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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리터 폰 레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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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666> 초대 독일 북부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FM Wilhelm Ritter von Leeb
파일:Bundesarchiv_Bild_183-L08126,_Wilhelm_Ritter_von_Leeb.jpg
이름 Wilhelm Josef Franz Ritter von Leeb
빌헬름 요제프 프란츠 리터 폰 레프[1]
출생 1876년 9월 5일
바이에른 왕국 란츠베르크 암 레히
사망 1956년 4월 29일 (향년 79세)
독일연방공화국 바이에른 퓌센
복무 독일 제국군 (1895년~1918년)
독일 국가방위군 (1918년 ~ 1933년)
독일 국방군 (1933년 ~ 1942년)
최종 계급 원수 (Generalfeldmarschall)
주요 참전 의화단 운동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
바르바로사 작전
레닌그라드 전투
주요 서훈 기사십자 철십자훈장
기사십자 막스 요제프 군사훈장

1. 개요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2.2. 제1차 세계 대전2.3. 전간기2.4. 제2차 세계 대전2.5. 전쟁 범죄와의 연관2.6. 전후
3. 대중매체

[clearfix]

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의 독일 육군 원수.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독일 국방군에서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에 이어 독일군 최고참 지휘관이였으며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독일 북부집단군 사령관이었다.

2. 생애

2.1. 제1차 세계 대전 이전

1895년 육군 사관후보생으로 바이에른 제4 야전 포병 연대에 입대하여 소위로 임관하고 포병학교에 입학했다. 중국 의화단 운동 때 독일 동방원정군 총사령관인 육군 원수 알프레트 폰 발더제 백작의 휘하에서 복무하였고 1903년에서 1907년 사이에 뮌헨의 전쟁 대학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다. 1905년 중위로 진급했다.

1907년부터 1909년까지 참모 장교로서 바이에른 참모본부에서 근무했다. 그 후에 1911년까지 베를린에 있는 프로이센 육군참모본부에 근무했다. 1912년부터 1914년 사이에 대위로 진급해서 바이에른 제10야전포병연대의 포대장으로 있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뮌헨의 바이에른 제1 군단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2.2.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후 바이에른 제11 보병사단에서 참모로서 여러 전선에서 종군했는데,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 장군 지휘 하에서 골릿츠 타르노프를 돌파하고 플루제미슬 요새공략전, 발칸반도에서의 도나우 강 도하 작전 등에서 공적을 거두어 1916년에 막스 요제프 군사 훈장을 수상해 기사 작위를 하사받았다.[2] 소령으로 승진한 후 1917년 3월부터 종전까지 서부전선에서 루프레히트 폰 바이에른 왕세자의 참모로 근무하면서 병참부장을 맡았다.

2.3. 전간기

전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육군에 남아 국방부 병무국 참사, 제 2, 7 군관구 참모를 역임하면서 1929년에 소장으로 승진한 레프는 1930년부터 제7군관구 사령관 및 제7보병 사단장을 지냈다. 1933년에 히틀러 정권의 수립 후 나치스와 거리를 두면서도 거듭 승진하여 10월에 제2 집단군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다음 해에 포병 대장이 되었다. 이 때, 방어전(Die Abwehr)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방어전술의 일인자로 여겨지게 되었다.

1938년에 블롬베르크-프뤼치 사건이 일어나자 새로운 육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발터 폰 브라우히치는 히틀러의 지시로 레프를 상급대장으로 승진시킴과 동시에 전역시켰다. 그러나 7월에 주데텐 위기로 인해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제12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데텐 진주군으로 일했다. 하지만 주데텐 점령 직후 다시 예비역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긴장이 높아지던 1939년 여름에 레프는 다시 현역으로 복귀해 프랑스 국경지대에 배치된 C 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때 레프는 룬트슈테트 원수에 이어 독일군의 최고참 군인이었다.

