 딜 계획은 굉장히 효과적이면서도 벨기에의 중립을 고려한 현실적인 계획이었다. 딜 계획의 골자는, "유사시 알버트 운하의 방어선(Albert Canal-Meuse line)에서 벨기에 군이 버티며 시간을 버는 사이, 프랑스군 주축의 연합군 병력이 딜 강을 낀 방어선(K-W line)까지 진출, 수도인 안트베르펜과 벨기에 서부의 방어를 겸한다" 였다. 이것이 효과적인 계획인 까닭은 다음과 같다. 우선 딜 계획은 그 대안과 달리 하천 방어선을 중심으로 강화되어 방어선 전체의 길이도 짧았다.[173]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벨기에 국경(Franco-Belgian border)에 위치한 전 병력이 일종의 전략적 예비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이다. 비록 방어선에 배치되기까지 어떻게 보면 불필요할 수 있는 기동을 해야만 했지만, 벨기에 영토만큼의 면적이 일종의 종심으로서 작용하여 독일군의 주공 방향에 따라 딜 계획을 발동하지 않는 대신 보다 결정적인 지점에 전력을 투입하여 수적 우위를 누리기 용이했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러한 이점은 가믈랭의 확증편향에 의해 모조리 상실되고는 이내 마이너스 요소로 까지 작용했음을, 그리고 후퇴하는 벨기에군이 딜 기동을 중대히 방해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술한 딜 게획의 장점에도 불구하고 연합군을 미리 벨기에 내부에 진주시켜놓는 것이 보다 효과적일 수 있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 벨기에 정도면 양반을 넘어서 선녀라고도 말할 수 있다. 진정한 배후의 적은 바로 영국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배경 문서에서도 다루는 내용인데, 영국은 뮌헨 협정 등 프랑스가 대독일 안보체계의 협력국을 날려 먹는 데에 적극적으로 동참한다. 또 독소 불가침 조약의 체결에도 중대하게 기여했는데, 상술했던 바와 같이 소련은 불가침 조약을 맺기 전에는 오히려 적극적으로 독일과 맞서고자 안보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 일환으로서 프영소의 협력 촉구하고자 영국과 프랑스에게 세 국가 중 어느 하나라도 독일에게 침략을 당할 시 즉시 3국 모두 독일과의 전쟁에 임한다는 요지의 동맹관계를 제안하는 문서를 영국과 프랑스에게 보내나 영국은 이에 무려 "'6주'"만에 답한다. 어째저째 협상이 이루어지기는 했는데 전쟁이 발발할 시 투입할 수 있는 병력이 120개 사단, 중포 5천여 문, 탱크 9천여 대, 항공기 5천여 대라고 밝히며 그쪽은 어느 정도나 가능하냐고 묻는 소련 측에게 영국은 꼴랑 4개, 심지어 제대로 된 사단은 2개 뿐이며 나머지 2개는 완편까지 시간이 더 걸린다고 밝힌다.
사실 위에 것에 비하면 이 전투기 투입과 관련한 태도는 사소한 것으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스핏파이어를 프랑스 전역에 투입하는 것을 거부한 영국 공군 사령부의 결정으로 인해 이미 파일럿 부족과 정비 미흡, 신형기 부족으로 인해 독일 공군에 비해 질적으로 열세였던 프랑스 공군은 절망적인 수적 열세에 놓였으며, 이는 독일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74]영국 공군이 보유하고 있던 200대의 스핏파이어를 프랑스에 투입하는 것이 프랑스 전역의 결과를 바꾸는 데에는 조금도 기여하지 못했을 것이 확실한 한편, 독일 공군의 작전 환경을 악화시키는 것은 분명히 가능했다.[175]
결국 영국은 1939년 ~ 1940년 내내 프랑스에게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애초에 영국은 독일과 전투를 벌이겠다는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전쟁을 시작했다. 체임벌린 내각에게 있어 전쟁은 실제적인 행동보다는 히틀러가 국제 협약을 어겼다는 실수를 최대한 빨리 깨닫도록 만들 상징적인 행위였을 뿐, 그들은 유혈사태와 피해가 발생하는 것을 최대한 회피하고 싶어했다.
하지만 파리의 달라디에 내각은 영국이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에 동의했을 때, 영국의 이러한 내면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았다. 처칠이 수상이 되었을 때, 그는 영국의 전쟁 수행에 활력을 불어넣었으나, 그 역시 1940년 여름에 영국이 보유한 군사 자원이 얼마나 제한적인 상태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병력의 완전한 투입을 자제했다. 최후의 순간 레노는 영국군이 기꺼이 투입하고자 하는 병력이 얼마나 소규모인가를 알고서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해진다.[176]
13. 그 외
- 프랑스의 항복 직후 수많은 아프리카 출신 흑인 병사들이 포로로 잡혔고 독일군이 이들에게 야만적 행동을 강요하며 선전 활동을 한 후 전부 총살했다는 풍문이 있다.[177] 실제로 프랑스 침공 기간의 독일 주간 뉴스 510~512호를 보면 흑인 프랑스군 포로들을 보도하며 '이것이 자칭 유럽의 자존심이라는 대육군의 현실이다'라고 조롱하는 장면이 잦았다. 프랑스 작가 자크 타르디가 당시 프랑스군 전차병이었다가 전쟁포로가 된 아버지[178]의 경험을 그린 포로수용소라는 만화를 보면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세네갈 출신 흑인 병사들이 독일군에게 잡힌 지 얼마 후 집단으로 총살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고 한다.[179] 게다가 살아남은 흑인 포로들은 다른 프랑스군 포로들과는 달리 유색인종을 독일땅에 들일 수 없다는 이유로 독일의 수용소로 이송하지 않고 프랑스에다가 따로 전용 수용소를 만들어 거기에 가두었다.[180]
- 영국과 프랑스가 방어 대신 공세를 펼쳤다면 제2차 세계 대전이라는 말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많다. 그 정도로 전간기부터 영국과 프랑스도 엄청난 삽질을 해댄 것이다. 또한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하자 동맹인 일본 제국은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손쉽게 점령했고[181] 프랑스가 무너지면서 영국이 유럽에서 홀로 고립되자 대다수가 영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182] 나머지 동남아시아 지역을 꿀꺽 삼키려 하고 이는 태평양 전쟁의 원인이 된다. 그리고 동시에 프랑스 침공 당시에는 중립을 표방하며 나서지 않아왔던 미국이 연합국으로 참전하게 된다.[183]
- 이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 제국 치하의 일본열도와 식민지 조선, 대만, 만주국 등에서는 전쟁을 유럽에서 일어난 난리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상기한 일제의 동남아 침공은 1942년, 즉 1941년 12월 진주만 공습 이후에나 이루어졌고 일본 본토의 국민들이 전쟁을 체감하는 것은 아무리 빨리 잡아도 둘리틀 특공대의 도쿄 폭격 이후로, 실제로는 사이판 섬을 미군이 점령한 이후 B-29 폭격기가 일본 본토를 마구 폭격하기 시작하면서였다. 그래서 프랑스 침공 당시 일본이나 조선의 식자들이 남긴 여러 기록을 보면 전쟁을 남의 일로 여기는 듯한 서술이 상당히 많이 보인다. 물론 이 시점에도 일본군이 침공한 중국 대륙에서는 충칭 대공습, 난징 대학살 등 일본군에 의하여 처참한 전쟁이 진행되고 있었다. 단지 일본 제국 권역의 사람들이 남의 동네 일로 여기고 있었을 뿐이다.
- 프랑스 침공과 점령기는 라디오 방송에도 영향을 주었다. 당시 굴러가고 있던 프랑스의 라디오 방송이 폐국되고 새로 개국되었다가 프랑스가 해방된 뒤 다시 폐국되고 전부 새로 개국됐다. 그래서 라디오 프랑스에 있는 전국구 라디오 방송의 역사가 주변국에 비해 짧고 프랑스 블뢰의 일부 지역국의 역사가 훨씬 더 오래되었다.
- 침공 당시의 독일군이 작전 기간 동안 계속해서 사기와 컨디션을 유지하게 만든 약물이 페르비틴(pervitin)인데, 필로폰으로 악명이 높은 메스암페타민이다.
[1]
이 포위당한 연합군 병력은
됭케르크 철수작전으로 장비들을 전부 버리고 몸만 이끈 채 겨우 탈출에 성공한다.
[2]
프랑스 역사상 희대의 굴욕샷으로 꼽힌다. 좌측의 인물은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장관, 우측의 인물은
조각가
아르노 브레커이다. 히틀러가 에펠탑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려 했을 때 프랑스 측에서 몰래 전기를 끊어놓는 바람에 당시 에펠탑의 꼭대기에 올라가지 못해 프랑스는 점령했어도 에펠탑은 점령하지 못했다는 재밌는 일화가 있다.
[3]
이탈리아의 프랑스 침공 문서로.
[4]
독일 육군 총사령관
[5]
A집단군 사령관
[6]
A집단군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사령관
[7]
제19기갑군단장
[8]
제15기갑군단장
[9]
B 집단군 사령관
[10]
C 집단군 사령관
[11]
제38 군단장
[12]
제2 항공함대 사령관
[13]
제18 군 사령관
[14]
제1 군 사령관
[15]
제7 기갑사단장
[16]
영국 원정군(British Expedinary Forces) 총사령관.
[17]
에스토니아 출신인 제작자의 동유럽식 발음이 영국/미국식 영어에 익숙한 사람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으나, 은근히 간과하기 쉬운 됭케르크 철수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도 상세히 다루고 있는 고로 관심있다면 참고 볼만 하다.
[18]
총 병력은 400만 이상.
[19]
헝가리는 고토 수복을 위해 1940년 11월에 추축국에 가입했고, 루마니아는 독 · 소 양국의 압박에 견디다 못해 추축국에 합류했다. 프랑스 침공 이후, 일본은 독일과 삼국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
[20]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을 제압한 적군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영토 수복과
중유럽 혁명 수출을 목적으로 동유럽에 침공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중흥을 꾀한 폴란드와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루마니아도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틈타 베사라비아를 장악했고, 이 때문에 전간기 내내 소련과 영토 분쟁을 벌였다.
[21]
두망 장군은 프랑스군 서열 40위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최측근이다.
[22]
나머지 12개 사단은 급하게 편제 중인 징집병이라 아직 훈련도 못 끝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10개 사단을 파견했다.
[23]
동유럽과 남유럽을 영국과 소련이 나눠 갖자는 퍼센트 합의가 무산되고, 45년의 대공세를 통해 소련이 유럽의 중부와 동부를 장악하자, 처칠은
언싱커블 작전을 입안했다가 내부 반대로 이를 취소했다. 영 · 소 양국의 관계는 불신과 협력을 반복하며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24]
앞선 영국과 프랑스 대표단과 달리 리벤트로프는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 역시 히틀러만큼 진심이었는데 리벤트로프를 비롯한 독일 협상단을 극진히 대접했다.
[25]
애초에 히틀러와 독일 국방군 수뇌부는
해군의
Z 계획 등 군사력 증강, 군수 공업 시설 건설이 완료되는 1945년 전후를 프랑스 침공 시점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역사적으로 독일의 군수 생산은 연합군의 폭격에 시달리면서도 1944년 가을에 정점을 찍은 바 있다. 1930년대 후반부터 건설했던 군수 공업 시설이 그때야 완전히 돌아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26]
출처: Befehl im widerstreit.Schicksalsstunden der deutschen Armee 1923~1945
[27]
히틀러는 대중적으로 알려진대로 고함치고 날뛰는 성격이 아니라 차분하고 신중한 성격이었다. 다만,
뮌헨 폭동 사건에서처럼 극한 상황에서는 절제력을 잃곤 했으며 대중매체에서 묘사하는 격정적인 모습은 1944년
암살미수 사건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운폴에서 묘사한 미쳐 날뛰는 모습은 그야말로 극한에 처해 정신이 완전히 붕괴했을 때였다.
[28]
출처: 칼 하인츠 프리저 저 "
전격전의 전설(Blitzkrieg-Legende)" 2-1장.
[29]
지도에 몇 가지 오류가 있는데, 큰 오류로
튀르키예가 칠해져 있지만 영불의
식민지도 아니었으며 참전시기도 1945년 2월이다. 또한
아이티도 칠해져 있지만 이미 1804년 프랑스에게서 독립하였고 참전 시기도 1941년 12월이다.
[30]
출처: 전격적의 전설, P50
[31]
안 그래도 할더는 1938년부터 히틀러에 대해 저항했으며, 1939년 11월에는 실제로
쿠데타 직전까지 갔었다. 그러나 할더 본인의 소심함과 더불어 순간적인 판단착오로 쿠데타 계획은 무산되었다. 이때의 쿠데타 멤버 중에 훗날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프랑스에서의 사태를 주도한 슈튈프나겔 장군이 있었고, 할더도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이후 이 1939년의 반란 기도가 발각되어 체포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32]
이때 독일은 있는 군대를 모조리 올인해서 2~3개
집단군을 만들었다.
[33]
Fall이란 말은 영어로 Case라는 뜻. 따라서 원래는 황색 상황이라고 번역되는 것이 직역이지만 대개 황색 작전,
청색 작전(
스탈린그라드 전투),
백색 작전(
폴란드 침공),
녹색 작전(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 등으로 번역되곤 한다. 영어권에서는 Case와 Operation을 구분해서 쓰는데 우리 나라에서는 잘 구분하지 않고 둘 다 작전이라고 부르는 데서 생기는 해프닝. 독일에서는 Fall과 Unternehmen으로 분류한다. 일반적으로 Fall이 좀 더 큰 단위로 쓰인다.
[34]
즉, 중립국인 스위스를 경유해 리옹 방면으로 찔러 들어자는 제안으로 사실 병력이 충분했더라면 이 생각도 나쁜 생각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수비는 기본적으로 동쪽에 치우쳐 있었고, 벨기에와 함께 수비를 하는 입장이라 나눠진 부대의 타격이 제대로만 들어간다면 제법 위협적인 수가 될 수 있었다.
[35]
사실 마지노 선의 건설이 바로 만슈타인이 우려한 것을 유발하기 위한 것이었다. 현대에서 바보 취급받는 마지노선이지만 만슈타인을 비롯한 독일군에게 마지노선은 건설 의도대로 독일군이 해당방면으로 공세하는 것을 극도로 기피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었다.
[36]
앞선 1차 대전 국경 전투 당시 아르덴 고원은 독일제국군의 조공이었다.
[37]
이는 또한 기갑부대가(적어도 구데리안이 생각하기로는) 과도하게 신장된 측면에 대한 보호가 여타 부대 대비 덜 필요했기 때문이다. 공격중인 부대의 측면은 언제나 약점으로서 작용하며 해당 부분에 반격을 당한 공세측은 필연적으로 '공격 중 방어'를 수행해야 한다. 이 때의 공격측은 클라우제비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방자의 이점을 전혀 누리지 못하는 방어 상황에 놓인다. 이것에 대한 위협을 무시할 시 공세는 그대로 절단되며, 이에 대한 우려로 병력을 나누어 잔가지를 뻗기 시작하면 결국 공세 자체의 충격력이 줄어들고야 만다. 최고사령부는 계획 단계 부터, 그리고 기갑군의 돌파 내내 이에 대한 우려가 있었고 실제로 구데리안의 회고록을 보면 최고사령부가 기갑군을 정지시키려는 사유의 태반은 보병부대로 하여금 신장된 측면에 대한 방어를 수행케하기 위해서였다.
[38]
이와 같이 종심이 깊고 크게 호를 그리는 우회 기동의 형태가 낫 같고, 덤으로 낫으로 단숨에 모든 풀을 베어 버리는 것과 같은 효과를 노렸다는 점 때문에 이 작전 계획을 낫질에 비유한 것이 유명해졌다. 그런데 앞에서 멋지게 독일어로 쓰긴 했지만, 사실 원래 낫질 비유를 처음 쓴 건
윈스턴 처칠 영국 수상이고, 당연히 원래는 영어 표현(Sickle Cut)이었다.
[39]
당시 독일군 편제상 참모총장이 해당 군의 최고 수뇌는 아니었다. 육군총사령관이 있었고 그 밑에 4개의 국과 육군참모본부가 편성되어 있었다. 육군참모총장은 그중 참모본부의 수뇌.
[40]
원래 만슈타인의 직전 보직은 육군참모본부 1부장이는데, 서열상 다음 참모총장이 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좌천된 것에는 사료별로 그 이유를 다르게 설명한다. 만슈타인 회고록에서 만슈타인 본인은
베르너 폰 프리치가 숙청된 후 그와의 친분 때문에 좌천되었다고 설명하며, 만슈타인 평전에서는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루트비히 베크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었다고 설명한다. 베크는
그의 최후에서 보듯 나치를 굉장히 싫어하던 인물이었는데, 친나치 군인이었던 만슈타인 또한 싫어했다고 한다.