2.4. 제2차 세계 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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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도 룬트슈테트처럼 자신만의 칼라장을 부착한[3]군복을 입기 즐겼다.
2차 세계대전 초기의 폴란드 침공 당시 레프의 C집단군은 서부전선의 연합군에 대해 숫적으론 열세였지만 연합군은 공격해오지 않았다. 1940년 5월에 시작된 황색 작전에서 레프의 C집단군은 개전 후 처음으로 공세에 나서 마지노 선을 돌파했다. 프랑스가 항복한 후 7월 19일에는 많은 장군들과 함께 원수 반열에 오른 레프는 이 해 가을 독소전쟁의 준비를 위해 프랑스에서 드레스덴으로 전환배치되어 1941년 초에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6월 22일에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자 레프의 북부집단군은 발트 해 연안의 해안도시들을 공략하면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했다. 그러나 겨울이 되자 북부집단군 지휘하의 장갑군이 모스크바 공략을 위해 중앙군 집단으로 차출되면서 레닌그라드의 대대적인 공략은 불가능해졌다. 결국 북부집단군은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도시에 억류된 소련군과 민간인이 아사하도록 내버려두는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 작전을 처음 수행했던 당사자인 레프는 도중에 히틀러의 전횡과 나치에 의한 야만적인 학살에 회의감을 느껴 직접 히틀러에게 자신을 북부집단군 사령관에서 해임시켜달라는 건의서를 제출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1942년 1월 16일 사령관에서 해임되어 총통예비령에 의해 이후 다시는 군무를 보지 못했다.

2.5. 전쟁 범죄와의 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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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각에서는 레프가 부하들의 학살을 막았으며 이 때문에 전후 그의 부하들은 단 한 명도 기소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는 옛 프로이센 군사 전통의 계승자인 국방군이 비무장 민간인을 대상으로 직접적인 학살을 저지르는 것에 대해서는 큰 불명예이자 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생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친위대와 국방군 보안사단들이 적극적으로 빨치산 토벌을 빙자한 학살을 벌이는 것을 막지는 않았다.

가령 레프의 휘하에 있던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의 경우 '유대-볼셰비즘과 모스크바의 아시아 놈들'을 뿌리부터 분쇄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북부집단군 소속으로 제4전차군을 이끌 당시에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 친위대 및 질서경찰 소장의 아인자츠그루펜 A와 가장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고, 그의 협력에 힘입어 아인자츠그루펜 A는 발트 3국 지역 유대인들을 거의 전부 살해했다. 레프는 이 사실을 알았음에도 방임했다. 때문에 회프너의 경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살아남았다면 전범 재판에서 목이 달아났을 확률이 매우 높았다. 전쟁 도중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다가 처형된 바람에 전범재판장에서 죗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에 따르면, 레프는 북부집단군 후방 지역(Rückwärtiges Heeresgebiet Nord)의 사령관으로서 후방 안정화와 인종 정화를 명목으로 수많은 민간인 학살을 수행했던 프란츠 폰 로케(Franz von Roques)[4] 국방군 보병대장이 카우나스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 소식을 알려 왔을 때, 부관에게 이에 대해 자신이 손쓸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답했다. 여기서 말하는 후방사령부란, 독일 각 집단군들의 예하부대로서 각각 9개의 보안사단들 및 비밀야전경찰부대들을 가지고 선전 및 빨치산 토벌 등의 임무를 수행한 부대를 말한다. 이들은 빨치산 토벌을 명목으로 직접적인 섬멸전을 수행했으며, 친위대 경찰부대, 심지어는 악명 높은 친위대 특무대와도 협조하곤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초토화 작전과 학살, 그리고 '부수적인 피해'가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이들 사령부들은 소속된 집단군 외에도 별도로 OKH( 육군최고사령부)의 국방군 병참감인 포병대장 에두아르트 바그너에게 보고할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바그너는 나중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으로 처형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충실한 나치로, 병참 외에도 전선 후방의 안정화를 담당했던 인물이다. 그는 1941년 5월 친위대 대장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공모해 국방군과 친위대 특무대가 협조하도록 별도의 규칙까지 제정하면서 학살을 적극적으로 수행했다.

북부집단군 후방지역 사령부 관할 지역에는 사령부 직속 보안사단들인 207, 281, 285사단, 국방군 비밀야전경찰 및 이들과 협력하는 상급 친위대 및 경찰지도자 한스-아돌프 프뤼츠만 친위중장의 친위특무대와 질서경찰 북부경찰연대 등의 부대들이 활동하며 유대인 학살과 빨치산 섬멸전을 수행했다. 1941년 9월에는 레프의 65세의 생일을 맞이하여 히틀러가 25만 라이히스마르크를 하사했는데, 이를 전달하러 찾아온 루돌프 슈문트 보병대장은 레프와 그의 참모진들에게 특무대 A 그룹의 절멸 전쟁은 당연한 것이며, 군대는 정치의 문제에 관심 갖지 말 것을 주문했다. 이 이후 친위특무대 A 그룹은 24만 9420명에 달하는 유대인을 학살했다고 상부에 보고했으며, 이 과정에서 북부집단군이 친위특무대의 활동에 '교과서적일 정도로' 협조적이었다고 평했다. 레프 또한 학살의 공모자였던 것이다.