[41]
참모장에서 군단장이니 형식상으로는 승진이지만, 38군단은 서부전선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동프로이센에 있었고 막 편성 중인 신설 부대인지라 보직에서 해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42]
여담으로 이 직전 만슈타인의 어느 참모장교가 38군단 예하의 사단참모로 전출되는 것을 보고 만슈타인이 해당 장교에게 "앞으로 큰 싸움이 있을 텐데 후방으로 가면 공훈은 언제 세우나?"하고 농 섞인 위로를 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며칠 뒤에 자신이 바로 그 군단의 군단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43]
원래 목적지는 회의 참석을 위한 베를린이었으나 악천후로 비상 착륙을 했는데 하필이면 벨기에 영내였다.
[44]
당연히 히틀러는 이 소식을 듣고 노발대발했다고 전해진다.
[45]
여담으로 이 소식을 무려 적국의 선왕이었던
에드워드 8세가 독일에 알려주었다고 한다.!!
[46]
역설적으로 이 사건은 독일군에게 악재만은 아니었는데 독일군의 기동계획을 입수한 연합군이 방어 태세에 들어가며 연합군 역시 독일군의 주공을 베네룩스 일대로 예상하고 있으며 프랑스 본토로 넘어오기 전 베네룩스에서 독일군을 저지하고자 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47]
특히 할더와 같은 고급 참모장교는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대안이라 해도 일단은 검토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
[48]
훗날 트레슈코프는 검은 오케스트라단에 가입하여 히틀러를 암살하고자 시도하였고 트레슈코프와 검은 오케스트라단의 암살 기도로 슈문트 대장은 중상을 입고 합병증으로 사망했고 트레슈코프는 암살 시도가 실패한 것으로 드러나자 수류탄으로 자살했다.
[49]
이는 기갑군의 폭주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50]
결국 이 기갑군 개념은
바르바로사 작전까지도 현실화되지 못했고, 1941년 10월에야 처음으로 창건된다.
[51]
Panzergruppe 1, 일명 클라이스트 기갑집단
[52]
"His most spectacular victory, thus sowed the seeds of his ultimate defeat."
[53]
특히 최초로 근대적 징병제를 도입한 나폴레옹 시절엔 이런 특성이 절정에 달했다. 당시 프랑스는 전근대 유럽에서 유일하게 100만이 넘는 병력을 뽑아내며 여러 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치렀고 거뜬히 감당해냈다.
[54]
독일이 프랑스 인구를 추월한 건 비교적 최근인 1871년이다. 러시아의 경우 1814년 프랑스 인구를 추월했다. 허나 비록 기술의 발달로 평균수명이 늘어서 그렇기는 해도 프랑스 혁명 때부터 프랑스 제3공화국 때 온갖 수많은 혁명들, 봉기들을 일으켰다가 진압당해 사망한 청년들, 그걸 진압하다가 죽은 정부군들, 제3자지만 같이 휘말려 죽은 주변인들, 이런 식의 혼란으로 산업시설이 박살나거나 농경지가 훼손되어 굶어죽은 농민들 등 불필요한 인력 손실이 많아 1864년부터 고령화 사회에 접어들었다. 그래도 내부는 그렇게 곪아 있어도 아직 표면적으로는 병력이 많았다는 것.
[55]
나머지 하나는
이탈리아.
[56]
중국군은 이미
일본군과
박터지게 싸우는 중이었다. 그나마도 중일전쟁 개전 시점에서 중국군은 180개 사단의 규모였으며 중국군 1개 사단은 1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편제였기 때문에 중소 군벌을 합쳐도 의외로 중국군은 1937년 시점에서 의외로 200만 좀 넘는 수준이었으며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400만 정도로 늘어난다. 즉 1937~1939년 시점에 비하면 오히려 프랑스가 더 많았다.
[57]
1941년 시점에서 303개 사단, 22개 독립여단, 총 550만 명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58]
대다수는 그나마 개전 초반이었으므로 장교나 고급 부사관 신분 예비역이긴 했으나
[59]
본토 병력은 130만여 명 사망, 350만여 명 부상.
[60]
당시 독일은 세계 3위, 프랑스는 5위의 경제대국이었다.
[61]
예로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7년 전쟁에서 서쪽으로는 프랑스, 남쪽으로는 오스트리아, 동쪽으로는 러시아, 북쪽으로는 스웨덴과 4면 전쟁을 벌이다가 멸망할 뻔 했고 1차 대전 때도 동부전선으로 전력이 분산되며 마른강 패배 이후 독일군 전선 고착에 악영향을 미쳤다
[62]
국제 정치에서 이를 소위 '연루의 위험'이라고 부른다. 이와 반대되는 개념은 '방기의 위험'이다.
[63]
안 그래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는 공세를 위해 벨기에 방면을 비웠다가 단 6주 만에 전쟁에서 질 뻔한 역사가 있다.
[64]
프랑스 침공전에서 독일 전차 1대를 격파하고 포로로 잡혔다. 다만 이때 전과는 R39로 올렸다.
[65]
독일 A집단군의 실제 침투 경로이다.
[66]
이 마스 강의 방어선은 독일군 상층부도 파악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만슈타인의 계획이 나왔을 때 할더가 '이색히 돌아도 단단히 돌았구나'라는 격렬한 반응을 보이면서 바로 묻어버린 것이다. 프랑스와 독일의 군 상층부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지리적 유불리와 유사시 침공 루트에 대해 몇십 년 동안 준비해왔기 때문에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마스 강의 주요 도시인 스당은 앞선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로이센군이 프랑스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며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은 곳이었기 때문에 마스 강으로의 돌파가 얼마나 힘든지 독일군은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67]
10월 24일 가믈랭이 내린 작전명령에 따르면 프랑스군의 방어 중점은 에스코 계획에 따르는 것이었고, 딜 계획은 어디까지나 독일군 공격 이전에 방어진지를 점령할 여유가 있다는 전제 하에서 실행할 예정이었다.
[68]
사실 벨기에로서는 프랑스에 협력하지 않으면 1차 대전 때처럼 최후의 항전거점으로 방어선이 구축된 안트베르펜으로 전군을 철수시켜 독일군의 우회기동로를 열어주면서 자국 영토의 70% 이상을 독일군의 점령지로 내줄 수밖에 없었으므로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1차 대전 때 독일군은 사소한 저항이 있었다는 핑계를 대고 벨기에에서
도시에 불을 지르고 아이를 포함한 민간인들에게 무차별 발포하는 일을 숱하게 저지른 바 있다. 이 문제는 당시 전 세계에 큰 충격을 날렸다. 물론 대전기 동안 이보다 더 끔찍한 사건은 많았지만 잔혹성의 수위 자체는 유대인 등의
인종차별 문제를 제외하면 절대 낮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벨기에군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항전할 수밖에 없었다.
[69]
한편으로 독일 역시 벨기에에게 영토의 전술, 전략적 가치 이외의 일로 이를 갈고 있었다. 과거 루르 공업지대를 프랑스와 벨기에가 강제 점령했던 과거 때문에 독일 내부에서도 벨기에를 손봐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다.
[70]
딜 계획에 따른 방어선은 에스코 계획이나 프-벨 국경선보다 약 7~80km 가량이 짧았다.
[71]
이 두 개의 제파에는 당시 독일군이 보유한 10개 기갑사단 중 9개가 투입되며,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사실상 이 사단도 네덜란드 제압만 끝나면 곧장 딜 방어선에 투입된다고 봐야 했다.
[72]
독일군은 이와 정반대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었다. 몰트케의 금언이 이를 가리키는데, 'Kein Plan überlebt die erste Feindberührung(적과의 첫 접촉 이후까지 살아남는 계획은 없다).'
[73]
2차 세계대전기
프랑스군의 통신 체계에 대한 인식은 이전 시대의 기준으로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심히 낮았다. 이것은 비단 사령부의 지휘 체계 뿐 아니라 무기 개발에도 영향을 미쳤다. 일례로 프랑스 전차들은 하드웨어 성능에선 독일 전차를 확실히 앞섰지만, 무전기의 부재로 실전에서는 따로 놀다가 모조리 각개격파당하고 말았다. 결국 이러한 통신체계 경시로 인해 프랑스군은 독일군보다 훨씬 많은 병력과 장비를 가지고도 지휘 통신 체계의 혼란으로 하위 부대의 현 상태를 실시간으로 파악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를 낳았고,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패전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
[74]
결과적으로 희생되었다는 것이지 프랑스가 동맹 체결 시점부터 체코, 폴란드가 침공당하는 것을 방기할 생각은 아니었다.
[75]
이 중 2개 사단은 아직 완편이 아닌 상태였다.
[76]
1차대전 당시 영국군은 일관되게 프랑스 제5군의 측면을 엄호해야 했지만, 영국군은 결국 1914년 9월
마른 전투 때까지 충분한 엄호를 제공하지 못한 채 후퇴를 거듭했다. 사실 그때 영국군이 프랑스군처럼 적극적으로 싸웠다면 더 일찍 프랑스가 망했겠지만, 그래도 영국이 자군의 안위을 도모하다가 동맹의 신의를 저버릴 뻔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77]
41기갑군단
[78]
아이러니지만 이런 상황은 1944년
아르덴 대공세 때도 발생했으며, 여기서 독일군은 사실상 좌절하고 만다. 차이점이라면 1940년은 차량이고 병력이고 너무 많아서 막혔던 것이고, 1944년엔 병력 수는 비교적 적당했지만 차량이 너무 무거워서 도로가 작살나고, 낮에는 연합군 전폭기들에게 사냥당하고, 결정적으로 연료가 없었다.
[79]
야간에 아르덴 숲을 정찰한 프랑스 정찰기가 전차와 트럭으로 뒤엉킨 채 끝없는 빛의 띠로 이어지는 독일군의 교통정체를 발견하고 급히 상부에 보고했으나 '날이 밝으면 다시 확인해 보라'라는 맥빠진 답만 돌아왔을 정도였다. 애초에 프랑스군 수뇌부는 아르덴 돌파를 쥘 베른의 소설에서나 가능한 상상력의 산물이라 여겼다.
[80]
"독일 공군은 1만 대 이상의 전술기를 보유하고 있다"라고 운운하는 등 실제 규모의 3배 이상으로 판단했다는 징후가 당시 항공 기술 관련 언론 보도에서 종종 보인다.
[81]
괴벨스 선전부의 고의적 누락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프랑스 방면으로의 공격은 보도하지 않았다.
[82]
독일군 공수부대가 로테르담, 헤이그, 암스트레담을 따라 종적으로 투입된 것과 맨 아래 벨기에의 에반 에마엘 요새로 강하 한 것을 볼수 있다.
[83]
독일 해군이 영국 해군에게 밀리면서 육군이 고전을 펼치고 있을 때 팔쉬름예거가 노르웨이 솔라 공항으로 공수하여 당당히 퍼레이드를 하는 공을 세웠다.
[84]
기존안은 이름 처럼 딜 강을 낀 하천 방어선이었으나 프랑스 침공이 있기 전인 1939-1940년 겨울, 가믈랭은 네덜란드의 도시인 브레다까지 진출하여 네덜란드에 대한 방위까지 겸하는 변형을 기했다. 이를 'Breda variant' 라고 부르는데, 이를 위해 프랑스군의 가장 강력한 전략 예비대인 7군이 제1집단군의 연안부 방면에 추가되었다.
[85]
쉽게 말해 강의 경로가 굽은 지역에서의 바깥쪽 하안선의 주변 일대를 뜻한다.
[86]
중앙에 배치된 주공 독일군 1기갑사단 예하 1보병연대와 그로스도이칠란트 보병연대가 마스강을 도하하여 프랑스 55사단 방어선 깊숙히 돌파구를 형성한 것을 볼 수 있다.
[87]
대체로 이런 공격 준비 사격 계열의 폭격은 일거에 대규모의 화력을 동원해 방어선을 분쇄하는 식인데, 구데리안은 이러한 형식의 공습의 효과에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아무리 큰 규모의 공습이어도 강변의 포대를 포함한 모든 저항을 무력화시키지는 못하고, 공습의 충격에서 회복한 방어군은 곧 도하를 필사적으로 저지하려들 것이 뻔했다. 따라서 구데리안은 도하 시작 시점 부터 지속적으로 공습을 가하는 방식을 구상한다. 도하를 저지하기 위해 포반들은 불을 뿜을 것이고 이렇게 노출된 위치에 폭격을 가해 포병들이 제 구실을 못하게 만들 심산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합동 공격을 맡은 비행군단의 뢰르처 장군과 논의 했는데, 폰 클라이스트 장군은 공군의 슈페를레 장군과 결정한 바대로 일회적인 집중 폭격을 명령했다. 이에 구데리안은 반론을 제기하며 그의 원래의 작전의 실행을 요청했으나 끝내 반려되었고, 도하 개시 시점인 16시 정각, 긴장한 채로 공군의 공격을 예의주시한다. 공습은 기존에 뢰르처 장군과 논의한 소규모의 공습이었고, 포병을 효과적으로 마비시키는 폭격에 힘입어 도하는 성공한다. 그날 밤 전화로 물어보니 슈페를레의 명령이 너무 늦게 도달해 폭격기 부대의 배치를 조정할 수 없어 기존안을 강행했다는 것.
[88]
이후 이 사태의 원인 규명을 위한 조사 위원회에서 당시 55보병사단의 장교와 병사들은 "우리가 전차를 보았다! 거짓말이 아니다!"라며 팔딱댔지만... 독일군 기갑부대는 와해 뒤 12시간 가까이 지나서야 도착했음이 밝혀졌고, 보고서들은 이 사태를 집단
환각 증상으로 평가했다. 이 사례는
무도병과 함께 심리학계에서 대표적인 집단 환각 사례로 자주 거론하는 사례이다.
[89]
이 시점에서 독일의 폴란드 침공에서의 전훈이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기간 동안 공세지점에 공군력을 집중 배치시키는 전략을 펼쳤고 나름 1차 대전 에이스 출신이었던 괴링의 노력과 앞선 참전 경험으로 독일 전투기 조종사들의 수준은 수적 우세를 살리기에 충분했다. 또한 20mm 대공포를 기반으로 한 방공부대들 역시 앞선 침공의 경험 덕에 상당히 괜찮은 탄막을 형성하며 연합군 공군의 작전수행을 효과적으로 방해했다
[90]
더 희극이 된 것은 역습 부대의 우익은 대규모 탈영병의 물결에 휘말려서 지체되는 중이었는데 상급 부대 명령을 수령하기 위해 사단 지휘소로 이동하던 연대장 모네 중령이 탈영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것. 근데 모네 중령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 경험이 있는 전쟁 영웅 출신이었다. 심지어 모네 중령은 이걸 빌미로 중령 계급을 박탈당하고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 명단에서 제명되기까지 했다.
[91]
무시했다는 표현은 곡해가 있는 것이 결과적으로 구데리안은 후술할 요충지 스톤(Stonne)의 선점으로 공세적인 측면 방어를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만슈타인이 작전 초안에서 대략적으로 제시한 개념을 구데리안이 현실로 옮긴 셈. 다만 그가 자신의 회고록에도 적었다시피 그는 기갑군이 타 병과에 비해 공세중 측면으로부터의 위협에 보다 안전하다고 믿었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그의 신속한 진격과 관련하여 상층부와 갈등을 빚은 부분이 주로 이것이었는데, 구데리안이 측면에 대한 방비를 하는 것보다 빠른 기동과 연속적인 전투를 통한 돌파를 중시한 것과 달리 상층부는 보병부대로 하여금 기갑군의 측면을 보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92]
샤르 B1 bis 전차는 독일군의 37mm
PaK 36
대전차포로는 거의 난공불락에 가까운 대상이었다.
[93]
2개 전차 중대의 공격으로 방어를 맡고 있던 그로스도이칠란트 대전차중대는 궤멸된 상황이었기에 그냥 밀고 들어가면 독일군은 끝장이었다.
[94]
그 외 2보병사단은 5월 14일, 8기갑사단은 구데리안이 이미 아르덴 운하 서쪽까지 진출한 5월 16일에야 마스 강변에 도착할 수 있었다.
[95]
이때 롬멜이 직접 도하 작전을 진두 지휘했다
[96]
이 와중에 5기갑사단장 하르틀리프와 롬멜 사이에 교량 부설용 자재를 놓고 갈등이 벌어진다. 자세한 내용은
에르빈 롬멜 문서 참조.