하이드리히까지 개입된 이러한 별도의 지휘체계 때문에 레프가 '손쓸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한 듯하지만, 어찌되었건 후방사령부들은 기본적으로는 속한 집단군사령부의 지휘를 받았기에, 레프는 북부집단군의 총사령관이자 국방군 원수로서 현장에서 벌어지는 범죄 행동들을 막을 수 있는 충분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이를 방조한 셈이다. 거기다 프뤼츠만 친위중장이 자신의 부대에 무선통신을 통해 보고하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려 영국군에서 통신 감청에 실패했고, 이로 인해 발트 지역 학살의 자세한 내막을 알기 힘들게 된 것도 학살의 책임 소재를 불분명하게 하는 데 일조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1941년 남부와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에서 벌어진 학살 다수는 영국 정보부 블레츨리 파크의 감청에 걸려 진상이 밝혀졌다.

또한 레프는 불명예스러운 직접적인 학살에는 거리를 두되 그 대안으로써 굶겨 죽이는 방법을 시행할 것을 피력했다. 그가 지휘했던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의 소련 국민들의 지옥 같은 생활상도 다 그의 그러한 끔찍한 발상에서 나온 산물인 것이다.

1944년 7월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직후에는 다른 많은 원수들처럼 보신을 위해 히틀러에게 충성서약을 하기도 했다.[clearfix]

2.6. 전후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WhilhelmRittervonLeeb.jpg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1945년 5월 미군의 포로가 되었고, 1948년에 열린 뉘른베르크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포로가 된 지 3년이 넘어 수감기간을 이미 채웠기에 곧바로 석방되었다. 알베르트 괴링의 유태인과 소련군 포로 석방을 묵인했다는 공로로 바로 석방되었다.[5] 그러나 그가 북부집단군 사령관으로서 학살을 방임하고 아사 계획을 입안한 결과가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낳았는지를 감안하면, 그에 대한 무죄 판결은 아주 심각한 솜방망이 처벌이었다.

1956년 휘센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막스 요제프 훈장[6]의 수여자 단체의 대표로 일했다. 등산이 취미였기에 전문 산악안내인의 강습도 받았었다.

레프가 사망한 지 1년 후 고향이던 란츠베르크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병영이 설치되어 독일 연방군의 육군 제8산악포병연대 및 주독 미 육군이 사용하기도 했다. 동서 독일의 통일 후 독일군의 개편으로 1992년에 이 연대가 해체되면서 레프 병영도 철거되어 란츠베르크 시로 부지가 이관되었다. 병영 터는 공업용지로 사용되었는데 현재는 주택단지가 되어 있다.[clearfix]

3. 대중매체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리터 폰레프'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 및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 [2] 이 이전에는 그냥 빌헬름 레프였다. '리터 폰 (Ritter von Leeb)'은 기사 칭호로 영어로 번역하면 'Knight of'와 동일한 의미이다. 나치 독일 최후의 공군사령관인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도 이런 사례에 속한다. [3] 룬트슈테트는 보병 쪽 칼라장(백색)을 달았고 레프는 참모장교/포병쪽 칼라장(적색)을 달았다. [4] 참고로 이 양반의 사촌인 카를 폰 로케 대장은 남부집단군 후방지역사령부 사령관이다. 그도 북쪽에 있던 자기 사촌처럼 우크라이나에서 온갖 전쟁범죄를 진두지휘했다. 다만 그는 천수를 누린 프란츠와는 달리 학살 죄목으로 수감중 1949년 사망했다. [5] 레프에 대한 판결은 잘못된 증거서류에 의한 것이었지만 오늘날까지 고쳐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출처가 명확하지 않다. [6] 젝트 토마 같은 명장이 수여받은 프로이센의 무공훈장 중 하나다. [7] 특히 포병 능력치가 좋은 편이다.