[97]
만약 1흉갑기병사단이 조금만 더 기동력을 발휘했다면
롬멜이 이끄는 7기갑사단의 기갑부대를 모조리 쓸어버릴 수 있는 기회가 이 시점에 주어졌다. 1흉갑기병사단이 숙영지를 펼친 곳에서 고작 5km 떨어진 곳에 7기갑사단의 전차연대가 숙영지를 짰던 것이다.
[98]
구데리안의 19기갑군단은 막 스당일대에 도착, 라인하르트의 41기갑군단 전체가 아직도 아르덴 삼림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점.
[99]
기병군단 예하에 있던 AMR-ZT-63의 전투력은 1호/2호 전차와 비등한 수준이었고, 90여 대의 파나르 178 장갑차는 4호 전차를 격파할 수 있는 25mm 주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100]
이 발언이 상정하는 상황을 해석하면 곧 기갑부대가 더욱 길게 측면을 노출하게 된다는 것은 적의 방어선을 돌파해 더욱 깊게 진격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후 독일군의 기갑부대가 공세적 상황에서는 적의 방어선을 뚫고, 깊게 침투한 다음 포위망을 형성해 섬멸하는 것으로 유명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에게 있어 더 깊은 돌파는 곧 더 큰 포위망을, 나아가 더 큰 섬멸 전과를 의미했던 것이다.
[101]
12군 사령관 리스트나 A집단군 사령관 룬트슈테트가 구데리안으로 대표되는 기갑부대의 고속 전진을 달갑게 여겼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102]
과거 1914년 독일군은 국경전투에서 프랑스군을 상대로 크게 승리하며 빠르게 파리로 접근했지만 프랑스가 모든 교통수단을 동원해 마른 강에서 독일군 주력군을 격파하며 전선을 고착화 시키는데 성공했는데 1차 대전 참전자 출신이었던 히틀러가 할더의 말마따라 오히려 강력한 보병 방어선을 구축하여 기갑군단을 막아내게 될 경우 전선이 고착화 될 것을 과할 정도로 걱정했다.
[103]
전술했듯이 할더는 작전 계획에 있어서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타입의 전형적인 참모부 장교지 룬트슈테트, 보크 등과 같은 보수파 장교는 아니었다. 만슈타인의 계획안에 대해 그가 가졌던 의문 부호와 불안점들은 해소된 상황에서 그는 공황상태가 온 프랑스군을 더 많이 더 신속하게 포위 격멸하는 계획을 세운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104]
사실 롬멜은 본인이 저술한 교범에서 기동력을 매우 강조하는 등, 원래 기동전에 밝은 사람이었다.
[105]
보다 엄밀히 따지자면 '지금 공세를 개시하라'는 작전명령이라기보단 '공세를 준비하라'는 명령에 가까웠다.
[106]
귀환 도중 3호 전차는 고장이 났다.
[107]
그리고 명령 취소 뒤 베이강이 한 일은 신임 내무장관 예방, 벨기에로 직접 날아가서 군 사령관/벨기에 국왕 예방이었다.
[108]
참고로 스톤(Stonne) 전투에서 B1 전차 1대를 이끌고 독일군 전차 13대를 격파한 피에르 비요트가 이 사람의 아들이다.
[109]
이 와중에 아이언사이드가 역습에 소극적인 비요트의 멱살을 잡기까지 했다. 본래 아이언사이드의 목적은 고트로 하여금 프랑스군과 함께 아미엥 방면으로 반격을 가해 후퇴하는 거였으나, 고트의 답변은 영국 원정군을 포함한 1집단군 사령관 비요트가 8일간 아무 명령도 내리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이에 대한 아이언사이드의 반응은... 한편 이 꼴을 접한
막심 베이강은 아이언사이드의 따귀를 때리고 싶었다고 적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110]
한편으로 이 전투는 정신없이 진격하던 최전선의 롬멜과 7기갑사단 뿐만 아니라 독일군 수뇌부에게 큰 충격을 주었고, 후술할 됭게르크 철수가 발생하는데 영향을 미친다.
[111]
총통의 경호대인 무장친위대 그것도 토텐코프가 패퇴했다는 것에 의문이 들 수 있는데 이 당시 무장 친위대 사단들은 훈련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무장친위대 사단들이 국방군보다 좋은 기갑장비를 배속받고 전투력이 올라간 것은 1943년에 이르러서의 일이었다.
[112]
이는 이틀전 비요트 장군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발생한 지휘공백, 혼란이 원인이었다.
[113]
어처구니 없는 건 룬트슈테트는 훗날 자신의 자서전에 정지명령의 책임을 히틀러에게 물었다. 하지만 히틀러의 정지명령은 전적으로 클루게와 룬트슈테트의 간격 조정을 위한 정지명령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14]
1944년 12월 기준. 침공 당시의 신분은 중령이었다.
[115]
됭케르크철수가 실패했다면이라는 전제는 2차 대전을 연구하는 군사학자들과 밀덕들 사이에서 여전히 열띤 토론을 부르는 존재다. 당시 영국은 1938년부터 공군을 위주로 차차 재무장을 시작했던 터라 육군이 매우 약했고 프랑스에 보내진 20만명의 원정군이 영국 육군의 핵심이자 사실상 전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을 다 섬멸했다면 영국은 독일과 협상을 선택했을 것이라는 주장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홈 네이비로 독일 상륙군을 원천 봉쇄했을 것이고 전쟁의 흐름이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립하고 있다. 물론 주류학계는 영국이 지중해와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선전하기 힘들었겠지만 강력한 홈네이비와 왕립 공군력으로 독일의 영국 침공을 봉쇄했을 것이라는 의견에 손을 들어준다. 다만 저 30만 명은 영국의 숙련된 장교와 부사관, 숙련병들이 몰려 있었던 정예라서 저들을 상실한 상황에서 육성한 군대는 실로 한심하기 짝이 없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원 역사가 병장 10명에게 신병 100명을 던져준 상황이었다면 영국 원정군을 상실한 상황에서는 병장 1명에게 신병 300명을 던져주는 상황이니...
[116]
당시 퍼레이드를 벌인 제30사단은
에투알 개선문 아래를 지나가지 않았다.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 프랑스군의 무명전사자 묘역이 개선문 아래에 있었기 때문. 적과 아군을 떠나 전사자를 묻은 묘지이기 때문에 독일군도 그에 맞게 예의를 갖춘 것으로, 이 퍼레이드도 파리 시민들 앞에서 제30사단장 폰 브리젠 소장을 비롯한
독일 국방군 장교단이 개선문 아래 무명전사자 묘역을 참배한 후에야 시작됐다. 이는 전후
샤를 드골과 미군의 파리 탈환 개선식 때도 똑같이 진행되었다.
[117]
일례로 호랑이 작전 중 마지노 선의 북단에서 벌어진 8시간 동안의 전투에서 독일군은 297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이 공세로 프랑스군에 발생한 사상자는 2명에 불과했다.
[118]
이 시점에 구데리안이 지휘하던 19기갑군단이 기갑집단으로 재편되었다.
전격전의 전설에는 기갑군으로 승격되었다고 했지만 이는 책의 실수로, 독일군은
독소전쟁 이전에 기갑군을 창설한 바 없다.
[119]
Deutschland siegt auf allen fronten: "독일은 모든 전선에서 승리한다" 라는 뜻이다.
[120]
35분 08초부터 시작되는 에투알 개선문을 배경으로 포슈 거리를 행진하는 독일군 앞에서 말을 타고 손을 흔들며 사열하는 장교가 바로 30사단장 쿠르트 폰 브리젠 소장이다. 연주되는 행진곡은 Helenmarsch 이다. 참고로 Helenmarsch는 군대 행진곡용으로 작곡된 곡이 아니라 크리스마스 파티 왈츠로 작곡된 곡이다(...)
[121]
37분 03초부터 콩피에뉴 휴전 협정 협상 보도가 시작된다. 시작과 동시에 독일군기가 걸리는 기념물이 프랑스의 승전을 기념하는 알자스-로렌 승전비이다.
[122]
여기서 자세히 들어보면 어떤 목소리 같은 잡음이 들리는데 이는 나치 독일이 프랑스 국영방송의
주파수를 탈취하기 위해 일부러 방해하는 소리이다. 심지어 더 방해하려고 영상의 0:20 쯤에
미국 포병대가
를 틀기까지 한다 근데 이래도 너무 잘들린다
[123]
출처:이안 커쇼 히틀러 하편
[124]
선전포고 자체는 6월 10일에 이루어졌지만 전쟁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았음을 이탈리아군 수뇌부가 잘 알고 있었기에 병력 투입이 늦어졌다.
[125]
쿠르트 폰 브리젠 소장은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침공에서의 공으로 진급하여 52군단장으로 독소전쟁에 참전한다. 1941년 11월 20일 도네츠에서 소련공군의 공습으로 독일군 군단장 중 제일 첫 번째로 전사했다.
[126]
물론 아주 엄밀히 말하면 독일은 영국과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지도 선제공격을 가하지도 않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와의 군사협약에 따라 독일에 전쟁을 먼저 선포했고 독일영내로 선제 진군한쪽도 영국과 프랑스쪽이긴 했다. 실제로 히틀러 역시 폴란드 침공에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방위조약을 이행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선전포고에 히틀러는 날뛰며 이를 막지못한 리벤트로프를 비난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절대 넘지말라고 경고해둔 폴란드를 억지로 구실을 조작하여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한 것은 나치 독일이니 히틀러가 할 말은 아니다.
[127]
이 때문에 스탈린은 만약 프랑스가 그렇게 무력하게 쓰러지지만 않았다면 독소전쟁 때 소련을 유린했던 독일군 소유의 프랑스 무기들이 없었을 것이라면서 제대로 싸우지 않고 나치에 무기만 조공한 프랑스도 추축국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이런 주장은 영국과 미국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 저런 식으로 따지면 바르바로사 작전 이전까지 독일과 붙어서 침략전쟁을 벌이고 독일에 물자를 퍼주고 불가침조약까지 맺은 소련이야말로 추축국에 가깝다.
[128]
당시 히틀러가 보낸 전문은 현재 대략 그 내용이 어떠하였는지는 두루뭉술하게만 전해지고 있다.
[129]
잘 알려졌다시피 1차 대전 패전의 주역들이 그득했던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프랑스와 영국이 가짜 전쟁으로 적극적인 공세가 아닌 수비적 태세를 보이자 히틀러의 프랑스 공격의도를 좌절시킬 엉터리 작전이나 심지어 쿠데타까지 계획했을 정도로 회의적이었다.
[130]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을 6일 만에 털어버리고 베를린까지 점령했다.
[131]
나치당을 위주로 다루지 않은 것에 삐진 괴벨스는 육군 최고 사령부에서 제작한 이 영화의 초연을 지연시키며 방해공작을 펼쳤다고 한다. 괴벨스가 아닌 육군 최고사령부에서 직접 주도한 영화라 당시 괴벨스 선전부에서 제작한 타 선전 영화들 처럼 프랑스군을 깎아내리며 국방군을 조명하기보단 프랑스군의 분전을 그대로 반영하여 국방군의 공을 더 강조하였다.
[132]
대부분 전투 장면은 1940년 야전 선전부에서 독일 주간 평론 보도용으로 촬영한 장면을 사용하였지만 프랑스 포로들과 독일군을 동원하여 연출한 장면도 끼어있다. 재연 장면 촬영 당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을 매우 좋아했던 에르빈 롬멜이 앞장서서 도왔다고 전해진다.하지만 영화 속 에르빈 롬멜 씬은 1초도 안된다
[133]
영화 초반부 복무신조를 제창하는 국방군 병사들을 시작으로 독일은 평화롭게 살며 번영을 꿈꾸어왔지만 식민지 지키기에 혈안이 된 영국과 프랑스로 인해 1차 대전을 치루게 되었고 치욕스러운 패배로 혼돈에 빠진 독일을 히틀러가 구원했다고 강조한다. 이후 폴란드 침공의 당위성을 강조하는데 히틀러가 제안했던 단치히 회랑 반환을 조명하며 독일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지만 영국의 전쟁 선동을 믿은 폴란드 정권이 독일의 요청을 거부하고 선제 공격을 하였다며 2차 대전 시작의 책임을 영국과 폴란드로 떠넘긴다. 이후 본격적인 프랑스 침공을 다루는데 이른바 낫질 작전의 계획을 모두 총통의 혜안에서 나온 것이라고 시종일관 강조한다.
[134]
아주 틀린 건 아니다. 모험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그 모험을 통해 무엇을 얻을지 정도는 가뿐하게 내다보는 사람만이 감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히틀러는 정치적인 역량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타고났으며, 정치에서 협상이나 교섭을 할 때 벼랑 끝 전술은
제법 효과가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 대승리 때문에 전쟁은 정치와 다른 논리로 돌아간다는 것을 히틀러는 몰랐다.
[135]
비록 러시아 영토로 깊숙히 진군하진 않았지만 독일군은 거진 러시아군에게 승리를 거두었고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의 유럽 영토 절반을 뜯어냈었다.
[136]
또한 이 작전은 프랑스보다는 영국과 영연방이 중심이 된 철수작전이었다. 그러나 됭케르크가 실패했다면 영 육군 정규병과 소수인 영연방군 병력까지 잃어 아프리카를 비롯한 비유럽 전장까지 손쉽게 내어줬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137]
실제로 독일은 1942년, 북아프리카 전황이 뭔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기 시작하자 2차 콩피에뉴 휴전 협정을 위반하고 비시 프랑스 해군을 탈취하려 시도하였으니 처칠의 시각은 정확했다.
[138]
이 가능성은 결국 독일이 소련에게
선전포고조차 하지 않고 냅다 쳐들어오면서 현실화되었다.
[139]
이것마저도 연합국이 특별히 선물해준 것이 아니라 신생 유고와의 타협으로 얻은 것이다.
[140]
이렇게 그나마 남아 있던 해군을 모두 잃어버린 프랑스는 실질적인 통제 수단을 잃어버려 전후에는 대부분의 식민지를 잃게 된다.
[141]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앤서니 이든이 캐터펄트 작전 실시이후 국왕 조지 6세를 알현한 자리에서 '이제 우리 곁에 친구가 없다'라고 고했다고 전해진다.
[142]
이때 상륙작전 중 비시 프랑스군의 기관총 세례에 겁을 먹은 한 미군이 울고 있자 패튼이 그를 구타하며 욕설을 퍼부어 문제가 되기도 했다.
[143]
정확히는 임시정부 선거에서 제1당까지 차지했는데도 미국의 압력으로 내각에서 추방당했다. 물론 연정에서만 배제되었지 제4공화국 내내 줄곧 제1당을 차지했지만.
[144]
당장 독일군에서도 프랑스에서 3번 싸우는 것보다 소련에서 1번 싸우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왔다.
[145]
다만 이는 식민지를 포함하는 "영토"를 기준으로 할 때이다. 본토만 기준으로 한다면 프랑스는 저 시점에서 국토의 절반 가까이를 독일에게 점령당한 후였으며, 비슷하게 국토의 절반 이상이 점령당했던
한국 전쟁과는 다르게 뒹케르크 철수 작전으로 외부에서 올 지원군도, 타개 할 작전도 없었다는 차이점이 있었다.
[146]
만약 모스크바 전투에 패하고 모스크바가 독일에게 넘어갔다면 소련도 프랑스의 전철을 밟을 확률이 높았다. 오히려 소련은 파리보다도 각종 물자 생산원 및 철도시설이 모스크바에 집중되어 있어 만약 점령되면 심리적 효과뿐 아니라 실질적 전력도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는 판국이었다.
[147]
독일군이 모스크바에서 30km 떨어져 있는
힘키에 도착했던 순간에도 스탈린과 소련 수뇌부는 크렘린 궁을 지키고 있었다. 이러한 점이 결합되어 프랑스 침공때보다 독일군은 경이로운 전공을 세우며 소련의 영토 깊숙히 진입했지만 긴 종심과 기동전 특유의 약점인 기동부대와 후속 부대간의 간격사이를 위협하는 소련군을 정리하는데 시간을 보내야했고 소련군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 나머지 월동장비를 갖추지도 않아 전쟁이 겨울까지 넘어가게 되자 소련군의 강력한 저항에 주저앉고 만다. 다만 유사시를 대비해 대부분의 정부 기관은 후방의
쿠이비셰프로 옮겼다.
[148]
이때 독일군이 정예사단을 차출하면서 나르비크의 독일군 방어선이 약화되었고 클로드 오킨렉의 영국군과 노르웨이군은 반격을 가해 5월 27일 독일군을 몰아내고 나르비크를 탈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를 바탕으로한 영화가 2022년 12월 25일 개봉한 '나르비크'이다.
[149]
참고
[150]
그도 그럴 게 영국 입장에서는 이것보다
프랑스를 놀려먹을 만한 적절한 소재가 없는데다 프랑스와는 달리 영국은 끝까지 본토를 지키며 싸웠다는 점에서 처지가 대조되기도 하며, 독일도 2차 대전 이슈에 대해선 꿀리는 입장이긴 하지만 프랑스를 굴복시킨 전적만큼은 확실하니 다른 연합국들은 몰라도 프랑스에게는 할 말이 있는 셈이다.
[151]
물론 위에서 언급했지만 사실 프랑스는 굉장히 열심히 싸웠다. 6주 간의 전쟁 동안 10만 명이 전사했으며 뒹케르크 철수 작전 때도 외곽을 방어하던 프랑스군이 뒤늦은 독일군의 공세를 필사적으로 방어하며 영국군과 벨기에군의 철수를 도와주었다. 또한 1944년 6월 6일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규모는 작았지만 자유 프랑스군은 자유 폴란드군 못지 않게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증오가 너무 심했던 나머지 서방 연합군 중 독일에 대한 민간인 전쟁범죄율이 가장 높았던 것도 프랑스군이었다. 물론
독소전쟁으로 독일에게 점령당한 국토 전체가 쑥대밭이 돼서 프랑스 이상으로 독일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에 불타던 소련군 수준은 아니었지만.
[152]
미국과 소련도
피그만 침공이나
겨울전쟁 같은 졸전을 벌였지만 규모가 작은지라 그다지 놀림받지 않는다. 프랑스도
병인양요,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같이 군사적으로 여러 삽질을 벌인 적이 있지만 그 임팩트와 영향력이 한참 떨어진다.
[153]
이는 월드컵과 같은 세계 스포츠 대회에서 굴지의 강팀이 허무하게 참패했을 때 조롱을 더욱 심하게 받는 것과 같다. 대표적으로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에서 당시 최강으로 명성이 높았던 독일이 한국에게 0:2으로 참패하여 전 세계 축구팬들의 영원한 놀림감이 된
카잔의 기적이 있다.
[154]
이 패배로 인해 프랑스의 위신은 급락했고, 군대도 경제도 망가진 현실과 별개로 강한 프랑스를 원하는 강경론으로 베트남 전쟁(여기서도 그나마 주요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체적인 전황에서 훗날 미국의 베트남과 아프간 전쟁처럼 피해가 누적되었고 전후의 경제사정이 악화되어 철수한 타 식민재국들과 달리 상호간 만명단위의 병력을 동원했던 대규모 전투인
디엔비엔푸 전투에서 정예병력이었던 그 외인부대가 박살나는 차원이 다른 굴욕을 겪었다.
아도와 전투에서 패배했던 그 이탈리아 군도 엄연히 2선급 부대였던 아스카리와 에리트리아 주둔군이 패배한 거였다!), 알제리 전쟁에서도 패전하며 패배->위신 하락->위신 회복을 위한 전쟁->패배...의 악순환을 겪어 제4공화국이 무너지고야 만다.
[155]
김용빈-제2차세계대전 시 프랑스의 위기관리 및 조치 실패원인 (2015) 군사연구 제141집. P.215
[156]
독일의 라인란트 진주 당시 프랑스는 영국에게 독일과 무력 충돌시 지원 여부를 타진했지만 영국의 반응은 '나 느그 전쟁해도 안 도와줄거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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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디에 내각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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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빈-제2차세계대전 시 프랑스의 위기관리 및 조치 실패원인 (2015) 군사연구 제141집. P.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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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빈-제2차세계대전 시 프랑스의 위기관리 및 조치 실패원인 (2015) 군사연구 제141집. P.22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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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Red by Robert Forczyk
번역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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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마지노선을 놀림거리로 삼아 퍼붓는 비난이 아닌, 온당한 비판은 대체로 필요 이상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침공 중에도 이들을 대부분 유지시키는 등 마지노선에 대해 보인 일종의 집착에 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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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즈번드 킴멜과 가믈랭은 결코 같은 선상에 놓을 수 없다. 함대사령관이라는 위치는 비록 중책이기는 하나 일개 국가의 총사령관으로 지냈던 가믈랭에 비하면 그렇지도 않다. 1931년 1월 20일 총사령관으로 임명되고 1940년 5월 19일 개전 초기의 패전의 책임을 물어 해임될 때까지의 9년간 가믈랭은 총사령관으로 지냈다. 딜 계획 자체는 그 대안에 비해 타당하다고 볼 수 있으나 브레다 변형(Breda variant)의 입안으로서 기껏 줄인 방어선을 다시 늘릴 뿐 아니라 전략 예비대를 전선에 배치하는 치명적인 결정으로 이어졌다. 르노 R35와 같은 방어력에 치중한 전차의 채택과 그것들의 분산 배치는 전차에 대한 그의 시각(보병 지원용 병기)을 방증한다. 무전기에 대한 도외시는 구데리안의 전차에 대한 시각과 크게 배치된다. 구데리안에게 있어서 전차는 연속적인 전투가 가능한 기동전 병기였고 따라서 개별 차량간의 소통은 그들의 집단 운용과 연계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였다. 가믈랭의 전략안은 1차대전기의 참호속을 벗어나지 못했고 이러한 수동적인 전략은 폴 레노를 포함한 일부 고위층을 분개시켰다. 그는 총리가 된지 채 한달도 안 된 시점인 1940년 4월 가믈랭의 경질을 꾀했으나 그의 명성과 인맥에 막혀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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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허즈번드 킴멜은 태평양 함대 사령관이었다. 1941년 2월에 임명되었고 1년도 채 되지 않은 같은 해 12월 7일, 선전포고도 없는 항공모함 발 함재기에 의한 공습이라는 미해군에게 있어선 전대미문이었던 기습공격을 당한다. 태평양 함대는 본디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에 위치한 해군기지를 거점으로 삼고 있었다. 그런데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개전 등 일본이 영토 확장의 야욕을 드러내자 FDR 대통령은 일본에 대한 억지력으로서 태평양 함대를 진주만에 전진배치 시킬 것을 고려한다. 이에 킴멜의 전임자였던 제임스 O. 리처드슨은 일본의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 보급상에 난점이 생긴다는 점, 하와이는 함대를 운용하는데에 적합하지 않다는 점을 들어 반대했으나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2차 회동 후인 1940년 10월 해임된다. 그의 주장은 타당했고, 길어진 보급선은 정보의 전달에 있어서 중대하게 작용했다. 미국은 일본의 외교 암호를 해독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 "매직(Magic)"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를 통해 일본의 외교 통신을 감청할 수 있었고, 일본이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려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1941년 후반에 이르자 일본이 태평양에서 전쟁을 벌일 것임이 명확해졌다. 이러한 논의는 주로 워싱턴 D.C에서 이루어졌는데, 구체적으로 태평양 어느 지점인지는 특정되지 않았다. 개전이 임박한 1941년 11월과 12월 초, 워싱턴 D.C로부터 일본이 태평양 지역의 미국 군사시설을 공격할 가능성이 있다는 경고가 하와이로 전달된다. 그러나 이는 그다지 명확하지 않았고, 여전히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인지 하와이인지 대략적으로도 그 위치가 특정되지 않았다. 여태까지의 논의로부터 본의아니게 배제당했던 하와이는 이들 정보를 적절히 처리하기 어려웠다. 외교적인 단절부터 군사적인 위협까지 이어지는, 위기가 고조되어 가는 일련의 과정을 온전히 목도해온 워싱턴 D.C와 하와이는 같은 정보라도 동일한 방식으로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정적으로 선전포고문 비스끄무리한 무언가는 도청을 통해 보다 빠르게 해독해내는 데에 성공했으나 외교적 단절 이상을 의미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았던 이 통보를 바탕으로 하여 하와이 및 여타 전방 지역에 경고를 내린 시점은 이미 공습이 한창인 도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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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9년간 총사령관 지위를 지내며 병기 개발, 병력 배치, 전략안 수립 등의 전쟁 준비 과정을 총괄해온 가믈랭과, 임명된지 채 1년도 안된, 본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섬에서 함대 사령관직을 지냈던 킴멜 제독은 그 책임의 정도도 차원도 비교할 것이 못된다. 이는 전투의 결과로서도 거듭 증명되는데, 야전군 하나를 홀라당 날려먹고는 전황이 크게 기울었던 프랑스 침공 초기 전투와는 달리 태평양 함대의 소멸은 필리핀 전역의 패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하고(태평양 함대가 증원군을 이끌고 도착할 때까지 요새화한 도서지역에서 버티는 계획이었는데 그 태평양 함대가 사라져버렸다) 태평양 전쟁 초기 미해군의 움직임을 크게 제한시키기는 했으나 전쟁 전 과정을 부감해 보면 결국 국지적인 손실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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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물며 1934년에 막 1호 전차가 등장하고 1938년 안슐루스에 2호 전차가 동원되는 등 최신병기였던 전차의 발전 속도는 아주 빨랐다. 이러한 신병기의 등장에도 이전의 판단을 근거로서 결정을 내리는 것 부터가 심대한 태만이자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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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실은 오토 카리우스가 '대기만성의 에이스'라고 불리는 것이 단적으로 입증해낸다. 물론 몽고메리같은 사례도 없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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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10만여명의 프랑스군도 탈출한 뒤 이후의 저항에 재투입 되기는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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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군은 총 7번, 독일군은 9번 승리하였고, 16일 야간 전투는 양측 모두 고지를 점령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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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해당 무기를 충분히 생산해내진 못했고, 따라서 그 활약도 크게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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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동성이 아닌 방어력에 치중하고, 그것들을 보병사단에 분산 배치한 시점에서 전차를 보병 지원용 병기로 치부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며 결정적으로 무전기를 도외시한 것이 '현대전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비판의 골자임은 잠시 잊자. 다만 이러한 비판 이전에 당시 프랑스의 내부적 문제를 다시금 상기시킬 필요가 있는데, 프랑스의 국방 예산은 31년도부터 프랑스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준 대공황의 여파로 크게 감축되었다. 그 가믈랭조차도 국방 예산 감소에 우려를 표하며 사표를 낼 정도였으며, 인민전선이 당선된 후 레옹 블룸이 크게 늘렸지만 프랑스의 국방 예산은 여전히 부족했다. 일례로 1938년 프랑스의 국방 예산은 10억 달러 규모였는데 적국인 나치 독일의 국방 예산은 120억 달러였다. 게다가 해군을 거의 도외시하다 시피한 독일과 다르게 프랑스는 식민지 유지와 지중해 패권을 위해 해군 양성에도 예산을 써야 했기에 육군 예산은 더욱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프랑스 기갑의 대표적인 문제점인 무전기 부재와 1인 포탑은 이러한 육군 예산 부족에서 기인한 부분도 있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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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보유한 전차 대수 대비 기갑사단에 포함된 전차의 수량은 독일의 그것에 비해 크게 뒤떨어졌다. 비교해보자면, 우선 독일이 2,400여대의 전차를 사단당 200대 이상의 전차를 보유한 10개의 사단으로서 집중적으로 운용했다. 그에 반해 프랑스는 3천여대의 전차를 보유한 한편 3개의 기갑사단(Division Cuirassée de Réserve, 이하 DCR)과 3개의 경기갑사단(Divisions Légères Mécaniques, 이하 DLM)를 개전 시점에 보유하고 있었다. DCR당 할당된 전차수는 대충 Char B 68대와 H39 90대(1re, 2e 기준이며 3e는 H39가 조금 더 적었다)였고, DLM당 할당된 전차는 2e DLM 기준 S35 48대와 H35 42대로 도합 750대에 조금 못 미치는 숫자가 기갑사단의 형태로 굴려졌다. 이는 곧 7할 이상의 전차가 보병 지원용으로 전선 전반에 걸쳐 분산 배치되었음을 의미하며, 동시에 전차의 운용 사상에 있어서 독일과 결정적으로 차이가 났음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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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Red by Robert Forczyk
번역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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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 방어선은 클라우제비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단단하지만 깨지기 쉬운 소재로 된 도구"와 같은 성질을 지니는데, 이는 산악 방어 대비 방어를 위한 요소들을 활용하기에 용이한 한편, 한 곳이 뚫릴 시 방어선 전체가 붕괴하며 종심상의 잔류 저항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높은 경도를 지니는 만큼 강도를 충분히 높여줄 필요가 있었는데, 이 곳에 배치될 계획이었던 병력의 규모는 절대 부족한 수준이 아니었다. 물론 이러한 이점은 가믈랭이 브레다 변형을 기하면서 상당부분 상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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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기 성능상의 열세 때문만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전투기 기종이 Bf 109에 뒤쳐졌음은 사실이나 D.520 같이 일단은 상대하는 것이 가능한 기종도 분명 있었다. 문제는 이것이 상당히 신형기였기에 기종 전환에 시간이 들었고, 1940년 6월 25일까지 351대라는 나름 괜찮은 수량을 뽑아내긴 했으나 개전 시점에서는 30여대 만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는 공군에 대한 도외시라고도 보일 정도였고 그러한 태도의 결과는 참담했다. 신기종을 개발할 능력이 있음에도 구식 기종의 양산을 계속했고 이것이 조종사가 신형기에 적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독일 공군의 폭격과 공수부대의 공작으로 개전과 동시에 전선에 인접한 비행장 수 곳이 무력화 되는 등 자체적인 대응 태세에도 문제가 있었다. 말하자면 프랑스 공군은 뿌리부터가 앙상해진 상태였고,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프랑스 공군은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를 몇백, 몇천 대를 지원해주더라도 제대로 굴려먹을 파일럿도, 운용교리도, 정비 역량도 없었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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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영국 본토 항공전의 성과가 단지 기체의 성능이 아닌, 체인홈이라는 조기경보 및 지상 관제의 통합 체계에 의한 요격에 기반했음을 상기할 필요도 있다. 방자로서 누린 우위는 확고했고, 해당 우위를 쥐어 짜내는 수준의 전략으로 싸웠기에 얻어낼 수 있었던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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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처칠이 전시 내각을 잡은 후에는 보다 적극적인 지원에 나서려 했는데, 스핏파이어와 허리케인을 해협 너머로 보내려는 처칠과 그것을 뜯어 말리는 휴 다우딩의 일화는 나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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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용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의 다큐멘터리
제2 차 세계대전, 2부 프랑스의 참패에서 나온 내용을 그대로 옮겨적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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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윗 문단에서 "군복무 해보면 알 것"이라 아들에게 일갈한 르네 타르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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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에 대해 딱히 증오심이나 차별의식이 없고 굳이 찝찝한 기억을 만들고 싶지 않던 병사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이런 흑인 포로들을 잘 대할 때도 있었으나 유럽 전체와 나치 독일에 만연한 인종주의, 특히 루르 지역을 자신들이 열등하다 말할 가치조차 없게 여긴 흑인으로 구성된 외인부대에게 점령된 것을 굉장한 치욕 중의 하나로 여겼기 때문에 상부에서는 이들을 좀 더 거칠게 다룰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프랑스 장교는 그들을 다른 병사들과 동일하게 대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저것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라는 정중한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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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프랑스도 파리 탈환을 앞두고 흑인부대는 빼고 백인부대만 파리 행진을 시키며 식민지군의 충성심을 날려버렸다. 다만 이 문제는 미국이 파리 행진에서 유색 인종을 빼달라는 요청을 프랑스 측에 전달하면서 시작됐다. 이에 프랑스는 흑인 부대를 빼고 북아프리카인 부대를 배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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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하면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지 총독부를 위협해서 주둔권 등의 권리를 얻은 것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점령과 마찬가지였다. 이후 비시 프랑스가 항복하고 나치 독일도 멸망 직전에 이르자 일본은 1945년 3월 총독부를 아예 해체시키고 괴뢰국들을 세워 잠시마나 인도차이나를 지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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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 자체가 1940년을 기점으로 일본의 위협에 처하게 됐다. 인도네시아와 인도차이나를 식민지로 삼았던 네덜란드와 프랑스의 본토가 독일에게 점령당했고 영국은 본토가 점령당하지 않았지만 그동안의 삽질로 인한 손실과 본토방어에 바빠 동남아시아를 지원할 여력이 없었다. 미국이 유일하게 건재했는데 일본이 워낙 기습적으로 공격해서 필리핀을 방어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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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당시 세계 대공황과 뉴딜 정책 등으로 인해서 국내 분위기도 혼란스러웠던 시기였을 뿐 아니라 유럽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 비유럽권 국가인 본국이 나설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굳이 프랑스 침공에 개입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